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사 나리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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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삿사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오와리국에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흑모의중의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며, 나가시노 전투, 테도리가와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호쿠리쿠 지방을 다스리며 엣추 국 평정에 힘썼으나, 히고 국인 일기 진압에 실패하여 몰락했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후 히고 국주가 되었지만, 가혹한 통치로 반란을 겪고 할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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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사 나리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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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삿사 나리마사 |
본명 | 佐々 成政 |
출생일 | 1536년 2월 6일 |
사망일 | 1588년 7월 7일 |
출생지 | 나고야, 오와리 국 |
별명 | 구라노스케 |
묘소 |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호온지 교토시 가미교구 지겐지 교토시 기타구 류쇼지 |
계명 | 성정사정월도한대거사 |
가문 | 삿사 씨 (오미 겐지) |
아버지 | 삿사 나리무네 |
형제 | 삿사 마사쓰구 삿사 마고스케 삿사 나가아키 삿사 노부무네 단바 씨 지쓰구의 아내 야마다 시게쿠니의 아내 마에노 요시야스의 아내 (삿사 나오카쓰의 어머니) |
배우자 | 지코인 (정실) 사유리 (측실) |
자녀 | 마쓰치요마루 하야카와 유스케 즈이센인 가쿠쇼인 고슈인 쇼주인 야마오카 가게모토의 아내 가노 다카노부의 아내 후와 모리쿠니의 아내 (삿사 나리미쓰의 어머니) |
양자 | 사쿠마 가쓰유키 (후에 양자 관계 해소) 삿사 나리미쓰 삿사 노부무네? |
관직 | |
관위 | 종5위상 무쓰 국 수 종4위하 시종 |
영지 | 고마루 성 영주 (1575년 - 1581년) 도야마 영주 (1581년 - 1585년) |
정치 경력 | |
주군 | 오다 노부나가 오다 히데노부 도요토미 히데요시 |
전임 | 진보 나가쓰미 |
후임 | 마에다 도시이에 |
소속 | 오다 씨 도쿠가와 씨 도요토미 씨 |
직위 | 다이묘 |
지휘 | 고마루 성 도야마 성 |
군사 경력 | |
주요 전투 | 이나바야마 성 전투 가네가사키 전투 아네가와 전투 에치젠 전역 나가시노 전투 데도리가와 전투 엣추 전역 아라카와 전투 우오즈 성 전투 마쓰쿠라 성 전투 스에모리 성 전투 도야마 성 전투 |
기타 | |
로마자 표기 | Sassa Narimasa |
2. 생애
오와리국 가스가이군 히라성에서 삿사 나리무네(佐々成宗)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삿사씨는 오와리국카스가이군의 히라성을 근거지로 한 토호로, 원래 오다 노부야스에게 속해 있었다고 전해진다(『무공야화』). 삿사씨는 우다겐지 오미 사사키 씨의 서류로, 오와리국으로 옮겨 스와 씨의, 이어서 오다 씨의 가신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카즈사국 사사쇼에서 오와리로 옮겨왔다는 설, 후지와라 씨 출신설, 스가와라 성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1550년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했다.(『尾張佐々系譜』) 형으로 마사쓰구, 마고스케 등이 있었지만, 형들이 연달아 싸움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에, 1560년에 가독을 상속받아 히라 성주가 되었다.[1]
1561년, 모리부의 전투(이나바야마성 전투 참조)에서 이케다 쓰네오키와 함께 이나바 마타우에몬(이나바 요리미치의 삼촌)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웠다.(『신장공기』)
1567년, 이나바야마성 전투에서 사이토 다쓰오키(사이토 씨)와 싸웠다.[2] 같은해, 나리마사는 흑모의중 10명의 수장이 되었다. 노부나가는 흑모의중과 적모의중을 각각 10명으로 편성하였는데, 이는 기마대와 소년 중에서 무공이 뛰어난 자들을 선발한 것으로 보인다. 흑모의중은 기마대에서, 적모의중은 소년중에서 선발된 것으로 보인다. 나리마사는 노부나가 휘하의 무장이었으며, 등에 검은 호로(겉옷)를 착용한 군사 집단인 오다의 }}의 지휘관이었다.[2][3]
1568년,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섬기고 6만의 군사를 이끌고 상락의 길에 올랐다. 이 상락의 길, 오미에서 발생한 간논지성 전투에서는 롯카쿠 요시카타의 미노사쿠 성과 간논지성을 공략하고 9월 28일 교토에 입성하였다. 거기에 나리마사의 모습도 있었다.
1569년, 노부나가가 이세국의 기타바타케 구교의 오가와치 성을 공격할 때, 시바타 가쓰이에, 모리 요시나리, 후와 미쓰하루와 함께 성의 동쪽을 공격하는 부대를 이끌었다(『신장공기』).
1570년, 가네가사키 전투에 참전하여 기병대를 이끌었고, 조총 부대를 이용하여 하시바 히데요시를 지원했다. 이후 그는 아자이 씨와 아사쿠라 씨와 아네가와 전투에서 싸웠는데, 그는 후위에 있었다. 아네가와 전투에 앞서 "팔상산의 후퇴"에서는 야나다 히로마사, 나카조 이에타다 등과 함께 소수의 기마대를 이끌고 후위를 담당하여 철포대를 이용하여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신장공기』『당대기』).
1574년, 나가시마 일향 일기와의 전투에서 장남인 마쓰치요마루를 잃었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마에다 도시이에, 노무라 마사시게, 후쿠도미 히데카쓰, 반 나오마사와 함께 철포대를 이끌었다.[10] 철포봉행(砲奉行)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1577년, 그는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우에스기 겐신(우에스기 씨)과 싸웠다.
하지만, 이 시기(엣추국 입국 이전)의 나리마사의 활동에 대해서는 『신장공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의 경력과 업적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많다.[10]
덴쇼 3년(1575년) 5월, 나가시노 전투에서 마에다 도시이에 등과 함께 철포대를 이끌었다. 철포봉행(砲奉行)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같은 해 9월,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평정 후 시바타 가쓰이에 휘하에서 호쿠리쿠 지방을 담당했다. 마에다 도시이에, 후와 미쓰하루와 함께 에치젠 후추 10만 석을 다스리는 후추 산닌슈(府中三人衆)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영지를 나누지 않고 수입만을 분배하는 상급 지행 형태로 다스렸으며, 고마루 성을 쌓아 거점으로 삼았다. 후추 산닌슈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부하였으나, 반독립적인 오다 군의 유격 부대와 같은 존재였다. 우에스기 겐신 사후 엣추 국을 다스리는 권한을 얻었다.
덴쇼 5년(1577년) 8월, 우에스기 겐신이 노토에 침입하자 시바타 가쓰이에 등과 함께 가가를 침공했으나, 나나오 성 함락으로 같은 해 10월 철수했다. ( 테도리가와 전투) 그러나 덴쇼 6년(1578년) 3월 우에스기 겐신이 죽자 점차 형세가 역전되었다. 덴쇼 8년(1580년) 이시야마 홍난사와 강화가 성립되자 호쿠리쿠 지방의 상황이 활발해졌고, 시바타 가쓰이에가 일향 일기를 제압했다. 삿사 나리마사는 이에 종군하여 노토국과 에치고국(현 도야마현)에도 진출했다.
삿사 나리마사는 1580년부터 엣추 국 평정에 관여했다.[14][15] 도야마시를 흐르는 조간지 강 연안에 "사사제방"이라 불리는 제방을 축조하는 등 치수사업에 힘썼다.[11] 1581년에는 도야마성에 입성하여 엣추 국을 통치했다.[11]
1582년 혼노지의 변 당시,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가스가야마성을 공격하려던 삿사 나리마사는 우오즈성 전투 직후 우에스기 군의 저지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에 즉각 대응하지 못했다.[4] 이후 기요스 회의에서 시바타 가쓰이에 측에 가담했으나, 시즈가타케 전투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한 대비 때문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숙부인 삿사 헤이자에몬을 지원군으로 보냈었다.
시바타 가쓰이에가 패배한 이후, 마에다 도시이에의 배신과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압박으로 딸을 인질로 보내고 머리를 삭발하는 것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5]
삿사 나리마사는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가담하여 마에다 도시이에와 스에모리성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19] 이 시기 나리마사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와도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양면 공격을 당해 고전하였다.[23]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자, 나리마사는 재기를 위해 히다 산맥을 넘어 이에야스를 만났으나 설득에 실패했다("사라사라 고에").[24][25]
1585년, 히데요시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도야마성을 포위했다.[4]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카쓰의 중재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도야마 성 전투의 결과로 나리마사는 목숨은 건졌으나, 엣추국 영지를 몰수당하고 오사카로 이주했다.
1587년 규슈 정벌에서 삿사 나리마사는 공을 세워 히고 국주로 임명되었다.[5] 히데요시는 급속한 개혁을 삼가도록 지시했다고도 전해지지만, 병을 얻고 있던 나리마사는 곧바로 검지를 실시하려 했다.[45] 이에 반발한 구마베 지카나가(隈部親永)를 중심으로 한 국인(国人)들이 봉기하였다.( 히고 국인 일기(肥後国人一揆) )[45]
나리마사는 히고 국인 지배를 슈인죠(朱印状)에 근거한 히데요시 직속에서 나리마사가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하는 중층형으로 전환하면서 실질적인 영토를 축소하려고 했다는 견해도 있다.[45] 그 외에도 영토 재편성을 통해 세력 분산을 도모한 점도 보이는데,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국인의 반발을 불렀다는 분석도 있다.[45]
나리마사가 참수당한 날 히데요시가 일기 진압에 참여한 여러 다이묘(大名)에게 발급한 “무쓰노카미 전후 악역 조조사(陸奥守前後悪逆条々事)”라고 불리는 나리마사를 단죄하는 문서에는 검지에 대한 언급은 없고, 나리마사와 쿠마베 치카나가의 불화가 일기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42]
1588년 2월, 나리마사는 사죄하기 위해 오사카(大坂)로 향했지만, 히데요시에게 면회를 거부당하고 니가타에 유폐된다.[34] 히데요시는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의 구명탄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를 검사로 삼아 나리마사의 할복을 명령했다.[34] 할복할 때, 단도를 옆으로 한 번 긋고 나서, 장부(臟腑)를 꺼내 천장에 던졌다고 한다.[34] 묘는 셋쓰국(摂津国) 니가타의 호원사(法園寺)에 있다.[34]
계명(戒名)은 성정사정월동한대거사(成政寺庭月洞閑大居士)이다.[34] 사세(辞世)가는 "이 고로의 액망상을 넣어 두었던 철발주머니 이제 터뜨리네(このごろの 厄妄想を 入れ置きし 鉄鉢袋 今やぶるなり)"[37][38][39]이다.
2. 1. 오와리 시대
삿사 나리마사는 오와리국 가스가이군 히라성에서 삿사 나리무네(佐々成宗)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삿사씨는 오와리국카스가이군의 히라성을 근거지로 한 토호로, 원래 오다 노부야스에게 속해 있었다고 전해진다(『무공야화』). 삿사씨는 우다겐지 오미 사사키 씨의 서류로, 오와리국으로 옮겨 스와 씨의, 이어서 오다 씨의 가신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카즈사국 사사쇼에서 오와리로 옮겨왔다는 설, 후지와라 씨 출신설, 스가와라 성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1550년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했다.(『尾張佐々系譜』) 형으로 마사쓰구, 마고스케 등이 있었지만, 형들이 연달아 싸움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에, 1560년에 가독을 상속받아 히라 성주가 되었다.[1]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1561년, 모리부의 전투(이나바야마성 전투 참조)에서 이케다 쓰네오키와 함께 이나바 마타우에몬(이나바 요리미치의 삼촌)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웠다.(『신장공기』)
1567년, 이나바야마성 전투에서 사이토 다쓰오키(사이토 씨)와 싸웠다.[2] 같은해, 나리마사는 흑모의중 10명의 수장이 되었다. 노부나가는 흑모의중과 적모의중을 각각 10명으로 편성하였는데, 이는 기마대와 소년 중에서 무공이 뛰어난 자들을 선발한 것으로 보인다. 흑모의중은 기마대에서, 적모의중은 소년중에서 선발된 것으로 보인다. 나리마사는 노부나가 휘하의 무장이었으며, 등에 검은 호로(겉옷)를 착용한 군사 집단인 오다의 }}의 지휘관이었다.[2][3]
1568년,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섬기고 6만의 군사를 이끌고 상락의 길에 올랐다. 이 상락의 길, 오미에서 발생한 간논지성 전투에서는 롯카쿠 요시카타의 미노사쿠 성과 간논지성을 공략하고 9월 28일 교토에 입성하였다. 거기에 나리마사의 모습도 있었다.
1569년, 노부나가가 이세국의 기타바타케 구교의 오가와치 성을 공격할 때, 시바타 가쓰이에, 모리 요시나리, 후와 미쓰하루와 함께 성의 동쪽을 공격하는 부대를 이끌었다(『신장공기』).
1570년, 가네가사키 전투에 참전하여 기병대를 이끌었고, 조총 부대를 이용하여 하시바 히데요시를 지원했다. 이후 그는 아자이 씨와 아사쿠라 씨와 아네가와 전투에서 싸웠는데, 그는 후위에 있었다. 아네가와 전투에 앞서 "팔상산의 후퇴"에서는 야나다 히로마사, 나카조 이에타다 등과 함께 소수의 기마대를 이끌고 후위를 담당하여 철포대를 이용하여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신장공기』『당대기』).
1574년, 나가시마 일향 일기와의 전투에서 장남인 마쓰치요마루를 잃었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마에다 도시이에, 노무라 마사시게, 후쿠도미 히데카쓰, 반 나오마사와 함께 철포대를 이끌었다.[10] 철포봉행(砲奉行)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1577년, 그는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우에스기 겐신(우에스기 씨)과 싸웠다.
하지만, 이 시기(엣추국 입국 이전)의 나리마사의 활동에 대해서는 『신장공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의 경력과 업적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많다.[10]
2. 2. 후추 산닌슈 시대
덴쇼 3년(1575년) 5월, 나가시노 전투에서 마에다 도시이에 등과 함께 철포대를 이끌었다. 철포봉행(砲奉行)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같은 해 9월,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평정 후 시바타 가쓰이에 휘하에서 호쿠리쿠 지방을 담당했다. 마에다 도시이에, 후와 미쓰하루와 함께 에치젠 후추 10만 석을 다스리는 후추 산닌슈(府中三人衆)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영지를 나누지 않고 수입만을 분배하는 상급 지행 형태로 다스렸으며, 고마루 성을 쌓아 거점으로 삼았다. 후추 산닌슈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부하였으나, 반독립적인 오다 군의 유격 부대와 같은 존재였다. 우에스기 겐신 사후 엣추 국을 다스리는 권한을 얻었다.덴쇼 5년(1577년) 8월, 우에스기 겐신이 노토에 침입하자 시바타 가쓰이에 등과 함께 가가를 침공했으나, 나나오 성 함락으로 같은 해 10월 철수했다. ( 테도리가와 전투) 그러나 덴쇼 6년(1578년) 3월 우에스기 겐신이 죽자 점차 형세가 역전되었다. 덴쇼 8년(1580년) 이시야마 홍난사와 강화가 성립되자 호쿠리쿠 지방의 상황이 활발해졌고, 시바타 가쓰이에가 일향 일기를 제압했다. 삿사 나리마사는 이에 종군하여 노토국과 에치고국(현 도야마현)에도 진출했다.
2. 3. 엣추 시대
삿사 나리마사는 1580년부터 엣추 국 평정에 관여했다.[14][15] 도야마시를 흐르는 조간지 강 연안에 "사사제방"이라 불리는 제방을 축조하는 등 치수사업에 힘썼다.[11] 1581년에는 도야마성에 입성하여 엣추 국을 통치했다.[11]1582년 혼노지의 변 당시,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가스가야마성을 공격하려던 삿사 나리마사는 우오즈성 전투 직후 우에스기 군의 저지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에 즉각 대응하지 못했다.[4] 이후 기요스 회의에서 시바타 가쓰이에 측에 가담했으나, 시즈가타케 전투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한 대비 때문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숙부인 삿사 헤이자에몬을 지원군으로 보냈었다.
시바타 가쓰이에가 패배한 이후, 마에다 도시이에의 배신과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압박으로 딸을 인질로 보내고 머리를 삭발하는 것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5]
2. 4. 히데요시와의 관계
삿사 나리마사는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가담하여 마에다 도시이에와 스에모리성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19] 이 시기 나리마사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와도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양면 공격을 당해 고전하였다.[23]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자, 나리마사는 재기를 위해 히다 산맥을 넘어 이에야스를 만났으나 설득에 실패했다("사라사라 고에").[24][25]1585년, 히데요시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도야마성을 포위했다.[4]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카쓰의 중재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도야마 성 전투의 결과로 나리마사는 목숨은 건졌으나, 엣추국 영지를 몰수당하고 오사카로 이주했다.
2. 5. 히고 시대
1587년 규슈 정벌에서 삿사 나리마사는 공을 세워 히고 국주로 임명되었다.[5] 히데요시는 급속한 개혁을 삼가도록 지시했다고도 전해지지만, 병을 얻고 있던 나리마사는 곧바로 검지를 실시하려 했다.[45] 이에 반발한 구마베 지카나가(隈部親永)를 중심으로 한 국인(国人)들이 봉기하였다.( 히고 국인 일기(肥後国人一揆) )[45]나리마사는 히고 국인 지배를 슈인죠(朱印状)에 근거한 히데요시 직속에서 나리마사가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하는 중층형으로 전환하면서 실질적인 영토를 축소하려고 했다는 견해도 있다.[45] 그 외에도 영토 재편성을 통해 세력 분산을 도모한 점도 보이는데,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국인의 반발을 불렀다는 분석도 있다.[45]
나리마사가 참수당한 날 히데요시가 일기 진압에 참여한 여러 다이묘(大名)에게 발급한 “무쓰노카미 전후 악역 조조사(陸奥守前後悪逆条々事)”라고 불리는 나리마사를 단죄하는 문서에는 검지에 대한 언급은 없고, 나리마사와 쿠마베 치카나가의 불화가 일기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42]
1588년 2월, 나리마사는 사죄하기 위해 오사카(大坂)로 향했지만, 히데요시에게 면회를 거부당하고 니가타에 유폐된다.[34] 히데요시는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의 구명탄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를 검사로 삼아 나리마사의 할복을 명령했다.[34] 할복할 때, 단도를 옆으로 한 번 긋고 나서, 장부(臟腑)를 꺼내 천장에 던졌다고 한다.[34] 묘는 셋쓰국(摂津国) 니가타의 호원사(法園寺)에 있다.[34]
계명(戒名)은 성정사정월동한대거사(成政寺庭月洞閑大居士)이다.[34] 사세(辞世)가는 "이 고로의 액망상을 넣어 두었던 철발주머니 이제 터뜨리네(このごろの 厄妄想を 入れ置きし 鉄鉢袋 今やぶるなり)"[37][38][39]이다.
3. 사후
나리마사의 외손녀 다카쓰카사 다카코(데루코의 딸)는 에도 막부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혼인하여 미다이도코로가 되었다.[7][8]
4. 평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용맹을 떨친 삿사 나리마사는 엣추 국 통치 기간 동안 치수 사업에 힘쓰는 등 내치에도 힘썼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후에도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히고 국인 잇키 진압에 실패하여 몰락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삿사 나리마사의 무용에 대해 "무변(武辺)에 여유가 있어 매우 뛰어나다"라고 평가했다. 삿사 나리마사는 무용이 뛰어난 인물들을 좋아하여, 5000석의 지행을 약속하고 실제로는 6000석이나 7000석의 지행을 주기도 하여 많은 무용의 소유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당시 가모 우지사토가 "금색 삼층 스가 삿갓" 마크 사용 허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요청했을 때, 히데요시는 "삼층 스가 삿갓은 무용으로 유명한 삿사 나리마사가 사용했던 마크이므로 쉽게 허락할 수 없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의 무용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1580년에는 조간지 강 중류의 마세구치 일대가 자주 결괴하여 도야마성 아래에 재해를 일으키자, 인력을 동원하여 거석을 모아 마세구치 상류에 제방을 쌓아 수해를 방지했다.
삿사 나리마사의 몰락을 초래한 히고 국인 잇키와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강압적인 검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존재한다. 히데요시가 나리마사에게 신중한 영토 운영을 요구했다는 근거는 『태합기』에 있는 “오개조의 정서”에 기록된 국인의 지행 안도와 3년간의 검지 금지에 있지만, 이 문서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45][47] 나리마사는 입국 후 검지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구마베 지카나가의 반란이 국인 잇키의 발발을 불렀다고 여겨지지만, 나리마사 검지의 실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45]
나리마사가 참수당한 날 히데요시가 일기 진압에 참여한 여러 다이묘에게 발급한 문서는 나리마사와 구마베 지카나가의 불화가 일기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부젠 국인 일기에서는 일기를 일으킨 영주 구로다 다카타카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42] 구마베 지카나가 등의 반발의 원인은 검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큐슈 국분 자체에 대한 불만이라는 지적이 있다. 히고에서는 시마즈 씨의 북상을 배경으로 친시마즈파 국인과 친오토모파 국인이 격렬하게 다투었지만, 최종적으로 시마즈 씨가 히고 전역을 점령했다. 큐슈 평정에서 가장 먼저 히데요시에 대한 신종의 뜻을 보인 구마베 씨 등은 원래 친오토모파 국인이었으며, 그들은 시마즈 씨에게 빼앗긴 영토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국분에서는 원래 친오토모파 국인의 구영 회복이 인정되지 않았고, 한편 히데요시에 적대했던 친시마즈파 국인도 많은 수가 존속을 인정받았다. 구영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등으로 국인들의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기대는 반감으로 변했고, 직접적으로 새로운 영주인 나리마사에게 향했을 가능성이 있다.[48]
4. 1. 긍정적 평가
삿사 나리마사는 용맹한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며 주요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노부나가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엣추 통치 시에는 치수 사업에 힘쓰는 등 내치에도 힘썼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삿사 나리마사의 무용에 대해 "무변(武辺)에 여유가 있어 매우 뛰어나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무용이 뛰어난 인물들을 좋아하여, 5000석의 지행을 약속하고 실제로는 6000석이나 7000석의 지행을 주기도 하여 많은 무용의 소유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당시 가모 우지사토가 "금색 삼층 스가 삿갓" 마크 사용 허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요청했을 때, 히데요시는 "삼층 스가 삿갓은 무용으로 유명한 삿사 나리마사가 사용했던 마크이므로 쉽게 허락할 수 없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의 무용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1580년에는 조간지 강 중류의 마세구치 일대가 자주 결괴하여 도야마성 아래에 재해를 일으키자, 인력을 동원하여 거석을 모아 마세구치 상류에 제방을 쌓아 수해를 방지했다.
4. 2. 부정적 평가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의 몰락을 초래한 히고(肥後) 국인 일기(国人一揆)와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강압적인 검지(検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존재한다. 기존에는 나리마사가 강경한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반발을 불러 일으켜 일기가 발발했다고 여겨졌으며, 거기에서 역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秀吉)의 음모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는 의문점이 있거나, 좀 더 복잡한 배경이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45]히데요시가 나리마사에게 신중한 영토 운영을 요구했다는 근거는 『태합기(太閤記)』에 있는 “오개조의 정서(五箇条の定書)(제서)”에 기록된 국인의 지행 안도(知行安堵)와 3년간의 검지 금지에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수취인이 다르고, 문체에 한문(漢文)과 와칸분(和漢文)이 섞여 있는 점도 부자연스러워 정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45][47]
나리마사는 입국 후 검지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구마베 지카나가(隈部親永)의 반란이 국인 일기의 발발을 불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나리마사 검지의 실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나리마사는 히고 국인 지배를 슈인조(朱印状)에 근거한 히데요시 직속에서 나리마사가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하는 중층형으로 전환하면서 실질적인 영토를 축소하려고 했다는 견해도 있다.[45]
나리마사가 참수당한 날 히데요시가 일기 진압에 참여한 여러 다이묘(大名)에게 발급한 문서는 나리마사와 구마베 지카나가(隈部親永)의 불화가 일기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검지나 국인들의 통치를 둘러싸고 발발했다고 여겨지는 부젠(豊前) 국인 일기에서는 일기를 일으킨 영주 구로다 다카타카(黒田孝高)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42]
구마베 지카나가 등의 반발의 원인은 검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큐슈(九州) 국분(国分) 자체에 대한 불만이라는 지적이 있다. 히고에서는 시마즈(島津) 씨의 북상을 배경으로 친시마즈파 국인과 친오토모(大友)파 국인이 격렬하게 다투었지만, 최종적으로 시마즈 씨가 히고 전역을 점령했다. 큐슈 평정에서 가장 먼저 히데요시에 대한 신종의 뜻을 보인 구마베 씨 등은 원래 친오토모파 국인이었으며, 그들은 시마즈 씨에게 빼앗긴 영토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국분에서는 원래 친오토모파 국인의 구영 회복이 인정되지 않았고, 한편 히데요시에 적대했던 친시마즈파 국인도 많은 수가 존속을 인정받았다. 구영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등으로 국인들의 도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 대한 기대는 반감으로 변했고, 직접적으로 새로운 영주인 나리마사에게 향했을 가능성이 있다.[48]
5. 전설
삿사 나리마사에게는 “하야유리(早百合)”라는 아름다운 측실이 있었다고 한다. 나리마사는 하야유리를 매우 총애하여 하야유리는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하야유리가 간통을 하고 있다. 뱃속 아이는 나리마사의 아이가 아니다”라는 소문이 퍼졌다. 나리마사는 격노하여 하야유리를 신통강(神通川) 강가에서 살해하고, 하야유리의 일족 18명의 목을 모두 베어 참형시켰다. 하야유리는 “내 몸은 여기서 죽임을 당하지만, 원한은 악귀가 되어 몇 년 안에 너의 자손들을 모두 죽이고 가문을 끊어버리겠다.”라고 외쳤다(『絵本太閤記』).[43] 또한 하야유리히메는 “立山에 검은 백합꽃이 피면 삿사 가문은 멸망한다”는 저주의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한다(黒百合伝説).[43] 삿사 미즈오(나리마사의 조카인 삿사 나오카츠의 자손)에 따르면 어머니에게 “우리 집에서는 절대 백합과 식물은 꽂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43] 하야유리가 죽임을 당한 신통강 강가에서는 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여자의 목과 도깨비불이 나타난다고 하여 그것을 “부라리히(ぶらり火)”라고 불렀다.
나리마사의 몰락에 한몫했다고 알려진 검은 백합 전설이 있다. 히데요시의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는 진귀한 꽃으로 여겨지는 검은 백합을 나리마사에게서 선물받고, 그것을 공개하기 위해 다회를 열었는데, 요도도노는 갑자기 많은 검은 백합을 구해와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장식해 보였고, 키타노만도코로는 창피를 당했다며 나리마사를 미워했다고 한다.[44]
6. 가신
삿사 모리마사의 아들로는 삿사 헤이자에몬 등이 있다. 삿사 마고스케는 아즈키자카 칠본창 중 한 명으로, 오다 노부유키와의 이나부가하라 전투에서 1556년에 전사했다. 또 다른 아들 삿사 "하야토노카미" 마사츠구 역시 아즈키자카 칠본창 중 한 명으로,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1560년에 전사했다. 나리마사의 자녀로는 마츠치요마루가 있었는데, 1574년 세 번째 나가시마 공성전에서 전사했다. 딸 즈이젠인은 나리마사의 가신 마츠바라 고로베의 아내가 되었다. 또 다른 딸 테루코는 1630년에 사망했는데, 구게(kuge) 다카쓰카사 노부후사와 결혼하여 아들 다카쓰카사 노부히사와 딸 타카코를 두었다.[7][8] 미쓰히데인은 노부나가의 일곱 번째 아들 오다 노부타카(교운인의 아들 오다 노부타카,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입양된 도요토미 다카주)의 아내가 되었다. 쇼주인은 나리마사의 가신 진보 우지오키의 아내가 되었다.
그 외 가신으로는 고사카 유키치, 사사 무네요시, 쿠세 타지마, 진보 우지하루, 테라시마 모리토쿠, 오오키 카네요시, 마에노 코헤에, 케야 타케히사, 시부야 시게츠구, 시부야 요시히로, 코우라 카즈모리, 코이케 하루노리, 오카다 요시나가, 혼죠 히데츠나, 키쿠치 타케카츠, 하나와 야스토모, 구 평사부로 등이 있었다.
7. 현대의 현창
도야마시에서는 매년 7월 하순에 '관광 오야마 사사나리마사 전국시대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49][50] 토야마 성곽 카드 No.95는 도야마와 인연이 있는 무장 카드이다.[49][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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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田信長(下)唯我独尊が招いた相次いだ謀反… 久秀、村重、そして光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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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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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前田利家 武勇と仁愛を兼備、秀吉を支えた「槍の又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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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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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中の文学と風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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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近世移行期の国衆一揆と領主検地-肥後国衆一揆を素材として
戎光祥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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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成14年5月号 特別寄稿 佐々成政と肥後国衆一揆 ~中世から近世への歴史的転換点~
http://www.ccis-toya[...]
201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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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山の伝説その五 白山の黒百合
https://www.shiray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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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トピックスで読む≫熊本の歴史
弦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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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文 #추정. Harvnb 템플릿의 내용을 알 수 없으므로 추정.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47]
書籍
熊本県の歴史
山川出版社
[48]
書籍
中近世移行期の国衆一揆と領主検地-肥後国衆一揆を素材と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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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웹사이트
とやま城郭カード第二弾が完成しました!
https://www.city.ton[...]
[50]
웹사이트
とやま城郭カード一覧(第二弾)
https://www.city.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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