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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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학분쟁은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을 의미한다. 일본의 좌익 운동과 교육 개혁의 영향으로 학생들의 좌익 사상이 확산되었고, 1948년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이 결성되어 학생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갱신에 반대하는 안보투쟁 당시, 신좌파의 주체성 논쟁이 벌어지면서 학생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 1968년에는 도쿄 대학을 중심으로 전공투가 결성되어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 1969년 경찰의 강경 진압과 대학 관리 임시 조치법 제정으로 인해 학생 운동은 쇠퇴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주체성'을 추구하며 실존주의적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문학 작품과 페미니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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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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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대학 분쟁 |
일본어 명칭 | 大学紛争 (Daigaku Funsō), 大学闘争 (Daigaku Tōsō) |
시기 | 1968년 1월 ~ 1969년 5월 |
지역 | 일본 |
관련 사건 | 1968년 사회운동, 냉전 |
구글 지도 검색어 | 일본 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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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
주요 원인 | 일본 신좌파의 성장 |
목표 | |
목표 | 대학 개혁 사회 변혁 |
방법 | |
주요 방법 | 캠퍼스 건물 점거, 동맹 휴학, 시위 |
결과 | |
주요 결과 | 시위 종료 1969년 대학의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 통과 연합적군의 투쟁이 1970년대 지속 일본의 여성 해방 운동 시작 |
교전 세력 | |
시위대 | 학생 전학공투회의 전학련 친일본공산당파 학생 (민청) 중핵파 혁마르파 사청동 해방파 제2분트 기타 신좌파 계열 |
정부 | 정부 일본 문부성 일본 경찰청 개별 대학 행정부 보수 및 우익 학생 단체 |
주요 인물 | |
시위대 지도자 | 요시모토 다카아키 구로다 간이치 야마모토 요시타카 도코로 미츠코 아키타 아케히로 |
정부 측 주요 인물 | 사토 에이사쿠 (총리) 나다오 히로키치 (문부 대신, 1968년 11월 이전) 사카타 미치타 (문부 대신, 1968년 11월 이후) |
기타 정보 | |
관련 용어 | 내게바 () |
2. 학생 운동의 기원
1960년, 일본 공산당, 일본 사회당,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소효 노동 연합 등 여러 좌익 단체들이 미일 안보 조약 갱신에 반대하는 안보투쟁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1] 마루야마 마사오는 시위를 통해 사회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인 ''주체성''(shutaisei)이 실현되고 민주주의 이상이 빛을 발한다고 보았지만,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시위를 민주주의 보호가 아닌 자본주의적 소외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았다. 요시모토는 마루야마와 그의 지지자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대중 민주주의의 선구자인 척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며 주체성에 반한다고 비난했다. 신좌파는 요시모토의 아이디어와 마루야마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였다. 전학련은 일본 공산당 등 ''주체성''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이는 일본 신좌파가 주류 진보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대학생 수와 대학 수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도쿄에는 52개의 대학이 신좌파 급진주의자들의 안식처를 제공했다. 전후 출판물 검열 부재, 저렴한 마르크스주의 텍스트 인쇄, 대학에서의 풍부한 자유 시간은 더 많은 학생들을 급진화시켰다. 20세기 중반의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난 세대가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은 수천 개의 추가 공간을 열어 적응했다. 학생 운동은 안보투쟁 이후 휴면 상태였으나, 대학 상황은 불안정해져 1968년 시위로 이어졌다.
2. 1. 전후 일본 사회와 정치 변화
일본 점령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부터 1952년까지 일본 정치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점령 당국은 전쟁 전에 좌익 단체를 특별히 겨냥하고 그 구성원을 체포하기 위해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폐지했다.[1] 이 법에 따라 투옥된 좌익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1] 일본 공산당(JCP)과 일본 사회당(JSP)은 합법화되어 일본 정치 내에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일본 공산당은 학생들 사이에서 지지세를 늘리는 데 집중했고, 이는 학생들을 좌익 활동과 연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점령 당국은 전후 일본국 헌법을 공포하여 정치 단체에 존재할 권리와 노동자에게 조직할 권리를 부여했다. 좌익 단체는 헌법을 지지했고, 학생들은 헌법을 보호하고 위헌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일본 국가의 조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노력했다.2. 2. 교육 개혁과 학생 운동의 확산
일본 점령 당국은 일본 교육 제도를 개편하여 교육에 관한 교육칙어를 폐지하고 교육 행정 권한을 분산시켰으며, 미국식 6-3-3-4 학제(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를 도입했다.[1] 의무 교육은 최소 9년으로 실시되었다. 1949년 국립학교설립법에 따라 모든 현에 국립 대학이 설치되어 고등 교육 시스템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 수의 증가를 가져왔고, 문부과학성은 더 많은 사립 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고등학교 졸업생 수가 학생의 90%까지 증가하면서 고등 교육 기관의 확대가 이루어졌다.이러한 교육 개혁은 대학생 수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는 학생 운동의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1948년에는 사회주의 학생 단체인 전학련이 결성되어 학생 운동이 결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2. 3. 전학련의 결성과 신좌파 운동
1948년 사회주의 학생 단체인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이 결성되어 학생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1] 1950년대에는 일본 공산당과 무관한 신좌파 운동이 학생 운동 내에서 나타났다. 공산주의자동맹(분트),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혁공동) 등 다양한 신좌파 조직들이 결성되어 활동했다.일본 신좌파 내의 다양한 파벌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도표이다. 그러나 이는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으로, 많은 세부 사항이 표시되지 않았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파벌은 반 JCP 연합인 전학련의 구성원이었다. 혁공동의 두 분파는 혁공동의 전학련 학생 조직인 마루가쿠도 자체 파벌도 가지고 있었다.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갱신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안보투쟁)는 학생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 학생들은 '주체성' 개념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기존 진보 세력에 반대하며 개인적인 신념과 자아 변혁을 추구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신좌파의 "예언자"로 불리며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1960년 안보투쟁과 학생 운동의 전환점
3. 1. 안보투쟁과 주체성 논쟁
안보 투쟁 당시, 마루야마 마사오와 요시모토 다카아키 등 지식인들 사이에 시위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마루야마는 시위를 사회의 자율성(주체성) 실현으로 본 반면, 요시모토는 자본주의적 소외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했다. 신좌파는 요시모토의 비판을 수용하여 기존 진보 세력과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당시 학생들은 '주체성' 개념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1960년 안보 투쟁 동안 '주체성'을 포기한 진보 세력에 반대하는 방식이었다. 학생들은 개인적인 자아 의식, 즉 주체성을 느끼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주체성'을 찾는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려 했다. 당시 일본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책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같은 실존주의 작품들이었다.
일본 신좌파 학자 윌리엄 앤드류스는 학생들의 '주체성' 해석을 장 폴 사르트르의 선과 악의 자기기만 이론과 유사하다고 비유했다. 즉, 학생들은 정당 노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념과 학생 주체성이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더 혁명적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 비판과 자기 부정(''지코히한'')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도쿄 대학 학생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들 대부분은 "자아 주장" 또는 "자기 변혁"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구체적인 개혁 목표와 같은 "개량주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들의 목표는 전반적으로 매우 모호했다. 한 전공투 회원은 "투쟁 자체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고, 일부 학생들은 단순히 싸움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학생들, 특히 분트 내의 학생들은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단순화된 해석을 통해 '주체성'을 해석했다. 그들의 '주체성'에 대한 생각은 그들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정할 수 있는 주체성을 원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비판자로는 당시 도쿄 대학 문학부 학장이었던 하야시 겐타로가 있었는데, 그는 시위 기간 동안 학생들에게 인질로 잡혔으며, 학생들의 생각을 "자기 비하의 위선"으로 비난했다. 즉, "우리 안의 도쿄 대학"을 부정한다는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위선적으로 도쿄 대학 학생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예언자"로 여겨졌던 요시모토 자신도 그들이 "공동체적 환상"에 휩싸여 있다고 비판했다.
3. 2. 신좌파의 주류 진보주의 비판
1968년 7월, 도쿄 대학의 전공투는 일본 공산당, 진보주의자, 그리고 자아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이는 일본 신좌파가 주류 진보주의와 정통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전공투는 비당파 활동가들의 활동을 조명했는데, 이들은 혁명을 위한 정해진 길을 따르지 않고 전학련이나 일본공산당에도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는 과거 전학련에 소속된 39개 그룹과 일본공산당에 반대하는 1개 그룹으로 나뉘어 있던 상황과 대조적이다. 전공투는 1960년 안보 투쟁에는 학부생만 참여했지만, 대학원생과 일부 교직원도 포함시켜 시위대의 범위를 확장했다.
1968년 7월, 도쿄 대학의 전공투는 대학의 모든 고위 의료진의 사임을 요구했고, 8월 10일 도쿄 대학 병원장과 의학부 학장이 사임했다. 같은 달, 협상이 결렬되고 캠퍼스에서 폭력이 재발하면서 전공투는 점차 여러 조직에 통제력을 잃었다. 11월에는 가쿠마루파라는 트로츠키주의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의 분파 조직의 구성원들이 문학부 학장 하야시 겐타로를 포함한 9명의 교수를 인질로 잡았다. 사세이도 해방파, 또 다른 전학련 조직과 일본 민주 청년 동맹(민세이 동맹)인 일본공산당과 연계된 전학련 파벌도 관여했다. 이러한 파벌들은 파벌주의 분열을 캠퍼스에 가져왔고, 비당파 학생들이 중재하거나 응급 처치를 제공하기 위해 개입하는 싸움으로 이어졌다.
12월, 와세다 대학에서 사세이도 해방파와 가쿠마루파 간의 싸움은 도쿄 대학으로 번졌고, 이들 파벌은 대학 문학부 소속의 여러 건물을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 분쟁은 3주 동안 지속되었고, 가쿠마루파가 전공투에서 탈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이후로 서로 다른 전학련 파벌들이 서로 다른 건물을 통제했다.
그동안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확산되었다. 각 대학의 학생들은 서로 다른 문제에 대해 시위했다. 간세이 가쿠인 대학과 도호쿠 대학에서는 학비 인상에 항의했고, 가나가와 대학과 벳푸 대학에서는 대학 민주화를 요구했다. 도시샤 대학과 와세다 대학에서는 시위의 주요 초점이 대학 총장을 학생이 선출하는 것이었고, 나가사키 대학과 하나조노 대학에서는 학생회 건물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소피아 대학은 6개월 동안 캠퍼스를 폐쇄했고, 규슈 대학의 컴퓨터 센터에 미국 제트기가 추락하면서 후쿠오카 공항의 폐쇄를 목표로 한 반미 시위가 촉발되었다. 1968년 말까지 학생들은 67개 캠퍼스를 장악했고, 수백 개의 캠퍼스에서 심각한 학생 소요가 발생했다.
시위는 대학 캠퍼스 밖에서도 발생했다. 10월 21일(국제 반전의 날) 수천 명의 학생들이 신주쿠역에 진입하여 신주쿠 폭동을 일으켰고, 경찰은 집단 난동죄를 발동했다. 폭동의 규모는 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경찰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증가시켜 점거된 캠퍼스를 공격할 때 더 많은 무력을 사용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1968년 12월 경찰의 캠퍼스 포위 공격 이후 소피아 대학 점거가 무너졌다.
1968년 가을에 폭력이 심화되었다. 학생들은 '게발트 스테이브' 또는 일본어로 '게바루토-보'(줄여서 '게바-보')라고 알려진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든 막대기로 싸웠다. 단어 ''Gewalt''는 독일어로 "폭력" 또는 "힘"을 의미하며, 학생들에게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었다.
4. 1960년대 후반 학생 운동의 격화
1960년대 후반, 대학생 수와 대학 수가 증가하고, 전후 출판물 검열이 사라지면서 마르크스주의 서적이 인기를 얻는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학생 운동은 더욱 급진화되었다.
4. 1. 전공투의 등장과 확산
1965년 게이오기주쿠 대학과 1966년 와세다 대학에서 시위를 조율하는 학생 단체인 전학공동투쟁회의(전공투)가 처음으로 등장했다.[1] 와세다 대학에서의 소요는 150일 동안 지속되다가 전국적인 학생 운동이 진정되면서 끝났다. 1968년 초, 도쿄 대학 의대생들은 의학 인턴십과 관련된 논란이 많은 개혁에 반발하여 파업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튜터와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발생했고, 17명의 학생이 처벌받고 4명이 퇴학당했다. 3월에는 졸업식을 방해한 의대생들에 대한 처벌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시위가 이어졌고, 진압 경찰이 투입되자 학생들은 6월에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다.
도쿄 대학 의대생들의 시위는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일본대학('니치다이'로 널리 알려짐)에서는 1968년 5월 대학 이사회의 20억 엔 자금 사용에 대한 의혹으로 10,000명의 학생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사회를 "대량 생산 대학"의 "돈벌이"로 비난했다. 도쿄 대학은 좌익적 성향의 엘리트 학교였고, 일본 대학은 보수적이고 억압적이었지만, 시위는 대학 건물 점거와 같은 유사한 전술을 사용했으며, 이는 여러 대학에서 전공투 그룹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전공투는 비당파 활동가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대학원생과 교직원까지 시위 범위를 확장했다.
5. 학생 운동의 쇠퇴와 몰락
1965년 게이오기주쿠 대학과 1966년 와세다 대학에서 "전학공동투쟁회의(Zenkyōtō)"라는 이름이 시위 조율 학생 단체를 지칭하는 데 처음 사용되면서 학생 불안이 다시 나타났다. 와세다 대학의 소요는 150일 동안 지속되었고, 학생 운동이 전국적으로 진정되면서 종료되었다. 1967년 말 도쿄 대학이 의학 인턴십과 관련하여 실시한 논란이 많은 개혁은 의대생들에게 6년간의 무임금 노동으로 여겨졌으며, 1968년 초 대학에서 학생 파업으로 이어졌다. 인턴십 개혁 논란으로 인해 2월 19일에 튜터와 학생들 사이에 발생한 싸움으로 인해 17명의 학생이 처벌받고 4명이 퇴학당했다. 3월에 대학 졸업식을 방해한 의대생들은 처벌 중 일부가 터무니없다고 여겼는데, 그 중 한 학생은 싸움 당일에 도쿄에 있지 않고 규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졸업식을 보호하기 위해 진압 경찰이 투입되자, 학생들은 6월에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도쿄 대학은 학생 점거로부터 야스다 강당을 되찾고 바리케이드를 치우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학생들 사이에 격분을 일으켜 강당을 재점거하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도쿄 대학 의대생들의 시위는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그 중 하나가 일본대학('니치다이'로 널리 알려짐)으로, 1968년 5월 대학 이사회가 20억엔의 자금을 의심스럽게 사용한 것에 대해 86,000명의 학생 중 10,000명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사회를 "대량 생산 대학"의 "돈벌이"로 비난했다. 대학의 정치적 이념은 달랐지만, 도쿄 대학은 학생들의 좌익적 공감을 가진 엘리트 학교였고, 일본 대학은 더 보수적이고 억압적이었다. 시위는 중요한 대학 건물 점거와 같은 유사한 전술을 사용했으며, 이는 나중에 여러 대학에서 전공투 그룹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6. 학생 운동의 분파와 이념
대학 분쟁에서는 일본 공산당(JCP)에 반대하는 반요요기 단체, 일본민주청년동맹(민세) 등과의 내부 갈등이 대학 투쟁을 어렵게 만들었다.
6. 1. 주요 분파와 이념적 차이
일본 공산당(JCP)에 반대하는 반요요기 단체, 일본민주청년동맹(민세) 등과의 내부 갈등은 대학 투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트로츠키주의 혁공동은 중핵파와 혁마루파로 나뉘었다.[1] 중핵파는 대학 제도가 자본주의에 편입되었다고 주장하며 자본주의 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강조했다. 반면 혁마루파는 대학의 제국주의적 성격 때문에 학생들이 대학 행정에 참여하여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1969년 말 와세다 대학에서 전공투와도 충돌했다.혁마루파는 반스탈린주의 정당 창설을, 중핵파는 계급 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동원을 강조했다. 중핵파는 혁마루파를 쁘띠 부르주아라고 비판했다. 사세이도 해방파는 학생들을 산업의 "노예"로 만들려는 교육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번드는 파시즘으로부터 일본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집중했다. 민세는 JCP와 연계된 개혁주의적 파벌로, 교수들과의 타협을 주장하며 교육부의 억압적인 세력에 대항했다. 민세는 전공투에 맞서 캠퍼스 점거에 반대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 신좌파 내 다양한 분파 간의 관계는 복잡하며, 아래 표는 이를 단순화한 것이다.
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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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소스에 제공된 Tree chart/start, Tree chart 템플릿을 사용하여 작성된 복잡한 표는 여기서는 일반 텍스트로 대체합니다. 해당 표는 일본 신좌파 내 다양한 파벌 간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자료였으나, 위키텍스트 형식의 제약으로 인해 정확한 재현이 어렵습니다. |
6. 2. 분파 간 관계 (도표)
대학 분쟁에서 반(反)요요기 단체, 민세 등과의 내부 갈등은 대학 투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1] 중핵파와 혁마루파는 트로츠키주의 혁공동의 두 주요 파벌이었다. 중핵파는 번드와 뜻을 같이하여 대학 제도가 이전의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본주의에 편입되었으며, 투쟁은 자본주의 내의 모순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혁마루파는 대학의 제국주의적 성격 때문에 학생들이 대학 행정에 참여하여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한 1969년 말 와세다 대학에서 그들과 싸웠기 때문에 반 젠쿄토이기도 했다). 둘 다 정치적으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는데, 둘 다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말이다. 혁마루파는 반 스탈린주의 정당 창설에 집중할 것을 옹호한 반면, 중핵파는 계급 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동원에 더 집중했다. 중핵파는 혁마루파를 쁘띠 부르주아라고 비판했다. 사세이도 해방파는 대학의 문제점이 학생들을 산업의 "노예"로 만들 준비를 시키는 교육 이데올로기라고 믿었다. 번드는 다른 학생 단체에 비해 훨씬 더 위계적이었다. 이념적으로 그들은 대학을 파괴하는 대신 파시즘으로부터 일본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집중했다. 민세는 일본 공산당과 연계된 개혁주의적 파벌로서, 교수들과의 타협이 가능하며 궁극적인 적은 교육부의 억압적인 세력이라고 믿었다. 민세는 젠쿄토에 대항하여 캠퍼스 점거에 반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다음 표는 일본 신좌파 내의 다양한 파벌 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으로, 많은 세부 사항이 표시되지 않았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파벌은 반 JCP 연합인 전학련의 구성원이었다. 혁공동의 두 분파는 혁공동의 전학련 학생 조직인 마루가쿠도 자체 파벌도 가지고 있었다.
혁공동 (혁명적 공산주의자동맹) | 일본사회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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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공동(전국위원회) | 사세이도 해방파 | 교산도(번드) | 민세 동맹 | |||||||
중핵파 | 사가쿠도 | 혁마루파 | ||||||||
제4 인터내셔널 일본 | 마르크스-레닌주의-하 | 다수 | 제2 번드 | |||||||
선기파 | ||||||||||
혁명파 | 세키군파(적군파) | |||||||||
연합적군 | 요도호 그룹 | 일본 적군 |
7. 학생 운동의 철학
1960년대 일본 학생 운동은 '주체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주체성'을 포기했다고 여겨지는 기존 진보 세력에 반발하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주체성'을 찾고 실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개인의 자아의식과 주체적인 삶을 갈망했으며, 이를 위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려 했다.[1]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같은 실존주의 문학 작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7. 1. 주체성 추구와 실존주의
학생들은 '주체성' 개념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60년 안보 투쟁에서 '주체성'을 포기한 진보 세력에 반대하며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는 학생들의 방식이 되었다.[1] 학생들은 개인적인 자아 의식, 즉 주체성을 느끼고 싶어했고, 이를 얻기 위해 '주체성'을 찾는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책 중 일부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같은 실존주의 작품이었다.일본 신좌파 학자 윌리엄 앤드류스는 학생들의 '주체성' 해석을 장 폴 사르트르의 선과 악의 자기기만 이론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즉, 학생들은 정당 노선을 따르는 대신, 개인적인 신념과 학생 주체성이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는 더욱 혁명적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 비판과 자기 부정(''지코히한'')을 강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도쿄 대학 학생들에게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질문했을 때, 그들 대부분은 "자아 주장" 또는 "자기 변혁"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답했다. 학생들은 구체적인 개혁 목표와 같은 "개량주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들의 목표는 전반적으로 매우 모호했다. 한 전공투 회원은 "투쟁 자체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고, 일부 학생들은 단순히 싸움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특히 분트 내의 학생들은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단순화된 해석을 통해 '주체성'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체성'에 대한 생각은 결국 그들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정할 수 있는 주체성을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비판자들도 있었는데, 당시 도쿄 대학 문학부 학장이었던 하야시 겐타로는 시위 기간 동안 학생들에게 인질로 잡히기도 했으며, 학생들의 생각을 "자기 비하의 위선"이라고 비난했다. 즉, "우리 안의 도쿄 대학"을 부정한다는 말과는 달리, 학생들은 위선적으로 도쿄 대학 학생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예언자"로 여겨졌던 요시모토 다카아키 자신도 그들이 "공동체적 환상"에 휩싸여 있다고 비판했다.
7. 2. 자기 비판과 자기 부정
학생들은 정당 노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념과 학생 주체성이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더 혁명적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 비판과 자기 부정(''지코히한'')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1]도쿄 대학 학생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들 대부분은 "자아 주장" 또는 "자기 변혁"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구체적인 개혁 목표와 같은 "개량주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들의 목표는 전반적으로 매우 모호했다. 한 전공투 회원은 "투쟁 자체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고, 일부 학생들은 단순히 싸움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학생들, 특히 분트 내의 학생들은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단순화된 해석을 통해 '주체성'을 해석했다. 그들의 '주체성'에 대한 생각은 그들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정할 수 있는 주체성을 원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비판자로는 당시 도쿄 대학 문학부 학장이었던 하야시 겐타로가 있었는데, 그는 시위 기간 동안 학생들에게 인질로 잡혔으며, 학생들의 생각을 "자기 비하의 위선"으로 비난했다. 즉, "우리 안의 도쿄 대학"을 부정한다는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위선적으로 도쿄 대학 학생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예언자"로 여겨졌던 요시모토 다카아키 자신도 그들이 "공동체적 환상"에 휩싸여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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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7. 3. 주체성 해석에 대한 비판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신좌파의 "예언자"로 불렸다. 학생들의 '주체성' 해석에 대한 비판자로는 당시 도쿄 대학 문학부 학장이었던 하야시 겐타로가 있었는데, 그는 학생들의 생각을 "자기 비하의 위선"이라고 비난했다. 즉, "우리 안의 도쿄 대학"을 부정한다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위선적으로 도쿄 대학 학생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시모토 자신도 그들이 "공동체적 환상"에 휩싸여 있다고 비판했다.8. 학생 운동의 유산
1960년대 말의 시위는 일본 좌파가 대중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고, 1969년 일본 총선에서 일본 사회당은 51석을 잃었다. 좌파의 영향력, 권력, 대중적 이미지의 쇠퇴와 경찰의 감시 증가는 1970년 안보 투쟁의 실패로 이어졌다.[1]
학생 시위는 독일의 녹색당과 같은 개혁적인 정치 운동을 낳지 못했다. 오구마 에이지는 이에 대한 세 가지 이유로 학생들의 구체적인 목표 거부와 그들 자신의 도덕주의적 목표, 일본 사회 내에서 전직 활동가들을 고용하는 지속적인 일본 경제 성장, 그리고 종파들의 경직된 구조와 마르크스주의적 성격을 제시한다.
8. 1. 정체성 위기와 문학적 영향
1968년 세대의 정신 속에서, 시위의 패배는 정체성 위기를 야기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이해 부족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주요 영감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일부 책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같이 1970년대 시위의 여파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시위에서 영감을 받은 다른 유명한 책으로는 미타 마사히로의 1977년 젠쿄토 소설 ''나는 무엇인가''와 무라카미 류의 ''69'' (나중에는 2004년 영화로 각색됨)가 있다. 야스다 강당에서 발생한 사건은 결국 시위 기간 동안 출판된 책으로 구성된 새로운 문학 장르인 ''젠쿄토 문학''을 창조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강렬한 감정, 실망, 혼란, 실패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포함한다.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기호의 제국''의 한 부분을 전학련 학생들에게 할애하기도 했다.8. 2. 과격 학생 운동의 등장
일부 과격한 학생들은 연합 적군 또는 일본 적군과 같은 새로운 운동을 만들었다. 적군과 시위에 참여한 학생 단체의 다른 잔존 세력들은 일본항공 351편 요도호 납치 사건과 아사마 산장 사건과 같은 사건에 책임이 있었다.8. 3. 일본 페미니즘의 부상
학생 시위는 일본 페미니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 사회는 여성의 역할이 더 전통적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이 운동 기간 동안 시위에 참여하는 데 제약을 받았다. 중요하게도, 여성 학생들은 공개 행동을 할 기회와 주체성을 얻었다. 시위 기간 동안 여성 학생들이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한 것은 캠퍼스 내 성 불평등에 대한 여성들의 더 큰 인식을 가져왔다. 이러한 새로운 인식은 페미니스트 지식인 다나카 미츠가 1970년 작품 ''더 이상 화장실은 없다''를 쓰도록 이끌었고, 이는 우만 리부 운동의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다나카는 신좌파 그룹 내의 내분이 지나치게 남성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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