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오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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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루야마 오쿄는 1733년 일본 단바국에서 태어난 에도 시대의 화가이다. 그는 이시다 유테이의 제자로, 1766년부터 오쿄라는 호를 사용하며 중국 화가 전순거에 비견될 만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오쿄는 서양화의 원근법을 수용하여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고, 사생을 중시하여 동물, 곤충, 식물 등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화풍은 마루야마파를 형성하여 일본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고슌, 나가사와 로세츠, 모리 테츠잔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설경의 소나무》, 《호즈 급류》 등이 있으며, 1795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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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회권은 일본에서 유래된 요괴들의 밤 행진을 그린 그림 또는 이야기로, 기물 요괴 중심의 그림 두루마리 형태이며, 시대에 따라 묘사가 발전해 왔고, 현대 한국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루야마 오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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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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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루야마 마사타카 |
일본어 표기 | 円山 応挙 (まるやま おうきょ) |
로마자 표기 | Maruyama Ōkyo |
출생 | 1733년 6월 12일 |
사망 | 1795년 8월 31일 |
국적 | 일본 |
활동 시기 | 에도 시대 중기 |
분야 | 일본화 |
사조 | 마루야마 사생화파 |
스승 | 이시다 칸테이 |
영향 | 서양화 기법 수용 |
생애 | |
출생지 | 교토 |
초기 활동 | 장난감 가게에서 그림 그림 |
화가 데뷔 | 이시다 칸테이에게 그림 배우고 화가로 데뷔 |
화풍 | 사생화풍의 화풍 확립 |
제자 양성 | 많은 제자 양성 |
사망지 | 교토 |
화풍 특징 | |
사생 정신 | 자연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사생 정신 |
서양화법 | 서양화법 도입 (원근법, 음영법) |
독자적인 화풍 | 일본화에 새로운 경지 개척 |
주요 작품 | |
대표작 | '설송도병풍(雪松図屏風)' '우산 없이 돌아가는 그림(雨中遊帰図)' '요괴도감(化物尽絵)' |
참고 자료 | |
관련 서적 | "마루야마 오쿄" (미술수첩) "마루야마 오쿄 화집" (국화서원) |
2. 약력
마루야마 오쿄(円山応挙)는 후지와라 가문 출신으로, 후에 미나모토로 성을 바꿨다. 처음 이름은 이와지로(岩次郎)였고, 나중에 슈스이(主水)로 고쳤다. 하운(夏雲), 설정(雪汀), 일소(一嘯), 선령(僊嶺), 선재(僊斎), 성취관(星聚館), 압수어사(鴨水漁史), 양운(攘雲), 낙양선인(洛陽仙人) 등 다양한 호를 썼다. 이시다 유테이의 제자였다.
미이데라 엔만인의 우상 문주, 미쓰이가, 묘호인 문주 신닌 법친왕 등에게 후원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칠난칠복도』, 『공작모란도』 등이 미이데라 엔만인에, 『설송도』는 미쓰이가에 전해졌다. 다이죠지, 곤고지 장벽화군도 대표작이다.
만년 작품인 『미타테 에구치노 키미도』, 『사계 유희도권』 등은 우키요에풍으로 카미가타 풍속도로 꼽힌다.
간세이 7년(1795년) 63세로 사망했다.[54]
2. 1. 유년기 및 초기 수련
교호 18년(1733년), 마루야마 오쿄는 단바국미나미쿠와다군 아나오무라 (현재의 교토부 카메오카시 소가베무라 아나오)에서 농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10대 후반에는 교토로 상경하여 가노 탄유의 화풍을 잇는 츠루자와파 화가 이시다 유테이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54]메이와 3년(1766년)부터 '''"오쿄(応挙)"'''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중국 송 말 ~ 원 초의 화가 전순거에 필적하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53]
20대 무렵, 오쿄는 교토 시조도오리 야나기바바에 있던 오와리야 나카지마 칸베에라는 완구 가게에서 일하면서 '''메가네에(眼鏡絵)''' 제작에 종사했다. 호레키 9년(1759년)경, 오쿄는 네덜란드에서 온 메가네에를 보고, 「사조가와라유료즈」,「이시야마데라즈」,「가모케이바즈」,「마루야마자시키즈」,「산주산겐도즈」 등 교토 풍경을 소재로 한 메가네에를 제작했다. 메가네에는 서양화의 원근법을 응용하여 그린 그림을 볼록렌즈가 달린 상자(엿보기 안경)를 통해 보면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오쿄가 본 메가네에는 45도 기울어진 거울에 비친 그림을 렌즈를 통해 보는 방식이었으며, 원근감을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도록 원화와 도상의 글자를 좌우 반대로 그렸다. 작품은 목판에 먹으로 칠하고 손으로 채색했으며, 화면에 작은 구멍을 뚫고 얇은 종이를 붙여 뒤에서 빛을 내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53]
이 무렵부터 미이데라 엔만인의 우상 문주와 교류하며 그의 지원을 받았다. 우상은 공가인 니조가 출신으로, 몬제키 사원에 들어가 승려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반시(萬誌)'''』라는 책을 통해 오쿄의 언행을 상세히 기록하여, 동시대의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53]

2. 2. 오쿄로 개명
메이와 3년 (1766년)부터 '''"오쿄(応挙)"'''라 칭하기 시작했다. "오쿄"의 뜻은 "전순거 (중국 송 말 ~ 원 초의 화가)에 응한다"는 것으로, 중국의 대가 못지않은 수준의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53] 또, 이 무렵부터 미이데라 엔만인의 우상 문주의 지원을 받았다. 우상은 공가의 니조가로부터 문적사원에 들어가 승려가 된 인물로, 『반시(萬誌)』라고 하는 일상 잡일을 기록한 서적을 남겼는데, 그 안에 오쿄의 언행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동시대의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2. 3. 주요 후원자
미이데라 엔만인의 우상 문주, 호상 미쓰이 가, 묘호인 문주 신닌 법친왕이 마루야마 오쿄의 주요 후원자였다.[53] 대표작인 『칠난칠복도』, 『공작모란도』 등은 제2차 세계 대전 후까지 미이데라 엔만인에 전해졌으며, 『설송도』는 미쓰이가에 전해져 내려왔다.2. 4. 사망
간세이 7년(1795년) 63세로 사망했다.[54] 법명은 엔요무노이치코지(円誉無之一居士)이다. 묘소는 교토부 우쿄구 우즈마사의 고신지에 있다.[54] 위패형 묘석 앞면에는 "미나모토 오쿄 묘(源応挙墓)"라고 새겨져 있다.[54] 고신지는 쇼와 26년(1951년)에 시조오미야에서 묘와 함께 우즈마사로 이전한 것으로, 경내에는 마루야마 가문의 묘가 늘어서 있다.[54] 마루야마파는 장남 오즈가 이었지만, 후술할 제자들이 더 유명하다.오모토 교주 데구치 오니사부로는 오쿄의 가계에서 나왔다.[55]
집터 (시조도오리 사카이마치 히가시이루 남쪽)에 석표가 하나 세워져 있다.[56]
3. 화풍
마루야마 오쿄의 화풍은 근대 일본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사생(写生)의 중시: 오쿄는 자연을 직접 관찰하고 묘사하는 사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항상 사생첩을 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동식물 등을 스케치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 서양 화법의 수용: 서양의 원근법과 음영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그림에 입체감과 사실감을 더했다. 특히, 유럽의 자연 묘사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 동서양 화풍의 융합: 사생을 중시하고 서양 화법을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일본 회화의 전통적인 화제를 다루고 장식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했다. 쓰케타테 기법을 사용하여 윤곽선 없이 대상의 형태를 표현하고, 섬세한 묘사와 장식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마루야마파의 형성: 오쿄의 화풍은 마루야마파로 불리며, 고슌, 나가사와 로세츠 등 많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교토 화단의 주류가 되었다.
오쿄의 그림은 탁월한 기량과 평이하고 친근한 화풍으로 미쓰이 가문을 비롯한 부유한 상인층에게 인기가 많았다.
3. 1. 사생(写生)의 중시
오쿄의 화풍상 특색으로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근세 일본 화가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사생(写生)'''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오쿄는 항상 사생첩을 품고 다니며 틈만 나면 스케치에 몰두했다. 현존하는 『화조사생도권(花鳥写生図巻)』 (센소(千總) 소장, 중요문화재)이나,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의 『사생첩(写生帖)』 등에는 동물, 곤충, 식물 등이 다양한 각도에서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오쿄의 그림은 이러한 사생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 회화의 전통적인 화제를 다루면서도 장식성이 풍부한 화면을 창조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네즈 미술관 소장의 『등나무꽃도(藤花図)』 병풍을 보면, 등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쓰케타테[57] 기법으로 대담하게 그린 반면, 등나무 꽃송이는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그려져 전체적으로 린파를 연상시키는 장식성이 풍부한 큰 화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탁월한 그림 솜씨와 평이하고 친근한 화풍 덕분에 오쿄의 그림은 미쓰이 가문을 비롯한 부유한 상인층에게 인기가 많았다.

3. 2. 서양화법의 수용
오쿄의 화풍상 특색으로 첫 번째로 꼽아야 할 것은, 근세 일본 화가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사생(写生)'''을 중시한 점이다. 오쿄는 항상 회중에 사생첩을 숨기고 틈만 나면 스케치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화조사생도권(花鳥写生図巻)』 (천총장(千總蔵), 중요문화재)이나, 도쿄 국립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사생첩(写生帖)』 등에는 동물, 곤충, 식물 등이 다양한 각도에서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쿄의 그림은 이러한 사생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 회화의 전통적인 화제를 다루면서도 장식성이 풍부한 화면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이 특색이다. 예를 들어 네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등나무꽃도(藤花図)』 병풍을 보면, 등나무의 줄기나 가지는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츠케타테 기법'''[57]으로 대담하게 그려낸 반면, 등나무 꽃송이는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그려져 전체적으로 린파를 연상시키는 장식성이 풍부한 대화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탁월한 화기와 평이하고 친근한 화풍으로 인해, 오쿄의 그림은 미쓰이가를 비롯한 부유한 상인층에게 선호되었다.유명한 제자로는 고슌, 나가사와 로세츠, 모리 테츠잔, 겐키 등이 있다. 오쿄를 시조로 하는 일파는 「마루야마시조파(円山四条派)」[58]라고 칭해져 현대에까지 그 계보를 잇는 교토 화단의 원류가 되고 있다.
오쿄가 원근법을 처음 접한 것은 유럽식 입체경을 통해서였다.[1] 1767년에 그는 1점 원근법으로 작은 그림인 ''항구 풍경''을 제작했다. 오쿄는 곧 입체경 이미지(''메가네-에|안경 그림일본어)를 그리는 기술을 습득했다.[1]
오쿄는 화가로서의 경력을 쌓기로 결심하고, 처음에는 가노파의 일원인 이시다 유테이 밑에서 공부했는데, 이는 입체경 이미지보다 오쿄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2] 이 시기에 오쿄는 중국 회화도 공부했는데, 특히 자세한 꽃 그림으로 유명한 13세기 화가 첸 쉬안과 16세기 인물 화가 추잉의 작품을 존경했다.[3] 오쿄의 이름에 있는 "쿄"는 첸 쉬안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채택되었으며, 심지어 잠시 동안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로 서명하는 중국식 관행을 채택하여 한동안 오쿄 엔으로 알려지기도 했다.[3] 그는 1731년부터 1733년까지 나가사키에 거주하며 꽃 그림을 그린 중국 화가 선취안의 작품을 연구했으나,[1] 예술가의 비례 처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와타나베 시코의 작품을 선호했다.[4] 그는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 그림도 연구했으며,[5] 구할 수 있는 모든 서양 그림이나 판화를 열심히 연구했다.
마루야마파(Maruyama style)는 에도 시대 중기의 화가 마루야마 오쿄에 의해 창시된 화풍이다. 일본 근대 회화의 주요 학파 중 하나인 마루야마파는 18세기 중반 교토의 신흥 도시들의 현실적인 감성을 바탕으로 했으며, 사실주의와 전통적인 장식적 요소를 융합한 새로운 화풍으로 일본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화풍은 틀을 그리지 않고 먹의 음영을 더하는 츠케타테(tsukeitate)라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쿄의 화풍은 서양의 평온한 자연주의와 가노파의 동양적 장식 회화를 융합했으며,[13] 그의 작품은 하이라이트와 그림자에 대한 서양적 이해를 보여준다.[13] 그의 사실주의는 감정을 배제하고 자연을 궁극적인 근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전 일본 화파와 달랐다. 오쿄의 정교한 식물 및 동물 스케치는 유럽의 자연 묘사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을 보여준다. 교토의 니시무라 컬렉션에 있는 잎사귀 앨범(현재는 두루마리 형태로 보존)에는 여러 동물과 식물이 묘사되어 있으며, 각 묘사에는 유럽 안내서처럼 설명이 붙어 있다.[14]
그럼에도 오쿄의 작품은 여전히 일본적이다. 유럽 회화와 달리, 오쿄의 그림은 중간색조가 거의 없으며, 대상의 배경을 거의 묘사하지 않는 동양의 전통을 따른다. 그의 그림은 종종 평범한 배경에 단일 주제를 특징으로 하며,[5] 그 결과 장식적이고 반성적인 느낌을 주는 더욱 직접적인 자연주의가 나타났다.[5][8] 이는 능숙한 붓놀림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오쿄는 넓고 평평한 붓으로 그렸으며 붓의 한쪽에 더 많은 물감을 묻혔다. 이렇게 하면 물감의 농도가 다른 넓은 붓stroke가 생성되었다.[15] 자연만이 그의 유일한 주제는 아니었으며, 오쿄의 많은 작품은 교토 상업 지역의 일상적인 장면을 묘사한다.[2]
1767년 엔만인에서 그려진 《물 위에 내려앉는 기러기》는 그의 성숙한 화풍을 보여주는 초기 예시이다. 이 주제는 자연의 일부로 다루어졌으며, 동아시아 전통에서 이러한 이미지에 함축되었던 철학적인 것은 암시되지 않았다.[3] 1769년에 그려진 《물총새와 송어》는 이미지 상단 근처에 물고기를 기다리는 새를 특징으로 하며, 송어는 중앙 근처의 큰 바위 아래에서 헤엄치고 있다. 새, 물고기, 돌 모두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실적이고 이해 가능하며 자연스러운 작품을 만들어낸다.[3] 이후 그의 작품 중, 부유한 미쓰이 가문을 위해 1773년에 제작된 《설경의 소나무》는 금색 배경에 먹을 사용한 일본식 표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이다. 두 개의 여섯 폭 병풍에는 서로 다른 붓stroke로 구분된 나무 껍질과 소나무 잎이 묘사되어 있으며, 하얀 눈이 가지를 짓누르는 듯하다.[16] 나무 껍질은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어두운 음영과 밝은 음영만 사용하여 양감의 착시를 만드는 ''쓰케타테'' 기법으로 그려졌다.[6]
1795년에 그려진 《호즈 급류》는 오쿄의 후기 작품 중 하나이다. 두 개의 여덟 폭 병풍에 나무와 바위 덩어리와 몇 마리의 용이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자연적 요소를 설득력 있고 사실적인 방식으로 묘사하는 오쿄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파인과 같은 미술 평론가들에 따르면 용은 약점을 드러낸다. 그들은 학문적으로 다루어져 웅장하고 전설적인 본질을 잃었다고 평가한다.[17]
3. 3. 동서양 화풍의 융합
오쿄의 화풍상 특색으로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근세 일본 화가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사생(写生)'''을 중시한 점이다. 오쿄는 항상 회중에 사생첩을 숨기고 틈만 나면 스케치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화조사생도권(花鳥写生図巻)』 (천총장(千總蔵), 중요문화재)이나, 도쿄 국립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사생첩(写生帖)』 등에는 동물, 곤충, 식물 등이 다양한 각도에서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오쿄의 그림은 이러한 사생의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회화 전통적인 화제를 취급하여 장식성이 풍성한 화면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네즈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등나무꽃도(藤花図)』 병풍을 보면, 등나무의 줄기나 가지는 윤곽선을 이용하지 않고 '''츠케타테 기법'''[57]으로 대담하게 그려내는 한편, 등나무꽃송이는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그려져, 전체적으로는 린파를 연상시키는 장식성이 풍부한 대화면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탁월한 화기와 평명하고 친근한 화풍으로 인해, 오쿄의 그림은 미쓰이 가문을 비롯한 부유한 상인층에게 선호되었다. 그의 사실주의는 감정을 배제하고 자연을 궁극적인 근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전 일본 화파와 달랐다. 오쿄의 정교한 식물 및 동물 스케치는 유럽의 자연 묘사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을 보여준다.
마루야마파는 사실주의와 전통적인 장식적 요소를 융합한 새로운 화풍으로 일본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화풍은 틀을 그리지 않고 먹의 음영을 더하는 츠케타테(tsukeitate)라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오쿄의 작품은 하이라이트와 그림자에 대한 서양적 이해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오쿄의 작품은 여전히 일본적이다. 유럽 회화와 달리, 오쿄의 그림은 중간색조가 거의 없다. 더욱이 그는 대상의 배경을 거의 묘사하지 않는 동양의 전통을 따른다. 그의 그림은 종종 평범한 배경에 단일 주제를 특징으로 한다.
유명한 제자로는 고슌, 나가사와 로세츠, 모리 테츠잔, 겐키 등이 있다. 오쿄를 시조로 하는 일파는 마루야마시조파(円山四条派)[58]라고 칭해져, 현대에까지 그 계보를 끄는 교토 화단의 원류가 되고 있다.
3. 4. 마루야마파의 형성
오쿄의 화풍상 특색으로 첫번째로 꼽아야 할 것은, 근세 일본 화가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사생(写生)"'''을 중시한 점이다. 오쿄는 항상 회중에 사생첩을 숨기고, 틈만 나면 스케치 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현존하는 『화조사생도권(花鳥写生図巻)』 (천총장(千總蔵), 중요문화재)이나, 도쿄 국립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사생첩(写生帖)』 등에는 동물, 곤충, 식물 등이 다양한 각도에서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쿄의 그림은, 이러한 사생의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회화 전통적인 화제를 취급하여 장식성이 풍성한 화면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한가지 예로, 네즈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등나무꽃도(藤花図)』 병풍을 보면, 등나무의 줄기나 가지는 윤곽선을 이용하지 않고, '''쓰케타테 기법'''[57]으로 대담하게 그려내는 한편, 등나무꽃송이는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그려져, 전체적으로는 린파를 연상시키는 장식성이 풍부한 대화면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탁월한 화기와 평명하고 친근한 화풍으로 인해, 오쿄의 그림은 미츠이가를 비롯한 부유한 상인층에게 선호되었다.유명한 제자로는 고슌, 나가사와 로세츠, 모리 테츠잔, 겐키 등이 있다. 오쿄를 시조로 하는 일파는 「마루야마시조파(円山四条派)」[58]라고 칭해져, 현대에까지 그 계보를 끄는 교토 화단의 원류가 되고 있다.
교토에서 오쿄는 자신의 새로운 화풍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성공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재능 있는 미술 교사였으며,[9] 곧 많은 학생들을 받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빛, 그림자,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자연에 의존하도록 가르쳤다. 이 학교는 인기를 얻었고, 곧 오사카를 포함한 다른 지역에도 분교가 생겨났다.
고슌은 1787년에 오쿄의 학교에 합류했다. 그해 마루야마 학교는 다이죠지 절의 병풍을 그리는 의뢰를 받았다. 그해 말, 교토는 엄청난 화재를 겪었고, 오쿄와 고슌은 키우닌이라는 절로 거처를 옮겼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오쿄는 그들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여기는 것을 거부했다.[11] 고슌은 나중에 시조 화파를 창립했다.[12]
- > 제거됨
4. 대표작
작품명 | 기법 | 형태·수량 | 치수(세로x가로cm) | 소유자 | 연대 | 낙관 | 인장 | 문화재 지정 | 비고 |
---|---|---|---|---|---|---|---|---|---|
백응도 | 비단에 먹 | 1폭 | 50.5x81.4 | 다이운인 (교토시) | "엔이치 쇼" | "테이인" 백문 방인·"잇쇼" 주문 방인 | 초기작[29] | ||
겐지 이야기 그림 병풍 | 종이에 금지 채색 | 6폭 한 쌍 | 161.0x352.0 | 개인 | "낙양처사/엔잔 스이" (좌우 족) | 백문 방인·주문 방인(좌우 족) | 희귀한 초기의 대작. 스승 유테이의 영향이 남아있다.[30] | ||
맹호도 | 종이에 금지 채색 | 6폭 한 쌍 | 175.6x372.2 | 개인 | "헤이안 엔잔 스이" (좌우 족) | "헤이안 인원 테이자 츄킨" 백문 방인·"카운" 주문 방인(좌우 족) | 희귀한 초기의 대작. 개장 시 오류로 호랑이 배치가 변경됨.[31] | ||
산수도 | 종이에 먹 | 미닫이 10면 | 엔조지 호메이인 | 1765년(메이와 2년)경 | "센레이" | "헤이안 인원 테이자 츄킨" 백문 방인·"센레이" 백문 방인 | 오츠시 지정 문화재 | 오쿄 칭호 사용 직전 작품[32] | |
요도가와 양안도권 | 비단에 채색 | 1권 | 42.0x1690.0 | 알캉셸 미술 재단 | 1765년(메이와 2년) | 무 | 무 | 1763년(호레키 13년) 밑그림 부속[33] | |
호잔 연애도 | 종이에 먹 담채 | 1폭 | 159.5x174.3 | 소코쿠지 | 1767년(메이와 4년) | "메이와 정인 여름날 쓰다/헤이안 토요 오쿄" | |||
오이시 요시오 그림 | 비단에 채색 | 1폭 | 189.3x133.6 | 백경자료관 | 1767년(메이와 4년)[34] | "정인 여름날/응거 쓰다" | |||
칠난 칠복도권 | 종이에 채색 | 3권 | 322x1420.6(천재 권) 31.9x1062.3(인재) 32.2x1209.1(복수) | 소코쿠지쇼텐카쿠 미술관 | 1768년 (메이와 5년) | "메이와 5 무자년 중추 엔오쿄 그림/응거" | "응거의 인" 백문 방인 | 중요 문화재 | 시가·엔만인, 만노 미술관 구장 |
란정 곡수도 미닫이·벽 부착 | 종이에 먹 담채 | 9면 | 167.5x68.5(4면) 169.5x93.0(4면) 168.7x137.3 | 개인 | 1768년(메이와 5년) | 소재지 불명[35] | |||
공작 모란도 | 비단에 채색 | 1폭 | 131.5x191.3 | 쇼코쿠지 쇼텐카쿠 미술관 | 1771년 (메이와 8년) | "신묘 여름날/응거" | "응거의 인" 백문 방인 | 중요 문화재 | 시가·엔만인, 만노 미술관 구장 |
사생 도감 | 종이에 채색 | 2권 | 31.8x1009.0(갑권) 44.0x277.0(을권) | 센소 컬렉션 | 1770년-72년 (메이와 7년~안에이 원년) | 중요 문화재 | 엔잔파 4대·엔잔 오리츠 구장 | ||
대폭포도 | 종이에 담채 | 1폭 | 362.8x144.5 | 소코쿠지 | 1772년 (안에이 원년) | "임진 맹하 쓰다/응거"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 중요 문화재 | 시가·엔만인, 만노 미술관 구장 |
죽학 치송도 병풍 | 종이에 금지 채색 | 6폭 한 쌍 | 153.5x357.8(각) | 후쿠오카시 미술관 | 1772년(안에이 원년) | "임진 중동 쓰다/응거" | |||
운룡도 병풍 | 종이에 담채 | 6폭 한 쌍 | 176.0x365.0(각) | 기후·법인 | 1773년 (안에이 2년) | "안에이 계사 중하 쓰다/응거" (좌우 족)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좌우 족) | 중요 문화재 | 도지 간치인 전래 |
산수도 병풍 | 비단에 채색 | 6폭 한 쌍 | 158.5x355.0(각) | 미이 문고 (미이 기념 미술관 보관) | 1773년(안에이 2년) | ||||
백접도 | 비단에 채색 | 1폭 | 104.4x143.4 | 도쿠가와 뮤지엄 | 1775년(안에이 4년) | "안에이 을미 모추 쓰다/응거"[36] | 백문 방인 2개 | ||
우죽 풍죽도 병풍 | 종이에 먹 | 6폭 한 쌍 | 160.5x354.0(각) | 교토·엔코인 | 1776년 (안에이 5년) | "안에이 병신 계하 응거 그림/엔코 정사"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좌우 족) | 중요 문화재 | |
등화도 병풍 | 종이에 금지 채색 | 6폭 한 쌍 | 156.7x359.7(각) | 네즈 미술관 | 1776년(안에이 5년) | "안에이 병신 초추 쓰다/응거" (좌우 족)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좌우 족) | 중요 문화재 | |
강주 히노 마을 그림 병풍 | 종이에 먹 | 6폭 한 쌍 | 154.5x350.4(각) | 산노마루 쇼조칸 | 1776년(안에이 5년) | ||||
모란 공작도 | 비단에 채색 | 1폭 | 130.4x98.8 | 산노마루 쇼조칸 | 1776년 (안에이 5년) | "안에이 병신 모추 쓰다/응거"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 ||
쌍계도 | 종이에 금지 채색 | 병풍 1기 | 114.0x164.0 | 야사카 신사 | 1776-77년(안에이 5-6년) | "응거" | "응거의 인""츄켄" 주문 방인 | 닭이 빠져나올까 걱정되어 금속망으로 덮어놓았으며, 못 자국이 남아 있다.[37] | |
화락 사계 유희도권 | 비단에 채색 | 2권 | 28.2x561.2(하권) | 도쿠가와 미술관 | 1777년(안에이 6년) 이전 | 중요 미술품 | |||
도연명 그림 병풍 | 종이에 금지 채색 | 2폭 한 짝 | 175.0x190.0 | 개인 | 1777년(안에이 6년) | 중요 미술품[38] | |||
후지 미호도 병풍 | 종이에 먹 담채 | 6폭 한 쌍 | 153.8x357.6(각) | 지바시 미술관 | 1779년(안에이 8년) | ||||
확원 선생[39]·단숙 부인상[40] | 비단에 채색 | 2폭 | 91.8x32.3(확원 선생) 100.1x32.4(단숙 부인상) | 도쿄 국립 박물관 | 1779년(안에이 8년) | 무 | 무 | ||
고빙자명도 | 종이에 금지 채색 | 1폭 | 113.6x166.3 | 오사카 덴만구 | 1780년(안에이 9년) | "고빙자명/경자 초춘 쓰다 응거"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씨" 주문 방인[41] | ||
아라시야마 춘효도 | 종이에 담채 | 1폭 | 87.5x126.5 | 잇소 미술관 | 1780년(안에이 9년) | "경자 중춘 쓰다/응거"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 ||
유령도 | 비단에 담채 | 1폭 | 97.8x26.0 | 개인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교 미술관위탁[42]) | 1772-81년(안에이 연간) | "희도"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 진필로 인정되는 몇 안 되는 "유령도" 중 하나.[43] 아오모리현히로사키시큐토지본도 진필. | |
군학도 | 종이에 금지 채색 | 6폭 한 쌍 | 152.0x350.0 | 개인 | 1772-81년(안에이 연간) | "응거" | "등응거 인" 백문 방인·"츄켄씨" 주문 방인[44] | ||
심산 대택도 병풍 | 종이에 담채 | 6폭 한 쌍 | 119.7x256.0(각) | 닌나지 | 40대 말에서 50대 초반경 | "응거 쓰다" (좌우 족) | |||
겐지 사계도 병풍 | 종이에 금지 채색 | 6폭 한 쌍 | 171.3x364.6(각) | 산노마루 쇼조칸 | 1781-82년(텐메이 원-2년)경 | "겐 응거" (각 족) | "응거의 인" 백문 방인(각 족)[45] | ||
아침 해 그림·장미 문조 그림 | 종이에 은지 채색(아침 해 그림) 종이에 금지 채색(장미 문조 그림) | 2폭 | 119.4x109.0(각) | 소코쿠지 | 1784년(텐메이 4년) | 만노 미술관 구장 | |||
명안원 구장 장벽화 | 도쿄 국립 박물관 | 1784년(텐메이 4년) | 아이치현오하루초 명안원 서원 장벽화. 현재 도쿄 국립 박물관 내 응거관 소재. | ||||||
신주 화상 | 비단에 채색 | 1폭 | 107.9x41.6 | 난젠지 자씨원[46] | 1785년(텐메이 5년) | 무 | "응거" 주문 방인[43] | ||
죽작도 병풍 | 종이에 담채 | 6폭 한 쌍 | 165.5x373.0(각) | 시즈오카현립 미술관 | 1785년(텐메이 5년) | ||||
초당사 본당 장벽화 | 종이에 먹 | 7면·3폭 | 187.3x92.0(6면) 189.3x173.2 254.0x79.0 255.0x179.0 254.0x79.0 | 초당사 | 1785년(텐메이 5년) | "응거 그림"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 중요 문화재 | |
무료사 본당 장벽화 | 무료사 | 1786년(텐메이 6년) | "텐메이 병오 초동 쓰다/헤이안 응거"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 중요 문화재 | ||||
추월 설협도 병풍 | 종이에 먹 담채 | 6폭 한 쌍 | 154.6x348.2(각) | 지바시 미술관 | 1786년(텐메이 6년) | ||||
후지 권수도 병풍 | 종이에 금지 채색 | 6폭 한 쌍 | 155.0x361.0(각) | 개인 | 1786년(텐메이 6년) | "텐메이 병오 초하 쓰다/응거" (좌우 족)[47] | |||
물푸레나무 토끼 그림 | 비단에 채색 | 1폭 | 104.5x42.0 | 시즈오카현립 미술관 | 1786년(텐메이 6년) | "병오 중추 쓰다/응거"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 ||
설송도 병풍 | 종이에 담채 | 6폭 한 쌍 | 155.7x361.2(각) | 미이 문고 (미이 기념 미술관 보관) | 1786년(텐메이 6년)경 | "응거 쓰다" (각 족)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 국보 | |
금비라궁 장벽화 | 곤피라궁 | 1787년 (텐메이 7년) 및 1794년 (간세이 6년) | 중요 문화재 | 미이 가 주문. 『폭포도』가 유명 | |||||
다이죠지 장벽화 | 165면 | 효고·다이죠지 | 1787년 (텐메이 7년) 및 1795년 (간세이 7년) | 중요 문화재 | |||||
청풍 폭포도 | 종이에 채색 | 1폭 | 178.0x91.9 | 산토리 미술관 | 1787년(텐메이 7년) | ||||
사계 초화도 병풍 | 종이에 채색 | 6폭 한 쌍 | 155.2x559.2 | 대중암 삽화 산계 어류 | 1787년(텐메이 7년) | "텐메이 정미 맹추 쓰다/응거" (좌우 족)[48][49] | |||
포대도 | 종이에 먹 | 1폭 | 210.0x108.2 | 나고야시 박물관 | 1788년 (텐메이 8년) | "고화 그림/텐메이 무신 초동 헤이안 겐 응거" | "응거의 인" 백문 방인 | 성철 주초, 송설계 찬. 『집고십종』"명물 고화" 소재 "묘심사 십물양개필 포대도" 모사[50] | |
곤고지 장벽화 | 53폭·2폭 한 쌍 | 곤고지 (가메오카시) (도쿄 국립 박물관 위탁) | 1788년 (텐메이 8년) | ||||||
파상 백골 좌선도 | 종이에 먹 담채 | 1폭 | 132.6x59.0 | 효고·다이죠지 | 1781-89년(텐메이 연간) | ||||
삼미인도 | 비단에 채색 | 1폭 | 92.1x64.9 | 토쿠간지 | 1781-89년(텐메이 연간) | "헤이안 츄켄 사이 화"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 ||
당미인도 | 비단에 채색 | 1폭 | 122x67.5 | 이치바시 도쿠가와가 소장 | "응거"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츄켄" 백문 방인 | |||
얼음 그림 | 종이에 먹 | 2폭 한 짝 | 60.5x182.1 | 대영 박물관 | 1781-89년(텐메이 연간) | "응거" | "응거" 주문 방인 | ||
견립 에구치의 군 그림 | 비단에 채색 | 1폭 | 세이카도 문고 | 1794년 (간세이 6년) | |||||
호츠가와도 병풍 | 종이에 담채 | 8폭 한 쌍 | 154.5x483.0(각) | 센소 컬렉션 | 1795년 (간세이 7년) | "을묘 만하 쓰다/응거" (오른쪽 족) "응거"(왼쪽 족) | "응거의 인" 백문 방인(좌우 족) | 중요 문화재 | |
죽계도 | 종이에 금지 채색 | 미닫이 2면 | 163.5x165.5(각) | 오카야마·렌다이지 | 1795년 (간세이 7년) | 무 | 무 | 미나카와 기엔 식어 | |
군수도 병풍 | 6폭 한 쌍 | 산노마루 쇼조칸 | |||||||
매화 가지를 가진 입미인도 | 비단에 채색 | 조세이 대학 미즈타 미술관 |
5. 오쿄를 다룬 작품
오쿄의 그림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대중 오락에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케나미 쇼타로의 소설 오니헤이 한카초에서는 도적의 인상착의를 시조 엔잔파의 화가인 이시다 치쿠센에게 그리게 했으며, 사실적인 화풍으로 막부의 전속 화가인 가노파에 못지않다고 극 중에서 묘사되고 있다.[1]
6. 오문십철(応門十哲)
마루야마 오쿄(円山応挙)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10명을 오문십철(応門十哲)이라고 부른다.
- 고마이 겐키
- 나가사와 로세쓰
- 야마자토 가쿠레이
- 모리 텟산
- 요시무라 코케이
- 야마구치 소켄
- 오쿠 분메이
- 겟센
- 니시무라 난테이
- 와타나베 난가쿠
참조
[1]
문서
Sullivan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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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on 3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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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e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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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on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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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a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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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付立て」(つけたて)とは、1本の筆の全体に淡墨(淡彩)、先端の部分に濃墨(濃彩)を含ませて、一筆で濃淡を表現する技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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