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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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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가미 요시아키는 1536년 출생하여 1614년에 사망한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데와 국(현재의 야마가타현)을 다스린 다이묘이다. 그는 모가미 씨의 가문을 계승하여 야마가타현을 통치하며, 덴노 국의 통일을 목표로 영토를 확장했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군사적 역량을 겸비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하고, 게이초 데와 전투에서 활약했다. 에도 막부 수립 후에는 야마가타 성을 개축하고 조카마치를 정비하는 등 영내 부흥에 힘썼다. 오늘날 야마가타 시의 기초를 다졌으며, 20세기 이후 다양한 작품에서 다루어지며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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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미 요시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모가미 요시아키
이름모가미 요시아키
일본어 이름最上 義光 (もがみ よしあき)
출생일1546년 2월 1일
사망일1614년 2월 26일
출생지야마가타 번
사망지야마가타 성
아명하쿠주마루
별명데와의 여우
가문 정보
가문모가미 씨
아버지모가미 요시모리
자매요시히메
매부다테 데루무네
조카다테 마사무네
관직 정보
직위모가미 씨 당주
재임 시작1571년
재임 종료1614년
전임모가미 요시모리
후임모가미 요시토시
야마가타 번 다이묘야마가타 번 다이묘
재임 시작1600년
재임 종료1614년
후임도리이 다다마사
군사 정보
충성모가미 씨
도요토미 씨
동군
도쿠가와 막부
계급다이묘
부대야마가타 번
주요 전투데와 국 정벌 (1580-1586)
주고리하라 전투 (1588)
오다와라 정벌 (1590)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 (1591)
시로이시 성 공방전 (1600)
하세도 성 공방전 (1600)
기타 통칭고류 고조마루, 야치 고조마루, 데와노카미, 데와의 교쇼
가족 관계
배우자샤쿠묘에이 (오사키 요시나오의 딸)
시미즈 요시우지의 딸
측실덴도 고젠 (덴도 요리사다의 딸)
자녀모가미 요시야스
모가미 이에치카
시미즈 요시치카
야마노베 요시타다
가미노야마 요시나오
오야마 미쓰타카
다케히메 (우지이에 미쓰우지의 부인)
마쓰오히메 (노베사와 미쓰마사의 아내)
고마히메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측실)
기쿠히메 (히가시네 지카노리의 아내)

2. 생애

덴분 원년(1536년) 1월 1일, 아버지 요시모리와 어머니 나가우라 사이에서 태어났다.[2][1] 어렸을 때 이름은 하쿠쥬마루였으며, 아버지를 계승하여 다이묘가 되었다. 야마가타현을 다스렸다. 모가미 씨는 시바 씨에서 갈라져 나온 아시카가 씨의 일족으로 유서 깊은 혈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름의 "요시(義)" 자는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직접 하사했다. 아시카가 막부의 직속 가신 지위에 있었던 모가미 가문에서 사무라이이자 귀족으로 자란 요시아키는 3미터가 넘는 긴 편지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문학적 재능을 가졌으며, 사토무라 쇼하 등 유명한 연가 시인들과 함께 교토에서 연가를 즐겼다.[2]

에이로쿠 6년(1563년) 6월 14일, 17세의 요시아키는 아버지와 함께 교토로 가서 쇼군 요시테루를 알현하고 말과 칼을 바쳤다.[2]

1564년, 누이 요시히메(義姫)가 다테 테루무네와 결혼하면서 다테 씨와 동맹을 맺었다.[2] 이 기간 동안 모가미 씨는 계승 분쟁을 겪었다.

모가미 씨의 계승을 둘러싼 혼란으로 텐도 요리사다, 히가시네 요리카게, 가미노야마 미쓰카네, 시라토리 나가히사 등 덴노 국의 지역 영주들은 독립하려 했다. 가문의 수장직을 계승한 요시아키는 이들의 독립 시도를 진압하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7] 가미노야마의 가신 사토미 민부, 히가시네의 가신 사토미 카게요리를 배신하게 하여 죽였다. 텐도 가문의 단결을 파괴한 요시아키는 텐도 요리사다 사후 그의 아들 요리미즈를 유배 보냈다.[7]

1570년, 25세에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지도자 자리를 계승하고, 세습 지위인 오슈 탄다이(데와 국 감독관)를 부흥시키는 목표를 세웠다. 야마가타현 북부와 서부, 아키타현 남부로 영토를 확장했다.[2] 1571년, 공식적으로 모가미 씨의 당주가 되었다.[21] 요시히메는 다테 씨에 대한 정보를 요시아키에게 제공했고, 이들의 행동으로 다테 씨는 모가미 가문을 불신하게 되었다. 1574년과 1578년 두 차례에 걸쳐 다테 씨와 싸웠는데, 두 전투 모두에서 요시히메는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 전장 한가운데로 나아갔다.[8] 무쓰 국 오사키 씨 출신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의 친척이었다. 후에 다테 씨가 오사키 씨를 공격하자 요시미쓰와 다테 마사무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7]

1580년, 사토미 긴부의 도움으로 가미노야마 성을 점령하여 가미노야마 미쓰카네가 자결하게 만들었다. 1581년, 무라야마 구로 세력을 확장하고 오구니 성을 점령했다. 사케노베 성을 공격하여 사케노베 히데쓰나를 항복시켰고, 히데쓰나는 요시아키의 가신이 되었다.[21] 1583년, 세보쿠 지역을 확장하고 다이호지 요시우지를 위협했다. 다이호지 씨는 모가미 씨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으나, 요시우지는 패배하고 자결했다.

모가미 요시아키 동상


1584년, 사가에 다카모토가 이끄는 사가에 씨를 공격해 자결시켰다. 야마가타 북쪽 텐도에 기반을 둔 텐도 요리즈미가 이끄는 텐도 씨를 공격하여 고쿠부(현 미야기현)로 몰아넣었다.[2] 요리즈미는 고쿠분 모리시게의 영토로 도망쳐 텐도 씨를 붕괴시켰다. 같은 지역 내에서 시라토리 씨를 패퇴시켰다.[2]

데와 국에서 요시아키와 대립하던 남은 지역 영주 중 하나는 시라토리 나가히사였다. 나가히사의 영토는 데와 국 무라야마 군에 있었고, 현재의 무라야마 근처였다. 오다 노부나가와 관계하며 '데와노카미' 칭호를 얻으려고 음모를 꾸미던 나가히사를, 1584년 야마가타 성으로 초대하여 중병에 걸렸다고 주장했다. "모가미 요시아키 이야기"에 따르면, 병석에 누운 요시아키는 나가히사에게 "내 장남 요시야스가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족보를 건넸다. 나가히사가 족보 문서를 받으려 할 때 요시아키가 숨겨둔 칼로 그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7] 나가히사를 제거함으로써 모가미 씨는 지역 지배력을 확립했다. 나가히사의 암살은 1582년 혼노지의 변 이전 몇 년 전에 나가히사가 자신이 데와 국의 통치자라고 노부나가에게 거짓말하여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명령받았다는 보고가 있다.[9]

1586년, 오노데라 요시미치와 싸웠다. 요시아키의 장남 모가미 요시야스와 다테오카 미쓰시게가 오노데라의 증원군을 물리쳤다. 10월, 로쿠지 고속도로를 건너 쇼나이를 침략하여 다이호지 요시오키의 공격에 맞서 토젠지 요시나가의 토젠지 성을 지원하려 했다. 요시오키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하여 다이호지 씨가 멸망했다.[10] 1587년, 쇼나이(야마가타현 서부)를 장악했다. 그러나 조카 다테 마사무네도 야망을 확장하며 모가미 씨의 영토를 목표로 했다.[2]

1588년, 오슈 지역 수호자인 전 오슈 탄다이였던 오사키 씨 내부에서 내분이 발생했고, 증원을 요청한 모가미 씨와 다테 씨는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여동생 요시히메의 간청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다테 씨와의 갈등에 정신이 팔린 사이 우에스기 씨의 부하 혼죠 시게나가가 에치고 국에서 쇼나이를 장악했다.[2] 요시아키는 우에스기 씨로부터 그 지역을 탈환하려 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장악하자 다이묘들 간의 사적인 전쟁을 금지했고,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권위에 복종했다.[2] 같은 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약 20만 석을 받았다.[2]

1589년 5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타쿠라 가게쓰나에게 편지를 보내 다테 마사무네가 요시아키와 화해할 것을 간청했다.[11]

1591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구노헤 정벌에 참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에게 반해 결혼했고, 요시아키는 도요토미 씨와의 관계로 중요한 다이묘가 되었다. 도요토미 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보통 하시바 요시아키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동안 조선으로 출병하지는 않았지만, 1592년 500명의 가신과 함께 히젠의 나고야 성으로 가서 조선으로 건너갈 준비를 했다.[2]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의 묘


1595년 7월, 히데쓰구와 약혼한 딸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했다. 요도도노에게 남자 상속자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쓰구는 반역죄로 고발되어 고야산에서 할복을 강요받았다. 히데요시는 히데쓰구 외에도 히데요리의 아내, 측실, 아이들도 산죠가와라에서 처형했다. 15세에 히데쓰구와 결혼한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도 처형되었다. 요시아키는 목숨을 구걸했지만 거절당했다. 코마히메는 다른 아내와 측실들과 함께 참수되었고, 시체는 8월 2일 산죠가와라 강에 버려졌다. 요시아키는 히데쓰구의 반란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로 사면되었다. 코마히메의 처형으로 아내 오사키도노는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깊은 슬픔에 빠져 8월 16일에 사망했다. 이후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와 가까워져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2]

1597년, 아들 요시야스는 모가미 가문의 장남으로서 슈리 다이후의 공식 칭호를 받았다.[12]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시다 미쓰나리 세력 간의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했을 때, 이에야스는 요시아키에게 오슈 북부 지휘를 맡겼다. 4월 19일, 이에야스는 7월 25일 오야마(도치기현 오야마시)에서 미쓰나리의 군대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돌린 후, 난부 씨족, 오노데라, 아키타 씨족에게 요시아키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지시했다.[2] 또한 우에스기 씨족에 대한 공격이 취소되었음을 알렸다. 오슈에 모인 군대는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2] 우에스기 씨족은 기세를 올려 이에야스에 적극 대항하며 요시아키 등에게 우에스기 측에 가담할 것을 종용했다.

모가미는 이에야스를 지지했지만, 도요토미 측에 가담하지 않으면 우에스기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딜레마에 직면했다. 간사이 지방에서 이에야스의 승리를 믿었기에 시간을 벌려 했지만, 결국 우에스기 군은 9월 8일 모가미 영토를 침략했다. 요코테 성에 주둔하던 오노데라 요시미치도 우에스기에게 호응하여 모가미 영토를 침략했다.[2]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했다.[13]

2만 명이 넘는 우에스기 군은 나오에 가네쓰구가 지휘하는 주력군이 기츠네고에 고속도로를 통해 남쪽에서, 서쪽은 쇼나이 지역에서 침략했다. 군사력 차이가 커 요시아키는 다테 마사무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2] 메시지는 장남 요시야스를 통해 전달되었다.[7] 마사무네는 어머니 요시히메에 대한 의무와 이에야스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지원군을 파견했다.[2] 요시아키는 다테의 시로이시 성 전투를 지원했고, 하타야 성 전투와 가미노야마 성 전투에서 공격을 받았다.[1]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침략에 저항했다.[3] 병력을 하세도 성, 야마가타 성, 가미노야마 성에 집중시켰다. 나오에 가네쓰구의 군대는 1,000명이 방어하는 하세도 성을 전면 공격했다. 야마가타 성에서 파견한 지원군과 하세도 성 병사들의 높은 투지로 수비군은 선전했다.[2]

모가미 요시미쓰 역사 박물관 연구팀의 전장 유적지 조사, 우에스기 씨족의 추정 경로, 양군 병력 구성 추정을 바탕으로 하세도 성은 쉽게 함락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요시아키가 우에스기 군의 이동 경로를 방해하기 위해 실시한 게릴라전이 성의 성공적인 방어에 기여했다.[14] 우에스기 군은 가미노야마 성 공격에서 패배하고 혼란 속에 요네자와로 도주했다.[2] 모가미 씨족 닌자가 나오에 가네쓰구의 진영에 잠입하여 군기를 훔쳐 하세도 성문에 게양, 우에스기 군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고 한다.[15] 15일간 하세도 성을 포위했지만, 우에스기 군은 끈질긴 모가미 군에게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16] 공성전 마지막 단계에서 우에스기 군은 하세도 성을 전면 공격했지만, 다테 지원군 도움으로 대규모 우에스기 군에 맞서 버텼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가네쓰구 지휘하의 우에스기 군은 하세도 성에서 철수했다. 요시아키는 추격을 시작했지만, 가네쓰구는 소총병을 집중시켜 후퇴하는 군대를 방어하여 요네자와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2]

1601년, 우에스기 씨족으로부터 타가와, 구시비키, 유사 지방을 차례로 탈환했다.[17] 전투 후, 모가미 씨족은 전쟁 중 동군에 대한 충성으로 영지 규모가 20만 석에서 57만 석으로 증가했다.[1] 야마가타 번은 도쿠가와 소유 땅을 제외하고 일본에서 다섯 번째로 큰 영지가 되었다. 5월 11일,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패권을 확립한 이에야스는 황궁을 방문하여 천황을 알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선봉을 지휘했던 이이 나오마사와 사나다 씨족 공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모리 타다마사, 오다 나가마스와 함께 모가미 요시아키와 동행했다.[2]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 성립 후, 야마가타 번의 초대 번주가 되어 "모가미 가 법"이라는 지방 법 제정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2]

모가미 씨 영지 내 모든 옛 사찰을 포함, 사찰과 신사 복구 등 많은 건설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국보 데와 신사(데와 산잔 하구로산) 5층탑도 요시아키에 의해 수리되었다. 모가미 강 수운 개선에 노력, 세 곳의 난관을 개선하여 교토와 야마가타 사이 운송을 용이하게 했다. 쇼나이 지역에 총 길이 30km 넘는 대규모 관개 시설(기타다테 오제키)을 건설, 4,200ha에 달하는 광대한 논을 조성했다. 기타다테 토시나가의 조언을 따라 건설 프로젝트를 허가하고 재정적, 물적 지원을 제공하여 성공을 보장했다.[2]

칸토 지방 북부에서 에도 성 다음으로 큰 야마가타 성은 천수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겐기" 기록에 따르면, 고위 가신들이 천수각 건설을 촉구했지만, 요시아키는 백성을 과도하게 일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했다.[2]

가신들 간 권력 투쟁으로 요시아키와 장남 요시야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갈등이 계속되자 내전으로 이어져 막부가 모가미 씨의 영지 통치권을 박탈할 가능성을 우려, 차남 이에치카에게 가독을 넘기기로 결정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에치카를 총애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에야스는 이에치카에게 자신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하사했고, 이에치카는 이에야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이에치카는 이에야스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 휘하에 있었다. 이에치카가 가독을 계승하면 모가미 씨가 막부 처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7] 1605년, 요시야스에게 고야산에 들어가 승려가 될 것을 명했다. 요시야스는 아버지 명령에 따라 고야산으로 향했지만, 가는 도중 요시아키 가신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다. 요시아키가 암살을 지시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암살 후 야마가타 성 아래 조넨지 사찰을 가족 사찰로 삼아 요시야스의 넋을 기렸다.[7]

1614년, 68세 나이로 야마가타 성에서 병으로 사망했다.[19] 야마가타에는 재건된 야마가타 성 동쪽 큰 문 바로 밖에 모가미 요시아키 역사관이 있으며, 투구, 전투 지휘봉 등이 전시되어 있다.

최상 씨 당주 재임 기간 동안 단 한 건의 반란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7]

모가미 요시아키 소유의 가부토


모가미 요시아키는 현대 야마가타시의 기초가 된 성곽 도시를 건설했다. 모가미 강 "삼난지"를 통제하여 일본해에서 내륙으로 항해를 안전하게 만들었고, 교토, 오사카 문화를 야마가타로 가져왔다. 기타다세키, 이나바제키 등 댐 건설 프로젝트와 관개 시설 개선은 쇼나이 평야 쌀 재배 발전에 기여했다.

야마가타 시 기초를 세운 모가미 요시아키의 이름을 딴 박물관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까지 야마가타 시를 지배했던 모가미 씨 관련 자료를 수집, 보존, 연구하기 위해 1989년 12월 1일에 건립되었다.[20]

2. 1. 가독 상속까지

덴분 15년(1546년) 1월 1일, 모가미 요시모리와 어머니 오노노 고쇼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햐쿠슈마루였다.[46]

에이로쿠 3년(1560년) 15세에 성인식을 치렀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편휘를 받아 '''요시아키'''라는 이름을 받았다. 같은 해 3월 사가에 성 공격에 처음 출전했으나 실패했고, 덴분의 난에서 다테 씨로부터 독립한 이후 추진해오던 요시모리의 영토 확장 정책은 좌절되었다.

에이로쿠 6년(1563년) 요시모리·요시아키 부자는 상경하여 쇼군 요시테루를 알현했다.[47][48] 이때 이들은 막부로부터 어소호로 대접받았다 (겐케이쿄키).[49] 에이로쿠 7년(1564년) 요시아키의 여동생 요시히메(호슌인)가 다테 데루무네에게 시집갔고, 에이로쿠 10년(1567년) 장남 본텐마루(다테 마사무네)가 태어났다. 이 혼인은 이후 양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겐키 원년(1570년) 무렵[50][51] 요시모리와 요시아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5월, 우지이에 사다나오의 중재로 부자는 화해했다. 겐키 2년(1571년) 8월, 요시모리는 출가하여 「에이린」이라 불렀고, 요시아키가 가독을 이었다.

덴쇼 2년(1574년) 1월, 부자 사이가 다시 악화되자, 다테 씨로부터의 독립 경향이 강했던 요시아키를 견제하기 위해 다테 데루무네가 장인 요시모리 구원 명분으로 모가미 영내에 출병했다. 덴도 요리사다, 시라토리 나가히사, 구라조 요리나오, 노베사와 미쓰노부 등이 데루무네에 동조했으나, 요시아키는 이들의 공세를 물리쳤다. 9월 10일 요시아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 모가미 씨는 다테 씨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이후 부자는 화해했다.

요시모리가 요시아키를 폐적하고 차남 요시토키에게 가독을 잇게 하려던 것이 불화의 원인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1급 사료에는 요시토키의 이름이 없어, 이 설은 요시토키의 존재를 포함하여 후세의 창작으로 여겨진다.

2. 2. 데와 통일 전쟁

모가미 요시아키는 가독 상속을 둘러싼 항쟁에서 승리했지만, 덴도 요리사다(天童頼貞) 등 모가미 집안의 서류(庶流)들은 여전히 그에게 따르지 않았다. 야치 성(谷地城) 성주 시라토리 나가히사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데와노카미 추임(推任)을 청원하는 등[52] 모가미 1개 군(郡)[53]의 지배도 완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요시아키는 내부 정비에 힘쓰며 모가미 집안의 위세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에 나섰다.

덴쇼 5년(1577년), 덴도 요리사다를 맹주로 하는 모가미 8순(最上八楯)과의 전쟁을 벌였으나 결판을 내지 못하고 화친하여 요리사다의 딸을 측실로 맞이했다.

덴쇼 6년(1578년), 가미노야마 미쓰카네가 다테 데루무네의 지원을 받아 쳐들어왔으나, 요시아키는 끈질기게 방어하며 야전으로 전환하여 연합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요시히메가 양측을 설득하여 화의를 맺게 하였다(가시와기 산 전투).[54] 덴쇼 8년(1580년), 요시아키는 미쓰카네의 중신 사토미 민부(里見民部)를 회유하여 미쓰카네를 죽이고 가미노야마 성을 손에 넣었다.

덴쇼 9년(1581년)부터 무라야마 군(村山郡)으로 병력을 보내 오구니 성(小国城)을 공략하고, 사케노베 성(鮭延城) 성주 사케노베 히데쓰나(鮭延秀綱)를 공략하였다.

덴쇼 10년(1582년), 덴도 고젠이 사망하면서 덴도 집안과의 화친도 무효화되었다.

덴쇼 11년(1583년), 쇼나이(庄内)의 다이호지 요시우지(大宝寺義氏)가 모가미를 치려 하자, 요시아키는 다이호지 집안의 가신 도센지 요시나가(東禅寺義長) 등을 내응시켜 요시우지를 자결하게 만들었다.

덴쇼 12년(1584년), 요시아키는 시라토리 나가히사를 야마가타 성으로 유인하여 죽이고 야치 성을 공략하였다. 이어 사가에 성 성주 사가에 다카모토(寒河江高基)를 쳐서 자결시키고 사가에 집안을 멸문시켰다. 덴도 요리즈미(天童頼澄)를 쳤으나, 노베사와 미쓰노부(延沢満延)의 분전으로 패퇴하였다. 요시아키는 미쓰노부의 아들에게 딸을 시집보내 미쓰노부를 끌어들이고, 히가시네 성을 공략하여 요리즈미를 고쿠부로 몰아냈다. 이로써 덴도 집안을 맹주로 하던 모가미 8순은 붕괴하고, 요시아키는 모가미 군 전역을 손에 넣었다.

덴쇼 14년(1586년), 오노데라 요시미치(小野寺義道)와 아리야토게(有屋峠)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덴쇼 15년(1587년), 다이호지 요시오키(義興)를 쳐서 자결시키고, 요시오키의 양자 요시카쓰(義勝)는 에치고로 달아났다.

덴쇼 16년(1588년), 다테 마사무네가 오자키 요시타카(大崎義隆)를 공격하자(오자키 합전) 요시아키는 원군을 파병하여 다테를 격파하였으나, 요시히메(호슌인)의 중재로 화의를 맺고 철수했다.[55][56] 윤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요시아키를 우슈 단다이로 임명했다.[57] 8월, 주고리가와라 전투(十五里ヶ原の戦い)에서 모가미군은 대패하고 쇼나이 지방은 우에스기 집안의 영향 아래로 넘어갔다. 이후 우에스기와의 전투가 이어졌으나, 히데요시의 재정에 따라 쇼나이 지방은 우에스기 영지로 공인되었다.

덴쇼 17년(1589년) 5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타쿠라 가게쓰나에게 편지를 보내 다테 마사무네와 요시아키의 화해를 요청하였으며,[58] 요시아키는 스리아게하라 전투(摺上原の戦い)에 원군을 보냈다고 한다.[59]

2. 3. 도요토미 정권 치하

1590년 모가미 요시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와라 정벌에 참가하여 우쓰노미야 성에서 부인과 함께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본래 영지인 24만 석[60]을 보장받았다.[61] 이 때 요시아키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요시모리의 장례 문제로 조카 마사무네보다 늦게 히데요시에 도착했는데, 사전에 이에야스와 교섭한 덕분에 별다른 문책을 받지 않았다.[62] 또한 오슈 처분 때 발생한 센보쿠 잇큐(仙北一揆)를 계기로 오노데라 집안의 영지로 병력을 보내 오카쓰 군(雄勝郡)[63]을 점령했다.

한편, 오다와라 정벌 참가 전에 누이동생 요시히메를 이용하여 마사무네의 독살을 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591년 정월, 요시아키는 교토로 상경하여[64] 종4위하 시종(侍従)에 임명되었다.[65] 같은 해, 이에야스가 구도 마사자네(九戸政実)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에 둘째 아들 이에치카를 여러 다이묘들 앞에 내세워 도쿠가와 집안고쇼(小姓)로 출사시켰다. 이때 동행했던 히데쓰구가 야마가타 성(山形城)에 들렀을 때 셋째 딸 고마히메의 미모가 눈에 띄어 요시아키에게 고마히메를 측실로 바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야마가타 성에 히데쓰구는 들르지 않았고 미모에 대한 소문만 듣고 요구했다는 설도 있다). 요시아키는 거절하였으나 계속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딸을 내주게 되었다. 고마히메가 조금 더 자라면 데려가 줄 것을 요청했다고도 하나, 그것이 요시아키의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또한 셋째 아들 요시치카를 히데요시에게 출사시켜 모가미 집안의 안정을 꾀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히젠 나고야(名護屋)에 머물렀으나, 실제로 바다를 건너지는 않았다. 나고야에 머무르던 중에 구니모토(国許)의 가신(家臣)인 이라고 시나노노카미(伊良子信濃守)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으며,[66] 전황이 악화되는 와중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남겼다.[66] 같은 해부터 야마가타 성의 개축에 착수했다. 이 즈음에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羽柴)라는 묘지(名字)를 받았다.[67]

1594년 오노데라 요시미치의 충신 야가시와 미치타메(八柏道為)에게 거짓 편지를 보냈다. 이 계략에 빠진 요시미치는 미치타메를 제거했다. 그 뒤 요시미치는 요시아키를 상대로 연패하고 세키가하라 전투(게이초 데와 합전)에서는 서군(西軍)에 가담했다가 전후에 개역(改易)되었다.

1595년 히데쓰구가 모반 혐의로 할복했을 때(히데쓰구 사건) 딸인 고마히메도 연좌되어 교토 산조가와라(三条河原)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고마히메의 나이는 열다섯이었다.[68] 일설에는 고마히메는 히데쓰구의 측실이 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히데쓰구가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의 주선도 받아가며 필사적으로 고마히메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탄원했으나 때는 늦었다. 요시아키 부부의 비통함은 깊었고, 비보를 들은 요시아키는 며칠 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고마히메의 생모 오자키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마히메의 뒤를 따르듯이 사망하였다.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등 28명과 함께 연명으로 서명한 기청문(起請文)을 올렸음에도[69] 히데요시의 의심을 풀지 못했고, 마사무네 등과 함께 히데쓰구에게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근신 처분을 받게 된다. 이때 아버지의 무사함을 아들 요시야스와 이에치카 형제가 기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요시아키가 당시 얼마나 절박한 입장에 놓여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처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제되었으나, 요시아키는 이 일로 히데요시를 깊이 증오하게 되었다. 이후 게이초 후시미 지진 직후에 히데요시가 아닌 이에야스의 호위에 나서거나, 히데요시로부터 다회(茶会)에 초청받은 이에야스를 자발적으로 호위하는 등, 반대로 요시아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도쿠가와 측으로 더욱 기울어갔다.

1598년 아이즈 와카마쓰 성(会津若松城)의 성주(城主)였던 가모 히데유키(蒲生秀行)가 가신단의 싸움을 진압하지 못하고 전봉(転封)되자(가모 소동), 아이즈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오우(奥羽) 지방의 여러 다이묘들에 대한 감시와 간토(関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견제를 위해 보내졌다. 요시아키는 가게카쓰와 쇼나이 지방을 놓고 분쟁을 벌인 적이 있었고, 우에스기 영지가 모가미 영지로 아이즈와 쇼나이, 사도(佐渡)로 나뉘어 있었던 만큼, 양측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해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요토미 정권은 오대로(五大老)와 오봉행(五奉行)에 의한 집단체제로 정무를 수행했는데, 이듬해에는 오대로의 필두인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였다. 오봉행인 이시다 미쓰나리도 칩거에 들어가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大阪城)의 니시노마루(西の丸)에서 정무를 수행하였다.

2. 4. 게이초 데와 전투

하세도 성 합전도 병풍에 그려져 있는, 나오에 가네쓰구를 공격하는 모가미 요시아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아이즈우에스기 가게카쓰가 군비를 증강하는 것을 비난하자,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이른바 『나오에장』(直江状)을 보내어 답하였다. 이에야스는 6월에 아이즈 정벌을 시작하였다. 요시아키 등 오우 지역 무장들은 도쿠가와 측인 동군(東軍)에 가담하여 요네자와 성(米沢城) 공격을 위해 모가미 영내에 집결해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 도중 이시다 미쓰나리 등이 이에야스 타도를 명분으로 거병하자, 이에야스는 아이즈 공격을 중지하고 요시아키 등에게 가게카쓰 견제를 명하고 가미가타(上方)로 돌아왔다.

오우 지방 무장들은 모가미 영내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영내에서 폭동이 벌어졌다. 난부 도시나오(南部利直)는 급히 돌아갔고, 다테 마사무네는 우에스기 세력과 강화를 맺었다. 요시아키는 동군에 가담할 결의를 보였으나 우에스기 영지와 접해 있는 가신단은 반대하였고, 요시아키도 불리함을 깨닫고 아들 요시야스를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우에스기와 화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요시아키가 동군 측 아키타 사네스에와 짜고 우에스기 영지를 공격한 정황이 알려지면서 강화는 무산되었다. 결국 모가미 가문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우에스기 가문과 대치하게 되었다.

가게카쓰는 나오에 가네쓰구에게 2만~2만 4천 군세를 주고 모가미 영지 침공을 개시하였다. 모가미 군세는 7,000여 명(실제로는 3,000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요시아키는 철포를 구사하며 항전하였다.

350명 정도의 모가미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던 하타야 성(畑谷城)의 에구치 미쓰키요(江口光清)는 철퇴하라는 요시아키의 명령을 무시하고 농성하였다. 가네쓰구는 항복을 권고했지만 미쓰키요는 거부하고 항전하여 우에스기 군세에 큰 피해를 입히고 전멸, 성은 함락되었다. 우에스기 군세는 하세도 성(長谷堂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을 지키던 시무라 미쓰야스(志村光安)가 이끄는 1천 명의 병력은 우에스기 군에 맞서 성을 방어했고 사케노베 히데쓰나 등의 분전으로 적장 가미이즈미 야스쓰나(上泉泰綱)를 패배시키는 등 전과를 올렸다. 가미노야마 성의 사토미 민부, 유자와 성(湯沢城)의 다테오카 미쓰시게(楯岡満茂) 등도 선전하여 성을 지켜냈다.

요시아키는 아들 요시야스를 보내 조카 마사무네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마사무네는 와가 다다치카(和賀忠親)를 선동하여 잇큐를 일으키게 하고(이와자키 잇큐岩崎一揆), 루스 마사카게(留守政景)가 이끄는 3천 명의 원군을 파견하였으나 모가미 영지에서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마사무네는 가타쿠라 가게쓰나로부터 야마가타 성 함락을 방관하고 피폐해진 우에스기를 쳐서 이득을 얻자는 계책을 받았으나, 어머니 요시히메가 야마가타 성내에 있음을 고려하여 실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9월 29일, 우에스기 군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西軍)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하세도 성의 포위를 풀고 요네자와 성으로 물러났다. 요시아키는 가신 호리 기운(堀喜吽)의 제지에도 자신이 선두에 서서 우에스기 군을 추격하였으나, 우에스기 군의 일제 사격으로 호리 기운은 전사하고 요시아키 자신도 투구에 총탄을 맞았다. 결국 모가미 군세는 간발의 차이로 가네쓰구를 놓쳤다. 그러나 가네쓰구가 퇴각하면서 보여준 훌륭한 모습에 대해서는 적대하던 요시아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우에스기군이 퇴각하자 모가미 군세는 뒤처지는 우에스기 군세를 추격해 야치 성(谷地城)[70]에서 농성하던 오우라 성(尾浦城) 성주 시타 히데히사(下秀久)를 항복시켰다. 우에스기 씨가 화평 교섭을 위해 움직이는 사이에 시타 히데히사는 쇼나이 지방으로 진공하여 단기간에 옛 영지를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우에스기 군세를 격퇴한 공으로 요시아키가 쳐서 얻은 쇼나이 지방은 그대로 모가미 가문이 영유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우에스기 영지였던 오키타마 군(置賜郡)을 제외한 오늘날의 야마가타현(山形県) 전역과 유리 군(由利郡)[71] 57만 석 영지를 가지고 데와 야마가타번(出羽山形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또한 요시아키는 아키타 사네스에가 동군을 배신하였다고 이에야스 측에 참소하였고, 이는 사네스에가 히타치(常陸)로 이봉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2. 5. 에도 시대

에도 막부 성립 이후, 요시아키는 영내 부흥에 전력을 다했다. 백성들에게 매우 관대하여 요시아키 생존 중에는 농민 봉기(잇큐)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통치는 훗날 "모가미 겐고로(最上源五郎)는 요역(연공 이외의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72]

야마가타 성을 개축하여 국내에서 손꼽히는 넓이의 평지성으로 확장하고, 조카마치 정비에도 착수했다. 우선 상인마치(商人町) 정비를 위해 야마가타 성 아래에는 지자전이나 연공을 면제하고, 폭 4칸 반에서 5칸, 내부 길이 30칸을 기본으로 한 125평에서 150평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동시에 우슈 가도 · 사사야 가도 도로변에 정기 시장을 마련했다. 또 우에스기 가문으로부터 빼앗아 온 사카타 항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쇼나이에서 야마가타로 가는 2개 가도를 개수·확장했다. 모가미 강의 세 부분을 절개해 수운의 안전성을 높이고 영내 유통을 활발하게 하여 번 재정을 크게 비축하였다. 시키진마치(職人町)는 고멘마치(御免町)로서 제반 역할이 면제되었고, 기술자들 가운데에는 가신급 대우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당시 마치의 수는 31곳, 주택수는 2,319채에 인구 19,796명이었고 여기에 가신단을 더하면 인구는 3만 명을 넘어섰다.

다이호지 성(쓰루가오카 성)의 항공사진. 1976년 일본 국토교통성 국토화상정보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


치수 공사는 농업 부문 관련으로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기타다테 도시나가 · 신제키 히사마사 등에게 명하여 기타다테 다이옌 · 이나바 옌 등을 수리하여 용수 문제를 해결하고, 쇼나이 평야 개발을 진행하여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다. 이후 요시아키는 다이호지 성을 개축하여 쓰루가오카 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의 은거처로 삼았다.

요시아키와 그의 적남 요시야스의 관계는 처음에는 양호했으나 가신의 참언으로 험악해졌다. 이는 이에치카로 하여금 모가미 가문의 가독을 잇기를 원했던 막부나, 그것을 이용하려는 가신의 의도도 개입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게이초 8년(1603년, 1602년 또는 1611년 설도 있다), 요시야스가 누군가[73]에 의해서 암살됐다.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며, 요시미쓰의 의향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가신들의 단독 범행설도 있어 확실치 않다. 요시아키가 이에야스의 근시로 파견해 보낸 이에치카가 의외로 이에야스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요시야스의 폐적은 이러한 이에야스의 의향이 반영되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요시아키가 모가미 가문의 안녕을 도모하려던 생각이 오히려 역효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 이미 요시야스는 모가미 가문의 차기 당주로 가신들에게 자신의 이름자를 하사할 정도의 권한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요시야스의 죽음은 모가미 가문을 크게 흔들어 놓았고[74] 모가미 가문의 개역에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지적되고 있다. (다만 모가미 가문이 개역된 배경에는 이에치카 요절이나 가신들의 강소라는 요소도 크다는 의견도 있다). 성주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모가미 가문의 가신단이었기에 당주였던 요시아키 자신조차도 그들을 힘으로 통제할 수 없었던 점도 지적된다. 요시아키가 행한 요시야스에 대한 공양은 고마히메와 마찬가지로 극진했다고 한다.

한편 이에치카는 게이초 10년(1605년) 시종에 보임되었다.[75]

3. 요시아키 사후의 모가미 가문

요시아키 사후, 이에치카겐나 3년(1617년)에 급서하였다. 이에치카의 아들 요시토시가 뒤를 이었으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분쟁으로 모가미 가문은 크게 흔들렸다. 결국 요시아키 사후 9년 만인 겐나 8년(1622년) 모가미 가문은 개역(改易)당했다(모가미 소동). 요시토시 사후 고쿠다카(石高)는 1만 석에서 5천 석으로 줄었고, 모가미 가문은 고다이요리아이(交代寄合)로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이어졌다.

모가미 가문의 직계에서 먼 후손에 해당하는 가계는 오늘날 일본 간사이(関西) 지방에 살고 있다. 요시아키의 넷째 아들 야마노베 요시타다(山野辺義忠)의 가계는 미토 번(水戸藩) 가로(家老)로써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TV 시대극 『미토 고몬(水戸黄門)』에 등장하는 국가로(国家老) 야마노베 효고(山野辺兵庫)는 요시타다의 아들 야마노베 요시카타(山野辺義堅)로, 요시아키의 손자이다.

1924년(다이쇼 13년) 2월 11일, 일본 궁내성(宮内省)은 모가미 요시아키에게 정4위(正四位)를 추증했다. 1977년 야마가타시 가조 공원(霞城公園) 내에 "모가미 요시아키 공 용전의 상"이 건립되었고, 1989년 12월 1일 야마가타 시에 모가미 요시아키 역사관(最上義光歴史館)이 세워져 모가미 가문 사료를 전시하고 요시아키를 현창하고 있다.

4. 인물 및 일화


  • 덴분 15년(1546년) 1월 1일, 최상 의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노 소죠의 딸이며, 어린 시절 이름은 시라스마루였다.[21]
  • 에이로쿠 3년(1560년) 15세에 성인식을 치르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서 편휘를 받아 '''요시미쓰'''(義光)로 개명했다.
  • 요시아키(義光)의 이름은 "요시아키(よしあき)"로 읽는다. 그는 친동생 보춘원(保春院)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히라가나로 "요시아키(よしあき)"라고 적었다.
  • 집단 전술과 화기에 일찍부터 주목하여, 사카타 항(酒田港)을 통해 상방(上方)에서 다량의 총기와 화약을 입수하고, 사카이(堺)에서 철포장(鉄砲鍛冶)을 초빙했다. 덴쇼 2년(1574년) 다테(伊達)·가미야마(上山) 세력과의 전투, 간가에(寒河江) 성 공략에서 집단 사격으로 적을 격퇴했고, 하세도(長谷堂) 성 전투에서도 우에스기(上杉) 세력은 모가미(最上) 세력의 사격에 고전했다.
  • 친동생 보춘원(保春院)은 다테 테루무네(伊達輝宗)에게 시집갔으며, 그녀와 주고받은 서신이 많이 남아있다. 오사키 전투(大崎合戦)·게이쵸 데와 전투(慶長出羽合戦)에서 보춘원이 친정인 모가미 가문을 염려하여 다테 가문과의 관계 중재를 시도한 편지들이 존재한다. 반면, 조카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와는 인연이 깊어 친척으로서의 서신도 있었지만, 적대자로서 도발적인 서신 왕래도 있었다. 소부지령(惣無事令) 이후 마사무네가 제삼자에게 요시아키(義光)를 풍자적으로 평가한 편지도 많다.
  •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우필(右筆)을 거의 쓰지 않고 자필로 편지를 썼다.
  • 요시아키(義光)에 대해 당대에 그려진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으며, 널리 알려진 에보시(烏帽子) 차림 초상화는 근세 이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 키가 180cm 이상으로 컸다고 전해진다.[39] 마츠오 고우지 야마가타 대학 명예교수는 「오우에이에이케이군키」 제25권에 6척(약 180cm)이 넘는다는 기록을 확인했다.[39] 요시아키(義光)가 전투에서 사용한 지휘봉은 일본도 두 자루 무게였다는 일화가 있다.[39]
  • 힘이 세고 무용이 뛰어났다. 에이로쿠 4년(1561년, 16세)에는 7, 8명이 겨우 움직이는 큰 돌을 혼자 굴렸다고 한다.
  • 『이세 이야기(伊勢物語)』 등 고전 문학에 친숙했고, 가신들에게도 문학을 장려했다.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에 관해서는 상락(上洛) 중 조아(乗阿)에게 강의를 듣고 면장(切紙)을 받았다. 그림 두루마리(絵巻物)·병풍(屏風)·도자기(陶器) 등 미술품도 수집했다.
  • 요시아키(義光)가 남긴 련가(連歌)는 현존 33권·248구로, 동시대 제후 중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斎) 다음으로 많다.
  • 최상 가문(最上家)은 대대로 종교를 보호했고, 요시아키(義光) 역시 신앙심이 깊었다. 애용하던 지휘봉에는 "'''세이와 천황(清和天皇) 말엽 야마가타(山形) 데와슈(出羽守) 유발승(有髪僧) 의광(義光)'''"이라고 새겨져 있다.
  • 야마가타 시의 「약사제 식목 시장(薬師祭植木市)」은 요시아키(義光)가 대화재로 소실된 녹지를 복구하고자 주민들에게 호소한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 야마가타 성(山形城)의 요시아키(義光) 상은 말이 두 발로 서 있는 드문 형태이다.

5. 평가

모가미 요시아키는 현대 야마가타시의 기초가 된 성곽 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모가미 강의 "삼난지(三難地)"를 통제하여 일본해에서 내륙으로의 항해를 더 안전하게 만들었고, 교토오사카의 문화를 야마가타로 가져왔다. 기타다세키(北田沢), 이나바제키(稲葉沢) 등지의 그의 댐 건설 프로젝트와 다른 관개 시설 개선 조치는 쇼나이 평야의 쌀 재배 발전에 기여했다.[20]

군기물에서는 요시아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리며,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다.


  • “의광공은 지(智), 인(仁), 용(勇)의 삼덕을 겸비하였고, 그 명성은 세상에 높았다. 주변 사람들이 따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최상 의광 이야기』)
  • “대략 우슈(羽州) 12군 중 아키타 조케(秋田城介)의 영토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람의 진퇴에 따랐으니, 이는 또한 의광의 지용이 조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아이즈 사케 합고』)
  • “무용은 사람들에게 뛰어났고, 특히 자비심이 깊어 여러 무사들을 깊이 위로하였으니, 마치 친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 같았다.” (『아이즈 사케 합고』)
  • “그 성품은 관대하고 온화하여 불의에 보복하지 않았고, 그러나 용맹하여 사악하지 않았다. 참으로 군주가 된다면, 신하가 되겠는가.” (『오슈 에이케이 군기』)


또한, “우슈의 여우”, “오슈의 용장”, “호장”(관직인 근위소장(近衛少將)의 한 명인 “호분랑장(虎賁郎將)”에서 유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6. 현대의 재조명

最上 義光|모가미 요시아키일본어는 덴분 15년(1546년)에 태어나 1570년 무렵 아버지 의수와의 갈등을 겪은 뒤 1571년 가독을 이어받았다.[24] 이후 1574년에 다시 부자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다테 테루무네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다테씨로부터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종래에는 의수가 요시미쓰 대신 차남 요시토키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것이 갈등의 원인으로 여겨졌으나, 1차 사료에는 요시토키의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오늘날에는 이 설은 요시토키의 존재를 포함하여 후대의 창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最上義光」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4
[2] 웹사이트 伊達と上杉の宿敵「最上義光」...梟雄と語られてきた戦国大名の知られざる素顔 https://rekishikaido[...] PHPオンライン 2024-06-14
[3] 웹사이트 Profile of Mogami Yoshiaki https://mogamiyoshia[...] 最上義光歴史館 2014
[4] 웹사이트 ◇◆中野義時は実在したか?◆◇◆ https://mogamiyoshia[...] 最上義光歴史館 2014
[5] 웹사이트 最上義光再考 誉田慶恩『奥羽の驍将 最上義光』の見直しを通じて」松尾剛次 https://mogamiyoshia[...] 最上義光歴史館 2014
[6] 논문 戦国大名最上氏の成立過程-元亀・天正初期の内訌をめぐって- Komazawa University (first published 1980) 2017
[7] 웹사이트 極悪非道の子殺し大名…権謀術数に長けた【最上義光】はどんな人生を送った? https://www.rekishij[...] ABC ARC, inc. 2023
[8] 서적 戦国なるほど人物事典: 100人のエピソードで歴史の流れがよくわかる https://books.google[...] PHP研究所 2003-05-21
[9] 웹사이트 「最上義光は残虐非道」に一石、武将・白鳥長久謀殺は信長の命令で実行か…山形大名誉教授が研究成果を披露 https://www.yomiuri.[...] The Yomiuri Shimbun 2024
[10] 서적 鶴岡市史 鶴岡市役所 1980
[11] 웹사이트 史料総覧 https://kokusho.nijl[...] 2024-06-25
[12] 논문 最上義康について Yamagata Historical Studies, vol. 43 and 44 2014
[13] 웹사이트 関ヶ原合戦と最上義光 http://www.mogamiyos[...] Mogami Yoshiaki Museum 2021-10-29
[14] 웹사이트 最上義光 長谷堂城の戦いで孤軍奮闘 https://www.sankei.c[...] The Sankei Shimbun 2015
[15] 서적 2012
[16] 서적 2011
[17] 서적 新編庄内人名辞典 庄内人名辞典刊行会編 1986
[18] 웹사이트 新発見、最上義光の書状紹介 27日、山形大でシンポジウム https://www.sankei.c[...] The Sankei Shimbun 2015
[19] 웹사이트 Mogami Yoshiaki http://www.mogamiyos[...] Mogami Yoshiaki Museum 2021-10-29
[20] 웹사이트 最上義光歴史館/施設の沿革と概要について https://mogamiyoshia[...] 最上義光歴史館 2014
[21] 웹사이트 Sakenobe Hidetsuna http://www.mogamiyos[...] Mogami Yoshiaki Historical Museum official 2021-10-24
[22] 서적 山形藩 雄山閣出版 1988
[23] 서적 中世出羽の領主と城館 奥羽史研究叢書2 高志書院 2002
[24] 논문 戦国大名最上氏の成立過程-元亀・天正初期の内訌をめぐって- 戎光祥出版 2017
[25] 논문 戦国期奥羽における保春院のはたらき-戦国時代の平和維持と女性- 吉川弘文館 2016
[26] 문서 閏5月11日付中山光直書状 横手市史 史料編 古代・中世
[27] 문서 史料総覧
[28] 문서 奥羽永慶軍記
[29] 문서 山形県史
[30] 서적 2016
[31] 문서 史料総覧
[32] 서적 2016
[33]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34] 문서 上杉景勝等二十八名連署起請文
[35] 논문 最上義康について 戎光祥出版 2017
[36] 서적 大日本史料
[37] 논문 北館文書
[38] 문서 てんどうのむかしばなし第二集
[39] 웹사이트 最上義光、やっぱり長身だった 山形大・松尾名誉教授「奥羽永慶軍記」で確認 https://www.yamagata[...] 山形新聞 2022-06-25
[40] 간행물 特別展 重要文化財 光明寺本 遊行上人絵 ─最上義光 没後四百年記念 全巻公開─ 山形市 2013-09
[41] 웹사이트 最上家をめぐる人々#8 【義光の妻たち① 大崎夫人/おおさきふじん】 https://sp.mogamiyos[...] 最上義光歴史館 2024-11-06
[42] 웹사이트 大蔵村その他の名所・旧跡 https://www.vill.ohk[...] 山形県最上郡大蔵村教育委員会 2024-11-06
[43] 서적 やまのべ風土記 私設 やまのべ文学会 1988
[44] 간행물 ふるさと寒河江の歴史 寒河江市教育委員会 2009
[45] 서적 徳川実紀 雄山閣出版 1988
[46] 논문
[47] 문서 교토로 가는 도중의 안전과 앞날의 무운장구를 빌며 요시아키의 어머니가 자수를 놓은 「문수보살기사상」(文殊菩薩騎獅像)이 현존하고 있다.
[48] 문서 요시아키의 어머니인 오노노 고쇼(에이호니永浦尼)는 일러도 게이초(慶長) 8년([[1603년]]) 늦봄 무렵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향 모가미 집안의 천수당관음(千手堂観音)에 봉납된 노래 편액의 존재를 통해 추측되는 것이다. 그가 읊었다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花を見ていまや手折らん千手堂 庭の千草もさかりなるらん」
[49] 서적 中世出羽の領主と城館 奥羽史研究叢書2 高志書院 2002
[50] 문서 아와노 도시유키(粟野敏之)는 다테 하루무네(伊達晴宗) ・ 데루무네(輝宗) 부자의 대립에 관해 모년 5월자로 모가미 집안의 중신(重臣) ・ 마키노 히사나카(牧野久仲)에게 보낸 에이린(모가미 요시모리)의 편지 내용을 들어 다테 부자의 내분은 모가미 부자의 내분보다도 뒤에 벌어진 일로, 마키노 히사나카는 겐키 원년 3월에 실각하여 다테 집안에서 쫓겨났으므로 요시아키의 가독 계승은 겐키 원년 이전의 일이라고 보고 있다. 다테 하루무네의 은거는 에이로쿠 7년([[1564년]]) 말에서 이듬해 봄 사이에 있었으므로 아와노는 요시아키가 원복한 시점과 멀지 않은 에이로쿠 4년(1561년)에서 이듬해(1562년)에 요시모리와 요시미쓰 부자의 대립과 우지이에의 간언에 의한 당주 교체가 이루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51] 논문 戦国大名最上氏の成立過程-元亀・天正初期の内訌をめぐって- 戎光祥出版
[52] 뉴스 일본 『야마가타 신문』(山形新聞) 헤이세이 6년 3월 4일자 조간 기사에는 덴쇼(天正) 5년([[1577년]]) 요시아키 또한 노부나가에게 알현하고 「모가미 데와노카미」(最上出羽守)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의 문서가 발견되었음을 보도하였다. 山形新聞 1994-03-04
[53] 문서 태합검지(太閤検地) 이전에는 모가미 군과 무라야마 군(村山郡)은 오늘날과 비교하면 서로 이름이 뒤바뀌어 있었다.
[54] 문서 이 전투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후세의 창작이었다는 설도 있다.
[55] 문서 요시아키는 요시히메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 다이묘들이 보는 앞에서 화목이라니, 굴욕스럽기 짝이 없다」(덴쇼 16년 7월 8일자)고 토로하다가, 다른 편지에서는 「요시히메 님의 활약하심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전해졌다고 한다(총무사령에 위반이 되므로 더 이상 싸울 수가 없다)」(덴쇼 17년 2월 12일자)라고도 서술하고 있어, 다테 마사무네와의 화의를 바라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56] 논문 戦国期奥羽における保春院のはたらき-戦国時代の平和維持と女性- 吉川弘文館
[57] 서적 横手市史 史料編 古代・中世
[58] 서적 史料総覧
[59] 서적 奥羽永慶軍記
[60] 서적 山形県史
[61] 서적 山形市史
[62] 문서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기 전에 요시아키가 아키타 사네스에(秋田実季)에게 보낸 편지에는 「늦게 참전한 것을 주인장을 받고 용서받았다」(遅参を御朱印状で認められている)라고 되어 있다.
[63] 문서 가미우라 군(上浦郡)의 일부
[64] 논문 伊達家文書 1590-12-26
[65] 서적 史料総覧
[66] 논문
[67]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68] 논문
[69] 문서 上杉景勝等二十八名連署起請文
[70] 문서 니시무라야마 군(西村山郡) 가와키타 정(河北町)
[71] 문서 사타케 씨와의 영토 교환
[72] 문서 사카이 다다카쓰와 맹인의 노래
[73] 문서 모가미 요시야스 제거 관련 설
[74] 논문 최상 의강에 관하여 戎光祥出版 2014
[75] 서적 대일본사료
[76] 서적 (제목 미상) 2016
[77] 서적 (제목 미상)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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