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페타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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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베르토 페타지니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야구 선수로, 1990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계약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마이너 리그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으며, 1999년 일본 프로 야구(NPB)의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홈런왕과 최고 출루율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활약했으며, 2008년에는 한국 프로 야구(KBO)의 LG 트윈스에서 4번 타자로 활약하며 팀의 100타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페타지니는 일본 프로 야구 통산 233홈런을 기록하며 2010년 소프트뱅크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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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페타지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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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포지션 | 1루수 |
투구/타석 | 좌투/좌타 |
출생지 | 베네수엘라 포를라마르 |
생년월일 | 1971년 6월 7일 () |
선수 경력 | |
MLB 데뷔 | 1994년 4월 4일, 휴스턴 애스트로스 |
NPB 데뷔 | 1999년 4월 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
KBO 데뷔 | 2008년 5월 17일, LG 트윈스 |
MLB 마지막 경기 | 2006년 7월 8일, 시애틀 매리너스 |
NPB 마지막 경기 | 2010년 10월 18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KBO 마지막 경기 | 2009년 9월 18일, LG 트윈스 |
소속팀 | 휴스턴 애스트로스 (1994)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95) 뉴욕 메츠 (1996–1997) 신시내티 레즈 (1998) 야쿠르트 스왈로스 (1999–2002)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3–2004) 보스턴 레드삭스 (2005) 시애틀 매리너스 (2006) LG 트윈스 (2008–2009)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0) |
수상 내역 | |
수상 | 2001년 센트럴 리그 MVP |
MLB 성적 | |
타율 | 0.227 |
홈런 | 12 |
타점 | 54 |
NPB 성적 | |
타율 | 0.312 |
홈런 | 233 |
타점 | 635 |
KBO 성적 | |
타율 | 0.338 |
홈런 | 33 |
타점 | 135 |
2. 선수 경력
로베르토 페타지니는 1990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계약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3] 베네수엘라 리그 레오네스 델 카라카스에서 뛰며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마이너 리그에서는 뛰어난 출루율과 장타율을 기록하며 성장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트리플 A 올스타에 3회 선정되었고, 인터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을 2년 연속 수상했다.
1999년 일본 프로 야구(NPB) 야쿠르트에 입단하며 일본 무대에 데뷔했다. 야쿠르트와 요미우리에서 7시즌 동안 통산 타율 .317, 223홈런, 594타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99년에는 44홈런으로 홈런왕과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했다. 2001년에는 팀을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2003년과 2004년에는 요미우리에서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최고 연봉을 받았다.
1994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뛰었다.[7] 2005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으나 무릎 수술을 받았다. 8월에 1루수 존 올러루드의 부상으로 메이저 리그에 복귀하여 18경기에서 .281의 타율을 기록했다. 2006년 시애틀 매리너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으나, 시즌 중 부진으로 방출되었다.[7]
2008년 멕시칸 리그를 거쳐 같은 해 5월, LG 트윈스와 계약하며 한국 프로 야구(KBO)에 진출했다. 계약 조건은 2008년 잔여 기간 동안 25만달러(약 3억원)였다.[19] 2009년에는 26개의 홈런과 100타점을 기록하며 LG 역사상 최초로 시즌 100타점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페타신', '페타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높은 연봉과 무릎 부상 문제로 재계약에 실패했다.[19]
2010년 소프트뱅크와 계약하며 6년 만에 일본 프로 야구에 복귀했다.[20] 8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1, 10홈런, 41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시즌 후 소프트뱅크와 재계약에 실패하고 은퇴했다.[15]
2. 1. 유년 시절 및 마이너 리그
로베르토 페타지니는 1990년 2월 13일, 18세의 나이로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계약하며 프로 야구계에 입문했다.[3] 계약에 앞서 베네수엘라의 야구팀 레오네스 델 카라카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뛰어난 파워를 보여주며 스타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프로 첫 시즌은 걸프 코스트 리그의 GCL 애스트로스(Rookie League)에서 보냈고, 이듬해 싱글 A 벌링턴 애스트로스(Burlington)에서 활약했지만 눈에 띄는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다.페타지니는 20대 초중반 마이너 리그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통제력과 볼넷을 얻는 능력이 탁월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마이너 리그를 거쳐 트리플 A로 진출하면서 누적 출루율(OBP) 0.400 이상, 장타율 0.500 이상을 기록했다.
Baseball America는 1992년과 1994년 두 차례 페타지니를 휴스턴 애스트로스 톱 10 유망주에 선정했다([http://www.astroland.net/baseballamericatopprospects.html 휴스턴 애스트로스 Baseball America 톱 10 유망주, 1992 - 2013]). 그는 트리플 A에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세 차례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인터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International League MVP Award)을 2년 연속 수상했다. 1997년에는 노퍽 타이드(Norfolk) 소속으로, 1998년에는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Indianapolis) 소속으로 수상했다.
2. 2. 일본 프로 야구 (NPB)
1999년 야쿠르트에 입단하여 일본 프로 야구에 데뷔했다. 야쿠르트와 요미우리에서 7시즌 동안 통산 타율 .317, 223홈런, 594타점을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활약했다. 장타력, 선구안, 스피드를 고루 갖춘 타자로 평가받았으며, 삼진을 잘 당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1루 수비 또한 능숙하여 시즌 최다 보살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골든 글러브 상을 3회 수상했다.2003년과 2004년에는 요미우리에서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최고 연봉을 받았다.
2. 2. 1.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1999년, 개막부터 4번 타자를 맡았지만, 4월까지는 타율 .227, 홈런 9개로 정확성 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5월 이후 타율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시즌 전반기까지 타율 .324, 홈런 26개를 기록하며, 부상으로 출전을 못한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의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대신하여, 보충 선수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최종적으로 마쓰이 히데키(거인)나 로버트 로즈(요코하마)와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펼쳐, 44홈런으로 홈런왕, 출루율 .469로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장타율 .677은 리그 최고 기록이었다. 일본 진출 첫 해에 "타율 3할·4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2000년에는 전 경기에 출전하여 36홈런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하며 팀의 리그 우승·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2002년, 중반에는 거인의 마쓰이와 홈런 경쟁을 했지만, 8월에 거인이 독주 체제로 여유가 생기자 마쓰이도 홈런을 노리며 맹활약을 시작했고, 2년 연속 홈런왕은 실패했지만, 41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무릎 통증, 고액 연봉 등의 이유로 계약 연장이 보류되어, 그 해 11월 11일 야쿠르트를 떠났다. 이러한 퇴단 원인으로는, 페타지니가 사구를 맞아도 팀 동료 투수들이 보복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보도도 있다.[10]
2.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3년, 마쓰이 히데키의 대체 선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이적 첫 해 100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323, 34홈런, 81타점을 기록하며 여전한 기량을 과시했다.[1] 1루수에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있어서 주로 외야수로 기용되었다. 그러나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개막전에서 우익수 수비 중 홈으로 송구하는 과정에서 포수의 머리를 크게 넘기는 악송구를 시작으로, 파울 플라이를 잡지 못하거나 슬라이딩 캐치를 시도하다가 공을 놓치는 등 외야 수비에 어려움이 있었다. 5월 13일에는 왼쪽 무릎 부상으로 등록 말소되었고, 6월 23일에 1군에 재등록되었다. 그 후에도 타격이 좋아서 9월 13일 친정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역대 11번째로 5년 연속 30홈런을 기록했고, 다음 날 14일에는 프로 야구 통산 8만 호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막바지인 10월 4일 무릎 통증으로 등록 말소되면서 그대로 시즌을 마쳤다. 1개월 이상 부상으로 이탈한 것이 영향을 미쳐 일본 진출 후 처음으로 규정 타석에도 도달하지 못했다.[1]2004년에는 호리우치 쓰네오 감독의 구상에 따라 기요하라와 1루수에서 병용되었다. 지병인 무릎 통증도 악화되어 11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90, 29홈런, 84타점으로 일본에서 자기 최저 성적으로 끝나면서 3할과 30홈런의 연속 기록도 끊어졌다. 하지만 기요하라의 부상으로 인한 장기 이탈로 2년 만에 규정 타석에 도달했다. 오프 시즌에 호리우치의 구상으로 기요하라가 한때 다음 해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지만, 계약 기간이 1년 남아 있었기 때문에 기요하라는 편성권이 프런트와 감독 중 누구에게 있는지 확인하고, 구단에 다음 해 잔류를 직담판했다. 최종적으로 기요하라의 다음 해 잔류가 결정되었고, 기요하라를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싶다는 팀 방침에 더해, 외야 수비의 어려움과 높은 연봉이 걸림돌이 되어 다음 해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어 퇴단했다.[1]
2. 3. 메이저 리그 (MLB)
1994년 4월 4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7] 그해 12월 28일 트레이드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이적했다.[7]2005년 시즌 전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 그는 스프링 트레이닝 중 무릎 수술을 받아 25인 로스터에 합류하지 못했다. 8월에 1루수 존 올러루드가 15일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페타지니가 그의 로스터 자리를 채웠다. 페타지니는 포터킷에서 74경기 동안 .327의 타율, 20개의 홈런, 69타점을 기록하는 등 트리플 A에서 좋은 시즌을 보냈다. 보스턴에서 18경기에 출전하여 .281(34타수 9안타)의 타율, 1개의 홈런, 9타점을 기록했다.
2006년 2월 6일, 보스턴에서 해고되었다.[7] 같은 해 2월 22일, 초청 선수 자격을 거쳐 시애틀 매리너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7] 2006년 스프링 캠프 초대 선수 자격으로 시애틀과 마이너 계약을 맺고,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홈런을 치기도 했다. 개막전에서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로부터 대타 홈런을 기록했으나, 시즌 중 부진으로 8월 17일에 방출되어 잠시 야구계에서 은퇴하게 된다.[7]
2. 4. 멕시칸 리그
2008년, 멕시칸 리그의 멕시코시티 레드 데블스에서 현역으로 복귀하여 37경기에서 타율 .372, 6홈런, 27타점을 기록했다.[11]2. 5. 한국 프로 야구 (KBO)
2008년 5월, LG 트윈스는 부진으로 퇴단한 제이미 브라운을 대체할 선수로 페타지니와 계약했다. 계약 조건은 2008년 잔여 기간 동안 25만달러(약 3억원)였다.[19] 페타지니는 4번 타자로 활약했으나, 9월 왼쪽 발바닥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어 2009년까지 LG 트윈스에서 활약하게 되었다.2009년 4월 10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페타지니는 프로 야구 경력 최초로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특히 3번째 홈런은 9회 말 4:5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8:5로 역전시킨 끝내기 만루 홈런이었다.[18] 뛰어난 공격력을 바탕으로 '페타신'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1971년생으로 나이가 많아 '페타옹'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페타지니는 LG 트윈스에서 첫 풀 시즌을 보내며 26개의 홈런과 100타점을 기록, LG 역사상 최초로 시즌 100타점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LG 트윈스는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김재박 감독과의 계약이 만료되었다. 후임 박종훈 감독은 용병을 모두 투수로 운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페타지니의 재계약은 불투명해졌다. 페타지니는 100만달러의 연봉을 요구했고, 무릎 상태도 좋지 않아 결국 재계약에 실패했다.[19] 마침 LG 트윈스의 리빌딩과 이택근의 트레이드 추진이 겹치면서, 페타지니는 팀을 떠나게 되었고, 그의 등번호는 이후 트레이드된 이택근에게 넘어갔다.
2. 6. 일본 프로 야구 복귀
2010년 4월 15일 소프트뱅크와 연봉 4000만엔의 조건으로 계약하며 6년 만에 일본 프로 야구에 복귀했다.[20] 8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1, 10홈런, 41타점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보였다.[20]6월 9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일본 복귀 후 첫 홈런을 끝내기 홈런으로 장식했다. 이는 교류전 첫 홈런이자,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인 2001년 8월 이후 5번째 끝내기 홈런이었다. 7월 2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는 통산 6번째 끝내기 2점 홈런을 쳤는데, 이는 구단 통산 100번째(2리그제 이후) 끝내기 홈런이었다. 6번 지명 타자로 출전하며 호세 오르티스, 타무라 히토시에 이어 OPS .772를 기록,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페타지니는 다음 시즌 잔류를 원했지만, 81경기 출장에 타율 .261, 10홈런으로 전성기에 비해 기량이 저하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1월 14일 소프트뱅크는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발표했고,[15] 페타지니는 은퇴했다.
3. 개인사 및 기타
페타지니의 부인은 25세 연상인 올가이며,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낸 미셸이라는 친구의 의붓 어머니였다.[21] 페타지니는 초등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올가를 만나 사랑을 굳게 지켜 결혼에 이르렀다.[16] 부인과는 2021년 현재도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17] 베네수엘라 출신이지만, 미국 국적이어서 2009년 8월 8일에는 부인의 미국 시민권 심사 문제로 잠시 미국으로 출국하기도 했다.[22]
일본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응원가는 토머스 오말리의 응원가 멜로디를 차용했다.
4. 수상 경력 및 기록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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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 프로 야구) |
MiLB (마이너 리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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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소속팀 | 리그 | 비고 |
1997 | 노퍽 타이드 | 인터내셔널 리그 | 인터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 수상 |
1998 |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 | 인터내셔널 리그 | 인터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 수상 |
NPB(일본 프로 야구) 첫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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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장·첫 선발 출장 | 1999년 4월 2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4번·1루수로 선발 출장 |
첫 타석 | 동일, 2회 초에 미우라 다이스케를 상대로 헛스윙 삼진 |
첫 안타 | 동일, 7회 초에 미우라 다이스케를 상대로 좌전 안타 |
첫 홈런·첫 타점 | 동일, 8회 초에 요코야마 미치야를 상대로 우월 2점 홈런 |
첫 도루 | 1999년 5월 1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6차전 (나가사키 빅 N 스타디움), 7회 말에 2루 도루 (투수: 고바야시 아쓰시, 포수: 세토 테루노부) |
NPB(일본 프로 야구) 기타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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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홈런 | 2001년 6월 28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3회 말에 마크 호지머를 상대로 우월 2점 홈런 ※역대 213번째 |
150홈런 | 2002년 8월 1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2차전 (도쿄 돔), 1회 초에 이리키 유사쿠를 상대로 우월 선제 2점 홈런 ※역대 122번째 |
200홈런 | 2004년 5월 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7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1회 초에 가와우치 다카야를 상대로 중월 3점 홈런 ※역대 79번째 |
올스타전 출장 | 3회 (1999년 - 2001년) |
KBO 리그에서는 2009년 4월 10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프로 야구 경력 최초로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19] 세 번째 홈런은 9회 말 4:5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8:5로 역전시킨 끝내기 만루 홈런이었다.
4. 1. NPB (일본 프로 야구)
야쿠르트와 요미우리에서 중심 타자로 활약한 페타지니는 장타력, 선구안, 빠른 발을 겸비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삼진을 잘 당하지 않았고, 1루 수비 능력도 뛰어나 골든 글러브상을 3회 수상했다.1999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첫 시즌을 시작하여 147안타, 44홈런, 112타점, 타율 .325를 기록했다. 2002년에는 146안타, 41홈런을 기록했고, 200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4번 타자로 활약했다. 일본 통산 756경기에서 813안타, 223홈런, 813타점, 통산 타율 .317을 기록했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7.2억엔,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7억엔으로 역대 일본 프로 야구 연봉 킹의 자리를 차지했다.[1] 2003-04년에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야구 선수가 되었다.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뛰게 된 마쓰이 히데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그를 영입했다.[1] 그러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는 이미 키요하라 카즈히로라는 1루수가 있었기 때문에 페타지니는 종종 외야수로 뛰어야 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두 시즌 동안 타석에서 73홈런, 165타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98년 12월 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계약했다. 야쿠르트는 그 해 오프 시즌에 드웨인 호지와 에릭 앤서니를 해고했고, 그들과 교체하는 형태로 페타지니와[7], 마크 스미스(전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각각 새로운 외국인 타자로 영입했다.[8] 등번호는 '''9'''였으며, 추정 연봉은 약 6000만엔의 1년 계약이었다[9].
1999년, 개막부터 4번 타자를 맡았지만, 4월 종료 시점에서의 타율은 .227, 홈런 9개로, 정확성 면에서는 기대만큼의 결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5월 이후 타율 면에서도 성적이 향상되었다. 시즌 전반 종료 시점에서 타율 .324, 홈런 26개를 기록하며, 부상으로 출장을 고사한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의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대신하여, 보충 선수로 올스타전에도 선출되었다. 최종적으로 마쓰이 히데키 (거인)나 로버트 로즈(요코하마)와의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펼쳐, 최종적으로 44홈런으로 홈런왕, 출루율 .469로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각각 획득했다. 장타력도 발휘하여 장타율 .677은 리그 최고 기록이었다. 일본 진출 1년 만에 사상 최초로 "타율 3할·4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2000년에는 전 경기에 출전하여 36홈런을 기록했다.
2001년, 두 번째 홈런왕을 획득하여 팀의 리그 우승·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2002년, 중반에는 거인의 마쓰이와 홈런 경쟁을 했지만, 8월에 들어서 거인이 독주 체제로 여유가 생기자 마쓰이도 홈런을 노리며 맹활약을 시작했고, 2년 연속 홈런왕은 이루지 못했지만, 41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만성화되어 가던 무릎 통증, 고액 연봉 등의 이유로 계약 연장이 보류되어, 그 해 11월 11일 야쿠르트를 퇴단했다. 이 퇴단의 원인으로는, 페타지니가 사구를 맞아도 아군 투수진이 보복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보도도 있다[10].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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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 프로 야구) |
NPB(일본 프로 야구) 첫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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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장·첫 선발 출장 | 1999년 4월 2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4번·1루수로 선발 출장 |
첫 타석 | 동일, 2회 초에 미우라 다이스케를 상대로 헛스윙 삼진 |
첫 안타 | 동일, 7회 초에 미우라 다이스케를 상대로 좌전 안타 |
첫 홈런·첫 타점 | 동일, 8회 초에 요코야마 미치야를 상대로 우월 2점 홈런 |
첫 도루 | 1999년 5월 1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6차전 (나가사키 빅 N 스타디움), 7회 말에 2루 도루 (투수: 고바야시 아쓰시, 포수: 세토 테루노부) |
NPB(일본 프로 야구) 기타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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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홈런 | 2001년 6월 28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3회 말에 마크 호지머를 상대로 우월 2점 홈런 ※역대 213번째 |
150홈런 | 2002년 8월 1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2차전 (도쿄 돔), 1회 초에 이리키 유사쿠를 상대로 우월 선제 2점 홈런 ※역대 122번째 |
200홈런 | 2004년 5월 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7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1회 초에 가와우치 다카야를 상대로 중월 3점 홈런 ※역대 79번째 |
올스타전 출장 | 3회 (1999년 - 2001년) |
4. 2. MiLB (마이너 리그)
로베르토 페타지니는 1990년 2월 13일, 18세의 나이로 프로 야구계에 입문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계약하기 전, 베네수엘라의 레오네스 델 카라카스에서 뛰며 뛰어난 파워를 선보여 자국에서 스타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그 해 걸프 코스트 리그의 GCL 애스트로스(Rookie League)에서 첫 프로 시즌을 보냈고, 이듬해 싱글 A 벌링턴 애스트로스(Burlington)에서 활약은 준수했지만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었다.20대 초중반 마이너 리그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초기 통계는 평균 이상의 출루율(OBP)을 기록했지만, 홈런 파워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전성기에는 마이너 리그를 거쳐 트리플 A로 진출하면서 누적 OBP 0.400 이상, 장타율 0.500 이상을 기록했다.
''Baseball America''는 그를 두 차례(1992년과 1994년) 휴스턴 애스트로스 톱 10 유망주에 선정했다. 그는 트리플 A에서 세 차례(1996–1998)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인터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International League MVP Award)을 2년 연속 수상했다. 1997년에는 노퍽 타이드(Norfolk) 소속으로 메츠의 트리플 A 제휴팀에서, 1998년에는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Indianapolis) 소속으로 레즈의 트리플 A 제휴팀에서 수상했다.
4. 3. KBO (한국 프로 야구)
2008년 5월 LG 트윈스와 계약하여 4번 타자로 활약했다. 9월 왼쪽 발바닥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지만, LG 트윈스가 최하위를 기록했음에도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어 2009년까지 활약했다.[19]2009년 4월 10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프로 야구 경력 최초로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세 번째 홈런은 9회 말 4:5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8:5로 역전시킨 끝내기 만루 홈런이었다.
공격력이 탁월하여 ‘페타신’[18]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1971년생으로 나이가 많아 ‘페타옹’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LG 트윈스는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김재박 감독의 계약이 만료되었다. 후임 박종훈 감독은 용병을 모두 투수로 운용하겠다고 밝혔고, 페타지니는 연봉 100만달러를 원했으며 무릎 상태도 좋지 않아 재계약하지 않았다.[19] 당시 LG 트윈스의 리빌딩과 이택근의 트레이드 추진이 맞물려 페타지니의 재계약은 불투명했고, 그가 떠난 후 그의 등번호는 트레이드된 이택근에게 넘어갔다.
2008년 5월 12일, LG 트윈스는 페타지니가 팀에 합류하여 선발 투수 제이미 브라운을 대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계약 조건은 2008년 잔여 기간 동안 25만달러(약 3억원)이었다. 2009년 LG 트윈스에서 첫 풀 시즌을 보낸 페타지니는 26개의 홈런과 100타점을 기록했다.
4. 4. 주요 기록 (NPB)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99년 4월 2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4번·1루수로 선발 출장
- 첫 타석: 같은 날, 2회 초에 미우라 다이스케를 상대로 헛스윙 삼진
- 첫 안타: 같은 날, 7회 초에 미우라 다이스케를 상대로 좌전 안타
- 첫 홈런·첫 타점: 같은 날, 8회 초에 요코야마 미치야를 상대로 우월 2점 홈런
- 첫 도루: 1999년 5월 1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6차전 (나가사키 빅 N 스타디움), 7회 말에 2루 도루 (투수: 고바야시 아쓰시, 포수: 세토 테루노부)
- 100홈런: 2001년 6월 28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3회 말에 마크 호지머를 상대로 우월 2점 홈런 (역대 213번째)
- 150홈런: 2002년 8월 1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2차전 (도쿄 돔), 1회 초에 이리키 유사쿠를 상대로 우월 선제 2점 홈런 (역대 122번째)
- 200홈런: 2004년 5월 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7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1회 초에 가와우치 다카야를 상대로 중월 3점 홈런 (역대 79번째)
- 올스타전 출장: 3회 (1999년 - 2001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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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nt shoes to fill | The Japan Times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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楽天復帰の田中、日本球界最高年俸選手に 背番号は「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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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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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幻に終わったペタジーニのオリックス入り 仰木監督に届いた“交換オファ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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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式会社Creativ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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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外国人獲得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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ヤクルト新外国人米大パイレーツ スミス外野手を獲得
中日スポー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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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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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外国人三選手発表
中日スポーツ
1999-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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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月1日】2002年(平14) なぜ報復しない!ペタジーニ怒りの職場放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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助っ人最高はペタジーニ7.2億円 米国ではド軍カーショー40億円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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ペタジーニ氏 球界最高年俸“助っ人”の今…25歳年上妻を裏切った?不倫疑惑を直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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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菅野8億円で更改 ペタジーニ超え史上最高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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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ベルト ペタジーニ選手 入団のお知ら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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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ペタジーニ選手の退団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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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年上女性は年下男性にモテるのか?「年上妻」夫婦が最高に素敵&幸せである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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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巨人・ペタジーニ氏 73歳のオルガ夫人とラブラブキス披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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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의 달인, 현수 머신이냐, 페타신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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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결국 페타지니와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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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지니, 소프트뱅크와 재계약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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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의 여인과 함께 살리라" 프로야구선수들 결혼 '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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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페타지니, 개인사정으로 8일 출국…5경기 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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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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