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코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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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스코 추방은 1609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가 이슬람교도인 모리스코를 추방한 사건이다. 1492년 그라나다 함락 이후 기독교도와 모리스코 간의 긴장이 지속되었고, 모리스코는 종교적,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펠리페 3세는 레르마 공작과 발렌시아 대주교 후안 데 리베라의 지원을 받아 추방 칙령을 발표했으며, 발렌시아에서 시작하여 아라곤,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등지에서 수십만 명의 모리스코가 북아프리카 등으로 추방되었다. 추방은 발렌시아와 아라곤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귀족의 권력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현대 유전자 연구는 스페인에 모리스코의 후손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며, 2006년에는 모리스코 후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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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코 추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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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모리스코 추방 |
설명 | 스페인에서 모리스코가 추방된 사건 |
시기 | 1609년 - 1614년 |
장소 | 스페인 |
관련 집단 | |
추방 대상 | 모리스코 |
주도 세력 | 스페인 정부 |
배경 | |
종교적 갈등 | 가톨릭 vs. 이슬람 |
정치적 불안정 | 모리스코의 잠재적 반란 및 외부 세력과의 연계 우려 |
주요 인물 | |
주도 인물 | 펠리페 3세 |
관련 인물 | 레르마 공작 |
영향 | |
사회적 영향 | 스페인 사회의 분열 심화, 경제적 손실 |
문화적 영향 | 모리스코 문화의 소멸 가속화 |
인구 변화 | 수십만 명의 모리스코가 북아프리카 및 다른 지역으로 이주 |
기타 | |
추가 정보 | 모리스코는 개종한 무슬림의 후손으로, 스페인 사회에서 차별과 탄압을 받았다. |
2. 배경
모리스코 추방의 배경에는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레콩키스타 이후에도 모리스코와 기독교도 사이의 불신과 긴장은 계속되었다. 일부 모리스코는 영향력을 유지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비중은 낮았다. 기독교도들은 모리스코의 신앙을 의심했고, 이는 펠리페 2세의 이슬람 관습 금지령(1567년)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알푸하라스 반란(1568-1571)이 일어났지만 진압되었다.
17세기 초, 스페인 제국의 경제는 악화되었다. 1604년 불황은 생활 수준을 낮추었고, 이는 기독교도와 모리스코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특히 발렌시아 왕국에서는 모리스코들이 농민 계층의 다수를 차지했고, 기독교도와의 경제적 경쟁이 심화되면서 적개심이 커졌다. 이는 형제회의 반란(1520년)에서 이미 표면화된 바 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을 위협으로 간주하는 전국적인 합의가 있었지만, 모리스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일부 성직자들은 모리스코에게 동화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하이메 블레다와 같은 종교재판 관계자는 대량학살까지 주장하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15] 레르마 공작은 모리스코들이 바르바리 해적과 공모한다고 비난하며 반감을 드러냈다.[16]
인문주의자 페드로 데 발렌시아는 1605년 말이나 1606년 초에 모리스코에 관한 논문을 저술했다. 그의 ''에스파냐 모리스코에 관한 논문''(Tratado acerca de los Moriscos de España)에서 발렌시아는 국왕의 모리스코 정책을 비판하며 림피에사 데 상그레(순혈)을 폄하했다.[20] 그는 추방이 부당하고 비그리스도교적이며 탐욕과 증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22] 그는 타키야(전략적 거짓말)를 인정하면서도 모리스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동화라고 주장했다.[20]
2. 1. 레콩키스타와 모리스코의 등장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에스파냐 연합왕국이 그라나다를 점령한 1492년 이후에도 모리스코와 기독교도 사이의 시기심과 긴장감은 높았다. 일부 모리스코들은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고, 발렌시아 귀족이나 아라곤 귀족과 같이 모리스코의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는 일부 사람들과 협력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스페인 전체에서 모리스코들의 정치적·경제적 비중은 낮아졌다. 기독교도 주민들은 모리스코의 기독교 신앙이 진실하지 않다고 의심했다.[49]이러한 상황에서 펠리페 2세는 1567년 모든 모리스코(스페인의 이슬람 교도)들에게 이슬람 관습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법을 시행했다. 이에 저항해 1568~1573년 반란이 일어났으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에게 제압되었다. 반란 진압 후, 펠리페 2세는 그라나다의 모리스코들을 다른 지역으로 분산시키도록 명령했다. 펠리페 2세는 이것이 모리스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나머지 기독교 인구에 대한 동화를 용이하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는 어느 정도 그라나다의 모리스코에게는 해당되었을 수 있지만, 이슬람이 여전히 널리 행해지고 민족적 긴장이 스페인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았던 발렌시아나 아라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15]
모리스코들이 개종 또는 망명을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자, 그들 대부분은 왕실이나 가톨릭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부는 펠리페 2세가 아랍어와 아랍어 이름 사용 금지, 모리스코 아이들을 가톨릭 성직자에게 교육시키도록 요구하는 칙령에 저항하여 1568년-1571년의 알푸하라스 반란(Rebelión de las Alpujarrases)을 일으켰다.[49]
2. 2. 종교적, 사회적 갈등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에스파냐 연합왕국이 그라나다를 점령한 1492년 이후에도 모리스코와 기독교도 사이의 시기심과 긴장감은 높았다. 일부 모리스코들은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고, 발렌시아 귀족이나 아라곤 귀족 같이 모리스코의 값싼 노동력에 의존했던 일부 사람들과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점차 스페인 전체에서 모리스코들의 정치적·경제적 비중은 낮아졌다. 기독교도 주민들은 모리스코들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진실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들을 의심했다. 이러한 상황은 펠리페 2세가 1567년 모든 모리스코들에게 이슬람 관습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법을 시행하게 만들었다. 이에 저항해 모리스코 반란이 일어났으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에게 제압되었다.[11]같은 시기 스페인은 개신교의 네덜란드 공화국과 전쟁을 치렀다. 1600년대 초, 경제적으로 스페인은 더욱 나빠졌다. 1604년의 불황으로 돈의 가치가 타격을 받아, 스페인 제국이 아메리카 대륙에 소유하는 보물의 몰락이 벌어졌다. 따라서 경제적인 스페인 내부의 생활 수준이 낮아져 기독교도와 모리스코 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커졌다.[16]
모리스코와 구도(舊徒)라 불린 다른 기독교인들 사이의 의심과 긴장은 스페인 일부 지역에서는 높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모리스코는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고 심지어 성직자 직책을 맡기도 했지만, 특히 발렌시아와 아라곤에서는 지역 귀족을 위한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종파 갈등이 있었던 곳에서는 구도 공동체가 모리스코의 기독교 신앙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의심했다. 무슬림으로 남은 무어인들은 무데하르로 알려져 있었다.[11] 반면 많은 모리스코는 새로운 기독교 신앙에 헌신적이었으며,[12] 그라나다에서는 많은 모리스코가 기독교 순교자가 되어 기독교를 포기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무슬림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13] 구도와 신도 사이의 적대감의 상당 부분은 종교보다는 민족성에 기반한 것이었다.[14]
몇몇 반란이 일어났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568~1573년 알푸하라스의 반란이었다. 이 반란은 필립 2세의 아랍어, 아랍식 이름 금지와 모리스코들이 자녀들을 사제들에게 교육받도록 맡겨야 한다는 칙령에 대한 저항이었다. 반란 진압 후 필립 2세는 그라나다의 모리스코들을 다른 지역으로 분산시키도록 명령했다. 필립 2세는 이것이 모리스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나머지 기독교 인구에 대한 동화를 쉽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는 어느 정도 그라나다의 모리스코에게는 해당되었을 수 있지만, 이슬람이 여전히 널리 행해지고 민족적 긴장이 스페인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았던 발렌시아나 아라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15]
같은 시기 스페인은 저지대 국가 소유지의 절반 이상을 개신교 네덜란드 공화국에 잃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스페인 지배 계급은 이미 스페인을 가톨릭 기독교의 수호자로 생각했고, 이 패배는 사고방식의 급진화와 스페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타격을 가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어졌다.[16]
2. 3. 경제적 요인
1600년대 초, 스페인 제국 경제는 악화되었다. 1604년 불황으로 금의 가치가 하락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자산 몰락이 발생했다. 이는 스페인 내 생활 수준 저하로 이어져 기독교도와 모리스코 간 긴장을 고조시켰다.[16]17세기 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령으로부터 금과 보물 유입이 줄면서 1604년 불황이 닥쳤고, 생활 수준 저하는 귀중한 일자리를 둘러싼 모리스코와 구 기독교도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16]
발렌시아 왕국은 아라곤 왕관 내 모리스코 인구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카스티야와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발렌시아 모리스코들은 대다수가 무지한 농민 계층이었고, 기독교 인구와 격리되어 생활했다. 특히 장인 계급 중산층과의 경제적, 사회적 경쟁은 모리스코에 대한 적개심의 주요 원인이었다.[15] 이러한 적개심은 1520년 발렌시아 장인 길드가 지주 귀족과 무슬림 무데하르 농민 계층 모두에 맞서 봉기한 형제회의 반란에서 이미 나타났다. 1523년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반란군은 많은 사람을 살해하고 무슬림들에게 강제 세례와 개종을 강요했다. 1525년 카를 5세는 이러한 강제 개종을 옹호하여 발렌시아 모리스코를 만들었다. 발렌시아 모리스코들은 오랜 기간 기독교 이웃들의 적대감으로 인해 추방 기간 동안 가장 큰 고난을 겪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이 억압해야 할 위협이라는 전국적인 합의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이 된 모리스코들에게 이를 어떻게 적용할지는 불분명했다. 왕실 고문 프레이 루이스 데 알리아가와 같은 일부 성직자들은 모리스코들이 동화되어 완전한 기독교인이 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5]
3. 모리스코 추방
펠리페 3세는 1609년 4월 9일에 모리스코 추방 칙령에 서명했다. '신도'(新徒)라 불린 모리스코와 '구도'(舊徒)라 불린 다른 기독교인들 사이의 의심과 긴장은 스페인 일부 지역에서는 높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모리스코는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고 심지어 성직자 직책을 맡기도 했지만, 특히 발렌시아와 아라곤에서는 지역 귀족을 위한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종파 갈등이 있었던 곳에서는 구도 공동체가 모리스코의 기독교 신앙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의심했다. 무슬림으로 남은 무어인들은 무데하르로 알려져 있었다.[11] 반면 많은 모리스코는 새로운 기독교 신앙에 헌신적이었으며,[12] 그라나다에서는 많은 모리스코가 기독교 순교자가 되어 기독교를 포기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무슬림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13] 구도와 신도 사이의 적대감은 종교보다는 민족성에 기반한 것이었다.[14]
몇몇 반란이 일어났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펠리페 2세의 아랍어, 아랍식 이름 금지와 모리스코들이 자녀들을 사제들에게 교육받도록 맡겨야 한다는 칙령에 대한 1568~1573년 반란이었다. 반란 진압 후 펠리페 2세는 그라나다의 모리스코들을 다른 지역으로 분산시키도록 명령했다. 펠리페 2세는 이것이 모리스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나머지 기독교 인구에 대한 동화를 용이하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는 어느 정도 그라나다의 모리스코에게는 해당되었을 수 있지만, 이슬람이 여전히 널리 행해지고 민족적 긴장이 스페인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았던 발렌시아나 아라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15]
같은 시기 스페인은 저지대 국가 소유지의 절반 이상을 개신교 네덜란드 공화국에 잃었다. 지배 계급은 이미 스페인을 가톨릭 기독교의 수호자로 생각했고, 이 패배는 사고방식의 급진화와 스페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타격을 가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어졌다.[16] 17세기 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령으로부터의 금과 보물의 양이 줄어들면서 1604년에 불황이 닥쳤다. 생활 수준의 저하는 귀중한 일자리를 놓고 모리스코와 구도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16]
스페인에서 추방 당시 모리스코의 수는 알 수 없으며, 대부분의 추정치는 추방된 모리스코의 수를 기반으로 한다. 30만 명에서 40만 명 사이라는 수치가 종종 인용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17세기 초 스페인 전체 인구 850만 명 중 50만 명에서 100만 명의 모리스코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17][18][3] 상당수가 이전 아라곤 연합왕국 지역에 거주했는데, 이곳에서는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발렌시아 지역에서는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부유층과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던 반면, 모리스코들은 외곽 시골과 도시의 빈민가에 거주했다.[19]
카스티야 연합왕국 지역, 즉 현재 안달루시아의 과달키비르 강 계곡을 포함한 지역의 상황은 상당히 달랐다. 전반적으로 모리스코의 비율은 낮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대다수가 이전 무데하르 출신의 기독교도였고, 주류 사회에 잘 통합되어 있었으며, 많은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발렌시아와 달리, 그들은 이웃인 구 기독교인들로부터 적대감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이웃들이 왕실의 추방 시도로부터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는데, 플라센시아에서는 모리스코를 추방하기 위해 파견된 왕실 관리들이 도착하자마자 즉시 투옥되었고, 아빌라에서는 추방을 피하기 위해 현지 모리스코들이 성직자와 정부 직책에 통합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무데하르 출신 모리스코들과 더불어 또 다른 모리스코 공동체가 공존했다. 알푸하라스의 봉기와 전쟁 이후 추방되거나 흩어진 많은 그라나다 모리스코들이 그들이 정착한 공동체 내에서 더 많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모리스코에 대한 지역 사회의 동정심으로 인해 카스티야와 안달루시아에서는 모리스코를 식별하고 추방하려는 노력이 소극적이었다. 추방은 아라곤 연합왕국, 특히 발렌시아보다 느리고 훨씬 덜 철저한 과정이었으며, 상당수의 모리스코들은 추방을 피하거나 추방 후 몇 년 안에 돌아왔다.[15]
발렌시아 왕국은 아라곤 연합왕국 내 모리스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상황은 카스티야와는 극적으로 달랐다. 발렌시아 모리스코들은 무지한 농민 계층의 압도적 다수였고, 기독교 인구와는 격리된 채 살았다. 특히 장인 계급 중산층으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경쟁이 그들에 대한 적개심의 주요 원인이었다.[15] 이러한 적개심은 1520년, 발렌시아의 장인 길드가 지주 귀족과 무슬림 무데하르 농민 계층 모두에 맞서 봉기한 형제단의 반란에서 이미 표면화되었다. 비록 이 반란은 1523년에 최종적으로 진압되었지만, 반란군은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나머지 무슬림 인구의 대규모 세례와 개종을 강요했다. 1525년, 카를 5세는 이러한 강제 개종을 옹호함으로써 발렌시아 모리스코들을 만들었다.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이 진압되어야 할 위협이라는 데 대해 사실상 전국적인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이었던 모리스코들에게 이것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왕실 고문이었던 프레이 루이스 데 알리아가와 같은 일부 성직자들은 모리스코들에게 동화되어 완전한 기독교인이 될 시간을 주는 것을 지지했다.[15] 모리스코들을 가장 열렬히 옹호한 사람들은 발렌시아와 아라곤 귀족들이었는데, 그들의 사적 이익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귀족들은 모리스코들이 제공하는 값싸고 저렴한 노동력으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견해에 반대한 사람들은 다양한 저명 인사들과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알리아가에 반대한 성직자들에는 발렌시아에서 가장 저명한 종교재판원이었던 하이메 블레다가 포함되었다. 블레다는 모리스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펠리페 3세에게 추방이나 기타 방법으로 종식시킬 것을 여러 차례 제안했으며, 심지어 대량 학살을 권고하기도 했다.[15] 1596년, 펠리페 3세의 최고 재무 책임자였던 레르마 공작은 모리스코들이 무슬림 바르바리 해적들과 공모했다고 비난했는데, 이는 수년 동안 그들을 괴롭혀 온 혐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위협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아라곤 의회는 어떤 처벌 조치에도 반대하며, 모리스코들이 스페인을 배신하고 싶더라도 "그들에게는 무기나 보급품, 요새화된 위치, 터키 함대의 기지가 없기 때문에" 그럴 입장이 아니라고 적었다. 레르마 공작은 모리스코들에 대한 반감을 계속 유지했다.[16]
인문주의자 페드로 데 발렌시아는 1605년 말이나 1606년 초에 모리스코에 관한 논문을 저술했다. 그의 ''에스파냐 모리스코에 관한 논문''(Tratado acerca de los Moriscos de España)은 펠리페 3세의 사제인 Diego de Mardones의 요청으로 쓰여졌다.[20] 그는 순혈주의를 폄하하며 "스페인인의 피가 무어인의 피와 섞임으로써 오염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지 맙시다."라고 말했다.[21] 그는 추방이 부정의하고 비그리스도교적이며 탐욕과 증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며, 모리스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동화를 선호했다.[20]
레르마 공작은 결국 발렌시아 대주교 후안 데 리베라의 도움을 받아 펠리페 3세를 설득했다. 리베라 대주교는 모리스코들을 이단자이자 반역자로 간주했으며, 국왕에게 모리스코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왕실 재정을 확보할 것을 제안했다. 다만 모리스코들을 노예로 삼자는 제안은 거부되었다.[15]
카스티야 의회는 1619년 추방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국가 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발렌시아 왕국에서는 농지가 버려졌고, 토착 기독교인들이 채울 수 없는 경제 부문의 공백이 생겼다. 발렌시아 왕국 주민의 33%가 제거되면서, 현재 알리칸테 주 북부의 일부 카운티는 사실상 전체 인구를 잃었다. 기반 시설이 붕괴되었고, 기독교 귀족과 지주들은 체납에 빠졌다. 현금이 부족해진 많은 발렌시아 귀족들은 이전 소득에 가까워지기 위해 기독교 소작농의 지대를 인상했다. 지대 인상은 새로운 소작농들이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오는 것을 막았고, 그 결과 발렌시아의 농업 생산량이 크게 감소했다.[46]
추방은 아라곤과 발렌시아의 경제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권력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전 아라곤 연합왕국은 더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그늘에 있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위상은 더욱 떨어졌다. 동부 왕국 자체에서 카탈루냐 귀족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소득은 남부와 서부 이웃들과 달리 상당한 모리스코 인구가 없었기 때문에 영향을 덜 받았다. 따라서 추방은 아라곤 연합왕국 내에서 권력의 중심을 전통적인 발렌시아에서 카탈루냐 공국으로 이동시키는 데 기여했다.[47]
3. 1. 추방 칙령 (1609년)


펠리페 3세는 1609년 4월 9일에 모리스코 추방 칙령에 서명했다.[19] 모리스코 인구가 가장 많았던 발렌시아에서부터 추방이 시작되었다. 준비는 철저한 비밀 속에서 이루어졌다. 9월부터 이탈리아에서 테르시오 대대가 도착하여[24] 발렌시아의 주요 항구인 알파케스, 데니아, 알리칸테에 주둔했다. 9월 22일, 총독은 칙령 발표를 명령했다.[24]
발렌시아 귀족들은 노동자들을 잃으면 농업 수입이 크게 줄 것이라며 정부에 항의했다. 정부는 그 대가로 모리스코인들의 몰수된 재산과 영토 일부를 제공했지만, 손실을 보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모리스코인들은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었지만, 그들의 집과 토지는 주인의 소유가 되었다. 추방 전에 집을 불태우거나 파괴하는 것은 사형에 처해졌다.[24]
몇 가지 예외가 있었다. 100가구 중 6가구는 남아 주로 모리스코인이 거주했던 마을의 기반 시설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이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한, 4세 미만의 어린이는 추방이 선택 사항이었으며, 이는 나중에 16세로 확대되었다. 후안 데 리베라 대주교는 이 조치에 강력히 반대했고, 적어도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분리하여 노예로 만들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독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
9월 30일, 첫 추방자들이 항구로 이송되었고, 이들은 여행 경비를 스스로 지불해야 했다.[24] 모리스코인들은 북아프리카로 이송되었는데, 때로는 그들을 침략자로 보고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배에서 소규모 반란이 일어나 추방자들 중 일부가 선원들과의 전투에서 살해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발렌시아에 남아 있던 모리스코인들에게 두려움이 생겼고, 10월 20일 추방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6,000명에 달했고, 외딴 계곡인 아이오라와 무엘라 데 코르테스를 장악했다. 5일 후, 남부 해안에서 1만 5천 명의 반란군이 루가르 계곡을 점령하면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다.[25]
반란군은 11월에 진압되었다. 3개월 만에 11만 6천 명의 모리스코인이 발렌시아에서 북아프리카로 이송되었다. 1610년 초에는 아라곤의 모리스코인들이 추방되었고, 4만 1,952명이 알파케스를 통해 북아프리카로, 1만 3,470명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보내졌다.[25] 격분한 프랑스는 그 대부분을 아그드 항구로 보냈고, 육로를 이용한 사람들에게는 통행료와 해상 운임을 모두 부과했다.[25] 9월에는 카탈루냐의 모리스코인들이 추방되었다. 안달루시아에서도 약 3만 2천 명의 모리스코인이 추방되었다.[25]
카스티야, 엑스트레마두라, 안달루시아(당시 모두 카스티야 연합왕국에 속함)의 모리스코인 추방은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그들은 어느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모리스코인들에게는 가장 귀중한 소지품과 판매 가능한 다른 물건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출국할 수 있는 첫 번째 선택권이 주어졌다. 따라서 카스티야에서는 1611년부터 1614년까지 3년 동안 추방이 지속되었다.
3. 2. 추방 과정
레르마 공작은 후안 데 리베라 발렌시아 대주교의 도움으로 펠리페 3세를 설득하여 모리스코 추방을 결정했다. 리베라 대주교는 모리스코들을 이단자이자 반역자로 여겼으며, 왕에게 모리스코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왕실 재정을 확보할 것을 제안했다. 다만, 모리스코들을 노예로 만들자는 제안은 거부되었다.[15]
1609년 4월 9일, 모리스코 추방 칙령이 서명되었다.[19] 모리스코 인구가 가장 많은 발렌시아에서 추방이 시작되었으며, 준비는 철저한 비밀 속에 이루어졌다. 9월부터 이탈리아 테르시오 대대가 발렌시아의 주요 항구인 알파케스, 데니아, 알리칸테에 주둔했다.[24] 9월 22일, 총독은 칙령 발표를 명령했다. 발렌시아 귀족들은 노동력 손실을 우려하여 추방에 항의했지만, 정부는 모리스코들의 몰수된 재산 일부를 제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모리스코들은 소지품을 가져갈 수 있었지만, 집과 토지는 주인의 소유가 되었다. 집을 불태우는 행위는 사형으로 금지되었다.[24]
예외적으로 100가구 중 6가구는 마을 기반 시설 유지를 위해 남을 수 있었지만, 이 특권을 이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4세 미만 어린이(이후 16세로 확대)는 추방이 선택 사항이었으나, 리베라 대주교는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분리하여 노예로 만들고 기독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
9월 30일, 첫 추방자들이 항구로 이송되어 북아프리카로 보내졌는데, 이들은 여행 경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24] 일부 모리스코들은 현지인들에게 공격받거나, 배에서 반란을 일으켜 살해되기도 했다. 10월 20일,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리스코들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11월에 진압되었다.[25] 3개월 만에 11만 6천 명의 모리스코가 발렌시아에서 북아프리카로 이송되었다.[25]
1610년 초, 아라곤의 모리스코 4만 1,952명이 북아프리카로, 1만 3,470명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보내졌다.[25] 프랑스는 이들을 아그드 항구로 보냈고, 육로 이용자에게는 통행료와 해상 운임을 부과했다.[25] 9월에는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에서 각각 3만 2천 명의 모리스코가 추방되었다.[25]
카스티야의 모리스코 추방은 1611년부터 1614년까지 3년간 진행되었는데, 이들은 1571년 반란으로 분열된 후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 출국을 허용하고 소지품을 판매할 수 있게 했다.
3. 3. 추방의 예외
몇 가지 예외가 허용되었다. 100가구 중 6가구는 남아 주로 모리스코인이 거주했던 마을의 기반 시설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추방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한, 4세 미만의 어린이는 추방이 선택 사항이었으며, 이는 나중에 16세로 확대되었다. 후안 데 리베라 대주교는 이 조치에 강력히 반대했고, 적어도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분리하여 노예로 만들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독교화해야 한다고 로비했다.[24]4. 추방의 결과
모리스코 추방은 발렌시아와 아라곤 경제뿐 아니라 귀족 권력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11] 특히 발렌시아 지역은 모리스코 인구가 많았고,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1609년 모리스코 추방 칙령으로[19] 발렌시아에서만 11만 6천 명의 모리스코인이 북아프리카로 이송되면서,[25] 이 지역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권력 구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자 했던 모리스코들은 주로 이탈리아, 특히 리보르노에서 새로운 터전을 찾았다. 그러나 추방된 모리스코들의 대다수는 무슬림이 지배하는 북아프리카에 정착했다.[11]
4. 1. 경제적 타격
추방은 발렌시아와 아라곤의 경제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권력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모리스코들은 이 지역 귀족들에게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11] 발렌시아 왕국은 아라곤 왕관 내에서 모리스코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는데, 이들은 농민 계층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기독교 인구와는 격리된 채 살았다. 특히 장인 계급 중산층은 모리스코들과의 경제적, 사회적 경쟁으로 인해 적개심을 가졌다.[15]1609년 모리스코 추방 칙령이 서명되면서,[19] 발렌시아에서만 11만 6천 명의 모리스코인이 북아프리카로 이송되었다.[25] 이로 인해 발렌시아 왕국 주민의 33%가 제거되었고, 현재 알리칸테 주 북부의 일부 지역은 사실상 전체 인구를 잃었다. 기반 시설이 붕괴되었고, 기독교 귀족과 지주들은 빚을 지게 되었다. 현금이 부족해진 많은 발렌시아 귀족들은 기독교 소작농의 지대를 인상했지만, 이는 새로운 소작농들이 오는 것을 막았고, 결국 발렌시아의 농업 생산량은 크게 감소했다.[46]
카스티야 의회는 1619년 추방에 대한 평가에서 국가 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45] 이는 카스티야에서는 모리스코 인구가 중요했던 부문에서 경제적 결과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54] 그러나 발렌시아 왕국에서는 농지가 버려졌고, 기독교인들이 채울 수 없는 경제 부문의 공백이 생겼다.[46]
모리스코 인구는 귀족, 군인, 성직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반 노동 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따라서 모리스코 추방은 세수 감소로 이어졌고, 특히 발렌시아와 아라곤은 수십 년 동안 경제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추방은 아라곤 왕관 내에서 권력의 중심을 발렌시아에서 카탈루냐로 이동시키는 데 기여했다.[47] 카탈루냐 귀족들은 모리스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추방의 영향을 덜 받았고,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더 부각될 수 있었다.[56]
4. 2. 사회적 변화
모리스코와 구 기독교인들 사이의 의심과 긴장은 스페인 일부 지역에서는 높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없었다. 일부 모리스코는 영향력과 권력을 가졌지만, 특히 발렌시아와 아라곤에서는 지역 귀족을 위한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종파 갈등이 있던 곳에서는 구 기독교인 공동체가 모리스코의 기독교 신앙을 의심했다. 많은 모리스코는 새로운 기독교 신앙에 헌신적이었으며,[12] 그라나다에서는 많은 모리스코가 기독교 순교자가 되기도 했다.[13] 구 기독교인과 신 기독교인 사이의 적대감은 종교보다는 민족성에 기반한 것이었다.[14]1568~1573년 반란 진압 후, 펠리페 2세는 그라나다의 모리스코들을 다른 지역으로 분산시키도록 명령했다. 이는 모리스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동화를 쉽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이 여전히 널리 행해지고 민족적 긴장이 높았던 발렌시아나 아라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15]
17세기 초, 스페인의 아메리카령으로부터의 금과 보물의 양이 줄어들면서 경제 불황이 닥쳤다. 생활 수준이 낮아지면서 귀중한 일자리를 놓고 모리스코와 구 기독교인 사이의 긴장이 높아졌다.[16]
카스티야 왕국 지역, 특히 안달루시아의 과달키비르 강 계곡 지역의 상황은 달랐다. 이 지역의 모리스코들은 주류 사회에 잘 통합되어 있었고, 많은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버렸으며, 이웃인 구 기독교인들로부터 적대감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이웃들이 추방 시도로부터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다.[15]
그러나 당시 또 다른 모리스코 공동체가 공존했는데, 알푸하라스 봉기 이후 추방되거나 흩어진 그라나다 출신 모리스코들이었다. 이들은 더 많은 의심을 받았다. 카스티야와 안달루시아에서는 모리스코를 식별하고 추방하려는 노력이 소극적이었다. 추방은 아라곤 왕국, 특히 발렌시아보다 느리고 덜 철저했으며, 상당수의 모리스코들이 추방을 피하거나 돌아왔다.[15]
발렌시아 왕국은 아라곤 왕국 내 모리스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상황은 카스티야와는 매우 달랐다. 발렌시아 모리스코들은 무지한 농민 계층의 대다수였고, 기독교 인구와는 격리된 채 살았다. 특히 장인 계급 중산층으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경쟁이 그들에 대한 적개심의 주요 원인이었다.[15] 이러한 적개심은 1520년 형제단의 반란에서 이미 표면화되었다. 1525년, 카를 5세는 강제 개종을 옹호함으로써 발렌시아 모리스코들을 만들었다. 발렌시아 모리스코들의 고난은 오랜 기간 이어져 온 기독교 이웃들의 적대감 때문에 추방 기간 동안 최악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이 위협이라는 데 대해 전국적인 합의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이었던 모리스코들에게 이것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왕실 고문이었던 프레이 루이스 데 알리아가와 같은 일부 성직자들은 모리스코들에게 동화될 시간을 주는 것을 지지했다.[15] 이러한 선택지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약하게 지지되었다. 모리스코들을 가장 열렬히 옹호한 사람들은 발렌시아와 아라곤 귀족들이었는데, 그들의 사적 이익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귀족들은 모리스코들이 제공하는 값싸고 저렴한 노동력으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견해에 반대한 사람들은 다양한 저명 인사들과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알리아가에 반대한 성직자들에는 발렌시아에서 가장 저명한 종교재판원이었던 하이메 블레다가 포함되었다. 블레다는 펠리페 3세에게 추방이나 대량학살을 권고하기도 했다.[15] 레르마 공작은 모리스코들이 바르바리 해적들과 공모했다고 비난했다.[16]
인문주의자 페드로 데 발렌시아는 1605년 말이나 1606년 초에 모리스코에 관한 논문을 저술했다. 그의 ''에스파냐 모리스코에 관한 논문''(Tratado acerca de los Moriscos de España)은 필리페 3세의 사제인 --의 요청으로 쓰여졌다.[20] 그는 림피에사 데 상그레(순혈)를 폄하하며 스페인인의 피가 무어인의 피와 섞여 오염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21] 그는 추방이 부정의하고 비그리스도교적이며 탐욕과 증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22] 그는 코란이 거짓된 책이며 무슬림들이 ''타키야''(전략적 거짓말)에 가담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모리스코 문제에 대해 동화를 선호했다.[20]
레르마 공작은 결국 발렌시아 대주교 후안 데 리베라의 도움을 받아 펠리페 3세를 설득했다. 리베라 대주교는 모리스코인들을 이단자이자 반역자로 간주했다. 대주교는 국왕에게 모리스코인들의 자산과 재산을 몰수하여 왕실 재정에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는 계획을 추가했다. 리베라 대주교는 또한 국왕에게 모리스코인들을 노예로 삼을 것을 촉구했지만,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15]
1609년 4월 9일, 모리스코인들을 추방하는 칙령이 서명되었다.[19] 정부는 모리스코 인구가 가장 많은 발렌시아에서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준비는 철저한 비밀 속에서 이루어졌다. 9월부터 이탈리아에서 테르시오 대대가 도착했다.[24] 9월 22일, 총독은 칙령 발표를 명령했다. 발렌시아 귀족들은 추방에 항의했는데, 노동자들을 잃으면 농업 수입이 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그 대가로 모리스코인들의 몰수된 재산과 영토 일부를 제공했지만, 손실을 보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모리스코인들은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있었지만, 그들의 집과 토지는 주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전에 집을 불태우거나 파괴하는 것은 사형에 처해졌다.[24]
몇 가지 예외가 허용되었다. 100가구 중 6가구는 남아 기반 시설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4세 미만의 어린이는 추방이 선택 사항이었다. 이는 나중에 16세로 확대되었다. 리베라 대주교는 이 조치에 강력히 반대했고, 적어도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분리하여 노예로 만들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독교화해야 한다고 로비했다.[24]
9월 30일, 첫 추방자들이 항구로 이송되었고, 여행 경비를 스스로 지불해야 했다.[24] 모리스코인들은 북아프리카로 이송되었는데, 때로는 그들을 침략자로 보고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배에서 소규모 반란이 일어나 추방자들 중 일부가 선원들과의 전투에서 살해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발렌시아에 남아 있던 모리스코인들에게 두려움이 생겼고, 10월 20일 추방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6,000명에 달했고, 외딴 계곡인 아이오라와 무엘라 데 코르테스를 장악했다. 5일 후, 남부 해안에서 1만 5천 명의 반란군이 루가르 계곡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다.[25]
반란군은 11월에 진압되었다. 3개월 만에 11만 6천 명의 모리스코인이 발렌시아에서 북아프리카로 이송되었다. 1610년 초에는 아라곤의 모리스코인들이 추방되었고, 4만 1,952명이 알파케스를 통해 북아프리카로, 1만 3,470명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보내졌다.[25] 프랑스는 그 대부분을 아그드 항구로 보냈고, 육로를 이용한 사람들에게는 통행료와 해상 운임을 모두 부과했다.[25] 9월에는 카탈루냐의 모리스코인들이 추방되었다. 안달루시아에서도 약 3만 2천 명의 모리스코인이 추방되었다.[25]
카스티야, 에스트레마두라, 안달루시아의 모리스코인 추방은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그들은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모리스코인들에게는 가장 귀중한 소지품과 판매 가능한 다른 물건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출국할 수 있는 첫 번째 선택권이 주어졌다. 따라서 카스티야에서는 1611년부터 1614년까지 3년 동안 추방이 지속되었다.
모리스코 추방의 성공 여부는 스페인에서 모리스코 인구를 완전히 제거했는지에 대한 평가로, 최근 학계에서 재검토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판단하기 매우 어렵다. 추방 이전 스페인에 거주하던 모리스코의 수에 대한 추정치조차도 다양하다.[25]
최근의 여러 조사 연구들은 스페인에서 모리스코 인구를 제거하는 데 있어 추방의 성공이라는 전통적인 담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많은 현대 연구들은 특히 카스티야와 아라곤이라는 두 개의 주요 스페인 왕국 내에서 추방의 성공 여부가 매우 다양했음을 결론지었다. 2007년 트레버 J. 대드슨은 모리스코의 최대 40%(약 20만 명)가 스페인을 떠나지 않았고, 추방된 사람들 중 최대 7만 명이 귀환했다고 추산했다. 대드슨은 스페인 전역에서 모리스코들이 비모리스코들에게 보호와 지원을 받고 북아프리카, 포르투갈 또는 프랑스에서 원래 마을로 집단적으로 돌아온 유사한 사건의 많은 예를 제시한다.[4]
안달루시아의 추방에 대한 유사한 연구는 이것이 비효율적인 작전이었으며, 지방 당국과 주민들의 저항으로 심각성이 크게 감소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북아프리카에서 끊임없이 귀환하는 사람들의 흐름을 강조하며, 왕실령으로 인해 무슬림 지역에 머무는 동안 이슬람으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던 현지 종교 재판소에 딜레마를 만들었다. 펠리페 4세의 즉위 후, 새 왕은 귀환자들에게 조치를 부과하려는 시도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628년 9월 최고 종교 재판소 평의회는 세비야의 종교 재판관들에게 "중요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추방된 모리스코들을 기소하지 말라고 명령했다.[26]
2012년에 발표된 한 조사는 그라나다 지방에만 남아 1571년 스페인 다른 지역으로의 초기 추방과 1604년 최종 추방을 모두 피해 살아남은 수천 명의 모리스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모리스코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왕실 칙령을 피해 그들의 진정한 출신을 숨겼다. 더욱 놀랍게도, 17세기와 18세기에 이 집단의 상당 부분이 비단 무역을 장악하고 약 100개의 공직을 차지하면서 큰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혈통의 대부분은 혼인제한 관행에도 불구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 완전히 동화되었다. 1727년 종교 재판소는 활동적인 비밀 무슬림들의 핵심 집단을 기소했고,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았다. 이 유죄 판결자들은 18세기 후반까지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했다.[27]
카탈루냐 저지대 에브로 강의 많은 모리스코들은 공식적으로 추방에서 제외되었고, 카탈루냐 기독교 사회에 매우 잘 통합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마을에 남았고, 추방된 일부는 돌아왔다.[28]
모리스코 추방에 관한 칙령 후 수세기 동안 스페인에서 비밀 무슬림들이 계속 존재했지만, 이슬람은 19세기까지 서서히 사라졌는데, 이는 이슬람이 은폐되도록 강요되었기 때문이다.[29]
많은 모리스코들은 1609년부터 1620년대까지, 특히 갈라타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의 여러 지역에 정착했다.[30]
4. 3. 권력 구조 변화
추방은 발렌시아와 아라곤의 경제뿐만 아니라 귀족의 권력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한동안 이전의 아라곤 왕국은 더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카스티야 왕국의 그늘에 있었다. 그러나 이 모리스코 추방으로 발렌시아와 아라곤의 성장은 더욱 감소했다. 이베리아 반도 동부 왕국 중, 카탈루냐 귀족은 이제 탁월했고, 그들의 수입은 위의 두 국가보다 모리스코 추방의 영향을 훨씬 덜 받았다. 이처럼 모리스코 추방은 발렌시아와 아라곤의 전통적인 경제 중심지에서 카탈루냐로 권력을 이동하는 데 기여했다.[56]단호하게 가톨릭 신자로 남기를 원했던 모리스코들은 대개 이탈리아(특히 리보르노(Livorno))에서 새로운 터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추방된 사람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슬람교도가 장악하고 있는 북아프리카에 정착했다.
4. 4. 모리스코들의 정착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자 했던 모리스코들은 주로 이탈리아, 특히 리보르노에서 새로운 터전을 찾았다. 그러나 추방된 모리스코들의 대다수는 무슬림이 지배하는 북아프리카에 정착했다.[11]5. 현대의 재조명
스페인이 추방된 유대인 후손들의 스페인 시민권 취득을 쉽게 하려는 정책을 펼치자, 무슬림들 사이에서 모리스코 후손에게도 비슷한 정책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6년 안달루시아 의회[48]가 이러한 요구를 지지했지만, 더 큰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5. 1. 유전학적 연구

스페인의 모리스코는 북아프리카에서 온 여러 무슬림 정복자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인구 유전학은 모리스코가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 혈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보지만,[31] 수 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며 혼인 관계를 맺은 후에는 다른 스페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32][4] 이러한 이유로 현대 인구에서 모리스코 혈통을 확인하려는 연구는 북아프리카의 현대 모리스코 후손들 사이에서 이베리아 또는 유럽 유전자 마커를 찾고,[33] 현대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 북아프리카 유전자 마커를 찾는다.[8]
최근 여러 유전학 연구는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아프리카의 영향이 다른 유럽 지역[34] 및 인구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35][36][37] 스페인인의 약 5%는 북아프리카인 또는 베르베르인의 특징적인 해프로그룹인 E-M81 Y-해프로그룹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지배와 관련이 있다.[38] 이베리아 반도에서 비교적 높은 빈도를 보이는 일반적인 북아프리카 유전자 마커는 Y 염색체 E1b1b1b1 (E-M81),[39][40][41] 그리고 mtDNA 해프로그룹 L과 U6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북아프리카 혼혈은 반도의 남쪽과 서쪽에서 증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안달루시아,[42] 엑스트레마두라 및 카스티야 북서부 일부 지역에서 가장 높다. 북아프리카 마커의 분포는 스페인 북동부와 바스크 지방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8] 스페인에서 혼혈의 불균일한 분포는 특정 지역의 이슬람 식민화 범위와 강도, 스페인 여러 지역에서 모리스코 추방 시도 성공 수준의 차이,[8] 그리고 16세기와 17세기 동안의 강제 및 자발적인 모리스코 인구 이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43]

북아프리카에서 모리스코 후손을 추적하는 것과 관련하여, 마그레브 지역의 모리스코 출신 인구에 대한 유전 연구는 거의 없었지만, 모로코 인구에 대한 연구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입된 최근의 유전적 유입이 상당히 감지되지 않았다. 다양한 튀니지 민족 집단에 대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안달루시아인으로 자칭하는 집단을 포함하여 모든 집단이 토착 북아프리카인이었다.[33]
터키에서는 1609년부터 1620년대 사이에 갈라타에 모리스코가 정착한 결과로 모리스코의 Y-DNA와 mt-DNA가 발견된다.[44]
2008년에 실시된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모리스코를 조상으로 둔 사람들이 스페인에 남아 있는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추방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북아프리카 출신(10.6%)을 조상으로 둔 평균 비율이 높은 것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높은 수준의 종교적 개종(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회적·종교적 편견의 역사적 사건에 의해 몰리고, 결국 자손의 동화에 이르렀다.[57][58]
5. 2. 시민권 부여 논의
스페인이 스페인 시민권 취득을 용이하게 하려는 정책에 대한 반응으로, 무슬림들 사이에서 모리스코 후손들에게도 유사한 정책을 적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2006년 이러한 요구는 안달루시아 의회[48]의 지지를 받았지만, 더 폭넓은 지지는 얻지 못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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