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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르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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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세르비아는 18세기부터 시작된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세르비아인들의 통합을 목표로 한 정치적 구상이다. 1844년 일리야 가라샤닌의 나체르타니예에서 공식화되었으며, 20세기 초 세르비아 왕국의 모든 정당(사회민주당 제외)이 이를 지지했다. 발칸 전쟁 이후 세르비아는 영토를 확장했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통합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수립되면서 대세르비아의 목표가 부분적으로 달성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중 체트니크는 대세르비아를 추구했으나 실패했고,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세르비아 과학예술 아카데미의 각서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권력 장악,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대세르비아는 비판받았으며, 현대에는 ICTY의 기소와 세르비아 정치인들의 입장 변화가 있었다. 2020년 이후에는 "세르비아 세계"라는 용어가 사용되며, 2024년에는 전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인 대표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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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르비아
개념
명칭대세르비아 (大Serbia)
로마자 표기Daesereubia
주요 내용모든 세르비아인이 하나의 국가에서 통일되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이념
관련 용어범슬라브주의
유고슬라비아
역사적 배경
기원19세기, 일리야 가라샤닌의 '나체르타니예'에서 비롯
발전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유고슬라비아 전쟁 등을 거치며 구체화 및 확장
주요 주장모든 세르비아인이 거주하는 지역 (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을 세르비아 영토로 통합해야 함
지리적 범위
핵심 지역세르비아 본토
포함 주장 지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체
크로아티아 일부 (세르비아 크라이나 지역)
몬테네그로 전체
북마케도니아 전체
코소보 전체
이념적 기반
민족주의세르비아 민족의 우월성 및 통일 강조
종교세르비아 정교회를 통한 민족적 정체성 강화
역사적 정당화과거 세르비아 제국의 영광을 내세워 영토 확장 주장
논란 및 비판
주변국 반발영토 침략 및 민족 갈등 조장 우려
전쟁 범죄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인종 청소 등 전쟁 범죄의 배경으로 지목
현대적 의미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념으로 비판받으며, 지역 안정에 위협 요인으로 간주됨

2. 역사적 배경

18세기부터 유럽에서 이탈리아 통일과 같은 민족주의적 경향이 확산되면서, 세르비아는 1817년 오스만 제국 내에서 세르비아 공국을 획득한 후 주변 지역, 특히 인근 국가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과의 완전한 통합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1]

1844년, 보수적인 정치가이자 비스마르크적인 야망을 가진 일리야 가라샤닌은 세르비아 공국의 비밀 정치 초안인 나체르타니예를 통해 세르비아의 영토 확장에 대한 구상을 공식화했다.[2] 이 초안에 따르면 새로운 세르비아 국가는 몬테네그로, 북부 알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인근 지역을 포함할 수 있었다.[3] 20세기 초 세르비아 왕국의 모든 정당(사회민주당 제외)은 일반적으로 모든 세르비아인을 하나의 세르비아 국가로 통합하고 이를 발칸 연방의 일부로 만들려는 구상을 받아들였다.

발칸 전쟁 이후 세르비아 왕국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지만,[4] 아드리아 해로 나아갈 땅을 얻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신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왕국의 일부가 될 예정이었던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지역을 얻었고, 세르비아 군은 새로 만들어진 알바니아 공국의 일부가 될 해안 지역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합병과 더불어, 왕국 밖에 많은 수의 세르비아인이 남게 되었기 때문에 세르비아의 열망을 좌절시켰다.[5]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세르비아가 승리한 후,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몬테네그로의 남슬라브 지역을 통합하여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장군이 이끄는 왕당파 유고슬라비아 조국군은 전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그 지식인 중 한 명은 보스니아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스테반 몰례비치였는데, 그는 1941년 "동질적 세르비아"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상당 부분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인이 상당한 소수 민족을 구성하지 않는 지역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및 헝가리 지역을 포함하는 더욱 큰 대세르비아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1. 오브라도비치의 범세르비아주의 (18세기 말 ~ 19세기 초)

도시테이 오브라도비치는 근대적 의미의 범세르비아주의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슬라보세르비아인"을 언급하며, 이들을 "교회와 종교에 관계없이 그의 세르비아 형제들"로 여겼다.[1] 여기서 슬라보세르비아인은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시르미움, 바나트, 바치카의 주민들을 가리킨다.

요반 라이치와 사바 테켈리야 같은 다른 지지자들도 범세르비아주의를 지지하며, 앞서 언급된 여러 지역을 "세르비아 영토"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통합하는 내용의 저술을 발표했다.[1]

이들은 합리주의가 슬라브족을 정교회 기독교인, 가톨릭교인, 무슬림으로 분리하는 종교의 장벽을 극복하고, 여러 민족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할 것이라고 믿었다.

페타르 2세 페트로비치네고시는 강제적인 통합과 동질화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1]

2. 2. 가라샤닌의 나체르타니예 (19세기 중반)

일리야 가라샤닌은 1844년에 '나체르타니예'(Начертаније)라는 문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서 대세르비아 이데올로기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2] 이 문서는 세르비아 공국의 비밀 정치 초안으로, 비스마르크적인 야망을 가진 보수 정치인 가라샤닌이 작성했다.[2]

'나체르타니예'는 폴란드 왕자 아담 카지미에시 차르토리스키가 작성하고 세르비아 주재 폴란드 대사 프란티셰크 자흐가 개정한 "세르비아가 따라야 할 행동에 대한 조언"의 영향을 받았다.[3] 가라샤닌은 이 문서에서 세르비아의 영토 확장을 주장하며, 몬테네그로, 북부 알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하는 새로운 세르비아 국가를 구상했다.[3]

이 문서는 불가리아인,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 몬테네그로인, 보스니아인, 헝가리인,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는 땅을 대세르비아의 일부로 주장했다.[7] 가라샤닌은 "가톨릭 신앙의 세르비아인"과 "이슬람 신앙의 세르비아인"으로 간주한 크로아티아인과 슬라브계 무슬림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제안했으며, 발칸 국가들 간의 협력 필요성을 강조했다.[7]

'나체르타니예'는 1906년까지 비밀로 유지되었으며, 세르비아의 국가 통일을 위한 청사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7] 주변 국가에 세르비아 및 친세르비아 국가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세르비아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다.[7]

그러나 '나체르타니예'는 상반된 해석이 존재하는 논쟁적인 문서이다.[7] 일부 학자들은 가라샤닌이 포용적인 유고슬라브주의자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그가 대세르비아를 추구하는 배타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2. 3. 부크 카라지치의 범세르비아주의 (19세기)

부크 카라지치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의 슈토카비아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남슬라브인을 세르비아인으로 간주했다.[8] 이러한 관점 때문에 그는 일부 학자들에게 대세르비아 계획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19세기에 부크가 세르비아인으로 간주했던 슈토카비아 방언


부크 카라지치는 현대 세속적인 세르비아 민족 의식의 형성자로, 모든 토착 슈토카비아어 사용자(동방 정교회, 가톨릭, 무슬림)를 하나의 세르비아 민족으로 통합하려는 목표를 가졌다. 독일 역사가 마이클 바이트만(Michael Weithmann)은 카라지치가 모든 남슬라브인이 세르비아인이라는 위험한 이념적, 정치적 사상을 과학적인 형태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체코 역사가 얀 리흘리크(Jan Rychlik)는 카라지치가 대세르비아 이데올로기의 선구자 역할을 했으며 슈토카비아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유고슬라브인이 세르비아인이라는 이론을 제기했다고 여긴다.

2. 4. 발칸 전쟁 (20세기 초)

발칸 전쟁 이후 세르비아 왕국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지만,[4] 아드리아 해로 나아갈 땅을 얻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신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왕국의 일부가 될 예정이었던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지역을 얻었고, 세르비아 군은 새로 만들어진 알바니아 공국의 일부가 될 해안 지역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합병과 더불어, 왕국 밖에 많은 수의 세르비아인이 남게 되었기 때문에 세르비아의 열망을 좌절시켰다.[5]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세르비아는 여러 차례 역사적인 세르비아 영토 회복을 시도했으며, 특히 발칸 전쟁에서 남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세르비아는 14세기에 스테판 두샨이 획득한 마케도니아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주장하였다.[9]

세르비아는 발칸 전쟁을 통해 영토를 거의 두 배로 늘렸지만, 대부분 알바니아인, 불가리아인, 튀르크인 등 비세르비아인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9] 세르비아가 발칸 전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목표는 바다로의 접근이었다. 따라서 세르비아 왕국은 알바니아 내륙 대부분과 알바니아의 아드리아 해안을 점령하였다. 발칸 전쟁 당시 알바니아인 학살은 세르비아 육군과 몬테네그로 육군에 의해 자행되었다.[9] 발칸 전쟁 국제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세르비아는 합병된 영토를 "종속물, 일종의 정복된 식민지로서, 정복자들이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는 곳"으로 간주하였다.[9] 새로 획득한 영토는 계엄령 하에 놓였으며, 세르비아의 헌법 체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9] 반대파 언론은 합병된 영토 주민에 대한 법치주의와 이 지역에 대한 세르비아 왕국 헌법의 확대를 요구하였다.[9]

세르비아 왕립 육군은 1912년 11월 29일 아무런 저항 없이 두라조 (두러스|Durrëssq)를 점령하였다.[11] 두라조의 동방 정교회 대주교 야곱은 새로운 당국에 특히 따뜻한 환영을 표하였다.[12] 야곱이 세르비아 당국에 중재한 덕분에 여러 알바니아 게릴라 부대가 구출되어 처형을 피할 수 있었다.[13]

그러나 세르비아 왕국의 군대는 열강의 해군 함대의 압력으로 1913년 4월 두라조에서 철수하였지만, 이후 두 달 동안 알바니아의 다른 지역에 남아 있었다.[14]

2. 5. 흑수단 (20세기 초)

흑수단은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 아피스가 이끈 비밀 군사 조직으로, 대세르비아 국가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고 호전적인 입장을 취했다.[15] 이 조직은 발칸 전쟁 이후 수많은 잔혹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15]

2. 6. 제1차 세계 대전과 유고슬라비아 건국 (20세기 초)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세르비아가 승리한 후,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몬테네그로의 남슬라브 지역을 통합하여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건설하였다.[16] 이는 대세르비아를 추구하던 사람들의 극단적 민족주의적 열망이 달성된 것이었다.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 시대에, 왕국 정부는 마케도니아인에 대해 언어적 세르비아화 정책을 추진하였다.[17] 당시 이 지역은 비공식적으로 "남부 세르비아" 또는 공식적으로 "바르다르 바노비나"로 불렸으며, 이 지역에서 사용되는 방언은 세르보크로아티아어의 방언으로 간주되었다.[18] 이러한 남부 방언들은 교육, 군사 및 기타 국가 활동과 관련하여 억압되었고, 그 사용은 처벌 대상이었다.[19]

2. 7. 제2차 세계 대전과 몰례비치의 동질적 세르비아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장군이 이끄는 왕당파 유고슬라비아 조국군은 전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그 지식인 중 한 명은 보스니아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스테반 몰례비치였는데, 그는 1941년 "동질적 세르비아"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상당 부분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인이 상당한 소수 민족을 구성하지 않는 지역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및 헝가리 지역을 포함하는 더욱 큰 대세르비아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21] 체트니크는 군사 통제하에 있던 지역에서 인종 청소를 자행했는데, 이는 집단 학살 캠페인이었다.[22],[23],[24] 이는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몰례비치의 구상은 1944년 1월 세르비아 중부 바 마을에서 열린 체트니크 회의에서 논의되었지만, 요시프 브로즈 티토파르티잔에 의해 체트니크가 패배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몰례비치의 핵심적인 생각, 즉 세르비아는 기존의 국경과 관계없이 세르비아인 정착 패턴에 의해 정의된다는 주장은 대세르비아 이상의 근본적인 주제로 남아 있었다.

3.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대세르비아주의

18세기부터 유럽에서 이탈리아 통일과 같은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세르비아는 1817년 오스만 제국 내에서 세르비아 공국을 획득한 후 주변 지역, 특히 인근 국가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과의 완전한 통합을 열망했다.[1] 1844년 일리야 가라샤닌은 나체르타니예에서 세르비아 공국의 영토 확장 구상을 공식화했는데, 이 초안에 따르면 새로운 세르비아 국가는 몬테네그로, 북부 알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할 수 있었다.[2][3] 20세기 초 세르비아 왕국의 모든 정당은 모든 세르비아인을 하나의 세르비아 국가로 통합하려는 구상을 받아들였다.

발칸 전쟁 이후 세르비아 왕국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지만,[4] 아드리아 해에 접근할 수 있는 땅을 얻지 못했고,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지역을 받았다. 또한 세르비아 군대는 알바니아 공국의 일부가 될 해안 지역을 떠나야 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합병과 함께 세르비아의 열망을 좌절시켰다.[5]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세르비아의 승리 이후, 대세르비아 신봉자들과 다른 남슬라브 국가들을 새로운 국가에 포함시키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카라조르제비치 세르비아 왕족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을 통치했다. 전간기 동안 대부분의 세르비아 정치인들은 중앙집권 국가를 옹호했지만, 반대파들은 지역 자치권을 요구했다.

1941년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체트니크는 대세르비아 형성을 위해 추축국과 협력했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지지하며 게릴라전을 벌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이념에 따라 분열되어 내전을 벌였다.

전후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국가 원수가 되었고, 국가는 6개의 공화국으로 나뉘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내에 코소보 자치주와 보이보디나 자치주가 설립되었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대세르비아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반역죄로 기소되거나 추방되었다.

대세르비아 주장은 발칸반도 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세르비아 영토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세르비아인의 고향,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지배 지역, 세르비아인이 이주해 온 지역 등이 포함된다.

대세르비아 건설을 위한 방법으로는 세르비아 국외 남슬라브 지역에 선전을 퍼뜨리는 것이 있었다. "대세르비아"라는 명칭은 1918년 유고슬라비아 건국 무렵에도 사용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표면적으로는 다민족 국가였지만, 세르비아인 정치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유고슬라비아 운동에 반대한 사람들은 이것이 세르비아인이 다수인 국가를 강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세르비아 개념은 19세기 세르비아 장관 일리야 가라샤닌의 저서 나체르타니예가 기원으로 여겨진다. 그 목적은 당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의해 분단되었던 세르비아인의 땅을 통합하는 데 있었다. 가라샤닌의 계획은 선전을 통해 이들 국가에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제안했다.

가라샤닌의 나체르타니예는 이후 세르비아를 확장하는 지정학적 지침, 군사 전략으로 변모했다. 가상적인 세르비아 국경에는 비로비티차-칼로바츠-칼로바그 선 내부의 크로아티아 대부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전역, 알바니아 북부가 포함되었다.

3. 1. 세르비아 과학예술 아카데미의 각서 (1986년)

세르비아 과학예술 아카데미의 각서(1986년)는 1980년대 후반 팬세르비아 운동을 촉발시킨 가장 중요한 문서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권력 장악과 그 후의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이어졌다.[26] 각서의 저자들은 도브리차 초시치, 파블레 이비치, 안토니예 이사코비치, 두샨 카나지르, 미하일로 마르코비치, 밀로시 마추라, 데얀 메다코비치, 미로슬라브 판티치, 니콜라 판티치, 류비샤 라키치, 라도반 사마르지치, 미오미르 부코브라토비치, 바실리예 크레스티치, 이반 막시모비치, 코스타 미하일로비치, 스토얀 첼리치, 니콜라 초벨리치 등 세르비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을 포함했다. 철학자 크리스토퍼 베넷은 이 각서를 "정교하지만 조악한 음모론"으로 규정했다.[26] 각서는 세르비아와 세르비아인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을 주장하며, 코소보와 메토히야의 세르비아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절정에 달했다. 베넷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 대부분이 명백히 터무니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각서는 당시 발표된 여러 유사한 논쟁 중 하나에 불과했다.[26]

각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문서가 대세르비아 노선을 따라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촉구하기는커녕 유고슬라비아를 지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그들의 지지는 각서가 주장한 유고슬라비아 헌법에 내재된 세르비아에 대한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조건으로 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코소보보이보디나의 자치권 폐지였다. 노먼 시가르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각서의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은 오직 무력으로만 가능했을 것이다.[27]

3. 2. 밀로셰비치의 집권과 대세르비아주의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세르비아 과학예술 아카데미의 각서(1986년)는 1980년대 후반의 범세르비아 운동을 촉발시킨 가장 중요한 문서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권력 장악과 그 후의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각서는 세르비아와 세르비아인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을 주장하며, 코소보와 메토히야의 세르비아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26]

각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문서가 대세르비아 노선을 따라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촉구하기는커녕 유고슬라비아를 지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그들의 지지는 각서가 주장한 유고슬라비아 헌법에 내재된 세르비아에 대한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조건으로 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코소보보이보디나의 자치권 폐지였다. 이러한 변화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각서의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은 오직 무력으로만 가능했을 것이다.[27]

밀로셰비치의 집권과 함께 각서의 내용은 세르비아에서 주류가 되었다. 밀로셰비치는 언론의 엄격한 통제를 이용하여 세르비아인이 피해자라는 선전 캠페인을 조직하고, 세르비아에 대한 추정되는 편향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를 재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밀로셰비치의 반관료혁명이 일어났는데, 보이보디나와 코소보의 지방 정부와 몬테네그로 공화국 정부가 전복되면서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집단 대통령직에서 8표 중 4표를 차지하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88년 8월, 반관료혁명 지지자들은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다!"라는 대세르비아를 주제로 한 구호를 외쳤다고 전해진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더욱 중앙집권적인 정부 시스템에 대한 밀로셰비치의 요구를 비난했고, 유고슬라비아를 완전한 다당제 연방 국가로 만들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밀로셰비치는 연방 시스템에 반대한다고 주장했지만, 연방 시스템이 만들어진다면 세르비아의 외부 국경은 "열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며, 유고슬라비아가 분권화될 경우 그의 정부가 대세르비아 건설을 추구할 것임을 암시했다. 밀로셰비치는 "이것들은 국경의 문제, 본질적인 국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국경은 항상 강자에 의해 결정되고 약자에 의해 결정되는 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28]

이 시점에서 세르비아의 여러 야당은 공개적으로 대세르비아를 요구하며, 당시 존재하던 공화국의 경계를 티토의 파르티잔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거부했다. 밀로셰비치는 대세르비아를 요구하는 단체들을 지지하며 "하나의 국가 안에 모든 세르비아인"을 요구했다. 세르비아 사회당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세르비아인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르비아 사회당 대표이기도 한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모든 세르비아인이 세르비아에 포함될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했다.[29]

3. 3. 비로비티차-카를로바츠-카를로바그 선

'''비로비티차-카를로바츠-카를로바그 선'''(Вировитица–Карловац–Карлобаг линија|비로비티차-카를로바츠-카를로바그 리니야sr)은 대세르비아를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가상의 경계선이다.[31] 이 선의 동쪽, 즉 카를로바그–오굴린–카를로바츠비로비티차를 잇는 지역은 세르비아 영토로, 서쪽 지역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의 나머지 영토로 규정한다. 이러한 경계선은 당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영토의 대부분을 세르비아인에게 할당하게 된다.

이 선은 세르비아의 정치인 보이슬라브 셰셸이 자주 언급했다.[32][33] 그는 자신의 연설과 저서에서 이 지역 주민 모두가 정교회, 가톨릭 또는 이슬람교도인 세르비아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셰셸의 세르비아 급진당을 제외하고는 최근 세르비아 정치 생활에서 이 선이 공식적으로 지지된 적은 없다.

대세르비아는 영토 확장뿐 아니라 경제적 이유에서도 지지받았다. 세르비아가 해안선, 중공업 시설, 농업용 경작지, 천연자원, 그리고 대부분 파노니아 평원, 특히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매장된 원유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연관된 여러 세르비아 정치인, 예를 들어 미할리 케르테스, 밀란 바비치, 밀란 마르티치, 보이슬라브 셰셸, 스테반 미르코비치 등이 이러한 견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34]

3. 4. 유고슬라비아 전쟁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해체 (1991~2008)


1992년~1995년 세르비아군이 장악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영토


밀로셰비치의 집권과 함께 세르비아에서는 대세르비아 관련 담론이 주류가 되었다. 밀로셰비치는 언론을 통제하여 세르비아인이 피해자라는 선전 캠페인을 조직하고 유고슬라비아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9] 이후 밀로셰비치의 반관료혁명으로 보이보디나, 코소보, 몬테네그로의 지방 정부가 전복되면서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에서 8표 중 4표를 차지하는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1988년 8월, 반관료혁명 지지자들은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다!"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전해진다.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중앙집권화를 요구하는 밀로셰비치를 비난하며 다당제 연방 국가를 요구했다. 밀로셰비치는 연방 시스템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며, 연방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세르비아의 외부 국경은 "열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며 유고슬라비아가 분권화될 경우 대세르비아 건설을 추구할 것임을 암시했다. 밀로셰비치는 "국경은 항상 강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28]

이 시점에서 세르비아의 여러 야당은 공개적으로 대세르비아를 요구하며, 당시 존재하던 공화국의 경계를 티토파르티잔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거부했다. 셰셀리의 세르비아 급진당은 최근의 변화가 반세르비아 편향을 바로잡았다고 주장했다. 밀로셰비치는 대세르비아를 요구하는 단체들을 지지하며 "하나의 국가 안에 모든 세르비아인"을 요구했다.[29] 세르비아 사회당 대표이자 세르비아 대통령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모든 세르비아인이 세르비아에 포함될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했다.[29]

1990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자유 선거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야당이 집권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26] 1990년에는 연방 정부의 권력이 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 유고슬라비아의 미래를 놓고 교착 상태에 빠졌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연방을, 세르비아는 더 강력한 연방을 추구했다. 1991년 5월 15일, 퇴임하는 대통령직 세르비아 대통령과 세르비아 위성국들이 크로아티아 대표 스테판 메시치의 대통령 취임을 막으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사실상 "기능을 멈췄다".[30]

'''비로비티차-카를로바츠-카를로바그 선'''(Вировитица–Карловац–Карлобаг линија|비로비티차-카를로바츠-카를로바그 리니야sr)은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가상의 경계선이다.[31] 이 선의 동쪽 지역, 즉 카를로바그(Karlobag)–오굴린(Ogulin)–카를로바츠(Karlovac)–비로비티차(Virovitica)를 잇는 지역을 세르비아(Serbia)의 영토로, 서쪽 지역은 슬로베니아(Slovenia)와 크로아티아(Croatia)의 잔여 영토로 규정한다.

이 선은 세르비아의 정치인 보이슬라브 셰셸리(Vojislav Šešelj)가 자주 언급했다.[32][33]

대세르비아는 영토 확장뿐 아니라 경제적 이유에서도 지지받았다. 세르비아가 해안선, 중공업 시설, 농업용 경작지, 천연자원, 그리고 원유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와 연관된 여러 세르비아 정치인들이 이러한 견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34]

셰셸은 자신의 연설과 저서에서 이 지역 주민 모두가 정교회, 가톨릭 또는 이슬람교도인 세르비아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셰셸의 세르비아 급진당을 제외하고는 최근 세르비아 정치 생활에서 이 선이 공식적으로 지지된 적은 없다.

밀로셰비치에 대한 전쟁 범죄 혐의는 그가 "대세르비아" 건설을 추구했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헤이그 검찰은 밀로셰비치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거주 지역과 코소보 전체를 포함하는 중앙 집권적인 세르비아 국가인 '대세르비아'를 건설하려는 계획의 일부였으며, 이 계획은 비세르비아인을 강제 추방하는 것을 통해 달성될 예정이었다고 주장했다.[35]

헤이그 재판부는 보스니아 세르비아 지도부의 전략적 계획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인 거주 지역을 연결하고, 이 지역을 장악하고, 대부분의 비세르비아인이 영구적으로 제거될 별개의 보스니아 세르비아 국가를 건설하는 계획"이었다고 판단했다.[36]

부크 드라슈코비치는 세르비아 르네상스 운동의 지도자로서 세르비아, 코소보, 보이보디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이 고밀도로 거주하는 지역을 포함하는 대세르비아 건설을 촉구했다.[29] 세르비아군이 장악하려 한 지역에서 약 16만 명의 크로아티아인이 추방되었다.[38]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많은 전투는 세르비아인을 통합하려는 시도의 결과였다. 세르비아 사회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인 미하일로 마르코비치는 세르비아 외부의 세르비아인을 소수 민족으로 만드는 모든 해결책을 거부했다. 그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그리고 크라이나, 슬라보니아, 바라냐, 스렘 세르비아 자치구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된 연방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29]

4. 현대의 대세르비아주의

18세기부터 유럽에서 이탈리아 통일과 같은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세르비아는 1817년 오스만 제국 내에서 세르비아 공국을 획득한 후 주변 지역, 특히 인근 국가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과의 완전한 통합을 열망했다.[1]

1844년 일리야 가라샤닌이 작성한 나체르타니예는 세르비아의 영토 확장 구상을 공식화했다.[2] 이 초안에 따르면 새로운 세르비아 국가는 몬테네그로, 북부 알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할 수 있었다.[3] 20세기 초 세르비아 왕국의 모든 정당은 모든 세르비아인을 하나의 세르비아 국가로 통합하려는 구상에 동의했다.

발칸 전쟁세르비아 왕국은 남쪽으로 확장했지만,[4] 아드리아 해로의 접근이 좌절되면서 엇갈린 반응을 얻었다. 세르비아는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지역을 얻었지만, 알바니아 공국 해안 지역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합병과 함께 세르비아의 열망을 꺾었다.[5]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세르비아의 승리는 대세르비아 지지자들과 다른 남슬라브 국가들을 포함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을 일으켰다. 1929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으로 개명될 국가는 카라조르제비치 세르비아 왕족이 통치했다.

1941년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체트니크는 전후 대세르비아 형성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지지하며 내전을 벌였다.

전후 파르티잔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1980년까지 유고슬라비아 국가 원수를 역임했다. 국가는 6개 공화국으로 나뉘었고,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내에 코소보 자치주와 보이보디나 자치주가 설립되었다.

세르비아 급진당 당수 보이슬라브 셰셸은 대세르비아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세르비아 정교회 파블레 대주교는 범죄를 통한 대세르비아 건설에 반대했다.[39]

세르비아 학자 체도미르 포포프는 "대세르비아 의도" 주장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용되며 부정확하다고 주장하며, 대세르비아는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41]

2008년, 세르비아 급진당 전 당원 알렉산다르 부치치는 셰셸의 대세르비아 비전이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42]

대세르비아는 다음 이유로 세르비아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세르비아인의 고향 (슈마디야, 몬테네그로 등)

2. 중세 세르비아 왕국 지배 지역 (프레셰보 계곡, 북마케도니아 등)

3. 세르비아인 이주 지역 (보이보디나, 코소보 등)

대세르비아 건설의 또 다른 방법은 세르비아 국외 남슬라브 지역에 선전을 퍼뜨리는 것이다. "대세르비아"는 세르비아 확장을 의미하지만, 1918년 유고슬라비아 건국 무렵에도 사용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표면상 다민족 국가였지만, 세르비아인 정치인들이 다수였다.

대세르비아 개념은 19세기 일리야 가라샤닌의 나체르타니예(Načertanije)가 기원이다. 19세기 부크 카라지치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의 슈토크어 사용자를 모두 세르비아인으로 간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드라자 미하일로비치체트니크는 전후 국가상을 위해 활동했다. 스테반 몰예비치는 1941년 논문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 대부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일부를 포함한 대세르비아 건설을 주장했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분쟁 동안 대세르비아 개념은 세르비아 영토 밖에서 세르비아 국가 건설 및 유지를 위한 무력 투쟁의 주요 동기로 여겨진다.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공화국, 세르브스카 공화국이 만들어졌다.

4. 1. 전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ICTY)

전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다른 세르비아 지도자들을 인류에 대한 범죄 (살인, 강제 인구 이동, 추방, "정치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이유에 따른 박해") 혐의로 기소했다.[38] 재판소 검찰은 밀로셰비치를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인권 침해와 집단 학살" 혐의로 기소했다.[38]

세르비아 역사가 시마 치르코비치는 대세르비아에 대한 불만과 가라샤닌의 나체르타니예(Načertanije)를 비난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40]

4. 2. 세르비아 세계

2020년 이후 알렉산다르 훌린(Aleksandar Vulin)과 같은 세르비아 정치인들 사이에서 "세르비아 세계"(Srpski svet)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44][45] 여러 지역 언론과 정치 평론가들은 이 용어를 이전의 "대세르비아" 개념을 대체하는 것으로 해석했다.[46][47][48] 2024년 11월, 훌린 세르비아 부총리는 바냐루카(Banja Luka)에서 연설하며 "세르비아 세계 창조 과정, 통일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44][45]

2024년 6월 8일, 세르비아 대통령 알렉산다르 부치치(Aleksandar Vučić)는 벨그라드에서 전 유고슬라비아 전역의 세르비아인 대표들을 모아 팬세르브 집회를 개최했다. 정치학자 알렉산더 로테르트(Alexander Rhotert)가 훌린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이 집회의 주요 목표는 모든 세르비아인이 살고 대세르비아보다 다소 작은 "정치적·국가적 영토"를 만드는 세르비아 세계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49] 이 집회에서는 코소보가 세르비아의 불가분의 일부이며, 스릅스카 공화국이 "세르비아의 국가적 이익"으로 간주된다는 내용을 담은 세르비아 일반 선언을 발표했다.[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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