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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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래읍성은 삼한시대부터 존재했던 동래 지역의 읍성으로, 고려 시대에 처음 수리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다. 고려 현종 12년(1021)에 수리되었고, 우왕 13년(1387)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일 외교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과 함께 일본군의 1차 공격 목표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영조 7년(1731)에 재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 현재는 부분적으로 복원되었으며, 동래읍성역사축제 등 다양한 행사와 더불어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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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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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명칭 | 동래읍성 (東萊邑城) |
로마자 표기 | Dongnaeeupseong |
위치 | |
위치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 |
상세 정보 | |
종류 | 읍성 |
지정 번호 |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 |
지정일 | 1972년 6월 26일 |
면적 | 103,647m² |
시대 | 고려 말 ~ 조선 시대 |
소유 | 부산광역시 외 |
관리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역사 | |
관련 사건 | 동래성 전투 |
2. 역사
삼한시대부터 동래에는 거칠산국, 내산국, 장산국, 독로국 등으로 불린 작은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1021년 고려사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고려 시대 늦어도 이 지역에 요새가 있었으며,[1] 1387년에 요새 건설 공사가 시작되어 한 달 넘게 지속되었다.[1] 조선 시대인 1446년에는 이 자리에 석성이 축조되었다.[1][2]
(임진왜란과 동래성 전투, 조선 후기 증축과 일제강점기 훼손, 해방 이후 복원 노력은 하위 섹션을 참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평지의 성벽은 대부분 철거되었고, 마안산을 중심으로 성곽의 모습만 겨우 남아있다.[5] 현재 북문과 옹성, 동장대, 서장대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되고 있다.[5]
2. 1. 임진왜란과 동래성 전투
삼한시대부터 동래에는 거칠산국, 내산국, 장산국, 독로국 등으로 불린 작은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년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성과 함께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1592-1598년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던 곳으로,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인 이 성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산 진성과 함께 왜적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5][1]
2. 2. 조선 후기 증축과 일제강점기 훼손
읍성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5] 동래읍성은 마안산을 거쳐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의 평탄한 지역을 포함하여 쌓은 읍성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5]왜적 방어의 제1관문인 이 성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산진성과 함께 왜적의 1차 공격 목표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592-1598년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으며,[1] 이후 파괴되어 수 세기 동안 방치되었다. 1731년에 요새를 재건하고 그 안에 읍성을 들였는데,[1][2] 당시 52,003명의 인원이 건설 공사에 동원되었다.[2] 둘레는 1729자였고, 4곳에 문을 만들었다.[5] 동문은 지희루, 서문은 심성루, 남문은 무우루, 암문(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작게 꾸민 성문)은 은일루라 하였다. 남문에는 양 날개가 달린 듯 좌우로 뻗은 성벽인 익성이 있고, 나머지 3개의 문에는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성문 밖으로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옹성을 두어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고 있다.[5]
1870년부터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하여 주 성벽과 여러 망루를 재건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1][2] 그러나 1910-1945년 일제강점기 동안 요새는 부분적으로 훼손되었는데,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성벽이 헐렸다.[1]
2. 3. 해방 이후 복원 노력
부산광역시는 1979년 동래읍성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이후 2022년까지 읍성에서 20여 차례의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어 읍성의 시설과 성격을 확인했다.[1] 조사 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과 인골이 발견되었으며, 일부는 부산 수안역에 전시되어 있다.[1]최근 몇 년 동안 읍성에서는 동래읍성역사축제가 열려 역사 관련 프로그램, 전통 놀이, 공연 등이 진행되고 있다.[3]
3. 구조 및 특징
임진왜란 이후 부분 보수되었던 동래읍성은 1731년(조선 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에 의해 크게 증축되었다. 이때 증축된 성이 현재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정비 계획 등으로 평지에 있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 모습이 남았다. 현재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성벽도 부분적으로 복원 및 보수 중이다.[5]
동래읍성은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 동래 시가지 중심 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쌓은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이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읍성이다.[5]
읍성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지만, 기초는 남아 있어 읍성의 형태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1] 읍성은 현재 주거 지역과 인접해 있으며, 지역 주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밤에는 산책로 주변에 조명이 켜진다.[4]
3. 1. 성문과 시설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읍성의 규모를 크게 고쳐 쌓았다. 이때 증축된 성곽 둘레는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 암문이 있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5] 동문에는 지희루, 서문에는 심성루, 남문에는 무우루, 암문에는 은일루가 있었다.[5]남문은 중요한 문루로,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을 둔 이중 구조인 익성(翼城)을 두었다. 나머지 3개의 문에는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성문 밖으로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옹성을 두어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했다.[5]
동래읍성은 대략 타원형이며 6개의 문이 있다. 각 문에는 문루가 있으며,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문루가 복원되었다.[1]
3. 2. 규모
1731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임진왜란 이후 부분 보수되었던 성을 나라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그 규모를 훨씬 크게 고쳐 쌓았다. 이때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5] Dongnae eupseong영어은 대략 타원형이며 6개의 문이 있다. 북쪽과 동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과 서쪽은 더 열린 지역에 위치해 있다. 남문은 읍성의 정문으로 여겨진다.[1]읍성은 내성과 외성을 가지고 있다. 읍성의 전체 성벽 길이는 2.7km이며, 이 중 1.3km가 도시화로 인해 파괴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5m이며, 상단 두께는 2.4m이다. 성벽의 기초는 작은 돌과 모래 점토로 이루어져 있다.[1]
4. 현대적 의의
동래읍성은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현대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래읍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으로, 임진왜란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겪은 장소이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은 오늘날에도 동래읍성을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과거를 기억하고 교훈을 얻는 공간으로 만든다.
최근 동래읍성에서는 동래읍성역사축제가 열리고 있으며[3], 주거 지역과 인접해 있어 지역 주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4]
4. 1. 동래읍성역사축제
최근 몇 년 동안 동래읍성에서 동래읍성역사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역사 관련 프로그램과 전통 놀이 및 공연이 열리고 있다.[3]4. 2. 접근성 및 활용
은 현재 주거 지역과 인접해 있으며, 지역 주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밤에는 산책로 주변에 조명이 켜진다.[4]참조
[1]
논문
동래읍성지 (東萊邑城址)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7-25
[2]
웹사이트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 - 부산역사문화대전
https://busan.grandc[...]
2024-07-25
[3]
웹사이트
Dongnaeeupseong History Festival, a reenactment of the historical day on Dongnae Hill
https://www.visitbus[...]
2024-07-25
[4]
웹사이트
Dongnaeeupseong Walled Town is Busan’s original attraction!
https://www.visitbus[...]
2024-07-25
[5]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6]
문서
원래는 갈마봉성이였으나 임진왜란에 석축을 헐어낸 후 일본식으로 재구축 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성북왜성 영토로 변했다.
[7]
간행물
당감동 성지 2차 발굴조사
https://museum.busan[...]
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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