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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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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인길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공민왕을 원나라에서 호종하며 일등공신이 되었고 병부상서까지 올랐다. 친원 세력 제거, 홍건적 격퇴, 제주 목호의 난 평정에 기여했으나, 신돈 집권기에 유배를 겪었다. 이후 이인임과의 갈등으로 여러 차례 유배되었으며, 조선 개국 후 고향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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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인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목인길
원어명睦仁吉
출생일1317년
직책고려국 병부상서 겸 대호군
임기1356년 2월 29일 ~ 1359년 9월 2일
사망일1392년 9월 30일 (향년 76세)
경력문하찬성사 역임
본관사천
부모아버지 목충달
군주고려 공민왕 왕기
정당무소속

2. 생애

목인길은 낭장동정(郞將同正) 목효기(睦孝基)의 6세손이며, 진사 목충달(睦忠達)의 둘째 아들이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고향인 사천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묘소는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수청리 산47번지 이구산(尼丘山)에 있다.

2. 1. 초기 활동

공민왕원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할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하여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거듭 승진해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었다.[1]

1356년(공민왕 5)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친원파(親元派) 기철(奇轍) 일파를 제거하였다.[1]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쪽으로 피난갈 때 호종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했다.[1]

목인길은 평소에 전법판서(典法判書) 이자송(李子松)과 원한이 있었다. 이자송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도당(都堂)이 전별(餞別)하자 목인길이 술에 취해 이자송의 멱살을 붙잡고 꾸짖었다. 1362년 감찰사(監察司)가 목인길을 탄핵하니 목인길이 왕에게 대관(臺官)을 고소하였으며 전법사가 재차 탄핵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간관(諫官) 전록생(田祿生) 등이 상소를 올리자 왕이 어쩔 수 없이 목인길을 사성군(泗城君)으로 책봉하여 전리(田里)로 보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어 목인길에게 채색 비단 2필을 하사하였다.[1]

2. 2. 권문세족과의 갈등

목인길은 평소 전법판서(典法判書) 이자송(李子松)과 원한이 있었다. 1362년 이자송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도당(都堂)에서 전별(餞別)할 때, 목인길이 술에 취해 이자송의 멱살을 붙잡고 꾸짖었다.[1] 감찰사(監察司)가 목인길을 탄핵하자, 목인길은 왕에게 대관(臺官)을 고소하였고 전법사가 재차 탄핵하였으나 왕은 들어주지 않았다.[1] 간관(諫官) 전록생(田祿生) 등이 상소를 올리자 왕은 어쩔 수 없이 목인길을 사성군(泗城君)으로 책봉하여 전리(田里)로 보냈다. 왕은 사람을 보내 목인길에게 채색 비단 2필을 하사하였다.[1]

1363년 흥왕사의 변 이후 다시 발탁되어 기용되었다.[1] 어느 날 상의(商議) 김귀(金貴)가 목인길보다 지위가 낮았으나 먼저 문서에 서명했다.[1] 목인길은 김귀가 자기보다 먼저 서명한 것에 화가 나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1] 평리(評理) 최영(崔瑩)이 노하여 왕에게 아뢰어 서명을 하게 하였으나, 목인길은 왕의 총애를 믿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1]

2. 3. 신돈과의 관계 및 유배

1365년 신돈이 집권한 후, 최영 등 그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축출되었다. 그러나 목인길은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신하로 있었고, 무인 출신이라 학식이 없어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내버려졌다. 하지만 어느 날 목인길이 야간 순찰 중 어떤 자가 노국공주의 종형 카라부카(哈刺不花)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카라부카의 집을 수색하려 했다. 카라부카는 이를 왕에게 호소했다. 이때 신돈은 목인길이 자신의 거짓말을 왕에게 보고할까 우려하던 중이었고, 왕이 노한 기회를 틈타 목인길을 참소하여 전주로 유배 보냈다. 이전에 목인길을 참소했을 때 "목인길은 원로라서 작은 실수를 가지고 쫓아낼 수 없다"고 변호했던 임군보 역시 목인길과 같은 날에 유배되었다.[1]

1367년 목인길은 오인택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고 꾀했으나, 이 계획이 누설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찬성사에 기용되었다.[1]

2. 4. 복귀 및 왜구 토벌

1367년 오인택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청주로 유배되었으나, 이후 찬성사로 복귀하였다.[1] 1374년 제주도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가 되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당시 왕은 최영을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로, 염흥방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이희필과 변안렬을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로, 목인길과 임견미를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로, 지윤나세를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로, 김유를 삼도조전원수 겸 서해·교주도도순문사(三道助戰元帥 兼 西海·交州道都巡問使)로 삼아 전함 314척과 사졸 25,600명을 거느리고 목호의 난을 토벌하게 하였다.

1379년 목인길이 도당에 근무할 때, “왜적이 제멋대로 침략해오는 판에, 우리들이 제 배만 불리고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자 이인임은 그 말이 자기를 비판하는 말이라고 여겨 목인길을 전라도의 왜적을 공격하도록 보냈다.

2. 5. 이인임과의 갈등 및 최후

1377년(우왕 3)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된 목인길은 지윤(池奫)과 더불어 이인임(李仁任), 경복흥(慶福興), 최영(崔瑩) 등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2] 그러나 이인임에게 밀고하여 지윤과 그 족당은 모두 붙잡히게 되었다. 목인길은 이준(李竴), 이전(李竱)과 토지 문제로 다투다가 사이가 틀어졌는데, 지윤이 처형되자 지윤의 당여로 무고되어 순군에 갇혔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1379년 목인길이 도당에 근무할 때, “왜적이 제멋대로 침략해오는 판에, 우리들이 제 배만 불리고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자, 이인임은 그 말이 자기를 몰아세우는 말이라고 여겨 목인길을 전라도의 왜적을 공격하도록 보냈다.

1380년 대사헌(大司憲) 우현보(禹玄寶) 등이 목인길이 반역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무고하여 탄핵하니, 관직이 삭탈되어 유배되었다.[3]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풀려나 고향인 사천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묘소는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수청리의 산47번지 이구산(尼丘山)에 있다.

3. 평가

목인길에 대한 평가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고려사에는 그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지 않아, 그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파편적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은 목인길에 대한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들을 통해 목인길의 삶과 활동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공민왕 대의 개혁 정치에 참여하여 권문세족과 맞서 싸웠던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친원파 숙청과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목인길은 권력을 남용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러한 점은 그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역사적 평가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목인길은 공민왕 대의 개혁 정치에 기여한 공과 권력 남용이라는 과를 동시에 지닌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공과 과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것이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에 중요할 것이다.

참조

[1] 서적 고려사 권제40 세가제40 공민왕 15년(1366년) 4월 24일 을해
[2] 서적 고려사 권133 열전 권제46 신우(禑王) 3년 4월 http://db.history.go[...]
[3] 서적 고려사 권114, 열전27 http://db.history.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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