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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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닌의 난은 1467년 일본 무로마치 시대에 발생한 대규모 내전으로,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주요 원인이었다. 쇼군의 동생과 아들 사이의 계승 분쟁, 유력 다이묘들의 갈등, 그리고 사회적 혼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교토를 중심으로 11년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아시카가 막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지방 영주들의 세력 확대를 가져와 센고쿠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교토는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사회,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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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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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오닌의 난 |
로마자 표기 | Ōnin no Ran |
한자 표기 | 応仁の乱 |
한자 표기 (신자체) | 応仁の乱 |
한자 표기 (구자체) | 應仁の亂 |
한국어 표기 | 오닌노 란 |
전쟁 정보 | |
분쟁 | 오닌의 난 |
날짜 | 1467년 ~ 1477년 |
장소 | 헤이안쿄, 교토 및 야마시로국 |
결과 |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승리, 양측 모두 군사적으로 지침, 오우치 가문 교토 포기. 호소카와 가문 쇼군 가문 장악, 아시카가 요시히사 쇼군 취임 교토 대부분 파괴 잇코잇키 발흥 하타케야마 가문 내부 내전 지속 쇼군 권력 붕괴, 센고쿠 시대 시작 |
이유 | 쇼군 후계자 문제, 권력 다툼 |
교전 세력 | |
동군 | 호소카와 씨 하타케야마 가문 (마사나가 지지파) 시바 가문 (요시토시 지지파) 기타 세력 |
서군 | 야마나 씨 오우치 가문 하타케야마 가문 (요시나리 지지파) 시바 가문 (요시카도 지지파) 기타 세력 |
지휘관 | |
동군 지휘관 | 호소카와 가쓰모토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기타 지휘관 |
서군 지휘관 | 야마나 소젠 오우치 마사히로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시바 요시카도 기타 지휘관 |
병력 규모 | |
동군 병력 | 약 160,000명 |
서군 병력 | 약 116,000명 |
기타 정보 | |
영향 | 막부와 슈고 다이묘의 쇠퇴 가속화, 센고쿠 시대 돌입 계기 막부 영향력은 유지되었으나, 메이오 정변 이후 센고쿠 시대 설도 존재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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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2. 배경
오닌의 난은 1467년부터 1477년까지 10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 약화와 유력 다이묘들의 세력 다툼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으며, 1461년에 걸쳐 일본 전국을 덮친 대기근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 그는 후계자 문제에도 소극적이어서, 1464년에는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이듬해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태어나자 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다.
요시마사의 부인 히노 도미코는 아들 요시히사를 쇼군으로 만들기 위해 야마나 소젠과 손을 잡았고, 요시미는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의 대립은 하다케야마 씨족과 시바 씨족 등 유력 다이묘 가문의 후계자 분쟁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1467년,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과 야마나 소젠이 이끄는 서군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초기에는 동군이 요시미를, 서군이 요시히사를 지지했지만, 1468년 요시미가 서군으로 넘어가면서 양측의 지지 대상이 바뀌었다.
오닌의 난은 단순한 쇼군 후계자 다툼을 넘어,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력 약화와 지방 세력의 성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각지의 다이묘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갔다.
'''전조'''[10]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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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쇼군이 됨. |
1445년 |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교토 간레이가 됨. |
1449년 |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간토에서 취임함. |
1457년 | 오타 도칸이 에도 성을 건설함. 아시카가 마사토모가 간토 통치를 위해 파견됨. |
1458년 | 요시마사가 새로운 무로마치 궁을 건설함. |
1464년 | 요시마사가 자신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미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정함. 히노 도미코는 이 결정에 반대하고 장래 자신의 아들이 쇼군이 되도록 군사적 지원을 구함. |
1465년 | 히노 도미코가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낳고 자신의 아들의 섭정을 자처함. |
1466년 | 야마나 소젠과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교토 근처에 군대를 집결시킴. |
2. 1. 시대적 배경
무로마치 시대는 '구세력의 몰락과 신흥세력의 대두'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 '명문'으로 불리던 무가(武家) ・ 공가(公家) 등 기존 지배세력은 가마쿠라 후기부터 농업 생산력 향상에 힘입어 성장한 고쿠진(國人) ・ 상인 ・ 농민 등에 의해 점차 기득권을 침식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층을 형성하던 슈고 다이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무로마치 막부는 이들 슈고 다이묘들의 합의제 연합정권이었다. 3대 쇼군 요시미쓰(義光), 6대 쇼군 요시노리(義敎) 시기를 제외하면 성립 초기부터 쇼군의 권력기반은 매우 취약했고, 슈고 다이묘로 성장한 슈고다이(守護代)나 유력 가신들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게다가 가독(家督) 상속 방식이 정해지지 않아, 막부와 슈고 다이묘 집안 사이의 후계자 문제를 비롯한 집안 싸움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이었다.
오닌의 난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계승 문제를 둘러싼 분쟁으로 시작되었다. 1464년, 요시마사는 후계자가 없었기에 그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에게 승려의 삶을 버리고 후계자가 될 것을 설득하여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1465년, 요시마사에게 예상치 못한 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나면서 이러한 계획은 의문에 휩싸였다. 이 유아의 탄생은 두 개의 경쟁 세력이 맞붙는 계승 위기를 불러왔다. 한쪽에는 쇼군과 그의 동생, 그리고 쇼군의 부관 호소카와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요시히사의 어머니 히노 토미코와 그녀의 동맹이자 여러 성의 수령이었던 야마나가 있었다.[10]
히노 토미코는 아들 요시히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서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구했다. 그녀는 야마나 소젠을 비롯한 유력한 사무라이 가문 지도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토미코와 야마나와는 대조적으로 요시미는 막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강력한 호소카와 가문의 지지를 받았다.
전쟁의 원인은 종종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계승 투쟁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아시카가 막부의 실질적인 권력은 유력한 다이묘들의 의회에 있었지만, 영향력 있는 다이묘들의 죽음과 쇼군 주변 여성들의 정치 개입으로 막부는 혼란에 빠졌다. 1441년부터 대중들은 몇 년마다 덕정령(덕치령)을 요구하며 막부 재정의 원천이었던 사케 저장소와 창고를 파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쇼군의 계승 분쟁 외에도 하다케야마 씨족과 시바 씨족의 계승 분쟁이 동시에 발생하여 전쟁에 영향을 미쳤다. 유력한 설에 따르면, 전쟁의 주된 원인은 호소카와 가쓰모토, 야마나 소젠 및 여러 지역의 다른 다이묘들이 참여한 가운데, 하다케야마 씨족 내부의 하다케야마 요시나리와 하다케야마 마사나가 사이의 계승 투쟁이었다.[2][3]
1467년, 이러한 갈등은 마침내 동군(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끌고 하다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아시카가 요시미가 포함됨)과 서군(야마나 소젠이 이끌고 하다케야마 요시나리, 시바 요시카도,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포함됨) 간의 오닌 전쟁으로 이어졌다.[4]
초기에는 동군이 아시카가 요시미를, 서군이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차기 9대 쇼군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을 싫어했던 아시카가 요시미는 이세로 도망쳐 키타바타케 씨족에게 피신을 청했고, 아시카가 요시미는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사이가 틀어졌다. 1468년 서군이 아시카가 요시미를 받아들이자 동군은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지지하게 되었다. 즉, 동군과 서군이 지지하는 후계자는 1년 만에 뒤바뀌었다.[5]
오닌 전쟁의 발발 원인은 다양하다. 분노한 막부 장군들 간의 다툼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설명이다. 10년간 지속된 이 전쟁의 초기 단계는 "더 큰 화재를 일으킨 작은 불꽃"에 불과했다. 무로마치 막부는 결과를 충분히 예상하지 못한 채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제약을 느슨하게 하였고, 이는 "새로운 에너지가 방출되고,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고, 새로운 부가 창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막부의 유력한 인물들이 교토에서 영향력을 다투는 동안, 지방의 주요 가문들은 자원을 축적하고 중앙 집권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점점 더 독립적으로 성장했다.[10]
'''전조'''[10]
연도 | 사건 |
---|---|
1443년 |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쇼군이 됨. |
1445년 |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교토 간레이가 됨. |
1449년 |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간토에서 취임함. |
1457년 | 오타 도칸이 에도 성을 건설함. 아시카가 마사토모가 간토 통치를 위해 파견됨. |
1458년 | 요시마사가 새로운 무로마치 궁을 건설함. |
1464년 | 요시마사가 자신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미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정함. 히노 토미코는 이 결정에 반대하고 장래 자신의 아들이 쇼군이 되도록 군사적 지원을 구함. |
1465년 | 히노 토미코가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낳고 자신의 아들의 섭정을 자처함. |
1466년 | 야마나 소젠과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교토 근처에 군대를 집결시킴. |
2. 2. 쇼군 요시마사의 나태함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어머니 히노 시게코(日野重子) 등 주변 인물들의 영향으로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성장했다. 취임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보이기도 했지만, 측근과 슈고 다이묘 사이의 대립으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자 다도와 정원 꾸미기 등에 빠져 막부 정치를 등한시했다.[1]조로쿠(長祿) 3년(1459년)부터 간쇼(寬正) 2년(1461년)에 걸쳐 일본 전국을 덮친 대기근(조로쿠·간쇼의 기근)에도 대책을 세우지 않는 등, 쇼군직을 버리고 은거할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후술할 쇼군 후계자 문제도 하루빨리 양위하기 위해 벌인 소동으로 추정된다.[1]
2. 3. 쇼군 후계자 대립과 가쓰모토와 소젠의 대립
1464년 11월 26일(12월 24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죠도지(淨土寺)의 승려가 된 동생 아시카가 기신을 환속시켜 아시카가 요시미로 개명하고, 차기 쇼군 후계자로 임명한 뒤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후견인으로 붙여주었다. 요시미는 이마데가와 저택(今出川邸)으로 옮겼다. 요시마사의 나이가 29살밖에 되지 않아 아들을 볼 가능성이 높았기에 요시미는 쇼군직 양위를 사양했지만, "향후 아들을 얻더라도 승려로 만들고 내 뒤를 잇게 할 생각은 없다"는 서약문까지 쓰면서 요시마사가 설득하여 쇼군 후계자가 되었다.1465년 11월 23일(양력 12월 11일), 요시마사와 히노 도미코 사이에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후에 요시히로로 개명)가 태어났다. 도미코는 아들을 쇼군에 앉히려 야마나 소젠에게 접근, 요시미의 쇼군직 취임을 저지하려 했다. 요시미의 후견인이었던 가쓰모토와 요시히사를 미는 소젠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막부의 가독 싸움은 전국의 슈고 다이묘를 가쓰모토파와 소젠파로 갈라놓았다. 하지만 요시히사가 태어나기 전부터 소젠은 여러 다이묘들과 파벌을 형성, 요시히사가 아닌 요시미와 결합하고 있었다.
1447년 가쓰모토가 소젠의 양녀를 정실로 삼은 이래 두 사람은 제휴관계에 있었고, 하타케야마 집안의 가독 싸움에서 협조하는 등 가쓰모토가 소젠을 돕기도 했다. 두 사람의 대립은 1465년부터 1474년 사이였고, 이 대립을 오닌의 난의 요인으로 보는 것은 《오닌기》의 서술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13][14][15]
2. 4. 다이묘 가문의 내분
무로마치 시대는 '구세력의 몰락과 신흥세력의 대두'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 명문 무가와 공가를 비롯한 기존 지배세력은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농업 생산력 향상으로 성장한 고쿠진, 상인, 농민 등에 의해 점차 기득권을 침식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층인 슈고 다이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무로마치 막부는 슈고 다이묘들의 합의제 연합정권이었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 시대를 제외하면 쇼군의 권력 기반은 매우 취약했고, 슈고다이나 유력 가신들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게다가 가독 상속 방식이 정해져 있지 않아 막부와 슈고 다이묘 집안 사이에 후계자 문제를 비롯한 집안 싸움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이었다.
이 무렵 유력 다이묘 가문에서는 가문을 통솔하는 가독 자리를 두고 심각한 내분이 발생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간레이 중 하나였던 유력 다이묘 가문 하타케야마 가문의 내분이었다. 당시 가문의 가독 하타케야마 모치쿠니는 동생 모치토요(持富)에게 가독을 물려주기 위해 모치토요를 양자로 들였으나, 에이쿄 9년(1437년)에 친아들 요시나리(義就)가 태어나자 분안 5년(1448년)에 모치토요를 폐적시키고 요시나리를 후계자로 교체했다. 2년 뒤에는 요시나리가 하타케야마 가문의 가독을 승계한다. 하지만 하타케야마 집안의 가신이었던 진보(神保)씨와 유사시(遊佐)씨 가문은 요시나리의 가독 승계를 인정할 수 없었고, 사망한 모치토요의 아들인 미사부로(弥三郞)를 가독으로 옹립하고자 계획했다(모치토요는 1452년에 이미 사망).
교토쿠 3년(1454년) 4월 3일, 하타케야마 모치쿠니가 진보 구니무네(神保国宗)를 주살하며 직접적인 숙청을 시작하자, 하타케야마 미사부로와 그 형제 하타케야마 마사나가(畠山政長)는 가쓰모토와 소젠에게로 달아났다. 가쓰모토와 소젠, 그리고 하타케야마씨 가신들 대부분의 지지를 얻어 8월 21일에 미사부로파는 모치쿠니의 저택을 습격했고, 모치쿠니는 8월 28일에 은거하고 요시나리는 교토에서 쫓겨났다. 쇼군 요시마사로부터 미사부로가 가독 계승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미사부로를 숨겨주었던 가쓰모토의 가신들에 대해서도 처형 명령이 내려진 것에 소젠은 격노하여 가쓰모토와 요시마사에 대해 반발했다. 쇼군 요시마사가 야마나 소젠을 토벌하려 했으나 가쓰모토의 탄원으로 소젠이 다지마국에 은거하는 것으로 처분이 결정되어 12월 6일에 소젠이 다지마 지역으로 낙향한다. 그러나 12월 13일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는 다시 군세를 이끌고 교토로 들어와 미사부로를 내쫓았고, 고쇼 4년(1455년) 3월 26일(양력 4월 12일)에 전임 가독이자 실권자인 하타카야마 모치쿠니가 사망하면서 다시 하타케야마 집안의 가독이 된 요시나리는 미사부로파 세력에 대한 탄압을 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에 수반된 군사행동을 대부분 쇼군 요시마사와의 상의를 거친 것이라고 사칭하는 바람에 차츰 요시마사의 신임을 잃어갔고, 결정적으로 가쓰모토의 영지인 야마시로국의 기쓰(木津)지역을 공격하면서 가쓰모토의 눈밖에 났다. 요시나리를 내쫓기 위해 미사부로를 옹립할 계획을 세우는 가쓰모토와는 달리, 조로쿠 2년에 사면되어 요시나리와 함께 야하타(八幡)의 신인(神人) 토벌에 나서기도 했던 소젠은 요시나리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으로 변해 있었다.
조로쿠 3년(1459년) 가까스로 사면받아 교토로 올라온 하타케야마 미사부로가 곧바로 사망하자 가쓰모토는 미사부로파 가신단과 함께 마사나가를 하타케야마 집안의 가독으로 추대했고, 간쇼 원년(1460년) 9월 20일에는 쇼군 요시마사도 마사나가의 가독 승계를 인정하면서 요시나리는 추방되었다. 이에 요시나리는 가와치국의 악산성(嶽山城)에서 농성하며 항전했고, 쇼군 요시마사의 토벌군이 악산성을 공격해 간쇼 4년(1463년) 4월 15일에 성이 함락되자 다시 기이국을 거쳐 요시노로 달아났다가 그 해 8월(쇼군 요시마사의 어머니가 사망)에 내려진 대사면령으로 사면되었다. 사면을 주도한 것은 쇼군의 측근인 이세 사다치카였는데, 마찬가지로 사면령 덕분에 운좋게 사면된 시바 요시토시(斯波義敏)의 첩이 바로 사다치카의 첩과 자매지간이었다는 점에서 가쓰모토와의 대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막부와 조정의 일관성없는 대응을 두고 당시에는 "공무(公武)의 성패 등 여러 일에 정체(正體)가 없다(公武御成敗諸事正体無し)"는 비판도 나왔다.[10]
하타케야마씨 집안뿐 아니라 시바씨, 도가시(富樫氏), 오가사와라(小笠原氏), 롯카쿠(六角氏) 등의 집안에서도 내부 다툼이 벌어졌는데, 막부가 이들 조정에 나섰으나 일관성이 없어 슈고 집안에 분열의 불씨만 남겼다.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 역시 오닌의 난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1464년, 요시마사는 후계자가 없었기에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에게 승려의 삶을 버리고 후계자가 될 것을 설득하여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1465년, 요시마사에게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태어나면서 경쟁 세력이 맞붙는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한쪽에는 쇼군과 그의 동생, 그리고 쇼군의 부관 호소카와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요시히사의 어머니 히노 도미코와 그녀의 동맹이자 여러 성의 수령이었던 야마나가 있었다.[10] 도미코는 아들 요시히사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서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구했고, 야마나 소젠의 지지를 확보했다. 반면 요시미는 막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호소카와 씨족의 지지를 받았다.[1]
1467년, 이러한 갈등은 동군(호소카와 가쓰모토,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아시카가 요시미)과 서군(야마나 소젠,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시바 요시카도, 아시카가 요시히사) 간의 오닌 전쟁으로 이어졌다.[4]
3. 경과
1464년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후계자가 없어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오닌의 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465년 요시마사에게 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나면서, 요시히사의 어머니 히노 토미코와 야마나 소젠을 비롯한 세력과 요시미,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비롯한 세력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10][1]
하다케야마 씨족과 시바 씨족의 계승 분쟁도 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다. 특히 하다케야마 요시나리와 하다케야마 마사나가 사이의 갈등은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 등 여러 다이묘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분쟁으로 이어졌다.[2][3]
1467년, 이러한 갈등은 동군(호소카와 가쓰모토, 하다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아시카가 요시미)과 서군(야마나 소젠, 하다케야마 요시나리, 시바 요시카도, 아시카가 요시히사)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4] 초기에는 동군이 아시카가 요시미를, 서군이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지지했지만, 1468년 서군이 아시카가 요시미를 받아들이면서 동군은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지지하게 되었다.[5]
고료캇센 이후 가쓰모토는 시코쿠 등 9개 구니의 군사를 교토에 집결시켰고, 1467년 3월 5일 연호가 분죠에서 오닌으로 바뀌었다. 4월에는 호소카와씨측 군사가 야마나씨측의 연공미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교토에서는 호소카와씨측 군사가 우지, 요도 등의 강에 놓인 다리를 불태우고 성문을 봉쇄했다. 5월에는 가쓰모토파인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하리마를 탈환하고, 다케다 노부카타, 호소카와 시게유키 등이 와카사의 잇시키씨 영지를 침공했다.
5월 26일, 잇시키 요시나오의 저택 근교가 점거되고, 다케다 노부카타, 호소카와 시게유키의 군이 요시나오의 저택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교토에서의 싸움(상경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쓰모토는 자신의 저택인 이마데가와에 본진을 두었고, 소젠 등은 5월 20일에 효조를 열어 고쓰지미치 오미야 동쪽에 본진을 두었다. 이때 양군의 위치에 따라 호소카와측은 동군, 야마나측은 서군으로 불렸으며, 양측의 병력은 《오닌키》에서는 각기 16만, 11만 이상이었다고 하나 과장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푸른색: 동군, 황색: 서군, 황록색: 내부분열
1467년 5월 26일, 야마나 소젠 저택 남쪽에 있던 호소카와 가쓰히사의 저택을 시바 요시카도의 부하인 아사쿠라 다카카게, 가이 씨 등의 서군이 공격했다. 호소카와 군과 격전을 벌였고 동쪽에서 원군으로 온 교고쿠 모치키요를 격퇴하기도 했다.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남하해 오기마치를 지나 이노쿠마를 치고 시바 씨의 군을 끌어들이자 호소카와 가쓰히사는 동쪽의 호소카와 시게유키 저택으로 달아났다. 가쓰히사의 저택을 불태운 서군은 시게유키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스모노데라, 햐쿠만벤의 불전, 혁당에도 불을 질러가며 공격했지만, 동군의 저항으로 다음날인 27일에 양군은 물러났다. 이 전투로 북쪽은 후나오카 산, 남쪽은 니조 대로까지 불탔다.[10]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28일에 양군에 화목을 명하고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군사 행동을 비난하면서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에게는 가와치 국으로 내려갈 것을 명하는 한편, 이세 사다치카에게 군을 이끌고 교토로 올라오도록 하는 등의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6월 3일에 가쓰모토의 요청으로 쇼군의 아기(牙旗)가 동군에 내려지고, 쇼군 요시마사는 아시카가 요시미에게 서군을 칠 것을 명했다. 6월 8일에는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이치조오미야에서 야마나 노리유키를 쳐부수고, 나아가 요시마사의 항복 권고에 동요한 시바 요시카도가 자신의 집에 칩거하자 동군은 요시카네의 저택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남북으로 니조에서 고료노 가쓰지까지, 동서로는 오토네리마치에서 무로마치까지 불탔다. 이때까지는 교토에 군세를 모으고 있던 동군이 우세했지만, 6월 14일에 야마토 국의 후루이치 다네나가, 19일에 기이 국의 하타케야마 마사쿠니 등 서군의 원군이 차례대로 도착하기 시작했고, 8월 23일에는 스오 국에서 오우치 마사히로가 이요 국의 고노 미치하루 등 사이고쿠 7개 구니의 군세 1만, 2천여 척의 수군을 이끌고 입경하면서 서군은 세력을 회복했다. 이 날 천황과 상황이 무로마치정으로 피난하고 요시미는 교토를 빠져나와 기타바타케 노리토모를 의지해 이세 국으로 달아났다. 이 시기를 즈음해 서군은 간레이 하지장을 통해 여러 군의 렌쇼에 의한 지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10]
오우치 마사히로는 8월 중에 후나오카 산에 진을 치고 9월 1일에는 요시나리 ·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쳤던 다케다 세력을 축출, 다케다가 버리고 간 산보인에 불을 질렀다. 6일에 쇼군 요시마사가 거듭 요시나리의 가와치 하향을 명했지만 요시나리는 따르지 않았다. 18일에 교토 교외의 난젠지 산에서도 전투가 발생했고(히가시이와쿠라 전투), 10월 3일에 발생한 쇼코쿠지 전투는 양군에 많은 사상자를 낸 격렬한 싸움이었지만 좀처럼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실된 쇼코쿠사 터에 시바 요시카도군이 진을 치고 요시나리가 야마나 소젠 저택 서쪽으로 옮기면서 동군은 열세에 몰렸다.[10]
조정에 대해서는 10월 3일에 고하나조노 법황이 고후쿠지에 야마나 소젠의 추토를 명하는 치벌 인센을 내린 것 말고도 12월 5일에 오기마치 산조 긴하루, 하무로 노리타다 · 미쓰타다 부자, 아노 스에토오 · 시미즈타니 사네히사 등 서군파로 몰린 구게의 관직과 작위 박탈이 결정되었다. 그들은 히노 도미코의 친가인 히노 집안과는 대립 관계에 있던 산조 집안의 일족이나, 친척이 대부분 요시미를 지지하고 있던 구교들이었다. 오닌 2년 3월 17일에 기타오지카라스마루에서 오우치 마사히로와 모리 도요모토 · 고바야카와 히로히라가 교전하고, 5월 2일에 호소카와 시게유키가 시바 요시카도의 저택을 공격하거나 5월 8일에 가쓰모토가 소젠의 진을 치고, 8월 1일에 가쓰모토의 군사가 쇼코쿠사 터의 요시나리의 진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투 장소는 점차 도성 밖으로 옮겨갔고, 야마시나, 도바, 사가에서 양군이 교전했다. 이 해에 요시카도는 막부와 적대하고 있던 간토의 아시카가 나리우지에게 화목을 제안하고 소젠과 요시나리가 연명으로 서명한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요시마사는 독단으로 화목을 도모한 요시카도를 7월 10일에 해임하고 가쓰모토를 간레이로 임명했으며, 요시카도의 가독 지위와 3개 구니의 슈고직도 마루오마루에게 넘겨버렸다.
오닌 2년 9월 22일, 이세에 체재하던 요시미는 가쓰모토나 쇼군 요시마사의 설득으로 동군에 가담했다. 교토로 돌아온 요시미는 히노 가쓰미쓰의 배척을 요시마사에게 호소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나아가 윤 10월 16일에는 분쇼 정변에서 요시미와 대립했던 이세 사다치카가 요시마사에 의해 정무에 복귀하고, 11월 10일에는 아리마 모토이에를 살해하는 등 요시마사는 확실하게 아시카가 요시히사 옹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가쓰모토도 요시미를 옹립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출가를 진행시켜, 요시미는 재차 히에이 산으로 출가해야 했다. 11월 23일, 서군은 히에이 산에 사자를 보내 요시미를 맞아들여 새로운 쇼군으로 추대하고, 오기마치 산조 긴하루, 하무로 노리타다 등도 이에 편입되어 서군은 '서막부'의 체재를 갖추었고, 요시미가 발급하는 문서에 의해 명령을 내리고 독자적으로 관위를 수여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동군의 '동막부'에서는 히노 가쓰미쓰, 이세 사다치카 등 요시마사 측근 세력이 커져서 분쇼 정변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쓰모토로서는 요시미를 굳이 서군에 보냄으로써 소젠에 우호적이었던 히노 도미코를 막부 내에서 고립시키려 했었다고도 추측되고 있는데, 이후 가쓰모토는 서군과의 싸움을 거의 실시하지 않고, 대신 오우치 씨와의 전투에 힘을 쏟았다. 이때 오우치 마사히로의 압도적인 군세 앞에 이미 교토가 있는 야마시로 국은 서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교토내에서는 산발적인 전투만 일어나는 대신 전장은 셋쓰 국 ・ 단바 국 ・ 야마시로로 옮겨가 있었다. 때문에 동군은 반오우치 활동을 부추겼는데, 분메이 원년 오우치 씨 집안의 중신으로 문무양도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던 마스다 가네타카가 이와미 국에서 오우치를 배반하고 규슈의 오토모 지카시게 ・ 쇼니 요리타다와 함께 오우치 마사히로의 숙부 오우치 노리유키를 끼고 서군측의 오우치령에 쳐들어갔고, 분메이 2년 2월에는 노리유키 본인이 마사히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반란은 모두 오우치 집안의 스에 히로모리에 의해 격퇴되었고 오우치 마사히로는 자신의 전력을 따로 끌어올 필요 없이, 7월 무렵까지 야마시로 전역을 서군이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동서 양군의 싸움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길어진 전란과 도적의 발호는 몇 번이나 전화로 불타버린 교토를 더욱 황폐화시켰다. 교토에 상경해 있던 슈고 다이묘의 영토에까지 전란이 확대되어 다이묘들은 교토에서의 싸움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다. 차츰 동서 양군의 사이에는 전쟁을 혐오하는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분메이 3년 5월 21일, 시바 요시카도의 중신으로 서군의 주력이었던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요시마사로부터 에치고 국 슈고직에 보임되어 동군으로 돌아서면서 동군은 결정적으로 유리해졌고, 고가 구보 아시카가 나리우지 추토를 재개할 여유도 생겼다. 한편으로 서군은 옹립을 주저하고 있던 고난초 세력의 오쿠라노미야 황자라 칭하는 인물을 옹립해 서진남제로 삼았으나 곧 내쫓았다. 이 해에 간토의 막부군이 단독으로 나리우지를 물리치고 나리우지의 본거지였던 고가 성을 함락시키면서 전세는 서군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분메이 4년에 이르러 가쓰모토와 소젠 사이에 오가기 시작한 화해 교섭도 야마나 가문과 대립하던 아카마쓰 마사노리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3월에 가쓰모토는 조카 가쓰유키를 폐적시키고 친자식으로 소젠의 외손자에 해당되는 소메이마루를 옹립한 뒤 삭발했다. 5월에는 소젠이 자살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은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분메이 5년 3월 18일과 5월 11일, 소젠과 가쓰모토가 차례대로 서거하고, 12월 19일에는 요시마사가 요시히사에게 쇼군직을 넘기고 은거했다. 막부에서는 요시히사의 생모인 도미코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고 요시마사의 실권은 차츰 사라져, 이듬해(1474년) 3월에 요시마사가 오가와도노에 새로 지은 저택으로 옮겨가고 무로마치도노에는 도미코와 쇼군 요시히사 모자만 남게 되었다. 고후쿠지의 벳토였던 진손은 "천하의 공사가 좋아져 여인에게서 계책이 나오게 되었으며, 구보(요시마사)는 큰 술, 여러 다이묘는 이누오모노와 같이, 천하가 태평한 때와 같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분메이 6년 4월 3일, 소젠의 손자 야마나 마사토요와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이에 화목이 성립되었다. 나아가 이 무렵 서군의 잇시키 요시나오의 아들 요시하루가 요시마사 앞으로 출두하고, 단고 잇시키 씨 집안도 동군에 귀순했다. 그 후로도 동군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아카마쓰 마사노리, 서군은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 오우치 마사히로를 중심으로 타성적인 소규모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서군의 도키 나리요리의 가신으로 미노 국의 슈고다이였던 사이토 묘슌은 활발한 군사활동으로 미노 · 오미 국 · 이세에 출병해, 에치젠 국에서는 시바 요시카도의 중신 가이 도시미쓰와 아사쿠라 다카카게를 서로 화목시켰다. 가이 도시미쓰는 이듬해인 7년(1475년) 2월에 도토미 국 슈고 대리에 임명되면서 동군으로 돌아섰고, 고립한 요시카도는 11월에 오와리 국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요시토시파의 슈고 대리 오다 도시사다와 충돌, 이후 행방불명된다.
분메이 7년에는 화목의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어 9월에 요시마사가 오우치 마사히로에게 '세상무위(世上無爲)'의 문서를 보내고 12월에는 요시미가 요시마사에게 공순할 것을 맹세했으며 요시마사도 요시미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분메이 9년 9월 22일에는 주전파의 한 사람이었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마사나가를 추토한다는 명분으로 가와치로 내려가고, 오우치 마사히로 등의 여러 다이묘도 11월 11일에 각기 철수하면서 서군은 사실상 해체되어, 교토에서의 전투는 수습되었다. 요시미도 도키 나리요리와 함께 미노로 갔다. 9일 뒤 막부에 의해 '천하 태평'의 자축연이 열림으로서 11년에 이르는 오닌의 난은 막을 내렸다.
応仁の乱일본어은 장기화되면서 교토 시가지는 불모지로 황폐해졌다. 각지의 슈고 다이묘들은 교토에서의 싸움에 전념할 수 없게 되었고, 막부 권력도 크게 실추되었다. 동군과 서군 양측에는 전쟁을 싫어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10]
1471년, 서군의 주력이었던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에치젠 국 슈고직을 보장받고 동군으로 돌아섰다. 이는 하극상의 사례로, 동군이 결정적으로 유리해졌다. 1472년에는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 사이에 화의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아카마쓰 마사노리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1473년, 소젠과 가쓰모토가 잇달아 사망했다.[10]
1474년,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야마나 마사토요와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이에 화목이 성립되었고, 잇시키 요시하루도 동군에 귀순했다. 그러나 서군의 사이토 묘춘은 화목에 반대하여 각지에 출병했다.
1475년, 시바 요시카도의 중신 가이 도시미쓰가 동군에 항복하고, 시바 요시카도는 오와리 국으로 내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 히노 가쓰미쓰가 사망하면서 화목의 흐름은 일시적으로 막혔다. 1476년,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아시카가 요시미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면서, 화목의 흐름이 빨라졌다.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는 오우치 마사히로의 항복으로 고립될 것을 두려워하여 1477년 가와치 국으로 내려갔다. 마사히로는 동막부에 정식으로 항복했고, 스오 국 등 4개국의 슈고직을 보장받았다. 오우치 군이 교토에서 철수하고, 하타케야마 요시무네와 도키 시게요리도 귀국했다. 아시카가 요시미 부자는 미노 국으로 물러났다. 1477년 11월 20일, 막부는 "천하 평온"을 선언하며 11년에 걸친 오닌의 난이 종결되었다.
전후,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를 제외한 모든 무장이 사면되었다. 요시나리는 가와치 국과 야마시로 국에서 계속 저항했지만, 1485년 야마시로 국에서 국인 잇키가 발생하여 철수했고, 1486년에 사면되면서 오닌의 난의 전후 처리가 완료되었다.
3. 1. 분조의 정변과 고료갓센
1466년 7월 23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측근 이세 사다치카, 계경진수 등의 진언에 따라 시바씨 종가인 무위가의 가독을 갑자기 시바 요시카도에게서 빼앗아 시바 요시토시에게 주었다. 8월 25일에는 에치젠, 오와리, 토토미 수호직을 요시토시에게 주고, 요시카도를 토벌하도록 명령했다.[16] 그러나 호소카와 가쓰모토는 이를 거부했고, 야마나 소젠 또한 요시카도를 위해 싸우겠다고 표명했다.[16] 사다치카 등 측근들은 수호 다이묘의 저항으로 궁지에 몰렸다.9월 5일, 이세 사다치카가 요시마사에게 하타케야마 요시미의 처단을 호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시마사는 일단 이를 인정했으나, 9월 6일에 요시미는 거처였던 이마데가와 덴을 빠져나와 소젠의 저택을 거쳐 가쓰모토의 저택으로 옮겼다.[16] 가쓰모토는 소젠과 협력하여 아시카가 요시미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에 따라 요시마사는 이세 사다치카에게 할복을 명령했다. 사다치카는 도망쳤고, 계경진수, 시바 요시토시, 아카마쓰 마사노리도 실각하여 교토를 떠났다. 유력한 측근을 잃은 요시마사의 영향력은 현저히 저하되었고 14일에 시바 가의 가독은 시바 요시카도에게 돌아갔다.

1466년 12월, 7년 전 추방 이후 기나이 근국에서 저항·도피를 계속해 온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대군을 이끌고 상경하여 센본지조인(교토시기타구)에 진을 쳤다. 그동안 연합했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이었지만, 하타케야마 씨의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는 입장을 달리했기 때문에, 양 하타케야마의 항쟁이 다시 중앙으로 옮겨져 긴장이 고조되면서 대립하게 된다.
새해가 밝은 1월 2일(1467년2월 6일), 쇼군 요시마사는 정월의 관례인 가스가 만리코지의 하타케야마 저택(마사나가 측)으로의 행차를 취소하고 무로마치 정에 요시나리를 초대하고, 더욱 압박을 가하듯 야마나 저택의 연회에 참석하여 요시나리·소젠 측을 지지하는 자세를 보였다. 1월 6일에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의 간레이 직을 파면하고, 하타케야마 저택을 요시나리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이에 대해 가쓰모토는 무로마치 정을 포위하여 쇼군으로부터 요시나리 토벌령을 얻으려고 했지만, 가쓰모토 부인(소젠의 딸)이 미리 소젠에게 정보를 흘렸기 때문에, 소젠·요시나리·시바 요시카도(간레이)가 선제적으로 무로마치 정을 점거하고, 가쓰모토 측은 고쇼마키에 실패했다.
1월 18일(2월 22일), 마사나가는 자택에 불을 지르고 상고령신사(교토시 가미교구)에 진을 치고 항전 태세를 보였다. 요시나리는 천황과 상황 등을 무로마치 정으로 피신시켜 쇼군과 함께 붙잡고, 가쓰모토·마사나가·교고쿠 모치키요의 군대가 이를 고쇼마키했다. 이에 이르러 쇼군 요시마사는 하타케야마 씨의 사투 개입을 금지했지만, 소젠과 야마나 마사토요(소젠의 손자)·시바 요시카도·아사쿠라 다카카게(시바 씨 슈쿠로) 등은 이를 무시하고 요시나리를 지원했다. 요시마사의 명령에 따라 마사나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 가쓰모토는 '궁시(弓矢)의 도(道)'를 저버린 자로 비난받았다. 요시나리 측은 샤카도에서 출병하여 고료 신사의 마사나가 군을 공격했다.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지만, 마사나가는 한밤중에 신사에 불을 지르고 자결한 척하며 도망쳤다. 가쓰모토 저택에 숨었다고 한다. 요시마사의 중립은 쇼군가 근신인 봉공중의 주장에 따른 것이며 그의 본심인지 여부는 확증이 없고, 합전 종결 전에 마사나가에 대한 처벌 인선이 나온 점이나 마사토요나 요시카도 등이 처벌받은 흔적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시점의 요시마사는 소젠과의 연합에 기울었을 가능성도 있다.[16]
3. 2. 전야
1464년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후계자가 없어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오닌의 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465년 요시마사에게 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나면서, 요시히사의 어머니 히노 토미코와 야마나 소젠을 비롯한 세력과 요시미,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비롯한 세력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10][1]하다케야마 씨족과 시바 씨족의 계승 분쟁도 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다. 특히 하다케야마 요시나리와 하다케야마 마사나가 사이의 갈등은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 등 여러 다이묘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분쟁으로 이어졌다.[2][3]
1467년, 이러한 갈등은 동군(호소카와 가쓰모토, 하다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아시카가 요시미)과 서군(야마나 소젠, 하다케야마 요시나리, 시바 요시카도, 아시카가 요시히사)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4] 초기에는 동군이 아시카가 요시미를, 서군이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지지했지만, 1468년 서군이 아시카가 요시미를 받아들이면서 동군은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지지하게 되었다.[5]
고료캇센 이후 가쓰모토는 시코쿠 등 9개 구니의 군사를 교토에 집결시켰고, 1467년 3월 5일 연호가 분죠에서 오닌으로 바뀌었다. 4월에는 호소카와씨측 군사가 야마나씨측의 연공미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교토에서는 호소카와씨측 군사가 우지, 요도 등의 강에 놓인 다리를 불태우고 성문을 봉쇄했다. 5월에는 가쓰모토파인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하리마를 탈환하고, 다케다 노부카타, 호소카와 시게유키 등이 와카사의 잇시키씨 영지를 침공했다.
5월 26일, 잇시키 요시나오의 저택 근교가 점거되고, 다케다 노부카타, 호소카와 시게유키의 군이 요시나오의 저택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교토에서의 싸움(상경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쓰모토는 자신의 저택인 이마데가와에 본진을 두었고, 소젠 등은 5월 20일에 효조를 열어 고쓰지미치 오미야 동쪽에 본진을 두었다. 이때 양군의 위치에 따라 호소카와측은 동군, 야마나측은 서군으로 불렸으며, 양측의 병력은 《오닌키》에서는 각기 16만, 11만 이상이었다고 하나 과장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3. 3. 본격화된 전쟁
1467년 5월 26일, 야마나 소젠 저택 남쪽에 있던 호소카와 가쓰히사의 저택을 시바 요시카도의 부하인 아사쿠라 다카카게, 가이 씨 등의 서군이 공격했다. 호소카와 군과 격전을 벌였고 동쪽에서 원군으로 온 교고쿠 모치키요를 격퇴하기도 했다.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남하해 오기마치를 지나 이노쿠마를 치고 시바 씨의 군을 끌어들이자 호소카와 가쓰히사는 동쪽의 호소카와 시게유키 저택으로 달아났다. 가쓰히사의 저택을 불태운 서군은 시게유키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스모노데라, 햐쿠만벤의 불전, 혁당에도 불을 질러가며 공격했지만, 동군의 저항으로 다음날인 27일에 양군은 물러났다. 이 전투로 북쪽은 후나오카 산, 남쪽은 니조 대로까지 불탔다.[10]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28일에 양군에 화목을 명하고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군사 행동을 비난하면서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에게는 가와치 국으로 내려갈 것을 명하는 한편, 이세 사다치카에게 군을 이끌고 교토로 올라오도록 하는 등의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6월 3일에 가쓰모토의 요청으로 쇼군의 아기(牙旗)가 동군에 내려지고, 쇼군 요시마사는 아시카가 요시미에게 서군을 칠 것을 명했다. 6월 8일에는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이치조오미야에서 야마나 노리유키를 쳐부수고, 나아가 요시마사의 항복 권고에 동요한 시바 요시카도가 자신의 집에 칩거하자 동군은 요시카네의 저택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남북으로 니조에서 고료노 가쓰지까지, 동서로는 오토네리마치에서 무로마치까지 불탔다. 이때까지는 교토에 군세를 모으고 있던 동군이 우세했지만, 6월 14일에 야마토 국의 후루이치 다네나가, 19일에 기이 국의 하타케야마 마사쿠니 등 서군의 원군이 차례대로 도착하기 시작했고, 8월 23일에는 스오 국에서 오우치 마사히로가 이요 국의 고노 미치하루 등 사이고쿠 7개 구니의 군세 1만, 2천여 척의 수군을 이끌고 입경하면서 서군은 세력을 회복했다. 이 날 천황과 상황이 무로마치정으로 피난하고 요시미는 교토를 빠져나와 기타바타케 노리토모를 의지해 이세 국으로 달아났다. 이 시기를 즈음해 서군은 간레이 하지장을 통해 여러 군의 렌쇼에 의한 지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10]
오우치 마사히로는 8월 중에 후나오카 산에 진을 치고 9월 1일에는 요시나리 ·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쳤던 다케다 세력을 축출, 다케다가 버리고 간 산보인에 불을 질렀다. 6일에 쇼군 요시마사가 거듭 요시나리의 가와치 하향을 명했지만 요시나리는 따르지 않았다. 18일에 교토 교외의 난젠지 산에서도 전투가 발생했고(히가시이와쿠라 전투), 10월 3일에 발생한 쇼코쿠지 전투는 양군에 많은 사상자를 낸 격렬한 싸움이었지만 좀처럼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실된 쇼코쿠사 터에 시바 요시카도군이 진을 치고 요시나리가 야마나 소젠 저택 서쪽으로 옮기면서 동군은 열세에 몰렸다.[10]
조정에 대해서는 10월 3일에 고하나조노 법황이 고후쿠지에 야마나 소젠의 추토를 명하는 치벌 인센을 내린 것 말고도 12월 5일에 오기마치 산조 긴하루, 하무로 노리타다 · 미쓰타다 부자, 아노 스에토오 · 시미즈타니 사네히사 등 서군파로 몰린 구게의 관직과 작위 박탈이 결정되었다. 그들은 히노 도미코의 친가인 히노 집안과는 대립 관계에 있던 산조 집안의 일족이나, 친척이 대부분 요시미를 지지하고 있던 구교들이었다. 오닌 2년 3월 17일에 기타오지카라스마루에서 오우치 마사히로와 모리 도요모토 · 고바야카와 히로히라가 교전하고, 5월 2일에 호소카와 시게유키가 시바 요시카도의 저택을 공격하거나 5월 8일에 가쓰모토가 소젠의 진을 치고, 8월 1일에 가쓰모토의 군사가 쇼코쿠사 터의 요시나리의 진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투 장소는 점차 도성 밖으로 옮겨갔고, 야마시나, 도바, 사가에서 양군이 교전했다. 이 해에 요시카도는 막부와 적대하고 있던 간토의 아시카가 나리우지에게 화목을 제안하고 소젠과 요시나리가 연명으로 서명한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요시마사는 독단으로 화목을 도모한 요시카도를 7월 10일에 해임하고 가쓰모토를 간레이로 임명했으며, 요시카도의 가독 지위와 3개 구니의 슈고직도 마루오마루에게 넘겨버렸다.
오닌 2년 9월 22일, 이세에 체재하던 요시미는 가쓰모토나 쇼군 요시마사의 설득으로 동군에 가담했다. 교토로 돌아온 요시미는 히노 가쓰미쓰의 배척을 요시마사에게 호소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나아가 윤 10월 16일에는 분쇼 정변에서 요시미와 대립했던 이세 사다치카가 요시마사에 의해 정무에 복귀하고, 11월 10일에는 아리마 모토이에를 살해하는 등 요시마사는 확실하게 아시카가 요시히사 옹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가쓰모토도 요시미를 옹립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출가를 진행시켜, 요시미는 재차 히에이 산으로 출가해야 했다. 11월 23일, 서군은 히에이 산에 사자를 보내 요시미를 맞아들여 새로운 쇼군으로 추대하고, 오기마치 산조 긴하루, 하무로 노리타다 등도 이에 편입되어 서군은 '서막부'의 체재를 갖추었고, 요시미가 발급하는 문서에 의해 명령을 내리고 독자적으로 관위를 수여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동군의 '동막부'에서는 히노 가쓰미쓰, 이세 사다치카 등 요시마사 측근 세력이 커져서 분쇼 정변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쓰모토로서는 요시미를 굳이 서군에 보냄으로써 소젠에 우호적이었던 히노 도미코를 막부 내에서 고립시키려 했었다고도 추측되고 있는데, 이후 가쓰모토는 서군과의 싸움을 거의 실시하지 않고, 대신 오우치 씨와의 전투에 힘을 쏟았다. 이때 오우치 마사히로의 압도적인 군세 앞에 이미 교토가 있는 야마시로 국은 서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교토내에서는 산발적인 전투만 일어나는 대신 전장은 셋쓰 국 ・ 단바 국 ・ 야마시로로 옮겨가 있었다. 때문에 동군은 반오우치 활동을 부추겼는데, 분메이 원년 오우치 씨 집안의 중신으로 문무양도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던 마스다 가네타카가 이와미 국에서 오우치를 배반하고 규슈의 오토모 지카시게 ・ 쇼니 요리타다와 함께 오우치 마사히로의 숙부 오우치 노리유키를 끼고 서군측의 오우치령에 쳐들어갔고, 분메이 2년 2월에는 노리유키 본인이 마사히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반란은 모두 오우치 집안의 스에 히로모리에 의해 격퇴되었고 오우치 마사히로는 자신의 전력을 따로 끌어올 필요 없이, 7월 무렵까지 야마시로 전역을 서군이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동서 양군의 싸움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길어진 전란과 도적의 발호는 몇 번이나 전화로 불타버린 교토를 더욱 황폐화시켰다. 교토에 상경해 있던 슈고 다이묘의 영토에까지 전란이 확대되어 다이묘들은 교토에서의 싸움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다. 차츰 동서 양군의 사이에는 전쟁을 혐오하는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분메이 3년 5월 21일, 시바 요시카도의 중신으로 서군의 주력이었던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요시마사로부터 에치고 국 슈고직에 보임되어 동군으로 돌아서면서 동군은 결정적으로 유리해졌고, 고가 구보 아시카가 나리우지 추토를 재개할 여유도 생겼다. 한편으로 서군은 옹립을 주저하고 있던 고난초 세력의 오쿠라노미야 황자라 칭하는 인물을 옹립해 서진남제로 삼았으나 곧 내쫓았다. 이 해에 간토의 막부군이 단독으로 나리우지를 물리치고 나리우지의 본거지였던 고가 성을 함락시키면서 전세는 서군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분메이 4년에 이르러 가쓰모토와 소젠 사이에 오가기 시작한 화해 교섭도 야마나 가문과 대립하던 아카마쓰 마사노리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3월에 가쓰모토는 조카 가쓰유키를 폐적시키고 친자식으로 소젠의 외손자에 해당되는 소메이마루를 옹립한 뒤 삭발했다. 5월에는 소젠이 자살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은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분메이 5년 3월 18일과 5월 11일, 소젠과 가쓰모토가 차례대로 서거하고, 12월 19일에는 요시마사가 요시히사에게 쇼군직을 넘기고 은거했다. 막부에서는 요시히사의 생모인 도미코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고 요시마사의 실권은 차츰 사라져, 이듬해(1474년) 3월에 요시마사가 오가와도노에 새로 지은 저택으로 옮겨가고 무로마치도노에는 도미코와 쇼군 요시히사 모자만 남게 되었다. 고후쿠지의 벳토였던 진손은 "천하의 공사가 좋아져 여인에게서 계책이 나오게 되었으며, 구보(요시마사)는 큰 술, 여러 다이묘는 이누오모노와 같이, 천하가 태평한 때와 같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분메이 6년 4월 3일, 소젠의 손자 야마나 마사토요와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이에 화목이 성립되었다. 나아가 이 무렵 서군의 잇시키 요시나오의 아들 요시하루가 요시마사 앞으로 출두하고, 단고 잇시키 씨 집안도 동군에 귀순했다. 그 후로도 동군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아카마쓰 마사노리, 서군은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 오우치 마사히로를 중심으로 타성적인 소규모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서군의 도키 나리요리의 가신으로 미노 국의 슈고다이였던 사이토 묘슌은 활발한 군사활동으로 미노 · 오미 국 · 이세에 출병해, 에치젠 국에서는 시바 요시카도의 중신 가이 도시미쓰와 아사쿠라 다카카게를 서로 화목시켰다. 가이 도시미쓰는 이듬해인 7년(1475년) 2월에 도토미 국 슈고 대리에 임명되면서 동군으로 돌아섰고, 고립한 요시카도는 11월에 오와리 국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요시토시파의 슈고 대리 오다 도시사다와 충돌, 이후 행방불명된다.
분메이 7년에는 화목의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어 9월에 요시마사가 오우치 마사히로에게 '세상무위(世上無爲)'의 문서를 보내고 12월에는 요시미가 요시마사에게 공순할 것을 맹세했으며 요시마사도 요시미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분메이 9년 9월 22일에는 주전파의 한 사람이었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마사나가를 추토한다는 명분으로 가와치로 내려가고, 오우치 마사히로 등의 여러 다이묘도 11월 11일에 각기 철수하면서 서군은 사실상 해체되어, 교토에서의 전투는 수습되었다. 요시미도 도키 나리요리와 함께 미노로 갔다. 9일 뒤 막부에 의해 '천하 태평'의 자축연이 열림으로서 11년에 이르는 오닌의 난은 막을 내렸다.
3. 4. 전란의 장기화와 종결
応仁の乱일본어은 장기화되면서 교토 시가지는 불모지로 황폐해졌다. 각지의 슈고 다이묘들은 교토에서의 싸움에 전념할 수 없게 되었고, 막부 권력도 크게 실추되었다. 동군과 서군 양측에는 전쟁을 싫어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10]1471년, 서군의 주력이었던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에치젠 국 슈고직을 보장받고 동군으로 돌아섰다. 이는 하극상의 사례로, 동군이 결정적으로 유리해졌다. 1472년에는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 사이에 화의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아카마쓰 마사노리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1473년, 소젠과 가쓰모토가 잇달아 사망했다.[10]
1474년,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야마나 마사토요와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이에 화목이 성립되었고, 잇시키 요시하루도 동군에 귀순했다. 그러나 서군의 사이토 묘춘은 화목에 반대하여 각지에 출병했다.
1475년, 시바 요시카도의 중신 가이 도시미쓰가 동군에 항복하고, 시바 요시카도는 오와리 국으로 내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 히노 가쓰미쓰가 사망하면서 화목의 흐름은 일시적으로 막혔다. 1476년,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아시카가 요시미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면서, 화목의 흐름이 빨라졌다.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는 오우치 마사히로의 항복으로 고립될 것을 두려워하여 1477년 가와치 국으로 내려갔다. 마사히로는 동막부에 정식으로 항복했고, 스오 국 등 4개국의 슈고직을 보장받았다. 오우치 군이 교토에서 철수하고, 하타케야마 요시무네와 도키 시게요리도 귀국했다. 아시카가 요시미 부자는 미노 국으로 물러났다. 1477년 11월 20일, 막부는 "천하 평온"을 선언하며 11년에 걸친 오닌의 난이 종결되었다.
전후,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를 제외한 모든 무장이 사면되었다. 요시나리는 가와치 국과 야마시로 국에서 계속 저항했지만, 1485년 야마시로 국에서 국인 잇키가 발생하여 철수했고, 1486년에 사면되면서 오닌의 난의 전후 처리가 완료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오닌의 난 이후, 아시카가 막부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사실상 호소카와 가문이 실권을 장악했고, 아시카가 쇼군들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1490년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쇼군이 되었으나, 호소카와 관령은 1493년 그를 몰아내고 다른 아시카가인 요시즈미를 쇼군으로 세웠다. 1499년 요시타네는 오우치 가문의 지원을 받아 야마구치로 이동했다.
1507년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당했고, 1508년 요시즈미는 교토를 떠났으며, 오우치 가문은 쇼군직을 요시타네에게 복귀시켰다. 이후 쇼군 막부의 꼭두각시 정부 장악권을 둘러싼 분쟁이 이어졌다.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후, 그의 양자 다카쿠니와 스미모토가 관령 계승을 놓고 싸웠지만, 스미모토 자신은 그의 가신 중 한 명의 꼭두각시였다. 이는 오닌의 난 이후 전쟁의 특징으로, 높은 이상이나 단순한 영토 욕심보다는 꼭두각시 정부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것이었다.[10]
호소카와 가문은 1558년 가신 가문인 미요시에게 배신당할 때까지 쇼군을 장악했다. 강력했던 오우치 가문 또한 1551년 가신인 모리 모토나리에게 멸망했다.[10]
전국 시대 말기에는 겨우 10여 개의 다이묘 가문만 남았다. 오닌의 난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수도 밖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내전이었다.[10] 예를 들어, 호소카와 가문은 오우치 가문의 영지에서 내분을 조장하려고 했고, 이 내분은 결국 오우치 가문으로 하여금 항복하고 떠나도록 강요했다. 오닌의 난 종식 이후, 가신들이 다이묘를 정복하려는 시도나 계승 분쟁에 외부 다이묘가 개입하는 등 이러한 유형의 내전은 일본 전역에 만연했다.
학자들은 "전국 시대"(일본어로는 중국식 용어인 ''센고쿠 지다이'')라는 용어의 적절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많은 학자들은 일본이 본질적으로 온전했고, 천황과 쇼군이 적어도 명목상으로 전국을 지휘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국 시대"가 아니라 "전국 영주 시대"였다고 주장한다.[10] 마크 라비나[8], 메리 엘리자베스 베리, 콘래드 토트먼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구니(지방)가 준독립적인 국가와 비슷했고, 따라서 이 용어는 다소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개별 다이묘에게는 막대한 손실이었고, 1세기의 분쟁으로 일본 영주들의 대부분이 약화되어, 오다 노부나가를 시작으로 일본 통일의 세 명의 위대한 인물들은 단일 통일 군사 정부를 군사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더 쉬웠다.
동양사학자 나이토 고난은 강연 『오닌의 난에 대해』에서 오닌의 난 전후를 "가장 중요한 시대"라고 지적하고, "대체로 오늘날의 일본을 알기 위해 일본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고대의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충분합니다"라고 발언하여 고대사학자들과 논쟁을 일으켰다.
4. 1. 막부 권위의 실추와 하극상 풍조
오닌의 난으로 인해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3대 쇼군 요시미쓰, 6대 쇼군 요시노리 시기를 제외하면 쇼군의 권력 기반은 매우 취약했고, 슈고다이(守護代)나 유력 가신들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가독(家督) 상속 방식이 정해지지 않아 막부와 슈고 다이묘 집안 사이에 후계자 다툼을 비롯한 집안 싸움이 일어나기 쉬웠다.[10]오닌의 난 이후, 아시카가 막부는 사실상 호소카와 가문이 실권을 장악했고, 아시카가 쇼군들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1507년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당한 후, 그의 양자 다카쿠니와 스미모토는 관령 계승을 놓고 싸웠지만, 스미모토 자신은 그의 가신 중 한 명의 꼭두각시였다. 이는 오닌의 난 이후 전쟁의 특징으로, 높은 이상이나 단순한 영토 욕심보다는 꼭두각시 정부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것이었다.[10]
호소카와 가문은 1558년 가신 가문인 미요시에게 배신당할 때까지 쇼군을 장악했다. 강력했던 오우치 또한 1551년 가신인 모리 모토나리에게 멸망했다.[10]
오닌의 난은 신분과 사회의 유동화를 가속화시켰다. 다가 다카타다, 우라가미 노리무네, 사이토 묘춘, 아마고 키요사다 등 수호가(守護家)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가진 국인(国人)이 등장했다. 또한 동서 양군은 편을 얻기 위해 기존의 가격(家格)을 무시한 서임을 행했다.
문명 7년(1468년),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제국의 사태는 매사 힘의 법칙에 따른다(諸国の沙汰は力次第である)”라고 말하며 수호가 다른 국을 침략하는 것도 인정했다. 이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의 가격 질서는 붕괴되었고, 신분 질서가 유동화되었다. 권위와 재정을 잃은 수호는 국인과 가신단에 대한 지배력을 현저히 저하시켰다. 국인과 가신들은 수호의 영향을 배제하고 자신의 기반을 굳히며 영주화해 갔다.
그동안 교토에 머무르는 것이 원칙이었던 수호는 자신의 영국을 지키기 위해 하국(下国)으로 내려가, 수호대에게 맡겼던 영국 경영을 자신의 권위로 행하려 했다. 이로 인해 수호는 막부의 통제를 벗어났고, 막부는 단젠(段銭) 등의 징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일부 수호는 영주화를 강화함으로써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이미 난 중에 수호대나 가신에게 권력을 빼앗긴 자도 있었고, 몰락한 수호도 많았다. 이 기존의 가격 질서를 깨는 풍조는 하극상(下克上)이라고 불리며, 센고쿠 시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수호 재경제(守護在京制)의 붕괴로 문명 18년(1486년)에는 교토에 남은 수호가 셋쓰(摂津)와 탄바(丹波)를 기반으로 하는 호소카와 씨 일문만 남았다. 수호의 협력을 얻을 수 없게 된 막부는 쇼군 근신인 봉공중(奉公衆)과 봉행중(奉行衆)에 의한 운영을 강요받게 되었고, 기나이 정권(畿内政権)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4. 2. 사회·문화적 변화
오닌의 난으로 교토의 상경구(上京)는 불타버렸지만, 상공업자들이 거주하던 하경(下京)은 남아 상업이 흥성하게 되었다.[29] 교토를 떠난 사람들은 주변 도시나 지방 영지로 피난했다. 1479년 무로마치 궁(花の御所)과 내궁 건설이 시작되었지만, 도시 황폐화로 전염병, 화재, 도적, 잇키 등이 빈번했다. 교토에 머물던 슈고 다이묘와 가신들이 영국의 정세 불안으로 귀국하면서 교토 재건은 더디게 진행되었다.조주(町衆) 주도로 1500년 기온마츠리(祇園祭)가 재흥되었는데, 이는 사회 불안 속에서 신앙심이 고조된 결과로 볼 수 있다. 1498년경부터 교토 주민에 대한 지코센(地子銭) 징수가 증가했고, 1508년 이후 사카야야쿠(酒屋役) 징수 강화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교토 인구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오닌의 난에서는 정규 무사가 아닌 아시가루(足輕)가 활약했다. 이전까지는 기마 무사 중심의 소규모 전투였으나, 오닌의 난에서는 대규모 전투가 계속되면서 병력 부족에 시달린 양군이 병참과 토목 작업에 종사하던 아시가루를 전력에 포함시켰다. 아시가루는 창을 주 무기로 사용하며 집단전을 벌였고, 게릴라전을 펼치기도 했다.
아시가루는 도적 등 무법자를 많이 포함하여 시가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치조 가네요시(一条兼良)는 『표담치요(瓢箪窶)』에서 "낙중낙외(洛中洛外)의 여러 사찰과 공가(公家) 문적(門跡)의 멸망은 그들이 행한 바이다"라고 비난했다. 한편, 도다이지(東大寺) 등 권문 사찰은 자위를 위해 아시가루를 고용하기도 했다.
오닌의 난 이후, 아시카가 막부는 완전히 무너졌다. 호소카와 씨(細川氏)가 실권을 장악하고 아시카가 쇼군은 꼭두각시가 되었다. 1490년 요시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가 쇼군이 되었으나, 호소카와 간레이(管領)는 1493년 그를 몰아내고 다른 아시카가인 요시즈미를 쇼군으로 세웠다. 1499년 요시타네는 오우치 씨(大内氏)의 지원을 받아 야마구치에 도착했다.
1507년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암살당하고, 1508년 요시즈미는 교토를 떠났으며, 오우치 씨는 쇼군직을 요시타네에게 복귀시켰다. 이후 쇼군 막부의 꼭두각시 정부 장악권을 둘러싼 분쟁이 이어졌다.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후, 그의 양자 다카쿠니와 스미모토가 간레이 계승을 놓고 싸웠지만, 스미모토 자신은 그의 가신 중 한 명의 꼭두각시였다. 이는 오닌의 난 이후 전쟁의 특징으로, 꼭두각시 정부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것이었다.[10]
호소카와 씨는 1558년 가신 가문인 미요시 씨(三好氏)에게 배신당할 때까지 쇼군을 장악했다. 오우치 씨 또한 1551년 가신인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에게 멸망했다.[10]
전국 시대 말기에는 겨우 10여 개의 다이묘 가문만 남았다. 오닌의 난의 중요한 결과는 수도 밖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내전이었다.[10]
학자들은 "전국 시대"라는 용어의 적절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많은 학자들은 일본이 본질적으로 온전했고, 천황과 쇼군이 적어도 명목상으로 전국을 지휘했기 때문에 "전국 시대"가 아니라 "전국 영주 시대"였다고 주장한다.[10] 마크 라비나[8], 메리 엘리자베스 베리, 컨래드 토트먼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구니(지방)가 준독립적인 국가와 비슷했고, 따라서 이 용어는 다소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개별 다이묘에게는 막대한 손실이었고, 1세기의 분쟁으로 일본 영주들의 대부분이 약화되어, 오다 노부나가를 시작으로 일본 통일의 세 명의 위대한 인물들은 단일 통일 군사 정부를 군사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더 쉬웠다.
교토는 전쟁으로 황폐화되었고, 16세기 중반까지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다. 교토는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도시에 대한 전략 폭격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교토에서 "전쟁 전"이란 제2차 세계 대전이 아니라 오닌 전쟁을 의미한다.
나이토 고난(内藤湖南)은 응인의 난 전후를 "가장 중요한 시대"라고 지적하고, "오늘날의 일본을 알기 위해 일본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고대의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응인의 난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충분합니다"라고 발언하여 고대사학자들과 논쟁을 일으켰다. 응인의 난 이전에는 역사 자료 소실로 인해 불명확한 점이 많다.
수호와 고쿠진(国人)에 의해 일원지행(一円知行)화가 진행되면서, 공가(公家)와 사찰의 장원(荘園)은 횡령되었다. 막부의 권위가 저하됨에 따라 장원제도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수입이 끊긴 공가는 몰락하였고, 조정 행사나 관위 승진에 대한 관심도 잃었다. 간로지 지카나가(甘露寺親長)는 일기에 "고관 무익(高官無益)なり"라고 적었으며, 1472년에는 고노에다이쇼(近衛大将) 희망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치조 노리후사(一条教房)처럼 교토를 떠나는 공가나, 마치 히로미쓰(町広光)처럼 집을 의도적으로 단절시키는 공가까지 나타났다. 니시카와 후사토미(西川房任)의 자손이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国)를 섬기며 야쿠시지 구니나가(薬師寺国長)의 기시(寄子)가 되는 등, 공가 신분을 버리는 예도 있었다.[27] 조정 수입도 격감하여, 즉위례(即位礼)나 대상례(大喪の礼) 등의 의식을 거행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전국 시대에는 헌금에 의한 매관(売官)이 행해지게 되었고, 이는 교토 문화가 지방에 전파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468년경 전화로 교토의 사찰과 공가, 무가 저택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류주국사(類聚國史) 등 교토에 있던 많은 역사 자료가 소실되거나 유실되어, 그 이전의 역사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교토칠구관(京都七口關)은 양군의 쟁탈전이 되어 물자 유입이 정체되었다. 아시가루의 방화와 약탈이 겹쳐 교토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심한 곤궁에 빠졌다. 1473년에는 역병이 유행하여 야마나 소젠(山名宗全)과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도 목숨을 잃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는 이를 돌보지 않고 주연에 빠져들었고, 오가와 저택(小河邸)과 지쇼지(慈照寺) 긴카쿠(銀閣)를 건설했다. 히노 도미코(日野富子)는 곤궁에 빠진 동서 양군의 수호에게 금전을 대출하고, 쌀의 투기를 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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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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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国合戦大事典 〈第5巻〉 岐阜県 滋賀県 福井県
新人物往来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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