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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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사여론》은 아라이 하쿠세키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에게 강의하기 위해 저술한 일본 역사서로, 1712년에 초고가 완성되었다. 이 책은 일본의 역사를 '천하구변오변설'에 따라 아홉 번의 변천과 다섯 번의 변천을 거쳐 도쿠가와 정권이 성립되었다고 설명하며, 천황, 공가, 무가의 삼중 정치 체제를 분석한다. 하쿠세키는 '안(按)하건대'라는 비평을 통해 유교적 역사관을 드러냈으며, 이전 역사서들과 달리 권력 이동 과정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하지만 자료 출처 불분명, 편향된 인물 평가 등의 비판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설득력 있는 시대 구분을 제시하여 정치사 서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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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여론 | |
---|---|
개요 | |
제목 | 독사여론 |
원어 제목 | 読史余論 (일본어) |
저자 | 아라이 하쿠세키 |
언어 | 한문 |
국가 | 일본 |
발표 연도 | 1716년 |
내용 | |
주제 | 역사 비평 |
범위 | 일본 역사를 중심으로 중국과 한국사를 포괄 |
특징 | 역사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적인 시각 제시 |
사상적 기반 |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 |
구성 | |
권수 | 3권 |
내용 구성 | 상권: 일본 건국 신화와 초기 역사 비판 중권: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 역사 비판 하권: 무로마치 시대와 에도 시대 초기 역사 비판 |
영향 | |
영향 | 에도 시대 후기 실학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줌 |
평가 | 일본 역사 연구에 비판적 시각을 확립하는 데 기여 |
2. 성립
아라이 하쿠세키 본인이 쓴 《독사여론》의 자발(自跋)에는 "이 세 책은 쇼토쿠 2년(1712년) 봄, 여름 동안에 자리를 해 주셔서 고금(古今)을 논해 말씀드릴 때의 강장(講章)의 초본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초본이 완성된 것은 그 이전이라는 것이 자발을 통해 알 수 있다.[7] 하쿠세키가 주군으로 섬겼던 쇼군 이에노부에게 《통감강목》을 진강하면서 일본 고래의 치란흥망(治乱興亡)의 연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8] 이에노부를 위해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에노부의 역사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하쿠세키 자신이 총괄적으로 개진한 내용들을 모은 것이 바로 이 《독사여론》인 것이다.
《독사여론》은 총 3권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제1권 첫머리에는 '천하구변오변설(天下九変五変説)'을 제시하여, 후지와라 정권 성립 이후 무가(武家) 정권, 도쿠가와 정권으로 이어지는 권력 변동 과정을 설명한다. 하쿠세키는 역사의 발전을 '대세(大勢)'로, 체제 전환을 '변화(変)'로 표현하고, 유교적 덕치(徳治) 관념을 바탕으로 정치 권력의 이동을 설명한다. 중세 일본 정치사를 천황, 구게(公家), 무가(武家)의 삼중 구조로 파악하고, 각 세력 간의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서술하며, 중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안(按)하건대"라는 구절을 사용하여 비평을 덧붙여 이에노부의 정치적 판단에 참고 자료를 제공하고자 했다.
아라이 하쿠세키 생전에 《독사여론》은 이미 초본과는 별도로 두 종의 사본이 있었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관직에서 물러나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722년 어느 날 하쿠세키가 문하생 도이 모토나리(다이라노 모토나리)와 지나간 선대의 일을 회고할 때까지 《독사여론》은 회중용 강장인 채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후 도이 모토나리가 하쿠세키의 자필 초본을 글자를 분간하기 쉽도록 원본보다 글씨를 약간 크게 해서 필사하고 이 사본에 하쿠세키는 자발을 붙였다(모토나리본). 하쿠세키의 둘째 아들인 요시노리도 도이 모토나리의 사본을 바탕으로 부본을 만들려 하였으나 1723년 5월에 타계하였고, 요시노리의 외숙 아사쿠라 가게히라(朝倉景衡)가 문하생에게 명해 그 사업을 계속하게 해서 그 해 11월에 완성할 수 있었다(요시노리본).
《독사여론》은 처음 완성되었을 때는 총 5책(상권 2책, 중권 1책, 하권 2책)으로 나누었고, 110년 뒤인 1840년에도 이리타니(入谷)의 나카타 아키타다(仲田顯忠)가 목활자로 짜서 6책본으로 출판하였다. 이때 저본의 중권 끝에 있던 한문체의 하쿠세키의 발문을 하권 권말로 옮겼으며, 18년 뒤인 1858년에는 하기와라 유가 후지와라 기요미쓰(하쿠세키의 외손자)가 필사해 두었던 5책본의 사본을 저본으로 12책본을 간행하였다. 이밖에 기요미쓰의 사본을 저본으로 1906년 《아라이 하쿠세키 전집》 제3권, 1927년 간행한 《일본고전전집》, 그리고 요시노리본을 저본으로 하는 《참고독사여론》이 간행되었다.
3. 구성 및 내용
3. 1. 천하구변오변설
후지와라 정권 성립 이후 일본 역사의 큰 변화를 아홉 번(구변)의 무가 시대와 다섯 번(오변)의 도쿠가와 정권 성립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9] 아라이 하쿠세키는 역사의 발전을 「대세」, 체제의 전환을 「변화」(変)라고 표현하고, 이 변화에 따라 시대를 구획하여 역사를 서술했다.[9]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덕(徳)과 부덕(不徳)이라는 유교 관념을 차용했다.[9]
3. 2. 구게(公家)와 무가(武家)의 관계
하쿠세키는 중세 일본의 정치사를 구게(公家) 세력과 무가(武家) 세력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그 위에 의례적인 존재로서 천황이 있다고 보았다. 제1권에서는 구게가 점차 쇠퇴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제2권에서는 상고로 거슬러 올라가 무가의 성립과 발흥의 대세를 서술하였다. 제1권의 6·7·8·9의 「변」(変)은 제2권의 1·2의 「변」과 시대적으로 중복된다. 이는 일본의 천황·구게·무가의 삼중 정치 체제에서 유래하는 성쇠 교차를 서술하기 위해 하쿠세키가 의도한 구성이었다.[9]
3. 3. '안(按)하건대' 비평
본문 곳곳에 "안(按)하건대"라는 구절을 사용하여 중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하쿠세키 자신의 비평을 덧붙였다.[9] 이는 유교적 역사관을 계승한 것으로, 정치적 교훈을 제공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4. 이전 연대기와의 차이점
지엔의 《구칸쇼》는 불교적 관점을,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진노 쇼토키》는 신토적 관점을, 하야시 가호의 《일본 왕대 일람》은 신유학적 관점을 보여주었다.[2][3][4] 그러나 《독사여론》은 특정 종교나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정치 권력의 변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분석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역사서들과 차이를 보인다.
이전의 일본 역사서들은 과거가 현재의 '현상 유지'를 정당화하는지를 기록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위한 부분이 컸던 반면, 《독사여론》은 여러 세대에 걸쳐 권력이 이전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5]
5. 비판
주자학의 입장에서 《신황정통기》의 영향을 받아, 신기를 가졌던 고다이고 천황과 남조 정권을 정통으로 보면서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덕'을 변호하는 등 평가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6]
후쿠자와 유키치는 소수 지배층과 개인의 동향에만 집중하여 '대세의 변화'를 논했다고 비판했으며, 에도 막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물 평가를 편향적으로 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6] 또한, 자료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하야시 가호의 ''일본왕대일람''을 광범위하게 차용했다는 비판도 받았다.[6]
6. 의의 및 영향
《독사여론》은 일본 역사상 최초로 설득력 있는 시대 구분을 도입하여 정치사 서술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아라이 하쿠세키는 역사의 발전을 '대세'로, 체제 전환을 '변화'로 표현하고, 이 변화에 따라 시대를 구획하여 역사를 서술했다. 그는 변화의 원동력으로 유교 관념인 덕(徳)과 부덕(不徳)을 차용하여, 정치 실권이 천황에서 셋칸케(摂関家) ・ 상황(上皇) ・ 겐지(源氏) ・ 호조씨(北条氏)로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한다.[9]
하쿠세키는 중세 일본 정치사를 구게(公家)와 무가(武家) 세력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그 위에 의례적 존재로서 천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중국의 기전체나 편년체 형식이 일본의 복잡한 삼중 정치 체제를 설명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구게와 무가를 대립 관계로 설정하고 양 세력의 상관관계와 성쇠 교체를 이원적, 입체적으로 서술하고자 했다.
본문 곳곳에 '살피건대'(按ずるに)라는 표현으로 중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비평을 추가하여, 쇼군 이에노부의 정치에 참고가 되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이는 중국사의 논찬과 유사하며, 하쿠세키가 유교적 역사관을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독사여론》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사 연구에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역사 인식과 비교 연구하면 동아시아 역사학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6. 1. 한국사와의 비교 연구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역사 인식과 《독사여론》의 역사관을 비교하면, 양국 역사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할 수 있다. 특히, 실학자들의 북벌론과 《독사여론》의 무가 정권 옹호론을 비교하면 17~18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역사 인식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 보면, 《독사여론》의 권력 변동에 대한 관심은 한국 정치사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막부 중심의 역사관은 경계해야 한다.[1]참조
[1]
서적
Political Thought in Japanese Historical Writing: From Kojiki (712) to Tokushi Yoron (1712)
1991
[2]
서적
Gukanshō
1979
[3]
서적
Jinnō Shōtōki
1980
[4]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5]
서적
Japanese Historians and the National Myths, 1600–1945: The Age of the Gods and Emperor Jimmu
1997
[6]
서적
Japanese Historians
[7]
문서
[8]
문서
[9]
서적
일본사상전사
日本思想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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