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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세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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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미트리 세냐빈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활약한 러시아 해군 제독이다. 그는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지중해 원정에 참여하여 해군 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다르다넬스 해협 봉쇄 및 아토스 해전 승리를 이끌었다. 1807년 틸지트 조약 이후, 세냐빈은 리스본에서 외교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뛰어난 외교술로 함대를 보존했다. 이후 불명예를 안고 은퇴했으나, 1820년대에 현역으로 복귀하여 나바리노 해전에 참여했으며, 그의 이름은 여러 함선과 지명에 사용되어 기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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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세냐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드미트리 니콜라예비치 세냐빈
드미트리 니콜라예비치 세냐빈
원어 이름Дми́трий Никола́евич Сеня́вин (드미트리 니콜라예비치 세냐빈)
출생일1763년 8월 17일
출생지칼루가주 보롭스크
사망일1831년 4월 17일
사망지상트페테르부르크
소속러시아 제국
복무 기간1777년–1813년, 1825년–1830년
최종 계급제독
지휘발트 함대
가족알렉세이 세냐빈 (대고모부)
군사 경력
주요 참전 전투/전쟁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년–1792년)
피도니시 해전
오차코프 공방전
칼리아크라곶 해전
나폴레옹 전쟁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제2차 이오니아 제도 원정}}
카타로 전투 (1806년)
라구사 전투 (1806년)}}
쿠르촐라 전투}}
브라차 전투
러시아-튀르크 전쟁 (1806년~1812년)
제2차 이오니아 제도 원정
다르다넬스 해전 (1807년)

아토스 해전
영국-러시아 전쟁 (1807년–1812년)
그리스 독립 전쟁
나바리노 해전
훈장

2. 초기 생애 및 해군 복무

2. 1. 가문 배경

2. 2. 초기 복무

3. 우샤코프 휘하 복무 (1787-1800)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 세냐빈은 피도니시 해전과 오차코프 해전에 참전했고, 전자의 승리를 황후에게 알리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그는 1788년에 부관장으로 승진했다.[5] 그는 칼리아크라 해전에서 전함 ''나바르키아''를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지만,[5] 우샤코프의 신중하고 지연적인 접근 방식에 인내심을 갖지 못했고, 그의 권위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경비대에 갇히고 계급 강등 위협을 받았다. 포템킨 공작은 세냐빈과 그의 동료를 화해시켰고, 우샤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냐빈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독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1798-1800년 우샤코프의 지중해 원정에서, 1798-1799년에 그는 참여했는데,[5] 세냐빈은 72문의 대포를 갖춘 기함 ''성 베드로/Святой Пётрru''를 지휘했다. 그의 선원들은 프랑스 점령 하의 산타 마우라 성을 레프카다에서 공격했고, 코르푸 점령에 참여했다. 원정이 끝나자 세냐빈은 헤르손 항과[5] 세바스토폴 항을 관리했다. 1804년, 그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레발의 탈린 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5]

3. 1.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1792)

드미트리 세냐빈은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피도니시 해전과 오차코프 해전에서 활약했다.[5] 피도니시 해전의 승전 소식을 황후에게 알리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되었으며, 1788년 부관장으로 승진했다.[5]

칼리아크라 해전에서 전함 '나바르키아'를 지휘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5] 우샤코프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포템킨 공작은 우샤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냐빈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독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하며 그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3. 2. 지중해 원정 (1798-1800)

세냐빈은 1798년부터 1800년까지 표도르 우샤코프지중해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72문 함포를 갖춘 기함 ''성 베드로''를 지휘했다. 그의 선원들은 프랑스 점령 하의 레프카다에 있는 산타 마우라 성을 공격했고, 코르푸 점령에 참여했다. 원정이 끝난 후, 세냐빈은 헤르손 항과 세바스토폴 항을 관리했다. 1804년, 그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레발 (탈린 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4. 지중해 원정 (1806-1807)

알렉산드르 1세아드리아해에서 나폴레옹의 확장을 저지하고자 1806년 부제독 세냐빈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지중해 원정을 시작했다.[6] 9월까지 남부 아드리아해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력을 재확립하고 두브로브니크의 해상 무역을 방해했으며, 레시나 공격을 준비했다.[6] 몬테네그로의 공주-주교와 동맹을 맺고 지원을 약속받았다.[6]

러시아 함대는 코르출라 섬과 리사 섬을 점령했고, 오스트리아는 코토르를 양도하도록 설득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이오니아 제도 점령에 실패했다.

둘째 아르키펠라고 원정도 참조

튀르크와의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면서, 세냐빈의 함대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에게해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07년 2월 24일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하여 3월에 테네도스 섬을 점령, 이 섬을 ''작전 기지''로 사용하여 해협을 봉쇄하고 술탄의 수도에 대한 보급을 차단했다.

아토스 해전


아토스 해전 이후 세냐빈의 함대


해안 포대 사격으로 281명의 사상자를 낸 영국 해군 제독 존 토마스 덕워스 경은 세냐빈의 함대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불운한 원정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군은 외국 지원 없이 에게해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터키군과 싸워야 했다.[7]

세냐빈의 수도 봉쇄는 결국 터키군을 극단으로 몰아넣었다. 식량 폭동이 발생한 후 술탄 셀림 3세는 무스타파 4세로 교체되었고, 그는 함대에 봉쇄를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오스만 제국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전 (5월 11일)과 아토스 해전 (6월 16일)에서 세냐빈의 함대와 충돌했다. 두 교전 모두 러시아의 승리였으며,[5] 전쟁 기간 동안 에게해에서 러시아의 우위를 보장했다.

4. 1. 아드리아 해에서의 작전

알렉산드르 1세아드리아해에서 나폴레옹의 확장을 저지하고자 1806년 부제독 세냐빈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지중해 원정을 시작했다.[6] 9월까지 남부 아드리아해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력을 재확립하고 두브로브니크의 해상 무역을 방해했으며, 레시나 공격을 준비했다.[6] 몬테네그로의 공주-주교와 동맹을 맺고 지원을 약속받았다.[6]

러시아 함대는 코르출라 섬과 리사 섬을 점령했고, 오스트리아는 코토르를 양도하도록 설득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이오니아 제도 점령에 실패했다.

4. 2. 다르다넬스 해전과 아토스 해전

둘째 아르키펠라고 원정도 참조

튀르크와의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면서, 세냐빈의 함대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에게해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07년 2월 24일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하여 3월에 테네도스 섬을 점령, 이 섬을 ''작전 기지''로 사용하여 해협을 봉쇄하고 술탄의 수도에 대한 보급을 차단했다.[6]

해안 포대 사격으로 281명의 사상자를 낸 영국 해군 제독 존 토마스 덕워스 경은 세냐빈의 함대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불운한 원정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군은 외국 지원 없이 에게해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터키군과 싸워야 했다.[7]

세냐빈의 수도 봉쇄는 결국 터키군을 극단으로 몰아넣었다. 식량 폭동이 발생한 후 술탄 셀림 3세는 무스타파 4세로 교체되었고, 그는 함대에 봉쇄를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오스만 제국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전 (5월 11일)과 아토스 해전 (6월 16일)에서 세냐빈의 함대와 충돌했다. 두 교전 모두 러시아의 승리였으며,[5] 전쟁 기간 동안 에게해에서 러시아의 우위를 보장했다.

5. 리스본 사건 (1807-1809)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프랑스가 동맹을 맺으면서 영국이 러시아의 적국이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드미트리 세냐빈은 자신의 정복이 무효화되고 국제 정세가 급변한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8월 12일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8월 14일, 세냐빈은 콜링우드 경(Lord Collingwood)과 작별하고, 발트해로 함대를 이끌고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테네도스는 8월 25일에 철수되었고, 세냐빈은 9월 19일에 코르푸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폭풍우로 인해 10월 30일에 리스본에 정박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John VI of Portugal)가 브라질 식민지(Colonial Brazil)로 도망치고, 영국 해군이 리스본을 봉쇄하면서 러시아 슬루프는 적선으로 간주되었다. 11월에는 장 앙도슈 쥐노(Jean-Andoche Junot) 휘하의 프랑스군이 포르투갈 수도를 점령하면서, 세냐빈은 두 교전국 사이에 끼인 꼴이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세냐빈은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여 함선을 지켜냈다. 나폴레옹은 세냐빈에게 프랑스나 독일 장교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고, 쥐노와 함선을 교환할 것을 권고했지만, 세냐빈은 이를 거부하고 중립을 표명했다.

1808년 7월, 세냐빈의 함선은 여전히 영국 해군에 의해 봉쇄되었고, 쥐노(Jean-Andoche Junot)와 프랑수아 에티엔 드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de Kellermann) 장군은 세냐빈에게 군사 작전 지원을 설득했지만, 세냐빈은 중립을 고수했다. 8월, 프랑스군이 비메이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상황은 또다시 반전되었다. 세냐빈은 영국 제독 찰스 코튼 경(Sir Charles Cotton)과 협상을 통해 러시아 함대가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런던으로 향하게 되었다. 세냐빈은 공동 영국-러시아 함대의 최고 사령관을 맡았으며, 두 척의 러시아 배는 리스본에 남겨졌다.

1809년 8월 5일, 러시아 함대는 마침내 포츠머스를 떠나 리가로 향했고, 9월 9일에 도착했다.

5. 1. 틸지트 조약과 국제 정세 변화

1807년 7월,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프랑스가 동맹을 맺으면서 영국이 러시아의 적국이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드미트리 세냐빈은 자신의 정복이 무효화되고 국제 정세가 급변한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8월 12일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8월 14일, 세냐빈은 콜링우드 경(Lord Collingwood)과 작별하고, 발트해로 함대를 이끌고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테네도스는 8월 25일에 철수되었고, 세냐빈은 9월 19일에 코르푸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폭풍우로 인해 10월 30일에 리스본에 정박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John VI of Portugal)가 브라질 식민지(Colonial Brazil)로 도망치고, 영국 해군이 리스본을 봉쇄하면서 러시아 슬루프는 적선으로 간주되었다. 11월에는 장 앙도슈 쥐노(Jean-Andoche Junot) 휘하의 프랑스군이 포르투갈 수도를 점령하면서, 세냐빈은 두 교전국 사이에 끼인 꼴이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세냐빈은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여 함선을 지켜냈다. 나폴레옹은 세냐빈에게 프랑스나 독일 장교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고, 쥐노와 함선을 교환할 것을 권고했지만, 세냐빈은 이를 거부하고 중립을 표명했다. 1808년 7월, 세냐빈의 함선은 여전히 영국 해군에 의해 봉쇄되었고, 쥐노(Jean-Andoche Junot)와 프랑수아 에티엔 드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de Kellermann) 장군은 세냐빈에게 군사 작전 지원을 설득했지만, 세냐빈은 중립을 고수했다.

8월, 프랑스군이 비메이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상황은 또다시 반전되었다. 세냐빈은 영국 제독 찰스 코튼 경(Sir Charles Cotton)과 협상을 통해 러시아 함대가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런던으로 향하게 되었다. 세냐빈은 공동 영국-러시아 함대의 최고 사령관을 맡았으며, 두 척의 러시아 배는 리스본에 남겨졌다.

1809년 8월 5일, 러시아 함대는 마침내 포츠머스를 떠나 리가로 향했고, 9월 9일에 도착했다.

5. 2. 리스본에서의 고립

1807년 8월 12일, 타르시트 조약 소식을 접한 세냐빈은 국제 정세의 급변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정복이 몰수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러시아의 동맹이었던 나폴레옹은 이제 러시아의 동맹이 되었고, 영국은 러시아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8월 14일, 그는 콜링우드 경(Lord Collingwood)과 작별했다. 8일 후, 러시아 함대의 대부분(전함 5척, 프리깃 4척, 코르벳 4척, 브리그 4척)은 세바스토폴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세냐빈은 남은 함대를 발트해로 이끌게 되었다.

테네도스는 8월 25일에 철수되었고, 세냐빈은 9월 19일에 코르푸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폭풍우 때문에 테주 강으로 들어가 10월 30일에 리스본에 정박했다. 며칠 안에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John VI of Portugal)는 브라질 식민지(Colonial Brazil)로 피신했고, 영국 해군은 리스본을 봉쇄하여 러시아 슬루프를 적선으로 간주했다. 영-러시아 전쟁이 선포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1월에는 장 앙도슈 쥐노(Jean-Andoche Junot) 휘하의 프랑스군이 포르투갈 수도를 점령하면서, 세냐빈은 양측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냐빈은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여 함대를 보존했다. 나폴레옹은 세냐빈에게 프랑스나 독일 장교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고, 쥐노와 함대를 교환하도록 권고했으나, 세냐빈은 이를 거부하고 중립을 표명했다.

1808년 7월, 세냐빈의 함대는 여전히 리스본에 봉쇄되어 있었고, 쥐노(Jean-Andoche Junot)와 프랑수아 에티엔 드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de Kellermann)은 세냐빈에게 군사 작전 지원을 요청했지만, 세냐빈은 이를 거부했다. 8월, 프랑스군이 아서 웰즐리 1대 웰링턴 공작(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에게 비메이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세냐빈은 영국 함대와 맞서야 했지만, 항복 대신 중립을 유지하며 공격 시 함대를 폭파하고 리스본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영국 제독 찰스 코튼 경(Sir Charles Cotton)과 협약을 체결하여 러시아 함대는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런던으로 향하게 되었다.

8월 31일, 세냐빈의 함대는 포르투갈을 떠나 포츠머스로 향했다. 9월 27일, 영국 해군성(British Admiralty)은 러시아 함대가 영국 항구에 정박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고, 런던 시장(Lord Mayor of London)도 이에 동의했다. 러시아 함대는 겨울까지 포츠머스에 억류되었고, 1809년 8월 5일에야 리가로 출발하여 9월 9일에 도착했다.

5. 3. 중립 유지와 외교적 노력

드미트리 세냐빈은 타르시트 조약으로 국제 정세가 급변하여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동맹이 되고 영국이 러시아의 적이 된 상황에서도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자신의 함대를 보존했다. 나폴레옹은 세냐빈에게 프랑스군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지만, 세냐빈은 중립을 선언하며 이를 거부했다.

1808년 7월, 영국 해군에 의해 리스본에 봉쇄되어 있던 세냐빈의 함대는 프랑스 장군 장 앙도슈 쥐노(Jean-Andoche Junot)와 프랑수아 에티엔 드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de Kellermann)의 군사 작전 지원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세냐빈은 전쟁 상태가 아닌 국가와 싸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프랑스군이 아서 웰즐리 1대 웰링턴 공작(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에게 비메이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르투갈을 떠나야 했을 때, 세냐빈의 함대는 영국 함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그는 항복을 거부하고 중립을 유지하며, 공격받을 경우 배를 폭파하고 리스본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영국 제독 찰스 코튼 경(Sir Charles Cotton)과의 협약을 통해 러시아 함대는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런던으로 향하게 되었다.

5. 4. 영국과의 협상

프랑스군이 비메이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르투갈을 떠나야 했던 1808년 8월, 드미트리 세냐빈의 함대는 리스본에서 영국 함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7척의 전열함과 1척의 프리깃으로 구성된 러시아 함대는 15척의 영국 전열함과 10척의 프리깃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다. 세냐빈은 항복을 거부하고 공격받을 경우 함대를 폭파하고 리스본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

이러한 강경한 태도를 바탕으로 세냐빈은 영국 제독 찰스 코튼 경(Sir Charles Cotton)과 협상을 진행했다. 그 결과, 러시아 함대는 깃발을 내리지 않은 채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런던으로 이동하기로 합의했다. 세냐빈은 공동 영국-러시아 함대의 최고 사령관을 맡게 되었으며, 두 척의 러시아 배(''라파일''(Rafail)과 ''야로슬라프''(Yaroslav))는 수리를 위해 리스본에 남겨졌다.

1808년 8월 31일, 세냐빈의 함대는 포르투갈을 떠나 포츠머스로 향했다. 그러나 런던 시장(Lord Mayor of London)은 이 협약이 영국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해군성 내 많은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다. 결국 러시아 함대는 여러 핑계로 겨울까지 포츠머스에 억류되었다.

5. 5. 포츠머스 억류

1808년 8월 31일, 세냐빈의 함대는 포르투갈을 떠나 포츠머스로 향했다. 9월 27일, 영국 해군성은 러시아 함대가 깃발을 게양한 채 영국 항구에 정박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명했다. 런던 시장은 이 협약이 영국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해군성의 많은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다.

러시아 함대는 겨울까지 여러 핑계로 포츠머스에 억류되었다. 포츠머스 당국은 세냐빈의 함대가 아르한겔스크로 항해하지 않으면 스웨덴 군함에 요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809년에는 발헤렌 원정으로 인해 출발이 더욱 지연되었다. 마침내 8월 5일, 러시아 함대는 포츠머스를 떠나 리가로 향할 수 있었고, 1809년 9월 9일에 그곳에 도착했다.

6. 불명예와 이후 경력

세냐빈은 차르에 대한 불복종과 그의 항해 중의 행동으로 인해 해군에서 다시는 임용되지 못했고, 귀국 후 황실에서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5]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동안 그는 다시 한번 평화로운 레발 항구를 관리했으며, 자신의 고향에서 민병대를 소집하게 해달라는 정기적인 청원에도 불구하고 적대 행위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다음 해에 은퇴했지만, 세냐빈의 이름은 해군에서 매우 유명하여 데카브리스트 음모자들은 궁정 혁명을 일으킨 후 그를 임시 정부의 구성원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리스 독립 전쟁이 1821년에 발발하자, 그리스 반군은 차르에게 "유명한 세냐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의 청원은 거부되었다.

세냐빈을 기념하는 1987년 소련 우표


알렉산드르 1세가 1825년에 사망하고 나서야 세냐빈은 현역으로 복귀했다. 러시아가 터키와의 적대 행위를 재개할 준비를 하면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그를 1826-1829년에 현역으로 복귀시켜 발트 함대를 지휘하도록 임명했다.[5] 다음 해 그는 정식 제독으로 승진하여 로그인 게이덴의 함대를 따라 지중해로 향했고, 그곳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은 나바리노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드미트리 세냐빈은 3년 후 사망했으며, 차르가 참석한 가운데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라브라에서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그는 제국 및 소련 해군에서 여러 척의 배의 이름으로 명명되었으며, 특히 니콜라이 1세가 1826년에 명령한 3년의 원정에 사용된 선박이 있었다. 오세아니아의 세냐빈 제도와 알래스카, 사할린의 곶은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6. 1. 불명예와 은퇴

세냐빈은 차르에 대한 불복종과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황실의 불신을 샀다.[5]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동안 그는 레발 항구 관리를 맡았고, 민병대 소집 청원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데카브리스트 반란 가담자들은 쿠데타 성공 후 세냐빈을 임시 정부 구성원으로 임명하려 했다.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발발 당시 그리스 반군이 차르에게 세냐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5]

1825년 알렉산드르 1세 사망 이후,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준비하며 세냐빈을 현역으로 복귀시켜 발트 함대를 지휘하게 했다. 세냐빈은 1826년 정식 제독으로 승진하여 로그인 게이덴 함대를 따라 지중해로 이동, 나바리노 해전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 함대의 승리에 기여했다.

세냐빈은 3년 후 사망하여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라브라에 안장되었다. 제국 및 소련 해군은 여러 척의 배에 그의 이름을 붙였으며, 오세아니아의 세냐빈 제도와 알래스카, 사할린의 곶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2. 나폴레옹 전쟁과 데카브리스트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1812) 당시 세냐빈은 자신의 고향에서 민병대를 소집하게 해달라고 청원했지만, 참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5] 데카브리스트 봉기 주동자들은 궁정 혁명을 일으킨 후 그를 임시 정부의 구성원으로 만들 계획을 세울 정도로 그의 명성은 해군에서 매우 높았다.[5] 그리스 독립 전쟁이 1821년에 발발하자, 그리스 반군은 차르에게 "유명한 세냐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가 1825년에 사망하고 나서야 세냐빈은 현역으로 복귀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가 터키와의 적대 행위를 재개할 준비를 하면서, 1826-1829년에 그를 현역으로 복귀시켜 발트 함대를 지휘하도록 임명했다.[5] 다음 해 그는 정식 제독으로 승진하여 로그인 게이덴의 함대를 따라 지중해로 향했고, 그곳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은 나바리노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6. 3. 그리스 독립 전쟁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 반군은 차르에게 "유명한 세냐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의 청원은 거부되었다.[5]

6. 4. 복귀와 사망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고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면서 세냐빈은 현역으로 복귀했다.[5] 러시아 제국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니콜라이 1세는 세냐빈에게 발트 함대 지휘를 맡겼다.[5] 1827년 세냐빈은 정식 제독으로 승진했고, 로그인 게이덴의 함대와 함께 지중해로 파견되어 나바리노 해전에서 영국, 프랑스 연합 함대와 함께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드미트리 세냐빈은 1831년 사망했으며,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니콜라이 1세가 직접 참석했다. 러시아 제국 해군소련 해군은 여러 척의 군함에 그의 이름을 붙여 기렸으며, 오세아니아의 세냐빈 제도와 알래스카, 사할린의 곶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7. 유산

여러 척의 러시아 제국 및 소련 해군 함정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특히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가 1826년에 명령한 3년의 원정에 사용된 선박이 있었다. 오세아니아의 세냐빈 제도와 알래스카, 사할린의 곶은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7. 1. 기념

여러 척의 러시아 제국 및 소련 해군 함정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특히 니콜라이 1세가 1826년에 명령한 3년의 원정에 사용된 선박이 있었다. 오세아니아의 세냐빈 제도와 알래스카, 사할린의 곶은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СЕНЯВИН ДМИТРИЙ НИКОЛАЕВИЧ • Great Russian Encyclopedia – Electronic version https://old.bigenc.r[...] 2023-09-16
[2] 웹사이트 бой у Новой Рагузы https://runivers.ru/[...] 2023-09-16
[3] 웹사이트 Кампания в Адриатическом море в 1805-1807 гг. https://runivers.ru/[...] 2023-12-13
[4] 웹사이트 АФОНСКОЕ СРАЖЕНИЕ 1807 • Great Russian Encyclopedia – Electronic version https://old.bigenc.r[...] 2023-09-02
[5] 서적 Russian Officer Corps of the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 https://books.google[...] Casemate Publishers 2005
[6] 문서 Tarle, pp. 253-254
[7] 웹사이트 АРХИПЕЛАГСКИЕ ЭКСПЕДИЦИИ • Great Russian Encyclopedia – Electronic version https://old.bigenc.r[...] 2023-10-21
[8] 웹인용 АФОНСКОЕ СРАЖЕНИЕ 1807 • Great Russian Encyclopedia – Electronic version https://old.bigenc.r[...] 20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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