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페두사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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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람페두사섬은 이탈리아 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항구 도시로 알려졌으며, 지질학적으로는 아프리카에 속한다. 역사적으로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로마인들의 상륙지였으며, 중세 시대에는 시칠리아 왕국의 종속 영토가 되었다. 1800년대 초 영국과 나폴리 왕국의 지배를 거쳐 1861년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군에 점령되었다. 2000년대 이후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의 주요 경유지가 되면서 난민 문제가 심각해졌으며, 2013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섬을 방문하여 이민자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민자 급증으로 인해 사회적, 인도적 위기가 발생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이민 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바다의 불'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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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페두사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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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별칭 | 지중해의 진주 |
지리 | |
위치 | 지중해 |
좌표 | 35°30′56″N 12°34′23″E |
군도 | 펠라지에 제도 |
면적 | 20.2 km² |
해안선 길이 | 해당 사항 없음 |
최고점 | 해당 사항 없음 |
해발고도 | 해당 사항 없음 |
행정 구역 | |
국가 | 이탈리아 |
레지오네 (주) | 시칠리아 주 |
지방 자치 단체 | 아그리젠토 현 |
코무네 (기초 자치 단체) | 람페두사 에 리노사 |
인구 | |
전체 코무네 인구 (2021년) | 6,462명 (람페두사 에 리노사) |
인구 밀도 | 해당 사항 없음 |
민족 그룹 | 해당 사항 없음 |
추가 정보 | |
어원 | |
고대 그리스어 | Λοπαδοῦσσα (Lopadoûssa), Λοπαδοῦσα (Lopadoûsa), Λοπαδυῦσσα (Lopadyŷssa) |
거리 | |
시칠리아 | 약 113km |
튀니지 | 약 205km |
몰타 | 약 176km |
기타 | |
언어 | 이탈리아어 시칠리아어 (람피두사) 몰타어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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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
람페두사(Lampedusa)라는 이름은 섬의 고대 그리스어 이름인 로파두사/Λοπαδούσσαgrc 또는 라파두사/Λαπαδούσσαgrc(Lopadoússa/Lapadoússa)에서 유래되었다.[6][7]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람페두사는 항구 도시로 알려졌다. 어업도 성행하여,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경에 섬에서 발행된 청동화에는 주로 게와 참치가 그려졌으며, 로마 제국 지배하에서는 가룸의 생산 거점으로도 이용되었다.[8] 역사적으로 람페두사섬은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고대 로마인들의 상륙지이자 해상 기지였다. 로마인들은 ''가룸''(fish sauce, 어장)으로 알려진 귀한 생선 소스를 생산하는 공장을 세웠다. 812년(또는 813년), 아글라브 왕조의 지시를 받은 사라센인들이 아랍-비잔틴 전쟁 중에 이 섬을 약탈했다.[9][10]
이 이름은 섬의 바위가 많은 지형 때문에 '바위'를 의미하는 레파스/λέπαςgrc(lépas)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이 단어는 그리스인들이 굴의 일종으로 사용했으며, 이 섬이 이 종류의 굴이 풍부하여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6] 다른 학자들은 이 이름이 뱃사람들을 위해 섬에 놓았던 불빛 때문에 '횃불'을 의미하는 람파스/λαμπάςgrc(lampás)에서 유래되었다고 믿고 있다.[7]
이 섬은 시칠리아어로 암피두사(Ampidusascn)라고 불린다. '''람페두사'''로도 표기되며[52][53], 옛날에는 로파두사(Lopadusait)라고도 불렸다[53]。
3. 역사
중세 시대 말까지 이 섬은 시칠리아 왕국의 종속 영토가 되었다.[11] 1553년, 오스만 제국의 지휘를 받는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이 람페두사섬을 습격하여 1,000명의 포로를 바르바리 노예 무역으로 끌고 갔다.[12] 해적의 공격으로 인해 섬은 무인도가 되었다. 1565년, 돈 가르시아 데 톨레도는 몰타 대공성전을 격파하기 위한 구원군을 이끌면서 람페두사섬에 잠시 들렀다. 그 후 수 세기 동안, 몰타에 주둔한 구호기사단 함대는 때때로 람페두사섬의 항구를 악천후나 해적을 피하는 대피소로 사용했다.[11]
1667년, 이 섬은 팔레르모의 페르디난드 토마시에게 주어졌고, 그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로부터 람페두사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1] 토마시는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조상이었다. 섬을 얻은 지 한 세기 후, 토마시 가문은 재정착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8세기 말, 구호기사단은 람페두사섬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예배당을 포함하여 작은 시설을 유지했는데, 여기에는 사제와 6명의 몰타인이 배치되었으며, 그들은 종종 해적들과 교역을 했다. 마라부트의 일원을 기념하는 묘소일 가능성이 있는 ''마라부토''라고 알려진 구조물도 이 시기에 섬에 존재했으며, 많은 무슬림 신자들이 방문했다.[11]
1800년 6월 25일, 줄리오 마리아 토마시 공작은 몰타 상인 살바토레 가트에게 람페두사섬을 영구임차권으로 임대했는데, 가트는 ''칼라 델라 갈레레''와 ''칼라 델라 마돈나''에 2개의 해안 망루를 건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가트는 몇 명의 몰타 노동자들을 데리고 섬에 정착하여 가축을 수입하고 토지 경작을 시작했다. 오래된 성을 재건하고 풍차도 지었다. 가트는 보호를 위해 영국 국기를 게양했다. 1804년 6월 27일, 공작은 또 다른 몰타인 주세페 부제자에게 섬을 양도했지만, 가트가 계속 섬을 관리했다.[11]
당시 영국은 람페두사섬을 인수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몰타 보호령이 된 몰타를 대체할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섬이 몰타에 물품을 공급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11]
1810년, 가트는 지중해 지역 육군 군수부의 알렉산더 페르난데스에게 섬을 임대했는데, 그는 소와 양을 기르는 농장을 세우고 28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섬 전체를 목초지로 만들었다. 1813년까지 섬에는 거의 200명의 몰타 노동자가 거주했다.[11]
1812년 보고서에서 왕립 위원회는 섬을 몰타의 보급 기지로 만드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813년 11월, 슬루프 HMS ''Partridge''가 황열병에 감염되어 요양을 위해 람페두사섬으로 보내졌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주민들이 몰타로 도망가고 섬에는 50~60명만 남게 되었다. 몰타 총독 토마스 메이틀랜드 경은 람페두사섬을 방문하여 페르난데스가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1814년 9월 15일, 그는 섬에 주둔한 영국군 철수를 발표했다. 같은 공고는 또한 "[영국] 정부는 [람페두사]와 더 이상 어떤 관련이나 관계를 가질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13]
페르난데스는 1813년에 지브롤터로 떠났지만, 람페두사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계속 주장했다. 영국 정부는 1818년에 그에게 보상을 거부했고, 시칠리아 법원은 곧 그의 권리를 박탈했다. 살바토레 가트는 1813년과 1821년 사이에 사망했거나 실종된 것으로 보이며, 섬은 살바토레의 아내 자코마 가트를 살해한 포르투나토 프렌도에게 넘어갔다.
1841년, 나폴리 군함이 위력 시위를 위해 섬을 방문했지만, 1843년 9월 11일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 날 2척의 군함이 도착하여 섬에 400명의 군인을 상륙시켰다. 그들은 섬에 있던 영국 국기를 나폴리 국기로 교체했다. 섬을 두 시칠리아 왕국의 일부로 선포하는 왕령이 낭독되었다. 몇몇 몰타 정착민들이 섬에 남았고, 다른 사람들은 몰타로 돌아가거나 튀니지로 갔다.[11]
1840년대에 토마시 가문은 공식적으로 섬을 나폴리 왕국에 매각했다. 1861년, 섬은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새로운 이탈리아 정부는 그곳에서의 활동을 교도소 건설로 제한했다.
1860년부터 이탈리아 왕국 영토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유배지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에는 판텔레리아 섬 침공 작전 (코크스크류 작전)에 부수하여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전투는 시칠리아 상륙 작전 (허스키 작전)의 전초전이었다. 1960년대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기지가 설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람페두사섬은 이탈리아의 작은 수비대가 주둔한 추축국 영토였다. 연합군이 점령한 몰타와 북아프리카와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3년 6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의 전조로 코르크스크류 작전에서 왕립 해군 구축함 HMS ''Lookout''과 콜드스트림 가드 제2대대 병력 95명에 의해 저항 없이 섬이 점령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군사적 충돌도 없었다. 항구에서 흰 깃발이 발견되었고, ''Lookout''의 코베트 중위가 모터 보트를 타고 항구에 접근했을 때 섬의 수비대가 항복하기를 원한다고 들었다.[14] 베니토 무솔리니는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비대에 항복을 허가했다. 총독의 공식 항복은 1943년 6월 12일 오후 9시 이전에 육군/해군 연합 대표단에 의해 섬의 지하 지휘소에서 수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총독은 칼을 콜드스트림 중대 지휘관인 빌 해리스 소령에게 넘겼다.[15]
같은 날 더 일찍 수비대의 일부가 특이한 상황에서 항복을 시도했던 것에 대한 두 번째 비공식적인 주장도 제기되었다. 왕립 공군 페어리 소드피시 항공기 조종사인 시드니 코헨 상사는 연료가 부족해지고 나침반에 문제가 생겨 착륙했다.[16] 코헨의 활약은 6개월 동안 상연된 이디시어 연극인 ''람페두사의 왕''에서 기념되었다.[17]
1960년대에야 비로소 시칠리아와의 첫 번째 전화 연결이 설치되었다. 같은 시대에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1972년, 섬 서쪽 부분은 미국 해안 경비대 LORAN-C 송신기 기지가 되었다. 1979년, 케이 하르젤 중위는 해안 경비대 기지를 지휘하며 "고립된 근무 기지의 첫 여성 지휘관"이 되었다.[18]
1980년대, 특히 1985년부터 1986년까지 긴장이 고조되었고 섬 주변 지역은 여러 차례 공격의 현장이 되었다. 1986년 4월 15일, 리비아는 미국의 폭격으로 트리폴리와 벵가지가 공격받고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의 양딸이 사망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람페두사 항법 기지에 두 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러나 미사일은 섬을 지나 바다에 떨어져 피해는 없었다.[19][20]
1989년 1월 4일, USS ''John F. Kennedy''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 해군 항공기가 섬에서 약 200km 떨어진 지점에서 리비아 전투기 두 대를 격추했다.[21]
나토 기지는 1994년에 폐쇄되어 이탈리아 군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2013년 7월 8일에는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가 섬을 방문했다. 로마와 그 주변을 제외하고, 프란치스코가 교황으로서 처음 방문한 곳이 되었다. 이 방문은 난민을 실은 어선이 섬 근해에서 조난당한 사건에 마음 아파하여 실현된 것으로, 희생자에 대한 미사가 봉헌되었다.[52][55]
2000년대 초부터 람페두사는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려는 이민자들의 주요 경유지가 되었다. 2004년 리비아와 이탈리아 정부는 이탈리아에서 추방된 아프리카 이민자들을 리비아가 수용하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고, 2004년과 2005년 사이 람페두사에서 리비아로 많은 사람들이 대량 송환되어 유럽 의회의 비판을 받았다.[22]
2006년까지 많은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리비아의 인신매매업자에게 돈을 지불하고 보트를 이용해 람페두사에 도착했다.[23] 이들은 이탈리아 본토의 수용 센터로 이송되었으나, 추방 명령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 석방되는 경우가 많았다.[24]
2009년, 유엔 난민 기구(UNHCR)는 섬의 임시 이민자 수용 센터가 과밀하다며 비판했다. 최대 850명 수용 시설에 약 2,000명의 보트 피플이 수용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비닐 시트 아래에서 야외에서 잠을 잤다.[25] 2009년 2월 19일, 수용자 폭동으로 인한 화재로 시설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2011년 튀니지 혁명과 2011년 리비아 내전으로 더 많은 이민자들이 람페두사로 이동했다. 2011년 5월까지 35,000명 이상,[26] 8월 말까지 48,000명이 도착했다.[27] 대부분 20~30대 젊은 남성이었다.[28] 이 상황은 유럽 연합 내 분열을 일으켰고, 프랑스 정부는 대부분의 도착자를 난민이 아닌 경제 이민자로 간주했다.[29]
2013년 7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 섬을 방문하여 이민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인신매매범들을 비난했다.[30]
2013년 10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난파 사고가 발생,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출신 500명 이상을 태운 보트가 침몰하여 최소 300명이 사망했다.[31][32]
2015년 1월부터 4월까지 약 1,600명의 이민자가 리비아에서 람페두사로 가는 경로에서 사망하여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이민 경로가 되었다.[33]
2017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다큐멘터리 영화 ''바다의 불(Fire at Sea)''은 이 이민 위기를 기록했으며, 2014년과 2015년에 섬에서 촬영되었다.[34] 이 영화는 제6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35]
2023년 9월, 24시간 이내에 120척 이상의 보트에 탑승한 약 7,000명의 이민자가 섬에 도착하여 람페두사 인구보다 많아졌다.[36] 이민자 중 일부는 독일로 재배치되었다.[37] 2023년 9월 이민자의 대다수는 튀니지에서 왔으며, "젊은 남성 또는 동반하지 않은 미성년자"였다. 이주의 이유는 다양했지만, ''아이리쉬 이그재미너''는 "튀니지의 사회경제적 상황" 악화와 위험 또는 박해로부터의 도피를 언급했다.[38]
3. 1. 고대 ~ 중세
역사적으로 람페두사섬은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고대 로마인들의 상륙지이자 해상 기지였다. 로마인들은 ''가룸''(fish sauce, 어장)으로 알려진 귀한 생선 소스를 생산하는 공장을 세웠다.[8] 812년(또는 813년), 아글라브 왕조의 지시를 받은 사라센인들이 아랍-비잔틴 전쟁 중에 이 섬을 약탈했다.[9][10]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람페두사는 항구 도시로 알려졌다. 어업도 성행하여,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경에 섬에서 발행된 청동화에는 주로 게와 참치가 그려졌으며, 로마 제국 지배하에서는 가룸의 생산 거점으로도 이용되었다.
중세 시대 말까지 이 섬은 시칠리아 왕국의 종속 영토가 되었다.[11] 1553년, 오스만 제국의 지휘를 받는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이 람페두사섬을 습격하여 1,000명의 포로를 바르바리 노예 무역으로 끌고 갔다.[12] 해적의 공격으로 인해 섬은 무인도가 되었다. 1565년, 돈 가르시아 데 톨레도는 몰타 대공성전을 격파하기 위한 구원군을 이끌면서 람페두사섬에 잠시 들렀다. 그 후 수 세기 동안, 몰타에 주둔한 구호기사단 함대는 때때로 람페두사섬의 항구를 악천후나 해적을 피하는 대피소로 사용했다.[11]
1667년, 이 섬은 팔레르모의 페르디난드 토마시에게 주어졌고, 그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로부터 람페두사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1] 토마시는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조상이었다. 섬을 얻은 지 한 세기 후, 토마시 가문은 재정착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8세기 말, 구호기사단은 람페두사섬에 작은 시설을 유지했는데, 여기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예배당이 포함되었다. 이곳에는 사제와 6명의 몰타인이 배치되었으며, 그들은 종종 해적들과 교역을 했다. 마라부트의 일원을 기념하는 묘소일 가능성이 있는 ''마라부토''라고 알려진 구조물도 이 시기에 섬에 존재했으며, 많은 무슬림 신자들이 방문했다.[11]
3. 2. 근세
역사적으로 람페두사섬은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고대 로마인들의 상륙지이자 해상 기지였다. 로마인들은 ''가룸''(fish sauce, 어장)으로 알려진 귀한 생선 소스를 생산하는 공장을 세웠다.[8] 812년(또는 813년),[9] 아글라브 왕조의 지시를 받은 사라센인들이 아랍-비잔틴 전쟁 중에 이 섬을 약탈했다.[10]
중세 시대 말까지 이 섬은 시칠리아 왕국의 종속 영토가 되었다.[11] 1553년, 오스만 제국의 지휘를 받는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이 람페두사섬을 습격하여 1,000명의 포로를 바르바리 노예 무역으로 끌고 갔다.[12] 1565년, 돈 가르시아 데 톨레도는 몰타 대공성전을 격파하기 위한 구원군을 이끌면서 람페두사섬에 잠시 들렀다. 그 후 수 세기 동안, 몰타에 주둔한 구호기사단 함대는 때때로 람페두사섬의 항구를 악천후나 해적을 피하는 대피소로 사용했다.[11]
1667년, 이 섬은 팔레르모의 페르디난드 토마시에게 주어졌고, 그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로부터 람페두사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1] 토마시는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조상이었다. 섬을 얻은 지 한 세기 후, 토마시 가문은 재정착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8세기 말, 구호기사단은 람페두사섬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예배당을 포함하여 작은 시설을 유지했는데, 여기에는 사제와 6명의 몰타인이 배치되었으며, 그들은 종종 해적들과 교역을 했다. 마라부트의 일원을 기념하는 묘소일 가능성이 있는 ''마라부토''라고 알려진 구조물도 이 시기에 섬에 존재했으며, 많은 무슬림 신자들이 방문했다.[11]
1800년 6월 25일, 줄리오 마리아 토마시 공작은 몰타 상인 살바토레 가트에게 람페두사섬을 영구임차권으로 임대했는데, 가트는 ''칼라 델라 갈레레''와 ''칼라 델라 마돈나''에 2개의 해안 망루를 건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가트는 몇 명의 몰타 노동자들을 데리고 섬에 정착하여 가축을 수입하고 토지 경작을 시작했다. 오래된 성을 재건하고 풍차도 지었다. 가트는 보호를 위해 영국 국기를 게양했다. 1804년 6월 27일, 공작은 또 다른 몰타인 주세페 부제자에게 섬을 양도했지만, 가트가 계속 섬을 관리했다.[11]
당시 영국은 람페두사섬을 인수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몰타 보호령이 된 몰타를 대체할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섬이 몰타에 물품을 공급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11]
1810년, 가트는 지중해 지역 육군 군수부의 알렉산더 페르난데스에게 섬을 임대했는데, 그는 소와 양을 기르는 농장을 세우고 28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섬 전체를 목초지로 만들었다. 1813년까지 섬에는 거의 200명의 몰타 노동자가 거주했다.[11]
1812년 보고서에서 왕립 위원회는 섬을 몰타의 보급 기지로 만드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813년 11월, 슬루프 HMS ''Partridge''가 황열병에 감염되어 요양을 위해 람페두사섬으로 보내졌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주민들이 몰타로 도망가고 섬에는 50~60명만 남게 되었다. 몰타 총독 토마스 메이틀랜드 경은 람페두사섬을 방문하여 페르난데스가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1814년 9월 15일, 그는 섬에 주둔한 영국군 철수를 발표했다. 같은 공고는 또한 "[영국] 정부는 [람페두사]와 더 이상 어떤 관련이나 관계를 가질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13]
페르난데스는 1813년에 지브롤터로 떠났지만, 람페두사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계속 주장했다. 영국 정부는 1818년에 그에게 보상을 거부했고, 시칠리아 법원은 곧 그의 권리를 박탈했다. 살바토레 가트는 1813년과 1821년 사이에 사망했거나 실종된 것으로 보이며, 섬은 살바토레의 아내 자코마 가트를 살해한 포르투나토 프렌도에게 넘어갔다.
1841년, 나폴리 군함이 위력 시위를 위해 섬을 방문했지만, 1843년 9월 11일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 날 2척의 군함이 도착하여 섬에 400명의 군인을 상륙시켰다. 그들은 섬에 있던 영국 국기를 나폴리 국기로 교체했다. 섬을 두 시칠리아 왕국의 일부로 선포하는 왕령이 낭독되었다. 몇몇 몰타 정착민들이 섬에 남았고, 다른 사람들은 몰타로 돌아가거나 튀니지로 갔다.[11]
1840년대에 토마시 가문은 공식적으로 섬을 나폴리 왕국에 매각했다. 1861년, 섬은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새로운 이탈리아 정부는 그곳에서의 활동을 교도소 건설로 제한했다.
3. 3. 현대
제2차 세계 대전 중 람페두사섬은 이탈리아의 작은 수비대가 주둔한 추축국 영토였다. 연합군이 점령한 몰타와 북아프리카와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3년 6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의 전조로 코르크스크류 작전에서 왕립 해군 구축함 HMS ''Lookout''과 콜드스트림 가드 제2대대 병력 95명에 의해 저항 없이 섬이 점령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군사적 충돌도 없었다. 항구에서 흰 깃발이 발견되었고, ''Lookout''의 코베트 중위가 모터 보트를 타고 항구에 접근했을 때 섬의 수비대가 항복하기를 원한다고 들었다.[14] 베니토 무솔리니는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비대에 항복을 허가했다. 총독의 공식 항복은 1943년 6월 12일 오후 9시 이전에 육군/해군 연합 대표단에 의해 섬의 지하 지휘소에서 수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총독은 칼을 콜드스트림 중대 지휘관인 빌 해리스 소령에게 넘겼다.[15]
같은 날 더 일찍 수비대의 일부가 특이한 상황에서 항복을 시도했던 것에 대한 두 번째 비공식적인 주장도 제기되었다. 왕립 공군 페어리 소드피시 항공기 조종사인 시드니 코헨 상사는 연료가 부족해지고 나침반에 문제가 생겨 착륙했다.[16] 코헨의 활약은 6개월 동안 상연된 이디시어 연극인 ''람페두사의 왕''에서 기념되었다.[17]
1960년대에야 비로소 시칠리아와의 첫 번째 전화 연결이 설치되었다. 같은 시대에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1972년, 섬 서쪽 부분은 미국 해안 경비대 LORAN-C 송신기 기지가 되었다. 1979년, 케이 하르젤 중위는 해안 경비대 기지를 지휘하며 "고립된 근무 기지의 첫 여성 지휘관"이 되었다.[18]
1980년대, 특히 1985년부터 1986년까지 긴장이 고조되었고 섬 주변 지역은 여러 차례 공격의 현장이 되었다. 1986년 4월 15일, 리비아는 미국의 폭격으로 트리폴리와 벵가지가 공격받고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의 양딸이 사망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람페두사 항법 기지에 두 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러나 미사일은 섬을 지나 바다에 떨어져 피해는 없었다.[19][20]
1989년 1월 4일, USS ''John F. Kennedy''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 해군 항공기가 섬에서 약 200km 떨어진 지점에서 리비아 전투기 두 대를 격추했다.[21]
나토 기지는 1994년에 폐쇄되어 이탈리아 군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2013년 10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난파 사고가 발생했다. 주로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출신의 500명 이상의 이민자를 태운 보트가 람페두사 해안에서 침몰하여 최소 300명이 사망했다.[31][32]
3. 3. 1. 2013년 람페두사 난민선 침몰 사고
2000년대 초부터 람페두사는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려는 이민자들의 주요 경유지가 되었다. 2004년 리비아와 이탈리아 정부는 이탈리아에서 추방된 아프리카 이민자들을 리비아가 수용하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고, 2004년과 2005년 사이 람페두사에서 리비아로 많은 사람들이 대량 송환되어 유럽 의회의 비판을 받았다.[22]
2006년까지 많은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리비아의 인신매매업자에게 돈을 지불하고 보트를 이용해 람페두사에 도착했다.[23] 이들은 이탈리아 본토의 수용 센터로 이송되었으나, 추방 명령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 석방되는 경우가 많았다.[24]
2009년, 유엔 난민 기구(UNHCR)는 섬의 임시 이민자 수용 센터가 과밀하다며 비판했다. 최대 850명 수용 시설에 약 2,000명의 보트 피플이 수용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비닐 시트 아래에서 야외에서 잠을 잤다.[25] 2009년 2월 19일, 수용자 폭동으로 인한 화재로 시설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2011년 튀니지 혁명과 2011년 리비아 내전으로 더 많은 이민자들이 람페두사로 이동했다. 2011년 5월까지 35,000명 이상,[26] 8월 말까지 48,000명이 도착했다.[27] 대부분 20~30대 젊은 남성이었다.[28] 이 상황은 유럽 연합 내 분열을 일으켰고, 프랑스 정부는 대부분의 도착자를 난민이 아닌 경제 이민자로 간주했다.[29]
2013년 7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 섬을 방문하여 이민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인신매매범들을 비난했다.[30] 2013년 10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난파 사고가 발생,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출신 500명 이상을 태운 보트가 침몰하여 최소 300명이 사망했다.[31][32]
2015년 1월부터 4월까지 약 1,600명의 이민자가 리비아에서 람페두사로 가는 경로에서 사망하여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이민 경로가 되었다.[33]
2017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다큐멘터리 영화 ''바다의 불(Fire at Sea)''은 이 이민 위기를 기록했으며, 2014년과 2015년에 섬에서 촬영되었다.[34] 이 영화는 제6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35]
2023년 9월, 24시간 이내에 120척 이상의 보트에 탑승한 약 7,000명의 이민자가 섬에 도착하여 람페두사 인구보다 많아졌다.[36] 이민자 중 일부는 독일로 재배치되었다.[37] 2023년 9월 이민자의 대다수는 튀니지에서 왔으며, "젊은 남성 또는 동반하지 않은 미성년자"였다. 이주의 이유는 다양했지만, ''아이리쉬 이그재미너''는 "튀니지의 사회경제적 상황" 악화와 위험 또는 박해로부터의 도피를 언급했다.[38]
4. 지리
람페두사섬은 이탈리아 최남단 지점이자 최남단 섬이다. 정치적, 행정적으로 람페두사섬은 이탈리아에 속하지만, 지질학적으로는 아프리카에 속한다. 두 지역 사이의 바다가 120m보다 깊지 않기 때문이다. 람페두사섬은 반건조 기후의 섬으로, 가리게 지형이 주를 이루며, 서쪽에는 마키 관목지가 있다. 불규칙적인 강수량 외에는 수원지가 없다. 섬 전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두 개의 경사면을 가지고 있다. 남서쪽은 깊은 협곡이 지배적이며, 남동쪽은 얕은 계곡과 모래 해변이 주를 이룬다. 북쪽 해안 전체는 절벽이 지배적이며, 동쪽 해안에는 완만한 경사의 절벽이, 서쪽 해안에는 수직 절벽이 있다.
람페두사는 지질학적으로 "펠라지안 지역"(USGS 정의)의 일부이며, 아프리카 대륙의 구조적 구성원으로서, ''람페두사 고원''이라고 불리는 구조적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람페두사는 본질적으로 석회암의 기울어진 블록이며, 최고점은 북서 해안에, 최저점은 남동 해안에 위치해 있다. 섬은 부드러운 석회암으로, 흰색에서 크림색-노란색을 띤다.[39] 이 지역은 중앙 지중해의 지진 활동 지역인 시칠리아 해협 열곡대에 위치해 있다. 구조적 관점에서 볼 때, 람페두사는 아프리카 판 북쪽 가장자리에 있는 전단대인 펠라지안 블록에 속하며, 시칠리아 해협 내부에 위치해 있다.[40]
람페두사섬은 펠라지에 제도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람피오네섬의 동남동쪽 약 20km, 리노자섬의 서남서쪽 약 45km에 위치한다. 섬의 형태는 동서로 가늘고 길며, 길이는 9km인 반면 폭은 1.5km 정도이다. 면적은 20.2km2이며,[54] 시칠리아주 소속의 섬들 중 6번째로 크다.
시칠리아섬의 아그리젠토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220km 떨어져 있는 반면, 튀니지의 해안에서는 동쪽으로 11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지세적으로는 아프리카와의 연결이 강하며, 아프리카와의 사이의 해저 최심부는 120m 정도이다[54]。 따라서 지리적으로는 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또한 북북서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이탈리아령 판텔레리아섬, 북동동쪽으로 약 170km 지점에 몰타섬(몰타 공화국)이 있다.
람페두사섬은 이탈리아 공화국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섬이며, 이 이탈리아 공화국 최남단이다. 북위 35°30'의 위도는 멜리야(북위 35°17')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튀니스, 알제, 세우타 등보다 남쪽에 있으며, 유럽 대륙에서는 이곳보다 남쪽에 위치한 곳은 없다. 유럽 최남단의 섬은 크레타섬(그리스) 남쪽에 있는 가브도스섬이라는 작은 섬으로, 북위 34°48'에 위치해 있다. 유럽 연합으로 생각했을 경우, 키프로스섬이 북위 34°33'로 최남단이 된다(스페인의 카나리아 제도는 제외).
섬의 최고점은 알베로 델 솔레(albero del sole)로, 해발 133m이다.
4. 1. 기후
람페두사섬은 아열대 반건조 기후(쾨펜: ''BSh'')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따뜻하고 강수량이 거의 없으며 습한 여름과 매우 온화하고 서리가 없는 겨울이 특징이다. 강력한 계절 지연과 작은 일교차를 보인다.[65] 1961년에서 1990년까지의 평균 기온 및 1960년부터 현재까지의 극값을 기준으로, 연중 최고 기온은 8월의 37.8°C이며, 연중 최저 기온은 1999년 2월 1일에 기록된 2.8°C이다. 1월 평균 기온은 13.6°C, 8월 평균 기온은 26.4°C이며, 연평균 기온은 19.2°C이다. 연간 강수량은 319.1mm로, 10월(59.3mm)에 가장 많고 7월(1.0mm)에 가장 적다. 습도는 11월(74%)을 제외하면 연중 76~78%로 높은 편이다.[65] 끊임없이 부는 해풍은 낮 동안의 여름 기온을 완화시킨다.[66] 람페두사섬은 지중해 연안에서 서리가 기록된 적이 없는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이다.5. 생태
람페두사의 동식물은 북아프리카와 유사하며, 몇몇 원해 고유종이 있다. 람페두사 남쪽 해안 근처의 ''이솔라 데이 코니글리''(직역하면 "토끼 섬")는 붉은바다거북의 이탈리아 마지막 산란지 중 하나이며, 지중해 전역에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60] 해변과 인접한 섬은 자연 보호 구역의 일부이다. 섬 해안을 따라 서식하는 다른 종으로는 만타 가오리와 돌고래, 낫돌고래와 같은 작은 고래류가 있다.[44] 람페두사 근처 해역은 지중해에서 임신한 백상아리와 갓 태어난 개체가 목격되는 유일한 지역이다.[45][61] 최근 연구에 따르면 람페두사 해역은 긴수염고래의 지중해 개체군의 겨울철 먹이 공급지이다.[46][47][62] 과거에는 지중해 분지에서 떠돌이 종으로 여겨졌던 혹등고래가 최근 몇 년 동안 섬 주변에서 발견되었다.[48][63]
리노사와 함께 람페두사는 1950년대까지 멸종 위기에 처한 지중해몽크바다표범의 거점이었지만,[49][64] 현재 섬에서는 지역 멸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2020년에는 람페두사에서 몽크바다표범이 목격되었다.[50]
섬의 남동부 타바카라 만 주변의 바다는 강수량이 적고, 해면이 많이 서식하며 영양분이 적기 때문에 투명도가 높다. 절벽에서 바다로 석회 성분과 굵은 입자의 모래가 떨어져 퇴적되어 수심이 얕은 해저를 이루고 있다. 파도가 잔잔한 날에 태양이 높이 뜨면, 투명한 해수와 해저에 비친 배 그림자의 상대적인 착시로 인해 해상에 떠 있는 배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 "날아다니는 배"로 세계적인 절경으로 여겨진다[59]。
자연 보호 구역(Riserva naturale orientata Isola di Lampedusait)으로 지정되어 있다.
6. 사회
주요 산업은 농업, 어업, 관광이다[54]。수산 자원으로는 멸치, 멸치, 해면, 산호 등이 있다[53]。
가혹한 자연 환경 때문에 농작물이 자라지 않아, 채소는 다른 지역에서 수입에 의존하고, 휘발유는 시칠리아 섬에서 한 달에 한 번밖에 운반되지 않아 물가가 이탈리아 본토에 비해 상당히 비싸다.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중환자가 발생하면 페리로 12시간이 걸리는 섬 밖의 병원에 가야 한다.
베스트셀러 서적 "죽기 전에 가고 싶은! 세계의 절경"에서 람페두사 섬의 광경이 "세계 1위의 절경"으로 소개되면서 관광지로서의 인기가 높아져 최근 일본에서 온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다.
==== 난민 문제 ====
2000년대 초부터 리비아와 가장 가까운 유럽 영토인 람페두사는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입국하려는 이민자들의 주요 경유지가 되었다. 2004년, 리비아와 이탈리아 정부는 이탈리아 영토에서 추방된 아프리카 이민자들을 리비아가 수용해야 한다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2004년과 2005년 사이에 람페두사에서 리비아로 많은 사람들이 대량 송환되었으며, 이는 유럽 의회의 비판을 받았다.[22]
2006년까지 많은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보트를 이용하여 람페두사에 도착할 수 있도록 리비아의 인신매매업자에게 돈을 지불했다.[23] 도착 후 대부분은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 본토의 수용 센터로 이송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추방 명령이 집행되지 않아 석방되었다.[24]
2009년, 섬의 임시 이민자 수용 센터의 과밀한 상황이 유엔 난민 기구(UNHCR)의 비판을 받았다. 원래 최대 850명을 수용하도록 건설된 시설에서 약 2,000명의 보트 피플이 수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닐 시트 아래에서 야외에서 잠을 잤다.[25] 2009년 2월 19일, 수용자 폭동으로 시작된 화재로 인해 수용 시설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2011년, 튀니지 혁명과 2011년 리비아 내전 동안 더 많은 이민자들이 람페두사로 이동했다. 2011년 5월까지 35,000명 이상의 이민자들이 튀니지와 리비아에서 섬에 도착했다.[26] 8월 말까지 48,000명이 도착했다.[27] 대부분은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젊은 남성이었다.[28] 이 상황은 유럽 연합 내에서 분열을 일으켰으며, 프랑스 정부는 대부분의 도착자를 박해를 피해 온 난민이 아닌 경제 이민자로 간주했다.[29]
2013년 7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로마 외곽에서 첫 공식 방문으로 이 섬을 방문했다. 그는 이민자, 생존자와 사망자를 위해 기도했으며, 인신매매범들을 비난했다.[30] 2013년 10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난파 사고가 발생했다. 주로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출신의 500명 이상의 이민자를 태운 보트가 람페두사 해안에서 침몰하여 최소 300명이 사망했다.[31][32]
2015년 1월부터 4월까지 약 1,600명의 이민자가 리비아에서 람페두사로 가는 경로에서 사망하여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이민 경로가 되었다.[33]
2017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영화 ''바다의 불''(Fire at Sea)은 이 이민 위기의 일부를 기록했으며 2014년과 2015년에 섬에서 전적으로 촬영되었다.[34] 이 영화는 또한 제6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35]
2023년 9월, 람페두사 인구 전체보다 많은 약 7,000명의 이민자를 태운 120척 이상의 보트가 24시간 이내에 섬에 도착했다.[36] 이민자 중 일부는 독일로 재배치되었다.[37] ''아이리쉬 이그재미너''(Irish Examiner)에 따르면, 2023년 9월 이민자의 대다수는 튀니지에서 도착했으며 "젊은 남성 또는 동반하지 않은 미성년자"였다. 이주의 이유는 다양했지만, ''아이리쉬 이그재미너''는 "튀니지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악화와 위험 또는 박해로부터의 도피를 열거했다.[38]
람페두사섬은 북아프리카와 가장 가까운 유럽 국가 영토이기 때문에 유럽을 목표로 하는 아프리카 이민 및 난민의 목적지가 되고 있다. '''람페두사 난민 수용 센터'''가 설치되어 있지만, 정원을 초과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탈리아는 솅겐 조약에 따라 다른 유럽 국가로 난민을 이동시키고 싶어하지만, 프랑스 등은 이 움직임에 반발하여 난민을 태운 열차를 국경에서 정차시키는 등 양국 간에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201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발생한 재스민 혁명 당시 약 5,000명의 섬 주민에게 수만 명 규모의 대량의 난민이 람페두사에 도착했다[56]。또한, 섬 인근 해역에서 종종 난민을 태운 배의 해난 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57](2013년 람페두사 섬 난민선 침몰 사고 참조).
2013년 7월 섬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난 사고 희생자들에게 기도를 바치고, 이민 및 난민 (이슬람교도 포함)과 면담하여 이민의 고통에 대해 세계가 관심을 기울이도록 메시지를 보냈다.[55]。교황의 방문과 이민 문제에 대한 발언에 대해 라우라 보르드리니/Laura Boldrini영어 하원 의장 (전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 사무소 대변인)은 높이 평가했고, 엔리코 레타 총리도 사의를 표명했다. 반면에 보수파는 불법 이민을 묵인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민 수용이 부담이 되고 있는 지역 자치 단체 (람페두사 에 리노사)의 시장은 이탈리아 정부와 유럽 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58]
==== 한국의 관점 ====
람페두사섬은 지중해에 위치한 이탈리아령 섬으로, 아프리카와 가까워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이 주로 거치는 곳이다. 이 섬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난민 문제로 더 자주 언급된다.
유럽 난민 위기는 2015년경부터 심각해졌으며, 람페두사섬은 이 위기의 최전선에 놓이게 되었다. 수많은 난민들이 좁은 섬에 몰려들면서 인도적 위기가 발생했고, 이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연합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한국은 유럽 난민 위기에 대해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더불어민주당 정부 시절 난민 문제에 대해 인도적 지원과 국제 협력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난민 수용에 대해서는 국내 여론의 반발 등으로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최근 국민의힘 정부는 난민 문제에 대해 더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불법 체류자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난민 문제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람페두사섬의 난민 문제는 단순한 지역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협력과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이다. 한국 역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고,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6. 1. 난민 문제
2000년대 초부터 리비아와 가장 가까운 유럽 영토인 람페두사는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입국하려는 이민자들의 주요 경유지가 되었다. 2004년, 리비아와 이탈리아 정부는 이탈리아 영토에서 추방된 아프리카 이민자들을 리비아가 수용해야 한다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2004년과 2005년 사이에 람페두사에서 리비아로 많은 사람들이 대량 송환되었으며, 이는 유럽 의회의 비판을 받았다.[22]2006년까지 많은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보트를 이용하여 람페두사에 도착할 수 있도록 리비아의 인신매매업자에게 돈을 지불했다.[23] 도착 후 대부분은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 본토의 수용 센터로 이송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추방 명령이 집행되지 않아 석방되었다.[24]
2009년, 섬의 임시 이민자 수용 센터의 과밀한 상황이 유엔 난민 기구(UNHCR)의 비판을 받았다. 원래 최대 850명을 수용하도록 건설된 시설에서 약 2,000명의 보트 피플이 수용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닐 시트 아래에서 야외에서 잠을 잤다.[25] 2009년 2월 19일, 수용자 폭동으로 시작된 화재로 인해 수용 시설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2011년, 튀니지 혁명과 2011년 리비아 내전 동안 더 많은 이민자들이 람페두사로 이동했다. 2011년 5월까지 35,000명 이상의 이민자들이 튀니지와 리비아에서 섬에 도착했다.[26] 8월 말까지 48,000명이 도착했다.[27] 대부분은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젊은 남성이었다.[28] 이 상황은 유럽 연합 내에서 분열을 일으켰으며, 프랑스 정부는 대부분의 도착자를 박해를 피해 온 난민이 아닌 경제 이민자로 간주했다.[29]
2013년 7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로마 외곽에서 첫 공식 방문으로 이 섬을 방문했다. 그는 이민자, 생존자와 사망자를 위해 기도했으며, 인신매매범들을 비난했다.[30] 2013년 10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난파 사고가 발생했다. 주로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출신의 500명 이상의 이민자를 태운 보트가 람페두사 해안에서 침몰하여 최소 300명이 사망했다.[31][32]
2015년 1월부터 4월까지 약 1,600명의 이민자가 리비아에서 람페두사로 가는 경로에서 사망하여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이민 경로가 되었다.[33]
2017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영화 ''바다의 불''(Fire at Sea)은 이 이민 위기의 일부를 기록했으며 2014년과 2015년에 섬에서 전적으로 촬영되었다.[34] 이 영화는 또한 제6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35]
2023년 9월, 람페두사 인구 전체보다 많은 약 7,000명의 이민자를 태운 120척 이상의 보트가 24시간 이내에 섬에 도착했다.[36] 이민자 중 일부는 독일로 재배치되었다.[37] ''아이리쉬 이그재미너''(Irish Examiner)에 따르면, 2023년 9월 이민자의 대다수는 튀니지에서 도착했으며 "젊은 남성 또는 동반하지 않은 미성년자"였다. 이주의 이유는 다양했지만, ''아이리쉬 이그재미너''는 "튀니지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악화와 위험 또는 박해로부터의 도피를 열거했다.[38]
람페두사섬은 북아프리카와 가장 가까운 유럽 국가 영토이기 때문에 유럽을 목표로 하는 아프리카 이민 및 난민의 목적지가 되고 있다. '''람페두사 난민 수용 센터'''가 설치되어 있지만, 정원을 초과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탈리아는 솅겐 조약에 따라 다른 유럽 국가로 난민을 이동시키고 싶어하지만, 프랑스 등은 이 움직임에 반발하여 난민을 태운 열차를 국경에서 정차시키는 등 양국 간에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201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발생한 재스민 혁명 당시 약 5,000명의 섬 주민에게 수만 명 규모의 대량의 난민이 람페두사에 도착했다[56]。또한, 섬 인근 해역에서 종종 난민을 태운 배의 해난 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다[57](2013년 람페두사 섬 난민선 침몰 사고 참조).
2013년 7월 섬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난 사고 희생자들에게 기도를 바치고, 이민 및 난민 (이슬람교도 포함)과 면담하여 이민의 고통에 대해 세계가 관심을 기울이도록 메시지를 보냈다.[55]。교황의 방문과 이민 문제에 대한 발언에 대해 라우라 보르드리니/Laura Boldrini영어 하원 의장 (전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 사무소 대변인)은 높이 평가했고, 엔리코 레타 총리도 사의를 표명했다. 반면에 보수파는 불법 이민을 묵인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민 수용이 부담이 되고 있는 지역 자치 단체 (람페두사 에 리노사)의 시장은 이탈리아 정부와 유럽 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58]
6. 1. 1. 한국의 관점
람페두사섬에 대한 한국의 관점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람페두사섬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와 함께, 이탈리아와 유럽 연합의 난민 문제에 대한 한국의 일반적인 입장을 곁들여 서술하겠습니다.람페두사섬은 지중해에 위치한 이탈리아령 섬으로, 아프리카와 가까워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이 주로 거치는 곳이다. 이 섬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난민 문제로 더 자주 언급된다.
유럽 난민 위기는 2015년경부터 심각해졌으며, 람페두사섬은 이 위기의 최전선에 놓이게 되었다. 수많은 난민들이 좁은 섬에 몰려들면서 인도적 위기가 발생했고, 이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연합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한국은 유럽 난민 위기에 대해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더불어민주당 정부 시절 난민 문제에 대해 인도적 지원과 국제 협력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난민 수용에 대해서는 국내 여론의 반발 등으로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최근 국민의힘 정부는 난민 문제에 대해 더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불법 체류자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난민 문제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람페두사섬의 난민 문제는 단순한 지역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협력과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이다. 한국 역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고,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7. 문화
람페두사섬은 망고의 앨범 ''Come l'acqua''(1992)의 수록곡 "Mediterraneo"의 뮤직 비디오 촬영 장소였다.[51] 에마누엘레 크리알레세가 각본과 감독을 맡고 발레리아 골리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숨결(Respiro)''(2002)은 람페두사섬에서 전적으로 촬영되었다. 모험 소설 작가 클라이브 커슬러의 책 ''The Pharaoh's Secret''(2015)는 람페두사섬을 섬 전체 주민을 죽음과 같은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신비한 죽음의 안개의 장면으로 묘사한다.
''람페두사를 생각하며(Think of Lampedusa)''는 2013년 난민선 침몰 사고에서 영감을 받아 Tchicaya U Tam'si 문학상을 수상한 코트디부아르 출신 조수에 게보의 시집이다. 2015년 오스트리아 다큐멘터리 ''겨울의 람페두사(Lampedusa im Winter)''는 야콥 브로스만이 감독했으며 람페두사섬에서 촬영되었다. 2016년 피에트로 바르톨로와 리디아 틸리타가 쓴 책 ''Tears of Salt: A Doctor's Story''는 지역 의사의 시각에서 섬의 생활과 이주민 위기를 이야기한다.
2017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바다의 불(Fire at Sea)''는 2014년과 2015년 사이에 람페두사섬에서 전적으로 촬영되었다. ''Lampedusa''는 캐나다 소설가 스티븐 프라이스가 쓴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2019년 소설화된 전기 소설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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