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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 미국 파견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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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엔 원년 미국 파견 사절은 1860년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에도 막부에서 미국에 파견한 사절단이다. 정사 니이미 마사오키, 부사 무라가키 노리마사, 감찰 오구리 다다마사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미국 해군 함선 포우하탄 호와 별도로 간린마루를 파견하여 태평양을 횡단했다. 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 파나마,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뉴욕 등지를 방문하며 미국 문물을 접하고, 통화 교환 비율 협상을 진행했지만,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사절단 파견은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 증가와 근대화 추진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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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 미국 파견 사절
지도 정보
사절 정보
정식 명칭만엔 원년 견미 사절 (万延元年遣米使節)
파견 시기만엔 원년 (1860년)
목적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서 교환
주요 경로에도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
뉴욕
파나마 지협
하와이
요코하마
파견 배경
주요 사건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1858년)
시대적 배경에도 막부 말기, 개국 정책 추진
사절단 구성
총 책임자신미 마사오키 (新見正興)
부사무라가키 노리마사 (村垣範正), 오구리 다다마사 (小栗忠順)
주요 수행원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
오카다 도키치 (岡田時敏)
가와카쓰 히로즈미 (川勝博澄)
주요 활동
비준서 교환제임스 뷰캐넌 대통령과 비준서 교환
미국 방문워싱턴 D.C.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뉴욕
주요 행사 참석백악관 환영 행사
뉴욕 시청 환영 행사
사절단의 영향
정치적 영향일본의 개국 정책 가속화
문화적 영향서양 문물에 대한 일본 사회의 관심 증대
후쿠자와 유키치 등, 사절단 참여자들의 계몽 활동
기타 정보
관련 기념물미국 워싱턴 D.C.의 일본 대사관
참고 자료가쓰 가이슈의 《해군역사》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

2. 역사적 배경

가에이 7년(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과 안세이 5년(1858년) 7월 29일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따라, 에도 막부는 비준서 교환을 위해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조약 협상을 맡았던 이와세 다다나리는 안세이 대옥으로 인해 사절단에 참여하지 못했다.[4]

사절단 3인방: 무라가키 노리마사, 신미 마사오키, 오구리 다다마사


안세이 6년(1859년) 9월, 정사 신미 마사오키와 부사 무라가키 노리마사가 임명되었다. 외국 봉행은 무라가키가 선임이었지만, 녹봉이 500석이었던 무라가키보다 2,000석을 받은 신미가 정사가 되었다. 감독관 오구리 다다마사는 비공식적으로 통화 교환 비율 협상 임무를 맡았다. 사절단 77명은 조시아 태트널 대장이 지휘하고 조지 피어슨 대령이 함장을 맡은 미국 해군의 ‘포우하탄 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포우하탄 호의 사고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함 봉행 미즈노 다다노리의 건의로 간린마루가 파견되었다. 기무라 가이슈가 간린마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가쓰 가이슈, 나카하마 만지로,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승선했다. 기무라는 일본인 승무원의 항해 기술에 불안을 느껴 미국 군인의 승선을 요청했고, 반대하는 일본인 승무원을 설득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2. 1. 사절단 구성

가에이 7년(1854년) 미일화친조약과 안세이 5년(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해 에도 막부는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안세이 대옥으로 인해 조약 협상을 했던 이와세 다다나리는 사절단에 참가하지 못했다.[4][5]

안세이 6년(1859년) 9월, 외국 봉행과 가나가와 봉행을 겸임하던 신미 마사오키가 정사, 무라가키 노리마사가 부사로 임명되었다. 무라가키가 외국 봉행 선임이었지만, 녹봉이 500석이었던 반면 신미는 2,000석이었기 때문에 신미가 정사가 되었다. 오구리 다다마사는 감독관으로 선정되었는데, 본래 임무 외에 비공식적으로 통화 교환 비율 협상 임무도 맡았다.[4][5]

정식 대표 3명을 포함한 77명의 사절단은 조시아 태트널 대장이 지휘하고 조지 피어슨 대령이 함장을 맡은 미국 해군의 ‘포우하탄 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감독관은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았으나, “검열을 한다”고 주장하여 위기를 모면했다.[4][5]

2. 2. 간린마루 파견

1860년 2월 9일 (일본 음력 1월 19일), 가쓰 가이슈가 선장을 맡고 나카하마 만지로가 공식 통역을 담당한 간린마루는 96명의 일본인과 미국 장교 존 M. 브룩을 태우고 가나가와현 우라가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2][3] 기무라 요시타케 제독은 사절단의 총지휘를 맡았으며, 훗날 교육자이자 개혁가로 활동하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기무라 제독의 조수로 자원했다.[2][3]

일본 사절단 본대는 미국 해군 군함 USS ''포와탄''을 타고 이동했고, ''간린마루''는 이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간린마루''는 태평양 횡단 경로가 달라 ''포와탄''보다 먼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일본 사절단은 신미 마사오키(新見正興) 대사, 무라가키 노리마사(村垣範正) 부대사, 오구리 타다마사(小栗忠順) 옵저버의 세 명으로 구성되었다.[4][5]

''간린마루''의 샌프란시스코 항해는 존 M. 브룩의 조언을 받기는 했지만, 일본 선박을 일본인 선원만으로 운항하여 태평양을 횡단한 첫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이는 일본 선박과 선원에 의한 최초의 태평양 횡단은 아니었다. 일본의 쇄국 시대 이전인 17세기에 이미 세 차례의 태평양 횡단이 있었다. 1610년 다나카 쇼스케, 1614년 하세쿠라 쓰네나가, 1616년 요코자와 쇼겐의 항해가 그것이다.

3. 일정

1860년 2월 9일, 사절단 일행은 시나가와 앞바다에서 포우하탄 호에 승선하여 요코하마에 4일간 정박한 후 2월 13일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했다. 항해 도중 심한 폭풍을 만나 석탄 소모가 많아져, 3월 4일 보급을 위해 하와이섬 호놀룰루에 기항했다. 하와이 체류 중에는 하와이 왕국 국왕 카메하메하 4세를 알현했다. 3월 17일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3월 28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3월 11일에는 시장 주최 환영식이 열렸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샌프란시스코의 테오도라 앨리스, 1860년.


간린마루샌프란시스코에 직항으로 도착했지만, 포와탄 호와 사절단은 먼저 하와이 왕국에 들러 카메하메하 4세 국왕과 엠마 왕비의 환대를 받았다.[6][7] 1860년 3월 29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사절단은 한 달 동안 머물면서 도시의 주요 명소를 둘러보고 시장의 영접을 받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미국 소녀와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은 이후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또한 웹스터 사전을 구입하여 이를 통해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자신만의 영어-일본어 사전을 준비했다.[8]

1860년 4월 7일 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4월 24일 파나마에 도착했다.[9] 당시 파나마 운하는 완공 전이었기 때문에, 사절단은 파나마 지협 철도를 이용해 대서양 쪽의 아스핀월(현재의 콜론)로 이동했다.[9] 무라가키 노리마사는 이때의 상황을 "드디어 증기가 끓어오르니, 지금 곧 달려나갈 듯하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들으니, 배와는 달리 어떨까 하고 걱정했는데, 맹렬한 기차 소리를 내며 달려나가더라"고 기록했다.[9] 사절단은 3시간 만에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여 대서양에 도착했고, 1년 이상 기다리고 있던 로어노크 호(USS ''Roanoke'')로 갈아탔다.[9]

백악관에서 열린 환영회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이 사절단을 맞이하다


1860년 5월 15일(구력 윤3월 25일) 워싱턴 D.C.에 도착한 사절단은 윌라드 호텔에 묵었다. 다음 날인 5월 16일(구력 윤3월 26일)에는 루이스 캐스 국무장관을 방문했고, 5월 17일(구력 윤3월 27일)에는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을 만나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서를 전달했다. 5월 22일(구력 4월 2일) 비준서 교환이 완료되면서 사절단의 가장 큰 임무는 마무리되었다.

워싱턴 D.C.에서 25일 동안 머무르는 동안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미국 국회의사당, 워싱턴 해군 공창, 미국 해군 천문대 등을 방문했다. 6월 5일(구력 4월 16일)에는 다시 뷰캐넌 대통령을 만났고, 이후 국무부에서 캐스 국무장관으로부터 사절 3명에게는 금메달, 수행원에게는 은메달, 종자에게는 동메달이 수여되었다. 또한 워싱턴 체류 중에는 금은 화폐 협상이 여러 차례 진행되었다.

6월 8일(구력 4월 19일) 워싱턴 D.C.를 출발하여 볼티모어에서 숙박한 후, 6월 9일(구력 4월 20일) 필라델피아로 이동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조폐국을 견학하고, 미일 금화 분석 실험과 금은 화폐 협상을 계속 진행했다.[17] 또한 체스 클럽을 방문하여 장기를 선보였다.

6월 16일 오전에 필라델피아를 출발하여 오후에 뉴욕에 도착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대규모 환영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5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사절단을 열렬히 환영했다.[17] 당시 《뉴욕 타임즈》는 이를 "도시 역사상 가장 새롭고 화려한 이벤트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18]

뉴욕에는 13일 동안 머물렀지만, 특별히 중요한 행사는 없었다. 6월 29일, 나이아가라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사절단이 뉴욕을 출발할 때,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이었던 그레이트 이스턴 호가 뉴욕항에 정박해 있었다. 그레이트 이스턴 호는 만재 배수량 32160ton, 길이 211m에 달하는 거대한 선박으로, 배수량만으로 따지면 포우하탄 호의 10배에 달했다. 사절단 일행은 이 배를 군함으로 오인하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일본과 서양 열강 간의 과학 기술 격차를 실감하게 되었다.

뉴욕을 출발한 일행은 북대서양을 횡단하여 포르투갈카보베르데(현 카포베르데)의 산비센테섬 포르토 그란데(현 민델르 항구)에 이르렀고, 거기에서 남하하여 포르투갈앙골라(현 앙골라)의 루안다를 거쳐 8월 27일에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갔다. 이후 네덜란드바타비아(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영국홍콩을 경유해 11월 9일 시나가와 앞바다에 도착하여 다음날 하선했다.[1]

3. 1. 샌프란시스코

안세이 7년(1860년) 2월 9일, 사절단 일행은 시나가와 앞바다에서 포우하탄 호에 승선하여 요코하마에 4일간 정박한 후 2월 13일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했다. 항해 도중 심한 폭풍을 만나 석탄 소모가 많아져, 3월 4일 보급을 위해 하와이섬 호놀룰루에 기항했다. (날짜 변경선 통과 후 날짜 조정 문제로 일행 대부분의 일기 날짜는 실제와 차이가 있었다.) 하와이 체류 중에는 하와이 왕국 국왕 카메하메하 4세를 알현했다. 3월 17일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3월 28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3월 11일에는 시장 주최 환영식이 열렸다.

3. 1. 1. 간린마루의 샌프란시스코 도착



간린마루샌프란시스코에 직항으로 도착했지만, ''포와탄'' (그리고 사절단)은 먼저 하와이 왕국에 들러 카메하메하 4세 국왕과 엠마 왕비의 환대를 받았다.[6][7] 1860년 3월 29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사절단은 한 달 동안 머물면서 도시의 주요 명소를 둘러보고 시장의 영접을 받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미국 소녀와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은 이후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또한 영어-중국어 웹스터 사전을 구입하여 이를 통해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자신만의 영어-일본어 사전을 준비했다.[8]

간린마루가 우라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항해한 것은 존 M. 브룩의 조언을 받기는 했지만 일본 선박을 일본인 선원만으로 운항하여 태평양을 처음 횡단한 것으로 종종 언급된다. 하지만 간린마루의 항해가 일본 선박과 선원에 의한 최초의 태평양 횡단은 아니었다. 일본의 쇄국 시대 이전인 17세기에 적어도 세 차례의 그러한 항해가 있었다. 1610년의 다나카 쇼스케, 1614년의 하세쿠라 쓰네나가, 그리고 1616년의 요코자와 쇼겐의 항해가 바로 그것이다.

3. 2. 파나마

1860년 4월 7일 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4월 24일 파나마에 도착했다.[9] 당시 파나마 운하는 완공 전이었기 때문에, 사절단은 파나마 지협 철도를 이용해 대서양 쪽의 아스핀월(현재의 콜론)로 이동했다.[9] 무라가키 노리마사는 이때의 상황을 "드디어 증기가 끓어오르니, 지금 곧 달려나갈 듯하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들으니, 배와는 달리 어떨까 하고 걱정했는데, 맹렬한 기차 소리를 내며 달려나가더라"고 기록했다.[9] 사절단은 3시간 만에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여 대서양에 도착했고, 1년 이상 기다리고 있던 로어노크 호(USS ''Roanoke'')로 갈아탔다.[9]

3. 3.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뉴욕



만엔 원년 미국 파견 사절단은 1860년 5월 15일(구력 윤3월 25일)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윌라드 호텔에 묵었다. 다음 날인 5월 16일(구력 윤3월 26일)에는 루이스 캐스 국무장관을 방문했고, 5월 17일(구력 윤3월 27일)에는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을 만나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서를 전달했다. 5월 22일(구력 4월 2일) 비준서 교환이 완료되면서 사절단의 가장 큰 임무는 마무리되었다. 비준 교환 증서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외무성에 보관되어 있다.

워싱턴 D.C.에서 25일 동안 머무르는 동안 사절단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미국 국회의사당, 워싱턴 해군 공창, 미국 해군 천문대 등을 방문했다. 6월 5일(구력 4월 16일)에는 다시 뷰캐넌 대통령을 만났고, 이후 국무부에서 캐스 국무장관으로부터 사절 3명에게는 금메달, 수행원에게는 은메달, 종자에게는 동메달이 수여되었다. 또한 워싱턴 체류 중에는 금은 화폐 협상이 여러 차례 진행되었다.

6월 8일(구력 4월 19일) 워싱턴 D.C.를 출발하여 볼티모어에서 숙박한 후, 6월 9일(구력 4월 20일) 필라델피아로 이동했다.

3. 3. 1. 필라델피아

조폐국을 견학하고, 미일 금화 분석 실험과 금은 화폐 협상을 계속 진행했다.[17] 또한 체스 클럽을 방문하여 장기를 선보였다.

3. 3. 2. 뉴욕

6월 16일 오전에 필라델피아를 출발하여 오후에 뉴욕에 도착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대규모 환영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5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사절단을 열렬히 환영했다.[17] 당시 《뉴욕 타임즈》는 이를 "도시 역사상 가장 새롭고 화려한 이벤트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18] 2010년 6월에는 사무라이 방미 1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회가 뉴욕시립박물관에서 개최되기도 했다.[17]

뉴욕에는 13일 동안 머물렀지만, 특별히 중요한 행사는 없었다. 6월 29일, 나이아가라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한편, 사절단이 뉴욕을 출발할 때,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이었던 그레이트 이스턴 호가 뉴욕항에 정박해 있었다. 그레이트 이스턴 호는 만재 배수량 32160ton, 길이 211m에 달하는 거대한 선박으로, 배수량만으로 따지면 포우하탄 호의 10배에 달했다. 사절단 일행은 이 배를 군함으로 오인하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일본과 서양 열강 간의 과학 기술 격차를 실감하게 되었다.

3. 4. 귀국

뉴욕을 출발한 일행은 북대서양을 횡단하여 포르투갈카보베르데(현 카포베르데)의 산비센테섬 포르토 그란데(현 민델르 항구)에 이르렀고, 거기에서 남하하여 포르투갈앙골라(현 앙골라)의 루안다를 거쳐 8월 27일에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갔다. 이후 네덜란드바타비아(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영국홍콩을 경유해 11월 9일 시나가와 앞바다에 도착하여 다음날 하선했다.[1]

4. 통화 협상

이 사절단의 숨겨진 목적 중 하나는 통화 교환 비율 협상이었다.

일본에서는 은(銀)이 원래 조긴(丁銀)과 마메이타긴(豆板銀)과 같이 무게로 화폐 가치가 결정되는 칭량화폐로 유통되었지만, 에도 시대 후기에 발행된 1분은은 액면이 기재된 계수화폐였다. 그 화폐 가치는 금화인 1분금과 등가로 간주되어 1/4에 상당했다. 그러나 덴포 1분은의 양은 2.3몬메에 불과하여, 칭량화폐인 덴포 정은의 함유 은량을 환산한 3.9몬메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여, 따라서 귀금속으로서의 가치는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분은의 발행고는 정은을 훨씬 웃돌게 되었고, 덴포 이후에는 은화 유통의 주류가 되었다.

미일 화친 조약 체결로 일본 화폐와 서양 화폐 간의 교환 비율을 정할 필요가 생겼다. 막부는 일본의 본위 화폐인 금을 기준으로 교환율 설정을 주장했지만, 해리스는 당시 국제 결제의 표준 통화가 양은(멕시코 달러 은화)였기 때문에 은을 기준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막부는 미국 측에 밀려 은 함유량을 기준으로 1달러 = 3분의 교환 비율을 승낙하게 된다.

이는 상대적으로 일본의 금이 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 함유량으로 비교하면, 덴포 소반 5냥이 미국 20달러 금화 (Double Eagle)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1달러(멕시코 은화) → 3분(1분은) → 0.75냥(덴포 소반) → 3달러(20달러 금화)로 환전만 해도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대량의 금이 해외로 유출되게 되었다.

이를 방지하는 방법으로, 1분은이 계수화폐이며 국제 결제에 부적절하다는 것을 여러 외국에 인정받는 방법이 있었다. 오구리 다다마사는 방미 중에 이 협상을 진행했다. 오구리는 1분은 및 그것과 같은 액면을 가진 1분금을 필라델피아 조폐국에서 분석하게 하여, 1분은은 35.6센트, 1분금은 89센트에 상당함을 확인시켰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양은과 1분은의 교환은 금지하고, 90센트=1분으로 1분금과의 교환을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측은 오구리의 주장의 정당성은 이해했지만,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 협상 과정에서, 오구리는 터프한 협상가로서 일본인의 평가를 높였다고 한다.

결국, 금은 교환 비율을 여러 외국과 같게 하기 위해, 막부는 오구리의 귀국을 기다리지 않고, 덴포 소반의 약 1/3의 금 함유량을 가진 만엔 소반을 새롭게 발행하게 되지만, 결과적으로 대폭적인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게 되었다.

5. 결과 및 영향

만엔 원년 미국 파견 사절단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되었으나, 이들의 임무는 단순한 외교 절차를 넘어선 의미를 지녔다. 사절단에는 통화 교환 비율 협상이라는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지만, 이 협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1] 이는 일본 경제에 어려움을 초래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사절단의 파견은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절단이 미국에서 보고 경험한 서양 문물은 일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서양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계기가 되었다.[1] 이는 곧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인물은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참조

[1] 문서 The first naval training in Japan had been begun at the Nagasaki Naval Training Center in 1855.
[2] 서적 Bakumatsu—Meiji Furushashin Chō Aizōhan
[3] 서적 Sekai wo Mita Bakumatsu-Ishin no Eiyūtachi
[4] 서적 Bakumatsu—Meiji Furushashin Chō Aizōhan
[5] 서적 Sekai wo Mita Bakumatsu-Ishin no Eiyūtachi
[6] 뉴스 The Japanese Embassy https://www.newspape[...] 1860-03-10
[7] 뉴스 The Japanese in Honolulu https://www.newspape[...] 1860-08-16
[8] 서적 Bakumatsu—Meiji Furushashin Chō Aizōhan
[9] 뉴스 The Japanese in America https://www.nytimes.[...] 1860-05-10
[10] 웹사이트 Arrival of First Japanese Embassy at the Navy Yard (1860) https://ghostsofdc.o[...] 2022-03-18
[11] 서적 Bakumatsu—Meiji Furushashin Chō Aizōhan
[12] 뉴스 The Japanese in Philadelphia https://www.nytimes.[...] 1860-06-12
[13] 서적 A History of Japan, 1582-1941 2003
[14] 뉴스 Reception of the Japanese https://www.nytimes.[...] 1860-06-16
[15] 서적 Bakumatsu—Meiji Furushashin Chō Aizōhan
[16] 뉴스 The Japanese Embassy https://www.nytimes.[...] 1860-08-20
[17] 웹사이트 http://www.examiner.[...]
[18] 뉴스 New York Times article from June 16, 1860 1860-06-16
[19] 뉴스 【世界を驚かせた日本人】立石斧次郎 米国女性を熱狂させた幕末の侍アイドル http://www.zakzak.co[...] 産経デジタル 2017-10-01
[20] 간행물 五味安郎右衛門 http://www.hayano.co[...] 2002-10-01
[21] 논문 「大坂町奉行並松本寿大夫救民手宛米一件」の社会事業史的意義 https://www.i-reposi[...] 2015-03-30
[22] 서적 Bakumatsu—Meiji Furushashin Chō Aizō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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