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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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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은 민주당 내 신구파 간의 갈등 속에서 치러졌다. 구파는 조병옥을, 신파는 장면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며, 후보 경선 방식과 당 대표 선출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조병옥은 당 분열을 우려해 경선 포기를 선언했으나, 구파의 반발로 번복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경선 결과,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장면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장면은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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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이기붕 민의원 의장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며, 이는 3·15 부정선거를 향한 자유당의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
선거 정보
국가대한민국
득표수1'484'
득표수2'481'
득표율150.1%
득표율249.8%
선거명1960년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
선거일1959년 11월 26일
선거전신익희
선거후조병옥
유형대통령
이전 선거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
이전 선거 연도'1956년'
직책대통령 후보
차기 선거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민정당 후보 선출
차기 선거 연도'1963년'
후보1조병옥
후보2장면
정당1민주당
정당2민주당
색1노랑
색2초록
선거인단대의원 993명 중 966명 참석, 당선을 위해 484표 필요
조병옥
조병옥
장면
장면

2. 경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내에서는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신파와 구파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구파는 조병옥을, 신파는 장면을 각각 후보로 지지하며 대립각을 세웠다.[1] 초기에는 신구파가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나누어 맡는 방안도 논의되었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무산되면서 전면 대결이 불가피해졌다.[2]

이러한 갈등 속에서 1959년 10월, 구파의 조병옥 후보는 돌연 당의 분열을 막겠다며 경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3] 이는 당내 화합을 위한 명분과 함께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전략적 판단으로 해석되었으나,[3] 오히려 구파 내부의 반발을 사고 당내 혼란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장면 측은 통합을 위해 노력했지만,[4] 조병옥 측은 부통령 후보직 제안 등을 거부했다.[5]

결국 구파 의원들의 강력한 번복 요구와 당내 혼란 수습 필요성 속에서,[10][6] 조병옥은 최고위원회의 공식 권고와 장면의 양보 의사 표명에도 불구하고[7] 고심 끝에 전당대회 직전인 11월 25일, 사실상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경선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8] 이로써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은 다시 조병옥장면의 양자 대결 구도로 치러지게 되었다.

2. 1. 신구파 대결

민주당 내 구파는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을 지지했고, 신파는 장면을 지지했다.[1]

초기에는 조병옥 측이 장면을, 장면 측이 조병옥을 부통령 후보로 지지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면서 신구파가 각각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를 나누어 맡는 안배 티켓 선출 가능성이 엿보였다. 실제로 민주당은 4년 전 경선에서도 구파가 대통령 후보직을, 신파가 부통령 후보직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합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장면 캠프는 이번에는 그러한 합의를 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고, 조병옥 캠프 또한 부통령 후보직에는 관심이 없음을 표명하면서 대통령 후보 지명 경쟁은 신파와 구파의 전면전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장면은 조병옥이 자신에게 대통령 후보직을 양보할 경우, 자신은 당 대표직을 조병옥에게 양보하겠다며 사전 조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조병옥 캠프는 이 제안마저 거부하고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 자리를 모두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2]

2. 2. 조병옥의 불출마

신구파 간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던 상황에서, 1959년 10월 10일, 구파의 대통령 후보로 지지받던 조병옥 박사는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경선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3] 이는 신구파의 전면 충돌로 인한 당 분열을 피하고, 이번 선거는 장면 박사에게 양보하는 대신 제5대 대통령 선거를 노리는 전략적인 판단에 따른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에 따라 조병옥계는 대통령 후보직을 양보하는 대신, 조병옥 박사가 당 대표직을 맡고 최고위원회 구성을 통해 당내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3]

대통령 후보 당선이 유력해진 장면 박사는 조병옥 박사의 갑작스러운 불출마 선언이 정치적 계산에 따른 '쇼'일 가능성을 의심하기도 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화합을 위해 조병옥 박사나 조병옥계 중진인 윤보선 의원을 부통령 후보(러닝메이트)로 고려하는 등 통합을 위한 노력을 보였다.[4] 하지만 조병옥 박사와 윤보선 의원 모두 부통령 후보직을 수락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5]

2. 3. 불출마 번의

조병옥 박사의 불출마 선언은 당내 분열을 수습하려는 의도와 달리 더 큰 혼란을 가져왔다. 이 선언은 구파 내부에서 미리 협의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수의 구파 의원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신파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조병옥 박사에게 공개적으로 불출마 번복을 요구했고, 일부는 당을 탈당하기도 했다.

신구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오히려 신파 측에서 전당대회 파행을 막기 위해 조병옥 박사에게 불출마 선언 번복을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곽상훈 최고위원을 비롯한 일부 신파와 중도파 인사들은 장면 박사에게 대승적 차원에서 대통령 후보 조병옥, 부통령 후보 장면 안을 수용하라고 공개적으로 권유하기도 했다.[10][6]

민주당 최고위원회는 1959년 10월 16일, 공식적으로 대표최고위원인 조병옥 박사에게 불출마 선언을 번복할 것을 권고했으나, 조병옥 박사는 이를 거절했다. 장면 박사 역시 조병옥 박사를 대통령 후보로, 자신을 부통령 후보로 하는 합의안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지만, 조병옥 박사는 당내 화합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후보 지명전에 복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이마저 거절했다.[7]

결국 조병옥 박사는 전당대회 전날인 11월 25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전당대회 결과 자신이 지명될 경우 당의 명령을 수락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사실상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였다.[8]

3. 경선 방식

민주당은 경선 규칙을 놓고도 막판까지 진통을 겪었다. 장면 캠프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결선 투표를 실시하여, 과반수 득표자를 대통령 후보로, 2위 득표자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방식을 주장했다. 반면, 조병옥 캠프는 결선 투표 없이 한 번의 투표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2위 득표자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단순다수제를 주장했다. 김도연 등 구파 일부에서는 2위 득표자가 자동으로 부통령 후보가 되는 방식에 반대하며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를 각각 별도로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연기명 투표제를 채택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네 가지 안건을 놓고 전당대회에서 표결에 부친 결과, 조병옥 측의 단순다수제 안은 총 974표 중 439표의 찬성을 얻는 데 그쳐 부결되었다. 이어 장면 측의 결선투표제 안이 974표 중 492표의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다.[9]

대의원 수에서는 구파가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병옥 캠프의 안이 부결된 것은 구파 내 일부 강경파의 이탈 때문으로 분석되었다. 이들은 당초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신구파 화합을 위해 불출마를 선언한 김도연을 부통령 후보로 지지하며 구파가 모든 직책을 차지하려 했다. 이를 위해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를 따로 선출하는 안을 지지했고, 따라서 조병옥 캠프의 안에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장면 캠프의 안이 먼저 통과되면서 이들이 지지했던 분리 선출 안은 표결에 부쳐지지도 못한 채 폐기되었다. 이로 인해 구파 강경파는 선거 시작 전에 조병옥 캠프의 분위기만 망쳐놨다는 빈축을 샀다.[10]

4. 결과

1959년 11월 26일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결과, 조병옥대통령 후보로, 장면이 부통령 후보로 각각 선출되었다.[11] 다음 날인 11월 27일에는 장면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최고위원회를 신파와 구파 동수로 구성하기로 합의하고 윤보선을 신임 최고위원으로 추가 선출하였다.[10]

4. 1. 대통령 후보 선거

전당대회는 원래 10월 중순에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신구파 간의 갈등이 늦게까지 수습되지 못한데다 국정감사 시즌까지 겹쳐 11월로 연기하게 되었다.[11]

1959년 11월 26일 열린 후보 지명 대회에서 대의원 투표를 진행한 결과, 조병옥 후보가 총투표수 966표 중 과반인 484표를 획득하여 결선투표 없이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었다. 2위를 한 장면 후보는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당초 조병옥 박사를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장면 박사를 부통령으로 하자는 절충안이 범계파적인 지지를 얻고 있어 조병옥 캠프는 5~600표 이상의 압승을 자신했으나, 실제 투표 결과는 박빙으로 나타났다.

득표순위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1조병옥48450.1%대통령 후보
2장면48149.8%부통령 후보
기권10.1%
총투표수966100%


4. 2. 당 대표 선거

대통령 후보 선출 다음 날인 11월 27일에는 당 대표 선출이 진행되었다. 투표 결과 장면 박사가 518표(53.5%)를 얻어 당 대표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다.

조병옥 박사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날 오후, 구파 지도부는 모임을 갖고 당 대표직도 구파에서 차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장면 캠프는 대표직마저 구파가 가져갈 경우 대회 진행을 막고 분당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강하게 반발하며 구파를 압박했다. 결국 구파 대의원들은 장면에게 표를 몰아주었다.[10]

득표순위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1장면51853.5%대표최고위원
2조병옥44746.2%
기권10.1%
무효20.2%
총투표수968100%



또한 이날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회 구성 변경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졌다. 기존 최고위원회는 구파의 조병옥·백남훈과 신파의 곽상훈·박순천·장면 등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구파 측 위원 1명을 추가하여 신구파 비율을 5대 5로 맞추기로 합의했다. 당초 기존 비율 유지를 주장하던 신파는 구파 위원 증원에 동의하면서도, 구파가 추천한 김도연 박사 임명에는 반대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그 결과 구파이면서도 비교적 중도적인 인사로 평가받던 윤보선 의원이 신임 최고위원으로 결정되었다. 정작 윤보선 본인은 이 합의에 강하게 반대했으나, 당 지도부는 어렵게 성사된 합의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윤보선 의원을 대회장 건물 안에 머물게 하고 해당 안건을 통과시켰다.[10]

참조

[1] 웹인용 양파 간에 미묘한 새 동향,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 위요 https://newslibrary.[...] 2019-05-24
[2] 웹인용 민주당, 분열 위기를 극복 - 조병옥 박사의 정·부통령 후보 포기로 https://newslibrary.[...] 2019-05-24
[3] 웹인용 당 지도권 확립을 지향, 민주당의 구파, 조 박사 중심으로 추진 https://newslibrary.[...] 2019-05-24
[4] 웹인용 장파 측의 지배적 주장 "부통령 후보에 윤보선 의원을" https://newslibrary.[...] 2019-05-24
[5] 웹인용 부통령 후보, 윤 의원은 거부 https://newslibrary.[...] 2019-05-24
[6] 웹인용 민주당 내에 신 클럽 - 지명 타협 안 되면 파당, 친장파 일부도 장씨 양보 추진 https://newslibrary.[...] 2019-05-24
[7] 웹인용 조 박사, 17일 최고위원횡서도 번의 요망을 또 거부한 듯 https://newslibrary.[...] 2019-06-08
[8] 웹인용 조 박사 민주당 간부회의서 성명 "나의 의사 당명만이 구속" https://newslibrary.[...] 2019-06-08
[9] 웹인용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씨 https://newslibrary.[...] 2019-03-04
[10] 웹인용 민주당 지명 전당대회의 이면 https://newslibrary.[...] 2019-04-24
[11] 웹인용 11월로 연기 난면, 민주당 지명 전당 양 대회 당 내분과 국정 감사로 https://newslibrary.[...] 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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