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고노에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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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고노에 내각은 1941년 7월 18일부터 1941년 10월 18일까지 93일간 재직했다. 도요다 데이지로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하여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미국은 일본 자산 동결 및 석유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고, 10월 하순까지 대미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외교적 해결이 없을 경우 개전을 결의하기로 했다. 고노에와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 간의 갈등, 조르게 사건 연루설 등으로 인해 1941년 10월 16일 내각이 총사직했으며, 후임으로 도조 히데키가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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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고노에 내각 | |
---|---|
내각 정보 | |
내각 명칭 | 제3차 고노에 내각 |
일본어 명칭 | 第3次近衛内閣 (だいさんじこのえないかく) |
대수 | 39대 |
국가 | 일본 |
존속 기간 | 1941년 7월 18일 ~ 1941년 10월 18일 |
정치 체제 | 일당 정부 |
정치 정당 | 대정익찬회 무소속 군부 |
총리 | 고노에 후미마로 |
이전 내각 | 제2차 고노에 내각 |
다음 내각 | 도조 내각 |
![]() |
2. 재직 기간
1941년 7월 18일부터 1941년 10월 18일까지 총 93일간 재직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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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각 구성
대신 직책 이름 정당 임기 시작 임기 종료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대정익찬회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외무대신 도요다 데이지로 style="color:inherit;background:#bfbfbf" | 군 (해군)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내무대신 다나베 하루미치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대장대신 오구라 마사쓰네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 style="color:inherit;background:#bfbfbf" | 군 (육군)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해군대신 오이카와 고시로 style="color:inherit;background:#bfbfbf" | 군 (해군)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사법대신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대정익찬회 1941년 7월 18일 1941년 7월 25일 이와무라 미치요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25일 1941년 10월 18일 문부대신 하시다 구니히코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농림대신 이노 히로야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상공대신 사콘지 세이조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체신대신 무라타 쇼조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철도대신 무라타 쇼조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척무대신 도요다 데이지로 style="color:inherit;background:#bfbfbf" | 군 (해군)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후생대신 고이즈미 지카히코 style="color:inherit;background:#bfbfbf" | 군 (해군)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국무대신 스즈키 데이이치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국무대신 히라누마 남작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국무대신 야나가와 헤이스케 style="color:inherit;background:#bfbfbf" | 군 (육군)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내각관방장관 도미타 겐지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내각법제국 장관 무라세 나오카이 style="color:inherit;background:;" | 무소속 1941년 7월 18일 1941년 10월 18일 colspan="6" | 출처:[2]
※ 내각 발족 당시(전 내각의 사무 인수는 제외).출신 국무대신 기타 연구회 1 style="text-align:left" | 화요회 1 국무대신 연 2 동화회 2 국무대신 연 3 무소속 클럽 1 style="text-align:left" | 군부 6 style="text-align:left" | 관료 2 법제국 장관, 내각서기관장 민간 2 style="text-align:left" | 15 국무대신 연 17
3. 1. 국무대신
1941년 7월 18일에 임명되어 93일간 재직하였다.
직명 | 대 | 씨명 | 출신 등 | 특명 사항 등 | 비고 | |
---|---|---|---|---|---|---|
내각총리대신 | 39 | 고노에 후미마로 | ![]() | 귀족원 무소속 (화요회) 공작 | 사법대신, 흥아원 총재 겸임 | 재임, 대정익찬회 총재 |
외무대신 | 57 | 도요다 데이지로 | 70px | 예비역해군 대장 (해대 갑종 17기) | 탁무대신 겸임 | 전임 |
내무대신 | 56 | 다나베 하루미치 | 70px | 귀족원 무소속 (무소속구락부) | ||
대장대신 | 43 | 오구라 마사쓰네 | 70px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 전임 | |
육군대신 | 29 | 도조 히데키 | 70px | 육군 중장 (육대 27기) | 대만 사무국 총재 겸임 | 유임 |
해군대신 | 21 | 오이카와 코시로 | 70px | 해군대장 (해대 갑종 13기) | 유임 | |
사법대신 | 43 | 고노에 후미마로 | ![]() | 귀족원 무소속 (화요회) 공작 | 내각총리대신 겸임 | 대정익찬회 총재 |
44 | 이와무라 미치요 | 70px | 사법성 | 첫 입각 | ||
문부대신 | 52 | 하시다 구니히코 | 70px | 민간 | 유임 | |
농림대신 | 19 | 이노 히로야 | 70px | 농림성 | 유임 | |
상공대신 | 22 | 사콘지 세이조 | 70px | 귀족원 무소속 (동화회) 예비역 해군 중장 (해대 갑종 10기) | 첫 입각 | |
체신대신 | 47 | 무라타 쇼조 | ![]() | 귀족원 무소속 (동화회) | 철도대신 겸임 | 유임 |
철도대신 | 22 | 무라타 쇼조 | 귀족원 무소속 (동화회) | 체신대신 겸임 | ||
탁무대신 | 20 | 도요다 데이지로 | 70px | 예비역 해군 대장 (해대 갑종 17기) | 외무대신 겸임 | 전임 |
후생대신 | 8 | 고이즈미 지카히코 | 70px | 예비역 육군 군의 중장 | 첫 입각 | |
국무대신 | - | 스즈키 데이이치 | 70px | 예비역 육군 중장 (육대 29기) | 기획원 총재 겸임 | 유임 |
국무대신 | - | 히라누마 기이치로 | 70px | 민간 남작 | 전임 | |
국무대신 | - | 야나가와 헤이스케 | 70px | 예비역 육군 중장 (육대 24기) | 전임 | |
colspan="7" style="font-size:smaller" | |
3. 2. 내각서기관장·법제국 장관
1941년 7월 18일 내각서기관장에는 토미타 겐지(내무성)가, 법제국 장관에는 무라세 나오카이(상공성)가 유임되었다.[3]직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
내각서기관장 | 토미타 겐지 | 55px | 내무성 | 유임 |
법제국 장관 | 무라세 나오카이 | 55px | 상공성 | 유임 |
3. 3. 정무차관
정무차관은 임명되지 않았다.3. 4. 참여관
참여관은 임명되지 않았다.4. 내각의 주요 정책 및 활동
제3차 고노에 내각은 제2차 고노에 내각의 내각 총사직 후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을 제외하고 재구성된 내각이다. 사실상 내각 개조의 형태였다. 마쓰오카의 후임 외무대신으로는 도요다 데이지로가 임명되었다.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 대사와의 협력을 위한 인사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는 미국의 강한 반발을 샀고, 미국은 일본 자산 동결 및 석유 수출 금지 조치를 취하며 미일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9월 6일 어전 회의에서 제국 국책 수행 요령이 결정되어, 10월 하순까지 대미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외교적 해결이 없을 경우 개전을 결의하기로 하였다.
오이카와 코시로 해군대신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각오로 교섭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은 강경론을 고수하며 고노에와 대립했다. 고노에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으나, 미국 측은 실무 협상을 우선시하여 무산되었다.
결국 10월 12일, 외무성의 대미 양보안을 두고 고노에와 도조는 다시 충돌했고, 10월 14일 각의에서 도조는 "감정적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 수상과는 만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같은 날 오자키 호츠미가 조르게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노에 내각 연루설까지 불거지면서 결국 10월 16일 내각은 총사직했다. 후임 수반으로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거론되었으나 기노 코이치 내대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5. 내각 총사퇴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마쓰오카 요스케 외상의 경질 후 도요다 데이지로를 외상으로 임명하여 미일 협상에 힘썼으나, 일본군의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인해 미국은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 수출을 금지하는 등 강경 대응을 하였다. 9월 6일 어전 회의에서 제국 국책 수행 요령을 결정, 10월 하순까지 대미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10월 상순까지 협상 가망이 없으면 개전을 결의하기로 하였다. 오이카와 코시로 해상은 대미 교섭을 격려했지만, 도조 히데키 육상은 철병 요구에 대해 육군 내 강경론을 내세우며 고노에와 대립했다.
고노에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미일 정상 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으나, 미국 측은 실무 교섭을 통한 사전 합의를 요구하여 무산되었다. 10월 12일, 외무성의 새로운 대미 양보안을 바탕으로 도조 육상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4일 각의에서 도조는 "감정적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 수상과는 만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같은 날, 조르게 사건 수사 과정에서 고노에의 측근인 오자키 호츠미가 체포되고, 고노에 연루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퇴진이 불가피해졌다. 10월 15일, 도조와 고노에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을 차기 수상으로 추천했지만, 기노 코이치 내대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1941년 10월 16일, 고노에는 총사직했고, 제3차 내각은 3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후임으로는 도조 히데키가 취임하여 도조 내각이 출범하였다. 쇼와 천황은 도조에게 "백지 환원의 어지"를 내려 국책 수행 요령을 재검토하게 했고, 개전 결의 기한은 소멸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Topics - A Window into the Early Showa Period
https://www.jacar.go[...]
2022-03-11
[2]
웹사이트
Third Konoe Cabinet
http://www.kantei.go[...]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昭和16年7月18日
[4]
문서
[5]
문서
[6]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昭和16年7月25日
[7]
문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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