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병옥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병옥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1894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광주학생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다. 광복 후 미군정 경무부장을 역임하며 경찰 창설에 관여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대통령 특사, UN 한국 대표, 내무부 장관 등을 지냈다. 이승만과의 갈등, 친일 경찰 등용 논란, 제주 4.3 사건 강경 진압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56년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며, 1959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1960년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3·15 부정선거 대통령 후보 -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재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도 받으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서거하였다.
  • 조병옥 가 - 조순형
    조순형은 삼성물산 과장 출신으로 7선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12·12 쿠데타 이후 정계 입문, 민주화 운동 참여, 킹메이커 역할 수행,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발의 주도, 자유선진당 활동, 조병옥 선생 친일파 논란 관련 법적 대응 등의 활동을 했다.
  • 조병옥 가 - 조윤형
    조윤형은 대한민국 국회의원 및 제13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으며, 민주당, 민중당 등 여러 정당에서 활동했다.
  • 와이오밍 대학교 동문 - 딕 체니
    딕 체니는 공화당 소속으로 하원의원, 백악관 비서실장,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제46대 부통령을 지낸 미국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이다.
  • 와이오밍 대학교 동문 - 스티브 코크란
    스티브 코크란은 와이오밍 대학교 농구 선수 출신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백열》, 《폭풍 경고》 등 다양한 영화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린 미국의 배우이자 제작자이다.
조병옥
인물 정보
이름조병옥
로마자 표기Jo Byeong-ok
한자 표기趙炳玉
다른 이름유석 (維石)
로마자 표기 (다른 이름)Yuseok
기본 정보
출생일1894년 5월 21일
출생지조선 충청도 천안군
사망일1960년 2월 15일
사망지미국 워싱턴 D.C. 월터리드 육군병원
사망 원인위암
배우자노정면
자녀조윤형(차남), 조순형(삼남) 등 3남 2녀
형제남동생 조병호(趙炳鎬, 독립운동가)
부모아버지 조인원(趙仁元, 독립운동가), 어머니 남양 홍씨 부인
본관한양 조씨
종교개신교(장로회)
학력
학력와이오밍 대학교 학사·석사
학력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 박사
정치 경력
정당민주당
당내 직책대표최고위원 겸 고문
국회의원 선수2
지역구서울 성동구 을
주요 경력제5대 내무부 장관
기타 경력고려대학교 초빙교수
기타 경력민주당 대선후보
기타 정보
직업독립운동가, 경찰관, 정치가
조병옥
외부 링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병옥(趙炳玉)
지식백과조병옥:지식백과

2. 생애

조병옥은 1894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나 1914년 미국으로 유학,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신간회, 조선일보 등에서 활동했고, 광주학생운동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두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1]

1945년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서 한국 경찰 창설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경찰 경력자들을 등용하여 친일 행위라는 비판을 받았다.[34][35] 1948년 제주 4.3 사건 당시에는 강경 진압을 주장하여 많은 민간인 희생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69][70]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UN 한국 대표,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대구 사수에 앞장섰다.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54년 호헌동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1955년 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신익희 사망 후 당 대표최고위원을 맡았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선거 직전 미국에서 사망했다.[54] 그의 죽음은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2. 1. 생애 초기 (1894년 ~ 1925년)

조병옥은 1894년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현 천안시)에서 태어났다.[1] 1914년 미국으로 유학, 펜실베이니아주 킹스턴의 고등학교를 거쳐 뉴욕주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22년 학사 학위, 1925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미국 체류 중 서재필, 안창호 등과 교류했으며,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국인 연합회의와 한국인 자유대회에 참가했다.[1]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으나, 교육 방침 차이로 사직했다. 1927년 신간회 창립위원 겸 재정총무를 역임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한용운과 함께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2년간 복역했다. 조만식이 경영하는 조선일보 경영에도 관여했다.[1]

2. 1. 1. 출생과 가계

조병옥은 1894년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현 천안시)에서 독립운동가 조인원과 부인 남양 홍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7] 조병옥의 가문은 고려 중서첨의 조지수(趙之壽)의 아들 총관 조휘(趙暉)의 23대손으로, 임천 조씨 가문이다.[7] 그의 직계 선조인 조인옥(趙仁沃)은 조선 개국공신이었다.[7] 아버지 조인원은 의협심이 강해 불우한 사람들을 자주 도왔으며, 훗날 조병옥은 아버지가 학식이 있었다면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8]

조병옥은 어릴 때 잔병치레가 많았다. 독종기를 앓아 발에 심한 고름이 났을 때는 어머니 홍씨가 외과의사도 없던 시절, 아들을 업고 한의원을 찾아다니며 을 놓게 했다. 열병을 앓을 때도 어머니가 밤새워 간호했다고 한다.[10] 그럼에도 조병옥은 총명하여 어린 나이에 동몽선습을 40일 만에 독파하고 암송까지 했다.[11] 7세 때부터는 아버지 조인원이 괴산에서 초빙한 신(辛) 선생에게서 13세까지 가르침을 받았다.[12] 이후 한글을 10일 만에 깨우치고, 자치통감 8권, 소학,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전, 서전, 사서삼경 등 주역을 제외한 모든 경전을 독파했다. 강목 75권 중 26권도 읽었다.[12]

1919년 아버지 조인원은 3.1 만세 운동 당시 유관순과 함께 3월 24일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심장 부근에 관통상을 입었다. 조인원은 영국인 병원에서 치료받았으나 4년형을 선고받고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조병옥의 동생도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3년형을 받았다.[9] 조병옥은 미국에서 아버지와 동생의 구속 소식을 들었다.[10]

2. 1. 2. 학창 시절과 유학

1903년 조병옥은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하였다.[12] 영명학교는 5년제 소학교와 2년제 특별중학교가 있었는데, 조병옥은 특별 배려로 영명소학교 4학년 과정에 편입하였다. 공주로 유학하여 하숙하였으며 1908년 영명소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12] 영명중학교로 진학하여 2년 과정을 마치고 1910년 영명중학교를 졸업하였다.[12]

1910년 4년제 중학교인 숭실중학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여 1912년 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에는 연설과 토론 대회에도 출전하였다.[14] 숭실중학교 영어교사이자 수사학교사인 김규식 박사를 따랐다고 회고하였다.[16]

숭실중학교 시절 그에게 수사학과 논리학을 가르친 김규식


1914년 펜실베이니아주 킹스턴의 고등학교를 다닌 후 뉴욕주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22년 학사 학위를 받고 1925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1. 3. 3.1 운동 참여와 부친 투옥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미국에서 접한 조병옥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1] 고국에서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를 주도한 아버지 조인원과 동생이 체포, 투옥되었다는 소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2. 2. 독립운동과 정치 활동 (1925년 ~ 1948년)

1912년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이승만의 귀국에 영향을 받아 미국 유학을 동경, 신흥우, 김규식, 백상규 등 미국 유학파의 감화를 받아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조병옥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1912년 배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16]

배재학당 재학 당시 조병옥은 김규식 박사의 수사학(修辭學)을 가장 재미있게 청강했다고 회상했다. 김규식은 영어와 한문에 능통했으며, 수업 시간에 영시를 읊어주곤 했다. 조병옥은 김규식에게 많은 기대를 가졌으나, 그가 중간 노선을 걷는 것에 실망하기도 했다.[17]

1911년 6월 배재학교 교장이 베카 박사에서 신흥우로 바뀌면서, 신흥우 교장의 요청으로 조병옥은 학생 신분으로 시간강사직을 맡게 되었다. 어린 나이 때문에 학생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논어, 맹자 등을 유창하게 해석하여 더 이상 놀림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18]

배재학당 시간 강사 시절, 노병선(盧炳善)의 딸 노정면(盧禎冕)을 소개받았다.[18] 가톨릭 신자인 노정면은 당시 소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조병옥은 윤성열의 모친에게 부탁하여 노정면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몰래 그녀의 출근 모습을 지켜본 뒤 노병선 내외를 찾아가 청혼하여 승낙을 얻었다.[19]

1914년 배재학당 대학부를 마치고(졸업생 유무가 확실치 않아서), 미국 와이오밍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18년 와이오밍 대학 학사과정을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 대학원으로 진학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후, ‘임시정부 환영준비위원회’ 사무장을 역임하고,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했다. 미군정청 경무부장에 취임하여 대한민국 경찰의 창설에 관여하는 한편 당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좌익 세력의 진압에 힘썼다.

1948년 대통령 특사, UN 한국 대표를 역임했고,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에서는 내무부 장관으로 대구 사수의 선봉에 섰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의 의견 충돌이 있었고,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여[1] 반이승만 세력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2. 2. 1. 귀국 후 교육 및 독립운동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국인 연합회의와 한국인 자유대회에 참가했다.[1]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으나, 교육 방침의 차이로 사직했다.[1] 1925년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여 재정부장, 총무부장 등을 역임했다.[2]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한용운과 함께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1]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2년간 복역했다.[1] 또한 조만식이 경영하는 조선일보 등의 경영에도 관여했다.[1]

2. 2. 2. 언론 활동과 수양동우회 사건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한용운과 함께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1] 1932년 조선일보 인수 운동에 참여하여 전무 겸 영업국 국장을 역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2년간 복역했다.[1] 출옥 후에도 일제의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는 등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2. 3.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활동 (1948년 ~ 1960년)

미국 유학 시절 안창호의 사상에 감화받은 조병옥은 귀국 후 윤치호를 찾아뵌 뒤, 이광수와 함께 흥사단수양동우회의 국내 지부 결성을 추진했다.

1925년 신간회(新幹會) 창립위원으로 참여하여 재정부장·총무부장 등을 지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옹호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고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20] 그 뒤 도산 안창호가 지도하는 흥사단에서 활동하다가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석방되었으나 윤봉길 의거 관련자로 지목되어 투옥된 안창호의 석방과 보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이광수 등과 국내에 흥사단 지부를 결성하려 했으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실패하고 만다.

1929년 겨울, 광주학생운동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되었을 무렵


1945년 8월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준비위원회 사무장을 역임하고,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했다. 미군정청 경무부장에 취임하여 한국 경찰의 창설에 관여하는 한편 좌익 세력의 진압에 힘썼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3차 국제 연합 총회(1948년 12월 7일~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 장면(단장)을 비롯한 장기영, 김활란, 정일형 등과 함께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의 국제 연합 승인을 위한 홍보 활동을 펼쳤다.

1948년 12월, 파리 샤오궁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임시총회에서 총회 결과가 다가오자 초조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남궁염, 한사람 건너 모윤숙, 조병옥, 장면.


1948년 1월 14일, 유엔 한국 위원회(UN Commission on Korea)가 한국에 도착하자,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유엔 대표 환영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발표하였다.

1948년 4월,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여하려 할 때, 김규식을 방문하여 3시간 동안 면담하며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은 무익하며, 이는 결국 정치적 자살 행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43]

1948년 7월 22일, 이승만대한민국 국회의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조병옥은 이승만에게 문교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자신의 평판을 이유로 거절하고, 대신 미국 특사 파견을 요청했다.

1949년 제4차 국제 연합 총회에서는 한국 대표단 단장으로서, 장면과 함께 참석하였다.[44]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대한국민당신익희, 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1949년 3월 24일, 조병옥 특사는 딘 애치슨을 만난 후, 미국 기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가 절실하다고 강조하며, "우리는 한 명의 미국 군인도 요구하지 않는다. 전투가 필요하게 되면 우리 자신이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20만 명의 병력을 갖고 있는 북한 공산주의자들보다 모든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공산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물질적인 원조뿐이다."라고 말했다.[45]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무부 장관직에서 사임하면서 이승만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1] 이승만이 사건 조사를 방해하고 가해자들을 사면으로 석방한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또한 1953년 판문점에서의 휴전 회담 중 이승만의 일방적인 북한 전쟁 포로 석방 결정을 비판하며, 이것이 대한민국의 외교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1954년 이승만 정권과 결별하고, 범야 신당 창당 준비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하였다. 이때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하였다.

1955년부터 민주당 창당 준비 회의를 하였다. 1955년 민주당을 조직하여 최고위원이 되었고,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53] 1956년 3월 대선 직전 신익희의 급서로 당 대표최고위원직을 맡았다.[20]

1956년 7월 27일 자유당의 선거 방해와 금권 정치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석했고, 8월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윤보선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총 투표자 966명 중 484표를 얻어, 481표를 얻은 장면을 3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56] 같은 날 장면은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56] 1959년 말, 조병옥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등록을 마쳤으나,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1960년 미국 월터리드 육군의료센터에 입원하게 되었다.[54]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채 미국에서 사망하였다.[54] 그의 사망으로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으나,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2. 3. 1. 미군정 경무부장과 친일 경찰 등용 논란

1945년 광복 후, 미군정 하에서 경찰 국장에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효율성을 이유로 일제강점기 경찰 경력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민족문제연구소 등으로부터 친일 행위라는 비판을 받았다.[34][35]

1946년 10월 대구 10월 사태의 조속한 수습과 좌우합작파들을 입법위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군정청은 조미공동위원회를 구성했다. 조미공동회담은 10월 23일부터 12월 10일까지 총 27회의 회담을 개최하였으며, 총 회의시간 84시간 중 75시간이 경찰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34] 조병옥은 조미공동위원회에 출석하여 친일경찰 채용 원인을 진술하면서, 친일은 직업적인 친일과 가족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연명책으로서의 친일, 두 가지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4][35]

한편 조미공동위원회에 출석한 수사국장 최능진은 국립경찰이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축출된 부패한 경찰관들을 포함, 일본의 훈련을 받은 경찰과 반역자들의 피난처라며 반박 성명을 냈다.[34][36] 12월 2일 조병옥은 자신을 비방한 최능진에게 국립경찰의 협조와 명령 계통 확보에 유해하다는 이유로 사직을 요구하였다. 최능진은 사직 후 조병옥을 비난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34]

최능진은 공개 서한에서 조병옥은 민족운동가를 잡아주던 사람을 고관대작에 채용하고 순수한 독립운동가를 무경험자라고 배척한 사람이라 비판하고, 해방 전의 조병옥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장택상이 조병옥의 편을 들어 최능진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자, 최능진12월 13일 이에 답하는 성명을 냈다. 성명에서 일제 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민중 지휘자는 될 수 없으므로 간부급에서 이들을 제거하고 하부 진영에만 경찰 기술자들을 존치시켜 민주경찰진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조병옥은 끝내 자신과 의견이 대립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지금의 경찰은 친일 경찰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한탄하였다.[37][38] 1946년 11월 29일 조미공동위원회는 하지에게 경찰 개혁 방안을 제시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보고서에는 경찰에 대한 원한과 군정청 내 친일파 잔류 문제를 거론하면서 경무부장 조병옥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군정청은 조병옥의 파면 요구를 거부하였다.[37]

대구 10월 사태 직후 대구 폭동의 원인이 친일파 경찰 등용에 있다는 중간파들의 비판이 있은 후,[39] 조병옥은 일제시대 경찰관 실무 등용을 두고 군정청에서 비판 여론이 나오자 청문회에 참석한 군정청 고위 관료들과 그 가족, 측근들의 친일 전력을 비판하면서 김규식 아들의 일본군 복무 경력을 지적하였다. 조병옥은 김규식에게 '일제 때 상해에서 일본의 해군 스파이로 8년간 활약한 책임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40]'라며 아들의 일본 해군 복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였다.

김규식은 이에 대한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 경무부장 조병옥 박사는 내가 가르친 사람이요. 그리고 미국에 가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훌륭한 학자로서 지식이 풍부하고 인격과 덕망이 있는 사람이며 주마가편격(走馬加鞭格)으로 군정 행정에 있어서 더 잘 해달라고 부탁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더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40]'하고는 퇴장하였다고 한다. 결국 친일 경찰 채용 파문은 불문에 부쳐졌다. 그러나 조병옥과 중도파, 좌파와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2. 3. 2. 제주 4.3 사건 강경 진압

1948년 5월 5일, 윌리엄 F. 딘 미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등은 제주 4.3항쟁에 대한 비밀회의를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다.[69][70] 이 회의에서 조병옥은 4.3 사건을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을 주장했다.[69][70]

특히, 조병옥은 김익렬 9연대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며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김익렬이 무력 위압과 설득을 병행하는 진압 작전을 건의하자, 조병옥은 김익렬의 부친이 북한에서 공산당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그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69][70] 이에 격분한 김익렬은 조병옥에게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고,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끝났다.[69][70]

이러한 조병옥의 강경 진압 주장은 제주 4.3 사건 당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2. 3. 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병옥은 제3차 국제 연합 총회(1948년 12월 7일~ 12월 12일, 프랑스 파리)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의 국제 연합 승인을 위한 홍보 활동을 펼쳤다. 장면(단장), 장기영, 김활란, 정일형, 전규홍, 김우평, 김준구, 모윤숙 등이 대표단에 함께 참여했다.

1948년 1월 14일, 유엔 한국 위원회(UN Commission on Korea)가 한국에 도착하자, 조병옥은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유엔 대표 환영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발표하였다.

1948년 4월,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여하려 할 때, 조병옥은 김규식을 방문하여 3시간 동안 면담하며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은 무익하며, 이는 결국 정치적 자살 행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43]

1948년 7월 22일, 이승만대한민국 국회의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조병옥은 이승만에게 문교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자신의 평판을 이유로 거절하고, 대신 미국 특사 파견을 요청했다.

1949년 제4차 국제 연합 총회에서는 조병옥이 한국 대표단 단장으로서, 장면과 함께 참석하였다.[44]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대한국민당신익희, 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1949년 3월 24일, 조병옥 특사는 딘 애치슨을 만난 후, 미국 기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가 절실하다고 강조하며, "우리는 한 명의 미국 군인도 요구하지 않는다. 전투가 필요하게 되면 우리 자신이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20만 명의 병력을 갖고 있는 북한 공산주의자들보다 모든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공산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물질적인 원조뿐이다."라고 말했다.[45] 같은 달, 조병옥은 뉴욕타임스에 '만약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가 없다면 한국은 공산화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2. 3. 4. 이승만과의 갈등과 야당 활동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무부 장관직에서 사임하면서 이승만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1] 이승만이 사건 조사를 방해하고 가해자들을 사면으로 석방한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또한 1953년 판문점에서의 휴전 회담 중 이승만의 일방적인 북한 전쟁 포로 석방 결정을 비판하며, 이것이 대한민국의 외교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1953년 10월 민주국민당 대표 신익희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인도 뉴델리를 순방하던 중, 북조선의 조소앙을 만나 영세중립화 음모를 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조소앙은 월북해있던 상태였다.) 민주국민당 소속 함상훈의 성명서에 의해 공개되었고, 내무장관 백한성함상훈을 불러 의혹을 고한 사람을 추궁하였으나 함상훈은 의혹을 제보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못했다.[50] 그러나 조병옥은 함상훈의 의견에 동조하며 신익희를 의심하였다. 대한민국 국회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 신익희조소앙이 만났다는 구체적인 증거자료가 제시되지 못하자 결국 함상훈은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조병옥은 계속 신익희를 의심하였다.

1954년 3월 16일 조병옥은 신익희최두선을 제외한 민주국민당의 간부들을 소집했고, 신익희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였다. 민주국민당 내에서는 함상훈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조병옥 역시 신익희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자 아무도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54년 이승만 정권과 결별하고, 범야 신당 창당 준비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하였다. 이때 곽상훈, 김도연, 김준연,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하였다. 조봉암의 신당참여를 강하게 반대하였고, 장택상, 서상일, 박기출, 김성수 등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의 참여는 무산되었다.

1955년부터 곽상훈, 장면, 정일형 등과 대성빌딩에서 민주당 창당 준비 회의를 하였다. 1955년 민주당을 조직하여 최고위원이 되었고,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53] 1956년 3월 대선 직전 신익희의 급서로 당 대표최고위원직을 맡았다.[20]

1956년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구파의 신익희, 부통령 후보로 신파의 장면이 낙점되었다. 민주당 구파의 반발이 있었으나, 구파인 조병옥이 같은 구파인 김도연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장면은 무난히 부통령 후보로 낙점될 수 있었다.

1956년 7월 27일 자유당의 선거 방해와 금권 정치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석했고, 8월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윤보선, 김도연, 현석호, 양일동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서울 성동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0] 당시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조병옥은 신익희, 유진산, 김도연, 윤보선, 김영삼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에서 활동했고 구파의 리더였다.[54]

1957년 장택상의 초대를 받고, 장택상경기도 시흥 별장에서 이기붕과 여야 영수회담을 하였다.

2. 3. 5.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사망

1955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고, 1956년 신익희의 급서로 당 대표최고위원직을 맡았다.[20]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신익희가 대통령 후보로, 장면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조병옥은 민주당 구파였지만, 같은 구파인 김도연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 장면이 무난히 부통령 후보로 낙점되는데 기여했다.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총 투표자 966명 중 484표를 얻어, 481표를 얻은 장면을 3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56] 같은 날 장면은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56] 1959년 말, 조병옥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등록을 마쳤으나,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1960년 미국 월터리드 육군의료센터에 입원하게 되었다.[54]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채 미국에서 사망하였다.[54] 그의 사망으로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으나,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 평가

조병옥은 해방 이후 정부 수립과 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친일 경찰 등용, 제주 4·3 사건 강경 진압, 독선적인 성격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거리낌없이 말하고 행동했으며, 남에게 굽히거나 아첨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또한 노련한 협상가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41]

그러나 미군정 경무부장 재직 시절, 대구 10월 사태 이후 친일파 경찰 등용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김규식의 아들이 일본군에 복무한 경력을 언급하며 반박하는 등 논란을 일으켰다.[39][40] 1947년 5월에는 장택상과 함께 여운형, 김규식, 허헌 등 미소공위 관련자 암살 계획을 보고하기도 했다.[42]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조소앙에게 크게 패하고 낙선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을 동원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47] 좌파 및 중도파 세력은 그를 "미군정의 앞잡이"라고 비난했고, 민주당 신파와 자유당은 "주색풍류객"이라며 공격했다.

특히 미군정 경무부장 시절 친일 경찰을 등용한 것은 민족 정기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는다.[61][62][63] 제주 4·3 사건 당시 경찰 지휘와 과잉 진압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초래한 점은 그의 가장 큰 과오 중 하나로 지적받는다.[1]

2003년 김희선이 조병옥을 친일파라고 비난했다가, 조병옥기념사업회가 반박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64][65][66] 2005년에는 강정구 교수가 조병옥을 친일파 후예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하여 논란이 되었다.[67]

그의 강직한 성격은 때로는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으로 비춰져 이승만과의 갈등, 민주당 내 신파와의 권력 투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3. 1. 긍정적 평가

해방 이후 정부 수립에 대한 공로와 내분 수습, 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바를 거리낌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성격이었다. 또한 남에게 굽히거나 아첨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노련한 협상가로 능력을 발휘하였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41]

3. 2. 부정적 평가

미군정 경무부장 재직 시, 대구 10월 사태 직후 대구 폭동의 원인이 친일파 경찰 등용에 있다는 비판[39]이 제기되자, 조병옥은 청문회에 참석한 군정청 고위 관료들과 그 가족 측근들의 친일 전력을 비판하면서 김규식의 아들이 일본군에 복무한 경력을 지적하며 반박하였다. 조병옥은 김규식에게 '일제 때 상해에서 일본의 해군 스파이로 8년간 활약한 책임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40]'라며 아들의 일본 해군 복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였다.

이에 김규식은 '조병옥 박사는 내가 가르친 사람이요. 그리고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훌륭한 학자로서 지식이 풍부하고 인격과 덕망이 있는 사람이며 주마가편격(走馬加鞭格)으로 군정 행정에 있어서 더 잘 해달라고 부탁할 따름입니다.[40]' 하고는 퇴장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친일 경찰 채용 파문은 불문에 부쳐졌으나, 조병옥과 중도파, 좌파와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1947년 5월 장택상과 함께 우익 진영의 미소공위 관련자 암살 계획을 보고했는데, 암살 대상자로는 여운형, 김규식, 허헌 등이 거론되었다.[42] 조병옥은 김석황임정 계열이 자신과 장택상의 암살 계획도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42]

1949년 김규식, 신익희, 안재홍, 윤치영, 조소앙 등을 중심으로 민족진영강화추진위원회가 추진되자 그는 잡동사니가 모인 이해단체라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1950년 5월 3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성북구에 출마하여 조소앙과 맞붙었으나, 경찰을 동원하여 조소앙 측 선거운동원 83명을 경찰서에 구금하고,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 것이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라는 등[47] 근거 없는 허위사실을 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소앙에게 크게 패하고 낙선했다.

좌파 및 중도파 세력으로부터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민주당 신파와 자유당으로부터는 "주색풍류객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격을 받았다.

3. 2. 1. 친일 경찰 등용

미군정 경무부장 시절 조병옥이 친일 경찰을 등용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다. 조병옥은 해방 후 장택상과 더불어 친일경찰들을 재등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61][62][63] 이는 당시 행정력의 효율성을 우선시한 결과였지만, 민족 정기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최능진은 이 점을 들어 조병옥을 비판하기도 했다.

2003년 12월, 김희선이 조병옥을 친일파라고 비난했다가 파문이 일었다.[64] 조병옥기념사업회는 사과를 요구하며[64]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배후조종 혐의로 옥중에 수감된 사진을 공개하며 반박했다.[65][66] 이 사태는 김희선의 사과로 종결되었다.[66]

2000년 8월, 소설가 복거일은 ‘친일파 단죄’의 단순논리의 위험성을 주장하며, 객관적인 사실과 역사학계의 연구 및 평가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6] 2001년 3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여부를 평가하는 엄격한 기준을 마련한 후 공청회 등을 거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계획"이라 하였고, 조병옥에 대해서는 “‘친일파’ 여부에 대한 단정적 평가를 내리기는 이르다"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66]

2005년 9월 30일, 동국대학교 교수 강정구는 친일파 후예의 대표적인 사례로 조병옥을 언급했다.[67] 이에 조병옥의 아들 조순형은 강정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발표했다.[67]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친일파 분류 기준으로 자발성과 적극성, 반복·지속성 여부를 참조한다는 원칙을 밝혔다.[68] 조병옥의 경우 임전대책협의회에 1차례 참여해 강연했다는 의혹을 받는데, 이러한 의혹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제기되는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도 있다.

3. 2. 2. 제주 4.3 사건 강경 진압

趙炳玉중국어은 미군정 당시 친일파 경찰을 채용한 점 때문에 최능진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1] 제주 4·3 사건 당시 경찰 지휘와 과잉 진압에 관련된 책임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초래하여, 그의 정치 역정에서 가장 큰 과오 중 하나로 지적받고 있다.[1]

3. 2. 3. 독선적인 성격과 권위주의

조병옥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때로는 이것이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했다.[39][40][41] 이러한 성격은 이승만과의 갈등, 민주당 내 신파와의 권력 투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대구 10월 사태 직후, 조병옥은 대구 폭동의 원인이 친일파 경찰 등용에 있다는 비판에 대해[39] 군정청 고위 관료들과 그 가족들의 친일 전력을 폭로하며 반박했다. 특히 김규식에게는 그의 아들이 일본 해군에서 복무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일제 때 상해에서 일본의 해군 스파이로 8년간 활약한 책임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라고 공격했다.[40]

이에 김규식은 조병옥이 자신의 제자였고, 학식과 인격을 존경하지만, 그의 정치적 노선이 모호하며, 자신의 아들에 대한 의혹 제기는 부당하다는 취지로 반박했다.[40] 결국 친일 경찰 채용 문제는 불문에 부쳐졌지만, 조병옥과 중도파, 좌파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1947년 5월에는 장택상과 함께 우익 진영의 미소공위 관련자 암살 계획을 보고했는데, 암살 대상자로는 여운형, 김규식, 허헌 등이 거론되었다.[42] 또한 조병옥은 김석황임정 계열이 자신과 장택상의 암살 계획도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42]

4.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조인원(趙仁元)1864년 5월 2일 - 1931년 2월 11일독립운동가[1]
어머니남양 홍씨(南陽洪氏)1861년 - 1922년 11월 11일
부인노정면(盧禎冕)1896년 4월 28일 - 1976년 12월 3일좌승지 광주 노씨 노병선(盧炳善)의 딸, 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아들조준형(趙準衡)1921년 3월 22일 ~ 1992년 4월 7일
조숙형(趙淑衡)1922년 ~ ?아명 조문례
조자형(趙子衡)? ~ 1973년 3월 15일
아들조윤형(趙尹衡)1932년 11월 26일 ~ 1996년 2월 2일국회의원[4]
아들조순형(趙舜衡)1935년 3월 10일 ~국회의원[4]
며느리김금지
동생조병호(趙炳鎬)1899년 ~ 1973년 3월 3일독립운동가


참조

[1] 웹사이트 조병옥(趙炳玉) https://encykorea.ak[...] 2023-08-15
[2]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3-13
[3] 뉴스 [維石(유석)]의 辯(변) https://newslibrary.[...] 2023-09-30
[4] 웹사이트 '아버지'에게 길을 묻다…2세 정치인의 '꿈' http://www.sisaon.co[...] 2022-06-22
[5] 문서 수술 후유증
[6] 웹사이트 조병옥:지식백과 https://terms.naver.[...]
[7]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8]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9]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0]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1]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2]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3]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4]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5]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6]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7]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8]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9]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20] 웹사이트 iMBC.com, More Click Better Life! http://www.imbc.com/[...]
[21]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22]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23]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24]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25] 서적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비의책 15) 역사비평사 2006
[26] 서적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비의책 15) 역사비평사 2006
[27] 서적 상록의 자유혼:창랑 장택상 일대기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2
[28]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29]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30]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4
[31] 서적 국가보안법연구 2(법과사회 4) 역사비평사 2008
[3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33]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34]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4
[35] 서적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고문에 의한 인간파멸과정의 실증적 연구 한길사 1987
[36] 서적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3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4
[38] 서적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고문에 의한 인간파멸과정의 실증적 연구 한길사 1987
[39]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40]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41]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42] 서적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6
[43]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44] 뉴스 歷代유엔總會韓國代表團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2-08-08
[45] 뉴스 秘錄 韓國外交<32> : 政府樹立 직후⑭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75-03-26
[46] 뉴스 서울신문 1948년 8월 11일자 기사 서울신문 1948-08-11
[47] 서적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48] 서적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0
[49] 백과사전 조병옥 http://enc.daum.net/[...]
[50] 서적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길사 2006
[51] 서적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6
[52] 서적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6
[53] 서적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4
[54] 서적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6
[55] 서적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6
[56] 서적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6
[57] 뉴스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8-08-22
[58] 서적 야당40년사 인간사 1987
[58] 서적 군과 나: 백선엽 회고록 대륙연구소 출판부 1989
[59]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60]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61] 뉴스 "조순형대표 선친은 친일인사" 파문 http://economy.hanko[...] 한국일보 2008-09-25
[62] 뉴스 우리당 김희선 "조병옥 친일파"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8-09-25
[63] 뉴스 "趙대표 선친 명예훼손 김희선의원 사퇴하라"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64] 뉴스 “조병옥박사 욕보인 김희선의원 사퇴를”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8-09-25
[65] 뉴스 조병옥 기념사업회 親日반박 사진제출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08-09-25
[66] 뉴스 역사평가 삐거덕대는 조병옥 http://herstory.hani[...] 한겨레신문 2003-12-22
[67] 뉴스 조순형 “부친 조병옥박사 친일파 매도… 姜교수 고소”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5-10-17
[68] 웹사이트 친일 명단 공개, 실사구시적으로 보자 http://www.sisapress[...] 2011-04-28
[69] 기고 국제신문 1948-08-06, 1948-08-07, 1948-08-08
[70] 문서 김익렬 유고 1988-12
[71] 서적 청소년을 위한 우리 역사 바로 보기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72]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73] 서적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