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알보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보인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랑고바르드족의 왕으로, 560년에서 572년까지 재위했다. 판노니아에서 성장하여 게피드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얻었고, 아바르족과의 동맹을 통해 게피드족을 멸망시켰다. 568년에는 랑고바르드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했으나, 572년 베로나에서 아내 로사문드와 측근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알보인의 죽음은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지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삶은 서사시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랑고바르드인 전사 - 데시데리우스
    8세기 롬바르드 왕국의 왕이었던 데시데리우스는 토스카나 공작 출신으로 왕위에 올라 교황령 문제에 개입했으나, 프랑크 왕 카롤루스 1세와의 대립 끝에 폐위되어 롬바르드 왕국 최후의 독립적인 왕으로 남았다.
  • 572년 사망 - 동륜태자
    동륜태자는 신라 진흥왕의 맏아들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요절하여 왕위를 잇지 못하고 그의 아들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미실과의 관계에 대한 설과 불교 진흥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 572년 사망 - 우문호
    우문호는 남북조 시대 서위 및 북주의 권신으로, 우문태의 조카로서 효민제를 옹립하여 북주 건국에 기여했으나 효민제와 명제를 폐위 및 살해하고 무제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폭정으로 비판받지만 북주 국력 신장에 공헌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알보인
기본 정보
칭호랑고바르드 왕
이름알보인
로마자 표기Alboin
출생 연도530년대
출생지판노니아
사망일572년 6월 28일
사망지베로나, 랑고바르드 왕국
매장지베로나, 이탈리아
통치
즉위560년/565년
퇴위572년
이전 통치자아우도인
다음 통치자클레프
가족
배우자클로트신트
로자문드
자녀알프스인다
왕가가우시 왕조
아버지아우도인
어머니로델린다
종교
종교아리우스파
기타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나오는 알보인의 목판화
1493년의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나오는 알보인의 목판화
론고바르드 왕 알보이노의 암살
론고바르드 왕 알보이노의 암살 (1856년)

2. 어원

알보인(Alboin)이라는 이름은 게르만 조어의 어근인 *''albiz'' (요정)와 *''winiz'' (친구)에서 유래되었다.[1] 따라서 이 이름은 고대 영어의 이름인 ''Ælfwine''과 어원이 같다.[1] 라틴어로는 ''Alboinus'', 코이네 그리스어로는 Ἀλβοΐνος (''Alboinos'')로 알려졌다. 현대 이탈리아어에서는 ''Alboino''이며, 현대 롬바르드어에서는 ''Alboin''이다.[2]

3. 판노니아 통치

아우도인이 사망한 후, 알보인은 560년에서 565년 사이에 랑고바르드족의 왕이 되었다.[9] 왕위는 부족 자유민들의 선거를 통해 계승되었으며, 이들은 전통적으로 사망한 군주의 일족에서 왕을 선출했다.[13][14] 알보인은 게피드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판노니아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 전쟁은 6세기 동안 이어진 판노니아 분지에서 게르만족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23]

3. 1. 아버지의 통치와 초기 생애

알보인은 530년대 판노니아에서 가우시 씨족 출신인 아우도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4] 어머니 로델린다는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조카였다.[5][6] 알보인은 아버지처럼 이교도로 자랐지만, 첫 번째 부인으로 프랑크 왕 클로타르 1세의 딸인 클로친드와 결혼했다.[7][8][9]

3. 2. 게피드족과의 전쟁

알보인은 게피드족과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전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552년 아스펠드 전투에서 그는 게피드 왕 투리신드의 아들 투리스모드를 죽였다.[10] 이 승리로 인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개입하여 경쟁하는 지역 강국 간의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전투 후, 바울 디아코누스가 전한 전설에 따르면, 알보인은 아버지의 식탁에 앉을 권리를 얻기 위해 외국 왕에게 환대를 요청하고 관례에 따라 그의 무기를 기증받아야 했다. 이 입문을 위해 그는 투리신드의 궁정에 갔고, 게피드 왕은 그에게 투리스모드의 무기를 주었다.[4][11]

565년 또는 566년, 투리신드의 아들인 쿠니문트가 이끄는 게피드족과의 새로운 전쟁이 발발했다. 메난드로스 프로텍터는 알보인에게 책임을 돌렸으며, 이는 역사가 발터 폴이 지지하는 해석이다.[15] 게피드족은 시르미움 지역을 양도하겠다는 약속과 교환하여 황제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하여 565년 또는 566년에 유스티누스 2세는 사위 바두아리우스를 ''마기스터 밀리툼''(야전 사령관)으로 파견하여 쿠니문트를 지원하기 위해 비잔틴 군대를 이끌고 알보인에 대항하게 했으며, 이는 롬바르드족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9][15][17][18][19]

알보인은 566년 아바르족의 바얀 1세와 동맹을 맺었다. 아바르족은 롬바르드족의 가축의 10분의 1, 전쟁 전리품의 절반,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게피드족이 소유한 모든 토지를 요구했다. 롬바르드족은 아바르족과 비잔틴 사이의 기존 적대감을 이용하며 후자가 게피드족과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했다.[9][20]

567년에 동맹국들은 쿠니문트를 상대로 마지막 공격을 가했다. 알보인이 북서쪽에서 게피드족의 영토를 침략하는 동안 바얀은 북동쪽에서 공격했다. 쿠니문트는 롬바르드족에 맞서 움직이고 티비스쿠스와 도나우 강 사이 어딘가에서 알보인과 충돌함으로써 두 군대의 합류를 막으려 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게피드족은 패배했고, 그들의 왕은 알보인에게 살해되었으며, 쿠니문드의 딸 로사문드는 ''오리고 젠티스 랑고바르도룸''에 언급된 대로 포로로 잡혔다. 게피드 왕국의 완전한 파괴는 아바르족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아바르족은 동쪽에서 게피드족을 물리쳤다. 그 결과 게피드족은 독립적인 민족으로서 존재를 잃고 롬바르드족과 아바르족에게 부분적으로 흡수되었다.[9][18][21] 568년 이전 어느 시점에 알보인의 첫 번째 아내 클로스신트가 사망했고, 쿠니문트에 대한 승리 후 알보인은 남은 게피드족과의 유대감을 확립하기 위해 로사문드와 결혼했다.[22]

4. 이탈리아 침공

568년, 알보인은 아바르족의 위협과 이탈리아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랑고바르드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이들은 판노니아를 떠나 율리안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입했다.

알보인이 롬바르드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들어간 슬로베니아의 비파바 계곡


롬바르드족은 비잔티움 제국의 별다른 저항 없이 프리울리를 점령하고, 포룸 율리(Forum Iulii)를 첫 번째 공국의 수도로 삼았다. 알보인은 조카 기술프 1세를 프리울리 공작으로 임명하여 동쪽 국경 방어를 맡겼다.[46]

이후 롬바르드족은 포스투미아 가도를 따라 베네치아 지역을 빠르게 점령했다. 트레비소, 비첸차, 베로나, 브레시아, 베르가모 등이 롬바르드족의 손에 떨어졌으나, 오데르초 점령에는 어려움을 겪었다.[9][46] 롬바르드족의 침공으로 베네치아는 큰 혼란을 겪었고, 많은 난민이 발생했다.[48][49][50]

알보인의 티키눔 입성도


알보인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리구리아를 침략, 569년 9월 밀라노를 점령했다.[4] 밀라노의 호노라투스 대주교와 성직자들은 제노바로 피신했다.[51] 알보인은 밀라노 점령 후 "이탈리아의 주" 칭호를 사용했다.[52]

롬바르드족의 빠른 진격은 비잔티움 제국이 발칸의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동쪽의 사산 제국의 공격으로 위협받는 시기에 이탈리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52][55][53]

파비아(티치눔)는 알보인의 이주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보였다. 알보인은 569년에 티치눔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여 3년 뒤 함락시켰다.[9] 티치눔은 포강티치노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했으며, 라벤나와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다.[30][62]

570년까지 알보인은 아오스타, 수사, 코마치나 섬 등을 제외한 북부 이탈리아의 마지막 비잔틴 방어선을 점령했다.[65] 알보인 통치 기간에 롬바르드족은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토스카나를 약탈하기도 했다.[4][28][30][49][64]

그러나 알보인은 티키눔 공방전 동안 백성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롬바르드 군주의 권위는 약했으며, 군대 구조상 각 부대(''파라'')를 이끄는 지휘관(''두케스'')에게 큰 권한이 주어졌다.[9][49][66][67]

4. 1. 이주 배경 및 준비

알보인은 게피드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자신의 세력을 크게 확장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아바르족의 강력한 위협에 직면하면서 이주를 결심하게 되었다.[24] 롬바르드족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역병과 세 개의 장 논쟁 등으로 약화된 이탈리아를 풍요로운 땅으로 여겼고, 막대한 전리품을 약속하는 곳으로 보았다.[24][27]

알보인은 이주를 위해 롬바르드족뿐만 아니라 헤룰리족, 수에비족, 게피드족, 튀링기족, 불가르족, 사르마티아족, 로마인, 동고트족, 작센족 등 다양한 민족을 모았다.[9][28] 특히 작센족 전사 2만 명이 가족과 함께 참여했는데, 이는 알보인이 프랑크족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시사한다.[9][28]

알보인이 이끈 전체 집단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10만 명에서 30만 명 사이로 추정한다.[27][28][29][30]

알보인은 이주에 앞서 아바르족과 "영원한 조약"을 체결하여 후방을 안정시켰다.[31] 이 조약으로 아바르족은 판노니아를 차지하고,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서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이탈리아 정복이 실패할 경우 200년 동안 롬바르드족이 이전 영토를 되찾을 권리를 보장받았다.[31][32] 이 협정은 롬바르드 왕국 시대 동안 아바르족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31][33]

일부 중세 자료에 따르면, 나르세스유스티누스 2세에게 제거된 것에 앙심을 품고 롬바르드족을 이탈리아로 초청했다고 전해진다.[30][34]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이 비잔틴 제국이 프랑크족으로부터 북부 이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롬바르드족을 ''페데라티''로 정착시키려 했던 공식적인 초청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25][35][36][37]

"알보인은 비서관인 나르세스(수장)의 초청으로 랑고바르드족을 이탈리아로 이끌었다. 그리고 랑고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은 부활절 이후 4월, 첫 번째 인딕션에 파노니아를 떠났다. 두 번째 인딕션에는 그들이 이탈리아에서 약탈을 시작했고, 세 번째 인딕션에는 그가 이탈리아의 주인이 되었다."[38]
'랑고바르드족 국가의 기원', 제5장



롬바르드족의 이동은 568년 4월 2일 부활절 월요일에 시작되었다. 알보인은 최근 아리우스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이는 이주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동고트족의 지원을 얻기 위한 정치적 고려였을 가능성이 크다.[25][39][9][40]

롬바르드족은 포에토비오첼레이아에모나 – 포룸 율리이 노선을 따라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9][27][29] 논의 세쿤두스는 569년 5월 20일 또는 21일에 비파바 계곡을 통해 율리안 알프스를 건넜다고 기록했다.[9][27][29] 그러나 이탈리아 진입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30][39]

"알보인이 아무런 방해 없이 베네치아 영토 [...] 즉, 포룸 율리이(치비달레) 도시 또는 요새의 경계에 들어섰을 때, 그는 자신이 점령한 첫 번째 지역을 누구에게 맡길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 그는 포룸 율리이 시와 그 전체 지역을 조카 기술프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 이 기술프는 알보인이 자신에게 선택하고 싶은 랑고바르드족의 가족이나 종족인 파라스를 주지 않으면 시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시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41]
'바울 디아코누스'
랑고바르드족의 역사, 제2권, 9장



롬바르드족은 국경 수비대의 저항 없이 이탈리아에 진입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군사력은 부족했고, 고고학 발굴에서도 격렬한 충돌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42]

롬바르드족에게 처음 함락된 도시는 포룸 율리이였다.[9] 알보인은 이곳을 프리울리 공국의 수도로 삼고, 조카 기술프를 공작으로 임명하여 동쪽 국경 방어를 맡겼다.[30][43][44] 이는 롬바르드족 역사상 최초의 공국 설치였으며, 로마 및 동고트족의 행정 모델을 차용한 것이었다.[44]

4. 2. 이탈리아 진격 및 점령

568년 4월, 판노니아를 출발한 롬바르드족은 569년 5월 또는 그 이전에 율리안 알프스를 넘어 프리울리에 도착했다.[46] 이들은 비잔틴 제국의 저항 없이 프리울리를 점령하고, 포룸 율리(Forum Iulii, 치비달레 델 프리울리)를 첫 번째 공국의 수도로 삼았다. 알보인은 조카 기술프 1세(Gisulf I)를 프리울리 공작으로 임명하여 국경 방어를 맡겼다.[46]

아퀼레이아(Aquileia)에서 알보인은 포스투미아 가도(Via Postumia)를 따라 베네치아 지역을 빠르게 점령했다. 트레비소(Tarvisium, Treviso), 비첸차(Vicentia, Vicenza), 베로나, 브레시아(Brixia, Brescia), 베르가모(Bergomum, Bergamo)가 롬바르드족의 손에 떨어졌다.[9][46] 다만, 오데르초(Opitergium, Oderzo) 점령에는 어려움을 겪었고, 알티눔, 파도바(Patavium, Padova), 몬셀리체(Mons Silicis, Monselice), 만토바, 크레모나 등 주요 베네치아 도시 공격도 피했다.[9][46] 롬바르드족의 침공으로 베네치아는 큰 혼란을 겪었고, 많은 난민이 발생했다.[48][49][50]

알보인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리구리아(Liguria, 북서부 이탈리아)를 침략, 569년 9월 3일 수도인 밀라노(Mediolanum, Milan)를 점령했다.[4] 밀라노의 호노라투스(Honoratus of Mediolanum) 대주교와 성직자들은 제노바(Genua, Genoa)로 피신했다.[51] 알보인은 밀라노 점령 후 "이탈리아의 주(Lord of Italy)" 칭호를 사용했다.[52] 비잔틴 제국의 방어망은 무너졌고, 대규모 난민 이동이 발생했다.[52]

롬바르드족의 빠른 진격은 비잔틴 제국이 발칸의 아바르족과 슬라브족, 동쪽의 사산 제국의 공격으로 위협받는 시기에 이탈리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52][55][53] 롬바르드족의 침공은 이탈리아에 큰 피해를 입혔다. 많은 재산가들이 피해를 보았고,[54][55][56][57] 성직자들 또한 큰 영향을 받았다. 롬바르드족은 대부분 이교도였기 때문에 성직자와 교회를 존중하지 않았다.[55] 많은 성직자들이 롬바르드족을 피해 교구를 떠났다.[55][58] 그러나 세 개의 장 분열로 인해 북부 이탈리아 주교들은 교황청과 제국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롬바르드족과의 타협을 모색하기도 했다.[55][59]

4. 3. 티치눔(파비아) 공방전



알보인의 이주에 대한 강력한 저항은 파비아(티치눔)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알보인은 569년에 티치눔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여 3년 뒤 함락시켰다.[9] 티치눔은 포강티치노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했으며, 라벤나와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다.[30][62] 티치눔의 함락은 알프스 마리타임과 아드리아해에 주둔한 비잔틴 수비대 사이의 통신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63][64]

570년까지 알보인은 아오스타(아우구스타 프라이토리아), 수사(세구시오), 코마치나 섬(코모호) 등을 제외한 북부 이탈리아의 마지막 비잔틴 방어선을 점령했다.[65] 알보인 통치 기간에 롬바르드족은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토스카나를 약탈하기도 했다.[4][28][30][49][64]

알보인은 티키눔 공방전 동안 백성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롬바르드 군주의 권위는 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에 비해 약했으며, 군대 구조상 각 부대(''파라'')를 이끄는 지휘관(''두케스'')에게 큰 권한이 주어졌다.[9][49][66][67] 롬바르드족이 ''페데라티''가 아닌 제국의 적으로 이탈리아에 진입했기 때문에 알보인이 정치적 실체를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9][49][66][67]

왕의 군대에 대한 권위 약화는 프랑크 부르고뉴 침공에서도 드러났다. 롬바르드족의 공격은 뭄몰루스의 엠브룅에서의 승리로 격퇴되었다. 이러한 공격은 롬바르드-프랑크 관계를 악화시키고, 제국과 프랑크족의 동맹을 맺게 했다.[4][9][64][67][68]

5. 암살

알보인은 572년 6월 28일 베로나의 왕궁에서 아내 로자문드와 측근 헬메키스의 음모로 암살당했다.[74]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는 알보인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는데, 역사와 전설이 뒤섞여 있다고 말한다. 아벤티쿰의 마리우스는 《연대기》에서 알보인이 헬메키스의 음모로 살해되었고 왕비가 이를 묵인했다고 간략하게 기록했다.[75][76] 로저 콜린스는 마리우스가 롬바르디아 이탈리아 근처에 살았고 기록 시점이 이르다는 점을 들어 신뢰할 만하다고 평가한다.[4][9]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프랑크족 역사》에서 알보인이 자신이 죽인 남자의 딸과 결혼했고, 그녀가 복수할 기회를 노려 독살했다는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월터 고파트는 이 기록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들을 들어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한다.[77]

5. 1. 암살 배경 및 동기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는 그의 저서 《랑고바르드족의 역사》에서 알보인이 자신의 장인인 쿤니문드의 해골로 만든 잔에 아내 로자문드를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한 사건이 그의 암살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60][78][79][80] 이 기록에 따르면, 베로나에서 열린 연회에서 알보인은 술에 취해 로자문드에게 567년에 죽인 그녀의 아버지 쿤니문드의 해골로 만든 잔으로 술을 마시라고 강요하며, "그녀에게 아버지와 함께 즐겁게 술을 마시도록 권했다"고 한다. 이는 로자문드로 하여금 아버지의 복수를 결심하게 만들었다.[60][78][79][80]

1615년 피터 파울 루벤스의 그림, 치명적인 연회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는 이 해골 잔이 샤머니즘 의식의 일부로, 죽은 자의 힘을 얻는 방법으로 여겨졌다고 주장하며, 740년대에 티키눔 왕궁에서 왕 라치스가 이 잔을 직접 보았다고 전한다. 스테파노 가스파리와 빌프리트 멩겐은 쿤니문드의 해골 잔이 랑고바르드족에게 유목 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해석한다. 즉, 알보인이 적의 해골로 술을 마심으로써 그의 생명력을 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로자문드에게 해골 잔을 바친 것은 랑고바르드족에 대한 그녀와 그녀의 백성의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는 의식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헌주를 통해 죽은 자를 달래는 의식이었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로자문드의 반응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60][78][80]

월터 고파트는 이 이야기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며, 파울이 인간의 약점으로 인한 영웅의 몰락과 약속의 땅에서의 추방에 대한 교훈을 전달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고파트는 파울이 실제로 해골 잔을 보았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740년대에는 이미 죄와 야만성 사이의 연관성이 확립되었다고 본다.[60][80]

로자문드는 왕의 양아들이자 무기 운반자인 헬미키스와 공모하여 알보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파울에 따르면, 로자문드는 헬미키스를 유혹한 후, 왕의 침실 관리인 페레데오를 암살에 가담시켰다. 572년 6월 28일, 알보인이 낮잠을 자는 동안, 페레데오가 알보인의 칼을 치우고 그를 무방비 상태로 만든 후 살해했다.[4][79][81] 알보인의 유해는 궁궐 계단 아래에 묻혔다고 전해진다.[77]

알보인은 페레데오에게 살해당하고 로사문드는 19세기 찰스 랜드시어의 그림에서 그의 칼을 훔친다.


한편, 알보인의 통치 기간 동안 롬바르드족은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토스카나를 약탈했지만, 이것이 알보인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 단순한 약탈 이상의 의미가 있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헤르비히 볼프람은 토스카나가 578-579년에 정복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외르크 야르눗 등은 알보인 시대에 시작되었지만 그의 사망 당시에는 완료되지 않았다고 본다.[4][28][30][49][64]

알보인이 백성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은 롬바르드 군주의 권위가 약했기 때문이다. 각 전사 부대(''파라'')를 이끄는 군 사령관 또는 ''두케스''에게 큰 권한이 주어졌고, 롬바르드족은 제국의 ''페데라티''가 아닌 적으로 이탈리아에 진입했기 때문에 제국의 정통성이 부족했다.[9][49][66][67] 왕권 약화는 569년 또는 570년부터 매년 프랑크 부르고뉴를 침공한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이 공격은 뭄몰루스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롬바르드-프랑크 관계를 악화시키고 제국과 프랑크족 간의 동맹을 맺게 했다.[4][9][64][67][68]

알보인의 죽음은 롬바르드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새로 형성된 게르만족 집단을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를 잃었으며, 엘베강에서 이탈리아로 롬바르드족을 이끌었던 영웅적인 왕조의 마지막을 의미했다. 알보인의 명성은 수세기 동안 서사시에 남아, 작센족과 바이에른족 사이에서 그의 전투 능력, 영웅성, 그리고 그의 무기가 가진 마법적 특성이 기념되었다.[9][22][83]

5. 2. 암살 이후

헬메키스는 왕위를 찬탈하려 했으나, 롬바르드족 전사 대부분이 왕의 암살에 반대하여 실패했다. 롬바르드족은 클레프를 새 왕으로 추대했고, 헬메키스는 왕비 로자문드, 군대, 왕실 보물, 알보인의 딸 알브수인다와 함께 라벤나로 도망쳤다.[85][86] 이 과정은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84]

"헬메기스는 그의 왕이 죽자 그의 왕국을 찬탈하려 했으나, 랑고바르드족이 왕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그를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전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로세문드는 즉시 라벤나의 총독 롱기누스에게 그들을 데려올 배를 빨리 보내라고 전했다. 롱기누스는 그러한 소식에 기뻐하며 헬메기스와 그의 아내 로세문드가 밤에 도망칠 배를 재빨리 보냈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Historia Langobardorum, Book II, Ch. 29



알보인의 죽음 당시 롬바르드와 비잔틴 영토 (572)


라벤나에서 헬메키스와 로자문드는 사이가 멀어졌고, 결국 서로를 죽였다. 이후 롱기누스는 알브수인다와 보물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85][86]

클레프는 18개월 동안 왕위를 지켰으나 노예에게 암살당했다. 비잔틴 제국의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88] 이후 10년간 공백기가 이어졌고, 584년 아우타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롬바르드 왕국은 다시 통합되었다.[89][90][91]

알보인의 딸 알프스인다(알부스인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으나,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6. 가족 관계

알보인은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타르 1세의 딸 클로토신트와 결혼하여 딸 알프스인다를 두었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의 《랑고바르드족의 역사》에 따르면, 알보인은 567년에 게피드족의 왕 쿠니문트의 딸 로자문다와 재혼하였고, 그 이전에 클로토신트가 사망했다고 한다. 클로토신트와의 결혼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555년경 트리어의 주교 니케티우스가 클로토신다에게 알보이노에게 가톨릭으로 귀의하고 아리우스파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고쳐달라는 서신을 보냈다는 주장에 따라 555년 이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알프스인다는 아버지 알보인이 암살당한 후, 계모 로자문다 및 아버지의 측근 헤르미키스와 함께 라벤나 총독 롱기누스에게 의탁했다. 롱기누스는 로자문다에게 남편 헤르미키스를 죽이고 자신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고, 로자문다는 헤르미키스에게 독이 든 잔을 마시게 했다. 독을 마신 헤르미키스는 로자문다에게 남은 독을 마시게 하여 함께 죽었다. 이후 알프스인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누스 2세에게 보내졌으며,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6. 1. 혈연

알보이노는 동고트 왕국의 왕족 아말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알보이노의 어머니 로델린다는 동고트 왕국 초대 테오도리크 대왕의 여동생 아마라프리다의 손녀(아마라프리다의 딸 아마라벨가의 자녀)였다. 알보이노는 아마라프리다의 증손이며, 테오도리크 대왕은 알보이노의 증조할아버지뻘이 된다.

테오도리크 대왕의 증손 게르마누스(550년 - 605년)는 알보이노의 삼종형제가 된다. 게르마누스는 테오도리크 대왕의 손녀이자 동고트 왕국 제3대 아마라순타의 딸, 제2대 아타라리크의 여동생, 서고트 왕국 국왕 아마라리크의 사촌인 마타순타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는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촌 게르마누스 유스티누스(500년경 - 550년)이다.

아마라리크와 아타라리크·마타순타 남매는 알보이노의 삼종고모, 아마라순타는 삼종고모할머니가 된다. 또한 아마라리크의 딸 고이스윈타는 알보이노의 삼종사촌, 고이스윈타의 두 딸(갈스윈트, 브룬힐데)은 삼종조카가 된다. 게르마누스의 두 딸(어머니는 레온티아. 장녀(583년경 - 605년)는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키우스와 그의 황후 콘스탄티나의 장남 테오도시우스(583년 - 602년)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고, 차녀(585년 - 몰년 불명)는 마우리키우스의 차차대 동로마 제국 황제 헤라클리우스와의 사이에 1남 요한네스를 낳았다) 또한 알보이노의 삼종조카이다.

6. 2. 혼인

알보인은 프랑크 왕 클로타르 1세의 딸인 클로토신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알보인이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 관계가 단절된 직후인 552년경, 부친 아우도인이 사망하고 알보인이 왕위에 오른 직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결혼은 프랑크족과 롬바르드족 간의 동맹을 반영하며, 알보인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클로토신트와의 사이에서는 딸 알프스인다를 두었다. 567년 이전에 클로토신트가 사망하자, 알보인은 게피드족의 왕 쿠니문트의 딸 로자문다와 재혼했다. 로자문다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알프스인다는 572년 아버지 알보인이 암살당한 후, 계모 로자문다와 함께 라벤나로 도피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으며,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7. 유산 및 평가

알보인은 10세기 고대 영어 시 비드지스(Widsith)에서 다른 부족 지도자들과 함께 언급된다.

Swylce ic wæs on Eatule mid Ælfwine, se hæfde moncynnes, mine gefræge, leohteste hond lofes to wyrcenne, heortan unhneaweste hringa gedales, beorhtra beaga, bearn Eadwines.|나는 이탈리아에 있었다네 알보인과 함께: 모든 사람들 중 그가 가졌지,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손 용감한 업적을 행하기에, 가장 관대한 마음 반지를 나눠주며 빛나는 토르크를, 오도인의 아들.ang

알보인 시대는 1961년 이탈리아 모험 영화 정복자의 검(이탈리아어: ''Rosmunda e Alboino'', 독일어 제목 ''Alboin, König der Langobarden'')의 배경이 되었으며, 잭 팔란스가 알보인 역을 맡았다.

피터 폴 루벤스의 ''알보인과 로사문드''(1615), 찰스 랜드시어의 ''롬바르드족의 왕 알보인 암살''(1856), 포르투니노 마타니아의 삽화 ''롬바르드족의 왕 알보인 앞에 포로로 잡힌 로사문드''(1942) 등은 알보인의 삶을 다룬 예술 작품이다.[34]

7. 1. 롬바르드 왕국 건국

568년, 알보인은 판노니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알보인이 이끌었던 집단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지만, 롬바르드족 외에도 게피드족, 불가르족, 사르마티아인, 수아비족, 튀링기족, 색슨족, 로마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3] 이들은 동로마 제국용병으로 복무했거나, 아바르족을 피해 이주해 온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3]

알보인이 이끈 롬바르드족은 별다른 저항 없이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고트 전쟁의 여파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고, 행정 체계가 무너진 상태였다.[24] 569년, 롬바르드족은 베네치아를 제외한 북부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밀라노를 수도로 삼아 롬바르드 왕국을 건국했다.[25]

7. 2. 문화적 영향

알보인은 10세기 고대 영어 시 ''비드지스''(Widsith) (70–75행)에서 다른 부족 지도자들과 함께 언급된다.

1961년 이탈리아 모험 영화 ''정복자의 검''(이탈리아어: ''Rosmunda e Alboino'', 독일어 제목 ''Alboin, König der Langobarden'')은 알보인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잭 팔란스가 알보인 역을 맡았다.

알보인의 삶을 다룬 예술 작품으로는 피터 폴 루벤스의 ''알보인과 로사문드''(1615), 찰스 랜드시어의 ''롬바르드족의 왕 알보인 암살''(1856), 포르투니노 마타니아의 삽화 ''롬바르드족의 왕 알보인 앞에 포로로 잡힌 로사문드''(1942) 등이 있다.[34]

7. 3.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알보인은 랑고바르드족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과 부족 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암살당한 비극적인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1]

알보인의 이탈리아 침공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가속화한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동시에 이탈리아 반도의 분열과 혼란을 초래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Meaning, origin and history of the name Alboin https://www.behindth[...]
[2] 웹사이트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Or, Dictionary of Arts, Sciences, and General Literature https://books.google[...] A. and C. Black 2019-06-29
[3] 서적 Jarnut 1995, pp. 16–18
[4] 서적 Martindale 1992, s.v. Alboin, pp. 38–40
[5] 서적 Rovagnati 2003, pp. 28–29
[6] 서적 Amory 2003, p. 462
[7] 서적 Wickham 1989, pp. 29–30
[8] 서적 Jarnut 1995, p. 21
[9] 서적 Bertolini 1960, pp. 34–38
[10] 서적 Rovagnati 2003, p. 28
[11] 서적 Ausenda 1999, p. 433
[12] 서적 Goffart 1988, p. 387
[13] 서적 Jarnut 1995, p. 25
[14] 서적 Wolfram 1997, p. 284
[15] 서적 Pohl 1997, p. 96
[16] 서적 Martindale 1992, s.v. Cunimundus, p. 364
[17] 서적 Rovagnati 2003, p. 30
[18] 서적 Jarnut 1995, p. 22
[19] 서적 Martindale 1992, s.v. Baduarius (2), pp. 64–65
[20] 서적 Pohl 1997, pp. 96–97
[21] 서적 Rovagnati 2003, pp. 30–31
[22] 서적 Gasparri 1990, p. 20
[23] 서적 Curta 2001, p. 204
[24] 서적 Jarnut 1995, p. 29
[25] 서적 Moorhead 2005, p. 152
[26] 서적 Christie 1998, p. 60
[27] 서적 Gasparri 1990, p. 25
[28] 서적 Schutz 2002, p. 82
[29] 서적 Christie 1998, pp. 63–64
[30] 서적 Jarnut 1995, p. 30
[31] 서적 Pohl 1997, p. 98
[32] 서적 Wolfram 1997, p. 286
[33] 서적 Jarnut 1995, pp. 29–30
[34] 서적 Whitby 2001, p. 91
[35] 서적 Christie 1998, pp. 60–63
[36] 서적 Pohl 1997
[37] 서적 Collins 1991
[38] 서적 Paul 1907
[39] 서적 Palmieri 1996
[40] 서적 Gasparri 1990
[41] 서적 Paul 1907
[42] 서적 Christie 1998
[43] 서적 Christie 1998
[44] 서적 Wolfram 1997
[45] 서적 Christie 1998
[46] 서적 Wolfram 1997
[47] 서적 Madden 2004
[48] 서적 Lane 1991
[49] 서적 Humphries 2001
[50] 서적 Richards 1979
[51] 서적 Christie 1998
[52] 서적 Gasparri 1990
[53] 서적 Ostrogorsky 1993
[54] 서적 Collins 1991
[55] 서적 Jarnut 1995
[56] 서적 Wickham 2005
[57] 서적 Moorhead 2005
[58] 서적 Wolfram 1997
[59] 서적 Richards 1979
[60] 서적 Schutz 2001
[61] 서적 Pohl 1997
[62] 서적 Christie 1998
[63] 서적 Gasparri 1990
[64] 서적 Wolfram 1997
[65] 서적 Rovagnati 2003
[66] 서적 Azzara 2009
[67] 서적 Pohl 1997
[68] 서적 Jarnut 1995
[69] 서적 Wickham 1989
[70] 서적 Palmieri 1996
[71] 서적 Moorhead 2005
[72] 서적 Christie 1998
[73] 서적 Gregory 1916
[74] 서적 Martindale 1992
[75] 서적 Collins 1991
[76] 서적 Jarnut 1995
[77] 서적 Goffart 1988
[78] 서적 Gasparri 1990
[79] 서적 Wolfram 1997
[80] 서적 Goffart 1988
[81] 서적 Jarnut 1995
[82] 서적 Goffart 1988
[83] 서적 Wolfram 1997
[84] 서적 Paul 1907
[85] 서적 Christie 1998
[86] 서적 Wolfram 1997
[87] 서적 Azzara 2009
[88] 서적 Schutz 2001
[89] 서적 Gasparri 1990
[90] 서적 Wickham 1989
[91] 서적 Ostrogorsky 1993
[92] 서적 Wickham 200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