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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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아들이자 로타르 1세의 동생이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건설하여 독일의 기원이 되었으며, 876년 사망할 때까지 바이에른을 통치했다. 그는 형제들과의 상속 분쟁과 서프랑크 왕국과의 갈등 속에서 동프랑크 왕국의 기반을 다졌으며, 교회와 수도원 건립에 힘썼다. 그의 사후 동프랑크 왕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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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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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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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843년 8월 10일경 – 876년 8월 28일 |
전임 | 루트비히 1세 |
후임 | 카를로만 (바이에른), 루트비히 3세 (작센), 카를 3세 (슈바벤) |
배우자 | 엠마 폰 알트도르프(827년 결혼, 876년 사망) |
자녀 | 카를로만 루트비히 3세 카를 3세 |
왕조 | 카롤링거 가문 |
아버지 | 루트비히 1세 (프랑크 왕) |
어머니 | 에르망가르드 드 에스베 |
출생일 | 806년경 |
사망일 | 876년 8월 28일 |
사망지 |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
매장지 | 로르슈 수도원 |
계승 | 동프랑크 왕(독일 왕) |
서명 유형 | 수결 |
서명 | Signatur Ludwig der Deutsche.PNG |
호칭 | |
독일어 | Ludwig II. der Deutsche |
로마자 표기 | Ludovicus II Germanicus |
통치 | |
재위 시작 | 843년 |
재위 종료 | 876년 |
추가 정보 | |
종교 | 가톨릭교회 |
2. 생애
루트비히 2세는 817년 베르덩 조약에서 바이에른의 지배권을 얻었다. 아버지 경건왕 사후, 동생 샤를 2세(대머리왕)와 손을 잡고 왕국의 모든 영토를 손에 넣으려 한 형 로타르 1세에 대항하여, 841년 퐁텐느와 전투, 842년 스트라스부르의 서약을 거쳐 843년 베르덩 조약에서 라인강과 아레강 이서의 땅을 획득하여 동프랑크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것이 후대 독일의 기원이다.[3][4]
842년 2월 12일 독일인 루트비히는 대머리 카를과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맹약을 체결했다. 이때 독일인 루트비히는 게르만어로, 대머리 카를은 갈로-로망어로 서약문을 낭독했다.
843년 8월 11일 베르덩 조약에 따라 카를과 로타르는 제국의 서부와 중부를 각각 차지했고, 루트비히는 동부와 함께 프랑켄, 슈바벤, 케른텐, 바이에른, 작센 지방의 영토를 차지했다.
869년, 중부 프랑크 왕국의 로타링기아 왕이자 조카인 로타르 2세가 사망하였으나, 이때 루트비히는 전신마비로 인해 움직일 수 없었다.[9] 같은 해 샤를 2세가 로타링기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870년, 루트비히는 로타링기아에 대한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하고, 샤를 2세와 메르센 조약을 맺어 그 유지를 분할 합병하기로 결정하고, 아헨과 메츠를 포함한 로타링기아 동부를 획득하였다.[10]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는데,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가 로타링기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타르 1세가 죽자마자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는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다.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개입하면서 대머리 카를의 로타링기아 접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18]
루트비히 2세 게르마니쿠스의 말년은 아들들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장남인 바이에른의 카를로만은 861년과 2년 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서 둘째 아들인 루트비히 3세가 동생인 뚱보 샤를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다. 864년 루트비히 2세는 카를로만에게 자신이 아버지 밑에서 한때 지배했던 바이에른 왕국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865년 그는 나머지 영토를 분할했는데, 작센과 프랑켄 및 튀링겐은 루트비히 3세에게, 슈바벤과 레티아는 뚱보 샤를에게 돌아갔다.
875년, 루트비히는 자신의 사후 세 아들에 대한 유산 분할 상속을 결정하고, 장남 카를만을 바이에른의, 차남 루트비히를 프랑켄, 튀링겐, 작센의, 삼남 카를을 알레마니아(슈바벤)의 부왕으로 삼았다. 이듬해 87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73세로 사망하여 로르슈 수도원에 매장되었다.[10] 유산은 875년 결정에 따라 세 아들이 분할 상속받았다.
2. 1. 젊은 시절
817년 경건왕 루트비히 1세가 그의 영토를 아들들에게 분할했을 때,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817년 베르됭 조약에서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의 지배권을 얻었다.2. 1. 1. 생애 초반
루트비히 2세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 군주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와 이르멘가르트 황후의 셋째 아들로 아키텐에서 태어났다. 로타르 1세, 피핀과 형제이며, 친누이로는 로트루드, 힐데가르트, 마틸다 등이 있었다. 이복 동생으로는 대머리 카를, 기셀라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는 아르눌프와 이복누나 알파이드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살아있을 당시에는 흘로도비쿠스, 흘루도비쿠스(HLUDOVICUS)라 불렸으며, 고대 프랑크어로 유명한 전쟁이라는 뜻을 가진 Hlu-do-vig의 합성어이다.루트비히는 유아기를 아버지의 임지인 아키텐에서 보낸 뒤 할아버지 샤를마뉴의 아헨 왕궁으로 보내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군사용 무기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재능을 보였다. 또한 매우 종교적이며 로마 가톨릭 수도사들에 대한 존경심과 신학적 질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13]
811년 할아버지 샤를마뉴로부터 숙부 동프랑크의 카를 2세의 영지 중 하나인 케노마니니쿠스 공작(메인 공작)직을 받았다. 그러나 숙부 동프랑크의 카를 2세가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 루트비히는 817년 로타르 1세에게 케노마니니쿠스 공작직을 넘겨주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 해당되는 영지의 분국왕이 되었는데, 아버지인 경건왕 루트비히와 구별하기 위해 독일인 루트비히(Ludwig der Deutsche)라 불렸다.
814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 즉위 후 바이에른 공작에 봉해졌으나, 한동안 아헨에 체류하고 있었다. 817년 8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가 제국 분할에 대한 제국 칙령을 발표할 때,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을 상속받고 바이에른의 왕에 봉해졌다. 817년 7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아헨의 제국 의회에서 피핀을 아키텐 왕으로, 바이에른을 루트비히 2세에게 주도록 정하고 로타르 1세를 공동황제 겸 후계자로 선포했다. 루트비히와 피핀은 바이에른과 아키텐의 왕이지만 자치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고, 로타르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어린 시절은 부분적으로 할아버지 샤를마뉴의 궁정에서 보냈으며, 샤를마뉴의 각별한 애정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817년 루이 1세 경건왕이 그의 영토를 아들들에게 분할했을 때, 루이(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루이는 바바리아인의 옛 수도인 레겐스부르크에서 통치했다. 825년 그는 동쪽 국경에서 벤드족과 소르브족과의 전쟁에 휘말렸다. 827년, 그는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여동생인 헤마와 결혼했다.
826년에야 루이가 처음으로 바이에른을 다스리게 되었다. 828년과 829년 그는 파노니아로 진입하려는 불가리아인들에 대한 두 차례의 원정을 수행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가 부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라인-마인 지역으로 그의 통치를 확장하려고 노력했다.[2]
2. 1. 2. 바이에른의 통치자
814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가 즉위한 후 바이에른 공작에 봉해졌으나, 한동안 아헨에 체류하였다. 같은 해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가 로타르 1세와 피핀을 바이에른과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하고, 교황청의 공인을 받으러 떠났을 때도 루트비히는 아헨에 남아 있었다. 817년 7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아헨의 제국 의회에서 피핀을 아키텐 왕으로, 바이에른을 루트비히 2세에게 주도록 정하고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 겸 후계자로 선포했다. 루트비히와 피핀은 바이에른과 아키텐의 왕이었지만 자치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고, 로타르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13]817년 8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가 제국 분할에 대한 제국 칙령을 발표할 때,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을 상속받고 바이에른의 왕에 봉해졌다. 한편 그의 메인 영지는 형 로타르 1세에게 넘어갔다.
825년 바이에른의 통치권을 위탁받아 826년부터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827년 바이에른 공작 구엘프 1세(Welf I)의 딸인 아르톨프의 엠마(Emma of Altdorf)와 결혼하였다. 823년 6월 루트비히 1세의 계비 유디트에게서 아들 대머리왕 카를이 태어나고 829년 상속령이 개정되자 830년, 831년, 833년 형 피핀과 함께 아버지 루트비히 1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833년 아버지 루트비히를 폐위시키고 계모이자 처형인 유디트를 수녀원에 감금하였으나, 부왕 루트비히는 교황의 지지를 얻어 다시 권좌로 복귀하였다.
828년과 829년 불가리 인이 판노니아(Pannonia)를 침공하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2회에 걸쳐 불가리아를 원정했으나 패배하였다. 이 기간 중 그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라인-마인까지 확장하려 하였다.[2]
829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보름스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 상속령을 개정하여 후처 유디트에게서 얻은 아들 대머리 카를에게 알레만니아를 주었다. 또한 기존의 세 아들에게 나누어준 영토 중 라이티아, 알자스, 부르고뉴의 일부도 같이 주었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이에 반발했다.
817년 베르됭 조약에서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의 지배권을 얻었다.
2. 2. 바이에른과 동프랑크의 국왕
루트비히 2세는 817년 베르덩 조약에서 바이에른의 지배권을 얻었다. 아버지 경건왕 사후, 동생 샤를 2세(대머리왕)와 손을 잡고 왕국의 모든 영토를 손에 넣으려 한 형 로타르 1세에 대항하여, 841년 퐁텐느와 전투, 842년 스트라스부르의 서약을 거쳐 843년 베르덩 조약에서 라인강과 아레강 이서의 땅을 획득하여 동프랑크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것이 후대 독일의 기원이다.842년 2월 12일 독일인 루트비히는 대머리 카를과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맹약을 체결했다. 이때 독일인 루트비히는 게르만어로, 대머리 카를은 갈로-로망어로 서약문을 낭독했다.
843년 8월 11일 베르덩 조약에 따라 카를과 로타르는 제국의 서부와 중부를 각각 차지했고, 루트비히는 동부와 함께 프랑켄, 슈바벤, 케른텐, 바이에른, 작센 지방의 영토를 차지했다.
869년, 중부 프랑크 왕국의 로타링기아 왕이자 조카인 로타르 2세가 사망하였으나, 이때 루트비히는 전신마비로 인해 움직일 수 없었다.[9] 같은 해 샤를 2세가 로타링기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870년, 루트비히는 로타링기아에 대한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하고, 샤를 2세와 메르센 조약을 맺어 그 유지를 분할 합병하기로 결정하고, 아헨과 메츠를 포함한 로타링기아 동부를 획득하였다.[10]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는데,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가 로타링기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타르 1세가 죽자마자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는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다.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개입하면서 대머리 카를의 로타링기아 접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18]
869년 로타르 2세가 사망했을 때, 루트비히는 중병을 앓고 있었고 그의 군대는 모라비아인과의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카를 대머리왕은 재빨리 로타르의 영토를 차지했지만, 회복한 루트비히는 전쟁으로 압박하여 메르센 조약을 통해 로타르의 영토를 분할하게 했다.
루트비히 2세 게르마니쿠스의 말년은 아들들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장남인 바이에른의 카를로만은 861년과 2년 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서 둘째 아들인 루트비히 3세가 동생인 뚱보 샤를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다. 864년 루트비히 2세는 카를로만에게 자신이 아버지 밑에서 한때 지배했던 바이에른 왕국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865년 그는 나머지 영토를 분할했는데, 작센과 프랑켄 및 튀링겐은 루트비히 3세에게, 슈바벤과 레티아는 뚱보 샤를에게 돌아갔다.
875년, 루트비히는 자신의 사후 세 아들에 대한 유산 분할 상속을 결정하고, 장남 카를만을 바이에른의, 차남 루트비히를 프랑켄, 튀링겐, 작센의, 삼남 카를을 알레마니아(슈바벤)의 부왕으로 삼았다. 이듬해 87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73세로 사망하여 로르슈 수도원에 매장되었다.[10] 유산은 875년 결정에 따라 세 아들이 분할 상속받았다.
2. 2. 1. 상속 분쟁에 참여
829년 그는 형 피핀과 함께 이복동생 카를에게 부여된 알레만니아를 침공하였다. 830년 로타르 1세와 피핀이 반란을 일으킬 때 루트비히는 관망하였다.[14] 831년 루트비히는 로타르, 피핀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14]832년 로타르 1세, 피핀과 함께 대머리 카를의 영지인 알레만니아를 다시 침공했다.[14]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는 교황 그레고리오 4세의 지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고 알자스의 지골스하임 부근에서 회의를 열어 아버지인 경건왕 루트비히를 폐위했다.[14] 같은 해 그는 슬라브인 군대를 데리고 알레만니아로 이끌었지만 아버지 루트비히에게 패하고 퇴각했다.[14]
833년 루트비히는 로타르, 피핀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14] 6월 루트비히, 로타르 1세, 피핀 형제는 콜마르에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장군 뤼겐펠트를 격파하고,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사로잡았다.[14] 834년 봄 루트비히 2세는 형 로타르 1세, 피핀 등과 함께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기도했다. 831년 초 로타르 1세는 제국을 3분할하였으나 아키텐의 피핀과 루트비히는 자신들의 몫이 적다고 보고 반발했다. 루트비히와 아키텐의 피핀은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의 탈출을 도와주었다.
836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루트비히의 바이에른 영지를 되돌려주었다.
2. 2. 2. 퐁트느와 전투와 베르덩 조약
840년 루이 황제가 사망하자 로타르 1세가 전체 제국을 주장했고, 루이는 샤를 대제와 동맹을 맺어 841년 6월 퐁트느와 전투에서 로타르 1세와 그의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아키텐의 피핀 1세의 아들)를 물리쳤다.[3][4]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풀다 연대기(Annales Fuldenses)에 따르면, 이는 옛날부터 프랑크족이 경험한 가장 큰 학살이었다. 동시에 이는 왕국 통일을 위한 루이의 마지막 전투였다.842년 6월, 세 형제는 쏘아 강의 한 섬에서 만나 평화를 협상했고, 각자 40명의 대표를 임명하여 각자의 왕국의 경계를 정했다. 이는 843년 8월 10일까지 체결된 베르됭 조약으로 발전했는데, 이 조약에 따라 루이는 라인 강 동쪽에 있는 대부분의 영토(동프랑크 왕국)와 함께 라인 강 왼쪽 기슭에 있는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주변 지역을 받았다(842년 스트라스부르의 서약 참조). 그의 영토에는 바이에른(그는 레겐스부르크를 그의 정부의 중심지로 삼았다), 투링겐, 프랑코니아, 작센이 포함되었다.
2. 2. 3. 동프랑크의 국왕
837년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은 아헨 제국 의회, 838년 네이메겐 제국 의회에서 더 많은 영토를 아들 대머리왕 카를에게 넘겨주었다. 로타르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 등은 이 조치를 받아들였으나 감정이 좋지 않았다.838년 루트비히 2세와 로타르 1세는 각자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트렌트 근처에서 다시 만났다. 그해 6월 루트비히 2세는 네이메헌에서 소집된 제국 의회에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와 다투었다. 838년 9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몫을 대머리 카를에게 넘긴다고 선언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반발했다. 838년 12월 형 피핀이 갑자기 죽자, 루트비히는 대머리 카를 대신 조카 아키텐인 피핀 2세의 아키텐 상속을 지지하였다. 그 뒤 부왕과 화해, 바이에른을 다시 통치하였다. 그러나 839년 봄 둘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가 다시 게르만 귀족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퇴하고 바이에른으로 물러갔다. 루트비히는 다시 형 로타르 1세를 부추겨 대머리 카를의 영지인 알레만니아를 침공했다. 판노니아 백작령을 얻고, 루트비히는 이때 획득한 영토인 판노니아를 자신의 영지에 포함하고 자신의 아들인 청년 루트비히를 백작으로 임명하였다.
839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한데 대해,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군사를 이끌고 이복 동생 대머리 카를의 알레만니아 영지에 침입했다.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신속하게 반응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판노니아로 퇴각하였다. 839년 5월 30일 보름스에서 개최된 제국 의회에서 제4차 배분이 이루어져 제국은 로타르 1세와 대머리 카를 사이에 양분되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만을 차지했다. 당시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은 바이킹 족의 프리슬란트, 프리시아 반환 요구를 거절하고 전쟁 중이었는데, 루트비히 2세는 보름스 의회의 결정에 반발, 조카 피핀 2세와 함께 다시 군사를 이끌고 아헨으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839년 말 보름스 전투에서 아버지 루트비히에게 격퇴당했다. 대머리 카를이 아키텐을 공략하려 하자, 독일인 루트비히는 조카 아키텐의 피핀 2세를 지원하였다.
839년말경 독일인 루트비히는, 5월 30일의 보름스 의회의 결정에 반발,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또다시 보름스에서 격퇴당했다. 840년 초 독일인 루드비히는 알레만니아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경건왕 루트비히가 진압군을 보내자 싸움없이 신속하게 후퇴했다. 그러나 840년 3월 경건왕 루트비히는 다시 셋째 아들 독일인 루트비히를 치려고 특별 군대를 조직했다가, 3월 말 프랑크푸르트에서 군대를 해산시켜 돌려보냈다.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840년 7월 1일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가 열리기 전인 6월 20일 인겔하임에서 사망하였다.
840년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이 죽은 뒤 큰형 로타르 1세가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이복 동생 카를과 손잡고 로타르에 대항하였다. 이때 아키텐의 분국왕이자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지원군이 로타르 1세에게 합류, 로타르를 도와주었다. 로타르 1세는 817년의 제국 칙령에서 부여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841년 7월 25일 퐁트느와 전투에서 로타르를 깨뜨렸다. 842년에는 작센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튀링겐의 공작 등이 이에 협조하여 로타르를 조여왔다. 패한 로타르는 결국 아헨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협상을 하게 된다.
842년 2월 12일 독일인 루트히비는 대머리 카를과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맹약을 체결한다. 이때 독일인 루트비히는 게르만어로, 대머리 카를은 갈로-로망어로 서약문을 낭독한다. 이들은 하느님과 형제애에 의거하여 로타르를 공격한다고 맹세하였다. 이 서약은 그때까지의 프랑크 왕국의 국왕, 황제들이 명령과 선언으로 전쟁, 정책을 집행하던 것과는 다른 신과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한 서약이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표준어인 고지독일어로 쓰여졌지만, 게르만어와 라틴어로 각각 낭독되었다.
842년부터 844년까지 루트비히는 작센 족의 스텔링가(Stellinga) 운동을 저지시켰다.
842년 6월 로타르, 루트비히, 카를 3형제는 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각 40명의 대표자들을 대동하고 손강(Saône) 인근의 한 섬에서 만나고, 각자의 왕국의 경계를 정했으나 결렬되었다. 842년 6월 루트비히는 로타르 1세, 대머리 카를을 작센에서 만나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었다. 협상은 여러 번 결렬되었으나 843년 8월 제국을 3분하기로 하고 종결된다.
843년 8월 11일 베르덩 조약에 따라 카를과 로타르는 제국의 서부와 중부를 각각 차지했고, 루트비히는 동부와 함께 프랑켄, 슈바벤, 케른텐, 바이에른, 작센 지방의 영토를 차지했다. 즉위 직후 루트비히는 정부와 행정 문서 형식을 간소화시켰다. 동시대의 동프랑크의 백성들은 그의 별명을 피피(piious) 또는 피피오스무스(piiousmus)라 불렀다. 서프랑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렉스 게르마니아(Rex Germaniae) 또는 렉스 게르마노룸(Rex Germanorum) 또는 렉스 테우톤(Rex Teutons)으로 불렸다. 독일인 루트비히라는 별명은 18세기 이후에 붙여졌다 한다.[15]
844년 왕국을 침략한 슬라브 족과 교전, 서슬라브족 연합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함부르크까지 침략한 데인 족의 왕 호릭1 세의 군사를 막지 못했다. 함부르크의 주교 안스가르는 주민들을 이끌고 브레멘으로 피신하였다. 845년 보헤미아 공작은 그의 종주권을 인정, 침례를 받고 루트비히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동프랑크의 국왕에 올랐지만, 왕국은 바로 프랑켄, 작센, 알레만니아, 바이에른 등의 여러 부족 출신 제후들의 세력이 강했고, 루트비히는 순찰사(Missi dominici)와 변경백을 파견하여 이들을 관리 감독하였다. 알레만니아와 작센 지역에서는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점을, 성 갈렌 수도원의 그리모알드(Grimoald), 슈바벤의 백작 처남 콘라트 1세 등 해당 지역의 유력자 및 해당 지역과 인근 지역 교회의 주교, 수도원의 원장, 평신도 수도원의 간부, 유력 평신도, 봉신 등의 지원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성 갈렌의 그리모알드는 그의 자문관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아들 중 카를로만 3세와 소 루트비히를 각각 바이에른과 작센으로 보내 분봉왕으로 봉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지역 제후들의 세력이 강했고, 판노니아와 모라비아인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노르만 족과 마자르 족의 잇단 침입으로 국왕의 통치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853년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은 아키텐의 귀족인 마이네 백작 고즈베르트(Gauzbert)를 처형하였다. 853년 카를에게 대항한 서프랑크의 귀족들이 루트비히에게 원조를 청하자 아들 루트비히 청년왕을 아키텐으로 보냈으며, 피핀 2세를 지원하게 했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대머리 카를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16] 854년까지 아들 소 루트비히는 아키텐에 체류하고, 그 이듬해에 되돌아왔다.[17] 독일인 루트비히는 아들 청년 루트비히를 지원하여 피핀 2세를 복직시켰다. 또한 서프랑크왕 샤를 2세의 폐위를 위한 거사에는 피핀 2세, 프로방스의 샤를까지 참여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858년 자신이 직접 서쪽으로 가서 카를을 폐위하려 했으나 장거리 이동으로 병력과 물자 조달에 실패하면서 중단하게 됐다. 결국 860년 6월 코블렌츠 조약을 맺어 카를의 영토에 대한 권리주장을 취소했다.
한편으로 그는 아키텐의 피핀 2세를 수시로 지원하였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상속 몫을 분배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서프랑크의 샤를로망이 아버지 카를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망명하자 그를 받아들였다.
840년 루이 황제가 사망하자 로타르 1세가 전체 제국을 주장했고, 루이는 샤를 대제와 동맹을 맺어 841년 6월 퐁텐느 전투에서 로타르 1세와 그의 조카인 아키텐의 페팽 2세(아키텐의 페팽 1세의 아들)를 물리쳤다.[3][4] 동시에 이는 왕국 통일을 위한 루이의 마지막 전투였다.
842년 6월, 세 형제는 쏘아 강의 한 섬에서 만나 평화를 협상했고, 각자 40명의 대표를 임명하여 각자의 왕국의 경계를 정했다. 이는 843년 8월 10일까지 체결된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으로 발전했는데, 이 조약에 따라 루이는 라인 강 동쪽에 있는 대부분의 영토(동프랑크 왕국)와 함께 라인 강 왼쪽 기슭에 있는 슈파이어, 웜스, 마인츠 주변 지역을 받았다(842년 스트라스부르크 선서 참조). 그의 영토에는 바이에른(그는 레겐스부르크를 그의 정부의 중심지로 삼았다), 투링겐, 프랑코니아, 작센이 포함되었다.
루이는 독일 왕국의 창시자라고 불릴 수 있지만,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려는 그의 시도는 헛수고였다. 842년 작센에서 일어난 슈텔링가(Stellinga) 반란을 진압한 후, 844년 그는 오보트리트족이 자신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그들의 왕자 고즈모빌을 죽였다. 그 후 투링겐 공작 타쿨프는 보헤미아인, 모라비아인 및 기타 부족에 대한 원정을 수행했지만, 흉포한 바이킹을 저지하는 데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852년 루트비히는 아들 젊은 루트비히를 아키텐으로 보냈는데, 그곳 귀족들은 샤를 대머리왕의 통치에 분개하고 있었다. 젊은 루트비히는 854년까지 출발하지 않았고, 이듬해 돌아왔다.
853년부터 루트비히는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차지하려는 여러 차례의 시도를 했다. 《풀다 연대기》에 따르면, 서프랑크 국민들은 샤를 대머리왕의 잔혹하고 잘못된 통치에 혐오감을 느껴 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조카인 아키텐의 페팽 2세와 프로방스의 샤를의 격려를 받아 루트비히는 858년 서프랑크 왕국을 침공했다. 샤를 대머리왕은 저항할 군대를 모을 수 없어 부르고뉴로 도망쳤다. 그해 말 루트비히는 "서프랑크 왕국 통치 1년차"로 명시된 칙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 내의 배신과 탈영, 그리고 아키텐 주교들의 샤를 대머리왕에 대한 지속적인 충성으로 인해 그의 모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860년 6월 7일 코블렌츠에서 루트비히와 샤를은 모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공개적인 서약을 했다.
855년 로타르 1세 황제가 죽은 후, 루트비히와 샤를은 한동안 로타르의 소유지를 서로 나누는 계획에 협력했지만, 로타르의 아들들과 상속자들—로타링기아를 받은 로타르 2세, 황제 칭호와 롬바르디아의 철 왕관을 가진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 그리고 프로방스의 샤를—이 이에 대한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868년 메츠에서 루트비히와 샤를은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죽었을 때, 루트비히는 중병에 걸려 있었고 그의 군대는 모라비아인들과의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샤를 대머리왕은 재빨리 로타르의 땅을 차지했지만, 회복한 루트비히는 전쟁으로 그를 압박하여 로타르의 땅을 모든 청구인들 사이에 분할한 메르센 조약에 동의하게 했다.
2. 2. 4. 교회와 수도원 건립
루트비히 2세는 853년 취리히에 펠릭스 운드 레굴라 수녀원을 건립하였는데, 그의 딸 힐데가르트(853년~856년)와 베르타(857년~877년)가 한때 이 수녀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15] 프랑크푸르트와 레겐스부르크에도 루트비히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튀링겐에는 클로스터 성당을 건립하였다.그는 성 갈렌 수도원, 잘츠부르크 성당, 풀다 성당 등에 많은 기부금을 희사하기도 했다. 그는 일부 수도원의 원장에 자신의 딸들과 자녀들을 임명하기도 했다.
2. 2. 5. 메르센 조약과 상속 분쟁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는데,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가 로타링기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타르 1세가 죽자마자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는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다.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개입하면서 대머리 카를의 로타링기아 접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18] 로타르 2세에게는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조카 로타르가 죽은 뒤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가 나타났고, 869년 로타르 2세가 죽었을 때 카를과 함께 위그를 사생아로 규정하고 로타르 2세와 발트라다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한 뒤 로트링겐에서 추방했다.로타르 1세 사후, 루트비히와 카를은 로타르의 영토를 나누는 계획에 협력했다. 그러나 로타르 1세의 아들들인 로타링기아의 로타르 2세,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황제 칭호와 롬바르디아의 철 왕관 소유), 프로방스의 샤를이 상속권을 주장했다. 868년 메츠에서 루트비히와 카를은 로타링기아 분할에 합의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사망했을 때, 루트비히는 중병을 앓고 있었고 그의 군대는 모라비아인과의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카를 대머리왕은 재빨리 로타르의 영토를 차지했지만, 회복한 루트비히는 전쟁으로 압박하여 메르센 조약을 통해 로타르의 영토를 분할하게 했다.
869년, 중부 프랑크 왕국의 로타링기아 왕이자 조카인 로타르 2세가 사망했으나, 루트비히는 전신마비로 움직일 수 없었다.[9] 같은 해 카를 2세가 로타링기아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870년, 루트비히는 로타링기아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카를 2세와 메르센 조약을 맺어 로타링기아를 분할 합병하기로 결정하고, 아헨과 메츠를 포함한 로타링기아 동부를 획득하였다.[10]
2. 2. 6. 교회 문제 개입
그는 동프랑크 각지에 교회와 수녀원 설립에 투자하였다. 853년 취리히에 펠릭스 운드 레굴라 수녀원을 건립하였는데, 그의 딸 힐데가르트(853년~856년)와 베르타(857년~877년)가 한때 이 수녀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와 레겐스부르크에도 루트비히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튀링겐에는 클로스터 성당을 건립하였다.그는 성 갈렌 수도원, 잘츠부르크 성당, 풀다 성당 등에도 많은 기부금을 희사하였다. 그는 일부 수도원의 원장에 자신의 딸들과 자녀들을 임명하기도 했다.
2. 2. 7. 유산 상속 문제와 갈등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는데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가 로타링기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타르 1세가 죽자 바로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개입으로 대머리 카를의 로타링기아 접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로타르 1세가 죽자 카를 2세는 형의 영토였던 로트링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지만, 독일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그를 막았다.[18] 대머리 카를은 로트링겐을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로타르 2세가 죽은 뒤에 다시 로트링겐을 차지하려 했다. 로타르 2세에게는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조카 로타르가 죽은 뒤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가 나타났고 869년 로타르 2세가 죽었을 때, 카를과 함께 위그를 사생아로 정하고 로타르 2세와 발트라다의 결혼은 무효로 선언한 뒤 로트링겐에서 추방했다.856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아들 카를로만 3세에게 군사 지휘권을 부여, 케른텐 공략을 지휘하게 했다.
858년 8월~859년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2세 칼부스를 폐위시키려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갔으나 실패하였다. 859년 1월 동프랑크 왕국 동부 국경의 소르브인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군사를 이끌고 서둘러 회군했다. 860년 6월 코블렌츠에서 대머리 카를과 평화협정을 체결, 서부 영토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했다.
861년과 863년, 864년 아들 바이에른의 카를로만 3세는 아버지 독일왕 루트비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곧 다른 아들들인 소 루트비히와 뚱보 카를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왕 루트비히는 863년 아들의 반란을 두려워 케른텐의 그의 영지를 침공했다. 루트비히는 비밀리에 카를로만의 측근인 군다카르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 군다카르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루트비히에게 갔고 카를로만은 군다카르를 해임하고 케른텐을 직접 차지하였다.
863년 아들 카를로만 3세를 판노니아 변경백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를 판노니아 변경백에서 해임한 루트비히는 윌리엄 등의 관료를 파견하는 한편 모라비아 부족장 엔겔샬크 등을 판노니아 변경백에 임명하여 그를 견제했다. 864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아들들로부터 아들 카를로만 3세에게 바이에른 왕국의 전권을 넘겨줄 것을 강요당했다. 864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아들들과의 반란에 시달리면서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는데 카를만에게는 바이에른, 소 루트비히에게는 작센, 프랑켄과 튀링겐, 뚱보 카를에게는 슈바벤과 라이티아를 주었다. 그러나 866년 아들 카를로만 3세은 영토 분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케른텐 후작 군다카르 등을 이끌고, 다시 아버지인 독일인 루트비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 2세 게르마니쿠스의 말년은 아들들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장남인 바이에른의 카를로만은 861년과 2년 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서 둘째 아들인 루트비히 3세가 동생인 뚱보 샤를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다. 864년 루트비히 2세는 카를로만에게 자신이 아버지 밑에서 한때 지배했던 바이에른 왕국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865년 그는 나머지 영토를 분할했는데, 작센과 프랑켄 및 튀링겐은 루트비히 3세에게, 슈바벤과 레티아는 뚱보 샤를에게 돌아갔다.
869년, 중부 프랑크 왕국의 로타링기아 왕이자 조카인 로타르 2세가 사망하였으나, 이때 루트비히는 전신마비로 인해 움직일 수 없었다.[9] 같은 해 샤를 2세가 로타링기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870년, 루트비히는 로타링기아에 대한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하고, 샤를 2세와 메르센 조약을 맺어 그 유지를 분할 합병하기로 결정하고, 아헨과 메츠를 포함한 로타링기아 동부를 획득하였다.[10]
2. 3. 생애 후반
869년 초, 셋째 아들 비만왕 카를 3세가 봉토 배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 해 루드비히는 중병에 걸려 레겐스부르크에서 요양하며 유언장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상속권 박탈, 영토 조정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이 소문을 들은 그의 아들 청년 루트비히와 비만왕 카를은 슈파이어가우에 모였다.[19] 그러나 그해 9월 비만왕 카를 3세는 사촌 로타르 2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스스로 철군했다. 869년 8월 8일 로타르 1세의 아들 로타르 2세가 이탈리아 피아첸차에서 사망하자,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로타르 2세의 서자인 어린 위그를 제치고 로타르 2세의 영토를 공동 분할하기로 약속하였다.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위그를 사생아로 규정하고, 로타링기아에서 추방했다. 869년 9월 로타링기아에 도착한 대머리 카를은 자신이 로타링기아 전체를 정복했음을 선언하고, 자신을 스스로 황제이며 존엄한 자(Imperator Augustus)라고 선언했다. 이복 형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즉시 반발했다.869년 9월 9일 대머리 카를는 메츠에서 로타링기아 전체의 왕으로 선언했다. 카를이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로타링기아를 합병하자, 870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동프랑크와 모라비아의 군대를 이끌고 로타링기아를 침공했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로타링기아 전역을 점령했고, 대머리 카를에게 사자를 보내 분할안에 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교황청이 나서서 중재를 요구했고, 그해 2월부터 3월 메르센에서 대머리 카를을 만나 메르센 조약에 따라 카를과 함께 로타링기아를 분할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루트비히는 옛 프랑크 왕국의 수도인 아헨 지역, 라인강 서쪽의 영역과 쾰른, 프리슬란트 등을 차지했다. 이때 로타리우스 2세의 가까운 친척이자 친형인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871년까지 남부 이탈리아에 출몰하는 해적들과 아랍인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여 조약 체결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자신을 배제한 분할 조약에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865년과 872년 3명의 아들인 카를로만, 루트비히 청년왕, 비만왕 카를 3세에게 맏이에게는 바이에른과 케른텐, 둘째 루트비히에게는 작센, 셋째 카를에게는 각각 알레만니아 영토를 나누어 주었으나, 이 분할에 불만을 품은 아들들은 861년부터 873년까지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는 모라비아 지방에 가톨릭을 전파하는 프랑크 족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이들의 안전한 선교를 주선하였으나, 모라비아를 흡수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869년 군사를 보내 모라비아를 공략하여 870년 병합시켰다. 그러나 모라비아는 라디스슬라프 공의 지휘하에 분리독립을 기도했고, 라디스슬라프가 죽자 모라비아의 반란은 진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871년 슬라보미르, 라스디슬라프의 조카 스바토풀크 2세 등을 중심으로 모라비아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그해 동프랑크 군을 몰아냄으로써 모라비아의 영지를 잃게 되었다. 873년 다시 모라비아와 전쟁을 하였으나 전쟁에 져서 874년 이후 대모라바 왕국은 독립했다.
870년대 이후 다시 바이킹들이 영토를 침략, 프리슬란트, 함부르크, 베를린 주변지역을 약탈하자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바이킹의 침입과 마자르족, 슬라브족의 침략과 약탈은 계속되었다.
871년 독일인 루트비히가 병에 걸리게 되자, 소 루트비히는 아버지의 건강 문제와 관련하여 슈파이어 근처에서 형 카를로만 3세를 만났고, 형제는 다시 독일인 루트비히를 상대로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872년과 873년에 동로마 제국의 바실 1세 황제의 사절들이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루트비히를 찾아왔고, 그의 통치가 콘스탄티노플까지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었다. 875년 8월 루트비히 2세 황제가 사망한 후, 루트비히는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위해 황제 자리를 얻으려고 했다. 이를 위해 풀다 수도원의 지기하르트 수도원장이 로마로 가서 요한 8세 교황을 만나는 여행을 떠났다. 5월 18일 잉겔하임으로 돌아온 그는 루트비히에게 875년 12월 샤를 대머리가 로마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황제 칭호를 얻었다고 보고했다.
그의 아내 헤마는 875년 5월 루트비히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그녀는 874년에 뇌졸중으로 목소리를 잃었다. 머무는 동안 그는 자신이 건설한 마리아 예배당에 도나우가우 산 수도원을 기증했다.[5] 헤마는 876년 1월 말 레겐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 그 후 루트비히는 짧은 병을 앓다가 876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의 궁전에서 사망했다. 다음 날 그의 아들 루트비히에 의해 로르슈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빌프리드 하르트만에 따르면, 그의 석관에 있는 시체가 카롤링거 왕인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다. 루트비히 사후 샤를 대머리는 동부 왕국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젊은이는 876년 10월 8일 안데르나흐에서 프랑크족, 색슨족, 투링겐족으로 구성된 부대로 그를 물리쳤다. 1년 후 샤를 대머리 또한 사망했다.
2. 4. 사후
869년 로타르 2세가 사망했을 때 루트비히 2세는 전신마비로 움직일 수 없었다.[9] 같은 해 샤를 2세가 로타링기아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870년 루트비히 2세는 로타링기아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 메르센 조약을 맺어 아헨과 메츠를 포함한 로타링기아 동부를 획득했다.[10]875년 루트비히 2세는 사후 세 아들에 대한 유산 분할 상속을 결정, 장남 카를만을 바이에른에, 차남 루트비히를 프랑켄, 튀링겐, 작센에, 삼남 카를을 알레마니아(슈바벤)의 부왕으로 삼았다.
876년 루트비히 2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73세로 사망하여 로르슈 수도원에 매장되었다.[10] 그의 아내 헤마는 875년 5월 루트비히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는데, 874년에 뇌졸중으로 목소리를 잃은 상태였다. 헤마는 876년 1월 말 레겐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 루트비히 2세는 짧은 병을 앓다가 876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의 궁전에서 사망했고, 다음 날 아들 루트비히에 의해 로르슈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유산은 875년 결정에 따라 세 아들이 분할 상속받았다.
루트비히 2세 사후 샤를 대머리는 동부 왕국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청년왕은 876년 10월 8일 안데르나흐에서 프랑크족, 작센족, 튀링겐족으로 구성된 부대로 그를 물리쳤다. 1년 후 샤를 대머리 또한 사망했다.
3. 가계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의 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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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및 조부모 | 조부: 샤를마뉴 | |
부: 경건왕 루트비히 | ||
모: 히스베니아의 에멩가르데(이르멘가르트), 히스베니아의 공작 잉게르만의 딸 | ||
서모: 바이에른의 유디트, 왕비 엠마 폰 바이에른의 친언니 | ||
외조부: 잉게르만, 히스파니아의 백작, 고조할머니 로트루드의 친정 조카 | ||
장인: 바이에른 공작 구엘프(Guelf I) | ||
장모: 헤드비가 | ||
왕후: 엠마 폰 바이에른(Emma von Bavaria, 802년 ~ 876년 1월 31일) | ||
형제 자매 | ||
형 | 로타르 1세(795년~855년): 중프랑크 왕(818~855), 신성로마황제(840~855) | |
페펭(797년~838년) : 아키텐의 왕, “피핀”이라고도 부른다. | ||
대머리 카를, 카롤루스 2세(823~877) : 서프랑크 왕(840~877), 신성로마황제(875~877) | ||
누나 | 아델라이드(799년 출생), 느스트리 백작 로베르 르 포르에게 시집감, 로베르 1세와 외드 형제의 생모 | |
로트루드 (800년 출생) | ||
힐데가르트 (802년 출생) | ||
자녀 | ||
자녀 | 힐데가르트(Hildegard, 828년 ~ 859년) | |
바이에른의 카를만(829 ~ 880) : 바이에른의 공작(876~880), 이탈리아의 왕(877~880) | ||
루트비히 3세, 소 루트비히(830 ~ 882) : 동프랑크의 왕, 작센의 왕(876~882)과 바이에른의 왕(880~882) | ||
카를 3세, 뚱보왕(비만왕) 카를(839~888) : 독일왕, 이탈리아왕, 프랑스왕, 신성로마황제(881~888) | ||
이르멘가르트(Irmangard, 830년 - 886년 7월 16일), 소 루트비히 2세, 일명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와 결혼 | ||
기셀라(Gisela of Franks), 슈바벤의 베르크톨드(Berchtold) 또는 베르톨(Berthold, 841 ~ 912?)와 결혼, 슈바벤 팔라틴백작 | ||
베르타(Bertha, ? - 877년 3월 26일) |
4. 기타
8월 28일 아들 소 루트비히에 의해 로르쉬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1920년 로르쉬 수도원에서 그의 석관이 발견되었을 때 그의 시신은 분실된 상태였다.[21] 1800년 무렵 로르쉬 수도원의 토굴에서 발견된 석관 중 하나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석관으로 명명되었다. 이 석관은 로르쉬 수도원 내 카롤루스 왕조 당시 건설된 토할레 로르쉬 건물 맞은 편에 있는 선거의 집(Kurfürstlichen Haus)에 전시되어 있다.[21]
독일인 루트비히는 당대에 자신의 영토에서 피우스(pius, 경건한) 또는 매우 경건하다는 뜻의 피시무스(piissimus)라는 별명을 얻었다.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그를 게르마니아의 왕 루트비히(Ludwig rex Germaniae) 또는 게르만의 왕(rex Germanorum)으로 불렀는데, 후대에 와서 독일인, 게르만이라는 별칭이 그의 별칭으로 굳어졌다.[21] 독일사와 오스트리아사에서는 루트비히를 독일 혹은 오스트리아의 첫 군주로 간주한다.[21]
프랑크 제국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통일이 깨질 정도로 동쪽으로 확장되었다.[21] 한편 독일, 오스트리아의 첫 번째 군주로 루트비히 2세를 보는 설과, 독일은 하인리히 1세, 오스트리아는 후작 레오폴트 1세를 첫 번째 군주로 보는 설이 있다.[21] 그의 혈통을 이은 이탈리아의 왕으로는 카를로만 3세, 카를 3세, 아르눌프, 라톨드, 루트비히 맹인왕 등이 있다. 맹인왕 루트비히는 그의 딸 이르멘가르트의 외손자가 된다.[21]
독일인 루트비히(Ludwig der Deutsche, 또는 Louis the German)라는 별칭은 그의 사후에 붙여진 별칭이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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