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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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쓰 사건은 1891년 5월 11일,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 방문 중 시가현 경찰관 쓰다 산조에게 습격당한 사건이다. 쓰다는 니콜라이 황태자를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황태자는 부상을 입었다. 사건 발생 배경에는 러시아의 극동 진출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감, 쓰다 산조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귀환설 등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쓰다 산조에게 사형을 구형하려 했으나, 대법원장 고지마 고레카타가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이를 거부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일본 사법부의 독립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았으며, 일본 국내 및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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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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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오쓰 사건 |
로마자 표기 | Ōtsu Jiken |
사건 개요 | |
발생 장소 | 일본 시가현시가군 오쓰정 (현재의 오쓰시) |
발생 날짜 | 1891년 5월 11일 |
개요 | 일본을 방문 중이던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가 일본 경찰관에게 사벨로 공격을 받아 부상당함. |
원인 및 배경 | |
부상자 | 니콜라이 2세(러시아 제국 황태자) |
가해자 정보 | |
범인 | 쓰다 산조(시가현 경찰부 순사) |
사건 대응 |
2. 사건 배경
1891년(메이지 24년),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태자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시작을 알리는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극동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중 일본을 방문했다. 니콜라이 황태자가 탑승한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가고시마, 나가사키, 고베에 정박했다. 고베에서 황태자는 육로로 교토로 이동했고, 일본의 아리스가와 다루히토 친왕을 중심으로 한 고위급 대표단이 직접 그를 맞이했다.
당시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의 군사적 영향력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는 일본 정부가 이 방문에 큰 중요성을 두게 된 주요 원인으로 여겨진다. 특히,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러일 관계 증진에 중점을 두었다. 니콜라이는 일본 전통 공예에 관심을 보였고, 오른팔에 용 문신을 새겼으며, 장식용 머리핀을 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할 만한 군사력이 없었으며,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등 극동 진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2. 1. 니콜라이 황태자의 일본 방문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태자는 시베리아 철도 극동지구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도중에 일본을 방문했다.[13][14][15] 니콜라이 황태자 일행은 나가사키(長崎)와 가고시마(鹿兒島)를 방문한 후, 고베(神戶)에 상륙해 교토(京都)로 향했다. 당시 아직 소국이었던 일본은 정부의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니콜라이 황태자의 방일을 접대했다. 공식 접대 담당으로 영국에 간 유학 경험 등 당시 황족 중 제일의 외국통이었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有栖川宮威仁)을 임명했고, 교토에서는 제철이 아니었던 [https://kyoto.travel/ko/season_festivals/gozan_okuribi.html 고잔 오쿠리비]도 행해졌다. 다음 방문 예정지였던 요코하마(橫浜)와 도쿄(東京)에서도 환영 준비가 행해지고 있었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 시작을 알리는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극동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해상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의 일부로 일본 방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니콜라이 황태자가 탑승한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가고시마, 나가사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베에 정박했다.
고베에서 황태자는 육로로 교토로 이동했고, 일본의 아리스가와 다루히토 친왕을 중심으로 한 고위급 대표단이 직접 그를 맞이했다.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가 1880년에 방문한 이후, 그리고 1881년에 방문한 다른 두 명의 영국 왕자 이후 이 지역을 방문한 그러한 인물의 첫 방문이었다. 황태자의 방문 당시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의 군사적 영향력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는 일본 정부가 이 방문에 큰 중요성을 두게 된 주요 원인으로 여겨진다. 특히,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러일 관계 증진에 중점을 두었다.
니콜라이는 일본 전통 공예에 관심을 보였고, 오른팔에 용 문신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니콜라이는 나가사키에 도착하기 전에 피에르 로티의 『마담 크리산템』을 읽었는데, 소설 속 인물을 본떠 로티 또한 오른팔에 용 문신을 새겼다. 니콜라이는 또한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일본 소녀를 위해 장식용 머리핀을 샀다고 한다.
1891년(메이지 24년), 니콜라이 황태자는 시베리아 철도 극동 지역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궁정함 「파르미야치 아조바」를 비롯한 러시아 제국 해군 함대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중 일본을 방문했다. 니콜라이 일행은 나가사키와 가고시마에 들른 후 고베에 상륙하여 교토로 향했다. 당시 아직 작은 나라였던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니콜라이의 방일을 접대하며, 공식 접대 담당관으로는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친왕 해군 대좌(순양함 「타카오」 함장)을 임명했고, 교토에서는 제철이 아닌 고산 보내는 불까지 피웠다. 다음 방문 예정지인 요코하마, 도쿄에서도 환영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말 그대로 전국적인 대규모 행사였다.
2. 2. 당시의 시대적 배경
당시 일본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러시아에 대항할 만한 군사력은 없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등 극동 진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발이 있었다.[11]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러시아로 망명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사건 발생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3. 사건 내용
1891년(메이지 24년), 시베리아 철도 극동 지역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 황태자 니콜라이는 러시아 제국 해군 함대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중 일본을 방문했다. 니콜라이 일행은 나가사키, 가고시마를 거쳐 고베에 상륙하여 교토로 향했다. 당시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해군 대좌(순양함 「타카오」 함장)을 공식 접대 담당관으로 임명하여 니콜라이의 방일을 접대했다. 교토에서는 제철이 아닌 고산 보내는 불까지 피웠고, 요코하마, 도쿄에서도 환영 준비가 진행되는 등 전국적인 대규모 행사였다.
1891년 4월 29일(구력 5월 11일), 비와호 방문 후 오쓰에서 교토로 돌아오는 길에 니콜라이는 호위 경찰 쓰다 산조(津田三蔵) (1855–1891)에게 공격받았다. 쓰다는 사브르를 휘둘렀고, 니콜라이의 사촌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조지 왕자가 지팡이로 두 번째 타격을 막아 그의 목숨을 구했다. 쓰다는 도망치려 했지만, 인력거꾼 두 명이 그를 쫓아 넘어뜨렸다. 니콜라이는 이마 오른쪽에 9센티미터 길이의 흉터가 남았으며, 평생 극심한 두통을 겪었다.
유학과 군사 시찰 경험으로 국제 관계에 정통했던 다케히토 친왕은 이 사건을 중대한 외교 문제로 판단, 메이지 천황에게 전보로 상소하고 러시아 측에 성의를 보이기 위해 천황의 교토 긴급 행차를 요청했다. 천황은 즉시 승낙하고 키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육군 소장을 문병 대표로 교토에 파견했다.
니콜라이는 급히 교토로 돌아왔고, 기타시라카와 요시히사 왕자는 교토 황궁으로 모셔 휴식을 취하게 했다. 총리대신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메이지 천황에게 즉시 황태자 방문을 조언했다. 천황은 신바시역에서 기차를 타고 밤새도록 여행하여 다음날 아침 교토에 도착했다.
다음 날, 니콜라이가 고베의 러시아 함대 복귀 의사를 밝히자, 메이지 천황은 기타시라카와 왕자와 아리스가와 다케히토 왕자에게 호위를 명령했다. 천황은 밤 9시, 총리 마쓰가타 마사요시 백작에게 칙어를 전달했다.[13]
같은 날 궁내성 고시 제10호로 다음 날(5월 12일) 교토 행차가 발표되었고,[14] 다음 날 새벽, 천황은 신바시역에서 기차를 타고 같은 날 밤 10시 5분에 교토에 도착했다.[15] 그날 밤 니콜라이 황태자를 문병할 예정이었으나, 니콜라이 황태자 측 시의 요청으로 다음 날로 연기되었고, 천황은 교토 고쇼에 숙박했다. 타루히토 친왕 육군 대장도 천황을 따라 교토에 도착했다.
다음 날(13일) 천황은 토키와 호텔에 직접 찾아가 니콜라이 황태자를 문병했고, 세 친왕을 이끌고 고베까지 니콜라이 황태자를 배웅했다. 러시아 본국의 지시로 니콜라이 황태자는 도쿄 방문을 취소하고 고베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귀국했다.
귀국 전날(5월 19일), 메이지 천황은 고베 항의 러시아 군함을 방문, 요양 중인 니콜라이 황태자를 다시 문병했다.
일본이 러시아 황태자를 부상시켰다는 사실에, 러시아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일본 전국에 퍼졌다. 학교는 근신의 뜻으로 휴교했고, 신사, 사찰, 교회에서는 황태자 평복을 위한 기도가 행해졌다.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1만 통이 넘는 문병 전보가 전달되었고, 야마가타현 모가미군 가나야마촌(현 가나야마정)에서는 「쓰다」,「산조」라는 이름을 금지하는 조례를 결의했다. 5월 20일에는 하타야마 유코가 죽음으로 사죄하려고 교토부청 앞에서 면도칼로 목을 그어 자살했다.
3. 1. 오쓰 사건 발생
1891년 5월 11일 오후, 교토에서 비와호 당일치기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던 러시아 제국 황태자 니콜라이, 그리스 왕국 왕자 요르요스,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은 인력거를 타고 오쓰 시가지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경호를 담당하던 시가현 경찰서 순사 쓰다 산조가 갑자기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사브르를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13] 니콜라이는 인력거에서 뛰어내려 옆 골목길로 도망쳤지만, 쓰다는 니콜라이를 쫓아가며 계속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쓰다는 요르요스 왕자의 대나무 지팡이에 등을 맞고, 니콜라이 황태자를 수행하던 인력거꾼에게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요르요스 왕자를 수행하던 인력거꾼은 쓰다가 떨어뜨린 사브르를 휘둘러 쓰다의 목에 상처를 입혔고, 결국 쓰다는 다른 순사에게 붙잡혔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오른쪽 머리에 9cm 정도의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케히토 친왕은 현장에 있었지만 구경꾼에게 막혀서 가까이 갈 수 없었고, 상황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쓰다가 잡힌 후였다.
3. 2. 쓰다 산조의 범행 동기
쓰다 산조는 러시아의 북방영토 문제 등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진술했다.[12] 또한 사쓰마 반란(西南戦争)에서 전사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러시아로 도망쳐 니콜라이와 함께 돌아온다는 유언비어가 있었는데, 쓰다는 사쓰마 반란에서 훈장을 받아 만약 사이고가 돌아오면 자신의 훈장이 박탈될 것을 우려했다는 설도 있다.[12]그러나 쓰다는 니콜라이를 살해할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건 후 조사에서도 "죽일 의도는 없었고, 한 칼(一太刀) 바친 것뿐이다"라고 진술했다. 당시 니콜라이의 방일이 군사 시찰이라는 소문[11]과 시베리아 철도가 러시아의 극동 진출 정책을 상징한다는 국민적 반감도 범행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4. 사건 수습
유학과 해외 군사 시찰 경험이 있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은 이 사건이 중대한 외교 문제임을 즉시 파악하고, 수행원에게 명해 사건 경위를 정리하여 메이지 천황에게 전보로 보고하고, 러시아 제국 측에 성의를 보이기 위해 천황의 교토 긴급 행차를 요청했다. 메이지 천황은 즉시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에게 니콜라이 황태자의 신변 경비를 명하고,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을 문안사로 교토에 파견했다.
메이지 천황은 국빈에 대한 부적절한 환대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고, 이는 대중의 지지와 황태자를 위한 애도의 메시지로 이어졌다. 1만 건이 넘는 전보가 황태자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며 발송되었다. 야마가타현에서는 "쓰다"라는 성과 "산조"라는 이름의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하기까지 했다.
내무대신 사이고 쓰구미치와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는 안전 관리 허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3]
정부는 궁정에 압력을 가해 쓰다를 형법 제116조(일본 천황, 황후 또는 황태자에 대한 행위에 대해 사형을 규정)에 따라 재판에 넘기려 했다. 그러나 고지마 고레카타 대법원장은 제116조가 이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하고,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젊은 재봉사였던 하타케야마 유코( 畠山勇子|하타케야마 유코일본어 )는 교토 부청 앞에서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하는 공개적인 속죄 행위를 했고, 곧 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그녀를 "렬녀(烈女)"(용감한 여성)라고 칭하며 그녀의 애국심을 칭찬했다.[1]
전직 경찰관 쓰다는 홋카이도의 아바시리 교도소로 이감되었고, 같은 해 9월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공격 동기는 정신 이상[6]에서부터 외국인 혐오[7]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거론되지만, 여전히 불분명하다.
러시아 정부는 일본의 조치 결과에 대해 공식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표명했고, 실제로 쓰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면 사면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4] 이 사건이 니콜라이의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견해, 그리고 1904~1905년 러일 전쟁에 이르는 과정과 전쟁 중 그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에 대해 종종 추측해왔다.[5]
4. 1. 일본 정부의 대응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시베리아 철도 극동지구 기공식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오쓰 사건이 발생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은 이 사건이 중대한 외교 문제임을 즉시 파악하고, 수행원에게 명해 전말을 즉시 정리하여 도쿄의 메이지 천황에게 전보로 보고하는 동시에, 러시아 제국 측에 성의를 보이기 위해 천황의 교토 긴급 행차를 요청했다.[13]전보를 받은 메이지 천황은 즉시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에게 니콜라이 황태자의 신변 경비를 명하는 동시에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을 문안사로 교토에 파견했다. 1891년 5월 12일 아침, 메이지 천황은 신바시역에서 기차를 타고 같은 날 밤 교토에 도착했다. 그날 밤 니콜라이 황태자를 병문안 할 예정이었지만, 니콜라이 황태자 측의 요청으로 다음 날로 연기되었다. 5월 13일 메이지 천황은 교토 호텔에 있던 니콜라이 황태자를 찾아가 병문안하고,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데리고 고베까지 배웅했다.[15]
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국빈에 대한 부적절한 환대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고, 이는 대중의 지지와 황태자를 위한 애도의 메시지로 이어졌다. 1만 건이 넘는 전보가 황태자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며 발송되었다.[1]
당시 소국이었던 일본이 대국인 러시아의 황태자를 부상하게 했다는 소식에, ‘러시아가 보복하기 위해 일본을 공격할 수 있다’라는 소문이 퍼졌다. 학교들은 근신의 뜻을 표하기 위해 휴교했고, 신사, 사원, 교회에서는 황태자의 회복을 위한 기도가 이어졌다. 야마가타현 가네야마정에서는 ‘쓰다’(津田)라는 성과 ‘산조’(三藏)라는 이름의 명명을 금지하는 조례를 결의하기도 했다.[28]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관할하던 재판관에게 구(舊) 형법 제116조에 규정된 대역죄(일본 천황이나 황족에게 위해를 가할 때 적용하는 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할 것을 요구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사형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을 경우 계엄령을 발령해서라도 사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4. 2. 일본 사법부의 독립
일본 정부는 쓰다 산조에게 대역죄를 적용하여 사형에 처하려 했으나, 일본 대심원장 고지마 고레카타는 법치주의를 내세워 이를 반대했다.[2] 결국 쓰다 산조에게는 일반인에 대한 살인미수죄가 적용되어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이 사건은 일본 사법부의 독립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재판 과정에서 일부 절차적 문제는 남아 있었다. 오쓰 지방재판소에서 다루어져야 할 사건을 관련 규정 없이 대심원으로 이관시키거나, 재판에 직접 관계가 없었던 고지마 고레카타 대심원장이 간섭한 것은 재판관의 독립에 대한 침해로 여겨진다.
4. 3. 러시아의 대응
주일 러시아 공사관은 이 사건의 수습을 맡게 된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과 사이고 주도 내무대신에게 범인에 대한 사형을 강경하게 요구했다.[29] 알렉산드르 3세 러시아 황제도 넌지시 사형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배상 요구도, 무력 보복도 행해지지 않았다. 황태자의 부상에 대한 일본의 신속한 처치나 사죄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가 일본에 대해 혐오감을 품은 적도 없다고 한다.[30]러시아 정부는 일본의 조치 결과에 대해 공식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표명했고, 실제로 쓰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면 사면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4] 이 사건(황태자 니콜라이에게 영구적인 흉터와 심한 두통을 남겼다)이 니콜라이의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견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그리고 이것이 1904~1905년 러일 전쟁에 이르는 과정과 전쟁 중 그의 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지에 대해 종종 추측해왔다.[5]
러시아의 셰르바체프(Ше́рбачев) 공사는 이전부터 일본에 대해 여러 차례 협박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 사건에 대해서도 사건 처리에 나선 아오키(青木) 외무대신과 사이고(西郷) 내무대신에게 사형을 강력히 요구했다.
알렉산드르 3세도 암묵적으로 사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배상 요구도 무력 보복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황태자의 부상에 대해서는, 황제와 황태자 모두 일본의 신속한 조치와 사과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며, 일본이 이 문제를 무사히 해결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러시아의 우호적인 태도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후, 러시아 공문서에서 일본인을 마카키(원숭이)라고 기록한 시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일기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니콜라이 2세가 이 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혐오감을 가진 적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22]
5. 사건의 영향
1891년(메이지 24년),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시베리아 철도 기공식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다가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소국이었던 일본이 대국 러시아의 황태자를 부상시켰다는 점에서 일본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국제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학과 군사 시찰 경험으로 국제 관계에 밝았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은 이 사건을 중대한 외교 문제로 판단하고, 메이지 천황에게 전보를 보내는 동시에 러시아 측에 성의를 보이기 위해 천황의 긴급 행차를 요청했다.
메이지 천황은 즉시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을 문병 대표로 교토에 파견했고,[13] 총리 마쓰가타 마사요시 백작에게 칙어를 전달했다. 다음 날 새벽, 천황은 신바시역에서 기차를 타고 그날 밤 교토에 도착했다.[15] 천황은 토키와 호텔에 직접 찾아가 니콜라이 황태자를 문병했고, 고베 항에서 러시아 군함을 방문하여 요양 중인 황태자를 다시 문병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가 보복으로 일본을 공격할 것이다"라는 두려움이 일본 전국에 퍼져 '러시아 공포증'과 같은 양상을 보였다. 학교는 근신의 뜻을 표하며 휴교되었고, 신사, 사찰, 교회에서는 황태자의 평복을 위한 기도가 행해졌다.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전달된 문병 전보는 1만 통을 넘었고, 야마가타현 모가미군 가나야마촌(현 가나야마정)에서는 "쓰다" 성과 "산조"라는 이름을 금지하는 조례를 결의했다. 5월 20일에는 하타야마 유코라는 여성이 천황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황태자가 일본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죽음으로 사죄하려고 교토부청 앞에서 면도칼로 목을 그어 자살하기도 했다.
5. 1. 일본 국내에 미친 영향
이 사건에 대한 판결 후, 사법부의 독립을 일부라도 확립함에 따라 일본 제국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던 삼권분립 의식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오쓰 지방재판소에서 다루어져야 할 사건을 관련 규정 없이 대심원으로 이관시키거나(이는 대역죄 적용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황족에 관한 재판은 모두 대심원에서 1심 재판을 관할했다.), 재판에 직접 관계가 없었던 고지마 고레카타 대심원장이 간섭한 것은 재판관 독립에 관한 침해로 여겨진다. 이는 권력의 적용이나 운용이 미분화되어 있지 않던 당시를 상징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삼권분립이나 사법부의 자세 등에 대해 활발히 논의되게 된다.[2]당시의 사법부는 헌법상으로는 독립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사법 행정이나 행정 재판에서 완전히 정부로부터 독립되지 못했다. 삼권분립의 이념은 모두에게 이해되고 있었지만, 이후에도 사법권 침해가 일부 일어나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대심원의 판단을 존중한 것은 어전회의 원로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아서였다는 설(說)이 있다.
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국빈에 대한 부적절한 환대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고, 이는 대중의 지지와 황태자를 위한 애도의 메시지로 이어졌다. 1만 건이 넘는 전보가 황태자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며 발송되었다. 야마가타현에서는 "쓰다"라는 성과 "산조"라는 이름의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하기까지 했다. 메이지 천황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가 일본 방문을 단축하자, 젊은 재봉사인 畠山勇子|하타케야마 유코일본어가 교토부청 앞에서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하는 공개적인 속죄 행위를 했고, 곧 병원에서 사망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그녀를 "열녀(烈女)"(용감한 여성)라고 칭하며 그녀의 애국심을 칭찬했다.[1]
내무대신 사이고 쓰구미치와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는 안전 관리 허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3]
소국이었던 일본이 대국 러시아의 황태자를 부상시켰다는 사실에, "사건의 보복으로 러시아가 일본을 공격할 것이다"라는 인식이 일본 전국에 큰 충격으로 퍼져, "러시아 공포증"과 같은 양상을 보였다. 학교는 근신의 뜻을 표하며 휴교되었고, 신사, 사찰, 교회에서는 황태자 평복을 위한 기도가 행해졌다.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전달된 문병 전보는 1만 통을 넘었고, 야마가타현 모가미군 가나야마촌(현 가나야마정)에서는 "쓰다" 성과 "산조"라는 이름을 금지하는 조례를 결의했다.
5. 2.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당시 유학 등으로 국제 관계에 정통했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은 이 사건을 중대한 외교 문제로 판단하고, 메이지 천황에게 전보를 보내는 동시에 러시아 측에 성의를 보이기 위해 천황의 긴급 행차를 요청했다.[13] 메이지 천황은 즉시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을 문병사로 파견했다.[13]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국빈에 대한 부적절한 환대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고, 이는 대중의 지지와 황태자를 위한 애도의 메시지로 이어졌다. 1만 건이 넘는 전보가 황태자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며 발송되었다. 야마가타현에서는 "쓰다"라는 성과 "산조"라는 이름의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하기까지 했다.[1]
내무대신 사이고 쓰구미치와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는 안전 관리 허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3]

러시아 정부는 일본의 조치 결과에 대해 공식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표명했고, 실제로 쓰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면 사면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영구적인 흉터를 남겼다는 점,[5] 그리고 그의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견해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지, 더 나아가 1904~1905년 러일 전쟁에 이르는 과정과 전쟁 중 그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에 대해 추측해왔다.[5]
5. 3. 한국 근대사에 미친 영향
오쓰 사건은 일본의 대외 정책에 영향을 미쳐, 조선에 대한 침략 정책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소국이었던 일본은 대국 러시아의 황태자를 부상시킨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의 보복 공격을 우려하는 등 전국적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다.[13] 일본은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자제하고, 친일 개화파 세력의 급진적인 개혁 시도를 억제했다.6. 사건 이후
1891년(메이지 24년), 일본은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를 부상시킨 오쓰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졌다. 러시아의 보복 공격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어 "러시아 공포증"과 같은 양상을 보였다. 학교는 근신하며 휴교했고, 신사, 사찰, 교회에서는 황태자의 평복을 기원했다. 니콜라이에게 전달된 문병 전보는 1만 통이 넘었고, 야마가타현 모가미군 가나야마촌(현 가나야마정)에서는 "쓰다"와 "산조"라는 이름을 금지하는 조례를 결의했다. 5월 20일, 하타야마 유코는 황태자가 일본을 떠난 것에 대한 사죄로 교토부청 앞에서 자결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친왕은 이 사건을 중대한 외교 문제로 판단, 메이지 천황에게 전보를 보내고 러시아 측에 성의를 보이기 위해 천황의 교토 행차를 요청했다. 천황은 즉시 승낙하고 키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을 문병 대표로 파견, 마쓰가타 마사요시 총리에게 칙어를 전달했다.[13]
5월 12일, 천황은 신바시역에서 기차를 타고 교토에 도착, 교토 고쇼에 숙박했다.[15] 다음 날, 토키와 호텔에서 니콜라이를 문병하고, 타루히토 친왕 등과 함께 고베까지 배웅했다. 니콜라이는 도쿄 방문을 취소하고 고베에서 귀국했다.
5월 19일, 메이지 천황은 고베 항의 러시아 군함을 방문,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양 중인 니콜라이를 다시 문병했다.
6. 1. 쓰다 산조의 최후
쓰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홋카이도의 아바시리 교도소로 이감되었고, 같은 해 9월에 병사했다.6. 2. 인력거꾼들의 영웅적 행위와 이후 삶
오쓰 사건에서 츠다 산조를 체포한 인력거꾼 무카이하타 지사부로(1854년?~1928년)와 기타가이치 이치타로(1859년~1914년)는 황태자의 요청으로 러시아 함대에 초대되어 러시아 해병대의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Орден Святой Анны|성 안나 훈장ru과 함께 당시 돈으로 2,500엔(현재 가치로 약 1000만 엔)의 포상금과 1,000엔의 연금을 받았다.[12] 당시 낮은 신분으로 여겨졌던 인력거꾼에게 훈장이 수여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두 사람은 일본에서 "훈장 받은 인력거꾼"으로 불리며 영웅으로 칭송받았다.그러나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무카이하타는 도박, 매춘, 투기 등으로 훈장을 몰수당했고, 여성 폭행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중에 연금이 중단되었고,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정부가 소멸하면서 연금은 완전히 끊겼다. 그는 빈곤하게 살다가 쇼와 시대까지 생존했다.
기타가이치는 고향 이시카와현에서 밭을 사서 지주가 되었고, 학문을 쌓아 군 의회 의원까지 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러시아 스파이로 몰려 비난을 받았다. 특히 전사자 유족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기타가이치는 훈장을 떼어내고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군대에 지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삶은 1962년 가츠 신타로 주연의 영화 "철포 안의 생애"로 제작되었다.[23] 현재는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고향에서는 영웅으로 여겨지며 가가시 가모 신사에 "기타가이치 이치타로 탄생지" 비석이 세워져 있다.
6. 3. 유물과 DNA 감정
니콜라이 2세가 사건 당시 입었던 피 묻은 셔츠는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24] 이 셔츠에 묻은 혈흔은 훗날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골 DNA 감정에 활용되어, 유골의 신원 확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5]1993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발견된 유골이 니콜라이 2세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DNA 샘플이 필요했다. 오쓰 사건 당시의 유물에서 혈흔을 채취하여 조사했지만, 결과는 결정적이지 않았다.[8]
1998년, 해당 유골은 니콜라이 2세의 것으로 공식 인정되었고, 러시아 정교회는 니콜라이 2세를 러시아 혁명의 희생자로 시성하였다.
2007년, 추가로 발견된 두 아이의 유골이 니콜라이 2세의 실종된 자녀인지 확인하기 위해 정밀한 DNA 감식이 이루어졌다. 매사추세츠 의과대학의 예브게니 로가예프 교수는 오래된 혈액에서 변질된 DNA를 추출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매우 상태가 좋은 DNA를 추출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24]
AFDIL 연구소장 마이클 코블 박사는 1991년에 발굴된 여성 유골(추정 알렉산드라)과 세 아이의 유골이 미토콘드리아 DNA 감식을 통해 모자 관계임을 증명했다. 새로 발견된 두 아이의 유골 또한 여성 유골과 모자 관계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니콜라이 2세의 혈액 DNA를 통해 니콜라이 2세와 부자 관계임을 확인했다.
코블 박사는 유골이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자녀일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의 4조 배에 달한다고 말했다. 2009년 2월, 두 사람은 두 아이가 실종되었던 니콜라이 2세 부부의 자녀인 아나스타샤(또는 마리아)와 알렉세이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25]
7. 사건 관련 작품
- 후지에다 시즈오「흉도 쓰다 산조」고단샤 문고
- 나츠보리 마사모토「훈장 환영 소설 오쓰 사건」중공문고
- 토미오카 타에코「호의 남쪽 오쓰 사건 이문」신초사, 이와나미 현대문고
- 요시무라 아키라「니콜라이 조난」이와나미 쇼텐·신초문고
- 사키 류조「이김을 다스리는 데 이르렀다」고단샤 문고
- 야마다 후타로「메이지 가게로 꾸루마」단편 지쿠마쇼보
- 토쿠나가 신이치로「오쓰 사건」단편 마이니치신문사
- 이시카와 준「유녀 시말」단편 지쿠마쇼보
- 마쓰오카 케이스케「셜록 홈즈 대 이토 히로부미」고단샤 문고
- 도쿄 보드빌 쇼·미타니 코키「그 자리에서의 남자들」희곡
- 릴리퍼트 아미 II·와카기 에후「죄와, 죄 없는 죄」희곡
- 에가와 타츠야「일러전쟁 이야기」쇼가쿠칸 코믹
- 텔레비전 드라마 「금벌레」(こがね虫) (NHK 방송, 1961년 10월 25일 방영, 주연: 내토 무토미) - 습격범을 체포한 인력거꾼의 이후 삶을 그린 작품[26]
- 영화 「철포 안의 생애」(鉄砲安の生涯) (다이에이 제작, 1962년, 주연: 카츠 신타로, 감독: 키무라 케이고) - 위 드라마 「금벌레」의 영화화[27]
- 가요곡 「무모한 철포 안」(がむしゃら鉄砲安) (노래: 테포 코자부로) - 드라마와 영화와 마찬가지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인력거꾼이 러일전쟁으로 인해 매국노 취급을 받게 된 비극을 노래한 곡.
8.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오쓰 사건은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사법부 독립과 삼권분립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특히, 이 사건은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이 처했던 어려움과 외교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오쓰 사건이 일본의 조선 침략 정책에 미친 영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일시적으로 자제한 것은, 한국 근대사의 흐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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