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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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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묘법원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위치한 덴다이종 사찰로, 고시라카와 천황 시대에 역사적 중요성을 얻었다. 묘법원은 원래 히에이산의 작은 사찰에서 시작되었으며, 고시라카와 법황의 지원을 받아 락중으로 이전했다. 묘법원은 고리(국보)와 대서원(중요문화재) 등 건축물과 포르투갈령 인도 부왕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외교 문서(국보) 등 다수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경내 일부는 무료로 참배할 수 있으며, 특별 공개 시에는 건물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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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인
기본 정보
문에서 창고(국보)를 바라보는 모습
문에서 창고(국보)를 바라본 모습
명칭묘호인
로마자 표기Myōhōin
위치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묘호인마에카와초 447
산호남예산 (南叡山)
원호묘호인 (妙法院)
종파천태종
사격교토 5개실 몬제키
본존보현보살 (중요문화재)
창건 연도헤이안 시대 초기
개산사이초
후다쇼 등신부츠레이죠쥰파이노미치 제119번 (교토 제39번)
문화재
국보창고, 포르투갈인도 부왕 신서
중요 문화재대서원, 목조 보현보살 기상상, 견본저색 고시라카와 법황

2. 역사

2. 1. 기원

묘법원은 유명 사찰이 집중된 교토시히가시야마구 남부에 있다. 인근은 고시라카와 법황의 거처였던 호주지전의 옛터이며, 근처에는 지샤쿠인, 교토 국립 박물관, 호코지, 산주산겐도, 신히에 신궁(이마히에진구), 고시라카와 법황 호주지릉 등이 있다. 근세 초기에 건립된 호화로운 고리(庫裏, 국보)와 대서원(大書院, 중요문화재) 등이 세워져 있지만, 절 안은 가을철 등 특별 공개 시기를 제외하고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덴다이종의 다른 문적 사원(쇼렌인, 산젠인 등)과 마찬가지로, 묘법원은 히에이산 위에 있던 방(작은 사찰)이 그 기원으로, 초대 문주는 덴교 대사(사이초)로 여겨진다. 그 후, 사이토 호도인(西塔宝幢院)의 에료가 계승하여 그 가르침을 전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헤이안 시대 말기(12세기), 고시라카와 법황 시대에 락중(洛中, 교토)으로 이전했으며, 한때 아야노코지 코사카(현재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야사카 신사의 남서쪽 부근으로 추정)에 있었지만, 근세 초기에 현재의 위치인 호주지전 터로 이전했다.

『가초 요략』등의 기록에 따르면, 히에이산 삼탑 중 서탑에 위치한 "혼가쿠인(本覚院)"이 묘법원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묘법원과 혼가쿠인의 관계는 반드시 명확하지 않아, 혼가쿠인에서 갈라져 묘법원이 성립했다는 설, 반대로 묘법원에서 혼가쿠인이 갈라져 나왔다는 설, 묘법원은 혼가쿠인의 별칭이라는 설 등이 있다. 또한, 묘법원이 히에이산에서 락중으로 이전한 시기, 아야노코지 코사카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한 시기에 대해서도 정확한 것은 불분명하며, 근세 이전의 사찰 역사는 뒤얽혀 있다. 현재 위치에는 원래 분로쿠 4년(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덴다이 승려 도초가 연 쇼코인이 있었다.

2. 2. 고시라카와 법황과 묘법원

사실상 묘법원이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고시라카와 천황 시대이다. 고시라카와 천황은 재위 3년도 안 되어 양위하고, 호겐 3년(1158년)에는 상황, 가오 원년(1169년)에는 출가하여 법황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고시라카와 상황은 양위 후 거처인 원어소인 호주지전을 조영했으며, 에이랴쿠 2년(1161년)부터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여기서 인세이가 행해졌고, 또한 어소 서쪽에 천 체의 천수관음상을 안치하는 거대한 불당(연화왕원= 산주산겐도)이 세워진 것은 역사에 널리 알려져 있다(산주산겐도 낙경은 초칸 2년〈1164년〉). 상황은 에이랴쿠 원년(1160년)에는 어소의 진수사로 히에이산의 진수사인 히에이사를 권청하여 신히에이사를, 신앙하고 있는 구마노 삼산에서 구마노 곤겐을 권청하여 신구마노사를 건립했다.

이 신히에이사 초대 벳토(대표자,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 가오 2년(1170년) 무렵 가모가와의 동쪽 아야노코지에 이전해 온 묘법원의 승려 쇼운이었다. 쇼운은 미코히다리 가의 후지와라노 타다나리의 아들이며, 텐다이좌주를 지낸 카이슈의 조카에 해당한다. 쇼운은 고시라카와 상황의 호지승이었으며, 상황으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묘법원은 상황의 어소 안에 있는 호주지와 신히에이사를 말사로 삼아 관리하에 두었다.

묘법원의 몬슈 계보에서는 사이초를 초대 몬슈로 하여 13대가 카이슈, 15대가 고시라카와 법황(법명은 교신), 16대가 쇼운이다. 뒤이어 17대 몬슈인 지쓰젠(쇼운의 제자이자 조카)도 후에 텐다이좌주가 되었다. 18대 몬슈로 손쇼 법친왕(고타카쿠라인 황자)이 입사한 이후 몬제키 사원(아야노코지 몬제키)으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어, 근세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몬슈의 대부분이 법친왕 (황족으로 출가 후 친왕선하를 받은 자를 가리킴)이다.

가마쿠라 시대의 묘법원은 "아야노코지 방", "아야노코지 어소", "아야노코지 궁" 등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의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기온마치 미나미가와 부근에 주요 방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호코지 대불에 인접하는 현재 위치로의 이전 시기 등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남북조 시대에는 고다이고 천황황자인 손초 법친왕(무네나가 친왕)이 쇼추 2년(1325년) 묘법원 몬제키를 계승. 겐토쿠 2년(1330년)에는 텐다이좌주로 임명되었으나, 겐코의 변으로 체포되어 사누키국으로 유죄가 되었다. 통칭으로 "묘법원 궁"이라고 불렸다는 것이 타이헤이키 등에 기재되어 있다.

2. 3. 가마쿠라 시대

2. 4. 남북조 시대

2. 5. 무로마치 시대

2. 6.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2. 7. 에도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분로쿠 4년(1595년)에 조영한 호코지 대불(교토의 대불)과 대불전은 호코지 경내에 있던 묘법원의 "경당"에서 천승공양이 거행될 때, 다수의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했던 부엌이 현존하는 묘법원 고리(국보)로 여겨진다.[2] 그러나 당시 이 장소에는 쇼코인이 건립되어 대불의 주지를 맡고 있었으므로, 이 고리가 실제로 천승공양에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묘법원이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은 겐나 원년의 일이다.[2]

근세의 묘법원은 호코지(교토의 대불), 렌게오인(산주산겐도) , 신히요시 신사를 겸대하는 대사원이었다.[2] 묘법원 문주가 호코지 주직을 겸무하게 된 것은 겐나 원년(1615년)부터인데, 이는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가 에도 막부에 멸망당한 것을 계기로 이루어졌다.[2] 쇼오 4년(1291년)의 고시라카와 법황 백 회기 공양은 묘법원 문주인 손교가 산주산겐도에서 거행한 이후, 50년마다의 성기 공양은 묘법원 문주가 산주산겐도에서 거행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2]

간세이 10년(1798년) 7월 1일(양력 8월 12일) 밤, 호코지 대불전에 낙뢰가 떨어져 화재가 발생, 대불전과 교토의 대불은 잿더미가 되었다.[3] 묘법원은 교토 대불 재건을 시도했지만, 당시와 같은 규모로 재건되지는 못했다.[3] 당시 묘법원 문주였던 시닌 법친왕은 대불 소실에 죄책감을 느껴 매일 소실된 자리에 참배하고 공양을 올렸으며, 식사량을 줄여 참회의 뜻을 표했다.[3]

묘법원 문주 시닌 법친왕상(묘법원 소장). 시닌 법친왕이 문주로 재임 중이던 시기에 호코지 대불과 대불전이 낙뢰로 소실되었다.


막말에는 산조 사네토미존왕양이파 공경 7명이 교토에서 추방된 "칠경락"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4] 당시 도사번주인 야마우치 가문이 묘법원을 진소로 빌려 사용했기 때문에, 산조 가문의 사네토미에게 몸을 의탁하기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4] 모인 공경들은 여기서 "묘법원 회의"를 열어 선후책을 논의했고, 그 결과 조슈번에 의지하여 서쪽으로 피신했다.[4] 경내 서남쪽 구석에는 "칠경락비"가 세워져 있다.[4]

1954년(쇼와 29년)에는 경내의 일부였던 정원 "적취원"이 일본전매공사에 매수되었다.[2] 이후 교토전매병원을 거쳐 2016년(헤이세이 28년)부터는 포시즌스 호텔 교토가 되었다.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구고구령취조장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막말기 묘법원령은 6개 촌, 1,604석 여였다.

  • 야마시로국아타고군 중
  • * 시시가타니 촌 중 - 95석
  • * 야나기하라 장 중 - 463석 여
  • * 우에노 촌 중 - 93석 여
  • 야마시로국 가도노군 중
  • * 히가시시오코지 촌 중 - 111석 여
  • * 우시가세 촌 - 250석
  • 야마시로국 오토쿠니군 중
  • * 테라토 촌 중 - 590석 여

2. 8. 메이지 시대 이후

분로쿠 4년(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돌아가신 조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일본 불교 8종(천태종, 진언종, 율종, 선종, 정토종, 일련종, 시종, 일향종)의 승려들을 모아 호코지 경내에 있던 묘법원의 "경당"에서 "천승공양"을 거행했다.[2] 당시 다수의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했던 부엌이 현존하는 묘법원 고리(국보)라고 여겨지지만, 당시 이 장소에는 쇼코인이 건립되어 대불의 주지를 맡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천승공양에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2]

겐나 원년(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가 멸망한 후, 묘법원 문주 죠인 법친왕은 에도 막부에 협력하여 토요쿠니 신사에 보관되어 있던 히데요시의 유품과 진구지(토요쿠니 신사 별당 신류인 본슌의 역택)를 횡령했다.[2] 쇼오 4년(1291년)의 고시라카와 법황 백 회기 공양은 묘법원 문주인 손교가 산십삼간당에서 거행한 이후, 50년마다의 성기 공양은 묘법원 문주가 산십삼간당에서 거행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3]

간세이 10년(1798년) 7월 1일 밤, 호코지 대불전에 낙뢰가 떨어져 화재가 발생, 대불전과 교토의 대불은 잿더미가 되었다. 묘법원은 대불 재건을 시도했지만, 당시와 같은 규모의 것은 재건되지 못했다.[3] 당시 묘법원 문주 시닌 법친왕은 대불 소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매일 참배하며 공양을 올리고 대불 재건을 기도했다.[3]

막말에는 산조 사네토미존왕양이파 공경 7명이 교토에서 추방된 "칠경락"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당시 도사번이 묘법원을 진소로 빌려 사용했기 때문에, 친척 관계에 있던 산조 가문의 사네토미에게 몸을 의탁하기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4]

1954년(쇼와 29년), 경내의 일부였던 정원 "적취원"("다이라노 시게모리"의 별저 "고마쓰도노"의 정원)이 일본전매공사에 매수되었다.

2. 9. 막말의 칠경락 사건

3. 경내

가람은 서쪽을 정면으로 하며, 히가시오지도리에 면하여 당문과 통용문이 있다. 경내에는 서쪽 정면에 고리(庫裏), 오른쪽에 신전이 있으며, 본당은 그 남쪽에 세워져 있다.


  • 본당 (보현당) - 본존 보현보살을 안치한다.
  • 남 정원 - 지천(池泉) 감상식 정원.
  • 신전
  • 서룡전
  • 변재천
  • 현관 (중요문화재)
  • 고리 (국보)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건축. 고리는 사찰의 부엌 겸 사무소 역할을 하는 안쪽으로 향한 건물이다. 묘호인 고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조를 위한 "천승공양"을 행했을 때의 부엌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호화로운 건물이다. 고리는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원의 고리는 입모양 지붕으로 한다. 내부는 흙바닥, 널빤지 방, 좌식 방의 3부분으로 나뉘며, 흙바닥·널빤지 방 부분은 천장 널빤지를 대지 않고, 관·량 등의 구조재를 그대로 드러낸 호쾌한 구조로 되어 있다.
  • 대서원 (중요문화재) - 대서원과 현관은 겐나 5년, 주궁도후쿠몬인 입내 시에 건축된 여어어소의 건물을 이전한 것이라고 전해지며, 양식적으로도 그 무렵의 것으로 생각된다.
  • 백서원
  • 고산수 정원
  • 호마당
  • 성천당
  • 용화장 (보물관)
  • 북 정원 - 지천 감상식 정원. 과거에는 현재 포시즌스 호텔 교토의 정원이 된 "적취원"의 일부였다.
  • 토장
  • 수장고
  • 표문
  • 당문

4. 문화재

1955년 (쇼와 30년) 6월, 포르투갈령 고아의 인도 부왕 두아르테 드 메네제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외교 문서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문서는 1588년 (일본의 덴쇼 16년)에 작성되었으며, 양피지로 제작되었다. 크기는 세로 60.6cm, 가로 76.4cm이다. 예수회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문서를 맡아 1590년 (덴쇼 18년) 일본에 왔고, 1591년 (덴쇼 19년) 주라쿠다이의 히데요시에게 전달되었다.

포르투갈령 인도 부왕 신서


문서 상부와 좌우에는 유채 세밀화가, 하부에는 끈과 술이 달려 있다. 상부에는 로마의 일곱 언덕, 군신 마르스, "SPQR" 문자가 새겨진 방패,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그려진 방패가 배치되어 있다. 중앙 본문 머리글자 "C" 안에는 도요토미 가문의 가문인 오동나무가 그려져 있고, 포르투갈어 본문이 기록되어 있다. "Vossa Alteza(전하)"와 약어 V.A는 금색 문자이며, 최하단 중앙에는 인도 부왕의 서명이 있다. 내용은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을 축하하고, 바테렌 추방령 완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을 인정하면서도,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고자 하는 포르투갈의 외교적 노력을 보여준다.

이 문서는 교토 국립 박물관에 기탁되어 있으며, 특별 공개 시 류게쿠조(보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 대서원(大書院)
  • 현관(玄関)
  • 비단 바탕에 채색한 고시라카와 법황상(後白河法皇像)
  • 묘법원(妙法院) 장벽화 58면 (부 14면, 1기) - 현관(玄関), 대서원(大書院) 1지간(一之間)・2지간의 장벽화로, 근세 초기의 가노파(狩野派)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목조 부동명왕 입상(不動明王立像) - 호마당(護摩堂) 본존. 헤이안 시대 전기. 2020년부터 도쿄 국립 박물관에 기탁[5]
  • 목조 보현보살 기상상(普賢菩薩騎象像) - 본당(보현당) 본존. 헤이안 시대 말기.
  • 추초나전 문대(秋草蒔絵文台)
  • 명관복류(明官服類) (분로쿠 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수증)[6]
  • 산가심중집(山家心中集)[7]
  • 내증불법상승혈맥보(内証仏法相承血脈譜)
  • 고코마츠 천황 친한 소식(宸翰消息)
  • 당공양기(堂供養記) (춘기(春記), 대기(大記))
  • 묘법원(妙法院) 문서(妙法院文書) (792통) 42권, 21책, 2첩, 14폭, 431통, 27매, 2쌍, 1포[8]


묘법원 대서원 장벽화는 종이 바탕에 금색을 칠하고, 소나무, 당나라 인물, 과자, 군선, 당나라 미인, 초화, 버드나무, 벚꽃, 가을 풀, 당나라 아이들 놀이 그림 등을 그린 58면(부 14면, 1기)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관복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증한 것으로 원령, 첨리, 피변복, 중단, 상, 옥구, 서, 기린복, 사자복, 맹복, 비어복, 두우복, 변복, 내의, 상, 말, 화, 대포 등이 포함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련된 유물들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4. 1. 국보

1955년 (쇼와 30년) 6월, 포르투갈령 고아의 인도 부왕 두아르테 드 메네제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외교 문서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문서는 1588년 (일본의 덴쇼 16년)에 작성되었으며, 양피지로 제작되었다. 크기는 세로 60.6cm, 가로 76.4cm이다. 예수회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문서를 맡아 1590년 (덴쇼 18년) 일본에 왔고, 1591년 (덴쇼 19년) 주라쿠다이의 히데요시에게 전달되었다.

문서 상부와 좌우에는 유채 세밀화가, 하부에는 끈과 술이 달려 있다. 상부에는 로마의 일곱 언덕, 군신 마르스, "SPQR" 문자가 새겨진 방패,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그려진 방패가 배치되어 있다. 중앙 본문 머리글자 "C" 안에는 도요토미 가문의 가문인 오동나무가 그려져 있고, 포르투갈어 본문이 기록되어 있다. "Vossa Alteza(전하)"와 약어 V.A는 금색 문자이며, 최하단 중앙에는 인도 부왕의 서명이 있다. 내용은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을 축하하고, 바테렌 추방령 완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문서는 교토 국립 박물관에 기탁되어 있으며, 특별 공개 시 류게쿠조(보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4. 2. 중요문화재


  • 대서원(大書院)
  • 현관(玄関)
  • 비단 바탕에 채색한 고시라카와 법황상(後白河法皇像)
  • 묘법원(妙法院) 장벽화 58면 (부 14면, 1기) - 현관(玄関), 대서원(大書院) 1지간(一之間)・2지간의 장벽화로, 근세 초기의 가노파(狩野派)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목조 부동명왕 입상(不動明王立像) - 호마당(護摩堂) 본존. 헤이안 시대 전기. 2020년부터 도쿄 국립 박물관에 기탁[5]
  • 목조 보현보살 기상상(普賢菩薩騎象像) - 본당(보현당) 본존. 헤이안 시대 말기.
  • 추초나전 문대(秋草蒔絵文台)
  • 명관복류(明官服類) (분로쿠 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수증)[6]
  • 산가심중집(山家心中集)[7]
  • 내증불법상승혈맥보(内証仏法相承血脈譜)
  • 고코마츠 천황 친한 소식(宸翰消息)
  • 당공양기(堂供養記) (춘기(春記), 대기(大記))
  • 묘법원(妙法院) 문서(妙法院文書) (792통) 42권, 21책, 2첩, 14폭, 431통, 27매, 2쌍, 1포[8]


묘법원 대서원 장벽화는 종이 바탕에 금색을 칠하고, 소나무, 당나라 인물, 과자, 군선, 당나라 미인, 초화, 버드나무, 벚꽃, 가을 풀, 당나라 아이들 놀이 그림 등을 그린 58면(부 14면, 1기)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관복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증한 것으로 원령, 첨리, 피변복, 중단, 상, 옥구, 서, 기린복, 사자복, 맹복, 비어복, 두우복, 변복, 내의, 상, 말, 화, 대포 등이 포함된다.

5. 참배

경내 일부는 무료로 들어갈 수 있으며, 본당(보현당) 문 앞까지 가서 참배할 수 있다. 건물 내부는 통상 비공개이나, 예년 11월경 또는 봄에 특별 공개가 진행된다.

6. 교통

묘호인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히가시오지도리 시부야 아래 묘호인 앞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교토 시영 버스 "히가시야마 시치조" 버스 정류장(급행 100・202・206・207・208 계통)에서 하차하면 바로 도착할 수 있다. 교토 급행 버스 (프린세스 라인 버스) "히가시야마 시치조" 버스 정류장도 이용 가능하다.

참조

[1] 웹사이트 天台宗について - 主な寺院 https://www.tendai.o[...]
[2] 서적 京都大仏御殿盛衰記 法藏館 2003
[3] 서적 京都大仏御殿盛衰記 法藏館 2003
[4] 서적 京都石碑探偵 光村推古書院 2004
[5] 웹사이트 彫刻展示作品リスト https://www.tnm.jp/m[...] 2020-08-09
[6] 간행물 平成20年7月10日文部科学省告示第115号 2008-07-10
[7] 간행물 平成27年9月4日文部科学省告示第139号 2015-09-04
[8] 간행물 平成29年9月15日文部科学省告示第117号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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