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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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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대치는 1962년부터 1966년까지 말레이시아 연방 형성을 반대하며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벌인 무력 분쟁이다. 이 분쟁은 영국령 보르네오의 정치적 상황과 브루나이 반란, 말레이시아 연방 구성을 둘러싼 인도네시아의 반대로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를 신식민주의의 도구로 간주하며, 군사적 침투와 공세를 통해 분쟁을 확대했다. 영국과 영연방은 말레이시아를 지원하며, 비밀 국경 침투 작전인 클라렛 작전을 수행했다. 1965년 9.30 사건 이후 수카르노 정권이 붕괴되고 수하르토가 집권하면서 분쟁은 완화되었고, 1966년 방콕 회담을 통해 종결되었다. 이 분쟁은 양국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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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대치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치 중 보르네오에 있는 영국군
1964년 8월, 보르네오에서 웨스트랜드 웨섹스 헬리콥터로 윈치에 매달려 올라가는 영국군 병사
분쟁 명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대치
로마자 표기Konfrontasi
일부말레이시아 수립
아시아의 냉전
날짜1963년 1월 20일 – 1966년 8월 11일 (3년 6개월 3주 1일)
장소말레이 반도, 보르네오 섬
결과영연방의 승리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수립 승인
9월 30일 운동 쿠데타 시도 이후 수카르노, 수하르토로 교체
사라왁 공산 반란은 1989년까지 지속
교전 세력
교전국 1영연방
{{기호 없는 목록






교전국 2
동맹 세력:
PKI
NKCP
PGRS
PRB
지휘관
영연방{{기호 없는 목록















흄]]



인도네시아 및 동맹군{{기호 없는 목록















병력 규모
교전국 1알 수 없음
교전국 2알 수 없음
사상자 및 피해
영연방군인 총 사상자:
114명 사망
181명 부상
민간인 총 사상자:
36명 사망
53명 부상
4명 포로
140명 사망 (44명은 구르카 용병)
52명 부상
23명 사망
8명 부상
12명 사망
16명 부상
9명 사망
다수 부상
구르카 44명 사망
83명 부상
인도네시아총 사상자:
590명 사망
222명 부상
771명 포로
명분
명분말레이시아 수립

2. 역사적 배경

1961년, 보르네오 섬은 남쪽의 인도네시아 칼리만탄과 북쪽의 브루나이 술탄국(영국의 보호령), 그리고 영국의 두 식민지인 북 보르네오(이후 사바 주)와 사라왁으로 나뉘어 있었다.

적대 행위 중단 이후 보르네오;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로 분할됨. 섬의 통제는 당시 전쟁의 주요 문제였다.


1946년, 사라왁 왕국의 찰스 비너 브룩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라왁 사람들에게 최선이라고 믿고 이 지역을 영국 왕실에 양도했다.[1] 사라왁은 영국의 왕령 식민지가 되었고, 말레이인 중심의 반양도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사라왁 최초의 영국 고등 판무관인 덩컨 스튜어트를 암살했는데, 이는 아마드 자이디 아드루스가 이끄는 사라왁의 이후 반말레이시아 운동의 선구자였을 수 있다.

사라왁 인민 게릴라군(SPGF), 북칼리만탄 국가군(NKNA) 및 인도네시아 국군 (TNI)의 구성원들이 수카르노 정권 하의 인도네시아 기간 동안 그들 간의 긴밀한 관계를 기념하기 위해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SCO는 주로 중국계가 지배했지만 다야크 지지자도 포함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동안 마오이즘은 사라왁의 중국어 학교에 퍼졌고, 노동 운동과 사라왁 연합 인민당에도 영향을 주었다. 사라왁 반란은 1962년 브루나이 반란 이후 시작되었고, SCO는 브루나이 반군 및 인도네시아군과 함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치 기간 동안 싸웠다.[3][4]

SCO와 브루나이 반군은 모든 영국령 보르네오 영토를 통합하여 독립적인 좌익 북칼리만탄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 아이디어는 A. M. 아자하리(브루나이 인민당 지도자)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그러나 브루나이 인민당은 자체 술탄과 함께 북보르네오의 세 영토가 통합되어 말라야, 싱가포르, 말레이 관리 또는 중국 상인들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조건하에 말레이시아 가입을 선호했다.[5]

북칼리만탄 제안은 말레이시아 계획에 대한 지역 반대의 대안으로 간주되었다. 보르네오 영토 전반의 지역 반대는 주로 보르네오 주와 말라야 간의 경제적, 정치적, 역사적 및 문화적 차이, 그리고 반도 정치의 지배를 받는 것을 거부하는 데 기반을 두었다.

2. 1. 식민지 시대

1961년, 보르네오 섬은 네 개의 독립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남쪽에는 인도네시아의 칼리만탄이 있었고, 북쪽에는 브루나이 술탄국(영국의 보호령)과 영국의 두 식민지인 북 보르네오(이후 사바주)와 사라왁이 있었다.

세 영국령 지역의 총 인구는 약 150만 명이었고, 그 중 절반 가량이 다야크족이었다. 사라왁에는 약 90만 명, 사바에는 60만 명, 브루나이에는 약 8만 명이 거주했다. 사라왁 인구의 31%는 중국인, 19%는 말레이인이었다. 사바 인구의 21%는 중국인, 7%는 말레이인이었다. 브루나이 인구의 28%는 중국인, 54%는 말레이인이었다. 사라왁에는 크고 경제적으로 활동적인 중국인 인구가 있었고, 사바 남부의 타와우에는 많은 인도네시아인이 있었다.

사라왁은 5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고, 사바는 북부 해안의 코타키나발루를 수도로 하여 여러 레지던시로 나뉘었다. 내륙과 타와우의 레지던시는 국경에 있었다.

인도네시아와의 국경은 양쪽 끝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졌으며, 제5구역에서는 거의 2,500미터까지 솟아 있었다. 제1구역에는 쿠칭에서 브루나이까지, 사바 동해안의 산다칸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포함한 몇몇 도로가 있었다. 제4구역, 제5구역, 내륙 레지던시에는 도로가 없었고, 제3구역에는 국경에서 약 약 241.40km 떨어진 해안 도로만 있었다. 지도는 부실했는데, 영국의 국토 지도는 작은 지형 세부 사항만 보여주었다. 인도네시아 지도는 더 나빴다.

칼리만탄은 네 개의 주로 나뉘었으며, 동칼리만탄과 서칼리만탄이 영국령 보르네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서칼리만탄의 수도는 서해안에 있는 폰티아낙으로 국경에서 약 약 160.93km 떨어져 있었고, 동칼리만탄의 수도는 남해안에 있는 사마린다로 국경에서 약 약 354.05km 떨어져 있었다. 서부 지역을 제외하고 국경 지역에는 도로가 없었으며, 동칼리만탄과 서칼리만탄을 연결하는 도로는 없었다.

국경 양쪽 모두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도로와 트랙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동은 대부분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도보 트랙, 수로 및 항공 이동으로 제한되었다. 국경 양쪽에는 많은 큰 강이 있었고, 이것이 주요 이동 수단이었다. 가벼운 항공기, 낙하산 공급 투하 지점 및 헬리콥터에 적합한 작은 풀밭 활주로도 몇 개 있었다.

적도는 쿠칭에서 약 100km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보르네오 북부 대부분 지역은 매년 3000mm 이상의 강우량을 기록한다. 보르네오는 자연적으로 열대 우림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많은 강으로 잘린 산악 지역을 덮고 있으며, 매우 가파른 언덕과 종종 폭이 불과 몇 미터에 불과한 산등성이가 있다. 높은 강수량은 큰 강을 의미하며, 이는 주요 운송 수단을 제공하고 강력한 전술적 장애물이다. 많은 해안 지역은 넓은 조수 갯벌을 덮고 있는 조밀한 맹그로브 숲이 특징이다. 계곡과 마을 주변에는 경작지가 있다. 버려지거나 현재 정착지 근처에는 조밀한 2차 재생 지역이 있다.

2. 2. 말레이시아 연방 형성

1946년, 사라왁 왕국의 찰스 비너 브룩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사라왁 사람들에게 최선이라고 믿고 이 지역을 영국 왕실에 양도했다.[1] 사라왁은 런던식민지부에서 통치하고, 다시 사라왁에 총독을 파견하는 영국의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 주로 말레이인 반양도 운동은 사라왁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사라왁 최초의 영국 고등 판무관인 덩컨 스튜어트를 암살했는데, 이는 아마드 자이디 아드루스가 이끄는 사라왁의 이후 반말레이시아 운동의 선구자였을 수 있다.

SCO는 주로 중국계가 지배했지만 다야크 지지자도 포함했다. 그러나 SCO는 말레이인 및 기타 토착 사라왁 민족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SCO는 전성기에 24,000명의 회원을 보유했다.[2] 1940년대와 1950년대 동안 마오이즘은 사라왁의 중국어 학교에 퍼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의 영향은 또한 노동 운동과 1959년 6월에 설립된 주 최초의 정당인 주로 중국인으로 구성된 사라왁 연합 인민당에 침투했다. 사라왁 반란은 1962년 브루나이 반란 이후 시작되었고 SCO는 브루나이 반군 및 인도네시아군과 함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치 기간 동안 싸웠다.[3][4]

SCO와 브루나이 반군은 모든 영국령 보르네오 영토를 통합하여 독립적인 좌익 북칼리만탄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지지하고 선전했다. 이 아이디어는 1940년대 자바에서 수카르노의 민족주의 운동과 함께 아마드 자이디와 연계했던 A. M. 아자하리(브루나이 인민당 지도자)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그러나 브루나이 인민당은 자체 술탄과 함께 북보르네오의 세 영토가 통합되어 말라야, 싱가포르, 말레이 관리 또는 중국 상인들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조건하에 말레이시아 가입을 선호했다.[5]

북칼리만탄 (또는 칼리만탄 우타라) 제안은 말레이시아 계획에 대한 지역 반대의 대안으로 탈식민지화 이후의 대안으로 간주되었다. 보르네오 영토 전반의 지역 반대는 주로 보르네오 주와 말라야 간의 경제적, 정치적, 역사적 및 문화적 차이, 그리고 반도 정치의 지배를 받는 것을 거부하는 데 기반을 두었다. 아자하리와 자이디는 모두 대치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후자는 사라왁으로 돌아와 정치적 지위를 회복했지만, 아자하리는 2002년 9월 3일 사망할 때까지 인도네시아에 남아 있었다.

3. 분쟁의 전개

수카르노가 대치를 시작한 동기는 논쟁의 대상이다. 이데 아낙 아궁 게데 아궁 전 인도네시아 외무장관은 수년 후,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가 서 뉴기니에 대한 주장을 추진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제안된 말레이시아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반대를 억제했다고 주장했다. 서 뉴기니 분쟁에서 인도네시아의 외교적 승리 이후, 수카르노는 더 약한 이웃 국가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의욕을 가졌을 수 있다. 반대로, 수카르노는 PKI의 지속적인 압력과 인도네시아 정치의 전반적인 불안정으로 인해 새로운 외교 분쟁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1950년대 후반,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괴뢰 국가이자 신식민지 실험이며, 말레이시아의 확장이 영국의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인도네시아의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카르노는 말레이 반도와 영국령 보르네오로 구성될 말레이시아 연방 결성을 포함하는 영국의 탈식민화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다.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를 동남아시아에 신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를 확립하고 인도네시아의 지역 패권 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억제하려는 영국의 괴뢰 국가라고 비난했다.[11]

수카르노


수카르노 대통령의 1963년 인도네시아 혁명 기념일 연설 발췌


수카르노가 말레이시아 결성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인 것은 말라야, 북 보르네오, 사라왁, 싱가포르를 별도의 국가로 분리하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영국의 탈식민주의 제안을 거부하고, 영국이 이 지역에 헤게모니를 퍼뜨리는 수단으로 신식민주의를 행한다고 비난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2][13]

필리핀은 보르네오 식민지가 술루 술탄국을 통해 필리핀과 역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동 보르네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수카르노는 북 보르네오를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에 병합하려는 직접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지만, 말레이시아의 형성은 말라야,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아우르는 비정치적 영토회복주의적 연합인 마필린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다.[11] 필리핀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처음에는 이 개념에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마닐라 협정을 주도했다. 필리핀은 적대 행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말라야의 승계 국가로 말레이시아를 인정하는 것을 연기했다. 결과적으로 말레이시아는 필리핀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의 수립으로 인해 영국이 싱가포르 기지를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유지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의 방위 수요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어 묵시적인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다. 수반드리오 인도네시아 외무장관은 미국 대사 하워드 P. 존스에게, 대치 정책은 말레이시아가 아닌 말라야와 관련이 있으며, 1958년 말라야와 영국의 반자카르타, 친 반군 활동에 대한 반작용이며, 1963년 여름 마닐라에서 열린 장관급 및 정상회담을 통해 말레이시아 분쟁을 해결하려는 외교적 노력이 탄력을 받으면서 수마트라를 분리하려는 프로그램의 추진이라고 신중하게 설명했다.[10]

인도네시아군의 의도적인 말레이시아군 공격은 수카르노의 "반제국주의" 자격을 강화하지 못했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열정적인 이상주의자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한 것이라며 해군 특공대 (Korps Komando|코릅스 코만도id)에 책임을 돌리려 했다. 그들은 또한 아자하리를 내세워 인도네시아군이 실제 작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했다. 수카르노는 다음으로 평화 공세를 펼쳐 1월 말에 휴전을 선언했다(직접적인 인도네시아 관여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콕에서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국경 침범이 계속되었고, 회담은 곧 실패했다. 회담은 연중반 도쿄에서 재개되었지만 며칠 만에 실패했다.

한편, 아흐마드 야니 중장이 이끄는 인도네시아군은 악화되는 인도네시아의 국내 상황에 점점 더 우려를 갖게 되었고, 대결을 방해하면서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말레이시아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하기 시작했다.[14] 이는 최근 서뉴기니에서 트리코라 작전을 수행했던 이미 소진된 군대를 보존하는 동시에, 특히 대결을 열렬히 지지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맞서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시행되었다.[15]

사라왁 레인저스(후에 말레이시아 레인저스의 일부)는 이반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벨 UH-1 이로쿼이 헬리콥터에서 말레이-태국 국경을 경계하기 위해 뛰어내린다.

3. 1. 초기 충돌 (1963년)

1963년 4월, 보르네오에서 첫 침투 및 공격이 발생했다. 1963년 4월 12일, 인도네시아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의심되는 침투 부대가 사라왁 제1구역 테베두의 경찰서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테베두는 쿠칭에서 40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칼리만탄과의 국경에서 2km 떨어져 있었다.[22] 같은 달 말, 다른 그룹은 쿠칭 남서부의 굼방 마을을 공격했으나 절반 정도만 돌아왔다.[22] 테베두 공격은 군사적 관점에서 대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22]

1962년 코볼드 위원회는 말레이시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여, 보르네오 식민지에서 더 큰 말레이시아 국가 창설에 대한 충분한 지지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이 말레이시아 제안에 대한 반대를 강화함에 따라, 양측의 반대 의견을 청취하기 위한 새로운 협상이 제안되었다. 분쟁 해결을 위해, 1963년 7월 30일부터 마닐라에서 말레이시아가 될 국가들과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표들이 며칠 동안 회담을 가졌다. 회담 며칠 전인 1963년 7월 27일,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를 분쇄하겠다"(Ganyang Malaysiaid)고 선언하며 선동적인 언사를 이어갔다. 마닐라 회담에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는 북보르네오와 사라왁 주민 대다수가 국제 연합이 조직한 국민투표에서 찬성할 경우 말레이시아 형성을 공식적으로 수용하기로 합의했다. 유엔 사실 조사단은 8월 22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인도네시아의 지연 전술로 인해 8월 26일에야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유엔은 보고서가 1963년 9월 14일까지 발표될 것으로 예상했다.[22]

마닐라 회담 전, 말라야 정부는 말레이시아 출범 날짜를 8월 31일(말라야 독립 기념일)로 정했다. 그러나 마닐라 협상에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정부는 말레이시아 출범을 1963년 9월 15일까지 연기하도록 설득했다. 그 무렵 유엔 조사단은 두 보르네오 식민지가 말레이시아 제안을 지지하는지 보고할 예정이었다.[22] 하지만 마닐라 회담이 끝난 후, 말라야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은 유엔의 최신 보고서와 관계없이 제안된 말레이시아가 1963년 9월 16일에 출범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2]

북보르네오와 사라왁은 친말레이시아적인 유엔 보고서를 예상하고, 유엔 보고서 발표 전인 1963년 8월 31일 말라야 독립 6주년에 말레이시아의 일부로 독립을 선언했다.[22] 9월 14일 유엔 보고서가 발표되었고, 제안된 말레이시아에 대한 지지 입장을 재확인했다. 말레이시아는 1963년 9월 16일에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즉시 말레이시아 대사를 자카르타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틀 후, PKI가 조직한 시위대가 자카르타의 영국 대사관에 불을 질렀다. 수백 명의 시위대가 자카르타의 싱가포르 대사관과 싱가포르 외교관의 집을 약탈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요원들이 체포되었고, 군중들은 쿠알라룸푸르의 인도네시아 대사관을 공격했다.[22]

3. 2. 인도네시아의 공세 강화 (1964년)

1963년 4월, 보르네오에서 인도네시아의 첫 침투 및 공격이 발생했다. 훈련받은 침투 부대는 둘로 나뉘어 첫 작전을 준비했다. 1963년 4월 12일, 한 부대가 사라왁 제1구역 테베두의 경찰서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테베두는 쿠칭에서 약 64.37km, 칼리만탄과의 국경에서 약 3.22km 떨어져 있었다.[22] 다른 그룹은 그달 말 쿠칭 남서부의 굼방 마을을 공격했지만, 절반 정도만 돌아왔다.[22] 테베두 공격은 군사적 관점에서 대치의 시작을 알렸다.

평화 회담이 진행되고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는 침투 작전을 지속했다. 8월 14일, 촌장은 제3사단에서 침입이 있었다고 보고했으며, 뒤따른 정보에 따르면 약 50명 규모였다. 2/6 구르카 소총대가 순찰과 매복 작전을 펼치면서 일련의 교전이 발생했고, 한 달 만에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들은 일주일 안에 300명, 2주 안에 600명의 침략자가 더 있다고 진술했다.[22] 롱 자와이 전투는 제3사단 중심부에 대한 최초의 주요 침투 작전이었으며, 연초에 난가바단으로 파견된 RPKAD 소령 물리요노 소에르자와르도요가 지휘했다.

1964년 5월 3일, 수카르노는 인민의 이중 사령부 또는 ''드위 코만도 라캬트'' (Dwikora)를 선포했다. 드위코라는 인도네시아 혁명을 방어하고 말라야,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에서 말레이시아를 파괴하기 위한 혁명을 지원하라는 수카르노의 호소를 담고 있었다.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 독립 기념일 축제에서 '위험하게 사는 해'를 발표하는 것과 동시에, 인도네시아군은 1964년 8월 17일에 말레이시아 반도에 대한 공수 및 해상 침투 작전을 시작했다.

1964년 8월 17일, 공군 신속 대응 부대 (Pasukan Gerak Tjepat|파수칸 게락 체팟id) 공수 부대, KKO 및 약 12명의 말레이시아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약 100명의 해상 부대가 배를 타고 말라카 해협을 건너 밤에 3개 부대로 폰티안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군으로 환영받는 대신, 다양한 영연방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침투자 중 4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며칠 안에 체포되었다.

9월 2일, 3대의 록히드 C-130 허큘리스 항공기가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도록 낮은 고도로 비행하며 자카르타에서 말레이 반도로 출발했다. 다음날 밤, 2대의 C-130이 탑승한 PGT 공수 부대와 함께 목표 지점에 도달하여 라비스 상륙 (싱가포르에서 북쪽으로 약 약 160.93km) 근처에 낙하했다. 남은 C-130은 RAF 재블린 FAW 9이 RAF 텐가에서 발사되어 요격을 시도하는 것을 피하려다 말라카 해협에 추락했다. 번개 폭풍으로 인해 96명의 공수 부대가 널리 분산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1/10 구르카 연대 근처에 착륙했으며, 그들은 말라카 근처에 주둔한 제1대대, 로열 뉴질랜드 보병 연대 (1 RNZIR)와 28 (영연방) 여단에 합류했다. 작전은 4개의 말레이시아 여단이 지휘했지만, 보안군은 96명의 공수 부대원 중 90명을 체포하거나 사살하는 데 한 달이 걸렸고, 작전 중 두 명이 사망했다.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 반도로 분쟁을 확대한 것은 순다 해협 위기를 촉발했고, 이 위기에는 영국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와 2척의 구축함 호위함이 순다 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추가적인 인도네시아군의 말레이시아 반도 침투가 시도될 경우, 영연방군은 수마트라의 인도네시아 침투 거점에 대한 공습을 준비했다. 긴장된 3주간의 대치 상황이 발생한 후 위기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3. 3. 영연방군의 반격 (1965년)

1964년 말레이시아 상륙과 인도네시아의 지속적인 병력 증강으로 인해, 호주와 뉴질랜드도 1965년 초에 보르네오에 전투 부대를 배치하기로 합의했다.[16]

퀸스 오운 하이랜더 연대 제1대대가 브루나이 정글에서 적의 위치를 수색하기 위한 순찰을 수행하고 있다.


클라렛 작전(Operation Claret)은 1964년 6월부터 1966년 초까지 보르네오에서 영연방 군대가 수행한 장기간의 비밀 국경 침투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영국 특수 공수 부대(SAS), 호주 특수 공수 연대(SASR), 뉴질랜드 특수 공수 부대를 포함한 특수 부대(Special forces)와 정규 보병에 의해 수행되었다. 분쟁 초기 단계에서 영연방 및 말레이시아군은 국경을 통제하고 인도네시아의 공격으로부터 인구 밀집 지역을 보호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1965년까지 그들은 정보를 얻고 철수하는 인도네시아 침투군을 "추격"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더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1965년 5월에 처음 승인되었고, 7월에는 국경 침투 매복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당시 극비리에 진행된 이 순찰 작전은 종종 소규모 정찰팀이 말레이시아 사라왁 또는 사바 주에서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으로 국경을 넘어 동말레이시아에 진입하려는 인도네시아군을 탐지하는 데 관여했다. 초기에는 침투 거리가 약 2743.20m로 제한되었지만, 나중에는 약 5486.40m로, 그리고 1965년 4월 플라만 마푸 전투 이후에는 약 9144.00m로 확대되었다. 그 후 소대(platoon)와 중대(company) 규모의 재래식 후속 부대가 인도네시아군이 국경을 넘을 때 또는 칼리만탄에 여전히 머물러 있을 때 매복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이러한 작전은 "부인할 수 있는" 작전이어야 했으며 "공격적인 방어"라는 정책에 따라 수행되었다. 이러한 작전의 민감성과 노출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결과 때문에, 이 작전은 최고위층에서 통제되었고 "황금률"로 알려진 엄격한 매개변수 내에서 수행되었으며, 참여자들은 비밀 유지를 맹세했다.

Claret 작전은 전쟁 말기에 중단되기 전까지 영연방 군대가 주도권을 잡는 데 대체로 성공했으며, 인도네시아군에게 상당한 사상자를 입히고 국경 반대편에서 방어적인 입장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 작전은 1974년에 영국에 의해 처음 공개적으로 공개되었고, 호주 정부는 1996년까지 공식적으로 관여를 인정하지 않았다.[16]

3. 4. 분쟁의 완화와 종식 (1966년)

1965년 말, 인도네시아에서는 9·30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수카르노 대통령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수하르토 장군이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했다.[14] 이러한 상황 변화는 인도네시아의 대외 정책에도 영향을 미쳐, 말레이시아와의 분쟁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들었다.[15]

한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필리핀의 입장도 변화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이전의 수카르노 정권과 달리 말레이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66년 5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간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을 진행했고, 결국 1966년 8월 11일에 최종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분쟁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16]

4. 주요 당사자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대치는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말레이시아 연방 성립을 둘러싸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분쟁이다.

수카르노가 이끌던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신식민주의 정책의 일환이며, 이는 인도네시아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주장하며 1963년 1월 20일, ''콘프론타시''(대치)를 선언했다.[10] 툰쿠 압둘 라만이 이끌던 말레이시아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인도네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맞섰다. 영국해럴드 맥밀런 총리와 해럴드 윌슨 총리 정부 주도하에 데니스 힐리 국방장관과 월터 워커 보르네오 사령관(DOBOPS)을 중심으로 군사 작전을 지휘하며 말레이시아 방위를 지원했다.[10]

1965년 9·30 사건으로 수하르토가 인도네시아의 권력을 잡으면서 군사적 대치는 완화되기 시작했다. 1966년 5월 28일 방콕 회의에서 양국은 분쟁 종식을 선언했고, 8월 11일 평화 조약이 체결 및 비준되었다.[17]

4. 1. 인도네시아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국가 혁명의 결론으로 네덜란드령 뉴기니 합병에 초점을 맞추고, 제1세계와 제2세계와는 다른 자체적인 의제를 지원하는 독립적인 인도네시아 외교 정책을 개발하려 했다. 인도네시아는 비동맹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국가였으며, 1955년 반둥 회의를 주최했다. 1962년 말까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 뉴기니 합병으로 상당한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지역 강국이라는 자존감을 높였다.

1961년 5월 영국과 말라야 정부는 말라야, 북보르네오 왕령 식민지, 사라왁 왕령 식민지, 브루나이, 싱가포르를 포괄하는 말레이시아 연방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인도네시아가 이 제안을 어느 정도 지지했지만,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은 이에 확고하게 반대했다.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괴뢰 국가이자 신식민지 실험이며, 말레이시아의 확장이 영국의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인도네시아의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말레이 반도와 영국령 보르네오로 구성될 말레이시아 연방 결성에 강력히 반대했다.[11]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를 동남아시아에 신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를 확립하고 인도네시아의 지역 패권 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억제하려는 영국의 괴뢰 국가라고 비난했다.[12][13]

1962년 12월 8일, 브루나이 반란이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직접적인 개입을 부인했지만, 제안된 말레이시아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목표에 공감했다. 1963년 1월 20일,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수반드리오는 말레이시아에 대한 ''콘프론타시''(대치) 정책을 발표했다.[10] 1963년 4월 12일, 사라왁의 테베두 경찰서를 공격하면서 인도네시아군의 첫 번째 침투가 기록되었다.

1963년 7월, 마닐라에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표들이 만나 분쟁 해결을 논의했다. 7월 27일,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를 분쇄하겠다"(Ganyang Malaysia|가냥 말레이시아id)고 선언했다. 마닐라 회담에서 국제 연합이 조직한 국민투표에서 찬성할 경우 말레이시아 형성을 수용하기로 합의했지만, 인도네시아의 지연 전술로 인해 유엔의 사실 조사단 파견이 늦어졌다.

아흐마드 야니 중장이 이끄는 인도네시아군은 악화되는 인도네시아의 국내 상황에 점점 더 우려를 갖게 되었고, 대결을 방해하면서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말레이시아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하기 시작했다.[14] 이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맞서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15]

1965년 9월 30일 밤, 쿠데타 시도가 자카르타에서 일어났다. 6명의 인도네시아 고위 군사 지도자가 살해되었고,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이후 PKI 회원과 동조자들에 대한 투옥과 린치가 발생했다. 수하르토가 권력을 잡으면서 인도네시아의 동보르네오 침투 캠페인은 완화되기 시작했다.

1966년 5월 28일, 방콕 회의에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정부는 분쟁 종식을 선언했다. 8월 11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틀 후에 비준되었다.

4. 2. 말레이시아

툰쿠 압둘 라만 총리가 이끄는 말레이시아 정부는 1963년 초 브루나이 반란에 신속하게 대응했다. 월터 워커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 보르네오 사령부(COMBRITBOR)는 초기에 반란 진압을 주도했다.

말레이시아는 영국과 협력하여 1961년 5월, 말라야, 북보르네오 왕령 식민지, 사라왁 왕령 식민지, 브루나이, 싱가포르를 통합하는 더 큰 연방 국가를 제안했다.[10]

사바와 사라왁의 원주민 부족 출신 1,500여 명이 말레이시아 정부에 의해 리처드 눈(Richard Noone)과 세노이 프라악(Senoi Praaq)의 다른 장교들의 지휘하에 국경 수비대로 모집되어 인도네시아의 침투에 대응했다.


RAF Avro Vulcan 폭격기가 1965년경 말레이시아 RAF 버터워스에 착륙했다. 이 전략 폭격기의 존재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상당한 억지력이 되었다.


독립 이후, 최고 권한은 쿠알라룸푸르의 말레이시아 국가 방위 위원회로 변경되었으며, 사바와 사라왁에는 주 행정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군사적 지휘는 말레이시아 국군 참모총장인 툰쿠 오스만 장군과 경찰 감사관인 클로드 페너 경이 공동 의장을 맡은 말레이시아 국가 작전 위원회에서 담당했다.[10]

1966년 5월 28일, 방콕에서 열린 회의에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정부는 분쟁 종식을 선언했다. 이후 8월 11일 평화 조약이 체결되고 이틀 후 비준되었다.[17]

4. 3. 영국 및 영연방

영국은 1961년 5월, 동남아시아 식민지 철수의 일환으로 북보르네오의 식민지들을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등과 통합하여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0] 초기 인도네시아는 이를 지지했으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반대했다.

1962년 12월 8일, 북칼리만탄 국민군(TNKU)이 일으킨 브루나이 반란은 실패했지만,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를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목표에 공감했다. 1963년 1월 20일,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수반드리오는 말레이시아에 대한 ''콘프론타시''(대치) 정책을 발표했다.

호주 군인이 전방에서 L7 범용 기관총(GPMG)을 배치하고 있다.


호송선에서 북보르네오(사바)에 도착한 호주 병사들.


케상 강 근처에서 체포된 인도네시아 침투자, 1964년 10월 29일 호주 왕립 연대에 의해 체포됨.


영국은 해럴드 맥밀런 총리와 후임 해럴드 윌슨 총리 정부 주도하에 말레이시아 방위를 지원했다. 데니스 힐리 국방장관과 월터 워커 보르네오 사령관(DOBOPS)이 군사 작전을 지휘했다. 영국군은 물론 호주군뉴질랜드군도 말레이시아 방위에 참여했다.

1963년 초, 북보르네오의 군대는 월터 워커 소장의 지휘를 받았다. 1963년 중반에는 패트 글레니 준장이 부 DOBOPS로 도착했다.

보르네오의 영국군은 HQ 3 코만도 여단(사라왁 서부 담당)과 본부 99 구르카 보병 여단(동부 담당)으로 구성되었다. 지상군은 초기에는 5개의 영국 및 구르카 보병 대대와 장갑차 중대로 제한되었으나, 1964년 말까지 약 14,000명으로 증가했다. 해군 활동은 주로 기뢰 제거함, 경비함 등이 담당했다.

분쟁이 심화되면서 영국군의 배치는 세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졌다. 극동에 2년 동안 주둔하는 부대는 4개월, 구르카 부대는 6개월, 영국 본토 부대는 12개월 순환 근무를 했다.

보르네오에 주둔한 초기 공군 부대는 말라야와 싱가포르에 주둔한 비행대대의 분견대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트윈 파이오니어 및 싱글 파이오니어 수송기, 블랙번 베벌리 및 핸들리 페이지 헤이스팅스 수송기, 그리고 다양한 유형의 헬기가 포함되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영국 해군, 호주 왕립 해군, 말레이 왕립 해군, 뉴질랜드 왕립 해군 및 왕립 함대 보조 부대에서 최대 80척의 군함이 투입되었다. 이 중 대부분은 순찰정, 기뢰 제거함, 프리깃함 및 구축함이었다. HMS ''앨비언''과 HMS ''불워크''도 병력, 헬리콥터 및 육군 항공기를 수송하는 역할로 투입되었다.

4. 4. 기타

1962년 브루나이 반란에서 북칼리만탄 국민군(TNKU)이 실패한 후, 1963년 1월 20일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수반드리오는 말레이시아에 대한 ''콘프론타시''(대결) 정책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10]

브루나이 정치인 A. M. 아자하리는 통일된 북보르네오를 지지했지만, 말레이시아 연방에는 반대했다. 그는 독립 전쟁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했던 좌익 인사였다.[10]

1965년 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긴장 완화를 추구하며 말레이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이에 격분한 수카르노는 마르코스를 비난하며 "혼자 싸워야 하더라도 말레이시아를 계속 분쇄할 것"이라고 말했다.[17]

5. 군사 작전 및 전술

Konfrontasiid 기간 동안, 양측은 각자의 전략과 전술을 바탕으로 군사 작전을 전개했다.

인도네시아는 1963년 1월 20일 수반드리오 외무장관이 말레이시아에 대한 ''콘프론타시'' 정책을 발표하면서 군사적 대치를 시작했다. 1963년 4월 12일에는 사라왁 테베두 경찰서를 공격하며 첫 침투를 감행했다.[22]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신식민지 정책의 일환이며, 이는 인도네시아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다.[11] 1964년 5월 3일, 수카르노는 인민의 이중 사령부(Dwikora)를 선포하고, 8월 17일에는 말레이시아 반도에 신속 대응 부대(PGT) 공수 부대, 해군 특공대(KKO) 등을 동원한 폰티안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14] 9월 2일에는 PGT 공수 부대가 라비스 상륙 근처에 낙하했지만, 영연방군에 의해 제압되었다.[15]

영국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북보르네오 왕령 식민지, 사라왁 왕령 식민지, 브루나이를 통합하는 말레이시아 연방을 제안했다.[10] 브루나이 반란 이후, 영국군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아흐마드 야니 중장이 이끄는 인도네시아군은 대결을 최소화하면서 말레이시아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하기도 했다.[14]

1964년, 인도네시아군은 말레이시아 반도에 대한 공수 및 해상 침투 작전을 시작했지만, 영연방군에 의해 대부분 체포되었다. 순다 해협 위기 당시, 영연방군은 인도네시아 침투 거점에 대한 공습을 준비하기도 했다. 1964년 말, 영연방 정보는 칼리만탄에서 인도네시아 침투군의 증강을 보고했고,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도 1965년 초에 보르네오에 전투 부대를 배치하기로 합의했다.

1964년 6월부터 1966년 초까지는 클라렛 작전이라는 비밀 국경 침투 작전이 수행되었다. 영국 보르네오 사령관 월터 워커 소장은 라부안 섬에 주둔하며 극동 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했다.

보르네오의 영국군은 쿠칭과 브루나이에 본부를 둔 3 코만도 여단과 99 구르카 보병 여단으로 구성되었다. 초기 지상군은 말라야, 싱가포르, 홍콩에 주둔한 5개 영국 및 구르카 보병 대대와 장갑차 중대로 제한되었다.

분쟁 초기, 인도네시아군은 서칼리만탄 해안의 폰티아낙에 주둔했으며, 약 1,500명의 불규칙군과 정규군, 지역 방위 불규칙군으로 구성되었다.

무룻족 전사가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공병대 소속과 함께 사바 (북 보르네오) 지형도를 보고 있다.


영국군은 보르네오에서 지휘권을 인수한 직후, 워커 장군은 말라야 비상사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경 정찰대를 창설하고, 경찰 특수 부서를 확대했다.

왕립 육군 의무대 대위가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에서 사라왁으로 도망친 부모를 둔 무루트 아이를 진찰하는 모습. 영국군은 국경에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국군 정글 전술은 말라야 비상사태 동안 개발된 것으로, 가볍게 이동하고, 탐지되지 않으며, 장기간 보급 없이 지내는 것을 강조했다.

1966년 ABC 보고서에서는 ''콘프론타시''의 인도네시아 정치적 맥락에 대해 논의한다.


영국 외무부와 MI6은 흑색 선전을 퍼뜨리는 심리전(psyops)을 영국 군대와 협력하여 조정했다.

1965년 말레이시아인 여성들이 주도한 말레이시아에 대한 반 인도네시아 정서 시위. 현수막에는 "우리 여성들은 말레이시아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 툰쿠 압둘 라만 만세! 수카르노를 타도하라!"라고 적혀 있다.


영국 SAS가 포획한 인도네시아 M1 개런드 소총 (B59일 가능성이 있으며, 인도네시아 베레타에서 개조한 개런드) 제국 전쟁 박물관, 런던


영국 육군 제22 특수공수연대 1개 비행대는 1963년 초 보르네오에 배치되었다.

5. 1.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1955년 반둥 회의를 주최하는 등 비동맹 운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2년 말, 인도네시아는 주목할 만한 지역 강국이라는 자존감을 높이는 상당한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인도네시아는 통일 말레이시아 국가에 대한 영국의 제안에 주목했다.[10]

1961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은 말레이시아 연방에 확고하게 반대했다. 브루나이 정치인 AM 아자하리 빈 셰이크 마흐무드 박사는 통일된 북보르네오를 지지하면서도 더 넓은 말레이시아 연방에는 반대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압둘 하리스 나수티온 장군은 도덕적 지원을, 소반드리오는 실질적인 지원을 시사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칼리만탄에서 북칼리만탄 국민군(TNKU)이라는 소규모 의용군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8일, TNKU는 브루나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인도네시아는 직접적인 개입을 부인했지만, TNKU의 목표에 공감했다. 1963년 1월 20일,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수반드리오는 말레이시아에 대한 ''콘프론타시'' 정책을 발표했다. 1963년 4월 12일, 인도네시아군의 첫 번째 침투로 기록된 사라왁 테베두 경찰서 공격이 발생했다.[22]

수카르노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괴뢰 국가이며 신식민지 실험이라고 주장하며, 말레이시아의 확장이 영국의 통제를 강화하여 인도네시아의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말레이시아를 동남아시아에 신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를 확립하고 인도네시아의 지역 패권 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억제하려는 영국의 괴뢰 국가라고 비난했다.[11]

1964년 5월 3일, 수카르노는 인민의 이중 사령부(Dwikora)를 선포했다. 1964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군은 말레이시아 반도에 대한 공수 및 해상 침투 작전을 시작했다. 공군 신속 대응 부대(PGT) 공수 부대, 해군 특공대(KKO) 및 약 12명의 말레이시아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약 100명의 해상 부대가 폰티안에 상륙했다.[14] 9월 2일에는 PGT 공수 부대가 라비스 상륙 근처에 낙하했다. 그러나 이들은 영연방군에 의해 제압되었다.[15]

5. 2. 영연방

영국 정부는 1950년대 후반부터 극동에서의 주둔 약속을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동남아시아 식민지 철수의 일환으로 북보르네오의 식민지를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와 통합하기 위해 움직였다.[10] 1961년 5월, 영국과 말라야 정부는 말라야, 북보르네오 왕령 식민지, 사라왁 왕령 식민지, 브루나이, 싱가포르를 포괄하는 말레이시아라는 더 큰 연방을 제안했다. 초기에는 인도네시아가 제안된 연방을 어느 정도 지지했지만,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은 이에 확고하게 반대했다.

브루나이 반란 이후, 싱가포르에 주둔한 영국군은 신속한 대응을 위해 동원되었다. 봉기의 실패는 싱가포르에서 공수된 구르카 군대가 브루나이 타운을 확보하고 술탄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30시간 이내에 분명해졌다.

평화 회담이 진행되고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는 침투 작전을 지속했다. 1963년 9월 말레이시아 선포는 말레이시아 육군 부대가 동말레이시아로 알려진 이전의 영국령 보르네오에 배치되었음을 의미했다.

아흐마드 야니 중장이 이끄는 인도네시아군은 악화되는 인도네시아의 국내 상황에 점점 더 우려를 갖게 되었고, 대결을 방해하면서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말레이시아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하기 시작했다.[14] 이는 군대를 보존하는 동시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맞서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시행되었다.[15]

1964년, 인도네시아군은 말레이시아 반도에 대한 공수 및 해상 침투 작전을 시작했다. 이에 다양한 영연방군이 제압하였고, 침투자는 대부분 체포되었다.

순다 해협 위기에는 영국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와 2척의 구축함 호위함이 순다 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추가적인 인도네시아군의 말레이시아 반도 침투가 시도될 경우, 영연방군은 수마트라의 인도네시아 침투 거점에 대한 공습을 준비했다.

1964년 말, 영연방 정보가 칼리만탄에서 인도네시아 침투군의 증강을 보고하기 시작하면서, 두 개의 추가 영국 대대가 보르네오에 배치되었다. 한편, 호주와 뉴질랜드도 1965년 초에 보르네오에 전투 부대를 배치하기로 합의했다.

1964년 6월부터 1966년 초까지 보르네오에서 영연방 군대가 수행한 장기간의 비밀 국경 침투 작전인 클라렛 작전이 수행되었다.

영국 보르네오 사령관 월터 워커 소장은 라부안 섬에 주둔한 보르네오 작전 국장(DOBOPS)이었고 극동 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했다.

보르네오의 영국군은 쿠칭에 있는 본부(HQ) 3 코만도 여단(사라왁 서부 담당)과 브루나이의 본부 99 구르카 보병 여단으로 구성되었다. 지상군은 처음에는 말라야, 싱가포르, 홍콩에 주둔한 5개 영국 및 구르카 보병 대대와 장갑차 중대로 제한되었다.

분쟁 초기에 인도네시아군은 국경에서 약 200km 떨어진 서칼리만탄 해안의 폰티아낙에 있는 줄키플리 중장의 지휘를 받았다. 인도네시아 장교들이 이끄는 인도네시아 불규칙군은 약 1,500명으로 추정되며, 정규군과 지역 방위 불규칙군도 불특정 숫자로 추정되었다.

영국군은 보르네오에서 지휘권을 인수한 직후, 워커 장군은 말라야 비상사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을 위한 지침을 내렸다.

워커는 국경 정찰대를 창설했다. 국경 정찰대는 보병 대대에 배속되었고, 지역 지식과 대가족을 활용하여 정보 수집 부대로 발전했다. 또한, 경찰 특수 부서가 확대되었다.

영국군 정글 전술은 말라야 비상사태 동안 개발되고 연마되었다. 그들은 가볍게 이동하고, 탐지되지 않으며, 수일 동안 보급 없이 지내는 것을 강조했다.

영국 외무부와 MI6은 흑색 선전을 퍼뜨리는 심리전(psyops)을 영국 군대와 협력하여 조정했다.

영국 육군 제22 특수공수연대 1개 비행대는 1963년 초 보르네오에 배치되었다.

6. 분쟁의 결과

분쟁은 거의 4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수카르노수하르토 장군으로 교체된 후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하는 데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전투는 완화되었다. 1966년 5월에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최종 평화 협정은 1966년 8월 11일에 비준되었다.[1]

인도네시아가 말라야에 몇 차례의 수륙 양용 공격과 공수 작전을 수행했지만, 전쟁은 지속되는 동안 제한적이었고 주로 육상 분쟁으로 남아 있었다. 어느 쪽도 대규모 공중 또는 해상 공격으로 확대하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미한 군사적 효과보다 훨씬 더 큰 불이익을 초래했을 것"이다.[1] 당시 영국의 국방 장관 데니스 힐리는 이 작전을 "세계 역사상 군사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사례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영국 연방군은 보르네오에 17,000명이 배치되었고 말라야와 싱가포르에 10,000명이 더 투입되어 정점을 찍었다.[1]

7. 국제적 관계

영국 연방 군대의 총사상자는 사망 248명, 부상 180명이었으며, 그중 가장 많은 수는 영국군이었다.[5] 구르카족의 손실은 사망 43명, 부상 83명이었고, 다른 영국군의 손실은 사망 19명, 부상 44명이었다. 호주군의 사상자는 사망 23명[6], 부상 8명이었다. 뉴질랜드군의 사상자는 사망 12명[7], 부상 8명이었다. 나머지 사상자는 말레이시아 군, 경찰, 국경 수비대였다.

성공적인 임무를 마치고 대치전 종전 후 라부안에서 영국 해군, 호주 해군, 뉴질랜드 해군의 철수 퍼레이드.


다수의 영국군 사상자는 헬리콥터 사고로 발생했는데, 여기에는 여러 SAS 사령관과 외무부 관리(아마도 MI6의 구성원)가 사망한 벨베데레 추락 사고, 2대 낙하산 대대에서 여러 명이 사망한 웨섹스 충돌 사고, 1964년 7월 16일 클루앙 비행장 근처에서 발생하여 656 Sqn AAC의 승무원 2명이 사망한 웨스트랜드 스카우트 추락 사고 등이 포함된다. 1966년 8월, 2명의 영국군과 2명의 호주 군인이 실종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호주 군인(두 명 모두 SASR 출신)은 불어난 강을 건너다 익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총 36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53명이 부상당했으며, 4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대부분은 현지 거주자였다.

인도네시아의 사상자는 사망 590명, 부상 222명, 포로 771명으로 추정된다.

출처사망부상
영국
구르카
140[5]
44
83
호주군23[6]8
뉴질랜드군12[7]8
기타2938
합계248180


8. 분쟁의 유산

참조

[1] 서적 Aircraft Nose Art: American, French and British Imagery and Its Influences from World War I through the Vietnam War https://books.google[...] McFarland 2017-01-26
[2] 서적 2006
[3] 간행물 The North Kalimantan Communist Party an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2005-12
[4] 웹사이트 The Sukarno Years http://www.gimonca.c[...] Sejarah Indonesia 2006-05-30
[5] 서적 UK Armed Forces Operational deaths post World War II https://assets.publi[...] Ministry of Defence 2015
[6] 웹사이트 Indonesian Confrontation, 1963–66 | Australian War Memorial https://www.awm.gov.[...]
[7] 웹사이트 NZ and Confrontation in Borneo – Confrontation in Borneo | NZHistory, New Zealand history online https://nzhistory.go[...]
[8] 웹사이트 Speech by the President of the SAF Veterans' League, Brigadier-General (NS) Winston Toh, At the Konfrontasi Memorial Ceremony on 10 March 2016, 1825hrs | http://www.safvl.org[...] 2022-02-17
[9] 뉴스 The lost wars: Britain's Malayan campaigns https://www.independ[...] 2011-09-17
[10] 간행물 'Maximum disavowable aid': Britain, the United States and the Indonesian rebellion, 1957–58 https://academic.oup[...] 1999-11-01
[11] 서적 Japan and Singapore in the World Economy: Japan's Economic Advance Into Singapore 1870–1965 https://books.google[...] Routledge 199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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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Bukan Ingin Rebut Sabah dan Sarawak, Ini Alasan Presiden Soekano Perang Lawan Malaysia 1964 https://www.dio-tv.c[...] Dayak International Organization 2024-10-23
[14] 서적 Indonesian Foreign Policy and the Dilemma of Dependence: From Sukarno to Soeharto https://books.google[...] Equinox Publishing 2007
[15] 서적 The Army and Politics in Indonesia https://books.google[...] Equinox Publishing 2007
[16] 뉴스 Truth still a casualty of our secret war http://www.theage.co[...] 2009-04-27
[17] 서적 Indonesia Abandons Confrontation: An Inquiry Into the Functions of Indonesian Foreign Policy https://books.google[...] Equinox Publishing 2009
[18] 문서 Infantry Training Volume IV Tactics, The Infantry Battalion in Battle 1963
[19] 뉴스 How we destroyed Sukarno https://www.independ[...] 2015-03-18
[20] 뉴스 How we lied to put a killer in power https://www.independ[...] 2015-03-18
[21]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s://www.hukumonl[...] 2023-04-23
[22] 뉴스 Merdeka and Malaysia Day The Star (Malaysia) 2007-04-08
[23] 웹사이트 Australians at war: casualties as a result of service with Australian units http://www.awm.gov.a[...] Australian War Memorial 2009-12-15
[24] 웹사이트 Unit Information—2nd Squadron, Special Air Service Regiment, Confrontation http://www.awm.gov.a[...] Australian War Memorial 200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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