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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크로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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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니트 크로이처는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음악 교육가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음악을 배운 그는 독일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다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이주하여 도쿄음악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일본 피아노 음악 발전에 기여했다. 쇼팽 작품 편집, 피아노 페달 사용법에 관한 저술을 남겼으며, 잉그리드 후지코 헤밍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53년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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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크로이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업피아니스트, 지휘자
출생일1884년 3월 13일
출생지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일1953년 10월 30일
사망지도쿄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료코 크로이처 (소프라노 가수)
활동 정보
활동 기간정보 없음

2. 생애와 경력

레오니트 크로이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안나 예시포바에게 피아노를,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베를린 국립음악학교에서 에곤 페트리와 함께 피아노 교사로 활동하며 블라디슬라프 슈필만, 한스-에리히 리벤삼, 블라디미르 호르보프스키, 카를-울리히 슈나벨, 프란츠 오스본, 보리스 베를린, 이그나체 스트라스포겔, 프란츠 라이젠슈타인, 그레테 술탄 등을 가르쳤다.[1]

1925년 6월에는 세자르 프랑크, 클로드 드뷔시, 파울 힌데미트, 파울 유온과 같은 동시대 또는 현대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1]

도쿄예술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레오니트 크로이처 기념비 (우에노, 도쿄, 일본)


나치는 그를 문화적 적으로 지목했고, 프리다 로벤슈타인과 함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독일 문화 투쟁 연맹"이 작성한 "정리 작업" 목록에 오른 두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1933년 일본 도쿄로 이민을 갔다.[1]

울슈타인 출판사에서 쇼팽의 작품을 편집했으며, 피아노 페달의 체계적인 사용에 관한 최초의 저서 중 하나("Das normale Klavierpedal vom akustischen und ästhetischen Standpunkt", 1915)를 저술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청각 장애 피아니스트인 잉그리드 후지코 헤밍이 있다.[1]

크로이처는 제자 중 한 명과 결혼했으며,[1] 그의 딸은 소프라노 료코 크로이처이다.

쇼팽의 모든 피아노 작품 교정판 (음악의 벗 출판사), 『장식음』 (1948년, 다이카 서방), 『어떤 음악가의 미학적 고백』 (1950년, 다이카 서방) 등을 저술하는 동시에, 피아노 곡 등의 작품도 남겼다.

묘소는 야하시라 영원에 있다.[2]

2. 1. 러시아와 유럽에서의 활동 (1884-1933)

레오니트 크로이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안나 예시포바에게 피아노를 배웠다.[1] 1906년 라이프치히로 이주하여 아르투르 니키슈에게 지휘를 배웠다.[2]

1908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활동했다. 1911년 모스크바에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지휘하기도 했다.[2] 1915년에는 실린더 축음기프레데리크 쇼팽마주르카 등을 녹음했는데, 이것이 크로이처의 첫 레코딩으로 여겨진다.[2]

1921년부터 1933년까지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했다.[2] 에곤 페트리와 함께 베를린 국립음악학교에서 영향력 있는 피아노 교사로 활동하며, 블라디슬라프 슈필만, 한스-에리히 리벤삼, 보리스 베를린 등 저명한 피아니스트들을 배출했다.[1] 또한 세자르 프랑크, 클로드 드뷔시, 파울 힌데미트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1]

2. 2. 일본에서의 활동 (1931-1953)

1931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2년 후 다시 일본을 방문, 고노에 히데마로의 요청으로 일본에 머무르며 193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도쿄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지가사키시에 거주하며 피아니스트, 지휘자로 활동했다.[2]

1942년, 나치 독일의 결석 재판으로 국적이 박탈되어 무국적자가 되었다.

1944년부터 종전까지 가루이자와로 피난(疎開)했다. 이 시기 가루이자와에는 레오 시로타, 요제프 로젠스톡, 만프레트 구를리트, 알렉산드르 모길레프스키 등 다른 음악가들도 피난 와 있었다.

1951년 5월, 방일 20주년 기념 연주회를 열었으나, 이 무렵부터 건강이 악화되었다. 1952년 2월 4일, 제자이자 도쿄예술대학 피아노과 강사인 오리모토 토요코와 결혼하여 고탄다로 거처를 옮겼다.

1953년 10월 28일, 아오야마 학원 강당에서 리사이틀 도중 심근 경색을 일으켜, 이틀 뒤인 30일 오후 6시 30분에 협심증으로 사망했다.[2]

3. 나치즘과의 관계

나치는 그를 문화적 적으로 지목했다. 그는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독일 문화 투쟁 연맹"(Kampfbund für deutsche Kultur)이 작성한 "정리 작업"(Aufräumungsarbeiten) 목록에 프리다 로벤슈타인과 함께 이름이 오른 두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1]

4. 저술 및 학문적 업적

레오니트 크로이처는 울슈타인 출판사(Ullstein-Verlag)에서 쇼팽의 작품을 편집했다.[1] 그는 피아노 페달의 체계적인 사용에 관한 최초의 저서 중 하나인 "Das normale Klavierpedal vom akustischen und ästhetischen Standpunkt"(1915)를 저술했다.[1] 음악의 벗 출판사에서 쇼팽 전 피아노 작품의 교정판을 출간했다.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 『피아노 연주법 강의』 (오이타 미츠요시 편찬) 게이주츠샤 출판부, 1931 (신편: 음악세계사 1934년, 개정 증보: 게이주츠샤 출판부 1936년)
  • 『장식음: 모차르트에서 슈만에 이르는 피아노 음악의 장식음』 (나카세고 카즈 역) 다이카 서방, 1948 (개제 재판 『피아노 장식음의 기법: 모차르트에서 슈만까지』: 음악지우사 1990년)
  • 『어떤 음악가의 미학적 고백』 (나카세고 카즈 역) 다이카 서방, 1950 (증보판: 콘도 요시아키 보역, 음악지우사 1989년)
  • 『예술로서의 피아노 연주: 피아노 주법의 새로운 미학』 (크로이처 토요코, 무라카미 노리코 공역) 음악지우사, 1969

5. 일본 음악계에 끼친 영향

크로이처는 1933년 일본 도쿄로 이민을 갔다. 일본에서 크로이처는 도쿄음악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일본 피아노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 그의 제자 중에는 청각 장애 피아니스트 잉그리드 후지코 헤밍이 있다.[1] 오자와 세이지는 히비야 공회당에서 크로이처가 피아노를 치면서 "황제(피아노 협주곡 제5번)"를 지휘하는 것을 보고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49년 도쿄 예술대학 성악과에 입학한 오가 노리오는 크로이처의 수업을 자주 참관했으며, 당시 크로이처 문하생이었던 마츠바라 미도리와 결혼했다.[3] YMO호소노 하루오미의 외할아버지 나카야 타카오는 크로이처의 매니저를 맡기도 했다. 가야마 유조는 1951년경 크로이처에게 지도를 원했지만, 크로이처는 다른 피아노 교사를 소개해주었다.

일본에는 그의 이름을 딴 피아노가 있다. 도쿄예술대학교 캠퍼스에는 레오니트 크로이처 기념비가 있다.

6. 제자

레오니트 크로이처는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안나 예시포바에게 피아노를 사사받은 후, 에곤 페트리와 함께 베를린 국립음악학교(Berliner Hochschule für Musik)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의 제자로는 블라디슬라프 슈필만, 한스-에리히 리벤삼, 블라디미르 호르보프스키, 카를-울리히 슈나벨, 프란츠 오스본, 보리스 베를린, 이그나체 스트라스포겔, 프란츠 라이젠슈타인, 그레테 술탄 등이 있다.[1]

1933년 일본으로 이주한 후에는 도쿄음악학교 (현 도쿄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잉그리드 후지코 헤밍을 비롯하여[1] 이노우치 스미코, 이구치 아키코, 오이다 미츠요시, 오호리 아츠코, 타카오리 미야지, 타카다 사부로, 다테 준, 타나카 키요코, 토오미 토요코, 나가오카 준코, 나카노 케이코, 나카야마 야스코, 마츠바라 미도리, 무로이 마야코, 야시로 아키오 등 많은 일본 피아니스트를 양성했다.

7. 가족

크로이처는 제자 중 한 명과 결혼했다.[1] 부인은 도쿄예술대학 피아노과 강사였던 오리모토 토요코이다.[2] 딸은 소프라노 료코 크로이처이다.

8. 기타

YMO호소노 하루오미의 외할아버지인 나카야 타카오(국립음악대학 음향공학과 강사이자 피아노 조율사)는 크로이처의 매니저를 맡았다.[3] 가야마 유조는 1951년경, 집이 근처여서 지도를 원했지만, 크로이처는 다른 피아노 교사(여성)를 소개했다. 이를 계기로 가야마는 그 교사에게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나중에 '탄코사쿠'로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기에 이르렀다.[3]

참조

[1] 웹사이트 Fujiko Hemming, Deaf Pianist https://kyotojournal[...] 2011-10-26
[2] 문서 "「レコーディングの夜明け」~ジュリアス・ブロックのシリンダー録音集」に収録。"
[3] 서적 レオニード・クロイツァー その生涯と芸術 音楽之友社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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