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도시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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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에다 도시마스(前田利政, 1539?~1612?)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무장이다.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일족으로, 마에다 도시히사의 양자가 되었으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을 섬겼다. 우에스기 가문에 사관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요네자와 번으로 이봉된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뛰어난 무예 실력과 더불어 독특한 기행으로 '가부키모노'로 불리며, 다양한 일화와 대중문화 속에서 개성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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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도시마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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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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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에다 도시마스 |
다른 이름 | 마에다 케이지 (前田慶次) 케이지로 (慶次郎) |
출생 | 1543년경 |
사망 | 1612년 |
묘소 | 도모리 젠코지, 요네자와, 야마가타현 |
친척 | 타키가와 카즈마스 (아버지) |
소속 | |
가문 | [[File:Japanese_crest_Kaga_Umebachi.svg|15px]] 마에다 씨 [[File:Mon-Oda.png|15px]] 오다 씨 [[File:Goshichi_no_kiri_inverted.svg|15px]] 도요토미 씨 [[File:Japanese_Crest_Uesugi_Sasa.svg|15px]] 우에스기 씨 [[File:大一大万大吉.svg|15px]] 서군 |
주요 전투 | |
참전 전투 |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1584년) 스에모리 성 공방전 (1584년) 오다와라 공성전 (1590년) 하세도 성 전투 (1600년) |
인물 정보 | |
시대 | 전국시대 - 에도 시대 초기 |
생몰년 | 천문 2년 (1533년) 또는 천문 10년 (1541년) 출생 게이초 10년 11월 9일 (1605년 12월 18일) 또는 게이초 17년 6월 4일 (1612년 7월 2일) 또는 게이초 18년 6월 4일 (1613년 7월 2일) 사망 |
다른 이름 | 리테이, 리타쿠, 리타, 리다이, 리코 소우베에, 게이지로, 게이지로, 게이지로, 게이지 곡창원표호사이, 곡창원홀지사이, 용쇄헌불편사이 |
묘소 | 요네자와시도모리 젠코지 |
주군 | 마에다 토시히사 마에다 토시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쓰 |
씨족 | 마에다 씨 |
아버지 | 실부: 타키가와 씨 모씨 ( 타키가와 마스시? / 타키가와 마스시게? / 타카야스 노리카쓰?) 양부: 마에다 토시히사 |
배우자 | 마에다 야스카츠의 딸 |
자녀 | 마사토라 딸 ( 토다 마사카츠 (마사쿠니)의 아내) 딸 ( 호조 쇼사부로 (호조 우지쿠니 막내아들)의 아내), 기타 |
참고 문헌 | |
참고 문헌 | 나카무라 아키라, 1994, 『켄신군기・우에스기 25장』, 勉誠社 다카야나기 미츠토시, 마츠다이라 토시카즈, 1981, 『전국인명사전』, 吉川弘文館, p.225 |
2. 가나와 휘
가나(통칭)는 소헤이(宗兵衛), 게이지로(慶次郎/慶二郎/啓次郎), 게이지(慶次) 등이다. 휘는 도시마스 외에도 도시사다(利貞|としさだ일본어), 도시타카(利卓|としたか일본어), 도시타카(利太|としたか일본어), 도시히로(利大|としひろ일본어), 도시오키(利興|としおき일본어) 등으로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현대 일본 역사책 등에서는 도시마스(利益) 또는 도시타카(利太)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게이지 자신의 자필로는 게이지로(啓二郎, 마에다 게이지 도중일기), 게이지(慶次, 倉賀野綱秀에게 보낸 서한), 도시사다(利貞, 亀岡文殊 봉납 시가, 게이지 본인이 소장했다고 알려진 술병) 뿐이다. 게이지 본인의 자필 외로 당시 사료를 통해 확인되는 것은 게이지(慶二, 마에다 도시이에가 보낸 서장), 도시타카(利卓, 野崎知通의 유서)이다. 利益, 利太, 利大, 利興 등의 표기들은 2차 사료 이후의 기술들에서 보인다.
《가가 번 사료》(加賀藩史料)에는 게이초(慶長) 10년(1605년) 11월 9일에 마에다 게이지 도시타카(前田慶次利太)가 73세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1] 이 기록은 《고거적록》(考拠摘録)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출생 연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마에다 도시마스(前田利益)는 센고쿠 시대 말기에서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꽃의 케이지(花の慶次)'의 모델로 유명하다.
3. 생몰년
한편, 19세기 초 요네자와(米沢) 지역 향토 사료인 《요네자와 이인담》(米沢里人談)에는 게이초 18년(1613년) 6월 4일에 병사했다는 기록이, 《요네자와 고지류찬》(米沢古誌類纂)에는 게이초 17년(1612년) 6월 4일에 도모리(堂森)에서 병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요네자와 사담》(米沢史談)에는 덴분 10년(1541년) 무렵 비슈(尾州) 가이도 군(海東郡) 아라코(荒子)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4. 생애
1581년 무렵,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노토 1국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된 마에다 도시이에를 의지하여 그에게 출사하였다. 도시이에로부터 마에다 도시히사・도시마스 부자에게 7천 석이 주어졌는데, 도시히사가 2천 석, 도시마스가 5천 석이었다.[24]
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 마에다 집안의 사료인 《가택기》(加沢記)에는 도시마스가 다키가와 세력의 선두에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1584년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삿사 나리마사가 공격해 온 스에모리 성 구원에 나섰다. 이듬해 5월에는 삿사 측에 가담했던 기쿠치 다케카쓰가 성주로 있던 아미 성에 입성하여 이 성의 탈환에 나선 진보 우지나가 등의 군세와 교전하였다(《스에모리키》). 이때 도시마스의 신분에 대해 성주 또는 성대(성주 대리)였다는 견해도 있는데,[25] 실제로 성에 머무른 것은 5월에서 7월 무렵까지 석 달 정도였다고 여겨진다.[25]
1587년 8월 14일, 의붓아버지 도시히사가 사망하고 도시마스의 적남 마에다 마사토라가 도시이에에게 출사하고 도시히사의 봉지는 그대로 2천 석이 주어졌다. 1590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이 시작되고 도시이에가 호쿠리쿠도의 총책임을 명받게 되어 출정하게 되자 도시마스도 이를 따랐고, 이어 도시이에가 무쓰 국 지방의 검찰사 임무도 명받게 되면서 도시마스 또한 이를 수행하였다.
1590년 이후, 도시마스는 마에다 가문을 떠났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도시이에와의 불화,[24] 도시히사의 죽음을 계기로 마에다 가문과의 연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그의 처자들은 도시마스를 따르지 않았다. 이후 도시마스는 교토에서 로닌(浪人) 생활을 하면서 사토무라 죠하 ・ 쇼시쓰 부자나 구조 다네미치 ・ 후루타 오리베 등 다수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가인(歌人) 「사쇼」(似生)는 1582년에 이미 교토에서의 렌카(連歌) 모임에 출석한 기록이 《렌카소모쿠로쿠(連歌総目録)》에 있어, 마에다 가문을 떠나기 전부터 교토에서 문화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598년부터 1600년 사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 석으로 이봉되자, 우에스기 집안에 사관하여 신규 고용된 로닌 집단인 조외중(組外衆)의 필두로써 1000석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하세도 성 전투에 출진하여 공을 세웠다. 서군(西軍)의 패퇴로 우에스기 씨가 30만 석으로 감봉되어 요네자와로 옮기게 되자 이를 따라 요네자와 번에 출사하였다. 요네자와에서는 나오에 가네쓰구와 함께 《사기》에 주석을 붙이고, 와카나 렌카를 읊는 등 유유자적 생활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마에다 게이지의 만년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가장 구체적인 것은 노자키 도모미치(野崎知通)의 유서로, 우에스기와 뜻을 같이했으나 병을 얻어 야마토 국으로 요양을 갔다. 그러나 교토에서 문제를 일으켜 마에다 도시나가의 명으로 야마토 국 가리메(刈布)에 칩거, 이후 불문에 귀의하여 류사이켄 후벤사이(龍砕軒不便斎)라 칭하며 1605년 11월 9일에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안라쿠지(安楽寺)에 사당과 비석이 세워졌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27]
《가가 번 사료》(加賀藩史料)에서는 1605년 11월 9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요네자와 향토 사료에는 1613년 6월 4일에 병사, 《요네자와 고지류산》(米沢古誌類纂)에는 1612년 6월 4일에 도모리(堂森)에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네자와 고지류산》에서는 요네자와 근교 도모리(堂森)에 은거하다가 1612년 6월 4일, 도모리의 기모이리 타로효에(肝煎太郎兵衛)의 집에서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도시마스의 유해는 기타데라 정(北寺町)의 이치카인(一花院)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이치카인은 이후 폐사되었고 당시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도모리 젠코지(堂森善光寺)에 마에다 도시마스의 공양탑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는 비교적 최근인 1980년에 세워진 것이다.[28]
4. 1. 출생과 성장
마에다 도시마스는 오와리 국 아라코 성(현재의 나고야 시 나카가와 구)에서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키가와 가문 출신이었으나, 마에다 도시이에의 형인 마에다 도시히사의 양자로 들어갔다.
원래 도시마스는 마에다 가문의 가독을 이을 예정이었으나, 오다 노부나가가 도시히사 대신 도시이에를 마에다 가문의 당주로 삼으면서 그 자리를 잃었다. 이러한 상속권 상실 때문에 도시마스는 삼촌인 도시이에와 다투었다고 전해진다.
에이로쿠 12년(1569년)에 노부나가는 도시히사에게 아들이 없고 병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은거를 명하고, 그의 동생 도시이에가 오와리 아라코 2천 관(약 4천 석)의 땅을 잇게 했다. 이 때문에 도시마스는 양아버지를 따라 아라코 성을 떠나게 되었다.
아쓰타 신궁에는 덴쇼 9년(1581년) 6월에 아라코의 주민 마에다 게이지로(前田慶二郎)가 봉납했다고 전해지는 「末□」라는 명이 있는 다치(太刀)가 남아 있다. 또한 《을유집록》(乙酉集録)의 「尾州荒子御屋敷構之図」에는 아라코 성의 남동쪽에 동서 20간, 남북 18간 되는 넓이의 「게이지 님의 집터」(慶次殿屋敷)가 기록되어 있다.
4. 2. 마에다 가문과의 갈등
마에다 도시하루의 장남이자 오와리 국 아라코 성(현재의 아이치 현 나고야 시 나카가와 구)의 성주였던 양아버지 마에다 도시히사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도시히사는 아내의 친정인 다키가와 가즈마스 가문에서 도시마스를 양자로 들였다. 그러나 1569년, 오다 노부나가는 도시히사에게 아들이 없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은거를 명하고, 도시히사의 동생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아라코 2천 관(약 4천 석)의 땅을 주었다. 이로 인해 도시마스는 양아버지를 따라 아라코 성을 떠나게 되었다.[25]
1581년 무렵, 도시마스는 노부나가 밑에서 노토 1국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된 도시이에를 의지하여 그에게 출사하였다. 도시이에로부터 도시히사・도시마스 부자에게 7천 석이 주어졌는데, 도시히사가 2천 석, 도시마스가 5천 석이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 마에다 집안의 사료인 《가택기》에는 도시마스가 다키가와 군의 선두에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1584년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삿사 나리마사가 공격해 온 스에모리 성 구원에 나섰다. 이듬해 5월에는 삿사 측으로 돌아선 기쿠치 다케카쓰가 성주로 있던 아미 성에 입성하여, 이 성을 탈환하려는 진보 우지나가 등의 군세와 교전하였다. 이때 도시마스는 성주 또는 성주 대리였다는 견해도 있지만, 실제로 성에 머무른 것은 5월에서 7월 무렵까지 석 달 정도였다고 여겨진다.[25]
1587년 도시히사가 사망하자, 도시마스의 적남 마에다 마사토라는 도시이에에게 출사하고 도시히사의 봉지 2천 석을 그대로 받았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도시이에가 호쿠리쿠도의 총책임자로 출정하게 되자 도시마스도 이를 따랐고, 이어 도시이에가 무쓰 지방의 검전사 임무도 맡게 되면서 도시마스 또한 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590년 이후 도시마스는 마에다 가문을 떠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도시이에와의 불화 때문이라는 설, 도시히사의 죽음을 계기로 마에다 가문과의 연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등의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한편, 도시마스의 적자인 마사토라를 비롯한 그의 처자들은 도시마스를 따르지 않았다.
4. 3. 마에다 가문 출분과 방랑
에이로쿠(永禄) 12년(1569년), 오다 노부나가는 마에다 도시히사(前田利久)에게 아들이 없고 병약하여 무사도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은거를 명하고, 그의 동생 마에다 도시이에(利家)에게 오와리 아라코 성(荒子城) 2천 관(약 4천 석)의 땅을 상속하게 했다. 이로 인해 도시마스는 양아버지를 따라 아라코 성을 떠나게 되었다.[24] 아쓰타 신궁(熱田神宮)에는 덴쇼(天正) 9년(1581년) 6월에 아라코 주민 마에다 게이지로(前田慶二郎)가 봉납했다고 전해지는 「末□」 명(銘)이 있는 타치(太刀)가 남아 있다. 또한 《을유집록》(乙酉集録)의 「오슈 아라코 고야시키 고우노즈」(尾州荒子御屋敷構之図)에는 아라코 성의 남동쪽에 동서 20간, 남북 18간 크기의 「게이지 님의 집터」(慶次殿屋敷)가 기록되어 있다.[25]
덴쇼 9년(1581년)경, 도시마스는 노부나가의 명으로 노토(能登) 1국을 다스리는 다이묘(大名)가 된 도시이에를 의지하여 그에게 출사하게 되었다. 도시이에로부터 도시히사・도시마스 부자에게는 7천 석이 주어졌는데, 도시히사가 2천 석, 도시마스가 5천 석이었다.
덴쇼 10년 6월 2일(1582년 6월 21일),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났다. 마에다 집안의 사료인 《가택기》(加沢記)에는 이때 도시마스가 다키가와 세력의 선두에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에게 공격받은 스에모리 성(末森城) 구원에 나섰다. 이듬해 5월에는 삿사 측에서 돌아선 기쿠치 다케카쓰(菊池武勝)가 성주로 있던 아미 성(阿尾城)에 입성하여, 이 성을 탈환하려는 진보 우지나가(神保氏張) 등의 군세와 교전하였다(《스에모리키》).[25] 이때 도시마스의 신분에 대해서는 성주 또는 성주 대리였다는 견해가 있지만,[25] 실제로 성에 머무른 것은 5월에서 7월 무렵까지 약 3개월 정도였다고 여겨진다.[25]
덴쇼 15년(1587년) 8월 14일, 의붓아버지 도시히사가 사망하자, 도시마스의 적남 마에다 마사토라(前田正虎)가 도시이에에게 출사하고 도시히사의 봉지 2천 석을 그대로 받았다. 덴쇼 18년(1590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이 시작되고 도시이에가 호쿠리쿠도(北陸道)의 총직(惣職)을 명받아 출정하게 되자 도시마스도 이를 따랐고, 이어 도시이에가 무쓰(陸奥) 지방의 검전사(検田使) 임무도 명받게 되면서 도시마스 또한 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덴쇼 18년(1590년) 이후, 도시마스는 마에다 가문을 떠났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도시이에와의 불화라는 설,[24] 도시히사의 죽음을 계기로 마에다 가문과의 연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한편, 도시마스의 적자인 마사토라를 비롯한 그의 처자들은 도시마스를 따르지 않았다. 그 뒤 도시마스는 교토(京都)에서 로닌(浪人) 생활을 하면서 사토무라 죠하(里村紹巴) ・ 쇼시쓰(昌叱) 부자나 구조 다네미치(九条稙通) ・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등 다수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고 한다. 다만, 가인(歌人) 「사쇼」(似生)는 덴쇼 10년(1582년)에는 이미 교토에서의 렌카(連歌) 모임에 출석한 기록이 《렌카소모쿠로쿠(連歌総目録)》에 있어서, 마에다 가문을 떠나기 전부터 교토에서 문화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덴쇼 16년(1588년)에는 우에스기 집안(上杉家)의 가신(家臣)인 기도 겐사이(木戸元斎)의 저택에서 열린 렌카 모임에 출석한 것 외에도, 렌카 모임에서 자주 만났던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斎)의 렌카 모음집 《겐지코고렌카》(玄旨公御連哥)에는 연도 미상의 「5월 6일, 마에다 게이지 흥행 어 이즈미시키부(세이신지)」(五月六日, 前田慶次興行於泉式部(誠心寺))라고 하여, 도시마스 본인이 주최한 렌카 모임에 유사이가 출석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4. 4. 우에스기 가문 출사와 활약
에이로쿠(永禄) 12년(1569년), 오다 노부나가는 "마에다 도시히사에게 아들이 없고 병약하므로 무예에 힘쓰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도시히사를 은거시키고, 그의 동생 마에다 도시이에가 오와리 아라코 2천 관(약 4천 석)의 땅을 잇게 하였다. 이 때문에 도시마스는 양아버지를 따라 아라코 성을 떠나게 되었다. 아쓰타 신궁에는 덴쇼 9년(1581년) 6월에 아라코의 주민 마에다 게이지로가 봉납했다고 전하는 「末□」라는 명이 있는 타치가 남아 있다. 또한 《을유집록》의 「오와리 아라코 저택 배치도」에는 아라코 성의 동남쪽에 동서로 20간, 남북으로 18간 되는 넓이의 「게이지의 집터」가 기록되어 있다.
덴쇼 9년(1581년) 무렵, 노부나가에게 여러 차례 나아가 노토 국 1국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된 도시이에를 의지하여 그에게 출사하였다. 도시이에로부터 도시히사・도시마스 부자에게 7천 석이 주어졌는데, 도시히사가 2천 석, 도시마스가 5천 석이었다.
덴쇼 10년 6월 2일(1582년 6월 21일),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다. 마에다 집안의 사료인 《가택기》에는 이때 도시마스가 다키가와 세력의 선두가 되었다고 한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삿사 나리마사가 공격해 온 스에모리 성 구원에 나섰다. 이듬해 5월에는 삿사 측에 가담했던 기쿠치 다케카쓰가 성주로 있던 아미 성에 입성하여 이 성의 탈환에 나선 진보 우지나가 등의 군세와 교전하였다(《스에모리키》). 이때 도시마스의 신분에 대해 성주 또는 성대(성주 대리)였다는 견해도 있는데, 실제로 성에 머무른 것은 5월에서 7월 무렵까지 석 달 정도였다고 여겨진다.[25]
덴쇼 15년(1587년) 8월 14일, 의붓아버지 도시히사가 사망하고 도시마스의 적남 마에다 마사토라가 도시이에에게 출사하고 도시히사의 봉지는 그대로 2천 석이 주어졌다. 덴쇼 18년(1590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이 시작되고 도시이에가 호쿠리쿠도의 총책임을 명받게 되어 출정하게 되자 도시마스도 이를 따랐고, 이어 도시이에가 무쓰 국 지방의 검찰사 임무도 명받게 되면서 도시마스 또한 이를 수행하였다.
4. 5. 요네자와 은거와 죽음
마에다 도시마스의 만년과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가가 번 사료》(加賀藩史料)에는 1605년 11월 9일에 73세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25] 반면, 요네자와 향토 사료인 《요네자와 이인담》(米沢里人談)에는 1613년 6월 4일에 병사, 《요네자와 고지류산》(米沢古誌類纂)에는 1612년 6월 4일에 도모리(堂森)에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 인물과 일화
2024년 현재 일본에 널리 퍼져 있는 마에다 도시마스(일명 마에다 게이지)의 인물상은 류 게이이치로의 소설 《일몽암풍류기》와 이를 원작으로 하는 하라 데쓰오의 만화 《꽃의 케이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원형은 《부헨바나시키키가키》, 《상산기담》, 《가관소설》, 《옹초》 등 에도 시대에 널리 읽혔던 부헨바나시[22]에 그려진 일화들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형성된 인물상이 현대에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일본사》의 속편인 《대일본야사》에도 「임협전 ・ 마에다 도시타카 전」으로 제275권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고, 우키요에로도 그려지는 등 에도 시대에 상당한 인지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 《대일본야사》에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목욕탕에 불러들여 장난을 치고 준마 마츠카제(松風)를 타고 도망쳤다는 이야기, 우에스기 집안에 출사하면서 「다이후헨모노(大不便者)」라는 기치를 썼다가 꾸지람을 들었다는 이야기 등 현대에 널리 알려진 일화들이 많이 실려 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로서 마에다 도시마스의 행적을 뒷받침하는 1차 사료는 부족하다. 특히 마에다 가문을 뛰쳐나오기까지의 구체적인 동향이나 일화는 마에다 가문 관련 사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케다 고이치는 마에다 도시마스에 관한 사료들이 마에다 가문의 '금기'로서 이미 (도시마스가 가문을) 뛰쳐나간 직후 '암매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도시마스의 가부키모노다운 파격적인 행동이 도시이에의 분노를 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24]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점이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자극하여 에도 시대부터 여러 부헨바나시에서 널리 다루어졌고, 현대 일본에서도 소설, 만화, 게임 등을 통해 마에다 도시마스(게이지)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마에다 도시마스는 평소 세상을 가볍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숙부 도시이에는 이를 자주 지적했고, 도시마스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느 날 도시마스는 도시이에에게 앞으로는 마음을 고쳐 성실하게 살겠다며 차 한 잔을 대접하고 싶다고 청했다. 도시이에는 조카가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기뻐하며 그의 집을 찾아갔다. 도시마스는 날이 쌀쌀하니 차보다 먼저 목욕을 권했고, 도시이에는 흔쾌히 승낙했다. 도시이에가 옷을 벗는 사이 도시마스는 물 온도가 딱 좋게 되었다며 목욕탕을 나갔다. 도시이에가 욕조에 들어가니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온후한 성격의 도시이에도 참지 못하고 수행원들에게 당장 도시마스를 잡아오라고 고함쳤지만, 도시마스는 이미 애마 마츠카제(松風)를 타고 달아난 뒤였다. 이 일화는 에도 시대 후기 수필집 《옹초》에 처음 등장하며 신빙성은 낮지만, 훗날 《상산기담》 등에서 각색되어 널리 알려졌다.
- 《대일본야사》 마에다 도시타카 전에는 도시마스가 우에스기 집안에 출사했을 때 「다이후헨모노(大不便者)」라는 기치를 들고 다녔는데, 다른 무사들이 이를 비웃으며 꾸짖었다고 한다. 도시마스는 자신이 로닌이라 처지가 곤궁하여 '크게 불편한 자'라는 뜻으로 쓴 것이라며 재치있게 답했다.
-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출사했을 때, 첫 대면에서 진흙투성이의 무 세 뿌리를 가져와 자신을 겉보기에는 누추해도 씹을수록 참맛이 나는 무와 같다고 소개했다(《상산기담》, 《요네자와인국기》).
- 도시마스가 교토에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시미 성(오사카 성이라고도 한다)에서 연회를 열었다. 도시마스는 말석에서 원숭이 흉내를 내며 춤을 추면서 다이묘들의 무릎에 차례로 앉아 얼굴을 살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 앞에서는 위풍에 눌려 차마 그의 무릎에 앉지 못하고 다음 사람에게 넘어갔다. 훗날 도시마스는 자신이 진정으로 의지할 주군은 가게카쓰뿐이라고 말했다(《요네자와고지류산》, 《요네자와시단》).
- 아이즈로 옮겨가던 날, 술자리에서 린젠지(林泉寺)의 오만한 승려를 때려주고 싶다는 푸념을 듣고 곧바로 절을 찾아갔다. 바둑판을 발견하고 승려에게 바둑 한 판을 제안하여, 이긴 쪽이 진 쪽의 머리를 가볍게 때려주기로 했다. 첫 판에서 승려가 이겼지만, 두 번째 판에서는 도시마스가 이겼다. 도시마스는 온 힘을 다해 승려의 미간을 때렸고, 코피를 흘리며 쓰러진 승려를 뒤로하고 절을 떠났다(《가관소설》, 《요네자와시단》).
- 에도 시대의 패사소설 《이시야마군키》에는 이시야마 혼간지 공격 때 오다 노부나가의 큰 깃발을 빼앗아 돌아왔다고 한다.
- 마에다 도시마스의 손녀딸로 도다 가타카쓰의 딸인 기사(幾佐)는 이마이노 쓰보네(今井局)라 이름하고 슌코인(春香院), 세이타이인(清泰院)에게 출사하였던 가가 번의 유명한 죠추(女中)였다. 세이타이인 소생의 마에다 쓰나노리의 양육도 담당하였기 때문에, 만년에는 쓰나노리로부터 성 가까운 곳에 저택을 받기도 했고, 나아가 양자를 들이도록 하여 도다 유키에(戸田靱負)라 하고 7백 석을 주었다. 이마이노 쓰보네가 죽은 뒤에는 묘전에 차를 공양하는데 쓸 다탕료(茶湯料)로 5백 석이 주어졌고, 오랫동안 그 공양을 모시게 하였다. 유명한 마에다 도시이에의 주판은 호슌인(芳春院)에게서 슌코인에게로 넘겨졌고, 이마이가 이를 맡고 있었는데, 슌코인이 사망한 뒤 마에다 집안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송운공어야화》 《금택고적지》).

- '''마츠카제'''("솔숲의 바람")는 마에다 도시마스의 유명한 애마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최고급 혈통의 말들로만 길러졌지만, 아무도 자신을 타지 못하게 하였고 결국 도망쳤다. 도시마스는 도시마스 자신의 거친 성격 덕분에 야생마를 길들였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늘 함께 있었다. 마츠카제는 엄청난 힘을 가진 말로, 주인의 큰 체격을 며칠 동안이나 지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마츠카제는 주인이 죽은 후 도망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5. 1. 뛰어난 무장
마에다 도시마스는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아들로 다키가와 씨 출신이었으나, 마에다 도시이에의 형인 마에다 도시히사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에이로쿠 12년(1569년)에 노부나가의 명으로 도시히사가 병약하다는 이유로 은거하게 되면서, 도시마스는 양아버지를 따라 아라코 성을 떠나게 되었다. 덴쇼 9년(1581년) 무렵, 오다 노부나가에게 여러 차례 나아가 노토 1국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된 도시이에에게 출사하여 5천 석을 받았다.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 도시마스는 다키가와 군의 선두에 섰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삿사 나리마사가 공격해 온 스에모리 성 구원에 나섰다. 이듬해 5월에는 삿사 측에 가담했던 기쿠치 다케카쓰가 성주로 있던 아미 성에 입성하여 성을 탈환하려는 진보 우지나가 등의 군세와 교전하였다. 덴쇼 15년(1587년) 의붓아버지 도시히사가 사망하고, 덴쇼 18년(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도시이에를 따라 출정하였다.
그러나 덴쇼 18년(1590년) 이후, 도시마스는 마에다 가문을 뛰쳐나왔다. 그 뒤 교토에서 로닌 생활을 하면서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훗날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아이즈 120만 석으로 이봉된 게이초 3년(1598년)부터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 게이초 5년(1600년)까지 우에스기 집안에 사관하여 1,000석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하세도 성 전투에 출진하여 공을 세웠다고 한다. 서군이 패퇴하고 우에스기 씨가 30만 석으로 감봉되어 요네자와로 옮기게 되자 도시마스도 이를 따라 요네자와 번에 출사하였다.
노자키 도모미치는 도시마스를 "심지 굳센 맹장"이라고 평가했으며, 아라이 하쿠세키는 "세상에 둘도 없는 용사"라고 칭찬했다.
5. 2. 가부키모노
마에다 도시마스의 인물상은 류 게이이치로의 소설 《일몽암풍류기》와 이를 원작으로 하는 하라 데쓰오의 만화 《꽃의 케이지》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 원형은 에도 시대에 널리 읽혔던 《부헨바나시키키가키》, 《상산기담》, 《가관소설》, 《옹초》 등에 묘사된 일화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형성된 인물상이 현대에 다시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22]《대일본사》의 속편인 《대일본야사》에는 「임협전 ・ 마에다 도시타카 전」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전기가 실려 있으며, 우키요에로도 그려지는 등 에도 시대에 상당한 인지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 《대일본야사》에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목욕탕에 불러들여 장난을 치고 준마 하루카제를 타고 도망쳤다는 이야기, 우에스기 가문에 출사하면서 「다이후헨모노」(大不便者)라는 기치를 썼다가 꾸지람을 들었다는 이야기 등 현대에 널리 알려진 일화들이 많이 실려 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로서 마에다 도시마스의 행적을 뒷받침하는 1차 사료는 부족하다. 특히 마에다 가문을 뛰쳐나오기까지의 구체적인 동향이나 일화는 마에다 가문 관련 사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이케다 고이치는 마에다 도시마스에 관한 사료들이 마에다 가문의 '금기'로서 이미 (도시마스가 가문을) 뛰쳐나간 직후 '암매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도시마스의 가부키모노다운 파격적인 행동이 도시이에의 분노를 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24]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점이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자극하여 에도 시대부터 여러 부헨바나시에서 널리 다루어졌고, 현대 일본에서도 소설, 만화, 게임 등을 통해 마에다 도시마스(게이지)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라 데쓰오의 만화 《꽃의 게이지》에서 "신장 여섯 자 다섯 치(197cm)의 거구의 무사"로 묘사된 이후, 마에다 도시마스는 체격이 좋은 거구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장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도시이에의 것으로 전해지는 현존 갑옷도 다른 무장들의 것에 비해 크기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5. 3. 문화인
마에다 도시마스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특히 문화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교토에서 로닌(浪人) 생활을 하면서 사토무라 죠하(里村紹巴) ・ 쇼시쓰(昌叱) 부자나 구조 다네미치(九条稙通) ・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등 다수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25] 덴쇼 10년(1582년)에는 이미 교토에서의 렌카카이(連歌会)에 출석한 기록이 《렌카소모쿠로쿠》(連歌総目録)에 있어, 마에다 집안을 뛰쳐나오기 전부터 교토에서 문화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덴쇼 16년(1588년)에는 우에스기 집안의 가신(家臣)인 기도 겐사이(木戸元斎)의 저택에서 열린 렌카카이(連歌会)에 출석했고,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斎)의 렌카 모음집(連歌集) 《겐지코고렌카》(玄旨公御連哥)에는 연도 미상의 「五月六日, 前田慶次興行於和泉式部(誠心寺)」라고 해서, 도시마스 본인이 주최한 렌카카이에 유사이가 출석한 기록이 있다.세키가하라 전투 이듬해인 게이초 6년(1601년)에는 교토 후시미(伏見)에서 요네자와로 내려갈 때의 사적을 자신의 일기인 "마에다 게이지 도중일기"에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와카(和歌)나 한시(漢詩), 방문한 지역의 전설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적어놓는 등 높은 교양 수준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일기를 통해 마에다 게이지 자신이 최소 세 명의 조선인을 몸종으로 거느렸음을 알 수 있다.[29]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続)와의 친분이 유명한데, 우에스기 집안의 가신이었던 야스다 요시모토(安田能元)와도 친하여 두 사람이 함께 지은 렌카(連歌)가 남아 전한다. 여기에서 게이지는 자신의 서명을 「利貞」로 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자신이 저술한 《번한보》(藩翰譜)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용사다"라고 마에다 게이지를 칭찬하였다.
6. 대중문화 속 마에다 도시마스
2024년 현재 일본에 널리 퍼져 있는 마에다 도시마스(일명 마에다 게이지)의 인물상은 류 게이이치로(隆慶一郎)의 소설 일몽암풍류기(一夢庵風流記)와 이를 원작으로 하는 하라 데쓰오(原哲夫)의 만화 꽃의 케이지(花の慶次)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원형은 《무변독문서(武辺咄聞書)》, 《상산기담(常山紀談)》, 《가관소설(可観小説)》, 《옹초(翁草)》 등 에도 시대에 널리 읽혔던 무변독(武辺咄)에 그려진 일화들로, 이를 통해 형성된 인물상이 현대에 되살아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일본사(大日本史)》의 속편인 《대일본야사(大日本野史)》에도 「임협전 ・ 마에다 도시타카 전」(任侠伝・前田利太伝)으로 제275권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고, 우키요에(浮世絵)로도 그려지는 등 에도 시대에 나름대로 지명도가 꽤 있었다고 여겨진다.[23] 《대일본야사》에는 이미 마에다 도시이에를 목욕탕에 불러들여 장난을 치고 준마 마쓰카제(松風)를 타고 도망쳤다거나,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에 출사하면서 「다이후헨모노」(大ふへん者)라는 기치를 썼다가 꾸지람을 들었다는 등 현대에 널리 알려진 일화들이 많이 실려 있다.
한편, 그 인기에 비해 역사적 인물로서 마에다 도시마스의 사적을 뒷받침하는 1차 사료는 적다. 특히 마에다 가문을 뛰쳐나오기까지의 구체적인 동향이나 일화는 마에다 가문 관련 사료에서는 거의 확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이케다 고이치(池田公一)는 "게이지로에 관한 사료들은 마에다 가문의 '금기'로서 이미 (게이지가 마에다 가문을) 뛰쳐나간 직후 '암매장'되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 정도로 게이지로의 「가부키」로 점철된 파천황적인 행동이 도시이에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음을 보여준다"고 평했다.[24]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에도 시대부터 여러 무변독(武辺咄)으로 널리 다루어지면서 현대 일본에서도 소설, 만화, 게임 등으로 마에다 게이지(마에다 도시마스)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도시마스는 원작 ''결전''과 ''삼국무쌍'', ''전국무쌍'' 시리즈에서 서군의 플레이 가능 캐릭터로 등장하며, 계지(Keiji)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는 ''전국 바사라'' 시리즈에서도 마에다 게이지(Maeda Keiji)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다. 그는 ''포켓몬 컨퀘스트''(일본명: 포켓몬 +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며, 파트너 포켓몬은 바스티오돈과 테라키온이다.[2]
2015년, 후지 타츠야는 시대극 드라마 카부키모노 계지에서 도시마스 역을 맡았다.
; 소설
- 해음사 조오고로(海音寺潮五郎) 『전국풍류무사』(1941년)
- 다이부츠지로(大佛次郎) 『단전병풍』(1951년)
- 난죠 노리오(南條範夫) 『방약무인검』(1958년)
- 야마다 후타로(山田風太郎) 『반기병』(1976년)
- 무라카미 겐조(村上元三) 『전국풍류』(1978년)
- 류케이이치로(隆慶一郎) 『일몽암풍류기』(1989년)
- 코노에 류슈(近衛龍春) 『천하무쌍의 경기자 마에다 케이지로』(2007년)
; 영화
- 『아바레다이묘』(1959년, 도에이(東映) 영화, 연기: 이치카와 우타에몬(市川右太衛門))
; TV 드라마
- 『리케토마츠~가가백만석이야기~』(2002년, 대하드라마, 연기: 오이카와 미츠히로(及川光博))
- 『가부키자 케이지』(2015년, NHK목요사극, 연기: 후지 류야(藤竜也))
; 만화
- 『하나노 케이지 -구름 저편에-』(1990년, 원작: 류케이이치로(隆慶一郎) 「일몽암풍류기」, 그림: 하라 테츠오(原哲夫))
- 『의풍당당!! 나에가 켄세츠 -마에다 케이지 츠키가타리-』 시리즈(2008년, 그림: 무라무라 유지(武村勇治), 데구치 마사토(出口真人))
- 『마에다 케이지 가부키타비』(2019년, 그림: 데구치 마사토(出口真人))
; 애니메이션
- 『의풍당당!! 켄세츠와 케이지』(2013년, 원작 「의풍당당!! 나에가 켄세츠 -마에다 케이지 사케가타리-」)
; 무대
- 『풍류몽다이묘 -하나노 케이지로-』(1995년, 원작: 류케이이치로(隆慶一郎) 「일몽암풍류기」, 연기: 다카하시 에이키(高橋英樹))
- 『하나노무샤(ひと) 마에다 케이지』(2010년 9월, 오사카 쇼치쿠자, 원작: 류케이이치로(隆慶一郎) 「일몽암풍류기」, 연기: 카타오카 아이노스케(片岡愛之助))
- 『일몽암풍류기 마에다 케이지』(2014년, 타카라즈카 가극단 설조(雪組) 공연, 원작: 류케이이치로(隆慶一郎) 「일몽암풍류기」, 연기: 소이치호(壮一帆))
- 『의풍당당!!』(2017년, 원작: 「「의풍당당!!」시리즈」, 연기: 카기모토 아키라(鍵本輝))
- 『마에다 케이지 가부키타비 STAGE&LIVE〜히고노토라 카토 키요마사편〜』(2024년 9월–11월, 원작: 하라 테츠오(原哲夫)・호리에 노부히코(堀江信彦)・데구치 마사토(出口真人) 「마에다 케이지 가부키타비」, 연기: RIKU)
; 음악
- 사쿠라유키(さくらゆき) 『전화』(2018년, 작사: 토오노 유키(遠野ゆき), 작곡: 모리 노부히로(森伸弘))
; 게임
- 「전국바사라2」(2006년, 캡콤)
; 파칭코・파치슬로
- 「하나노 케이지 -구름 저편에-」(1994년, 제작: 사차원)
- 「CR하나노 케이지」(2007년 7월, 뉴긴(ニューギン))
- 「CR하나노 케이지〜참」(2009년 2월, 뉴긴(ニューギン))
- 「CR하나노 케이지〜애」(2010년 3월, 뉴긴(ニューギン))
- 「CR하나노 케이지〜한」(2012년 12월, 뉴긴(ニューギン))
- 「파치슬로 하나노 케이지 〜천에 사랑받은 남자〜」(2012년 11월, 뉴긴(ニューギ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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