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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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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성종 15년(1484년)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8년(1616년)에 재건되었다. 다른 궁궐의 정전과 달리 동향을 하고 있으며, 단층 건물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일제강점기에는 창경원이 되면서 부속 행각이 철거되고 벚나무가 심어졌으나, 1983년 창경궁 복원과 함께 명정전도 복원되었다. 명정전은 건물 내부 구조, 월대, 공포, 처마 등에서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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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3년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2013년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이름창경궁 명정전
로마자 표기Myeongjeongjeon Hall of Changgyeonggung Palace
유형국보
지정번호226
지정일1985년 1월 8일
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1
시대조선 성종 15년(1484년) 창건, 광해군 8년(1616년) 재건
문화재청 ID11,02260000,11

2. 역사

창경궁 터는 원래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1418년에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이다.[1] 이때 명정전의 이름은 의정부 좌찬성이던 서거정이 지었으며, 상량문은 우부승지이던 김종직이 지었다.[1] 세종 이후 창경궁의 존재는 미미하였으나 성종 때에 이르러 대왕대비와 대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 터에다 창경궁을 창건하면서 정식 궁궐로서의 기틀을 잡았다. 임진왜란 이후에 불타버린 정궁(경복궁)의 근정전창덕궁 인정전 대신 법전으로 사용되었다.

명정전은 조선 제9대 성종 15년(1484년)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년)에 재건하였다.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은 모두 남향을 하였는데, 이 정전만은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지세에 따라 동향을 하고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정면인 동쪽으로는 현존하는 명정문을 위시하여, 지금은 없어진 광정문(光政門)과 광범문(光範門)이 각각 오른쪽인 남쪽과 왼쪽인 북쪽에 있었다. 이후 영조 때에는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이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경궁 전체가 창경원으로 개조되며 명정전의 부속 행각이 철거되었고, 마당에 벚나무를 심었다. 이는 일제가 한국의 전통 궁궐을 격하시키고, 일본식으로 변형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83년부터 창경궁을 복원할 때 명정전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2. 1. 창건과 중건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1418년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1] 이때 명정전의 이름은 의정부 좌찬성이던 서거정이 지었으며, 상량문은 우부승지이던 김종직이 지었다.[1] 성종 15년(1484년)에 대왕대비와 대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창건하면서 정식 궁궐로서 기틀을 잡았고, 이때 명정전이 건립되었다.[1]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광해군 8년(1616년)에 재건되었다.[1] 임진왜란 이후에 불타버린 정궁(경복궁)의 근정전창덕궁 인정전 대신 법전으로 사용되었다.[1]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은 모두 남향을 하였는데, 명정전만은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지세에 따라 동향을 하고 있다. 이후 영조 때에는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이는 의식을 명정전에서 거행하기도 했다.

2. 2. 일제강점기와 복원

3. 특징

명정전은 다른 궁궐 정전과 달리 동향을 하고 있으며, 단층 건물이라는 특징이 있다.

명정전은 지형에 맞추어 동향을 하며 정문인 명정문과 일직선 축을 형성하지 않는 점, 건물 내부 뒷부분 기둥을 모두 생략하여 보좌(寶座) 주위를 넓게 마련한 점, 건물 외부 뒤쪽에 퇴칸을 내달아 복도(複道)를 만든 점이 특징을 이룬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 사용하는 전각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월대

정면 상·하 월대 중앙과 월대 좌우에는 화강석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에서 앞으로 보아 월대 왼쪽으로 오르는 계단은 상·하 월대를 거치면서 오르도록 되어 있고, 오른쪽의 계단은 박석이 깔린 지면에서 바로 상월대로 오르게 되어 있다. 정면 상·하 월대 계단 중앙에는 한 쌍의 봉황을 돋을새김 했으며, 봉황을 새긴 판석 좌우 계단 수직면에만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월대에는 난간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상·하 월대 바닥에는 박석이 깔려 있다. 월대 앞 마당 중심 좌우에는 품계석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 구조

건물의 구조는 건물 외곽을 둘러싸는 16개의 평주(平柱)와 내부 전면(前面)에만 배치된 4개의 고주(高柱)로 형성되어 있다. 전면과 후면 어칸에는 꽃살 사분합문, 좌우 협칸에는 삼분합문, 툇칸에는 이분합창이 설치되어 있고, 좌·우 툇칸 이분합창의 하부는 회색벽돌로 12단 쌓아 화방벽(火防壁)으로 조성하였다. 좌우 측면 중앙칸에는 삼분합문이 설치되었고, 좌·우 툇칸 이분합창의 하단은 정면을 후면과 마찬가지로 회색벽돌로 12단 쌓았다. 분합문과 창 상부에는 모두 광창을 설치하였으며,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고, 내부 중앙 뒤에 보좌를 설치하였다.

;보좌

명정전 내부의 보좌. 문화재청 제공.


보좌는 사면에 나무계단을 설치하고 뒷면을 제외한 삼면 계단 둘레에는 연꽃모양으로 장식한 난간 기둥을 둘러 세운 다음, 가운데 뒤쪽에 어탑(御榻)을 놓고 그 뒤를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장식하였다. 보좌 위에는 화려한 짜임새의 포를 짜올려 만든 보개(寶蓋)를 얹고, 보개 한복판에 두 마리의 봉황과 구름을 새긴 나무조각을 붙여 왕의 자리임을 상징하였다.

;공포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의 포작을 평방 위에 촘촘히 조립했다. 공포의 짜임새는 대단히 견실하고 쇠서의 곡선은 경직하며 초각 솜씨도 힘차고 긴장미가 있어 조선 초기의 수법을 발견할 수 있다. 기둥 상부인 주두 밑에는 안초공 형상의 운공이 보방향으로 결구되어 있다. 1·2·3제공 첨차 외단은 앙서형을 하였고, 4제공은 끝을 길고 뾰죽하게 자른 삼분두형을 하였는데 수서형태로 변해가는 전단계의 모습을 보인다. 첨차 1·2·3 제공의 내부는 교두형이고, 4제공은 운공으로 처리되었다.

;처마

처마는 겹처마로 각 마루는 양성을 하였고, 용마루에는 취두, 내림마루 끝에는 용두, 추녀마루에는 다섯 기의 잡상을 두었다. 지붕 합각면은 풍판과 지네철로 구성된 판벽이다. 이 건물 기둥 사이의 문얼굴과 광창의 구성은 재건 당시의 것으로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등 다른 궁전의 모범이 된다. 명정전은 궁궐의 정전이기는 하지만, 이궁(離宮)이기 때문에 경운궁 중화전, 경희궁 숭정전과 같이 단층으로 처리되었다.

3. 1. 건축 양식

명정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바깥쪽 16개의 평주와 내부 앞쪽 4개의 고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뒷면에 툇칸이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화강석으로 만든 이중 월대 위 장대석 기단 위에 건물이 있으며, 기단 바닥에는 전돌이 깔려 있고 좌우 끝에는 드므가 있다. 명정전 터는 뒤쪽이 높은 경사지여서 월대는 뒤를 제외한 3면에만 조성되었고, 지세 때문에 명정문과 일직선 축을 이루지 않는다.

건물 정면 상·하 월대 중앙과 좌우에는 화강석 계단이 있고, 계단 중앙에는 봉황을, 좌우 수직면에는 당초문을 새겼다. 월대에는 난간이 없고, 박석이 깔린 월대 앞마당 좌우에는 품계석이 있다.

건물 전면과 후면 어칸에는 꽃살 사분합문, 좌우 협칸에는 삼분합문, 툇칸에는 이분합창이 설치되어 있다. 좌·우 툇칸 이분합창 하부는 회색벽돌로 화방벽을 쌓았고, 측면 중앙칸에는 삼분합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분합문과 창 상부에는 광창이 있다.

내부 중앙 뒤쪽 보좌는 사면에 나무계단을 설치하고 뒷면을 제외한 삼면 계단 둘레에 연꽃모양 난간 기둥을 세웠으며, 어탑 뒤에는 일월오봉병으로 장식했다. 보좌 위에는 봉황과 구름을 새긴 나무조각을 붙인 보개가 있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으로 평방 위에 조립되었고, 쇠서의 곡선은 경직되며 초각 솜씨는 힘차다. 기둥 상부 주두 밑에는 안초공 형상의 운공이 보방향으로 결구되어 있다. 1·2·3제공 첨차 외단은 앙서형, 4제공은 삼분두형을 하였고, 첨차 1·2·3 제공 내부는 교두형, 4제공은 운공으로 처리되었다.

처마는 겹처마로 각 마루는 양성, 용마루에는 취두, 내림마루 끝에는 용두, 추녀마루에는 다섯 기의 잡상을 두었다. 지붕 합각면은 풍판과 지네철로 구성된 판벽이다. 명정전은 이궁의 정전이기에 단층으로 처리되었다.

3. 2. 세부 구조

화강석으로 조성된 이중 월대 위에 명정전 건물이 들어서 있다. 월대 정면 상·하단과 좌우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정면 계단 중앙에는 한 쌍의 봉황 조각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좌우 계단 수직면에는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고, 월대에는 난간이 설치되지 않았다.

건물 외곽은 16개의 평주(平柱)와 내부 전면 4개의 고주(高柱)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과 후면 어칸에는 꽃살 사분합문, 좌우 협칸에는 삼분합문, 툇칸에는 이분합창이 설치되어 있다. 좌·우 툇칸 이분합창 하부는 회색벽돌로 12단 쌓아 화방벽(火防壁)으로 조성하였다.

내부 중앙 뒤쪽에는 보좌(寶座)가 설치되어 있다. 보좌는 뒷면을 제외한 삼면에 난간 기둥을 세우고, 어탑(御榻)과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장식했다. 보개(寶蓋)에는 봉황과 구름 조각이 새겨져 있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으로, 쇠서의 곡선이 경직되고 초각 솜씨가 힘차 조선 초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용마루에는 취두, 내림마루 끝에는 용두,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두었다.

4. 현대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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