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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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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등자룡은 명나라의 무관으로, 강서성 출신이다. 1558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반란을 진압하며 공을 세웠고, 특히 따웅우 왕조의 운남성 침공 당시 활약하여 부총병으로 승진했으나, 약탈죄로 관직을 잃기도 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70세의 나이로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노량 해전에 참여했으나, 전투 중 전사했다. 그는 조선과의 관계에서 노량 해전 참전을 통해 이순신과 함께 활약한 인물로 기억되며,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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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자룡

2. 생애

등자룡은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따웅우 왕조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많은 군공을 세웠으나, 휘하 병사들의 약탈이나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583년 윤2월, 따웅우 왕조가 운남성을 침공하자 등자룡은 영창부 참장으로 파견되었다. 목방부 경마족의 한건이 악봉과 함께 반역하여 따웅우의 난다버인왕을 영창부에 침입하게 하였고, 한건은 난다버인과 함께 운남성을 유린했다.[3] 1584년 등자룡은 한건, 경종진 등을 전장에서 베고 경종재를 생포했다. 한건의 아들이 궁수 500명으로 저항하려 하자, 등자룡은 반란군의 근거지를 직격하여 130여 명을 생포하고 500여 명을 참수했다. 악봉을 사로잡아 베이징으로 연행하자 만력제는 등자룡을 부총병으로 승진시켰으나, 이후 휘하 병사들의 약탈 죄를 물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하리가 되었다.

1590년 맹양(孟養)의 사개(思箇)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등자룡은 심문을 받고 있었으나 순무 오정의 청원으로 군공을 세워 죄를 속죄할 기회를 얻었다. 명나라 주력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오정은 등자룡과 검국공 목창조(沐昌祚)를 장수로 파견하여 사개를 격퇴하였다.[4] 곧 정개의 10개 군영에서 보응춘, 패생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등자룡은 이들을 토벌하여 1,200명을 참수하고 6,600명을 생포했다. 등자룡은 부총병으로 복직하여 서금산참장사를 지냈다. 사인(思仁)이 반란하여 따웅우 왕조의 군사를 끌어들였는데, 1592년 맹양을 침범하자 등자룡은 이들을 물리쳤다. 1593년 등자룡은 탄핵돼 파면됐다가 귀향했다.

1598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등자룡은 70세에 가까운 노령이었지만 200명의 사졸을 이끌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의 휘하로 참전하여 수군부총병에 임명되었다. 노량 해전에서 등자룡은 진린의 명에 따라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1,000명의 병사와 판옥선 2척을 포함한 3척의 군선을 이끌고 선봉에 섰다. 그러나 아군이 쏜 포탄에 피격되어 배에 불이 붙었고,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에 둘러싸여 배에 올라탄 왜군에 항전하다 전사하였다.[5] 그의 시신은 고향 풍성(豊城)으로 돌아가 묻혔고, 조선은 그를 위해 묘를 세워 모셨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등자룡은 강서성 남창부 풍성현 낙성교(落星橋) 무계(茂溪) 등촌(鄧村, 현재의 장시성 이춘시 두스진(杜市鎭) 덩자촌(鄧家村)) 출신으로, 1558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3]

체격이 우람하고 용맹하며 민첩하였다. 가정 연간 강서에서 반란이 일어나 장수시가 약탈당했을 때 관청의 소집에 응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후 전공을 거듭 쌓아 광동파총(廣東把總)에 올랐다.[3]

1573년 등자룡은 장원훈을 따라 혜주에서 뇌원작(賴元爵)의 난을 진압했고, 곧 장원훈 밑에서 진금앵(陳金鶯), 나소청(羅紹淸)의 난을 평정했다. 반란군의 수령 황고휘(黃高暉)가 도망치자 등자룡은 산에 들어가 이를 생포하였고, 이후 동고석(銅鼓石)의 수비를 맡았다. 곧 서도지휘첨사로 발탁되어 절강도사를 관장하였다. 파면에 해당하는 죄가 있다는 논의가 나왔지만, 만력제는 등자룡의 죄를 묻지 않았다. 이후 마양의 묘족 김도려(金道侶)가 반란을 일으키자 참장으로 발탁되어 이를 토벌, 반란군을 물리치고 그 일당을 해산시켰다.[3]

1580년 오개위(五開衛)의 군사 호야로(胡若盧) 등이 감사행서에 불을 놓고 수비와 여평부(黎平府)수를 추방하자, 정주·동고·용리에 거주하던 묘족들이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등자룡은 위성(衛城)의 동문에 불을 질러 반란군을 불러들이고 은밀히 북문으로 군사를 침투시켜 반란군을 무찔렀다.[3]

2. 2. 광동과 절강에서의 활약

1573년, 등자룡은 장원훈을 따라 혜주에서 뢰원작의 난을 진압하고, 이어서 장원훈 휘하에서 진금앵·나소청의 난을 평정했다.[3] 반란군 두목 황고휘가 도망치자 등자룡은 산에 들어가 그를 생포했다. 이후 동고석 수비를 맡았으며, 곧 서도지휘첨사에 발탁되어 절강성 도사를 관장했다. 파면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만력제는 등자룡의 죄를 묻지 않았다. 마양의 묘족인 금도려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참장에 발탁되어 이를 토벌, 반란군을 격파하고 그 일당을 해산시켰다.[3]

2. 3. 운남에서의 활약과 따웅우 왕조와의 전투

1583년 윤2월 따웅우 왕조가 운남성을 침공하자, 등자룡은 영창부 참장으로 파견되었다. 목방부(木邦部) 경마족(耿馬族)의 한건(罕虔)이 악봉(岳鳳)과 함께 반역하여 따웅우의 난다버인왕을 영창부(永昌府)에 침입하게 하였고, 한건은 난다버인과 함께 운남성을 유린했다.[3]

1584년 등자룡은 나뭇가지를 기어올라가 급전해 한건, 경종진(景宗眞) 등을 전장에서 베고 경종재(景宗材)를 생포했다. 한건의 아들 등은 궁수 500명을 통솔하게 하여 막게 하려 하였다. 등자룡은 반란군의 근거지를 직격하여 미리 산 뒤에 매복해있던 병사와 함께 이들을 공격하여 130여 명을 생포하고 500여 명을 참수했다. 악봉을 사로잡아 베이징으로 연행하자 만력제는 등자룡을 부총병으로 승진시켰으나, 이후 휘하 병사들의 약탈 죄를 물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하리가 되었다.

1590년 맹양(孟養)의 사개(思箇)가 반란을 일으켰다. 등자룡은 심문을 받고 있었는데, 순무 오정이 군공을 세워 죄를 속죄하게 하고 싶다고 청원하여 만력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명나라 주력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오정은 등자룡과 검국공 목창조(沐昌祚)를 장수로 파견하여 사개를 격퇴하였다.[4] 곧 정개의 10개 군영에서 보응춘, 패생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세를 확장시키자 이들을 토벌하러 갔다. 등자룡은 1,200명을 참수하고 6,600명을 생포했다. 등자룡은 부총병으로 복직하여 서금산참장사를 지냈다. 사인(思仁)은 그 동료 병측(丙測)과 함께 반란하여 따웅우 왕조의 군사를 계속 끌어들였는데, 1592년 사인은 맹양을 쳐들어가 만막을 침범하였고 등자룡은 이들을 물리쳤다. 1593년 등자룡은 탄핵돼 파면됐다가 귀향했다.

2. 4. 임진왜란 참전과 노량 해전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수군 부총병으로 임명된 등자룡은 7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그는 명나라 절강에서 파견된 수군 도독 진린(陳璘)의 휘하에 배속되었다.[5]

노량 해전에서 등자룡은 진린의 명에 따라 조선 수군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1,000명의 병력과 판옥선 2척을 포함한 3척의 배를 이끌고 선봉에 섰다.[5] 그는 용감하게 싸웠으나, 아군 포탄에 맞아 배에 불이 붙는 위기에 처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등자룡은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왜군에 포위되었고, 배에 올라탄 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5] 이는 조선 수군 주장 이순신과 더불어, 일본 측에는 없었던 고위 지휘관의 전사였다.

등자룡의 시신은 고향인 풍성(豊城)에 안장되었으며, 조선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려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5]

3. 평가

등자룡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지닌 장수였지만, 휘하 병사들의 약탈을 묵인하고 출신에 따라 차별 대우를 한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이러한 행위는 그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

4. 한국과의 관계

등자룡은 임진왜란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장수였다. 특히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다.

등자룡과 이순신은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등자룡은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 능력과 인품에 감복하여 그를 존경하고 따랐으며, 이순신 역시 등자룡의 용맹함과 의리를 높이 평가했다. 노량 해전에서 등자룡은 이순신과 함께 선봉에 서서 싸우다 전사하였고, 그의 죽음은 이순신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한국에서 등자룡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의로운 장수로 인식된다. 그의 용맹함과 이순신과의 우정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 곳곳에는 등자룡을 기리는 사당과 유적이 남아있으며, 그를 추모하는 행사도 열리고 있다.

5. 관련 작품

등자룡이 등장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5. 1. 드라마

5. 2. 영화


: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명나라 장수로 묘사된다. 영화는 등자룡의 용맹함과 희생을 강조하며, 그가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적인 인물임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明史 鄧子龍伝
[2] 서적 征韓録、土佐物語、明史
[3] 웹인용 동북아역사넷 < 동북아역사재단 http://contents.nahf[...] 2024-02-22
[4] 웹인용 동북아역사넷 < 동북아역사재단 http://contents.nahf[...] 2024-02-22
[5] 간행물 선조수정실록 33권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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