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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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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는 1960년 8월 12일, 4·19 혁명 이후 개헌으로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정부 형태가 바뀐 뒤 치러진 선거이다. 민주당 내 구파와 신파의 갈등으로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여, 구파는 윤보선-김도연을, 신파는 윤보선-장면을 각각 대통령 및 국무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선거 결과 윤보선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김도연 국무총리 지명은 부결되고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면서 신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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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선거 정보
국가대한민국
국기 연도1949
선거 유형대통령
이전 선거1960년 3월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60년 3월
다음 선거1963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다음 선거 연도1963년
선거일1960년 8월 12일
후보 정보
후보 1
후보 1 이름윤보선
후보 1 정당민주당
후보 1 득표수205
후보 1 득표율82%
후보 2
후보 2 이름김창숙
후보 2 정당무소속
후보 2 득표수29
후보 2 득표율11.6%
대통령 정보
선거 전 대통령백낙준 (권한대행)
선거 전 대통령 정당무소속
선거 후 대통령윤보선
선거 후 대통령 정당민주당
선거인단재적 국회의원 수 263명
(참의원의원 43명, 민의원의원 220명)
당선을 위해 176표 필요
필요한 득표수176
투표수263

2. 배경

1955년 민주국민당과 이승만 정권 반대 세력들이 합쳐져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민주당은 1960년 7월 총선에서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며 대통령 선거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민주국민당 출신 의원들과 다른 그룹 출신 의원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겨 당내 대통령 후보를 한 명으로 정하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1960년 8월 4일 민주국민당 계열이 새로운 당을 만들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힐 정도로 심각했다.[2]

결국 민주당의 두 파벌은 각각 다른 대통령 후보를 내세웠다. 민주국민당 계열이 아닌 의원들은 1960년 8월 11일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같은 날 저녁, 민주국민당 계열 의원들은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 김도연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2. 1. 권력 구조의 변화와 헌법 개정

대한민국은 본디 국민들이 직접 선거한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나, 4·19 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대통령의 지위와 선거방법도 달라지게 되었다.

대통령은 양원합동회의에서 선거하고 재적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하며, 1차 투표에서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2차 투표를 행하고, 2차 투표에서도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투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과는 달리 대통령에게는 실권이 없었으며, 실질적인 정부의 수반인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재적 민의원의원 과반수의 동의를 얻도록 하였다.

2. 2. 민주당의 분열과 계파 갈등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갈등은 날로 심화되고 있었다. 구파는 당권을 쥐고 있던 신파가 불공정 공천을 했다며 총선 전부터 분당 의사를 내비쳤으며, 총선 후에도 양 계파는 낙천 후 무소속으로 당선된 의원들의 복당 문제, 양원 의장단의 선출 등 중요한 사안마다 충돌하고 있었다.[3]

구파는 7·29 총선거 직후인 8월 4일 성명을 내고 분당 및 신당 창당을 선언했으며, 양 계파는 당선자 대회도 따로 여는 등 사실상 다른 당처럼 행동하고 있었다.[3]

곽상훈 민의원의장을 비롯한 중도파는 분당을 막기 위해 8월 10일 각각 구파와 신파의 리더 격인 윤보선 최고위원과 장면 대표최고위원을 불러 3자 회담을 여는 등 양 계파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두 계파는 합의를 보는 데 실패했다. 이로써 민주당이 단일 대통령 및 총리 후보를 내는 것은 무산되었다.[4]

1955년 민주국민당과 이승만 정권 반대 세력들의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당은 1960년 7월 총선에서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획득하며 대통령 선거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붕괴 후 민주국민당 출신 의원들과 다른 그룹 출신 의원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다. 그 결과, 당내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이러한 분열은 8월 4일 민주국민당 계열이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할 정도로 심각했다.[2]

결과적으로 민주당 두 파벌은 각기 다른 대통령 후보를 지명했다. 비(非)민주국민당 계열 지도부는 8월 11일 오전 회동하여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같은 날 저녁, 민주국민당 계열 지도부는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 김도연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2. 3. 집권 전략과 계파 안배

민주당은 1960년 7월 총선에서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획득하며 대통령 선거 승리를 확신했다.[2] 그러나 이승만 정권 붕괴 후, 민주당은 구 민주국민당 출신 의원들과 다른 그룹 출신 의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당내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2]

구파는 대통령과 총리를 모두 구파에서 차지하고자 했으나, 신파는 대통령은 구파가 맡고 총리는 신파가 맡는 계파 안배 선출을 주장했다.[5] 신파가 대통령직을 구파에 양보한 것은 장면 민주당 대표 외에 마땅한 대통령 후보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탈당을 준비 중이던 구파를 달래 분당을 막으려는 의도였다.[5] 곽상훈 민의원의장 등 중도파 의원들은 신파 측 안에 찬성했으나, 구파는 완강히 거부했다.[5]

신파는 의원 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에 대통령과 총리 후보를 의원총회나 상무위원회 등 당내 공식 기구를 통해 선출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파는 이미 탈당을 결심한 상태였으므로, 양 계파 간 합의가 불가능하여 시간 낭비만 될 것이라며 거부했다.[5] 결국 신파는 8월 12일 아침 의원총회를 통해 대통령 및 총리 후보를 지명하는 절차를 밟았다.

8월 11일, 신파 지도부는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반면, 구파 지도부는 같은 날 저녁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 김도연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2]

3. 후보

민주당 구파에서는 김도연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과 윤보선 민주당 최고위원이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6] 당초 김도연 의장을 대통령, 윤보선 최고위원을 국무총리에 추대하는 안이 유력했으나, 김도연 의장이 총리직에 강력한 의지를 보여 양측 지지자들 간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결국 윤보선 최고위원이 총리직을 김도연 의장에게 양보하여 합의가 성사되었고, 구파를 이끌고 있던 23인 위원회는 8월 11일 저녁 회합을 갖고 윤보선 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 김도연 의장을 국무총리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민주당 구파 제4대 대통령·제7대 국무총리 후보
대통령 후보
윤보선
국무총리 후보
김도연
160x160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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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상공부 장관, 제2대 서울특별시장, 제3·4·5대 민의원의원제4대 후반기 민의원부의장, 초대 재무부 장관, 제1·3·4·5대 민의원의원



같은 날, 신파를 이끌던 13인위원회는 윤보선 민주당 최고위원을 대통령으로, 장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을 국무총리로 밀기로 결정했으며, 다음 날인 12일 아침 의원총회를 통해 두 사람을 공식 지명하였다. 곽상훈 민의원의장을 비롯한 12명의 민주당 내 중도파 의원들도 11일 회합에서 신파의 윤보선 대통령·장면 총리 안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7]

민주당 신파
제4대 대통령·제7대 국무총리 후보
대통령 후보
윤보선
국무총리 후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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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상공부 장관, 제2대 서울특별시장, 제3·4·5대 민의원의원제4대 부통령, 제2대 국무총리, 제1·5대 민의원의원, 초대 주미 대사



무소속 민의원 의원 40여 명이 구성한 교섭단체인 민정구락부는 김병로대법원장, 변영태국무총리, 백낙준 참의원의장, 허정대통령 권한대행 등 제3인사 중 한 명을 지지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11일 저녁과 12일 아침 연달아 열린 모임에서 오랜 시간 토론과 여러 차례의 표결 끝에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자유 투표를 하였다.[8]

무소속 참의원 의원들로 구성된 삼우구락부 역시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해 자유 투표 혹은 백지 투표를 하기로 했다.[8]

한편 순수 무소속 민의원 의원들은 일당 독재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의 후보 외의 후보를 내야 한다며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로 합의했다.[8] 이외에 몇몇 사회대중당 의원들 역시 김창숙을 지지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8]

3. 1. 민주당 구파: 윤보선-김도연

민주당 구파에서는 김도연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과 윤보선 민주당 최고위원이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6] 당초 김도연 의장을 대통령, 윤보선 최고위원을 국무총리에 추대하는 안이 유력했으나, 김도연 의장이 총리직에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 양측 지지자들 간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결국 윤보선 최고위원이 총리직을 김도연 의장에게 양보하여 합의가 성사되었고, 구파를 이끌고 있던 23인 위원회는 8월 11일 저녁 회합을 갖고 윤보선 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 김도연 의장을 국무총리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민주당 구파 제4대 대통령·제7대 국무총리 후보
대통령 후보
윤보선
국무총리 후보
김도연
제2대 상공부 장관
제2대 서울특별시장
제3·4·5대 민의원의원
제4대 후반기 민의원부의장
초대 재무부 장관
제1·3·4·5대 민의원의원


3. 2. 민주당 신파: 윤보선-장면

신파를 이끌던 13인위원회는 같은 날 오전 윤보선 민주당 최고위원을 대통령으로, 장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을 국무총리로 밀기로 결정했으며, 다음 날인 12일 아침 의원총회를 통해 두 사람을 공식 지명하였다. 곽상훈 민의원의장을 비롯한 12명의 민주당 내 중도파 의원들도 11일 회합에서 신파의 윤보선 대통령·장면 총리 안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7]

민주당 신파
제4대 대통령·제7대 국무총리 후보
대통령 후보
윤보선
국무총리 후보
장면
제2대 상공부 장관
제2대 서울특별시장
제3·4·5대 민의원의원
제4대 부통령
제2대 국무총리
제1·5대 민의원의원
초대 주미 대사


3. 3. 기타 세력

무소속 민의원 의원 40여 명이 구성한 교섭단체인 민정구락부는 김병로대법원장, 변영태국무총리, 백낙준 참의원의장, 허정대통령 권한대행 등 제3인사 중 한 명을 지지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11일 저녁과 12일 아침 연달아 열린 모임에서 오랜 시간 토론과 여러 차례의 표결 끝에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자유 투표를 하였다.[8]

무소속 참의원 의원들로 구성된 삼우구락부 역시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해 자유 투표 혹은 백지 투표를 하기로 했다.[8]

한편 순수 무소속 민의원 의원들은 일당 독재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의 후보 외의 후보를 내야 한다며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로 합의했다.[8] 이외에 몇몇 사회대중당 의원들 역시 김창숙을 지지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8]

4. 결과

대통령으로 당선되려면 재적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득표가 필요했다. 당시 국회의원은 263명(하원 220명, 상원 43명)이었으므로, 당선에는 최소 176표가 필요했다.[1]

윤보선은 민주당 양파의 지지를 받아 208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한편, 일부 무소속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받은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29표를 얻었다.[1]

4. 1. 대통령 선거

1960년 8월 12일 참의원의원 43명과 민의원의원 220명의 양원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1차 투표에서 208표로 무난히 당선되었다.[8] 이 날 투표에는 한근조, 서상일, 그리고 구속 수감 중이던 이재학, 최하영 등 4명의 민의원의원을 제외하고 거의 재적 국회의원 전원이 참여했다.[9]

당시 국회의원은 263명(하원 220명, 상원 43명)이었으므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려면 3분의 2 이상인 최소 176표가 필요했다. 윤보선은 민주당 양파의 지지를 받아 208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출마도 하지 않은 김창숙 전 의정원부의장이 29표를 받게 돼, 무소속 의원들의 결속력이 주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무소속 의원들은 국회 내 캐스팅보터로 떠올랐으며, 이어진 구파와 신파의 국무총리 인준 대결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후보정당득표수득표율
윤보선민주당20882%
김창숙무소속2911.6%
백낙준무소속32%
변영태무소속31.2%
허정무소속20.8%
합계24597.6%
무효표52.4%


4. 2. 국무총리 선출

의원내각제 정부에서 실질적 권력을 갖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되 민의원 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받아야 했다.

4. 2. 1. 1차 지명: 김도연

1960년 8월 16일, 윤보선 대통령은 김도연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는 신파와 무소속 의원들의 반대로 인해 인준되지 못했다.[10] 특히 표결 전에 김도연 의장이 민정구락부 및 순수 무소속 의원들이 요구한 원내 소수파 권한 적극 보장, 무소속 입각 등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 결정적인 패착으로 평가되었다.[10]

국무총리 김도연 인준 동의안
국회 무기명 표결 결과 (1960. 8. 17)
투표표수%비고
11148.9부결
11249.3
무효10.4
불참31.3
재적227
필요114


4. 2. 2. 2차 지명: 장면

헌법은 대통령이 총리 인준 부결 후 5일 동안 새 총리 후보를 지명하지 않을 시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총리를 선거하도록 규정했는데, 구파에서는 한때 이 조항대로 5일을 기다렸다가 신파와 국회에서의 표 대결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정국의 불안정을 방치할 수 없다며 8월 18일 장면 민주당 대표를 총리로 지명하였고, 구파와 일부 무소속 의원들의 반대 속에서도 이는 통과되었다. 국민적 인기가 높던 장면 박사는 신파는 물론 무소속 의원들의 일부와 소수의 구파 내 온건 성향 의원들에게까지 지지를 받은 것으로 분석됐다.[1]

국무총리 장면 인준 동의안
국회 무기명 표결 결과 (1960. 8. 19)
투표표수%비고
11751.3가결
10746.9
무효10.4
불참31.3
재적228
필요115



결국 장면 총리 지명 동의안을 부결시키고 신파와의 실력 대결을 통해 김도연을 선출하려던 구파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으며, 신파는 수년 간의 야당 생활을 청산하고 공식적으로 집권에 성공했다.[1]

참조

[1] 간행물 The Voice of Korea, Vols. 16–19 Korea Affairs Institute
[2]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https://books.google[...] 인물과사상사 2004-09-23
[3]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https://books.google[...] 인물과사상사 2004-09-23
[4]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5
[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5
[6] 웹인용 초대 조각 문제 표면화 - 민주당, 투표일 사일 앞두고 https://newslibrary.[...] 2019-06-04
[7]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5
[8]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5
[9]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04
[10]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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