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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애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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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 애시스는 잉글랜드와 호주 간의 크리켓 테스트 경기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1882년 잉글랜드가 호주에 패배한 후, 잉글랜드 언론에서 "잉글랜드 크리켓이 죽었다"고 조롱하며 "재(ash)"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 용어는 두 나라 간의 오랜 경쟁을 상징하며, 승리한 팀은 "애시스"를 가져간다. 애시스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문화적인 의미를 지니며, 다른 스포츠 분야에서도 라이벌 관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경기는 1882년에 시작되었으며, 호주와 잉글랜드는 2023년까지 총 361번의 테스트 경기를 치렀다.

2. 역사

잉글랜드와 호주 간의 첫 번째 테스트 크리켓 경기는 1877년 멜버른에서 열렸으나, 디 애시스(The Ashes)의 전설은 1882년 런던 오벌에서 열린 양 팀 간의 9번째 테스트 경기 이후 시작되었다.[5] 이 경기에서 호주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원정 첫 승리를 거두자, 영국의 신문 ''더 스포팅 타임스''는 "잉글랜드 크리켓이 사망했으며, 시신은 화장되어 재(Ashes)는 호주로 가져갈 것"이라는 풍자적인 부고 기사를 실었다. (자세한 내용은 1882년 기원 섹션 참고)

''더 스포팅 타임스''에 실린 유명한 부고 기사


며칠 뒤, 다음 호주 원정을 떠나는 잉글랜드 팀의 주장 이보 블라이는 "그 재를 되찾아오겠다"고 선언하며 '애시스'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7][8]

'애시스'라는 용어는 이후 한동안 널리 쓰이지 않다가, 1903년 펠햄 워너가 다시 "애시스를 되찾겠다"는 목표로 잉글랜드 팀을 이끌고 호주 원정에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부활했다. 워너는 실제로 시리즈에서 승리한 후 ''우리가 애시스를 어떻게 되찾았는가 (How We Recovered The Ashes)''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고,[9] 이를 계기로 애시스는 양 팀 간의 정기 대결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디 애시스 시리즈는 이후 100년 넘게 이어지며 세계 크리켓에서 가장 치열하고 유명한 라이벌 관계로 발전했다. 각 시대별로 양 팀의 우세가 바뀌었으며, 바디라인 시리즈와 같은 논란이나 이안 보텀, 셰인 원과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의 활약 등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첫 경기가 열린 1882년부터 2023년 시리즈 종료 시점까지, 상대 전적은 호주가 152승, 잉글랜드가 111승, 무승부가 98번이다.[95] 시리즈 전적(각 투어별 승패)은 호주가 34회, 잉글랜드가 32회 승리했으며 7번의 시리즈는 무승부로 끝났다.

2. 1. 1882년 기원

1882년, 호주 크리켓 대표팀은 잉글랜드 원정 경기 중 런던의 오벌 경기장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승리했다. 이는 잉글랜드가 자국 영토에서 호주에게 당한 첫 패배였다. 이 패배에 대해 영국의 신문 ''더 스포팅 타임스''는 "잉글랜드 크리켓이 사망했으며, 시신은 화장되어 재(Ashes)는 호주로 가져갈 것"이라는 내용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13] 이는 잉글랜드 크리켓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며칠 후,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 주장이었던 이보 블라이(Ivo Bligh)는 다음 호주 원정에서 "그 재를 되찾아오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와 호주 간의 오랜 라이벌 관계인 '디 애시스'의 기원이 되었다.

2. 2. 초기 시리즈 (1884-1902)

명예로운 이보 블라이


1882년 후반, 오벌 경기장에서 호주가 승리한 후, 이보 블라이는 "그 재를 되찾기" 위한 목표로 잉글랜드 팀을 이끌고 호주 원정에 나섰다. 이 시리즈는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바로 이 시기에 애시스 항아리가 만들어졌다.

시리즈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서는 호주가 9 위켓 차이로 승리했지만, 이어진 두 번의 테스트 경기에서는 잉글랜드가 승리했다. 세 번째 테스트 경기가 끝난 시점에서 잉글랜드는 2승 1패로 "애시스를 되찾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네 번째 경기가 열렸는데, 상대는 "연합 호주 XI"였다. 이 팀은 앞선 세 경기에서 맞붙었던 호주 팀보다 더 강력한 팀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경기는 보통 1882–83 시리즈의 일부로 포함되지 않고, 독립적인 테스트 경기로 간주된다. 이 네 번째 경기는 호주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2. 3. 전설의 부활 (1903-1912)

주어진 원본 소스는 요청된 섹션 제목 '전설의 부활 (1903-1912)' 및 요약 내용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원본 소스는 1880년대부터 1896년까지의 애시스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1903년 이후의 사건에 대한 정보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공된 원본 자료만으로는 해당 섹션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2. 4. 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1933)

전쟁 이후, 호주는 애시스와 세계 크리켓을 확실하게 장악했다. 잭 그레고리와 테드 맥도날드라는 두 명의 특급 볼러를 함께 기용하는 전술이 처음으로 효과를 보았고, 이들은 정기적으로 잉글랜드 타선을 무너뜨렸다. 호주는 워릭 암스트롱이 이끄는 팀으로 1920–1921년 시리즈에서 5–0 백색 스윕을 달성하는 등, 잉글랜드와의 첫 8경기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암스트롱은 1921년 잉글랜드 투어에서도 팀을 이끌었으며, 투어 후반 단 두 경기만 패배하며 무패 투어 달성에 아쉽게 실패했다.

허버트 서트클리프가 1924년 시드니에서 열린 첫 번째 애시스 테스트에서 아서 메일리의 공을 스위핑하고 있다.


잉글랜드는 전쟁 후 1925년까지 15번의 테스트 경기 중 단 한 번만 승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1926년, 비가 많이 내린 시리즈에서 잉글랜드는 오벌에서 열린 마지막 테스트에서 승리하며 1–0으로 시리즈를 가져왔다. 시리즈 향방이 걸린 이 경기는 승부가 날 때까지 진행되는 "무제한" 방식으로 치러졌다. 호주가 첫 이닝에서 22점의 근소한 리드를 잡았으나, 밤새 내린 폭우로 다음 날 피치는 타격이 매우 어려운 스티키 위켓으로 변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잭 홉스와 허버트 서트클리프는 172점의 파트너십을 기록했고, 홉스는 100점, 서트클리프는 161점을 올리며 잉글랜드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 패배 후 호주 주장 허비 콜린스는 모든 주장직에서 해임되었고, 일각에서는 그가 경기를 일부러 져주었다는 비난까지 제기되었다.

1926년 이후 호주의 노장 선수들(콜린스, 찰리 맥카트니, 워렌 바즈리)이 은퇴하고 그레고리마저 1928–29 시리즈 초반 부진에 빠지면서 팀은 세대교체를 겪었다.

도널드 브래드먼이 데뷔했지만, 잭 라이더가 이끄는 경험 부족의 호주 팀은 잉글랜드에 4–1로 대패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월리 해먼드가 평균 113.12로 905점을 기록하고 홉스, 서트클리프, 패시 헨드렌 등이 활약한 강력한 타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1930년, 빌 우드풀은 경험이 부족한 팀을 이끌고 잉글랜드 원정에 나섰다.

브래드먼은 이 시리즈에서 평균 139.14, 총 974점이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특히 헤딩리 테스트에서는 하루 만에 309점을 포함해 총 334점을 기록했고, 로즈에서는 254점을 올렸다. 브래드먼 본인은 로즈에서의 254점 이닝을 더 높게 평가했다. 브래드먼은 1930년 녹음에서 "항상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 했고, 몇 번의 센추리는 경기를 이기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잉글랜드가 오벌에서 열린 결정적인 마지막 테스트까지 경쟁을 유지했지만, 브래드먼의 또 다른 더블 센추리와 퍼시 혼브룩의 7/92 활약에 힘입어 호주가 이닝 승리를 거두며 시리즈를 2–1로 가져갔다. 이 시리즈에서는 클라리 그림멧이 평균 31.89로 29개의 위켓을 잡아 호주 볼링진을 이끈 것도 중요했다.

1930년대 초 호주는 브래드먼 외에도 아치 잭슨, 스탠 맥케이브, 빌 우드풀, 빌 폰스포드, 잭 핑글턴 등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타선을 구축했다.

빌 우드풀이 해럴드 래우드의 공을 바디라인 필드 배치 속에서 피하고 있다.


이 막강한 타선에 맞서기 위해 1932–33년 애시스 시리즈의 잉글랜드 주장 더글라스 자딘은 소위 '바디라인' 전술을 사용했다. 이는 패스트 볼러, 특히 해럴드 래우드와 빌 보스가 호주 타자들의 몸을 겨냥해 공을 던지게 하여, 타자들이 본능적으로 배트로 몸을 방어하다가 레그 사이드에 밀집된 필더들에게 쉬운 플라이 아웃을 내주도록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자딘은 이를 "레그 이론"이라 부르며 정당한 전술이라 주장했지만, 호주 측과 비판자들은 타자의 몸(Body)을 노리는 선상(Line)의 볼링이라는 의미에서 "바디라인"이라 부르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잉글랜드는 이 전술로 애시스 시리즈에서 4–1로 승리했지만, 바디라인은 호주에서 극심한 논란을 일으켰다.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이자 외교관들이 개입하여 관계 악화를 막아야 했고, 결국 MCC는 레그 사이드 필더 수를 제한하도록 크리켓 규칙을 개정했다. 자딘은 "나는 친구를 사귀러 약 9656.04km를 온 것이 아니다. 애시스를 되찾으러 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호주 선수들은 보복으로 바디라인을 사용하고 싶어했지만, 우드풀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래우드의 공에 가슴을 맞고 쓰러진 후, 위로차 호주 라커룸을 방문한 잉글랜드 매니저 펠햄 워너에게 "여기 두 팀이 있습니다. 한 팀은 크리켓을 하고 있고, 다른 한 팀은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2. 4. 1. 바디라인 논란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바디라인 논란'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2. 5. 2차 세계 대전 전후 (1934-1953)

1934년 애시스 시리즈는 바디라인 논란의 여파 속에 시작되었다. MCC는 이전 시리즈에서 바디라인 전술을 사용했던 해럴드 래우드, 빌 보스, 더글라스 자딘을 호주와의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28] 특히 해럴드 래우드는 MCC의 사과 요구를 거부하고 테스트 팀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호주는 1934년에 애시스를 되찾았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중단기를 포함하여 1953년까지 애시스를 보유했다.

1934년 시리즈의 승패는 오벌에서 열린 마지막 테스트에서 결정되었다. 호주는 첫 이닝에서 빌 폰스포드 (266점)와 도널드 브래드먼 (244점)의 활약에 힘입어 701점을 기록했다. 두 선수는 2번째 위켓에서 451점을 합작하며 신기록을 세웠다. 잉글랜드는 승리를 위해 707점이라는 목표를 추격했으나 실패했고, 호주가 시리즈를 2-1로 승리하며 애시스를 탈환했다.[29] 이 승리로 빌 우드풀은 애시스를 되찾은 유일한 주장이 되었고, 시리즈 후 은퇴했다.

1930년대 후반은 타자에게 유리한 위켓이 많아 대부분의 테스트 경기가 승패를 가렸다. 특히 호주에서 열린 전쟁 전 테스트 경기는 승부가 날 때까지 계속 진행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많은 타격 기록이 세워졌다.

1936-37년, 도널드 브래드먼은 빌 우드풀의 뒤를 이어 호주 주장이 되었다. 그는 첫 두 테스트에서 패배하며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이후 팀을 추슬러 3-2 역전승을 거두며 주장으로서 첫 애시스 시리즈를 승리로 이끌었다.

1938년 시리즈는 1-1 무승부로 끝나 호주가 애시스를 방어했다.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3차 테스트는 비로 인해 취소되었고, 호주는 헤딩리에서 열린 4차 테스트에서 승리하며 애시스 유지를 확정했다. 오벌에서 열린 마지막 5차 테스트에서는 잉글랜드의 렌 허튼이 당시 세계 기록인 364점을 기록하며 잉글랜드가 903-7이라는 엄청난 점수를 기록하고 이닝 종료를 선언했다. 이 경기에서 도널드 브래드먼과 잭 핑글턴이 부상을 당해 9명으로 싸운 호주는 이닝과 579점 차이라는 테스트 역사상 가장 큰 점수 차로 패배했다.[3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애시스는 1946-47년에 재개되었고, 전쟁의 상처에서 호주가 잉글랜드보다 더 빠르게 회복한 모습을 보였다. 여전히 도널드 브래드먼이 주장을 맡았고, 레이 린드월과 키스 밀러라는 강력한 볼링 조합을 앞세운 호주는 3-0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당시 38세였던 브래드먼은 전쟁 중 건강 악화로 출전을 망설였으나, 첫 테스트에서 논란이 된 판정(잭 아이킨의 캐치 관련) 이후 187점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이는 호주의 전후 애시스 지배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킨 캐치 관련 논란은 당시 큰 분쟁 중 하나였다.

1948년, 호주 팀은 잉글랜드 원정에서 4승 1무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도널드 브래드먼이 이끈 이 팀은 투어 내내 단 한 경기도 패하지 않아 '무적 (The Invincible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총 34경기(테스트 5경기 포함)에서 27승 7무를 기록했다. 로즈와 헤딩리에서 열린 테스트 경기에서는 관중 동원 기록이 세워지기도 했다. 특히 헤딩리 4차 테스트에서는 호주가 마지막 날 404점을 추격하여 7위켓으로 승리하는 세계 기록을 세웠다.

1948년 시리즈는 크리켓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순간 중 하나로 마무리되었다. 오벌에서 열린 5차 테스트는 도널드 브래드먼의 마지막 테스트 경기였다. 그는 자신의 통산 타율을 정확히 100.00으로 만들기 위해 단 4점만 필요했지만, 에릭 홀리스의 두 번째 공에 아웃(덕아웃)되면서 99.94라는 경이로운 타율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브래드먼의 은퇴 후 린제이 하셋이 호주 주장을 이어받아 1950-51년 시리즈에서도 4-1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점수 차와 달리 접전이 많았다.

오랜 호주의 우세는 1953년에 마침내 끝났다. 잉글랜드는 오벌에서 마지막 테스트에서 승리하여 시리즈를 1-0으로 가져갔고, 19년 만에 애시스를 탈환했다. 이는 렌 허튼, 데니스 컴튼, 피터 메이, 톰 그레이브니, 콜린 코드리 같은 타자들과 프레드 트루먼, 브라이언 스타텀, 알렉 베드서, 짐 레이커, 토니 록 같은 볼러, 그리고 키퍼 고드프리 에반스와 올라운더 트레버 베일리 등이 활약한 잉글랜드 크리켓 황금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 6. 1954-1971

(내용 없음)

2. 7. 1972-1987

1972년 시리즈는 2–2 무승부로 끝나, 레이 일링워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가 애시스를 유지했다.[35]

1974–75 시리즈에서는 잉글랜드 팀의 전력이 약화되었고, 특히 핵심 타자였던 제프 보이콧이 투어 참여를 거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주의 빠른 공 투수 제프 톰슨과 데니스 릴리가 잉글랜드 타선을 압도하며 맹위를 떨쳤다. 결국 호주가 4–1로 크게 승리했으며, 이 결과는 잉글랜드가 충격을 받은 것을 적절히 반영했다.[36] 잉글랜드는 1975년 시리즈에서도 0–1로 패했지만, 새로운 주장 토니 그레그의 지휘 아래 어느 정도 자존심을 회복했다.[37]

1977년에는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에서 열린 첫 테스트 크리켓 100주년 기념 경기인 센테너리 테스트가 열렸고, 이 경기에서는 호주가 승리했다. 그러나 이 경기는 애시스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았다.[38] 같은 해, 미디어 재벌 케리 패커가 상업적인 크리켓 리그인 월드 시리즈 크리켓(WSC) 창설을 발표하면서 크리켓계에 큰 파문이 일었다.[39] WSC는 여러 국가 대표팀에 영향을 미쳤지만, 특히 많은 주축 선수들이 패커와 계약하면서 호주 대표팀의 전력 약화가 두드러졌다. 호주 크리켓 위원회(ACB)는 WSC 계약 선수들을 대표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고, 거의 완전히 새로운 선수들로 팀을 꾸려야 했다. WSC의 등장은 오랫동안 세계 크리켓의 양강으로 군림하던 호주와 잉글랜드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웨스트 인디스가 강력한 팀으로 부상하여 호주와 잉글랜드를 상대로 연이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1990년대까지 세계 크리켓을 지배하게 된다.

토니 그레그 역시 WSC에 합류하면서 잉글랜드는 마이크 브리어리를 새로운 주장으로 임명했다. 브리어리는 호주를 상대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제프 보이콧이 대표팀에 복귀하면서 타선이 강화된 잉글랜드는 1977년 시리즈에서 3–0으로 승리했다. 이어 1978–79년 시리즈에서는 WSC 참가로 주축 선수들이 대거 빠진 호주 팀을 상대로 5–1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시리즈에서 훗날 호주 크리켓의 전설이 되는 앨런 보더가 테스트 데뷔를 했다.

1980년 브리어리가 테스트 크리켓에서 은퇴하자 이안 보텀이 주장을 맡았다. 보텀은 1981년 시리즈를 주장으로 시작했지만, 당시 WSC 분열 사태는 마무리된 상태였다. 호주가 첫 두 테스트에서 1승 1무로 앞서나가자 보텀은 부진한 성적에 대한 책임으로 주장직에서 물러났다(사임 혹은 경질 여부는 출처에 따라 다름). 이에 마이크 브리어리가 헤딩리에서 열리는 세 번째 테스트를 앞두고 극적으로 주장직에 복귀했다. 이 경기는 크리켓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역전승 중 하나로 기록된다. 호주는 첫 이닝에서 227점 차로 앞서며 잉글랜드에게 팔로우 온을 강요했고, 시리즈 2-0 리드를 눈앞에 둔 듯 보였다. 잉글랜드는 두 번째 이닝에서도 135점에 7명의 타자가 아웃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몰렸지만, 이안 보텀이 149*점을 기록하며 팀을 구해냈다. 결국 잉글랜드는 356점을 만들었고, 호주에게 130점의 비교적 쉬운 목표 점수를 내주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투수 밥 윌리스가 8명의 타자를 43실점으로 잡아내는 눈부신 활약을 펼치면서 호주는 111점에 모두 아웃되었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팔로우 온을 당하고도 테스트 경기에서 승리하는, 1894-95년 이후 처음 있는 대역전극을 완성했다. 브리어리의 지휘 아래 기세를 탄 잉글랜드는 다음 두 경기도 승리했고, 마지막 오벌 테스트는 무승부로 끝나면서 시리즈 최종 스코어 3-1로 잉글랜드가 애시스를 탈환했다.[40] 이 시리즈는 주장직에서 해임된 후, 배트와 볼로 보여준 놀라운 활약으로 '보텀의 애시스(Botham's Ashes)'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2–83년 시리즈에서 호주는 WSC에서 복귀한 그렉 채플을 주장으로 맞이했고, 잉글랜드 팀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반란 투어 선수들의 출전을 강제로 막으면서 약화되었는데, 특히 그레이엄 구치와 존 엠부리가 그 대상이었다. 호주는 세 번의 테스트 후 2–0으로 앞섰지만, 잉글랜드는 마지막 아웃 스탠드를 70점 기록하면서 네 번째 테스트에서 3점 차로 승리하여 마지막 결정전을 치르게 되었고, 이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41]

1985년 데이비드 가워의 잉글랜드 팀은 구치와 엠부리의 복귀와 함께 팀 로빈슨과 마이크 개팅의 국제 무대 데뷔로 강화되었다. 앨런 보더가 주장하는 호주는 자체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반란 투어로 약화되었고, 테리 앨더먼의 부재가 특히 큰 요인이었다. 잉글랜드가 3–1로 승리했다.

1980년대 웨스트 인디스에 연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애시스에서 좋은 성적을 계속 거두었다. 마이크 개팅은 1986–87년 주장이었지만, 그의 팀은 좋지 않은 출발을 보였고 비판을 받았다.[42] 그러자 크리스 브로드는 연속 세 번의 테스트에서 100점을 기록했고, 그레이엄 딜리와 글래드스톤 스몰의 볼링 성공으로 잉글랜드가 시리즈에서 2–1로 승리했다.[43]

2. 8. 1989-2003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 복싱 데이 테스트 1998


1989년 호주 팀은 과거의 위대한 팀들에 비견될 만한 전력으로 잉글랜드를 4승 0패로 압도했다.[44] 앨런 보더가 이끈 이 팀에는 마크 테일러, 머브 휴즈, 데이비드 분, 이안 힐리, 스티브 워 등 젊은 선수들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이후 오랫동안 애시스에서 활약하게 된다. 반면, 데이비드 가워가 다시 주장을 맡은 잉글랜드는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4차 테스트 중, 팀 로빈슨, 닐 포스터, 존 엠부리 등 일부 주축 선수들이 다음 겨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릴 예정인 비공식 "반란 투어" 참가를 결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팀에서 제외되는 등 내홍을 겪었다.[45]

1989년 시리즈를 기점으로 호주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세계 크리켓의 강자로 군림하며 애시스에서 우위를 점했다. 호주는 1990-91, 1993, 1994-95, 1997, 1998-99, 2001, 2002-03 시리즈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애시스를 지켰다. 이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 호주의 성공에는 뛰어난 선수들의 활약이 있었다. 초기에는 타자 앨런 보더, 데이비드 분, 마크 테일러, 스티브 워 등이 팀을 이끌었다. 주장직은 1990년대 중반 보더에서 테일러로, 2001년 시리즈 전에는 스티브 워에게 넘어갔다. 1990년대 후반에는 스티브 워와 그의 쌍둥이 형제 마크 워가 타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빠른 볼러 글렌 맥그래스와 제이슨 길레스피는 상대 타자들을 효과적으로 공략했다. 위켓키퍼 겸 타자 포지션은 1990년대 대부분 이안 힐리가 맡았으며, 2001년부터는 아담 길크리스트가 그 자리를 이었다. 2000년대에는 타자 저스틴 랭거, 데미언 마틴, 매튜 헤이든 등이 등장하여 호주의 강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시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선수는 레그 스피너 셰인 워언이었다. 특히 1993년 애시스 시리즈에서 마이크 개팅을 상대로 던진 그의 첫 공은 '세기의 볼'로 알려져 있다.

1989년부터 2005년 시리즈 전까지 호주의 우세는 양 팀 간 통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89년 시리즈 시작 전 통계는 호주 87승, 잉글랜드 86승으로 비슷했으나,[46] 2005년 시리즈 시작 시점에는 호주 115승, 잉글랜드 93승으로 격차가 벌어졌다(무승부 82회).[47] 1989년부터 2005년 시리즈 시작 전까지 치러진 43번의 테스트 경기에서 호주는 28승, 잉글랜드는 7승을 기록했고 8경기는 무승부였다. 잉글랜드가 거둔 7승 중 애시스 향방이 결정되기 전에 거둔 승리는 1997년 시리즈 1차 테스트뿐이었고, 나머지는 호주가 이미 시리즈 승리를 확정한 후의 경기였다.[48]

2. 9. 2005-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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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0. 2017-현재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2017-현재' 섹션에 해당하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3. 디 애시스 항아리

디 애시스 경기가 처음부터 "디 애시스"로 불린 것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재(ashes)를 상징하는 트로피나 물리적인 기념물에 대한 개념은 한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1925년 ''The Cricketers Annual''에는 "항아리가 없는 재를!" 가져오라는 시구가 실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를 물리적인 기념물로 만들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는데, 1904년 워너, 1909년 호주 주장 M. A. 노블, 1934년 호주 주장 W. M. 우드풀에게 증정된 것들이 그 예이다.

이 중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은 1882-83년 투어 중 당시 잉글랜드 주장이었던 이보 블라이(훗날 다즐리 경)에게 증정된 작은 테라코타 항아리이다. 이 항아리의 정확한 기원과 증정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며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아리의 기원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항아리의 내용물 역시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설이 존재한다. 크리켓 용구인 베일(bail)의 재라는 설이 유력하게 거론되지만, 다른 주장들도 제기된 바 있다. 항아리 자체는 높이 약 약 15.24cm 크기의 테라코타 재질이며, 원래 향수병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항아리에는 1883년 ''멜버른 펀치''에 실린 시의 일부가 적힌 라벨이 붙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아리의 내용물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다즐리 경 생전에는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항아리는 1927년 그가 사망한 후 미망인에 의해 메릴본 크리켓 클럽(MCC)에 기증되면서 디 애시스의 상징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MCC는 로즈의 MCC 크리켓 박물관에서 항아리를 영구 보존 및 전시하고 있다. 항아리가 널리 알려지면서 공식 트로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블라이 개인에게 주어진 기념품이므로 시리즈 결과와 상관없이 MCC 박물관에 보관된다. 항아리 자체가 매우 약하기 때문에 호주로는 단 두 차례만 이동했으며[16], 우승팀에게는 실제 항아리 대신 워터포드 크리스탈로 제작된 복제 트로피인 '애시스 트로피'가 수여된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작은 테라코타 항아리가 디 애시스의 진정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내용은 항아리의 보관과 전시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3. 1. 항아리의 기원



> 길리건, 울리 그리고 헌에게


> 그들이 조국으로 가져오기를,


> 항아리가 없는 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를 실제 기념물로 만들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1904년 워너에게 증정된 것, 1909년 호주 대표팀 주장 M. A. 노블에게 증정된 것, 1934년 호주 대표팀 주장 W. M. 우드풀에게 증정된 것 등이 그 예이다.

이 중 가장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것은 1882-83년 투어 중 이보 블라이(훗날 다즐리 경)에게 증정된 작은 항아리이다. 이 항아리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 전통적인 설: 1894년 다즐리 경의 진술에 따르면, 1883년 3차 테스트 경기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한 후, 멜버른에서 플로렌스 몰피(훗날 다즐리의 부인)를 포함한 빅토리아 지역 여성들이 항아리를 증정했다고 오랫동안 믿어졌다.
  • 최근 연구: 로널드 윌리스[10]와 조이 문스[11] 등 최근 연구자들은 1882년 크리스마스 경, 선버리에 위치한 윌리엄 클라크 경의 사유지인 루퍼츠우드에서 열린 사적인 크리켓 경기 후에 항아리가 증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공식 테스트 경기가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이 주장은 클라크 경 후손들의 증언을 주요 근거로 삼는다.


다즐리 경 본인도 시간이 지나면서 항아리를 받게 된 경위에 대해 약간씩 다른 설명을 남겼다.

  • 1926년 (Morning Post 전시회): "잉글랜드는 머독의 호주 선수단을 상대로 한 세 경기 중 두 경기에서 이겼고, 세 번째 경기 후 멜버른의 몇몇 여성들은 약간의 재를 작은 항아리에 담아 잉글랜드 선수단의 주장인 나에게 주었다."[12]
  • 1921년 (몽타구 그로버 인터뷰): "이 항아리는 그의 팀이 최종 패배를 당한 후, 그리고 그가 팀원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전에 멜버른의 몇몇 여성들에 의해 다즐리 경에게 증정되었다."[14]
  • 1926년 (브리즈번 쿠리어 보도): "팀은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가 멜버른을 떠나기 직전에 그에게 재가 담긴 항아리가 보내졌다."[15]


항아리를 누가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다즐리 경의 부인인 다즐리 백작부인(플로렌스 블라이)은 1930년 연설에서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그녀는 1882년 오벌에서의 패배 후 ''Sporting Times''의 부고 기사를 언급하며, 이보 블라이가 다음 해 호주로 가 패배를 만회하자 W. J. 클라크 경의 부인인 레이디 클라크가 작은 나무 항아리를 찾아 베일(bail, 크리켓 용구)을 태운 재를 담아 붉은 벨벳 가방에 싸서 남편(이보 블라이)에게 주었다고 말했다.[13]

항아리 내용물 역시 논란거리였다. 과거에는 스텀프, 베일(bail), 또는 공의 가죽을 태운 재라는 설이 있었으나, 1998년 다즐리 경의 며느리는 시어머니(플로렌스 블라이)의 베일(veil, 면사포)을 태운 재라고 주장하여 혼란을 더했다. 하지만 2006-07년 호주 투어 당시 항아리와 동행한 메릴본 크리켓 클럽(MCC) 관계자는 베일(veil) 설은 근거가 부족하며, 항아리 속 내용물은 크리켓 베일(bail)의 재일 가능성이 "95% 확실하다"고 밝혔다. 또한 2006년 엑스레이 검사 결과, 항아리 받침대와 손잡이에 금이 가 수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항아리는 테라코타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약 약 15.24cm이고, 원래는 향수병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항아리에 붙어 있는 ''멜버른 펀치'' 시의 네 번째 절


항아리에는 여섯 줄짜리 시가 적힌 라벨이 붙어 있는데, 이는 1883년 2월 1일 자 ''멜버른 펀치''에 실린 노래 가사의 네 번째 절이다.

> 이보가 항아리를 가지고 돌아올 때, 항아리;


> 스터드, 스틸, 리드 그리고 타일코트가 돌아올 때, 돌아올 때;


> 천지가 크게 울리고,


> 많은 군중들이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 바로우와 베이츠가 항아리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항아리;


> 그리고 나머지는 항아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1883년 2월, 논란이 된 제4차 테스트 경기 직전에 앤 플레처 부인이 만든 벨벳 가방이 블라이에게 항아리를 담기 위해 주어졌다. 다즐리 경 생전에는 항아리의 존재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1921년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사진이 실리기 전까지는 공개된 사진 기록도 없었다.

1927년 다즐리 경이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은 항아리를 메릴본 크리켓 클럽(MCC)에 기증했다. 이는 항아리가 애시스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MCC는 처음에는 로즈의 롱 룸(Long Room)에 항아리를 전시했으며, 1953년부터는 MCC 크리켓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전시되면서 항아리가 공식 트로피라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개인적인 기념품이다. 따라서 시리즈 결과에 관계없이 MCC 크리켓 박물관에 영구 보관되며, 특별 제작된 붉은색과 금색 벨벳 가방, 1882년 경기 스코어카드와 함께 전시된다.

항아리 자체가 매우 약하기 때문에 호주로의 이동은 단 두 차례만 허용되었다. 첫 번째는 호주 건국 2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1988년에 이루어졌고, 두 번째는 2006-07 애시스 시리즈 기간이었다.[16]

1990년대 호주가 애시스 시리즈를 오랫동안 지배하자, 우승팀이 다음 시리즈까지 항아리를 트로피처럼 보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MCC는 항아리의 취약한 상태와 박물관의 귀중한 소장품이라는 이유로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2002년, 블라이의 증손자인 클리프턴 경은 항아리가 원래 가족 소유이며 안전을 위해 MCC에 맡겨둔 것이라고 주장하며 호주로 반환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타협안으로 MCC는 워터포드 크리스탈로 제작된 더 큰 복제품인 '애시스 트로피'를 만들어 1998-99년 애시스 시리즈부터 우승팀에게 수여하고 있다.[17] 하지만 여전히 다즐리 경의 작은 항아리가 크리켓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이자 이 유서 깊고 치열한 경쟁의 진정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3. 2. 항아리의 내용물

항아리의 내용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크리켓 스텀프, 베일(bail, 스텀프 위에 얹는 작은 나무 막대) 또는 공의 가죽 덮개를 태운 재라는 주장이 있었다.[10][11] 하지만 1998년, 다즐리 경의 82세 된 며느리는 항아리 속 내용물이 자신의 시어머니, 즉 플로렌스 블라이의 베일을 태운 재라고 주장하여 논란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그러나 2006-07년 애시스 시리즈를 위해 항아리가 호주를 방문했을 때, 항아리와 동행한 MCC 관계자는 베일 설은 근거가 부족하며, 현재로서는 항아리에 담긴 것이 크리켓 베일의 재일 확률이 "95% 확실하다"고 밝혔다. 또한 2006년 11월 25일, 채널 나인 TV와의 인터뷰에서 이 관계자는 항아리의 엑스레이 촬영 결과 받침대와 손잡이에 금이 가 있어 수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덧붙였다. 항아리 자체는 테라코타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약 약 15.24cm이고, 원래는 향수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항아리에는 여섯 줄짜리 시가 적힌 라벨이 붙어 있다. 이 시는 1883년 2월 1일 자 ''멜버른 펀치''에 실린 노래 가사의 네 번째 절이다.

: 이보가 항아리를 가지고 돌아올 때, 항아리;

: 스터드, 스틸, 리드 그리고 타일코트가 돌아올 때, 돌아올 때;

: 천지가 크게 울리고,

: 많은 군중들이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 바로우와 베이츠가 항아리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항아리;

: 그리고 나머지는 항아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3. 3. 항아리의 보관과 전시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가 부재함)

4. 경기 결과 및 통계

디 애시스는 잉글랜드와 호주 간의 오랜 테스트 크리켓 대결로, 1882년부터 이어져 온 역사 속에서 수많은 경기 결과와 통계 기록을 남겼다. 양 팀의 역대 전적과 주요 기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1. 역대 전적

1882년 호주가 잉글랜드 원정에서 처음으로 승리하자, 잉글랜드 언론 '더 스포팅 타임스'는 "잉글랜드 크리켓이 사망했으며, 시신은 화장되어 재(ashes)는 호주로 가져갔다"는 부고 기사를 실었다. 이후 잉글랜드 팀 주장 이보 블라이가 "그 재를 되찾겠다"고 선언하면서 '디 애시스'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첫 공식 애시스 경기는 1882년에 열렸다. 2023년 호주의 잉글랜드 원정 시리즈 종료 시점까지 총 361번의 테스트 경기가 열렸으며, 상대 전적은 호주가 152승, 잉글랜드가 111승, 무승부가 98번이다.[95] 시리즈 전적은 호주가 34회 우승, 잉글랜드가 32회 우승했으며, 7번의 시리즈는 무승부로 끝났다.

1882년 말, 블라이는 "재를 되찾기 위해" 잉글랜드 팀을 이끌고 호주로 향했다. 이 시리즈는 큰 관심을 받았고, 이 기간 동안 애시스 항아리가 만들어졌다. 호주가 첫 테스트에서 승리했지만, 잉글랜드가 다음 두 경기를 이겨 2–1로 시리즈 승리를 거두며 "애시스를 되찾았다"고 여겨졌다. 이후 열린 네 번째 경기는 테스트로 간주되지만, 1882–83 시리즈와는 별개의 독립 경기로 취급되며 호주가 승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인 1914년까지 잉글랜드와 호주는 팽팽한 경쟁을 벌였다. 1905년 시리즈에서는 잉글랜드 주장 스탠리 잭슨이 팀을 2–0 승리로 이끌었고, 1907–08년과 1909년에는 몬티 노블이 호주의 승리를 이끌었다. 1911–12년 시리즈에서는 잉글랜드가 4승 1패로 크게 이겼는데, 잭 홉스가 3번의 센추리를 기록했고, 프랭크 포스터와 시드니 반스가 강력한 볼링 조합을 선보였다. 잉글랜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참가한 1912 삼각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며 애시스를 지켰다. 당시 호주 팀은 선수와 위원회 간의 분쟁으로 인해 주요 선수들이 대거 제외되어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20]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는 타자에게 유리한 위켓이 많아 대부분의 테스트 경기가 승패로 결정되었다. 특히 이 시기는 돈 브래드먼을 앞세운 호주의 우세가 두드러졌다. 1934년 애쉬스 시리즈는 이전 바디라인 시리즈의 여파로 해럴드 라우드, 더글러스 자딘 등 일부 선수들이 불참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MCC는 바디라인 전술을 용인했었으나[28] 관계 악화 후 라우드에게 책임을 물었고, 그는 사과를 거부하고 테스트 팀에서 제외되었다. 호주는 1934년에 애쉬스를 되찾아 1953년까지 보유했다. 1934년 시리즈는 마지막 오벌 테스트에서 결정되었는데, 호주는 첫 이닝에서 701점을 기록했고, 브래드먼(244점)과 빌 폰스포드(266점)는 2번째 위켓에서 451점을 합작하는 기록을 세웠다. 결국 호주가 시리즈를 2–1로 승리했다.[29] 1936-37년에 브래드먼은 호주 주장을 맡아 첫 두 경기 패배 후 내리 3연승하며 3–2로 시리즈 역전승을 거두었다. 1938년 시리즈는 1–1 무승부로 끝나 호주가 애쉬스를 유지했다. 이 시리즈 마지막 오벌 테스트에서는 잉글랜드의 렌 허튼이 당시 세계 기록인 364점을 기록하며 팀의 903-7 (선언) 대기록을 이끌었고, 부상으로 9명만 경기에 나선 호주는 이닝과 579점 차이로 대패했다.[30] 이는 테스트 역사상 가장 큰 점수 차 패배 기록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애쉬스는 1946-47년에 재개되었고, 전쟁의 여파에서 더 빨리 회복한 호주가 다시 우위를 점했다. 브래드먼이 여전히 주장을 맡았고, 레이 린드월과 키스 밀러라는 강력한 볼링 듀오를 앞세워 3–0으로 압승했다. 1948년 호주 팀은 잉글랜드 원정에서 4–0(1무)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투어 전체 무패를 기록, '무적(The Invincible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시리즈 4차전에서는 호주가 마지막 날 404점을 추격해 승리하며 세계 기록을 세웠다. 브래드먼은 이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자신의 통산 타율을 정확히 100으로 만들기 위해 단 4점이 필요했지만, 두 번째 공에 아웃되어 99.94의 타율로 은퇴했다. 브래드먼의 뒤를 이은 린제이 하셋은 1950-51년 시리즈에서 팀을 4–1 승리로 이끌었다.

피터 메이가 시드니에서 센추리를 향해 질주하며 빌 존스턴을 몰아치는 모습.


1953년, 잉글랜드는 마침내 오벌에서의 마지막 테스트 승리로 시리즈를 1–0으로 가져오며 19년 만에 애쉬스를 탈환했다. 이는 렌 허튼, 데니스 컴튼, 피터 메이, 톰 그레이브니, 콜린 코드리와 같은 타자, 프레드 트루먼, 브라이언 스타텀, 알렉 베드서, 짐 레이커, 토니 록, 골키퍼 고드프리 에반스 및 올라운더 트레버 베일리와 같은 선수들이 활약한 잉글랜드 크리켓의 황금기 시작이었다. 1954-55년 호주 원정에서는 프랭크 타이스와 스테이텀의 빠른 공에 힘입어 3-1로 승리했다.[32] 1956년 시리즈에서는 짐 레이커가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4차전에서 혼자 19개의 위켓을 잡아내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33] 잉글랜드의 2-1 시리즈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1958-59년, 새로운 주장 리치 베노와 페이스 볼러 앨런 데이비슨을 앞세운 호주가 4-0으로 애쉬스를 되찾았다. 이 시리즈는 호주 볼러들의 투구 동작 논란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1961년에는 호주가 잉글랜드 원정에서 2-1로 힘겹게 승리했다.

1960년대에는 1962-63, 1964, 1965-66, 1968년 네 차례의 시리즈 동안 경기의 양상이 바뀌었다. 양 팀의 강력한 볼러들이 은퇴하면서 득점이 어려워졌고, 패배를 피하려는 소극적인 운영으로 인해 무승부 경기가 크게 늘어났다. 이 기간 동안 열린 20번의 테스트 중 호주는 4승, 잉글랜드는 3승에 그쳤고, 나머지 13경기는 무승부였다. 호주의 주장 밥 심슨과 빌 로리는 안전 위주의 전술을 펼쳤고, 이는 관중 감소와 언론의 비판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서인도 제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부상하며 잉글랜드와 호주의 양강 구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970-71년, 레이 일링워스가 이끄는 잉글랜드는 존 스노우의 빠른 볼링과 제프리 보이콧, 존 에드리치의 활약에 힘입어 호주 원정에서 2-0으로 승리하며 다시 애쉬스를 가져왔다. 이 시리즈 도중 부진한 성적과 소극적인 전술에 대한 비판으로 호주 주장 빌 로리가 경질되기도 했다.[34]

4. 2. 주요 기록

애시스 시리즈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명장면과 기록을 남겼다. 개인과 팀이 세운 주목할 만한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애시스 주요 기록
구분기록선수/팀상세 기록연도/경기비고
개인 타격한 이닝 최다 득점렌 허튼 (잉글랜드)3641938년 오벌[30]당시 테스트 크리켓 세계 신기록
최고 위켓 파트너십브래드먼 & 폰스포드 (호주)451 (2번째 위켓)1934년 오벌[29]브래드먼 244, 폰스포드 266
한 시리즈 최다 센추리잭 홉스 (잉글랜드)3회1911–12년
통산 최고 타율브래드먼 (호주)99.941948년 은퇴 시점테스트 크리켓 역대 최고 기록. 마지막 이닝에서 4점만 더 얻었다면 100.00 달성 가능했음.
개인 볼링한 경기 최다 위켓짐 레이커 (잉글랜드)19/90 (9/37 & 10/53)1956년 올드 트래포드[33]1급 크리켓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록
한 시리즈 최다 위켓 (잉글랜드)시드니 반스34 (평균 22.88)1911–12년
한 시리즈 최다 위켓 (호주)리치 베노311958–59년
한 시리즈 최다 위켓 (잉글랜드, 전후)프랭크 포스터32 (평균 21.62)1911–12년
팀 기록한 이닝 최다 득점잉글랜드903/7 선언1938년 오벌[30]테스트 크리켓 역대 2위 기록
한 이닝 최다 득점 (호주)호주7011934년 오벌[29]
최다 점수 차 승리잉글랜드이닝 및 579런1938년 오벌 (vs 호주)[30]테스트 크리켓 역사상 최다 점수 차 승리
4차 이닝 최고 추격 성공호주404/31948년 헤딩리 (vs 잉글랜드)당시 테스트 크리켓 세계 신기록



이 외에도 브래드먼이 이끈 1948년 호주 팀은 잉글랜드 원정에서 단 한 경기도 패하지 않으며 "The Invincibleseng"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1970-71년 시리즈에서는 존 스노우의 강력한 속구와 제프리 보이콧, 존 에드리치의 꾸준한 득점력이 잉글랜드의 승리를 이끌었다.[34]

5. 경기장

애시스 시리즈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번갈아 가며 개최되며, 각 시리즈의 경기는 서로 다른 경기장에서 열린다.

5. 1. 호주 경기장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는 애시스 시리즈 경기는 여러 크리켓 경기장에서 번갈아 개최된다.

경기장 이름위치첫 애시스 테스트 개최비고
MCG멜버른1876–77복싱 데이 테스트 개최
SCG시드니1881–82새해 첫날 테스트 개최
애들레이드 오벌애들레이드1884–85
더 가바브리즈번1932–33
WACA퍼스1970–712017–18 시즌까지 사용
벨레리브 오벌호바트2021–22코로나19 범유행으로 임시 개최 (태즈메이니아 최초)
브리즈번 전시 경기장브리즈번1928–29단일 테스트만 개최
퍼스 스타디움퍼스-WACA 대체 예정이었으나 미개최
마누카 오벌캔버라-애시스 테스트 미개최



전통적으로 MCG에서는 복싱 데이 테스트가, SCG에서는 새해 첫날 테스트가 열린다.

퍼스의 WACA는 1970–71 시즌부터 애시스 테스트를 개최했으며, 2017–18 시즌의 테스트를 마지막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원래 2021–22 시리즈부터는 퍼스 스타디움이 WACA를 대체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범유행 기간 동안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엄격한 국경 통제 및 격리 조치로 인해 해당 시리즈의 마지막 테스트는 호바트의 벨레리브 오벌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는 태즈메이니아에서 열린 최초의 애시스 테스트 경기였다.

브리즈번 전시 경기장에서는 1928–29 시즌에 단 한 번의 테스트 경기가 열린 바 있다. 한편, 캔버라의 마누카 오벌은 아직 애시스 테스트 경기를 개최한 적이 없다.

2010–11 시리즈 당시, 크리켓 오스트레일리아는 시리즈를 6경기로 늘려 벨레리브 오벌에서 추가 경기를 치를 것을 제안했으나, 잉글랜드 웨일스 크리켓 위원회(ECB)가 이를 거부하여 5경기 체제가 유지되었다.

5. 2. 잉글랜드 경기장

애시스 시리즈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번갈아 개최되며, 각 시리즈의 경기는 여러 경기장에서 나뉘어 열린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현재 주로 사용되는 경기장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는 소피아 가든스 (카디프, 웨일스, 2009년), 리버사이드 그라운드 (체스터-르-스트리트, 더럼, 2013년), 트렌트 브리지 (노팅엄셔 웨스트 브리지포드, 1899년부터 사용)에서도 애시스 테스트 경기가 열렸으며, 1902년에는 셰필드의 브라말 레인에서 단 한 차례 테스트 경기가 개최된 바 있다. 전통적으로 시리즈의 마지막 테스트 경기는 디 오벌에서 열린다.

소피아 가든스와 리버사이드 그라운드는 2020년부터 2031년까지 테스트 경기장 목록에서 제외되어, 최소 2035년까지는 애시스 테스트를 개최하지 않을 예정이다. ECB는 2027년과 2031년 애시스 시리즈 개최지로 로즈(2027, 2031), 디 오벌(2027, 2031), 에지바스톤(2027), 트렌트 브리지(2027, 2031), 로즈 볼(2027), 올드 트래포드(2031), 헤딩리(2031)를 발표했다.[70]

아래 표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열린 애시스 테스트 경기 기록이다.

  • * : 포기(Abandoned)된 테스트 포함
  • † : 해당 경기장을 연고지로 하는 카운티 크리켓 클럽
  • ‡ : 더 이상 테스트 경기를 개최하지 않는 이전 경기장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경기장카운티첫 테스트마지막 테스트경기 수잉글랜드 승리무승부*오스트레일리아 승리참고
올드 트래포드, 맨체스터랭커셔1884202333719811882019[78]
로즈, 런던미들섹스18842023377201314162023[79]
디 오벌, 런던서리18842023371720231462015[80]
트렌트 브리지, 노팅엄노팅엄셔189920152262015972001[81]
헤딩리, 리즈요크셔189920232692023892009[82]
에지바스톤, 버밍엄워릭셔190220231662015552023[83]
브라말 레인, 셰필드요크셔1902190210011902[84]
소피아 가든스, 카디프글러모건2009201521201510[85]
리버사이드, 체스터-르-스트리트더럼2013201311201300[86]


6. 문화적 영향

크리켓 시리즈로서 디 애시스의 인기와 명성은 다른 스포츠 및 게임 분야로 확장되어, 잉글랜드 또는 영국과 호주 간의 대결에 "애시스(The Ashes)"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20세기 전반 호주에서는 이 용어가 더욱 폭넓게 사용되어, 양국 간의 직접적인 대결이 아니더라도 특정 스포츠 내에서 가장 치열한 라이벌 관계나 경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87][88][89][90][91][92]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일반적인 용법은 줄어들었고, 오늘날 "애시스"는 주로 크리켓에서 호주와 잉글랜드 간의 전통적인 라이벌 시리즈를 지칭하는 용어로 인식되고 있다.

6. 1. 다른 스포츠에서의 사용

크리켓 시리즈의 인기와 명성으로 인해 다른 스포츠와 게임에서도 잉글랜드/영국과 호주 간의 대결에 "애시스(The Ashes)"라는 이름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하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은 럭비 리그 애시스 경기로, 현재의 잉글랜드와 호주 간의 경기를 가리킨다. 1908년 양국 간 럭비 리그 경기가 시작될 때 호주 팀이 "애시스"라는 명칭을 제안했다. 다른 예로는 텔레비전 게임 쇼인 ''글래디에이터''와 ''세일 오브 더 센추리''가 있는데, 두 쇼 모두 호주와 잉글랜드 버전의 출연자가 서로 경쟁하는 특별판을 방영했다.

20세기 전반기에 이 용어는 호주에서 더욱 일반화되어, 호주 대 잉글랜드의 맥락을 벗어나더라도 특정 스포츠 내에서 가장 두드러진 라이벌 관계나 경쟁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호주식 축구의 주(州) 간 경기 대회인 주간 카니발과 그 트로피 역할을 하는 작은 은색 상자는 상징적으로 호주 축구의 "애시스"로 알려졌으며,[87] 적어도 1940년대까지 그렇게 불렸다.[88] 호주와 뉴질랜드 간의 축구 라이벌 관계는 1950년대까지 "오스트랄라시아의 축구 애시스"로 묘사되었으며,[89] 1923년에는 두 나라의 주장이 피운 시가 재를 상자에 넣어 문자 그대로 트로피를 만들기도 했다.[90] 퀸즐랜드뉴사우스웨일스 간의 주간 럭비 리그 라이벌 관계(주간 럭비 리그)는 한동안 호주의 럭비 리그 애시스로 알려졌으며, 두 주 간의 론 볼 경기에서도 이 용어를 정기적으로 사용했다.[91] 심지어 남부 서호주의 연례 그레이트 사우스턴 풋볼 카니발과 같은 일부 지역 라이벌 관계도 지역적으로 "애시스"로 묘사되었다.[92]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용법은 더 이상 흔하지 않으며, 오늘날 "애시스"는 주로 호주와 잉글랜드 간의 대결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6. 2.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현대판 디 애시스 항아리 복제품


애시스는 1953년에 개봉된 테렌스 래티건의 텔레비전 연극을 각색한 영화 ''더 파이널 테스트''에 등장한다. 이 영화는 잭 워너가 애시스 시리즈의 마지막 경기인 은퇴 경기를 치르는 잉글랜드 크리켓 선수로 출연하며, 1953년 잉글랜드의 승리에 기여한 잉글랜드 주장 렌 휴턴과 다른 선수들이 카메오로 출연한다.[93]

더글러스 애덤스의 1982년 SF 코미디 소설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 은 애시스가 담긴 항아리가 플롯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항아리는 외계인 로봇에게 도난당하는데, 그 안의 불에 탄 그루터기가 "위킷 게이트"의 잠금을 해제하고 감옥에 갇힌 크리킷이라는 세계를 해방하는 데 필요한 열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1932-33년의 "바디라인" 애시스 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허구의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인 ''바디라인''은 1984년 호주에서 방영되었다. 출연진으로는 도널드 브래드먼 역의 게리 스위트와 잉글랜드 주장 더글러스 자딘 역의 휴고 위빙이 있었다.[94]

1938년 영화 ''레이디는 사라진다''에서 바실 래드퍼드와 네이튼 웨인이 연기한 찰터스 앤 칼디콧은 맨체스터에서 열린 세 번째 테스트의 마지막 날 경기를 보기 위해 유럽에서 서둘러 귀국하려는 두 명의 크리켓 팬이다.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 신문 배달부의 포스터를 보고서야 그들은 홍수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7.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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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외부 링크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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