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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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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현석은 대건황의 손자이자 대야발의 7대손으로, 871년에 발해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일본과의 교역을 추진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강화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으며, 여러 차례 사절단을 파견하여 교역 확대를 시도했다. 대현석은 894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치세 동안 발해는 당나라 및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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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대현석
한자 표기大玄錫
로마자 표기Dae Hyeonseok
즉위 기간871년 - 895년
시대발해
묘호없음
시호없음
대현석
생년불명
몰년건녕 2년 (895년)
능묘불명
가계
부왕불명
모후불명
왕후불명
자녀불명
재위
즉위871년
퇴위894년
전임자대건황
후임자대위해

2. 치세

대현석은 대건황의 손자이자 대중상의 아들 대야발의 7대손이다.[9] 형제자매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871년 대건황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연호는 알려져 있지 않다.

894년 사망했다. 《신당서》에 따르면 그의 대까지 당나라에 사절을 보내 교류했다고 한다. 정약용은 《발해속고》에서 대현석이 50년간 재위했다고 주장했으나, 신뢰하기는 어렵다. 또한 대인선과의 사이에 몇몇 왕의 이름이 누락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는 청나라 학자 김육불에 의해 실체로 확인되었다.

2. 1. 당과의 관계

대현석은 당나라와 활발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당 의종(재위: 859년 - 873년) 재위 기간 동안 세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강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9] 그러나 대현석 즉위 직후 당 의종은 사망했다.

871년에는 정당성공목관(政堂省孔目官) 양성규(楊成規) 등 105인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고,[5] 876년 12월에는 양성규, 양중원(揚中遠) 등을 비롯한 105인의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6] 이들은 877년 1월 16일에 일본에 도착했으며 그해 귀국했다. 882년에는 배정(裵挺) 등 105명을 사절단으로 보냈다.[7]

2. 2. 일본과의 관계

871년 정당성 공목관(孔目官) 양성규(楊成規) 등 105인의 사신을 교역 목적으로 일본에 파견했으나, 일본에 기침 전염병이 있어 지연되다가 872년 5월 그가 보낸 예물을 전달하고 일본 왕은 양성규에게 종3위 훈위를 수여하는 형식적인 답례 후 귀환했다. 이후 일시적으로 일본과 사무역이 성사됐다.[9]

876년 12월에는 일본과의 교역 확대를 위해 정당성 공목관 양성규, 양중원(揚中遠) 등을 비롯한 105인의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6] 이들은 877년 1월 16일에 일본에 도착했으며 그해 귀국했다. 882년에는 배정(裵挺) 등 105명을 사절단으로 보냈다.[7] 892년 그가 파견한 발해 사신과 일본 외교관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 서신이 《菅家文草》에 일부 수록되었다.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원왕재위 857년~872년
대씨미상
아들대위해
손자대인선



대현석의 즉위 연도는 비교적 확실하지만, 사망 연도(또는 퇴위 연도)와 대위해, 대인선과의 혈연관계는 불분명하다.

4. 평가 및 의의

대현석은 적극적인 대외 관계를 통해 발해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일본과의 외교 관계 강화는 당시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 발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전략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여 재위 기간, 업적, 후대 왕과의 관계 등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4][5][6][7]

5. 기타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대현석을 대건황의 아들로 보았으나, 정약용은 《발해속고》에서 연월과 세계가 전하지 않는다며 후대 인물로 추정했다.[9] 정약용은 《발해속고》에서 대현석의 재위 기간을 50년으로 추정했으나, 이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확실하지 않다.

참조

[1] 문서 Balhaego
[2] 문서 New Book of Tang
[3] 서적 桓檀古記
[4] 서적 新唐書
[5] 서적 日本三代実録
[6] 서적 日本三代実録
[7] 서적 日本三代実録
[8] 서적 김육불의 동북통사, 하 동북아역사재단 2007
[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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