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노리나가 (오규 마쓰다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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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노리나가는 1614년 아버지 마쓰다이라 이에노리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한 인물이다.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이후 여러 번의 이봉을 거쳐 도토미 하마마쓰번, 고즈케 다테바야시번의 영주를 역임했다. 1642년 로주에 임명되어 정무를 총괄했으며, 1654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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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노리나가 (오규 마쓰다이라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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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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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게이초 5년 1월 12일 (1600년 2월 26일) |
사망 | 조오 3년 1월 26일 (1654년 3월 14일) |
초명 | 겐지로 (유명), 노리카쓰 (초명) → 노리나가 |
계명 | 겐코인 신요 도테쓰 |
묘소 |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젠도지 |
관위 | 종5위하 → 종4위하, 이즈미노카미, 시종 |
막부 | 에도 막부 노중 |
번 | 미노이와무라번 번주 → 도토미하마마쓰번 번주 → 고즈케다테바야시번 번주 |
씨족 | 오규 마쓰다이라가 |
가족 | 부: 마쓰다이라 이에노리 모: 마쓰키 ( 이시카와 야스미치의 딸) 형제: 노리나가, 도모노리, 오쿠보 노리타카 정실, 지쿠 나오마사 실 등 |
배우자 | 정실: 마쓰다이라 야스나가의 딸 계실: 이시카와 다다후사의 딸 측실: 아카기 씨 |
자녀 | 노리히사 노리마사 노리카즈 마스야마 마사토시 정실 마쓰다이라 노리치카 정실 오가사와라 나가노부 정실 데이안인 등 |
이름 | |
일본어 | 松平 乗寿 (마쓰다이라 노리나가) |
로마자 표기 | Matsudaira Norinaga |
2. 생애
게이초 19년(1614년), 아버지 마쓰다이라 이에노리가 사망하면서 15세의 나이로 오규 마쓰다이라 종가의 가독을 상속받았다.[1] 같은 해 겨울부터 오사카의 진에 참전하여, 교토의 니조 성에서 미노 무사들을 통솔하는 조두(組頭)로 임명되었다. 이나바 마사나리, 엔도 요시타카 등 여러 장수를 이끌고 가와치 히라카타에 포진하여 오사카 세력과 대치했다.[1] 요도가와의 물을 이용한 오사카 측의 수공(水攻)을 막아내는 등 공을 세웠다.[1]
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미노와 시나노의 병사들을 이끌고 히라카타에 다시 진을 쳤다. 교고쿠 다다타카 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모리구치 전투에서 오사카 성 함락 후 도망치는 적병 57명의 목을 베는 전공을 세웠다.[1] 이러한 첫 출진의 공으로 막부로부터 중용받게 되었다.[1]
겐나 2년(1616년) 정초, 슨푸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1월 27일 종5위하 이즈미노카미에 임명되었다. 당시 16세였다.
간에이 8년(1631년), 이와무라 성 아래의 다케나미 신사에서 하치만 신사로 가마 행렬을 창시했다. 간에이 9년(1632년) 이와무라 성의 수호와 영민의 안녕을 기원하며 석실 천체 불상을 건립했다.
간에이 15년(1638년), 미노 이와무라 번 2만 석에서 도토미 하마마쓰 번 3만 6000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고 옮겨졌다.[1] 간에이 19년(1642년) 12월, 이에쓰나의 세자 시절 로주에 임명되었고, 종4위하에 서임되었다. 쇼호 원년(1644년) 2월 28일에는 고즈케 다테바야시 번 6만 석으로 다시 영지가 늘어나고 옮겨졌다.[1] 1651년,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4대 쇼군이 되자 정식으로 로주가 되어 정무를 총괄했고, 시종에도 임명되었다.
조오 3년 2월 1일 (1654년 3월 19일), 다테바야시에서 55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젠도지에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가독 상속
게이초 5년 1월 12일(1600년 2월 26일), 오규 마쓰다이라가 종가 6대 마쓰다이라 이에노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게이초 19년(161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15세에 가독을 이었다.[1]같은 해 겨울부터의 오사카 겨울의 진에 출진하여 교토의 니조 성에서 미노의 무사들을 통솔하는 조두로 임명되었다.[1] 이나바 마사나리, 엔도 요시타카, 다케나카 시게카도 등 여러 장수를 이끌고 가와치의 히라카타에 포진하여 오사카 세력과 대치했다.[1]
오사카 세력이 히라카타의 데구치 촌의 둑을 파서 요도가와의 물을 넘치게 하자, 노리나가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다시 메웠다.[1] 후에 오사카 세력과 화목할 때, 다마쓰쿠리구치의 둑을 무너뜨리고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고 돌아갔다.[1]
게이초 20년(1615년) 5월에 발발한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미노와 시나노의 장병들을 이끌고 히라카타에 다시 진을 쳤다.[1] 5월 7일에 교고쿠 세력이 비젠 섬으로 진격하고, 노리나가도 모리구치로 진격했다.[1] 이때 오사카 성은 함락되어 패병이 도망치려 하자 붙잡아 57명의 목을 베어 밤이 되어 히라카타의 진으로 돌아갔다.[1] 노리나가는 첫 출진에서 공을 세워 막부로부터 중용받게 되었다.[1]
겐나 2년(1616년) 정초에 슨푸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했다.[1] 1월 27일에 종5위하에 서임되어 이즈미노카미에 임명되었다. 이때 나이가 16세였다.[1]
간에이 8년(1631년), 노리나가는 이와무라 성 아래의 다케나미 신사에 배신으로 모셔진 도야마 가게토모가 가마를 타고, 당시 이와무라 성내 팔번 만곡에 진좌해 있던 하치만 신사의 배신인 가토 가게쓰라를 만나러 가는, 거기에 많은 읍민들이 수행하는 가마 행렬을 창시했다.[1]
간에이 9년(1632년) 이와무라 성의 진호와 영민의 안태 번영을 기원하여 석실 천체 불상을 건립했다.[1]
2. 2. 오사카 전투 참전
게이초 19년(1614년), 아버지 마쓰다이라 이에노리가 사망하면서 15세의 나이로 오규 마쓰다이라 종가의 가독을 이었다. 같은 해 겨울부터 오사카의 진에 참전하였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는 교토 니조 성에서 미노 무사들을 통솔하는 조두(組頭)로 임명되어 이나바 마사나리, 엔도 요시타카 등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가와치의 히라카타에 진을 쳐 오사카 세력과 대치했다. 오사카 세력이 히라카타 데구치 촌의 둑을 파서 요도가와의 물을 넘치게 하여 도로를 막았지만, 노리나가는 막부의 명을 받아 다시 메웠다. 이후 오사카 세력과 화친할 때, 다마쓰쿠리구치의 둑을 무너뜨리고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고 돌아갔다.[1]게이초 20년 5월에 발발한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미노와 시나노의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히라카타에 진을 쳤다. 이때 교고쿠 와카사노카미와 교고쿠 단고노카미가 데구치 촌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지원하라는 명을 받았다. 5월 7일 교고쿠 세력이 비젠 섬[1]으로 진격하자, 노리나가도 모리구치로 진격했다. 오사카 성이 함락되자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붙잡아 57명의 목을 베고 히라카타 진으로 돌아왔다. 노리나가는 첫 출진에서 공을 세워 막부로부터 중용받게 되었다.
2. 3. 막부 중신으로의 성장
게이초 19년(1614년), 아버지 마쓰다이라 이에노리가 사망하면서 15세의 나이로 오규 마쓰다이라 종가의 가독을 상속받았다.[1] 같은 해 겨울부터 오사카의 진에 참전하여, 교토의 니조 성에서 미노 무사들을 통솔하는 조두(組頭)로 임명되었다. 이나바 마사나리, 엔도 요시타카 등 여러 장수를 이끌고 가와치 히라카타에 포진하여 오사카 세력과 대치했다.[1] 요도가와의 물을 이용한 오사카 측의 수공(水攻)을 막아내는 등 공을 세웠다.[1]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미노와 시나노의 병사들을 이끌고 히라카타에 다시 진을 쳤다. 교고쿠 다다타카 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모리구치 전투에서 오사카 성 함락 후 도망치는 적병 57명의 목을 베는 전공을 세웠다.[1] 이러한 첫 출진의 공으로 막부로부터 중용받게 되었다.[1]
겐나 2년(1616년) 정초, 슨푸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1월 27일 종5위하 이즈미노카미에 임명되었다. 당시 16세였다.
간에이 8년(1631년), 이와무라 성 아래의 다케나미 신사에서 하치만 신사로 가마 행렬을 창시했다. 간에이 9년(1632년) 이와무라 성의 수호와 영민의 안녕을 기원하며 석실 천체 불상을 건립했다.
간에이 15년(1638년), 미노 이와무라 번 2만 석에서 도토미 하마마쓰 번 3만 6000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고 옮겨졌다.[1]
간에이 19년(1642년) 12월, 이에쓰나의 세자 시절 로주에 임명되었고, 종4위하에 서임되었다. 쇼호 원년(1644년) 2월 28일에는 고즈케 다테바야시 번 6만 석으로 다시 영지가 늘어나고 옮겨졌다.[1] 1651년,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4대 쇼군이 되자 정식으로 로주가 되어 정무를 총괄했고, 시종에도 임명되었다.
조오 3년 2월 1일 (1654년 3월 19일), 다테바야시에서 55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젠도지에 있다. 하야시 슌사이로부터는 "유약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 4. 로주 취임과 사망
간에이 15년(1638년), 노리나가는 미노 이와무라 번 2만 석에서 도토미 하마마쓰 번 3만 6000석으로 가증 이봉되었다.[1]간에이 19년(1642년) 12월, 이에쓰나의 세자 시절 로주에 임명되었고, 종4위하에 서임되었다. 쇼호 원년(1644년) 2월 28일, 고즈케 다테바야시 번 6만 석으로 다시 가증 이봉되었다.[1]
이에쓰나가 4대 쇼군이 되자 정식으로 로주의 한 사람으로서 정무를 총괄했으며, 게이안 4년(1651년)에는 시종에도 임명되었다.[1]
조오 3년 2월 1일 (1654년 3월 19일), 다테바야시 번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는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젠도지에 있다. 하야시 슌사이로부터 "유약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1]
2. 5. 평가
하야시 슌사이는 마쓰다이라 노리나가를 유약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1]3. 가족 관계
구 분 | 내 용 |
---|---|
아버지 | 마쓰다이라 이에노리 |
어머니 | 이시카와 야스미치의 딸 |
정실 | 마쓰다이라 야스나가의 딸 |
계실 | 이시카와 타다후사의 딸 |
측실 | 아카기 씨 |
장남 | 마쓰다이라 노리히사 (생모: 아카기 씨) |
차남 | 마쓰다이라 노리마사 (생모: 아카기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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