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노 야스나리 (15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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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키노 야스나리(1555년)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1566년 아버지 마키노 나리사다의 사망으로 11세의 나이에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590년에는 고즈케국 오고에 2만 석의 영지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으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우에다성 공격에서의 실책으로 칩거 처분을 받았다가 1604년 사면되었다. 이후 은거하다가 160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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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즈케국의 번주 - 마키노 다다나리 (초대)
마키노 다다나리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오고 번의 2대 번주를 지냈고,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겨 중용되었다. - 고즈케국의 번주 - 아키모토 야스토모
아키모토 야스토모는 1580년에 태어나 오사카 전투 이후 공을 세우고, 1633년 야무라 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닛코 도쇼구 조영을 총괄했으나, 1642년 간에이 대기근 시기 대책을 시도하다 사망했다. - 1555년 출생 - 이복남
이복남은 1555년 강원도 명주 출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활약하다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 1555년 출생 - 의인왕후
의인왕후는 조선 선조의 왕비로서, 박응순의 딸로 태어나 선조와 혼인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으며, 임진왜란 중 광해군을 보살피고 46세에 사망하여 선조와 함께 목릉에 안장되었다. - 마키노씨 - 마키노 사다미치
마키노 사다미치는 18세기 일본의 다이묘로,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하고 가사마 번으로 전봉되었으며, 43세에 사망했다. - 마키노씨 - 나가미네번
나가미네번은 마키노 다다나리가 영주로 임명되어 성립되었으나, 그가 다른 번으로 이봉되면서 2년 만에 폐지된 에치고국의 번이다.
마키노 야스나리 (1555년) | |
---|---|
기본 정보 | |
![]() | |
씨족 | 미카와 마키노 씨 |
이름 | 마키노 야스나리 |
이명 | 사다나리 (초명) 신지로 우마노스케 (통칭) |
생몰 | 출생: 고지 원년 (1555년) 사망: 게이초 14년 12월 12일 (1610년1월 6일) |
묘소 | 군마현 마에바시시의 정토종 요린지 |
계명 | 월조원전전전마응예영감칭덕대거사 |
관위 | 종5위하・우마노스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막부 | 에도 막부 |
가족 관계 | |
부모 | 마키노 시게사다 |
배우자 | 봉수원 |
자녀 | 마키노 다다나리 쇼센인 미쓰루 마키노 히데나리 마키노 요시나리 게이다이인 형향원 |
경력 | |
봉록 | 고즈케오고 번주 |
기타 정보 | |
특기 사항 | 실명에 조부의 이름을 사용하여 사다나리라고 칭했다 (조부, 아버지 모두 같은 통칭을 사용하고, 휘도 유사하기 때문에 이 3명은 혼동되기 쉬우므로 주의). 무공에 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편휘로서 「康」자를 받았다고 한다. |
2. 생애
본 절은 특히 주석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간세이 중수 제 가보』 권 제364 「세이와 겐지 지류·마키노」의 야스나리의 항을 참고하여 기술하고 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우시쿠보성 성주였던 아버지 마키노 나리사다가 병사하자 11세의 나이로 유지를 상속받았다. 이 때 일족인 마키노 모(이하 데와노카미, 나리모토 또는 나리자네라고도 하며, 마키노 야스나리의 아들)와 유지를 두고 다툼이 있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인과 후원의 결과 나리모토를 물리치고 상속에 성공했다[2]。다툼의 원인 중 하나는 야스나리가 이마가와 씨의 인질로 2년간 신병이 구속된 것(일설에는 요시다성)으로, 우시쿠보에 부재했던 것이 꼽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종사한 후에는 그 동 미카와 기두인 사카이 다다쓰구에 속하여, 덴쇼 3년(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 등 이에야스의 주요한 합전에 많이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으며, 또한 이에야스의 지시에 따라 덴쇼 연간에는 스와하라성(도토미국)·고코쿠지성(스루가국)·마사토성(이즈국)·나가쿠보성(스루가국)과 여러 성을 재번하며, 이에야스의 도카이도 평정에 기여했다. 그 공적으로 인해, 덴쇼 16년(1588년) 4월까지 종5위하·우마노카미에 서위·임관, 이 때의 구선에서 세이와 겐지를 칭했다(「류에이 실록」)[3][4]。또한 덴쇼 18년(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로 가증 이봉되자, 고즈케국 오고에 2만 석의 영지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5]。
게이초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속하여 사나다 마사유키(서군)가 지키는 우에다성 공격에 참가했다. 도쿠가와 측의 벼 베기 방해를 둘러싼 우발적인 전투에서, 야스나리는 아군이 위기에 처한 것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것이 성 공격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이 성 공격은 히데타다의 허가 없이, 게다가 결과는 참패였으므로, 야스나리는 그 책임을 추궁받았다. 직접 지휘를 한 부하 니에 소부의 할복을 명받았으나, 야스나리는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며 이를 거부했다. 적남인 타다나리도 이 명령에 거역하여, 니에 등을 데리고 출분했기 때문에 크게 히데타다의 노여움을 사, 야스나리는 고즈케국 아즈마에 칩거 처분을 받았다[6]。마키노대는 사나다 측의 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야스나리·타다나리 부자의 지휘 아래 우에다 성내로 쳐들어갔으며, 가신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화를 면했다. 깃발 봉행인 니에 소부는 주군의 실책을 대신하여 할복을 명받았다고 한다.
그 후, 게이초 9년(1604년)에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탄생한 것에 의한 은사로 처분이 해제되어, 오고 번 2만 석으로 돌아갔다. 단, 이 기간 동안 가문 몰락 상태는 아니었다. 이 이후, 공무는 적남인 타다나리에게 맡기고 오고에 한거하며, 그대로 게이초 14년(1609년) 12월에 사망했다. 법명은 겟쇼인덴 젠텐큐 에이요 에이칸 쇼토쿠 다이코지. 장지는 군마현마에바시시호리코시정의 정토종 요린지。또한 『당대기』에는 사망 6, 7년 전부터 세상을 원망하며 은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1. 가독 상속과 초기 활동
에이로쿠 9년(1566년), 우시쿠보성 성주였던 아버지 마키노 나리사다가 병사하자 11세의 나이로 유지를 상속받았다. 이 때 일족인 마키노 모(이하 데와노카미, 나리모토 또는 나리자네라고도 하며, 마키노 야스나리의 아들)와 유지를 두고 다툼이 있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인과 후원으로 상속에 성공했다.[2] 야스나리가 이마가와 씨의 인질로 2년간 신병이 구속되어 우시쿠보에 부재했던 것이 다툼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종사한 후에는 사카이 다다쓰구에 속하여 덴쇼 3년(1575년) 나가시노 전투 등 이에야스의 주요한 합전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덴쇼 연간에는 스와하라성(도토미국)·고코쿠지성(스루가국)·마사토성(이즈국)·나가쿠보성(스루가국) 등 여러 성을 재번하며 도카이도 평정에 기여했다. 덴쇼 16년(1588년) 4월까지 종5위하·우마노카미에 서위·임관, 구선에서 세이와 겐지를 칭했다(「류에이 실록」).[3][4] 덴쇼 18년(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자 고즈케국 오고에 2만 석의 영지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5]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속하여 사나다 마사유키(서군)가 지키는 우에다성 공격에 참가했다. 도쿠가와 측의 벼 베기 방해를 둘러싼 우발적인 전투에서 아군이 위기에 처하자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성 공격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이는 히데타다의 허가 없이 이루어진 공격이었고, 결과는 참패였으므로 야스나리는 그 책임을 추궁받았다. 직접 지휘를 한 부하 니에 소부의 할복을 명받았으나, 야스나리는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며 이를 거부했다. 적남인 타다나리도 이 명령에 거역하여, 니에 등을 데리고 출분했기 때문에 히데타다의 노여움을 사 고즈케국 아즈마에 칩거 처분을 받았다.[6] 마키노대는 사나다 측의 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야스나리·타다나리 부자의 지휘 아래 우에다 성내로 쳐들어갔으며, 가신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화를 면했다.
게이초 9년(1604년) 도쿠가와 이에미쓰 탄생에 의한 은사로 처분이 해제되어 오고 번 2만 석으로 돌아갔다. 이 기간 동안 가문 몰락 상태는 아니었다. 이후 공무는 타다나리에게 맡기고 오고에 한거했으며, 게이초 14년(1609년) 12월에 사망했다. 법명은 겟쇼인덴 젠텐큐 에이요 에이칸 쇼토쿠 다이코지. 장지는 군마현마에바시시호리코시정의 요린지이다. 『당대기』에는 사망 6, 7년 전부터 세상을 원망하며 은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2. 세키가하라 전투와 칩거
에이로쿠 9년(1566년), 우시쿠보성 성주였던 아버지 마키노 나리사다가 병사하자 11세의 나이로 유지를 상속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인과 후원으로 상속에 성공했다[2]。게이초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속하여 사나다 마사유키(서군)가 지키는 우에다성 공격에 참가했다. 도쿠가와 측의 벼 베기 방해를 둘러싼 우발적인 전투에서, 아군이 위기에 처한 것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것이 성 공격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이 성 공격은 히데타다의 허가 없이, 게다가 결과는 참패였으므로, 그 책임을 추궁받았다. 직접 지휘를 한 부하 니에 소부의 할복을 명받았으나,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며 이를 거부했다. 적남인 타다나리도 이 명령에 거역하여, 니에 등을 데리고 출분했기 때문에 크게 히데타다의 노여움을 사, 고즈케국 아즈마에 칩거 처분을 받았다[6]。 마키노대는 사나다 측의 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야스나리·타다나리 부자의 지휘 아래 우에다 성내로 쳐들어갔으며, 가신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화를 면했다. 깃발 봉행인 니에 소부는 주군의 실책을 대신하여 할복을 명받았다고 한다.
그 후, 게이초 9년(1604년)에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탄생한 것에 의한 은사로 처분이 해제되어, 오고 번 2만 석으로 돌아갔다. 단, 이 기간 동안 가문 몰락 상태는 아니었다. 이 이후, 공무는 적남인 타다나리에게 맡기고 오고에 한거하며, 그대로 게이초 14년(1609년) 12월에 사망했다. 법명은 겟쇼인덴 젠텐큐 에이요 에이칸 쇼토쿠 다이코지. 장지는 군마현마에바시시호리코시정의 정토종 요린지이다. 또한 『당대기』에는 사망 6, 7년 전부터 세상을 원망하며 은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3. 만년
에이로쿠 9년(1566년), 우시쿠보성 성주였던 아버지 마키노 나리사다가 병사하자 11세의 나이로 유지를 상속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인과 후원으로 상속에 성공했다.[2] 야스나리가 이마가와 씨의 인질로 2년간 신병이 구속되어 우시쿠보에 부재했던 것이 상속 분쟁의 원인 중 하나였다.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종사한 후에는 사카이 다다쓰구에 속하여, 덴쇼 3년(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 등 이에야스의 주요한 합전에 많이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덴쇼 연간에는 스와하라성(도토미국)·고코쿠지성(스루가국)·마사토성(이즈국)·나가쿠보성(스루가국)과 여러 성을 재번하며, 이에야스의 도카이도 평정에 기여했다. 덴쇼 16년(1588년) 4월까지 종5위하·우마노카미에 서위·임관, 이 때 세이와 겐지를 칭했다.[3][4] 덴쇼 18년(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로 가증 이봉되자, 고즈케국 오고에 2만 석의 영지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5]
게이초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속하여 사나다 마사유키(서군)가 지키는 우에다성 공격에 참가했다. 도쿠가와 측의 벼 베기 방해를 둘러싼 우발적인 전투에서 아군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성 공격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는 히데타다의 허가 없이 이루어진 공격이었고 결과는 참패였으므로, 야스나리는 그 책임을 추궁받았다. 직접 지휘를 한 부하 니에 소부의 할복을 명받았으나, 야스나리는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며 이를 거부했다. 적남인 타다나리도 이 명령에 거역하여, 니에 등을 데리고 출분했기 때문에 크게 히데타다의 노여움을 사, 야스나리는 고즈케국 아즈마에 칩거 처분을 받았다.[6] 마키노대는 사나다 측의 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야스나리·타다나리 부자의 지휘 아래 우에다 성내로 쳐들어갔으며, 가신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화를 면했다.
게이초 9년(1604년)에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탄생한 것에 의한 은사로 처분이 해제되어, 오고 번 2만 석으로 돌아갔다. 이 기간 동안 가문 몰락 상태는 아니었다. 이후, 공무는 적남인 타다나리에게 맡기고 오고에 한거하며, 게이초 14년(1609년) 12월에 사망했다. 법명은 겟쇼인덴 젠텐큐 에이요 에이칸 쇼토쿠 다이코지. 장지는 군마현마에바시시호리코시정의 정토종 요린지이다. 『당대기』에는 사망 6, 7년 전부터 세상을 원망하며 은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가계
마키노 나리사다의 아들로 태어났다.[7] 정실은 도요토미 가문 가신의 딸로, 사카이 타다츠구의 양녀였다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가 된 호주인이다.[7]
자녀는 3남 4녀를 두었다.[7] 장남 마키노 타다나리는 호주인이 낳았다.[7] 차남은 마키노 히데나리, 삼남은 마키노 요시나리이다.[7]
적녀 쇼센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가 되어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계실이 되었다.[7] 마츠라 타카노부의 정실이 된 딸(충, 에이쇼인)도 있다.[7] 그 외 딸로는 가신 마키노 마사유키의 처가 된 케다이인(삼녀)과[7] 가신 마키노 마사나리의 처가 된 쿄코인(사녀)이 있다.[7]
참조
[1]
문서
実名に祖父の名を用い貞成と称した(祖父・父ともに同じ仮名 (通称)|通称を用い、諱も類似しているためにこの3人は混同されやすいので注意)。武功により、徳川家康より偏諱として「康」字を拝領という。
[2]
서적
長岡の歴史 第1巻
[3]
서적
長岡の歴史 第1巻
[4]
문서
『寛永諸家系図伝』の編者注によるとする(『新編 豊川市史 第1巻』372頁)、および康成の源氏称姓時期は天正16年の従五位下・右馬允任官の際の口宣案とする(『新編 豊川市史 第1巻』374頁)。
[5]
문서
ただし、牧野氏および康成は、徳川家康(松平氏)に先祖代々仕えた譜代の家臣ではなく、家康が桶狭間の戦いの後に岡崎に自立して三河を平定して行く過程で、その軍事的圧力に屈して征服された経緯を持つ。はじめ康成は酒井忠次配下の東三河の国衆の一人とされ、家康譜代の家臣団とは区別されていたが、大胡移封のこの時に譜代大名に列したものである。
[6]
서적
長岡の歴史 第1巻
[7]
문서
『長岡の歴史 第1巻』24 - 25頁の添付系図とその注記に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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