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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싸 해전 (18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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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싸 해전 (1866년)은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이탈리아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간에 벌어진 해전이다. 이탈리아는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베네치아를 탈환하려 했으나, 해군력의 열세와 지휘 체계의 혼란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해군에 패배했다. 오스트리아 해군은 윌헬름 폰 테게토프 제독의 지휘 아래 충각 전술을 활용하여 승리했고, 테게토프는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이탈리아 해군의 지휘관은 무능함으로 비판받고 퇴역했다. 이 해전은 충각 전술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으나, 이후 함포 기술의 발전으로 그 중요성이 감소했다. 오스트리아는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할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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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싸 해전 (1866년)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Carl Frederik Sørensen의
칼 프레데리크 소렌센의 "리사 해전"
분쟁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날짜1866년 7월 20일
장소비스 섬 (리사 섬) 앞바다, 아드리아 해
결과오스트리아의 승리
관련 항목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교전 세력
교전국 1오스트리아 제국
교전국 2이탈리아 왕국
지휘관 1빌헬름 폰 테게토프
지휘관 2카를로 펠리온 디 페르사노
병력 규모
오스트리아 제국26척:
장갑함 4척
장갑 프리깃함 3척
전열함 1척
스크류 프리깃함 5척
스크류 코르벳함 1척
스크류 포함 2척
포함 6척
스크류 텐더 1척
증기선 3척
이탈리아 왕국32척:
장갑함 9척
장갑 프리깃함 1척
장갑 코르벳함 2척
스크류 프리깃함 7척
스크류 코르벳함 1척
외륜 코르벳함 2척
슬루프 1척
포함 3척
통보함 2척
상선 4척
피해 규모
오스트리아 제국사망 및 부상 176명
이탈리아 왕국사망 및 부상 660명, 장갑함 2척 침몰

2. 역사적 배경

리싸 해전은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일부로 발발했으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당시 통일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탈리아 왕국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과거 빈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 제국에 넘어갔던 구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특히 베네치아 지역의 탈환을 목표로 삼았다.[19]

그러나 1861년 통일 이후 불과 5년 만에 치르는 전쟁이었기에, 이탈리아 왕국은 여러 내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통일 이전 각국 군대의 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과 전직 장병 처우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아 군 내부가 혼란스러웠다. 특히 육군에서는 구 양시칠리아 왕국 출신 병사들이 사르데냐 왕국 출신 지휘관들에게 지휘받는 것에 대한 불만이 컸다. 이러한 내부 문제와 지휘 체계의 미비는 전장에서 약점으로 작용하여,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 원수가 이끄는 육군 주력 부대는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큰 패배를 당했다.

육군의 부진 속에서 1866년 7월, 동맹국 프로이센이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고무된 이탈리아 정부는 전황 타개를 위해 해군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명령했고, 1866년 7월 15일 이탈리아 함대는 안코나 항구를 출격했다. 하지만 해군 역시 육군과 마찬가지로 지휘관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과 불안정한 지휘 체계 문제를 안고 있었다.[3]

당시 아드리아해의 제해권은 오스트리아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해전의 무대가 된 비스 섬(리싸) 역시 오스트리아의 통제 하에 있었다.[3] 이처럼 이탈리아는 내부적인 혼란과 준비 부족 속에서 해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2. 1.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리사 해전

리싸 해전은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일부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연계되어 발발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서 싸웠다.[3] 이탈리아의 주요 목표는 과거 빈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에 넘어갔던 구 베니스 공화국 영토, 특히 베네치아와 최소한 베네토 지역 일부를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된 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은 이탈리아 왕국군은 여러 내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구 국가들 군대의 통합 과정이 미숙했고, 특히 육군 내에서는 구 양시칠리아 왕국 출신 병사들이 변방 소국이었던 사르데냐 왕국 출신 장교들의 지휘를 받는 것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내부 혼란과 지휘 체계의 미비는 전장에서 약점으로 작용했다.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 원수가 이끄는 이탈리아 육군 주력 부대는 오스트리아군과의 쿠스토차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비록 영웅 가리발디가 이끄는 알프스 군단이 베체카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인 전황은 이탈리아에게 불리했다.

그러던 중 1866년 7월, 동맹국 프로이센이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고무된 이탈리아 정부는 전황 타개를 위해 해군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명령했고, 1866년 7월 15일 이탈리아 함대는 안코나 항구를 출격했다. 하지만 해군 역시 육군과 마찬가지로 지휘관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과 불안정한 지휘 체계 문제를 안고 있었다.

양측 함대의 전력을 비교하면, 이탈리아 함대는 철갑함 12척과 비장갑 함선(통상파괴선 포함) 17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오스트리아 함대는 철갑함 7척과 비장갑 함선 11척을 보유했다.[3] 이탈리아는 함포 수(276문 대 121문)와 함선 총 톤수(53,236톤 대 23,538톤)에서도 오스트리아를 압도했다.[3][20] 특히 이탈리아 함대에는 당시 최신 함선이자 전투에 참여한 유일한 포탑선인 ''Affondatore''가 포함되어 있었다.[3] 이탈리아 함대는 60세의 피에몬테 백작 카를로 디 페르사노 제독이 지휘했고, 오스트리아 함대는 39세의 젊은 제독 빌헬름 폰 테겟호프 백작이 이끌었다. 비스 섬의 요새는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루마니아계 대령 다비드 우르스 데 마르기나가 지휘했다.[3]

오스트리아는 당시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세 개의 부대로 나뉘어 V자 대형(화살촉 대형)을 이루며 접근했다. 테겟호프 제독 휘하의 장갑함 제1부대가 선두에 섰고, ''코모도르'' 페츠 소장이 이끄는 강력하지만 구식인 비장갑 목조 전열함 SMS Kaiser와 5척의 프리깃함으로 구성된 제2부대가 중앙에 위치했으며, 소형 스크루 포탄과 무장 상선으로 구성된 제3부대가 후방을 따랐다. 무장 상선 순양함 ''스타디온''은 함대 앞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화력이 약했던 오스트리아 함대는 신속하게 접근하여 근접 사격과 충각 전술을 이용한 백병전을 벌여 이탈리아 함대의 일부를 격침시키고 전투 의지를 꺾으려 했다.[3]

반면, 수적 우세를 지닌 이탈리아 함대는 전투 준비가 미흡했다. 오스트리아 함대가 출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이탈리아 함대는 비스 섬 상륙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페르사노 제독은 급히 상륙을 취소하고 함대에 횡열 대형을 명령했다가, 다시 이를 취소하고 범선 시대의 전술과 유사한 전열 대형(종열 대형)으로 세 부대로 나누라고 명령하여 혼란을 야기했다.[3] 바카 제독 휘하의 제1부대(프린치페 디 카리냐노, 카스텔피다르도, 안코나), 파 디 브루노 대령이 지휘하는 제2부대(레 디탈리아, 팔레스트로, 산 마르티노), 그리고 아우구스토 리보티 선장이 지휘하는 제3부대(레 디 포르토갈로, 레지나 마리아 피아, ''Varese'')로 총 11척의 철갑함이 전열을 이루었다. 다른 목조 함선들은 전투 대열에 분산되었고, 예외적으로 ''Affondatore''는 제2전대의 반대편에 위치하여 전투 대열에서 벗어나 있었다. 페르사노는 이를 예비대로 의도했을 수 있다.[3] 전투 직전 페르사노 제독은 자신의 기함을 기존의 ''레 디탈리아''에서 ''Affondatore''로 옮겼는데, 이 과정에서 기함 변경 신호를 제대로 보내지 않아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레 디탈리아''가 제독을 내리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동안, 선두 부대는 계속 전진하여 이탈리아 함대 전열에 틈이 벌어졌다. 결국 전투 내내 이탈리아 함대는 ''Affondatore''가 아닌 구 기함 ''레 디탈리아''를 제독의 기함으로 인식하고 명령을 기다리는 상황에 처했다.[3]

2. 2. 양국 해군의 상황

리싸 해전은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일부로, 이탈리아 왕국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오스트리아 제국과 맞선 해전이다. 이탈리아의 주요 목표는 빈 회의 결과 오스트리아에 할양되었던 옛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특히 베네치아 지역을 되찾는 것이었다.[19]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1861년 통일 이후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아 여러 내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통일 이전에 존재했던 여러 국가의 군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고, 특히 육군 내에서는 구 양시칠리아 왕국 출신 병사들이 사르데냐 왕국 출신 지휘관들에게 지휘받는 것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이러한 혼란은 해군도 마찬가지여서, 지휘관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과 지휘 체계의 미비 문제가 존재했다. 육군 주력이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하는 등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탈리아 정부는 해군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명령했고, 1866년 7월 15일 이탈리아 해군 함대는 안코나에서 출격했다.

양측 함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이 비교될 수 있다.

구분이탈리아 해군오스트리아 해군
지휘관카를로 디 페르사노 제독 (60세)빌헬름 폰 테게토프 제독 (39세)
장갑함12척7척
비장갑함
(통상파괴선, 목조 함선 등)
17척11척
총 함선 수29척18척
함포 수276문121문
총 톤수53236ton[3]23538ton[3]
주요 함선아폰다토레(Affondatore) (세계 최초 포탑선)[3]SMS 카이저(Kaiser) (대형 목조 전열함)[3]



수치상으로는 이탈리아 해군이 함선 수, 함포 수, 총 톤수 등 여러 면에서 오스트리아 해군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세계 최초로 회전 포탑을 장착한 최신예함 아폰다토레까지 보유하고 있었다.[20][3]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당시 아드리아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전투가 벌어진 비스 섬(리싸)의 항구 역시 루마니아계 대령 다비드 우르스 데 마기나의 지휘 아래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3]

전투 직전, 이탈리아 함대는 비스 섬에 대한 상륙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함대의 출현 소식을 접한 페르사노 제독은 급히 상륙을 취소하고 함대에 전투 대형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횡열 대형을 지시했다가 다시 종열 대형으로 바꾸는 등 명령에 혼선이 있었다. 이탈리아 함대는 세 개의 부대로 나뉘어 전투 대형을 구성했다.[3]


  • 제1부대 (선두): 바카 제독 지휘 (프린치페 디 카리냐노, 카스텔피다르도, 안코나)
  • 제2부대 (중앙): 파 디 브루노 대령 지휘 (레 디탈리아, 팔레스트로, 산 마르티노)
  • 제3부대 (후방): 아우구스토 리보티 선장 지휘 (레 디 포르토갈로, 레지나 마리아 피아, ''바레세'')


총 11척의 이탈리아 철갑함이 전투 대열에 참여했으며, 아폰다토레는 예비대로 빠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페르사노 제독은 전투 직전 자신의 기함을 레 디탈리아에서 아폰다토레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함대 전체에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함대는 전투 내내 옛 기함인 레 디탈리아를 지휘함으로 오인하는 혼란을 겪었다. 또한 기함 변경을 위해 제2, 3부대가 속도를 늦추는 동안 제1부대는 계속 전진하여 이탈리아 함대의 전투 대열 중간에 큰 간격이 벌어지는 심각한 실책을 범했다.[3]

반면, 젊은 테게토프 제독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함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전술 목표를 세우고 접근했다.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함대를 세 개의 쐐기(V자) 대형으로 편성하여 이탈리아 함대 중앙의 빈틈을 돌파하고, 근접전과 충돌(ramming) 전술을 통해 이탈리아 함선을 격침시켜 적의 사기를 꺾으려 했다. 오스트리아 함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다.[3]

  • 제1부대 (선두): 테게토프 제독 직속 장갑함 부대
  • 제2부대 (중앙): 페츠 준장 지휘, 강력하지만 구식인 목조 전열함 카이저와 5척의 프리깃함
  • 제3부대 (후방): 소형 포함 및 무장 상선


오스트리아 함대는 정찰 임무를 맡은 무장 상선 순양함 ''스타디온''을 선두에 내세워 이탈리아 함대에 접근했다.[3]

3. 전술 계획

리싸 해전을 앞두고 양측 해군은 서로 다른 준비 상태를 보였다.

이탈리아 해군은 압도적인 함대 규모를 믿고 아드리아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비스섬 점령에만 집중했을 뿐, 오스트리아 함대와의 해전을 대비한 구체적인 전술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페르사노 사령관은 함대를 셋으로 나누어 운용했으나, 해전 발발 직전 갑작스러운 기함 변경과 혼란스러운 명령 하달로 인해 이탈리아 함대의 전열은 심각하게 흐트러졌다.

반면, 오스트리아 해군은 자신들의 장갑함 화력이 열세임을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준비했다. 테겟호프 제독은 적 함대를 분리하여 각개격파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근접전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으며, 특히 충각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수적 열세를 만회하려 계획했다. 오스트리아 함대 역시 세 개의 대대로 나뉘어 쐐기형 또는 학익진 형태로 기동할 준비를 마쳤다.

3. 1. 이탈리아 해군의 전략

페르사노 사령관이 이끄는 이탈리아 해군은 함대를 세 부대로 나누었다. 페르사노 본인이 직접 지휘하는 본함대는 9척의 장갑함으로 구성되어 주력 화력을 담당했다. 그의 정적으로 알려진 알비니 제독이 지휘하는 별동대는 3척의 장갑함으로 비스섬 상륙 작전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바카 제독은 범선들을 이끌며 예비 전력 역할을 수행했다.

이탈리아군은 자신들의 절대적인 함대 우위에 도취되어 별다른 해전 전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오직 아드리아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비스섬을 어떻게 점령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오스트리아 함대가 나타나 도발해오자, 페르사노 사령관은 모든 상륙 작전을 중지하고 전열을 갖추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이 명령을 번복하고 함대에 이동 명령을 내렸다. 적 함대가 눈앞에 나타난 상황에서 내려진 갑작스러운 이동 명령은 이탈리아 지휘관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

혼란은 페르사노 제독이 기함을 옮겨 타면서 더욱 가중되었다. 그는 원래의 기함 '레디탈리아'Re d'Italiait에서 최신함 '아폰다토레'Affondatoreit로 옮겨 탔다. 이동 명령에 따라 함정들이 최고 속도로 기동하려던 중, 사령관이 기함을 옮겨 타기 위해 다시 기관 정지 명령을 내리면서 전열은 흐트러졌다. 설상가상으로 일부 함정들은 이 명령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진하여 본의 아니게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결국, 제대로 된 공격 전열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함대의 기동마저 제멋대로가 되어 배들은 순간적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결과를 맞았다.

3. 2. 오스트리아 해군의 전략

오스트리아 해군 역시 함대를 세 개의 대대로 나누어 편성했다.

대대구성역할
제1대대장갑함주력 화력 (전위)
제2대대통상파괴선 (Kommodor호, Petzs'호 등)중앙
제3대대어뢰정, 무장상선, 외륜선예비 전력 (후위)
기타대형 증기기관 상선 (위장순양함)관측선 (전황 보고)



오스트리아 함대는 주로 쐐기형이나 학익진 형태로 기동했다. 테겟호프 제독이 지휘하는 제1대대가 주력으로서 전위에 섰고, 상대적으로 약한 어뢰정이나 외륜선 등으로 구성된 제3대대는 뒤로 물러나 있었으며, 'Kommodor'호나 'Petz's'호 등 통상파괴선으로 이루어진 제2대대는 중앙을 담당했다. 또한, 대형 증기기관 상선 한 척을 위장순양함으로 개조하여 전황을 기함에 보고하는 관측선으로 활용했다.

오스트리아 해군의 주요 과제는 자신들의 화력 열세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각개격파 전술을 채택했는데, 이는 적 함대를 부분적으로 고립시켜 해당 지점에서 일시적인 화력 우위를 확보하려는 계산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사거리는 짧지만 위력이 강한 대구경 함포를 통해 근접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충각전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이탈리아의 소형 함정들을 침몰시킴으로써 숫적 우위까지 확보하고자 했다.

4. 양국 함대의 조우

개전 초기 양측 함대 진형 조감도. (붉은색): 오스트리아 함대-쐐기 진형, (파란색): 이탈리아 함대-일자 단종진


1866년 7월 18일, 이탈리아 해군은 리사 섬(현재의 비스 섬)에 대한 함포 사격을 시작했다. 이틀 뒤인 20일, 오스트리아 해군 함대가 리사 섬 해역에 도착했다. 당시 이탈리아 함대는 상륙 준비로 분주한 상황이었고, 오스트리아 함대는 이 기회를 노려 기습적으로 해전을 걸어왔다.

이탈리아 함대의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은 해전 직전, 수병 관측관들이 "수상한 전함들"의 접근을 알렸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함대 정렬에만 집중했다. 이는 오스트리아 함대에게 기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더욱이 페르사노 제독은 해전이 임박한 시점에서 자신의 기함을 기존의 장갑함 레 디탈리아에서 최신 충각 장갑함인 아폰다토레로 옮겨 타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14] 이 갑작스러운 기함 변경은 이미 혼란스러운 이탈리아 함대 지휘 체계에 더 큰 혼란을 야기했고, 각 함선들은 명확한 지시 없이 우왕좌왕하게 되었다.[14]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함대는 제대로 된 전투 대형조차 갖추지 못한 채 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반면, 오스트리아 함대의 사령관 테게토프 제독은 이탈리아 함대의 혼란과 분열된 진형(특히 1함대와 2함대 사이의 간격)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이탈리아 장갑함 12척, 오스트리아 장갑함 7척)[21][14], 과감하게 자신의 함대를 쐐기 모양의 진형으로 편성하여 이탈리아 함대 중앙의 빈틈으로 돌진했다. 이는 이탈리아 함대의 단종진을 돌파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근접전 상황을 유도하여 오스트리아 함선들의 장기인 충각 전술을 사용하려는 목적이었다.[22]

오전 10시 30분경 해전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함대가 접근하는 동안, 전열에서 분리되어 있던 바카 부제독의 이탈리아 예비 함대(선두 3척)가 오스트리아 함대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함대는 이 포격에 적극적으로 응사하기보다는 함수와 함미의 포를 이용한 최소한의 대응 사격만 하면서 진형 유지와 돌파에 집중했다. 이 중요한 순간에 페르사노 제독은 여전히 기함을 옮겨 타는 중이었고, 이탈리아 본 함대인 2, 3함대는 사령관의 지휘 부재로 인해 오스트리아 함대가 코앞까지 접근하는 동안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 함대는 이탈리아 예비 함대로부터 약간의 피해만 입은 채[23] 거의 온전한 전력으로 이탈리아 함대 깊숙이 파고들 수 있었다.

오전 10시 43분, 오스트리아 함대는 이탈리아 함대 진형 돌파에 성공하고 본격적인 전술 행동에 들어갔다. 오스트리아 함대 쐐기 진형의 좌익을 맡은 합스부르크 호, 살라만더 호, 카이저 막스 호는 이탈리아 예비 함대와 교전을 시작했고, 우익의 돈 후안 데 오스트리아 호, 드라쉐 호, 프린츠 유겐 호는 알비니 부제독 휘하의 제2함대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페르사노 제독은 마침내 새 기함 아폰다토레 호에 탑승을 완료하고 혼란 속에서 전투 지휘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5. 전투의 경과

1866년 7월 20일, 이탈리아 함대가 아드리아해의 리사섬(현재 크로아티아비스섬) 점령을 위한 상륙 작전 준비 중, 테게토프 제독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함대와 조우하면서 해전이 시작되었다.[14] 이탈리아 함대는 장갑함 12척을 포함하여 함선 수와 함포 수에서 오스트리아 함대보다 우세했으나[4],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의 혼란스러운 지휘와 해전 직전 기함 변경 결정[14] 등으로 인해 전투 초반부터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테게토프 제독은 이탈리아 함대의 분열된 틈을 이용해, 자신의 함대를 쐐기 형태로 이탈리아 함대 중앙으로 돌진시켜 전열을 끊고 근접전을 유도했다. 그는 특히 충각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함대의 일부, 특히 알비니 제독이 이끄는 부대는 페르사노 제독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소극적이거나 참여하지 않아[4] 이탈리아 함대의 혼란을 더했다.

오스트리아 함대는 이탈리아 함대의 포화를 뚫고 근접전에 돌입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테게토프 제독의 기함 에르츠헤르초크 페르디난트 막스는 충각 공격을 성공시켜 이탈리아의 장갑함 레 디탈리아와 팔레스트로를 격침시키는 결정적인 전과를 올렸다.[7][14] 팔레스트로는 함장과 승무원 대부분이 배와 운명을 함께 했으며, 레 디탈리아는 충각 공격으로 흘수선 아래에 약 5.49m 크기의 구멍이 뚫린 후 불과 몇 분 만에 침몰했다.[7]

주력 장갑함 두 척을 잃고 큰 피해를 본 이탈리아 함대는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함대 역시 카이저를 비롯한 여러 함선이 피해를 입었지만[14],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는 오후 3시경 사실상 마무리되었고, 테게토프 함대는 리사섬 항구로 귀환했으며, 페르사노 함대는 안코나로 철수했다.[10] 이 전투는 철갑함 시대에 충각 전술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중요한 해전으로 기록되었다.

5. 1. 혼란에 빠진 이탈리아 함대

페르사노 사령관의 지휘 아래 이탈리아 함대는 세 부대로 나뉘었다. 페르사노가 직접 지휘하는 본함대는 9척의 장갑함을 중심으로 주 화력을 담당했고, 그의 정적인 알비니 제독이 이끄는 별동대는 3척의 장갑함으로 비스섬 상륙 작전을 호위했으며, 바카 제독은 예비 전력으로 범선들을 이끌었다.

이탈리아군은 압도적인 전력 우위에 도취되어 별다른 전술 계획을 세우지 않고 오직 아드리아해의 요충지인 비스 섬 점령에만 몰두했다. 1866년 7월 18일부터 리사 섬에 대한 함포 사격을 시작했고, 20일 상륙 준비를 하던 중 예상치 못하게 오스트리아 함대가 나타나 교전을 걸어왔다.[14] 하지만 페르사노 제독은 경계병이 "수상한 배"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무시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 함대는 제대로 대형을 갖출 시간을 놓쳤다.

오스트리아 함대가 나타나자 페르사노 사령관은 모든 상륙 작전을 중지하고 전열을 갖추라고 지시했으나, 곧이어 무슨 이유에선지 해전 준비 명령을 취소하고 갑자기 함대 이동 명령을 내렸다. 적이 코앞에 나타난 상황에서 내려진 이해할 수 없는 이동 명령에 이탈리아 지휘관들은 동요했다. 설상가상으로 페르사노 제독은 해전 직전, 원래 기함이던 레 디탈리아(Re d'Italia)에서 최신예 장갑함인 아폰다토레(Affondatore)로 기함을 옮겨 타기로 결정했다.[14]

이 기함 변경은 명백한 작전상의 실수였다. 이동 명령에 따라 최고 속도로 기동하려던 함선들은 기함을 옮겨 타기 위한 사령관의 갑작스러운 기관 정지 명령에 전열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명령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일부 함정들이 그대로 전진하면서 본의 아니게 전열에서 이탈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14] 안 그래도 급하게 진형을 짜던 이탈리아 함대는 기함 변경 소동까지 겹치면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제대로 된 전투 대형도 갖추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이탈리아 함대는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바카 제독이 이끄는 부대는 리사 섬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전투 초기에는 교전에 참여하지 못했다. 더욱이 알비니 제독의 함선들은 페르사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398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전투 내내 단 한 발도 발포하지 않았다.[4] 이는 이탈리아 지휘부 내의 갈등과 소통 부재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페르사노가 경계병의 경고를 무시하고 함대 정비 중에 기습을 허용한 탓에, 오스트리아 함대의 테게트호프 제독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는 이탈리아 함대의 제1부대와 제2부대 사이에 벌어진 틈을 발견하고 즉시 자신의 함대를 그 사이로 밀어 넣어 이탈리아 함선에 횡사를 가하고 충각 공격을 집중했다. 이는 이탈리아 함대의 T자 대형을 가로지르는 효과적인 기동이었다. 오스트리아 함대가 접근하는 동안 바카 제독의 제1 이탈리아 부대가 맹렬한 포격을 가했지만, 오스트리아 함대는 추격포로만 응사하며 돌파를 감행했다. 페르사노 제독은 기함을 옮기는 중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통합된 지휘나 명령도 내려지지 못했다. 결국 이탈리아 함대의 제2부대와 제3부대는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오스트리아 함대의 돌파를 허용했다. 오스트리아 함대는 이탈리아 함대의 포화를 뚫고 나아가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함선 손실 없이 이탈리아 함대의 중앙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오전 10시 43분경, 오스트리아 함대는 혼란에 빠진 이탈리아 함대의 선봉대와 근접전을 시작했다.[6]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함대는 수적, 질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과 리더십 부재, 그리고 지휘관들 간의 불화로 인해 심각한 혼란에 빠졌고, 전투 초반부터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오스트리아 함대에게 유리한 상황을 내주게 되었다. 페르사노 제독은 이후 재판에서 바카 제독으로부터 명령 불복종에 대한 솔직한 증언을 듣게 된다.[10]

5. 2. 오스트리아 함대의 공세



7월 20일, 이탈리아 함대가 리사섬에 상륙 준비를 하던 중 오스트리아 함대가 도착했다. 이탈리아 함대는 12척의 장갑함과 19척의 목조 함선, 총 641문의 함포를 보유하여 7척의 장갑함과 20척의 목조 함선, 532문의 함포를 가진 오스트리아 함대보다 규모 면에서 우세했다.[4][21] 그러나 이탈리아 함대의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은 "수상한 배"가 나타났다는 경계병의 보고를 무시하고 함대 정렬을 지시하여 오스트리아 함대에게 기습의 기회를 주었다. 더욱이 해전 직전 페르사노 제독은 기함을 기존의 레 디탈리아 호에서 최신 장갑함인 아폰다토레 호로 변경하는 결정을 내렸는데[14], 이는 급하게 진형을 짜던 이탈리아 함대에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오스트리아 함대의 테게토프 제독은 이탈리아 함대의 제1부대(바카 제독 지휘)와 제2부대(알비니 제독 지휘) 사이에 생긴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함대를 쐐기 진형으로 그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의 목표는 이탈리아 함선에 횡사포를 가하고 충각 공격을 시도하는 것이었다.[22] 오스트리아 함대가 접근하는 동안, 바카 부제독이 이끄는 이탈리아 제1부대(예비 함대)는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함대는 함수와 함미의 추격포로 소극적인 대응 사격만 하며 함대 기동에 집중했다. 페르사노 제독이 기함을 옮기는 중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주력인 제2, 제3함대는 오스트리아 함대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와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알비니 제독의 제2함대는 페르사노 제독의 발포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투 내내 단 한 발도 쏘지 않았다.[4][21]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 함대는 이탈리아 예비 함대로부터 약간의 피해만 입은 채[23] 거의 전력 손실 없이 본격적인 해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가장 오른쪽 날개에 있던 드라헤 호는 17발의 포탄을 맞고 주 돛대를 잃었으며, 함장 Heinrich von Moll|하인리히 폰 몰de이 전사했지만, 부함장 카를 바이프레히트가 지휘를 이어받아 전투에 복귀했다.[5]

오전 10시 43분, 오스트리아 함대는 이탈리아 함대에 접근하여 전술 행동을 개시했다. 오스트리아 함대 쐐기 진형의 좌익을 담당한 합스부르크 호, 살라만더 호, 카이저 막스 호는 이탈리아 제1부대와 교전했고, 우익의 돈 후안 데아우스트리아 호, 드라헤 호, 프린츠 오이겐 호는 알비니 제독 휘하의 이탈리아 제2부대와 맞섰다. 페르사노 제독은 새 기함 아폰다토레 호에 탑승을 완료하고 전투에 참여하려 했으나, 함대의 혼란 속에서 효과적인 지휘를 하지 못했다.[6]

안톤 로마코가 그린 리사 해전. 중앙에 테게토프 제독이 묘사되어 있다.


이탈리아 선봉대의 혼란을 틈타, 폰 페츠 사령관은 자신의 제2부대(비무장 목조 함선 위주)를 이끌고 이탈리아 후방으로 이동하여 제3부대를 공격했다. 오스트리아의 비무장함들은 이탈리아 장갑함들의 맹렬한 포격에 맞서야 했다. 스크류 프리깃함 노바라 호는 47발을 피격당하고 함장 에릭 아프 클린트가 전사했다. 에르츠헤르초크 프리드리히 호는 흘수선 아래를 피격당했고, 슈바르첸베르크 호는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표류했다.

이탈리아 장갑함 레 디 포르토갈로 호에 충각 공격을 시도하는 오스트리아 목조 전열함 카이저 호. 장갑의 차이로 인해 오히려 카이저 호의 함수가 크게 손상되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페르사노 제독은 아폰다토레 호를 이용해 오스트리아의 비무장 목조 전열함인 카이저 호에 충각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카이저 호의 함장 폰 페츠 제독은 이탈리아 장갑함 레 디 포르토갈로 호에 충각 공격을 감행했다. 목조 함선인 카이저 호는 충돌로 인해 함수와 선수상이 부서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레 디 포르토갈로 호 역시 장갑 일부가 파손되었다.[14] 레 디 포르토갈로 호는 근거리에서 카이저 호에 포격을 가해 주 돛대와 굴뚝을 파괴했다. 짙은 연기 속에서 두 함선은 서로를 놓쳤다.

한편, 테게토프 제독은 자신의 기함 에르츠헤르초크 페르디난트 막스 호(사령관 막시밀리안 다우블레브스키 폰 슈테르네크)를 몰아 이탈리아의 옛 기함 레 디탈리아 호와 팔레스트로 호에 충각 공격을 시도했다. 팔레스트로 호는 돛대가 부러지고 화재가 발생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함장 알프레도 카펠리니는 배를 전열에서 이탈시켰다. 승무원들은 함장을 버리고 떠나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결국 오후 2시 30분경 팔레스트로 호는 탄약고 유폭으로 폭발하며 침몰했다. 230명의 승무원 중 단 19명만이 생존했다.

에르츠헤르초크 페르디난트 막스 호는 다시 레 디탈리아 호(함장 에밀리오 파 디 브루노)에게 돌진했다. 레 디탈리아 호가 충돌을 피하려다 오히려 측면을 노출했고, 에르츠헤르초크 페르디난트 막스 호의 충각은 레 디탈리아 호의 흘수선 아래에 약 5.49m 크기의 구멍을 냈다. 레 디탈리아 호는 깃발을 내리고 불과 2분 만에 침몰했다. 전설에 따르면 함장은 깃발을 내리라는 명령 후 자결했다고 전해진다.[7] 에르츠헤르초크 페르디난트 막스 호가 세 차례의 충각 공격 시도 후 물러서자, 안코나 호가 접근하여 충각 공격을 시도했다. 이탈리아 포병은 근거리에서 포격을 가했으나, 흥분한 나머지 화약만 장전하고 포탄을 장전하는 것을 잊었다.

카이저 호는 레 디 포르토갈로 호 및 마리아 피아 호와의 교전 후 아폰다토레 호와 근접하게 되었다. 충각 공격의 좋은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사노 제독이 아폰다토레 호의 방향 전환을 명령하면서 카이저 호는 위기를 모면했다.[8] 테게토프의 승리는 주로 크로아티아인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옛 영토(베네치아, 이스트라, 달마티아) 출신 선원들에 의해 전통적인 베네치아의 승전 함성인 "비바 산 마르코!"(Viva San Marco!|비바 산 마르코!it, "성 마르코 만세!")로 축하받았다.[9] 오후 3시경, 테게토프는 손상된 카이저 호가 이미 도착해 있던 리사 항구로 함대를 이끌었다. 이탈리아 함대는 이를 방해하지 않았다. 페르사노 제독이 오스트리아 함선 공격 명령을 내렸음에도 알비니와 바카 제독은 이를 무시했으며, 바카는 이후 페르사노의 재판에서 이를 증언했다.[10] 연료와 탄약이 부족하고 승무원들이 지친 페르사노는 함대를 이끌고 안코나 항구로 철수했다. 카이저 호와 아폰다토레 호의 조우는 전투의 마지막 주요 교전이었으며, 이후 몇 시간 동안 산발적인 장거리 포격전이 이어졌다.

5. 3. 충각 전술의 성공

이탈리아 함대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페르사노 사령관은 사기를 높이기 위해 충각 공격을 계획했다. 그는 장갑이 약한 오스트리아의 통상파괴선을 노리고, 상대적으로 우세한 자신의 장갑함들을 빠르게 접근시켰다. 가장 먼저 표적이 된 오스트리아 함선 카이저는 이탈리아의 최신형 기함 아폰다토레가 다가오자 오히려 자신이 충각 공격을 시도하려 했다. 이를 본 이탈리아의 레 디 포르토갈로가 뱃머리를 돌려 카이저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카이저는 다시 뱃머리를 돌려 레 디 포르토갈로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이 충돌로 양측 함선 모두 불길과 연기에 휩싸였고, 주마스트와 기관 굴뚝이 부러지면서 기동을 멈추게 되었다.[14]

비슷한 시각, 테게토프 제독 역시 자신의 기함 에르츠헤르초크 페르디난트 막스를 이탈리아 함대의 이전 기함 레 디탈리아와 팔레스트로 사이로 돌진시켰다. 처음에는 비스듬히 스쳐 지나갔지만, 이 공격은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특히 팔레스트로는 주마스트가 부러지고 곧 화염에 휩싸였다. 팔레스트로의 함장 알프레도 카펠리니는 선원들에게 배를 버리라고 명령했지만, 자신은 함선에 남아 전열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부하들은 함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함선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팔레스트로는 오후 2시 30분경 탄약고 유폭으로 완전히 침몰했고, 230명의 승무원 중 단 19명만이 구조되었다.[7]

에르츠헤르초크 페르디난트 막스는 레 디탈리아 주위를 크게 돌며 맹렬한 포격을 가한 뒤, 뱃머리로 레 디탈리아를 강하게 들이받았다. 이 충격으로 레 디탈리아는 흘수선 아래에 약 5.49m 크기의 구멍이 뚫렸고, 결국 깃발을 내리고 2분 만에 침몰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레 디탈리아의 함장은 국기를 내리기 직전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7][14]

오스트리아 기함 에르츠헤르초크 페르디난트 막스 역시 여러 차례의 충각 공격으로 인해 손상을 입고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이 틈을 노려 이탈리아의 안코나가 후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충각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포수들이 흥분한 나머지 포탄 없이 화약만 장전하는 실수를 저질러 효과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다.[8]

한편, 오스트리아 비장갑함 전대의 기함인 목조 전열함 카이저는 앞서 레 디 포르토갈로와의 충돌로 뱃머리가 크게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계속했다. 이후 아폰다토레와 근접하게 되었으나, 페르사노 제독이 아폰다토레에게 방향 전환을 명령하면서 카이저는 추가적인 충각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8][14]

결과적으로 충각 공격은 오스트리아 함대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레 디탈리아와 팔레스트로 등 2척의 장갑함을 잃고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이탈리아 해군은 급히 전장을 이탈하여 안코나 항구로 후퇴했다.[8] 테게토프 제독의 함대는 리사 항구로 이동했으며, 이탈리아 함대의 방해는 없었다. 이 전투는 철갑함 시대에 충각 공격이 성공적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5. 4. 이탈리아 해군의 후퇴

이탈리아 함대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페르사노 사령관은 사기를 높이기 위해 충각전술을 시도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우세한 자신의 장갑함들을 동원해 장갑이 약한 오스트리아의 목조 함선들을 노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히려 이탈리아 함대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오스트리아 목조 전열함 카이저 함은 이탈리아의 최신형 기함 아폰다토레 함이 접근하자 오히려 충각을 시도하려 했다. 이를 본 이탈리아 장갑함 레 디 포르토갈로 함이 함수를 돌려 카이저 함을 공격했다. 카이저 함은 다시 함수를 돌려 레 디 포르토갈로 함의 측면을 들이받았다. 목조 함선인 카이저 함은 이 충돌로 함수 부분이 크게 부서졌고, 레 디 포르토갈로 함 역시 피해를 입어 양측 모두 잠시 기동을 멈춰야 했다.[14]

비슷한 시각, 테게토프 제독은 자신의 기함 어제어조그 페르디난트 막스 함을 이탈리아 함대의 이전 기함이었던 레 디탈리아 함과 팔레스트로 함을 향해 돌진시켰다. 이 공격으로 팔레스트로 함은 주마스트가 부러지고 큰 화재가 발생했다. 함장 카펠리니는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자신은 함선에 남아 전열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부하들은 함장을 버리기를 거부하고 함선과 운명을 함께했다. 팔레스트로 함은 오후 2시 30분경 탄약고 유폭으로 완전히 침몰했고, 230명의 승무원 중 단 19명만이 구조되었다.[7]

한편, 어제어조그 페르디난트 막스 함은 레 디탈리아 함 주위를 돌며 포격을 가한 뒤, 충각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레 디탈리아 함은 다른 함선에서 물에 빠진 선원들을 구조 중이었다고도 하며[6], 키가 손상되어 조종 불능 상태였다는 기록도 있다[14]. 이 충돌로 레 디탈리아 함은 흘수선 아래에 약 5.49m 크기의 구멍이 뚫렸고, 국기를 내린 뒤 불과 2분 만에 침몰했다. 함장 파 디 브루노는 배가 침몰하기 직전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전해진다.[7]

주력 장갑함 두 척을 잃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탈리아 해군은 급히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충각 공격을 감행한 오스트리아 기함 어제어조그 페르디난트 막스 함 역시 손상을 입어 속도가 느려졌다. 이탈리아의 안코나 함이 후퇴 직전 마지막으로 충각 공격을 시도했지만, 포수들이 당황하여 포탄 없이 공포탄을 쏘는 바람에[8]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페르사노가 탑승한 기함 아폰다토레 함은 오스트리아 함선들의 충각 시도를 피해 속도를 높여 다른 함선들과 함께 전장을 벗어나 안코나로 귀항을 서둘렀다. 오후 3시경 전투는 사실상 종료되었고, 양측 함대는 각자의 항구로 철수했다. 이탈리아 해군은 연료와 탄약 부족, 승무원의 피로 누적 등을 이유로 더 이상의 교전 없이 안코나 항구로 돌아갔다.[10]

6.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리싸 해전은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에게는 영웅적인 승리였지만, 이탈리아 왕국에게는 뼈아픈 패배로 기록되었다. 전투 후 이탈리아 함대는 장갑함 두 척을 잃는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24] 이탈리아 함대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은 처음에는 승리를 주장했으나, 패배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무능과 기만 행위로 인해 결국 불명예 제대하고 계급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11][12] 반면, 오스트리아 함대를 이끈 테겟호프 제독은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해군 대제독(Vizeadmiral|피체아드미랄de)으로 승진하는 등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15]

그러나 해전의 승리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반적인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다. 오스트리아는 같은 시기 육지에서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동맹국인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인해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할양해야만 했다. 다만 테겟호프의 승전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요구로부터 달마티아 등 아드리아 해 연안 영토를 지켜낼 수 있었다.

해군사적으로 리싸 해전은 여러 중요한 영향을 남겼다. 특히 전투 중 충각 공격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후 약 50년간 건조된 군함 설계에 충각 구조가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함포 기술의 발달로 충각 전술의 실효성은 점차 사라졌다. 또한 이 해전은 함선의 장갑 방어력이 함포 공격력보다 우위에 있었던 드문 사례로 평가되며, 이후 해군 강국들이 함선 장갑 강화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6. 1. 이탈리아의 패배와 페르사노 제독의 몰락

장갑함 두 척이 침몰하면서 이탈리아 함대는 철수했고, 이후 몇 시간 동안은 장거리 포격전만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페르사노 제독은 귀항 후 초기에는 승리를 주장하며 자축했으나, 전투의 정확한 경과가 보고되고 신문에 패전 소식이 실리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처음 페르사노 제독의 승전 발표로 축제가 벌어졌지만, 철갑함 2척을 잃은 실제 결과가 알려지자 국민적 분노가 거세게 일었다.[11][12]

결국 페르사노 제독은 이탈리아 상원에 소환되었다. 그는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참담한 패배를 초래한 무능과 비겁함으로 인해 상원의원들과 여론의 혹독한 비난에 직면했고, 결국 불명예 제대와 함께 계급을 박탈당했다.[24][11][12] 이는 자신의 죽음으로 책임을 진 부하 카펠리니 함장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알비니 제독 역시 지휘에서 해임되었고, 바카 제독은 연령 제한으로 은퇴했다.[11][12]

한편,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가리발디는 오스트리아 해군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한 베네치아 출신 수병들이 이탈리아 민족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하다며 격분하기도 했다.[25][26]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 수병들은 크로아티아 인과 소수의 베네치아 인으로 구성되었는데, 베네치아에서 수병을 양성했기 때문에 해군 용어 대부분은 베네치아 사투리가 섞인 이탈리아어였다.[27] 아이러니하게도 테게토프 제독의 승리 후 수병들의 만세 삼창 역시 이탈리아어였다.[28] 이후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에 병합되자, 리싸 해전에 참전했던 베네치아 출신 수병들은 이탈리아 해군에 편입되어 복무를 계속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해전에서는 승리했지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에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외교적 위신이 실추되었고, 이탈리아의 동맹국인 프로이센과 프랑스나폴레옹 3세의 압력으로 베네치아 지방을 이탈리아에 할양해야 했다. 그러나 테게토프의 해전 승리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게 달마티아 제도와 옛 베네치아 공화국아드리아해 연안 영토까지 내주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지휘관들에게 "다음에도 패전한다면 파리를 할양해달라고 하겠군"이라는 뼈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리싸 해전은 해군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충각 공격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이후 약 50년간 건조된 전함과 순양함들은 충각 전술을 위한 선수(船首)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아군 함선 간의 우발적인 충돌 사고를 증가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실제로 충각 전술이 이후 해전에서 효과적인 전술로 다시 등장하지는 못했다. (황해 해전에서 청나라 해군이 일본 해군을 상대로 시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함포 기술의 발달로 충각 전술의 중요성은 급격히 감소했다.

해전사 연구자들은 리싸 해전을 장갑의 중요성이 함포의 화력보다 우위에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례로 평가한다. 이는 이탈리아 측의 낮은 포격술 수준과 더불어, 프로이센의 금수 조치로 인해 오스트리아 해군 함선 일부(페르디난트 막스 호 포함)가 완전한 무장을 갖추지 못한 채 전투에 임해야 했던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이 전투는 장갑이 빈약한 함선은 장갑함에 대항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고, 열강들은 통상파괴선들을 조기에 퇴역시키거나 장갑함으로 개조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의 목조 전함 카이저 호는 리싸 해전 직후 장갑함으로 개조되어 1873년까지 운용되었다.

아폰다토레


카이저

6. 2. 오스트리아의 승리와 테겟호프 제독의 영웅화

장갑함 두 척을 잃은 이탈리아 함대는 결국 철수했고, 이후 몇 시간 동안은 장거리 포격만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이 전투는 아폰다토레 함의 처음이자 마지막 실전 경험이 되었다. (아폰다토레 함은 1907년 퇴역했다.) 페르사노 제독은 항구로 돌아와 승리를 주장했지만, 전투의 상세한 경과가 알려지고 신문에 패전으로 보도되면서 이탈리아 상원에 소환되었다. 그는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참패한 것에 대한 무능함과 비겁함으로 상원의원들과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고, 결국 불명예 제대 처리되었다[24][11][12]. 알비니 제독 역시 지휘에서 해임되었으며, 바카 제독은 정년으로 은퇴했다.[11][12] 페르사노는 패배를 숨기고 승리를 조작하여 칭찬받으려 했으나, 이는 곧 발각되어 퇴역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반면, 테겟호프 제독은 본국 오스트리아에서 영웅으로 환대받으며 '''대제독'''(Vizeadmiral|피체아드미랄de)으로 승진했다. 이는 오스트리아 해군 역사상 가장 높은 지위였다. 테게토프의 옛 상관이자 멕시코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는 그의 승리를 크게 칭찬하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신의 뜻이 나로 하여금 다른 길을 걷게 했을지라도, 그렇기에 지금도 나의 마음속에는 바다의 명예의 성화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젊은 힘의 전부를 바쳤던 호걸한 함대가, 귀관의 지휘 아래 1866년 7월 20일이라는 날을 해군사에 피로 칠한 것을 이 눈으로 본 이날이야말로, 나의 최상의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리사의 승리와 함께 귀관의 이름도 모든 시대의 바다의 용사 중 한 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5]

한편,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가리발디는 오스트리아 함대에 베네치아 출신 수병들이 다수 포함된 사실에 대해, 이들이 이탈리아 민족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하다며 격분했다[25][26]. 실제로 테겟호프 함대의 수병들은 크로아티아인과 소수의 베네치아인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 해군이 베네치아에서 수병을 양성했기 때문에 해군 용어 대부분은 베네치아 사투리이긴 했지만 이탈리아어였다[27]. 아이러니하게도 테겟호프의 승리 후 수병들의 만세 삼창 역시 이탈리아어였다[28].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에 합병된 후, 리싸 해전에 참전했던 베네치아 수병들은 이탈리아 해군에 편입되어 복무를 계속했다.

리싸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육지에서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에게 패배했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는 리싸 해전의 승리를 빛바래게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전반적인 군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베네치아 지방을 이탈리아에 할양해야 했다.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지휘관들에게 "당신들이 또다시 패전한다면 다음엔 파리를 할양해달라고 하겠군."이라는 뼈 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테겟호프의 승리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게 달마티아의 섬들과 옛 베네치아 공화국 시절 아드리아 해 연안 영토까지 내주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리싸 해전은 해군 전술과 기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전투 중 충각 공격의 성공은 이후 50년간 해군 설계자들이 전함과 순양함에 충각용 선수(ram bow)를 장착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는 평시에 아군 함선 간의 우발적인 충돌 사고로 인한 피해를 키우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충각 전술은 이후 해전사에서 다시는 효과적인 전술로 등장하지 못했다. (황해 해전에서 청나라 해군이 일본 해군을 상대로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함포 기술의 발달로 충각 전술의 중요성은 급격히 감소했다.

또한 리싸 해전은 장갑의 중요성이 함포의 중요성보다 강조된 거의 유일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 함포 기술의 열세와, 프로이센의 금수 조치로 인해 오스트리아 함선 일부가 완전한 무장을 갖추지 못한 채 전투에 임해야 했던 상황 때문이었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목조 전함 SMS 카이저가 장갑함 4척과 근접전을 벌여 살아남은 것은 전례 없는 일로 평가된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각국 해군은 장갑이 빈약한 함선들을 조기에 퇴역시키거나 장갑함으로 개조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리싸 해전에서 활약한 SMS 카이저는 전투 직후 장갑함으로 개조되어 1873년까지 운용되었다.

6. 3. 충각 전술의 부각과 해군 전략의 변화



리싸 해전은 해군 전술, 특히 충각 전술의 중요성을 일시적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불리한 전황 속에서 이탈리아 함대 사령관 페르사노는 사기 진작을 위해 상대적으로 장갑이 약한 오스트리아의 목조 함선들을 대상으로 충각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오스트리아 함대의 반격과 혼란을 야기했다. 오스트리아 함대의 카이저 함은 이탈리아의 최신형 기함 아폰다토레 함의 접근에 맞서 충각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레 디 포르토갈로 함과 충돌하여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오스트리아 함대 사령관 테겟호프 제독 역시 충각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의 기함 에르츠헤르초크 페르디난트 막스 함은 이탈리아 함대의 레 디탈리아 함과 팔레스트로 함 사이로 돌진했다. 이 공격으로 팔레스트로 함은 큰 피해를 입고 화재에 휩싸였으며, 함장 카펠리니와 대부분의 승조원은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며 오후 2시 30분경 침몰했다.[24] 테겟호프의 기함은 이어 파아 디 브루노 함을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당시 파아 디 브루노 함은 다른 함선에서 물에 빠진 선원들을 구조하던 중이었으며, 충각 공격으로 흘수선 아래에 약 5.49m 가량의 큰 구멍이 뚫려 2분 만에 가라앉았다.

장갑함 두 척을 잃은 이탈리아 해군은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페르사노 제독은 귀환 후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보고했으나, 곧 패배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그는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지휘로 참패를 자초했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상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불명예 제대했으며, 알비니 제독 역시 해임되었다.[11][12] 반면, 테겟호프 제독은 오스트리아에서 영웅으로 환대받으며 해군 대제독(Vizeadmiralde)으로 승진했다. 이는 오스트리아 해군 역사상 가장 높은 지위였다.

이 해전에서 충각 공격이 거둔 성공은 이후 약 50년간 해군 전략과 군함 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국가들이 전함과 순양함의 함수에 충각 공격을 위한 구조물(충각 선수, ram bow)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는 아군 함선끼리의 우발적인 충돌 사고를 유발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함포의 성능과 사격술이 발전하면서 충각 전술의 실효성은 급격히 감소했고, 황해 해전에서 청나라 해군이 일본 해군을 상대로 시도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는 등, 이후 해전에서 충각 공격이 성공적인 전술로 사용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해전사 연구가들은 리싸 해전을 장갑의 방어력이 함포의 공격력보다 우위에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례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의 미숙한 포격술과 더불어, 프로이센의 금수 조치로 인해 오스트리아 함대의 일부 함선들이 완전한 무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또한 이 전투는 장갑이 없는 목조 함선이 장갑함에 대항하기 어렵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으며, 이후 각국 해군은 장갑이 약한 구형 함선들을 퇴역시키거나 장갑함으로 개조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리싸 해전에서 분전했던 오스트리아의 카이저 함은 전투 직후 장갑함으로 개조되어 1873년까지 운용되었다.

한편, 해전의 결과는 정치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해전에서는 승리했지만, 동맹국인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전반적인 국력 약화를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압력 등으로 인해 베네치아를 이탈리아 왕국에 할양해야 했다. 그러나 테겟호프의 승리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달마티아의 섬들과 아드리아 해 연안 영토까지 이탈리아에 넘겨주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 통일의 상징적 인물인 가리발디는 오스트리아 해군 소속으로 참전한 베네치아 출신 수병들에 대해 민족적 자각이 부족하다며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25][26] 아이러니하게도 오스트리아 해군 수병 다수가 베네치아에서 양성되었기 때문에 해군 용어는 대부분 이탈리아어였고, 테겟호프의 승전 축하 함성 역시 이탈리아어였다.[27][28]

6. 4. 베네치아의 이탈리아 귀속

이탈리아에서는 페르사노 제독이 승리를 발표하여 처음에는 큰 축하가 있었지만, 전투의 실제 결과가 알려지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철갑함 2척의 손실에 대한 분노는 엄청났고, 전투 이후 페르사노는 이탈리아 상원에서 무능함을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고 계급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알비니 제독은 지휘에서 해임되었고, 바카 제독은 곧 나이 제한으로 은퇴해야 했다.[11][12] 반면, 테게트호프 제독은 영웅으로 귀환하여 ''부제독''으로 승진했으며, 오스트리아 해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리싸 해전에서의 이탈리아의 패배는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육군에 대한 프로이센의 압도적인 승리에 가려졌다. 프로이센에 굴복하고 프랑스나폴레옹 3세에게 압박을 받은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전반적인 군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할양하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테게트호프의 노력은 이탈리아가 한때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였던 달마티아 섬들을 합병하는 것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참조

[1] 문서 Stevens (1942)
[2] 웹사이트 The Italian "mistakes" in Lissa battle (in Italian) http://lastoriamilit[...] lastoriamilitare.splinder.com 2017-06-18
[3] 문서 Stevens (1942)
[4] 서적 Lissa 1866. la grande battaglia per l'Adriatico
[5] 웹사이트 BLKÖ:Moll, Heinrich Freiherr von – Wikisource https://de.wikisourc[...] de.wikisource.org 2017-06-18
[6] 간행물 Storia Militare n. 215 Parma 2011
[7] 간행물 Storia Militare N. 215
[8] 간행물 Storia Militare n. 215
[9] 논문 La battaglia di Lissa 2011-05
[10] 간행물 Storia Militare N. 215
[11] 간행물 Storia Militare N. 215
[12] 서적 Sangue Sul Mare Mondadori 2006
[13] 웹사이트 The history of Uljanik http://www.uljanik.h[...] Uljanik d.d. 2010-09-02
[14] 서적 世界の艦船増刊第41集 イタリア戦艦史 海人社
[15] 서적 イカロスの失墜 新人物往来社 1994
[16] 문서 Stevens (1942)
[17] 문서 다른 이름은 비스 해전(Battle of Vis)으로도 불린다.
[18] 문서 충각전술
[19] 문서 통상파괴선
[20] 서적 A History of Sea Power Doubleday 1942
[21] 문서 스코티 지아코모의 이탈리아 어 원문
[22] 문서 rake
[23] 문서 오스트리아 함대의 최우익에서 이탈리아 예비함대의 집중포격을 받았던 드라쉐(Drache) 함
[24] 서적 Sangue Sul Mare Mondadori 2006
[25] 서적 La campagna navale di Lissa 1866 Il saggiatore
[26] 서적 History of Italy Laterza
[27] 문서 더욱이 [[1849년]]까지 오스트리아는 자국 해군을 'Oesterreich-Venezianische Marine'(오스트리아-베네치아 연합 해군)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28] 문서 Viva San Mar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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