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이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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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망이산성은 충청북도 음성군, 경기도 안성시, 이천시의 경계에 있는 마이산 정상에 축조된 산성이다. 백제, 통일신라, 고려 시대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은 약 2,080m, 내성은 약 250m의 길이를 가지며, 치성, 성문, 봉수대 등의 시설이 확인된다. 특히 봉수대는 소백산맥을 넘는 중요한 봉수로가 합쳐지는 지점이었다. 망이산성은 각 시대별 축성 기술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고구려 양식의 치성과 특이한 성문 구조, 봉수대의 중요성 등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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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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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이천 망이산성 | |
이름 | 망이산성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양리 |
유형 | 기념물 |
지정 번호 | 138 |
지정일 | 1993년 6월 3일 |
소유 | 안성시, 이천시 |
면적 | (정보 없음) |
수량 | 일원 |
참고 | (정보 없음) |
음성 망이산성 | |
이름 | 망이산성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산30-1번지 |
유형 | 기념물 |
지정 번호 | 128 |
지정일 | 2003년 4월 11일 |
소유 | (정보 없음) |
면적 | (정보 없음) |
수량 | (정보 없음) |
참고 | (정보 없음) |
2. 역사
2. 1. 백제 시대
망이산성은 충청북도 음성군, 경기도 안성시, 이천시의 경계에 있는 마이산 정상에 축조된 성이다.[2]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주목 봉수조에 망이산성 봉수라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 망이성 봉수로 기록되어 있어 산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1]망이산성은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의 총 길이는 약 2,080m이며, 외성의 안쪽에는 전 구간에 걸쳐 일정한 너비의 성벽 안쪽 통행로가 마련되었다. 내성의 확인 가능한 길이는 약 250m이며, 내성의 중앙부에는 봉수대가 있다.[1] 망이산 정상부를 둘러싼 토성은 둘레가 약 250m이며, 판축 공법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을 돌출시킨 치성(雉城)은 서북·북·동·남·서남쪽의 5곳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문터는 서남·서북·동남·서문·내성문터 등 5개 문터가 남아 있다.[1] 출토유물은 철제단갑(鐵製單甲)·주조철부(鑄造鐵斧)·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1]
망이산성은 4세기에서 5세기경 한성백제 시기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 구조가 특이한 성으로, 하나의 산성에 서로 다른 형식의 성문이 시설되었다. 봉수대는 소백산맥을 넘은 봉수로서 단양 죽령과 충주 조령을 넘은 봉수로와 추풍령을 넘은 봉수로가 최종적으로 합쳐지는 가장 중요한 봉수대였다.[1]
망이산성은 성터와 봉수에 대한 귀중한 가치를 지닌 성으로서,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구성된 역사적 중첩성과 고구려 양식의 치성이 잘 남아 있는 석축산성이며, 특이한 성문 구조와 봉수대의 중요성 등은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1]
2. 2. 통일신라 시대
망이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주목 봉수조에 망이산성 봉수라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 망이성 봉수로 기록되어 있어 산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1]망이산성은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의 총 길이는 약 2,080m이며, 외성의 안쪽에는 전 구간에 걸쳐 일정한 너비의 성벽 안쪽 통행로가 마련되었다. 내성의 확인 가능한 길이는 약 250m이며, 내성의 중앙부에는 봉수대가 있다.[1] 성벽을 돌출시킨 치성(雉城)은 서북·북·동·남·서남쪽의 5곳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문터는 서남·서북·동남·서문·내성문터 등 5개 문터가 남아 있다.[1]
출토유물은 철제단갑(鐵製單甲)·주조철부(鑄造鐵斧)·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성문 구조가 특이한 성으로, 하나의 산성에 서로 다른 형식의 성문이 시설되었다. 봉수대는 소백산맥을 넘은 봉수로서 단양 죽령과 충주 조령을 넘은 봉수로와 추풍령을 넘은 봉수로가 최종적으로 합쳐지는 가장 중요한 봉수대였다.[1]
망이산성은 성터와 봉수에 대한 귀중한 가치를 지닌 성으로서,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구성된 역사적 중첩성과 고구려 양식의 치성이 잘 남아 있는 석축산성이며, 특이한 성문 구조와 봉수대의 중요성 등은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1]
2. 3. 고려 시대
망이산성은 경기도 안성시, 이천시, 충청북도 음성군 경계에 있는 마이산 정상에 축조된 성이다.[2]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봉수조와 여지도서에 망이산성 봉수 및 망이성 봉수에 대한 기록이 있어, 산성의 존재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1]망이산성은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의 총 길이는 약 2,080m이며, 외성 안쪽에는 전 구간에 걸쳐 일정한 너비의 성벽 안쪽 통행로가 마련되었다. 내성의 확인 가능한 길이는 약 250m이며, 내성의 중앙부에는 봉수대가 있다.[1] 성벽을 돌출시킨 치성은 서북·북·동·남·서남쪽의 5곳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문터는 서남·서북·동남·서문·내성문터 등 5개 문터가 남아 있다.[1] 출토 유물로는 철제단갑, 주조철부, 토기류 등이 있다.[1]
망이산성은 성터와 봉수에 대한 귀중한 가치를 지닌 성으로서,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구성된 역사적 중첩성과 고구려 양식의 치성이 잘 남아 있는 석축산성이며, 특이한 성문 구조와 봉수대의 중요성 등은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1] 특히, 봉수대는 소백산맥을 넘은 봉수로서 단양 죽령과 충주 조령을 넘은 봉수로와 추풍령을 넘은 봉수로가 최종적으로 합쳐지는 가장 중요한 봉수대였다.[1]
3. 구조
3. 1. 성벽
망이산성은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1] 외성의 총 길이는 약 2,080m이며, 외성의 안쪽에는 전 구간에 걸쳐 일정한 너비의 성벽 안쪽 통행로가 마련되었다.[1] 내성의 확인 가능한 길이는 약 250m이며, 내성의 중앙부에는 봉수대가 있다.[1] 성벽을 돌출시킨 치성(雉城)은 서북·북·동·남·서남쪽의 5곳에서 확인되었다.[1]3. 2. 성문
망이산성에는 서남, 서북, 동남, 서문, 내성문터 등 5개의 문터가 남아 있다.[1] 성문 구조가 특이한 성으로, 하나의 산성에 서로 다른 형식의 성문이 시설되었다.[1]3. 3. 치성
망이산성의 치성(雉城)은 서북, 북, 동, 남, 서남쪽의 5곳에서 확인되었다.[1] 성문 구조가 특이한 성으로, 하나의 산성에 서로 다른 형식의 성문이 시설되었다.[1]3. 4. 봉수대
망이산성 봉수대는 소백산맥을 넘은 봉수로가 최종적으로 합쳐지는 중요한 봉수대였다.[1] 단양 죽령과 충주 조령을 넘은 봉수로와 추풍령을 넘은 봉수로가 이곳에서 합쳐졌다.[1] 망이산성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주목 봉수조에 망이산성 봉수라는 기록이 있고, 『여지도서』에 망이성 봉수로 기록되어 있어 산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1]4. 출토 유물
5. 의의 및 평가
망이산성은 백제, 통일신라, 고려 시대의 군사 시설이 중복된 복합 유적이다.[1] 각 시대별 축성 기술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특히 백제 판축 토성 기술의 확산 과정과 통일신라의 석성 축조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망이산성은 한반도 중부 지역의 교통 요충지에 위치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1]
망이산성은 흙으로 쌓은 내성과 돌로 쌓은 외성으로 구성된 역사적 중첩성과 고구려 양식의 치성이 잘 남아 있는 석축산성이며, 특이한 성문 구조와 봉수대의 중요성 등은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1] 특히, 봉수대는 소백산맥을 넘은 봉수로서 단양 죽령과 충주 조령을 넘은 봉수로와 추풍령을 넘은 봉수로가 최종적으로 합쳐지는 가장 중요한 봉수대였다.[1]
6. 현황
망이산성은 안성시 일죽면과 이천시 그리고 충청북도 음성군의 경계지점에 있는 해발 472m 높이의 망이산에 있으며, 경기도 남동부와 충청도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다. 백제 성곽은 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며, 둘레는 250m 정도다. 성벽은 영정주를 사용하여 판축공법으로 구축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성내에서는 다량의 토기류와 철제무기류가 출토되었다. 한성백제 시기인 4세기부터 5세기 대에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성벽은 백제토성을 감싸며 능선을 따라 구축된 포곡식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2,080m로 대규모에 속하는 장방형 산성이다. 4개의 문지와 5개의 치, 다수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성벽은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정교하게 가공하여 쌓았으며, 대형의 지대석을 놓고 들여쌓기 방식으로 경사가 완만하게 쌓은 편축식 성벽이다. 성내에서 8각 건물지와 장방형건물지가 확인되었고, 건물지에서는 다수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고려 초기에 망이산성이 집중적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망이산성은 여러 시기의 군사시설이 중복된 복합 군사유적이다. 특히 백제 판축토성의 축성기술의 확산과정을 알 수 있게 해주며, 화강암 가공석과 지대석 사용, 편축공법이 도입되는 통일 신라의 축성법이 적용된 점 등에서 축성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참조
[1]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2]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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