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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자와 히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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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라자와 히로타카는 데라자와 히로마사의 아들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임진왜란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공을 인정받아 아마쿠사 제도를 영지로 받았으며, 가라쓰성을 축성하고 가라쓰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가라쓰와 아마쿠사 지역 호족을 탄압하여 영지를 안정시켰으나, 그의 사후 아마쿠사에서 시마바라의 난이 발발하여 가문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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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자와 히로타카
기본 정보
씨명데라자와 히로타카
시대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에이로쿠 6년 (1563년)
사망간에이 10년 4월 11일 (1633년 5월 18일)
이명주지로 (통칭)
마사나리
사다마사
히로타다
시호알려진 정보 없음
계명젠시슈다이슈 교호 소카 거사
영명아고스티니호 (세례명)
묘소사가현가라쓰시 거울의 가가미 신사 경내
교토시 다이토쿠지 산겐인
관위종사위하시마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섬긴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
히젠가라쓰번 번주
씨족데라자와 씨
부모데라자와 히로마사
형제이마이 사다후루 실
히로타카
한자부로
배우자쓰마키 사다노리 딸
자녀다다하루
가타타카
도가와 마사야스 정실
규쇼인
미즈타니 가쓰타카 계실
특기 사항알려진 정보 없음
다이묘 계승 정보
가라쓰 번 다이묘before: 없음
after: 데라자와 가타타카
years: 1593–1633

2. 생애

오와리국 출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히젠국 가라쓰 6만 석[2]을 하사받았고, 1589년 종5위하 시마노카미[2]에 서임되었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서 군공을 세워 1598년지쿠젠국 이토군 2만 석이 추가되었다[2].

1633년 4월 11일 사망하였으며, 향년 71세였다. 묘소는 가라쓰시 가가미의 가가미 신사 경내에 있으며, 지역민들은 시마 님(しまさま)으로 숭상하며 매년 봄 벚꽃 꽃놀이 시기에 작은 연회를 열고 있다.

2. 1. 도요토미 가신 시대

데라자와 히로마사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2]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즈음에는 히젠 나고야성 건축을 담당했고, 그 공으로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출세했다. 또, 무역 통제와 조선에 있는 일본군의 보급 및 병력 수송 등의 임무를 맡았다.[2]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소위 무단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2]

1594년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세례를 받고 기리시탄이 되었으나, 이후 다시 박해자로 변했다.[2] 기리시탄에 대해 일관성이 없는 태도를 보였으며, 기독교에 대한 강한 신앙심은 느껴지지 않고, 정치적인 언동에 종지부를 찍었다.[2]

2. 2. 도쿠가와 가신 시대

데라자와 히로타카는 아버지 데라자와 히로마사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때 히젠 나고야성 건축을 담당했고, 그 공으로 히데요시의 측근이 되었다. 또, 무역을 통제하고 조선에 있는 일본군에게 보급품과 병력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이른바 무단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2]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했다. 전투가 끝난 후, 그 공으로 아마쿠사 4만 석을 추가로 받아 가라쓰번 12만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버려진 히젠 나고야성의 자재를 활용해 가라쓰성을 쌓았다. 영지 내 가라쓰와 아마쿠사의 호족들을 억압하여 영지를 안정시키고 번영시켰지만, 그가 죽은 후 아마쿠사에서는 시마바라 봉기가 일어났다.

도요토미 정권의 권력이 도쿠가와로 넘어가면서 "히데요시의 중개인"에서 "이에야스의 중개인"으로 공적 지위를 새롭게 했다.[3] 규슈의 여러 다이묘들과 연이 있었고, 나가사키 대관으로 국제 외교에 관여했기 때문에, 간토에서의 해외 무역을 모색하고 있던 이에야스에게 귀중한 인재로 여겨졌다.[4]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실권을 잡은 이에야스와 서군이었던 시마즈 씨와의 전후 처리 협상을 중개하는 등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개 역할은 이에야스의 가신에게 위임되어 권력을 잃었다.

가라쓰성을 축성했고, 아마쿠사의 월경지를 포함하면 12만 3천 석을 영유하는 다이묘가 되었으며, 아마쿠사 영지를 다스리기 위해 도미오카성을 축성하는 등 성대·대관을 파견하여 통치했다. 가라쓰와 아마쿠사의 토착 호족들을 탄압했지만, 그 결과 가라쓰는 안정되고 번영했다. 한편, 처음에는 기리시탄 탄압을 적극적으로 행하지 않았지만, 1614년 금교령 이후, 엄하게 배교를 강요하게 되었고, 만년에는 고문의 수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2. 3. 가라쓰 번주 시대

1592년부터 임진왜란을 즈음하여 히젠 나고야성 건축을 담당했고, 그 공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 되어 출세했다. 또, 무역 통제와 조선에 있는 일본군의 보급 및 병력 수송 등의 임무를 맡았다.[2]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소위 무단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해,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했다. 전후, 그 공으로 아마쿠사 4만 석을 추가로 받아 가라쓰번 12만 3천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버려진 히젠 나고야성의 부재를 활용해 가라쓰성을 축성하고, 성대·대관을 파견하여 월경지인 아마쿠사 영지를 통치했다.

영지 내 가라쓰와 아마쿠사의 호족을 탄압한 결과, 영내는 안정되고 번영했지만,[2] 처음에는 기리시탄 탄압을 적극적으로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1614년 금교령 이후에는 엄하게 배교를 강요했고, 만년에는 고문 수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아마쿠사에서는 시마바라 봉기가 발생한다.

2. 4. 시마바라의 난

게이초 6년(1601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히고 아마쿠사를 추가로 봉토받았다. 이때 히로타카는 아마쿠사의 석고를 합계 약 42,000석으로 산정했지만, 이는 아마쿠사의 실제 상황을 무시하고 실태의 두 배나 되는 과도한 값으로 책정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후 징세가 가혹해졌고, 히로타카 사후 아들 데라자와 가타타카 대에 시마바라의 난(1637년-1638년)이 발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난이 평정된 후, 데라자와 가는 책임을 물어 아마쿠사 영지를 몰수당했고, 실의에 빠진 가타타카는 후에 자살하여 데라자와 가는 단절되었다. 막부가 과도한 석고 책정의 문제를 인정한 것은 만지 2년(1659년)에 이르러서였다. 게다가 간분 11년(1671년), 아마쿠사는 애초에 사령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데라자와 히로마사
어머니불명
정실쓰마키 사다노리의 딸
장남데라자와 타다하루1600년 ~ 1622년
차남데라자와 카타타카1609년 ~ 1647년
자녀토가와 마사야스의 정실생모 불명, 여자
자녀큐쇼인사카키바라 타다츠구의 계실, 생모 불명, 여자
자녀미즈타니 카츠타카의 계실생모 불명, 여자


참조

[1] 서적 本藩人物誌
[2] 서적 キリシタン研究 風間書店 1975
[3] 논문 内府(家康)の公儀掌握と関ヶ原合戦 2006
[4] 간행물 秀吉死後における家臣間の対立構造と推移 歴史と文化の研究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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