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폴란드 전쟁 (1654년-16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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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폴란드 전쟁 (1654년-1667년)은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봉기로 시작되어, 러시아 차르국의 개입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대응으로 전개된 일련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흐멜니츠키 봉기를 배경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보호령으로 삼으면서 본격화되었다. 주요 전개 과정에서 러시아는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 빌뉴스를 함락하는 등 초반에 우세를 보였으나, 폴란드의 반격과 스웨덴의 개입으로 전쟁 양상이 복잡해졌다. 결국 안드루소보 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분할되었고, 러시아는 스몰렌스크와 좌안 우크라이나를 획득하며 동유럽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전쟁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를 가속화시켰으며, 동유럽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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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폴란드 전쟁 (1654년-1667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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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명 | 러시아-폴란드 전쟁 (1654년–1667년) |
부분 분쟁 | 폴란드-러시아 전쟁 연 seri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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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654년–1667년 |
장소 | 유럽: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동부 변경 지역 |
원인 | 페레야슬라우 협정 |
결과 | 러시아의 승리 (안드루소보 조약) |
영토 변화 | 러시아, 좌안 우크라이나, 키이우 및 스몰렌스크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러시아 차르국 코사크 헤트만 국가 |
교전국 2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크림 칸국 코사크 헤트만 국가 (1658–1659, 1660–1667 우안 우크라이나) 프로이센 공국 (1654–1656) |
지휘관 | |
지휘관 1 | 알렉세이 트루베츠코이 보흐단 흐멜니츠키 유리이 흐멜니츠키 이반 보훈 이반 시르코 바실리 보리소비치 셰레메테프 바실리 부투를린 이반 호반스키 유리 돌고루코프 아파나시 오르딘-나슈초킨 야코프 체르카스키 |
지휘관 2 | 스테판 차르니에츠키 빈첸티 고시에프스키 얀 2세 카지미에시 스타니스와프 란츠코론스키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 미하우 카지미에시 파츠 알렉산데르 힐라리 포우빈스키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 야누슈 라지비우 파베우 얀 사피에하 이반 비호프스키 파블로 테테리아, 페트로 도로셴코 |
2. 배경
1654년부터 1667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폴란드 전쟁은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해 일으킨 흐멜니츠키 봉기가 직접적인 발단이었다.[1] 코사크의 수령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루스 차르국의 차르 알렉세이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알렉세이에게 신종할 것을 맹세했다.[1]
1651년 젬스키 소보르(루스 차르국 의회)는 코사크들을 루스 차르국 세력권 안에 편입시키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폴란드와의 전쟁은 망설였다.[1] 차르는 1653년 의회가 우크라이나를 루스 차르국으로 병합하는 것을 승인할 때까지 기다렸다.[1] 1654년 페레야슬라프 평의회에서 코사크들이 협정을 비준하면서 러시아-폴란드 간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1]
2. 1. 흐멜니츠키 봉기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항하여 봉기(흐멜니츠키 봉기)를 일으켰다.[1] 이는 연방에 대한 코사크들의 불만과 종교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 흐멜니츠키는 알렉세이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지원을 요청했다.[1]흐멜니츠키는 타타르의 지원을 받아 조브티 보디 전투와 코르순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이를 대중 봉기의 신호로 삼았다.[2] 우크라이나에서는 폴란드 협력자, 지주, 성직자, 유대인 등에 대한 폭력이 발생했다.[2] 폴란드 군대의 진압과 보복은 코사크 봉기를 더욱 강화시켰고, 필랴프치 전투에서 폴란드 군대는 또다시 패배했다.[2] 흐멜니츠키는 자모시치를 포위했으나, 블라디스와프 4세의 사망 후 그의 이복형제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왕으로 선출되자 우크라이나로 돌아갔다.[2]
흐멜니츠키는 우크라이나를 주권 코사크 국가로 만들기 위해 정부 시스템과 통화 당국을 계획하고, 외국과의 관계를 구축했다.[2] 폴란드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즈보리우 조약과 빌라 체르키바 조약은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1651년 젬스키 소보르(러시아 의회)는 코사크를 루스 차르국 세력권에 편입시키는 것을 주저했으나, 1653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합병을 승인했다.[1] 1654년 페레야슬라프 평의회에서 코사크들이 협정을 비준하자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불가피해졌다.[1]
2. 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상황
1654년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부터 폴란드인과 코사크 사이에는 민중의 불만, 종교적 갈등 등으로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긴장은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흐멜니츠키 반란을 일으키면서 폭발했다. 자포로지아 코사크는 연방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흐멜니츠키는 알렉세이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지지를 얻었다. 초기 흐멜니츠키는 타타르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의 전투와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했다.흐멜니츠키의 승리는 대중 봉기의 신호탄이 되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폴란드 협력자(관리, 지주, 라틴 및 우니아트 성직자 등)에 대한 폭력이 만연했다. 농민들은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을 일으켰으며, 반란군에 대한 강력한 진압과 보복은 코사크 봉기를 더욱 강화시켰다. 폴란드 군대는 또 다른 패배를 당했고, 흐멜니츠키는 자모시치를 포위하기 전에 갈리치아 서쪽으로 진군했다.
1649년 5월 블라디스와프 4세가 사망하고, 11월 의회에서 그의 이복형제가 왕으로 선출되자 흐멜니츠키는 곧 우크라이나로 돌아갔다. 1650년 1월에 그는 지역의 해방자로 널리 환영받았다.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정치적 분쟁, 민족적 긴장,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격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개혁을 시작했다.
흐멜니츠키는 우크라이나를 주권 코사크 국가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정부 시스템과 통화 당국을 계획하고, 베테랑 코사크 장교들로 구성된 통치 기구 아래 지역 행정부를 설립하고, 외국 국가와의 관계를 구축했다. 그는 폴란드와 협상을 시작하여 즈보리우 조약을 체결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2년 후 또 다른 조약을 체결했지만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폴란드와 반란군 사이에 산발적인 충돌이 계속되었고, 흐멜니츠키는 다른 동맹국을 찾기 시작했다.
1654년, 흐멜니츠키와 모스크바 지도부 사이에 페레야슬라프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의 결과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차르의 우월성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했지만,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가 우크라이나의 자치권(선출된 헤트만직, 주 정부, 외교 관계)을 인정했다고 강조했다. 1651년 젬스키 소보르가 코사크를 모스크바의 영향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차르는 1653년까지 기다렸다가 새로운 인민 의회가 우크라이나의 보호령을 승인했다. 코사크가 페레야슬라프 회의에서 이 조약을 비준한 후, 러시아-폴란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2. 3. 러시아 차르국의 팽창 정책
1654년부터 1667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폴란드 전쟁의 배경에는 러시아 차르국의 팽창 정책이 있었다. 러시아는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동슬라브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합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8]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지원 요청은 러시아에게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1651년 젬스키 소보르(러시아 의회)는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을 러시아 차르국의 세력권 안에 편입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은 망설였다.[8] 차르 알렉세이는 1653년 의회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차르국으로 병합하는 것을 승인할 때까지 기다렸다.[8] 1654년 페레야슬라프 평의회에서 코사크들이 협정을 비준하면서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8]
3. 주요 전개 과정
1654년,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야코프 체르카스키, 니키타 오도옙스키, 이반 호반스키 등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벨리, 도로고부시,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오르샤와 슈클로우 전투, 셰펠레비체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했다. 3개월간의 포위 끝에 스몰렌스크가 함락되었다.[7] 알렉세이 트루베츠코이는 남쪽에서, 표도르 셰레메테프는 북쪽에서 진격하여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1655년 초, 폴란드는 반격을 시작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러시아는 민스크, 빌뉴스, 카우나스, 흐로드나 등을 점령하며 공세를 이어갔다.[13]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는 이 기회를 틈타 폴란드를 침공했고, 러시아는 스웨덴과 일시적인 휴전을 맺고 1656년-1658년의 러시아-스웨덴 전쟁을 일으켰다.[13]
1657년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사망 이후, 이반 비호프스키가 하자치 조약을 통해 폴란드와 화해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알렉세이 1세는 스웨덴과 휴전하고 1658년 다시 폴란드와 전쟁을 시작했다.[1] 벨라루스 귀족과 코사크 지도층은 폴란드를 지지했고, 러시아는 코노토프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 그러나 유리 흐멜니츠키가 새로운 헤트만으로 선출되면서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1]
1660년, 폴란드는 올리바 조약으로 제2차 북방 전쟁을 종결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의 활약과 추드누프 전투 승리 등으로 폴란드가 우세를 점했다. 러시아는 카르디스 조약을 통해 발트 지방에서 철수했다.
1663년 말, 폴란드는 드네프르 강을 건너 좌안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나, 1664년 글루호프 공성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1664년부터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고,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루스 차르국은 스몰렌스크와 키이우를 포함한 좌안 우크라이나를 획득했고, 폴란드는 우안 우크라이나를 유지했다.[3]
3. 1. 러시아의 초기 공세 (1654-1655)
1654년 7월, 4만 1천 명의 러시아군(명목상으로는 차르 알렉세이의 지휘 아래 있었지만, 실제로는 야코프 체르카스키, 니키타 오도옙스키, 이반 호반스키 공이 지휘)은 벨리, 도로고부시를 점령하고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7] 스몰렌스크의 러시아군 위치는 리투아니아 대헤트만 야노시 라지비우 공이 이끄는 1만 명의 군대가 서쪽의 오르샤를 방어하고 있어 위협받았다.[7] 체르카스키는 오르샤를 함락시켰고, 그의 부하 유리 바랴틴스키 공이 이끄는 부대는 8월 12일 슈클로우 전투에서 라지비우를 후퇴시켰다.[7] 12일 후, 라지비우는 셰펠레비체 전투에서 다시 패배했다. 3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스몰렌스크 전쟁의 주요 목표였던 스몰렌스크는 9월 23일 러시아군에 함락되었다.한편, 알렉세이 트루베츠코이 공은 러시아군의 남쪽 부대를 브랸스크에서 우크라이나로 이끌었다. 드네프르강과 베레지나 강 사이의 영토는 빠르게 함락되었고, 트루베츠코이는 므스치슬라우, 로슬라블을 점령했으며, 그의 우크라이나 동맹군은 호멜을 점령했다. 북쪽 부대에서는 표도르 셰레메테프가 프스코프에서 출발하여 네벨(7월 1일), 폴로츠크(7월 17일), 비쳅스크(11월 17일)를 점령했다.
그 후, 12월에 차르의 군대는 리보니아를 휩쓸고 루자와 레제크네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동시에, 흐멜니츠키와 러시아 보야르 부투를린의 연합군이 볼히니아를 공격했다. 여러 지휘관들 사이의 많은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연말까지 오스트로크와 로브노를 점령했다.
3. 2. 폴란드의 반격과 스웨덴의 개입 (1655-1660)
1655년 초, 야노시 라지비우는 벨라루스에서 반격을 시작해 오르샤를 되찾고 마힐료우를 포위했지만, 3개월간의 포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같은 해 1월, 셰레메테프와 흐멜니츠키는 아흐마토프에서 폴란드군에게 패했고, 타타르족과 동맹을 맺은 폴란드군은 자시코프에서 루스 차르국-카자크 수장국 연합군을 격파했다.[13]이에 차르 알렉세이는 러시아군의 사기를 높이고자 대규모 공세를 명령했다. 리투아니아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7월 3일 민스크를 코사크와 체르카스키에게 넘겨주었다. 7월 31일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 빌뉴스가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으며, 8월에는 카우나스와 흐로드나가 점령되었다.[13]
한편, 볼콘스키 공은 키예프에서 출발해 드네프르강과 프리피야티강을 따라 이동하며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하고 핀스크를 점령했다. 트루베츠코이의 부대는 슬로님과 클레츠크를 점령했고, 셰레메테프는 6월 17일 벨리시를 점령했다. 흐멜니츠키와 부투를린은 갈리치아에서 활동하며 9월에 폴란드 도시 르부프를 공격했고, 브레스트 근처에서 파벨 얀 사피에하를 격파하고 루블린에 입성했다.[13]
루스 차르국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공격을 기회로 본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는 1655년 폴란드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아파나시 오르딘 나시초킨은 폴란드와 협상을 시작해 11월 2일 휴전했다. 이후 루스 차르국 군대는 1656년-1658년의 러시아-스웨덴 전쟁을 일으켜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공격하고 리가를 포위했다. 리보니아의 복잡한 상황은 우크라이나에 악영향을 미쳤다. 흐멜니츠키는 스웨덴을 동맹으로 보고 이 휴전을 루스 차르국의 배신으로 여겨 1657년 8월 사망할 때까지 차르와 관계를 끊을 계획을 세웠다.[13]
3. 3. 전쟁 재개와 코사크의 분열 (1658-1660)
1657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사망한 후, 이반 비호프스키가 뒤를 이었다. 비호프스키는 폴란드와 하자치 조약을 맺어 화해를 선택했다. 이에 알렉세이 1세는 스웨덴과 발리에르사리 휴전을 맺고 1658년 10월 폴란드와의 전쟁을 재개했다.[1] 2년 간의 평화 기간 동안 벨라루스의 귀족과 코사크 지도층은 폴란드 지지로 입장을 바꾸어, 벨라루스에서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는 폴란드를 지원했다.[1]북부에서는 유리 돌고루코프가 빌뉴스를 봉쇄하려던 파베우 얀 사피에하의 시도를 저지했다 (1658년 10월 11일).[1] 남부에서는 비호프스키가 이끄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바실리 셰레메테프에게서 키예프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1] 그러나 1659년, 비호프스키와 동맹을 맺은 크림 타타르는 코노토프 전투에서 알렉세이 트루베츠코이가 이끄는 러시아군을 궤멸시키고 코노토프를 포위했다.[1]
우크라이나 원정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러시아인들의 불안은 셰레메테프와 그의 부대가 키예프를 출발하면서 해소되었다.[1] 비호프스키는 치히린에서 셰레메테프에게 패배해 폴란드로 망명했고, 코사크들은 그를 해임하고 유리 흐멜니츠키를 새로운 헤트만으로 임명했다.[1]
3. 4. 폴란드의 우세와 전쟁 종결 (1660-1667)
1660년, 얀 2세 카지미에시 왕은 제2차 북방 전쟁을 종결짓는 올리바 조약에 서명하여 폴란드의 모든 국력을 러시아와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폴란드군은 러시아군을 벨라루스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는 폴론카 전투에서 승리하고 1661년 빌뉴스를 탈환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추드누프 전투에서 셰레메테프의 군대가 항복하는 등 폴란드의 우세가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차르는 스웨덴과의 새로운 전쟁을 피하고자 카르디스 조약을 체결하고 발트 지방에서 철수했다.1663년 말, 폴란드 왕과 군대는 드네프르 강을 건너 좌안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여러 도시가 폴란드에 항복했지만, 1664년 1월 글루호프 공성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노브고로트-세베르스키까지 퇴각해야 했다. 1664년 여름에는 러시아군이 비쳅스크 근처에서 패배했다.
1664년부터 1667년 1월까지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예르지 루보미르스키의 반란으로 인해 폴란드는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루스 차르국에게 스몰렌스크와 키이우를 포함한 좌안 우크라이나를 할양했고, 폴란드는 우안 우크라이나를 유지했다.[3]
4. 전쟁의 결과
러시아-폴란드 전쟁은 동유럽의 세력 판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166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올리바 조약으로 제2차 북방 전쟁을 마무리하고 동부 전선에 군대를 집중할 수 있었다.[3] 슈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사피에하는 폴론카 전투에서 호반스키를 격파했고, 포토츠키와 루보미르스키는 쿠드노프 전투에서 셰레메체프를 공격하여 유리 흐멜니츠키를 철수시키고 항복을 받아냈다.[3] 이로 인해 러시아는 카르디스 조약을 체결하여 스웨덴과의 전쟁 재개를 피해야 했다.
1662년 카니우 전투에서 유리 흐멜니츠키의 우크라이나 우안 세력이 그리고리 로모다놉스키의 러시아군과 야킴 솜코의 좌안 코사크에게 대패했다.[9] 1663년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은 좌안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지만 흐루히우 공성전에서 큰 손실을 보았고, 우크라이나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3]
1664년부터 1667년 1월까지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고, 내전으로 인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은 러시아에 스몰렌스크 요새와 좌안 우크라이나(키예프 포함)를 넘겨주고 우안 우크라이나를 유지했다.[3]
이 전쟁은 러시아 군대에 큰 변화를 가져와 상비군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 시대 러시아 군사적 성공의 기반을 마련했다.[10]
대홍수 시대에 발생한 이 전쟁은 폴란드에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일부 영토를 되찾았지만, 장기적으로 폴란드는 크게 약화되어 러시아의 침략에 취약해졌고, 결국 러시아가 주도한 폴란드 분할을 막지 못했다.[11]
4. 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
1660년, 제2차 북방 전쟁을 올리바 조약으로 마무리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2세 얀 카지미에시 국왕은 모든 군대를 동부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3] 슈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사피에하는 6월 27일 폴론카 전투에서 호반스키를 격파했다.[3] 포토츠키와 루보미르스키는 쿠드노프 전투에서 셰레메체프를 공격했고, 10월 17일 유리이 흐멜니츠키를 철수시킨 후 11월 2일 항복을 받아냈다.[3] 이러한 패배로 인해 러시아 차르는 스웨덴과의 전쟁 재개를 피하고자 카르디스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1662년 7월, 유리 흐멜니츠키의 우크라이나 우안 세력은 폴란드 및 크림 타타르 군대(약 2만 명)의 지원을 받았으나, 그리 고리 로모다놉스키의 러시아군과 야킴 솜코의 좌안 코사크(약 2만 8천 명)에게 카니우 전투에서 대패했다.[9]
1663년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은 드네프르 강을 건너 좌안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대부분의 도시는 저항 없이 항복했지만, 1월 흐루히우 공성전에서 큰 손실을 보았고,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에서 추가적인 좌절을 겪으며 우크라이나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여름에 리투아니아군은 비테프스크 근처에서 호반스키의 침입 부대를 격퇴했지만, 1664년 작전은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웠다.[3]
1664년부터 1667년 1월까지 평화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고, 내전으로 인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은 러시아에 스몰렌스크 요새와 드네프르 강 좌안의 우크라이나(키예프 포함)를 넘겨주고 우안 우크라이나를 유지했다.[3]
이 전쟁은 러시아 군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러시아 군대는 "계절적으로 동원되는 반상비군"에서 상비군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 시대 러시아 군사적 성공의 기반을 마련했다.[10]
대홍수 시대에 발생한 이 전쟁은 폴란드에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일부 영토를 되찾았지만, 장기적으로 폴란드는 크게 약화되어 러시아의 침략에 취약해졌다. 결국 폴란드는 러시아가 주도한 폴란드 분할을 막지 못했다.[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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Грамоты из переписки царя Алексея Михайловича с Богданом Хмельницким в 1656 г.
http://vostlit.nar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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