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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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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인선은 발해의 제14대 왕으로, 경왕 대현석의 손자이자 대위해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 중 당나라의 쇠퇴, 거란의 독립과 영토 확장, 신라의 혼란 등 국제 정세가 급변했다. 거란의 침략으로 발해가 멸망하면서 항복한 대인선은 거란의 수도로 연행되어 '오로고'라는 이름과 함께 유폐되었다. 발해 멸망 이후, 대인선은 거란에 항복했으나, 그의 아들 대광현은 고려로 망명하여 발해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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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대인선
원래 이름 (한자)大諲譔
원래 이름 (한글)대인선
다른 이름우르구(烏魯古)
통치 정보
즉위906년?
퇴위926년
칭호가독부
대수제15대
왕조발해(渤海)
생애 정보
출생미상
사망미상
아버지대위해(大瑋瑎)
어머니미상
배우자아리지(阿里只)
자녀대소순(大昭順)
대광찬(大光贊)
대우모(大禹謨)
대광현(大光顯)
기타 정보
인선(諲譔)
시호미상
묘호미상
능묘미상
가문대씨
연호미상

2. 생애

대인선은 발해 경왕 대현석(大玄錫)의 손자이자 대위해의 아들로, 발해 제14대 왕 대위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8]

대인선은 재위 기간 동안 후량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문헌 기록은 부족하지만, 주황후량을 건국한 이후 개평 원년 (907년)에 왕자 대소순을 파견하여 입조하게 했으며, 재위 중에 총 6차례의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발해는 서쪽에서 성장하는 거란의 세력에 맞서 군사적, 외교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정명 4년 (918년)에는 후량에 진공했지만, 오대 십국 시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주변 국가들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결국 신라와 신흥 고려, 일본 등과 협력하는 방침을 세웠으나, 신라가 거란과 통하면서 발해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8]

발해 부흥 운동은 20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며, 발해 유민들은 정안국, 대발해국, 흥료국 등의 나라를 세웠지만 모두 거란에게 멸망당했다.[8]

2. 1. 재위 기간

당나라황소의 난으로 국력이 쇠퇴했다. 이때 주전충당 애제를 쫓아내고 황제에 등극하여, 후량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한편, 신라에서도 지방 호족들과 농민 반란군의 봉기가 거세졌다.[8]

거란족은 7세기 전·후반에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당나라의 거듭된 혼란을 틈타 독립을 선포했다. 그들은 추장 야율아보기를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8]

923년 거란이 요양의 옛 성을 수리하고 발해 백성들을 붙잡아갔다. 924년에는 발해가 군사를 일으켜 요주(遼州)를 공격하였다. 공방전 끝에 요주자사 장수실이 전사하고, 발해군이 거란 백성들을 붙잡아 개선했다.[8]

925년 9월, 장군 신덕이 무리 500여 명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같은 해 12월,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어전회의에서 “서쪽은 제거했으나 동쪽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하였다. 곧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발해를 침공한다. 12월, 거란군이 발해의 살갈산에 진출하였다. 같은 달 고령에 이르렀으며, 이 날 밤 부여부가 포위되었다.[8]

926년 정월, 하늘에서 흰 기운이 일어나 태양을 관통하였다. 흰색은 서쪽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발해 서쪽에서 일어난 거란이 격파함을 암시하는 징조였다. 이듬해 1월, 마침내 부여성이 함락되었다. 부여성 성주가 분전 끝에 전사하였다. 처절한 공성전 와중에 야율아보기가 발해군이 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같은 날 거란군은 발해 동평부에 진출하였으며, 하루 만에 동평부가 함락되었다.[8]

이를 기점으로 거란 본토에서 병력이 대규모로 증파, 발해 침략에 참전한 거란군은 약 22만을 헤아렸다.[8]

1월, 발해의 재상이 이끄는 발해군이 황성(皇城) 인근에서 거란 군대와 교전하였다. 발해의 대규모 정예병력과 거란군의 첫 회전이었다. 하루 낮 밤의 싸움 끝에 발해군이 완파되고, 재상은 거란에 항복하였다. 이날 밤 황성이 포위되었다. 농성 끝에 결국 1월, 발해왕 대인선이 항복 의사를 내비쳤다.[8]

1월, 임금이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은 뒤 양을 끌고서 신하 3백여 명과 함께 나와 거란 진중으로 가 항복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이들을 예우한 뒤에 돌려보냈다. 같은 달, 야율아보기는 발해 군대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거란의 대신인 강말달 등 13명이 성 안에 들어가 성 내의 무기들을 수색하였는데, 그 태도가 매우 오만하고 무례했다. 격분한 발해의 순라군이 이들을 도륙하였다.[8]

1월, 임금이 성문을 굳게 닫고 다시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 하루 만에 거란 군대가 성첩을 넘어 황성을 함락시켰다. 야율아보기가 말을 탄 채 왕궁에 들어섰는데, 임금이 야율아보기의 말 앞에서 꿇어앉아 죄를 청했다. 거란이 왕족들을 포박하여 성 밖으로 끌고 나왔다.[8]

고려사에 의하면 야율아보기는 그가 있던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였다. 대인선이 패배하여 항복하기를 청함으로 드디어 발해는 멸망하였다. 이에 그 나라 사람들 중 다투어 오는 자들이 계속 이어졌다 한다. 일설에는 그가 체포된 곳이 부여성(扶餘城)이라는 설도 있다.[8]

2월, 거란이 발해를 동거란(東丹國, 동란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 상경의 이름을 천복성(天福城)으로 바꾸었다. 곧이어 거란 태자 야율배를 왕으로 봉하여 발해의 옛 땅을 통치하게 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임황(臨潢) 서쪽에 성을 쌓아 발해 최후의 임금 대인선을 유폐시켰다. 대인선에게는 오로고, 왕후에게는 아리지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오로고와 아리지는 야율아보기와 그 황후가 발해의 항복을 받을 때에 탔던 두 마리의 말 이름이다.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8]

한편, 발해의 태자 대광현926년 정월에 고려로 망명하였다.[8]

발해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은 20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후일에 발해 유민들은 정안국, 대발해국, 흥료국 등의 나라를 세우지만, 모두 거란에게 멸망당했다.[8]

2. 2. 발해의 멸망

923년 거란이 요양의 옛 성을 수리하고 발해 백성들을 붙잡아갔다. 924년에는 발해가 군사를 일으켜 요주(遼州)를 공격하였다. 공방전 끝에 요주자사 장수실이 전사하고, 발해군이 거란 백성들을 붙잡아 개선했다.[8]

925년 9월, 장군 신덕이 무리 500여 명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같은 해 12월,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어전회의에서 “서쪽은 제거했으나 동쪽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하였다. 곧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발해를 침공한다. 12월, 거란군이 발해의 살갈산과 고령에 진출하였으며, 부여부가 포위되었다.[8]

926년 정월, 하늘에서 흰 기운이 일어나 태양을 관통하였다. 흰색은 서쪽을 상징하는 색깔로, 발해 서쪽에서 일어난 거란이 격파함을 암시하는 징조였다. 같은 해 1월, 마침내 부여성이 함락되었다. 부여성 성주가 분전 끝에 전사하였다. 야율아보기가 발해군이 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같은 날 거란군은 발해 동평부에 진출하였으며, 하루 만에 동평부가 함락되었다.[8]

이를 기점으로 거란 본토에서 병력이 대규모로 증파, 발해 침략에 참전한 거란군은 약 22만을 헤아렸다.[8]

1월, 발해의 재상이 이끄는 발해군이 황성(皇城) 인근에서 거란 군대와 교전하였다. 발해의 대규모 정예병력과 거란군의 첫 회전이었다. 하루 낮 밤의 싸움 끝에 발해군이 완파되고, 재상은 거란에 항복하였다. 이날 밤 황성이 포위되었다. 농성 끝에 결국 1월, 발해왕 대인선이 항복 의사를 내비쳤다.[8]

1월, 대인선은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은 뒤 양을 끌고서 신하 3백여 명과 함께 나와 거란 진중으로 가 항복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이들을 예우한 뒤에 돌려보냈다. 같은 달, 야율아보기는 발해 군대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거란의 대신인 강말달 등 13명이 성 안에 들어가 성 내의 무기들을 수색하였는데, 그 태도가 매우 오만하고 무례했다. 격분한 발해의 순라군이 이들을 도륙하였다.[8]

1월, 대인선이 성문을 굳게 닫고 다시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 하루 만에 거란 군대가 성첩을 넘어 황성을 함락시켰다. 야율아보기가 말을 탄 채 왕궁에 들어섰는데, 대인선이 야율아보기의 말 앞에서 꿇어앉아 죄를 청했다. 거란이 왕족들을 포박하여 성 밖으로 끌고 나왔다.[8]

고려사에 의하면 야율아보기는 그가 있던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였다. 대인선이 패배하여 항복하기를 청함으로 드디어 발해는 멸망하였다. 이에 그 나라 사람들 중 다투어 오는 자들이 계속 이어졌다 한다. 일설에는 그가 체포된 곳이 부여성(扶餘城)이라는 설도 있다.[8]

2월, 거란이 발해를 동거란(東丹國, 동란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 상경의 이름을 천복성(天福城)으로 바꾸었다. 곧이어 거란 태자 야율배를 왕으로 봉하여 발해의 옛 땅을 통치하게 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임황(臨潢) 서쪽에 성을 쌓아 발해 최후의 임금 대인선을 유폐시켰다. 대인선에게는 오로고, 왕후에게는 아리지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오로고와 아리지는 야율아보기와 그 황후가 발해의 항복을 받을 때에 탔던 두 마리의 말 이름이다. 이후의 행적은 미상하다.[8]

2. 3. 멸망 이후

후대에 『야율종교묘지명(耶律宗教墓誌銘)』, 거란소자로 기록된 묘지명 및 한문 비명에는 대인선을 단국 혹은 발해의 '''성왕'''(聖王)이라 기록했는데, 이것이 그의 정식 시호인지 여부는 불명확하다. 발해 멸망 이후 발해 왕족은 요나라 귀족들과 함께 옛 발해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공유하도록 허용되었으며, 대인선은 야율배의 통치 기간 동안 고위직을 역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야율배와 함께 권력을 공유했을 수도 있다.[2]

대인선의 아들이자 발해의 마지막 태자인 대광현은 군대를 모아 요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 이끌었다. 937년, 대광현은 수만 명의 발해 난민을 이끌고 고려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왕건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는 한국 역사학자들에 의해 고구려의 두 후계 국가의 통일을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2]

거란의 황제 야율아보기는 동단국을 세우고, 발해의 옛 영토를 지배하게 했다. 항복한 대인선은 거란의 수도 상경 임황부로 연행되어 유폐되었다. 요사』의 기록에 따르면, 대인선은 "'''오로고'''"라는 이름을, 그의 아내는 "아리지"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오로고", "아리지"라는 이름은 원래 요 태조와 술률황후가 타고 다니던 두 마리의 의 이름으로, 항복한 국왕과 왕후에게 하사했다는 점에서 좋은 의미는 아니다.

3. 발해 부흥 운동

유득공의 《발해고》에 따르면, 10세기 중엽부터 12세기까지 발해인들이 거란에 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발해국, 정안국, 흥료국, 대원국은 발해 유민들이 세운 대표적인 나라이다.

후발해는 건국 및 멸망 연도가 명확하지 않다. 정안국936년경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안국은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거란과의 마찰을 우려한 고려가 관계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고려와의 교류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985년 정안국은 거란의 압박으로 멸망하였다. 대원국은 12세기에 세워졌고, 발해 부흥 세력 중 처음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결국 멸망했고, 이후 발해 부흥 운동은 종식되었다.

4. 가계

관계이름
조부대현석 (발해 제13대 국왕)
부왕대위해 (발해 제14대 국왕)
형제대씨(大氏)
형제대봉예[15]
형제대권(大權)
친족대균로 (발해 예부경)
친족대심리 (발해 좌우위장군)
관계이름
아들대소순
아들대광찬
아들대우모
아들대광현 (발해 세자)
조카대지균[9]
조카대화균[10] (발해 예부경)
조카대원균[13] (발해 정당성 사정)[14]
조카대원양[16]
조카대원겸
질손
(조카의 아들)
대복모[11] (발해 공부경)
질손대복예[12] (발해 공부경)
질손대심리
외손녀지녀 낭자: 1991년 랴오닝성 베이전 시에서 출토된 대계단국고광릉군왕묘지명(《야율종교묘지》)에 따르면, 의 모친으로, 대인선의 외손녀이다.[3]


5. 평가 및 의의

후대에 『야율종교묘지명(耶律宗教墓誌銘)』, 거란소자로 기록된 묘지명 및 한문 비명에는 대인선을 단국 혹은 발해의 '''성왕'''(聖王)이라 기록했는데, 이것이 그의 정식 시호인지 여부는 불명확하다.[1]

참조

[1] 웹사이트 К ПРОБЛЕМЕ ВЫДЕЛЕНИЯ В ПРИМОРЬЕ ПАМЯТНИКОВ ГОСУДАРСТВА ДУНДАНЬ И ИМПЕРИИ ЛЯО https://cyberleninka[...] 2019-02-05
[2] 논문 Bohai/Parhae Identity and the Coherence of Dan gur under the Kitan/Liao Empire 2016
[3] 뉴스 Original meaning of Dan gur in Khitai scripts: with a discussion of state name of the Dong Dan Guo http://www.ritsumei.[...] 立命館大学人文学会 2008-12
[4] 문서 우르구
[5] 문서 대현석 사후 대인선까지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왕이 더 있을 수 있다. 언제 즉위했는지도 알 수 없다.
[6] 서적 김육불의 동북통사, 하 동북아역사재단 2007
[7] 문서 契丹文dan gur與「東丹國」國號(─兼評劉浦江「再談“東丹國”國号問題」──)
[8] 문서 만주 학자 김육불의 연구로 당회요(唐會要)에서 당나라 건녕(乾寧) 2년(895) 10월에 발해왕 대위해(大瑋瑎)에게 칙서를 내린 기사를 발견, [[대현석]]과 대인선 사이에 [[대위해]]왕의 재위 사실이 20세기에 와서 규명되었다. 대인선을 [[대현석]]의 손자이자 [[대위해]]의 아들로 본다면, [[걸걸중상]]의 11대손, [[대야발]]의 10대손에 해당된다. 형제로는 대권(大權)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대씨, 태씨 족보에 이름만 전한다. 대인선의 이름은 907년 5월 중국 후량(後粱)에 왕자 대소순(大昭順)을 사신으로 파견하면서, 발해 국왕 대인선의 이름으로 보낸 기록이 처음 기록으로 나온다.
[9] 문서 대지균은 대인선의 아들이 아니고 조카일 것으로 추정된다.
[10] 문서 대화균은 대인선의 아들이 아니고 조카인 것으로 추정된다.
[11] 문서 대화균의 아들이라는 설을 따를 경우
[12] 문서 대복모와 형제로 추정된다.
[13] 문서 대지균, 대화균과 형제로 추정된다.
[14] 문서 발해의 최고행정기관인 정당성의 차관으로 좌복야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15] 문서 897년에 대위해의 아들 대봉예가 당에 하정사로 갔다.
[16] 문서 대인선 재위시에 조카 대원양을 당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인선과 대봉예는 대위해의 아들로 형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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