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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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정치가이다. 그는 비교적 덜 알려진 귀족 가문 출신으로, 기원전 87년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나, 동료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의 갈등으로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연합하여 로마로 진군, 옥타비우스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킨나는 4번의 집정관을 역임하며 술라의 귀환에 대비했으나, 기원전 84년 군대의 반란으로 사망했다. 킨나는 정치적 숙청을 자행하고, 이탈리아 시민권 문제에 관여했으며, 그의 통치는 공화정의 원칙을 훼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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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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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로마자 표기 | Lucius Cornelius Cinna |
출생 | 기원전 132년경 |
사망 | 기원전 84년 |
사망 장소 | 안코나, 이탈리아 |
사망 원인 | 반란으로 사망 |
직업 | 정치인, 군인 |
가족 | |
배우자 | 안니아 |
자녀 | 코르넬리아 (카이사르의 아내) 코르넬리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정치 경력 | |
관직 | 집정관 (기원전 87년–84년) |
군사 경력 | |
참전 전쟁 | 사회 전쟁 옥타비아누스 내전 (기원전 87년) 술라 내전 |
가문 | |
씨족 | 코르넬리우스 씨족 |
출신 계급 | 파트리키 |
기타 정보 | |
법무관 | 기원전 90년 이전 |
레가투스 | 기원전 90년? ~ 88년 |
2. 초기 생애와 가문
킨나는 기원전 130년경 이전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1] 테오도어 몸젠은 코르넬리우스 킨나 가문을 평민으로 여겼지만, 현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들을 귀족으로 간주한다. 그의 아버지는 기원전 127년에 집정관을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2]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민중의 반응을 의식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던 킨나에게 자신의 정책을 계속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집정관으로 선출하는 것을 허락했다. 킨나는 돌을 들고 맹세하며, 이 맹세를 어기면 로마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말하며 돌을 연단에서 던졌다. 그러나 취임하자마자 호민관 빌기니우스를 시켜 술라를 고발하게 했다. 술라는 이를 무시하고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으로 향했다[14]。
킨나는 안니아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두 딸과 동명의 아들 한 명을 두었다. 그의 장녀 코르넬리아는 킨나가 두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하던 기원전 86년경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했으며, 차녀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했다. 킨나의 아들은 술라의 내전 이후, 킨나의 군단 중 한 명이었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에게 도망쳐 술라의 보복을 피했으며, 이후 ''플라우티아 법''에 의해 사면을 받고 로마로 돌아와 기원전 44년에 법무관이 되었다.
킨나는 기원전 90년 이전에 법무관을 지냈으며, 사회 전쟁에도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T.R.S. 브로턴은 킨나가 기원전 89년 전쟁 중 마르시족에 대한 로마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끈 군단 중 한 명이었다고 추정했다.[4] 그는 스트라보 휘하에서 레가투스를 역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메텔루스 피우스와 함께 여러 차례 마르시족을 상대로 승리하여 강화 조약을 맺은 기록이 남아 있다.[13]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내가 되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유일한 공식적인 친자식인 율리아가 태어났다.
3. 첫 번째 집정관직 (기원전 87년)
동맹시 전쟁 결과, 포강 이남의 모든 자유인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지만, 이들을 어떤 트리부스 (선거구)에 등록할지는 미해결 상태였다. 킨나는 신시민을 전체 35 트리부스에 등록하는 법안(Rogatio Cornelia de novis civibus)을 제출했고, 이 때문에 동료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다투게 되었다[15]。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망명에서 불러들이는 법(Lex Cornelia de exulibus revocandis)을 통과시켰지만, 킨나 지지 세력과 옥타비우스 지지 세력 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옥타비우스는 군사를 이끌고 이를 제압했고, 킨나는 로마에서 추방되었다[16]。 원로원은 그를 해임하고, 보충 집정관으로 메룰라를 선출했다. 키케로는 이후 킨나의 행동에 합법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
3. 1. 선출 배경
기원전 88년, 로마는 이탈리아 문제와 폰토스 왕국과의 전쟁 지휘권 문제라는 두 가지 주요 정치적 문제에 직면했다. 사회 전쟁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동맹국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지만, 이들을 어떻게 투표 단위인 부족에 등록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평민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이들을 35개 부족에 동등하게 등록하려 했으나, 기존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한편, 폰토스 왕국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가 아시아 속주를 침략하면서, 로마의 대응 지휘관 자리를 두고 경쟁이 벌어졌다.
술피키우스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지휘권을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대가로, 마리우스가 이탈리아인 등록을 지지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두 문제를 연결하려 했다.[5] 그러나 술라는 군대를 매수하여 로마로 진군해 술피키우스의 행동을 뒤집고, 술피키우스와 마리우스를 포함한 12명을 추방했다. 술라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로마 헌법을 변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을 수도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술라의 후기 행동을 소급 적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술라의 로마 진군은 선거에서 큰 반발을 샀다.
킨나는 술라가 로마 진군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집정관직에 도전했다. 그는 선출되면 임기가 만료될 때 술라를 기소하겠다고 약속했다. 술라는 킨나 대신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를 내세웠지만, 민회(콤미티아)는 술라의 후보를 거부하고 킨나를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함께 선출했다. 술라는 킨나와 옥타비우스에게 자신의 조치를 뒤집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지만, 킨나는 이 맹세를 어길 생각이었다.
기원전 87년, 술라는 킨나에게 자신의 정책을 계속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집정관으로 선출하는 것을 허락했다. 킨나는 맹세를 어기면 로마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말하며 돌을 던지는 맹세를 했지만, 취임하자마자 호민관을 시켜 술라를 고발하게 했다.[14]
3. 2. 옥타비우스와의 전쟁
기원전 87년, 술라는 민중의 반발을 의식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던 킨나에게 자신의 정책을 계속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집정관으로 선출되는 것을 허락했다. 킨나는 맹세를 어기면 로마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말하며 돌을 던지는 맹세를 했지만, 취임하자마자 호민관을 시켜 술라를 고발하게 했다. 술라는 이를 무시하고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참전했다.[14]
동맹시 전쟁의 결과, 포강 이남의 모든 자유인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지만, 이들을 어떤 트리부스 (선거구)에 등록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킨나는 신시민을 35개 트리부스에 등록하는 법안(Rogatio Cornelia de novis civibus)을 제출했고, 이 때문에 동료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갈등을 빚었다.[15] 또한 마리우스를 망명에서 복귀시키는 법(Lex Cornelia de exulibus revocandis)을 통과시켰지만, 킨나를 지지하는 신시민과 옥타비우스를 지지하는 구시민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옥타비우스는 군사를 동원해 이를 제압했고, 킨나는 로마에서 추방되었다.[16] 원로원은 킨나를 해임하고 메룰라를 보충 집정관으로 선출했다.[16]
로마를 탈출한 킨나는 노예에게 자유를 약속하며 아군으로 만들려 했지만 실패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등이 킨나에게 합류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킨나는 카푸아에 주둔한 군대 앞에서 원로원의 위법성을 호소했고, 병사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킨나는 동맹 도시를 돌며 자신이 신시민을 위해 트리부스에 등록하려 했기 때문에 해임된 것이라고 호소하며 지원을 모았고, 이에 동조하는 원로원 의원들도 합류했다. 한편 옥타비우스는 스트라보를 불러들여 로마의 방비를 강화했다.[17]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킨나는 놀라를 포위하고 있던 풀케르 지휘하의 군대를 매수하고, 북아프리카에서 마리우스를 불러들여 로마로 진군했다. 집정관 측의 대응이 늦어 킨나와 마리우스는 우위를 점했고, 카르보 등에게 군단을 지휘하게 하여 로마를 포위했다.[18] 마리우스는 에트루리아에서 6,000명을 모아 킨나와 합류했다.[19] 옥타비우스는 사무니움과 싸우던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강화를 명령하고 구원을 요청했지만, 피우스는 사무니움 측의 조건을 거부했다. 마리우스는 조건을 모두 수용하겠다고 약속하고 사무니움을 아군으로 만들었다. 마리우스·킨나 군은 야니쿨룸을 공격했지만 옥타비우스와 스트라보에게 패배했다. 스트라보 진영에 낙뢰가 떨어져 스트라보를 포함한 몇몇이 감전사했다고 전해지지만, 스트라보의 사인은 병사였다는 설도 있다.[20]
마리우스는 로마를 식량으로 압박했고, 주변의 식민시를 잇따라 함락시켰다. 원로원은 학살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항복을 제의했고, 킨나는 로마 시민의 안전을 약속했지만, 이를 보증하는 선서는 거부했다. 로마 입성 후 옥타비우스를 살해하고 그 머리를 로스트라에 내걸었다.[22] 마리우스와 킨나는 로마를 약탈하고,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카이사르 형제 등 반대파를 숙청했다. 그리고 마리우스와 킨나는 선거 없이 다음 해 집정관에 취임했다.[23] 기원전 88년에 제정된 술라의 코르넬리우스 법은 모두 폐기되었고, 술라파는 사형에 처해졌으며, 술라의 재산은 몰수되고 그는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었다.[24]
3. 2. 1. 추방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킨나는 새로운 이탈리아 시민들을 35개 부족에 동등하게 등록하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뇌물을 받았다고 한다. 뇌물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킨나는 그러한 등록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이는 즉시 그의 동료 집정관 옥타비우스와 갈등을 일으켰다. 킨나와 옥타비우스의 지지자들은 즉시 무장했다. 새로운 시민들을 부족에 분배하기 위한 킨나의 법안 제정 시도는 옥타비우스가 지원하는 재판관의 거부권에 의해 저지되었고, 이는 재판관들에 대한 폭동으로 이어졌다.[7] 그 후 폭도들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되었을 수 있다. 옥타비우스는 즉시 이를 실행하여 급하게 무장한 지지자들을 이끌고 사크라 가도를 내려가 폭도들을 살해했다.[7]
킨나는 무사했고,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가이우스 밀로니우스, 마르쿠스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 그리고 10명의 평민 재판관 중 6명을 포함한 주요 지지자들과 함께 도시를 떠났다. 그가 군대와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이탈리아 도시로 떠난 후, 원로원은 불법적으로 그리고 위헌적으로 킨나의 집정관 직을 박탈하고 그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호스티스'')했으며, 그의 자리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를 선출했다.[7]
기원전 87년, 킨나는 동료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신시민을 전체 35 트리부스에 등록하는 법안 문제로 다투게 되었다.[15] 또한, 마리우스를 망명에서 불러들이는 법(Lex Cornelia de exulibus revocandis)을 통과시켰지만, 킨나를 지지하는 신시민과 옥타비우스를 지지하는 구시민 사이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옥타비우스는 군사를 이끌고 이를 제압했고, 킨나는 로마에서 추방되었다.[16] 원로원은 그를 해임하고, 보충 집정관으로 메룰라가 선출되었다.[16]
3. 2. 2. 로마 진군
킨나는 평민 재판관에게 술라를 술피키우스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도록 지시했다. 술피키우스는 당시 신성한 평민 재판관으로 복무 중이었다.[7] 이는 술라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떠나는 것을 막고, 그의 임페리움을 박탈하며, 미트리다테스 지휘권을 빼앗기 위한 것이었으나, 시행 불가능했다. 술라는 재판관의 소환을 무시하고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떠났다.[14]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킨나는 새로운 이탈리아 시민들을 35개 부족에 동등하게 등록하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뇌물을 받았다고 한다. 킨나는 그러한 등록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이는 동료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갈등을 일으켰다. 킨나와 옥타비우스의 지지자들은 무장했고, 킨나의 법안 제정 시도는 옥타비우스가 지원하는 재판관의 거부권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이는 재판관들에 대한 폭동으로 이어졌다. 그 후 폭도들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되었을 수 있다. 옥타비우스는 급하게 무장한 지지자들을 이끌고 사크라 가도를 내려가 폭도들을 살해했다.[15] 아피아노스는 Ῥωμαϊκὴ Ἱστορία|로마사|로마사grc 1.65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 "시민 여러분, 저의 권한은 여러분에게서 받은 것이며, 이는 시민들의 투표로 승인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원로원은 여러분과 상의 없이 그 권한을 박탈했습니다. 그 어리석은 행위에 저는 괴로워하고, 여러분을 위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과연 앞으로의 민회에서 트리부스의 의사가 고려될까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부여한 권한을 그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그것이 뒤집힌다면 민회, 투표, 집정관의 선출에서 앞으로 여러분의 권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킨나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가이우스 밀로니우스, 마르쿠스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 등 주요 지지자들과 함께 도시를 떠났다. 그가 군대와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이탈리아 도시로 떠난 후, 원로는 킨나의 집정관 직을 박탈하고 그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호스티스'')했으며, 그의 자리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를 선출했다.[7] 킨나는 로마 포위 공격에도 저항하고 있던 이탈리아 도시 놀라에 도착하여, 그곳에 주둔한 군대 앞에서 집정관 예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는 자신을 원로원이 민중의 선물을 부당하게 빼앗아 민중 주권을 조롱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집정관이라고 말했다. 군대는 그를 추대하고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킨나는 장교와 사병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은 후 이탈리아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지지가 필요하며 친이탈리아 옹호로 공격받았다고 말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술라의 망명자 중 한 명으로 이탈리아로 돌아와 킨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킨나는 마리우스를 전직 집정관으로 인정했지만, 마리우스는 이탈리아인들의 지지를 얻기 전에 그 칭호를 정중히 거부하고 약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킨나의 진영으로 돌아왔다.[19] 원로원과 옥타비우스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에게 로마로 돌아와 그의 군대로 도시를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도시 외곽에 진을 치고 있던 그는 양쪽 모두와 교섭하기 전에는 어느 쪽에도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후 킨나의 군대가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그는 콜리네 문 맞은편에서 주력을 이끌었고, 세르토리우스와 마리우스가 각각 도시 북쪽과 남쪽에 2개 부대를 배치했다. 스트라보는 결국 옥타비우스 편에 섰고, 원로원은 지원을 구하며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즉시 명예로운 평화를 맺고 도시를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메텔루스가 삼니움족과 협상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과 그들에게 도망온 모든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모든 전쟁 포로를 석방하고, 모든 약탈물을 상호 반환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메텔루스와 원로원은 거절했고, 킨나와 마리우스는 기회를 잡아 양보를 제안하여 삼니움족을 동맹으로 만들었다. 로마의 한 군사 호민관이 탈주하여 자니쿨룸의 문을 열자, 킨나와 마리우스의 군대는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했지만, 스트라보의 군대 6개 코호트에 의해 저지당했다. 스트라보는 자신의 군사력을 두 번째 집정관직으로 이용하려 했고 킨나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지만 곧 역병으로 사망했다. 포위 공격을 연장하면서, 킨나의 군대는 시골로 흩어져 로마의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원로원은 킨나에게 휴전을 협상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처음에는 킨나가 자신을 집정관으로 불러달라고 요구하여 거절했지만, 메룰라가 집정관직에서 물러난 후 원로원은 이 점에 동의했다.
마리우스는 로마를 병량으로 공략했고, 주변의 식민시를 잇따라 함락시켰기에, 원로원은 학살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고 항복을 제의했다. 이를 전달하는 사자에게 킨나는 집정관의 증표인 세라 쿨리스에 앉아 로마 시민의 안전을 약속했지만, 이를 보증하는 선서는 거부했다. 로마 입성 후 옥타비우스를 살해하고 그 머리를 검토한 뒤, 로스트라에 내걸었다.[22] 마리우스와 킨나는 로마를 약탈하고,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카이사르 형제 등 반대파를 숙청했다. 그리고 마리우스와 킨나는 선거 없이 다음 해 집정관에 취임했다.[23] 기원전 88년에 제정된 술라의 코르넬리우스 법은 모두 뒤집혔고, 술라파를 사형에 처했으며, 술라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를 국가의 적으로 삼았다.[24]
3. 2. 3. 불법적인 살인
킨나와 마리우스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는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및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재판 없이 살해되었다.[8] 최근에 사임한 보궐 집정관 메룰라와 마리우스의 오랜 라이벌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각각 집정관직 찬탈과 반역죄로 기소되어 민중 앞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판결이 나기 전에 자살했다.[8]
이러한 살인은 정치 계급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리우스의 개인적인 원한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희생자들은 당시 술라와 연관되어 있지 않았다.[8] 숙청이 희생자의 가족을 대상으로 했다는 증거는 없다.[9] 디오, 벨레이우스, 리비우스, 디오도로스, 플루타르코스와 같은 후대의 자료들은 킨나와 마리우스가 5일 동안 도시를 학살하고 약탈했다고 주장했지만,[9] 이러한 주장은 술라의 회고록을 통해 걸러진 술라의 선전일 가능성이 높다. 키케로는 킨나 치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직접 말하면서 킨나와 마리우스는 오직 정치적 적대자만을 대상으로 삼았고, 로마의 모든 주민을 위협하거나 도시를 약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4. 킨나의 지배와 죽음 (기원전 86-84년)
그는 도시로 돌아와 공공 업무를 장악하고 술라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했다. 술라는 ''호스티스''(공적)로 선언되고 사제직을 박탈당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그의 집은 철거되었으며, 그의 법률은 폐지되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그리스에 있는 술라 군대의 보호를 위해 도시를 탈출했다.[27] 기원전 87년 말 선거에서, 킨나는 자신과 마리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일부 고대 자료와는 달리, 선거 민회는 열렸을 가능성이 높고, 둘만이 유일한 후보였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일곱 번째 집정관직을 맡은 지 불과 13일 만인 기원전 86년 1월 13일에 폐렴으로 사망했다.[23] 마리우스 대신 킨나는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2월 5일에 보충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86년 동안, 인구 조사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에 의해 실시되었다. 킨나는 이탈리아인들의 시민권 등록을 지지했지만, 그 해에 집계된 인원 - 불과 463,000명 -은 새로 시민권을 얻은 이탈리아인들 대부분이 아직 등록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킨나의 공동 집정관인 플라쿠스는 또한 모든 미결 채무를 4분의 3으로 줄이는 법안을 가져와 통과시켰다.
그 해 말에, 플라쿠스는 표면적으로는 지휘관 없는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그리스로 떠났다. 술라의 지휘는 그가 무법자로 선언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해임되었지만, 플라쿠스는 곧 그의 부관 중 한 명인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에 의해 암살당했고, 핌브리아가 지휘권을 넘겨받았다.[26] 술라는 결국 미트리다테스를 아시아에서 몰아내고 폰투스에 관대한 조건으로 다르다노스 조약을 맺어 기원전 85년에 평화를 확보했다. 그는 또한 동방에서 핌브리아의 군대를 매수하여 핌브리아가 자살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85년에 킨나는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를 그의 집정관 동료로 선택했다. 폰투스와의 술라의 평화는 술라가 이탈리아의 적들을 상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관대하게 여겨졌고, 아시아에서의 다른 행동들은 그가 무장한 채로 돌아올 것임을 나타냈다. 킨나와 카르보는 즉시 군사적 준비와 선전 캠페인을 시작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돈과 물자를 비축하는 동시에 병력을 징집하고, 승리할 경우 술라가 이탈리아 시민권을 뒤엎을 것이라는 경고를 했다. 88년에 술피키우스에 대한 술라의 폭력적인 행동을 고려할 때, 이러한 경고는 정당한 것으로 보였다.
기원전 85년 말에, 술라는 로마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의 자신의 업적을 열거하고 로마 정권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살해된 친구, 추방된 가족, 로마의 이름을 걸고 적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킨나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는 또한 이탈리아 시민권을 뒤엎을 의사가 없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술라와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술라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여 편지에 응답했다. 원로원은 또한 킨나와 카르보에게 군사적 준비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지만 원로원을 무시하고 징집을 계속했다. 킨나의 전략은 그리스 동쪽으로 진격하여 그곳에서 술라와 싸우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킨나와 카르보는 기원전 84년에도 집정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그 해 초에 킨나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병사들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현대 자료들은 그의 최종 목적지에 대해 의견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T. R. S. 브라우턴은 에피루스라고 말한다. 에른스트 바디안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키나가 아드리아 해 북부에 있는 리부르니아로 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키나가 그리스에서 술라에게 도전할 의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아드리아 해를 건너는 과정에서, 첫 번째 선단은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두 번째 선단은 폭풍을 만났다. 일부 배는 침몰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료 시민들과 싸우는 것을 꺼린다고 말하며 탈영했다. 안코나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탑승을 거부했다.
아피아누스는 킨나가 회의를 소집했을 때, 그는 규율을 강요하려 했고, 결국 그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살해했다고 보고한다.[27] 플루타르코스는 당시 젊었던 폼페이우스를 킨나가 암살했다고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중심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 이때 킨나는 새로운 시민들에게 그들의 대변자임을 강조하며 지원을 호소했다.[28] 킨나는 겨울의 거친 아드리아 해를 횡단하여 일리리아로 향하도록 명령했고, 전 동료들과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병사들은 안코나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사망했으며, 일설에는 자신을 사로잡은 백인대장에게 집정관 반지를 내밀며 목숨을 구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살해당했다고도 한다.[29][30]
그의 사망 후, 그의 공동 집정관 카르보는 로마로 소환되어 그의 후임자를 위한 선거를 치렀지만, 선거를 두 번 시도한 후 흉조가 나타나 선거는 무기한 연기되었고, 카르보는 그 해 나머지 기간 동안 동료 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남겨진 카르보는 전 이탈리아 도시에서 인질 공출을 요구했다.[27]
원로원의 사절단은 킨나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술라에게 전했다. 술라는 원로원의 제안을 거부하고, 군대를 해산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원로원이 그의 법적 지위, 재산 및 관직을 회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술라의 조건 거부는 좋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술라는 기원전 83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이듬해 술라의 내전을 일으켰고, 그는 결국 승리했다.
모음젠은 킨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공포 정치와 함께 전제 정치가 막을 열었다. 킨나는 4년(기원전 87-기원전 84년) 연속으로 집정관의 지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무시하고 매번 자신과 동료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것은 마치 이 민주정 지지자들이 최고 결정권을 가진 민회를 명백한 모욕으로 구석으로 몰아넣은 것 같았다. 후에도 전에도, 이탈리아에서든 많은 속주에서든, 킨나만큼 장기적인 흔들림 없는 절대적이고 안정적인 권력을 얻은 민중파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5. 평가
킨나에 대한 평가는 자료 부족과 술라의 왜곡된 시각 때문에 명확하지 않다. 초기 학계와 고대 기록은 킨나를 마리우스의 부속물로 묘사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평가가 대부분 부정되고 있다. 킨나는 포풀라리스 스타일의 논쟁에 능숙했지만, 공화국의 구조적 결함에 대한 진단은 부족했다.
킨나는 무력을 정치적 지배로 전환한 최초의 인물로, 그의 방식은 공화정 원칙에 부합하지 않았으며, 이후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에게 선례를 남겼다.
몸젠은 킨나를 저속하고 이기적이며 정치적 신념이 부족한 인물로 평가했지만, 최근에는 그의 수완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이탈리아 통일에서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마리우스가 주도한 것으로 여겨지는 숙청에서 킨나가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킨나의 집정관 독점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정치 계급은 대체로 위협받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킨나는 이탈리아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35개 부족 간에 분배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이는 기회주의적인 면모였으며, 권력을 잡은 후에는 이탈리아인에 대한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기원전 86년 마리우스와 함께한 초기 살해 이후, 초법적인 박해는 없었다. 킨나의 통치 기간 동안 정치는 비교적 전통적이었지만, 집정관과 원로원은 주로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서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위 섹션인 '신 시민의 트리부스 등록 문제'에서 킨나가 이 문제에 진지하게 임했다고 언급되지만, 이는 상위 섹션에서 킨나가 이탈리아인에 대한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내용과 모순되므로 삭제했다.
5. 1. 신 시민의 트리부스 등록 문제
킨나가 로마를 지배했던 기원전 86년, 켄수스(국세 조사)가 행해졌다. 이 켄수스에서 각 시민은 자산의 소재지에 따라 각 트리부스에 등록되었고, 자산의 액수에 따라 켄투리아 민회에서의 클라시스(계급)가 결정되었다. 리비우스의 개요에 따르면, 기원전 87년에 원로는 모든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23] . 기원전 89년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법 통과 후 항복한 사람들에게도 킨나파로 돌아가지 않도록 시민권이 부여되었고, 킨나의 로마 지배 이후 약속에 따라 삼니움에도 시민권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다만, 기원전 86년 켄수스 시점의 시민 수는 약 46만 명으로, 이전 기원전 115년 켄수스에서 7만 명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이는 켄수스가 지방 도시에서 실시되고 그 결과가 로마에서 집계되었는데, 이 집계가 제때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신 시민의 트리부스 문제는 기원전 87년 혹은 기원전 84년에 해결된 것으로 여겨지며, 킨나는 동맹시 전쟁의 결과로 발생한 이 문제에 적어도 진지하게 임했다고 할 수 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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