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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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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고고자는 백제가 왜에 파견한 기술자 중 한 명으로, 아스카데라 건축에 참여했다. 588년, 백제는 왜의 요청에 따라 아스카데라 건축을 위해 다라미타를 비롯한 기술자들을 파견했으며, 문고고자는 이들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문고고자를 포함한 백제 기술자들이 이란계 호인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당시 백제가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주변국에 전파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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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고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문고고자
원어명文賈古子
국적백제
직업아스카데라 건설가
생애
출생미상
사망미상
주요 건축물
건축물아스카데라
참고 문헌
참고 문헌스즈키 야스타미, 1994-11-01, 아사히 일본 역사 인물 사전, 아사히 신문 출판, ISBN 4023400521
이토 요시노리, 2001-10-01, 조로아스터교 논집, 헤이카와 출판사, ISBN 4892033154, page 167

2. 생애

588년(백제 위덕왕 35년), 백제는 의 요청에 따라 아스카데라(飛鳥寺, 호코지) 건축을 위해 다라미타를 비롯한 여러 기술자를 파견하였다.[3]일본서기』 숭준 원년 조에는 588년 (위덕왕 35년)에 은솔 수신, 덕솔 개문, 나솔 복부미신 등 수신사의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 사공 다라미타,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과 함께 백제왜국에 공헌했다고 전한다.[3] 호코지는 백제가 제공한 기술자들의 기술을 바탕으로 조영되었다.[1]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복원된 인명의 원어에 차이가 있지만, 백제왜국에 공헌한 사공 다라미타, 문고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 기술자들이 모두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한다.[7][8][3]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세적 사정으로 인해,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4]양서』 열전 동이조의 신라에 관한 기술에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후에야 통한다"라고 하여,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는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4] 백제가 중국강남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지만[5],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페르시아) 호인, 아랍인 상인들이 진출했고,[6] 호코지의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기술자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거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7][8][1]

정교원은 "오늘날에는, 내선 인간의 씨명 등이 현저하게 상이하여, 마치 혈족적 교섭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고대 이전에는 성명도 양자 간에 거의 동일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소가가가 일본 최초의 사찰로서 건립한 호코지의 공사를 위해 백제에서 불렀던 기술자, 즉 다라미타, 문가고자의 성명과 같이, 또 와공 마나문노성명왕 시대에 일본에 사신으로 온 기신내솔미마사, 물부시덕마기무, 하부아사비다와 같이, 또 백제 멸망 때의 장군 귀실복신과 같이, 모두 지금의 조선식 성명과는 전혀 다르고, 오히려 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9]

2. 1. 아스카데라(飛鳥寺) 건축 참여

588년, 백제 위덕왕은 아스카데라 건축을 위하여 여러 기술자를 왜에 파견하였으며, 사공(寺工)인 다라미타 역시 이때 왜에 파견되어 아스카데라 창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3]일본서기』 숭준 원년 조에는 588년 (위덕왕 35년)에 은솔 수신, 덕솔 개문, 나솔 복부미신 등 수신사의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 사공 다라미타,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과 함께 백제왜국에 공헌했다고 전한다.[3] 호코지는 백제가 제공한 기술자들의 기술을 바탕으로 조영되었다.[1]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복원된 인명의 원어에 차이가 있지만, 백제왜국에 공헌한 사공 다라미타,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 기술자들이 모두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한다.[7][8][3]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세적 사정으로 인해,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4]양서』 열전 동이조의 신라에 관한 기술에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후에야 통한다"라고 하여,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는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4] 백제가 중국강남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지만[5],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페르시아) 호인, 아랍인 상인들이 진출했고,[6] 호코지의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기술자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거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7][8][1]

정교원은 "오늘날에는, 내선 인간의 씨명 등이 현저하게 상이하여, 마치 혈족적 교섭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고대 이전에는 성명도 양자 간에 거의 동일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소가가가 일본 최초의 사찰로서 건립한 호코지의 공사를 위해 백제에서 불렀던 기술자, 즉 다라미타, 문가고자의 성명과 같이, 또 와공 마나문노성명왕 시대에 일본에 사신으로 온 기신내솔미마사, 물부시덕마기무, 하부아사비다와 같이, 또 백제 멸망 때의 장군 귀실복신과 같이, 모두 지금의 조선식 성명과는 전혀 다르고, 오히려 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9]

3. 백제-왜 교류와 다라미타

588년(위덕왕 35년) 일본서기 숭준 원년 조는 은솔 수신, 덕솔 개문, 나솔 복부미신 등 수신사의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 사공의 다라미타,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과 함께 백제왜국에 공헌했다고 전한다.[3] 이러한 백제가 제공한 기술자들의 기술을 얻어 호코지가 조영되었다.[1]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복원된 인명의 원어에 차이가 있지만, 백제왜국에 공헌한 사공 다라미타, 문가고자, 노반 박사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양귀문, 㥄귀문, 석마제미, 화공 백가, 양고 등 기술자들은 모두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7][8][3]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비교해도 중국남조와의 교섭이 활발했고, 황해를 건너면 가깝다는 지세적 사정으로 인해, 중국남조로부터의 도래인도 많았다.[4]양서』 열전 동이조의 신라에 관한 기술에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후에야 통한다"라고 하여,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는 백제인을 통역으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4] 백제가 중국강남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도 분명하지만[5], 중국남조에는 이른 시기부터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 아랍인 상인들이 진출했고[6], 호코지의 조영에 참여한 백제의 기술자들도, 그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이른 이란계 (페르시아) 호인이거나, 그 자손으로 보인다.[7][8][1]

정교원은 "오늘날에는, 내선 인간의 씨명 등이 현저하게 상이하여, 마치 혈족적 교섭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고대 이전에는 성명도 양자 간에 거의 동일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소가가가 일본 최초의 사찰로서 건립한 호코지의 공사를 위해 백제에서 불렀던 기술자, 즉 다라미타, 문가고자의 성명과 같이, 또 와공 마나문노성명왕 시대에 일본에 사신으로 온 기신내솔미마사, 물부시덕마기무, 하부아사비다와 같이, 또 백제 멸망 때의 장군 귀실복신과 같이, 모두 지금의 조선식 성명과는 전혀 다르고, 오히려 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9]

3. 1. 다라미타의 출신 배경 (논란)

588년(위덕왕 35년) 일본서기 숭준 원년 조에는 은솔 수신, 덕솔 개문, 나솔 복부미신 등 수신사의 일행으로 혜총 등 승려들과 함께 사공 다라미타를 비롯한 여러 기술자들이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갔다고 기록되어 있다.[3] 이들의 기술은 호코지 건립에 사용되었다.[1]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다라미타를 포함하여 아스카데라 건립에 참여한 백제 기술자들이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7][8][3] 백제고구려, 신라에 비해 중국남조와 교류가 활발했고,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중국남조 출신 도래인이 많았다.[4] 양서에는 중국인이 신라인과 대화할 때 백제인을 통역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백제는 중국강남과 밀접하게 교류했다.[4] 인도 승려 마라난타동진에서 불교를 전래한 것도 이러한 교류의 증거이다.[5] 중국남조에는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아랍인 상인들이 일찍부터 진출해 있었고,[6] 아스카데라 건립에 참여한 백제 기술자들은 이러한 경로로 백제에 온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거나 그 후손으로 추정된다.[7][8][1]

정교원은 다라미타 등의 성명이 백제식이 아닌 일본식에 가깝다고 주장하며, 고대 한일 간 인적 교류가 활발했음을 강조했다.[9]

4. 평가

다라미타는 백제의 우수한 건축 기술을 일본에 전파하여 동아시아 건축 문화 교류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3][1] 일본서기에 따르면, 588년(위덕왕 35년) 백제는 왜국에 승려, 사공, 노반 박사, 와박사, 화공 등 다양한 기술자를 파견했는데, 다라미타는 사공으로서 호코지 건설에 참여하였다.[3][1]

이토 요시노리, 이모토 에이이치 등은 다라미타를 비롯한 백제 기술자들이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라는 점에 주목한다.[7][8] 백제는 중국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인도 승려 마라난타를 통해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일 정도로 인도와도 교류가 있었다.[5] 당시 중국남조에는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아랍인 상인들이 진출해 있었고,[6] 다라미타와 같은 백제 기술자들은 이러한 경로를 통해 백제에 온 이란계(페르시아) 호인이거나 그 후손으로 추정된다.[7][8][1] 이는 백제가 단순히 중국 문화를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역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고 주변국에 전파하는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정교원호코지 건설에 참여한 백제 기술자들의 이름이 당시 조선식 성명과 다르고 오히려 일본식에 가깝다는 점을 언급하며, 고대 한일 간 인적 교류의 밀접성을 강조했다.[9]

참조

[1] 서적 太良未太 朝日新聞出版 1994-11-01
[2] 서적 ゾロアスター教論集 平河出版社 2001-10-01
[3] 뉴스 欽明朝に来日した百済の医師王有稜陀について 日本医史学会 1983-10
[4] 서적 "鳥羽之表"事件の背景 愛知県立大学 2008
[5] 서적 百済仏教史序説 吉川弘文館 1978-10-01
[6] 서적 正倉院 : 流沙と潮の香の秘密をさぐる 瑠璃書房 1980
[7] 서적 ペルシア文化渡来考―シルクロードから飛鳥へ 岩波書店 1980
[8] 서적 古代の日本とイラン 学生社 1980-01-01
[9] 간행물 内鮮一体の倫理的意義 朝鮮総督府 19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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