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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이 다다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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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리이 다다쓰네는 도리이 다다마사의 장남으로, 162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했다. 그는 병약하여 막부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며, 1632년 도쿠가와 다다나가의 개역으로 사촌 도리이 다다후사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후사 없이 1636년에 사망하면서 영지가 몰수될 위기에 놓였으나, 도리이 모토타다의 공적을 고려하여 동생 도리이 다다하루에게 시나노 다카토번 3만 석을 주어 가문을 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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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이 다다쓰네
기본 정보
씨족도리이 씨
묘소도쿄도분쿄구혼코마고메의 기치죠지
생몰
출생게이초 9년 ( 1604년 )
사망간에이 13년 7월 7일 ( 1636년8월 7일 )
관위
관위종4위하・이가노카미, 사쿄노스케
경력
시대에도 시대 전기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미쓰
데와야마가타 번 번주
이름
어릴 적 이름신타로
이름다다쓰네
가족 관계
아버지도리이 다다마사
어머니다키가와 가쓰토시의 양녀
형제자매다다쓰네
도자와 사다모리
다다하루
이이 나오카쓰 정실
가쿠가쿠인
사카이 다다카쓰 정실
무네히메
사나다 노부시게 정실
오고치 다다오 실
배우자모리 다다마사의 딸・기쿠
자녀무네히메
기타
계명효도쿠지덴 데쓰잔 겐신 다이코지
야마가타 번
야마가타 번주before: 도리이 다다마사
after: 호시나 마사유키
years: 1628–1636

2. 생애

야마가타번의 초대 번주 도리이 다다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28년 아버지 다다마사가 사망함에 따라 가독을 이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탓에 막부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1]

1632년 도쿠가와 다다나가가 개역되면서, 그의 가신이었던 사촌 도리이 다다후사의 보호를 명받았다.

2. 1. 후사 문제와 가문의 개역

도리이 다다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28년 아버지 다다마사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었으나, 병약하여 막부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정실 부인과 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이복 동생 다다하루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다다쓰네는 임종 때 다다하루를 양자로 삼지 않고, 신조 번에 양자로 들어가 있던 동복 동생 도자와 사다모리에게 가독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는 막부의 말기 양자 금령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결국 1636년 후사 없이 사망하였다.

이이 나오타카는 "세습에 관한 일도 바라지 않고 청하지 않는 조항은 헌법을 어기고 윗사람을 얕보는 것과 같다"며 "이와 같은 무리는 징벌하지 않으면 앞으로 불의하고 불충한 고케닌 등을 무엇으로 경계하겠는가"라고 비판했다. 결국 막부는 다다쓰네의 영지를 몰수했다.[1]

다만, 할아버지 도리이 모토타다의 공적을 고려하여 배다른 동생인 다다하루에게 시나노 다카토번 3만 석을 주어 가문을 잇게 했다. 다다하루는 다다쓰네와 사이가 나빠서 다다쓰네가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양자로 채택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

2. 2.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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