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요시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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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가마쿠라 시대의 무장으로, 겐지 가문의 일원이다. 그는 1087년 후3년의 역에 참전하여 형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를 도왔으며, 이후 형부승, 히타치노스케, 가이노카미 등을 역임했다. 요시미쓰는 히타치 헤이시 가문과 혼인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조카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와의 다툼으로 칙감되기도 했다. 그는 1127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다케다 씨, 사타케 씨, 오가사와라 씨 등으로 이어져 지방 무사로 발전했다. 요시미쓰는 무예와 음악에도 능했으며, 대동류합기유술의 개조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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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시미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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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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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미나모토노 요시미쓰 (源 義光) |
이명 | 신라사부로 (新羅三郎) 다테사부로 (館三郎) |
생몰년 | 1045년 ~ 1127년 11월 25일 |
묘소 | 오쓰시 온조지정 가마쿠라시 다이호지 |
신분 | |
시대 | 헤이안 시대 후기 |
씨족 | 세이와 겐지요리요시 류(가와치 겐지) |
관직 | |
관위 | 종5위상 |
관직 | 형부소보 좌위문위 우마노스케 병위위 히타치노스케 가이노카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미나모토노 요리요시 |
어머니 | 다이라노 나오카타의 딸 |
형제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미나모토노 요시쓰나 미나모토노 요시미쓰 가이요 |
배우자 | 가이노카미 도모자네의 딸 외 |
자녀 | 미나모토노 요시나리 사네미쓰 미나모토노 요시키요 모리요시 지카요시 스케요시 아키요시 |
군사 경력 | |
소속 | 미나모토 씨 |
분파 | 가와치 겐지 |
상관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미나모토노 요시쓰나 |
참전 | 후삼년의 역 |
기타 | |
계명 | 선갑원준덕존료 |
2. 생애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아들로, 미이데라에서 원복식을 치러 '신라 사부로'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에노 마사후사에게 생을 배웠고, 기마술과 궁술에 능했다.
간지 원년(1087년), 후3년의 역에서 형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고전하자 조정에 참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관직을 버리고 무쓰국으로 가 요시이에를 도와 가나자와 책에서 기요하라노 다케히라, 이에히라와 싸웠다. 다케히라의 항복 의사를 요시이에가 거부하여 전투는 계속되었고, 결국 가나자와 책이 함락되어 다케히라와 이에히라는 처형되었다.
교토로 돌아온 후, 히타치 헤이씨와 혼인하여 세력을 키웠다. 가쇼 원년(1106년) 조카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와 영토 분쟁으로 전투를 벌여 함께 벌을 받았다.
덴닌 2년(1109년), 요시이에의 뒤를 이은 미나모토노 요시타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미나모토노 시게자네가 의심받았으나, 이후 요시미쓰의 노토(가신)였던 후지와라노 스에카타에게 혐의가 돌아 스에카타는 자결했다. 이 사건의 배후에 요시미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진상은 불분명하다.
다이지 2년(1127년) 10월 20일 사망하였다.
2. 1. 출생과 초기 활동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988-1075)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였다. 미이데라 사찰의 신라 선진도 홀에서 원복 의식을 치른 것에서 유래한 별명인 '''신라 사부로'''(新羅 三郎)라고도 불렸다.[1] 그의 법명은 '''센코인 슌토쿠 손료'''(先甲院峻徳尊了)였다. 오에노 마사후사는 요시미쓰에게 생을 가르쳤다. 그는 기마술과 궁술에 능했다.다이토류의 초기 역사에 따르면, 요시미쓰는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해부하여 급소 타격(''큐쇼지츠'') 및 관절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연구했다. 다이토류는 요시미쓰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오미국(오늘날의 시가현)의 "다이토"라는 저택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2. 2. 후삼년의 역 참전
간지 원년(1087년),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오슈 지방으로 가기 위해 조정에 요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무쓰국(陸奥国)으로 내려가 맏형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와 합류했다.[4] 요시미쓰는 요시이에를 도와 가나자와 책에서 기요하라노 다케히라 ・ 이에히라를 공격했다. 다케히라가 요시미쓰에게 항복 의사를 전했을 때, 요시미쓰는 이를 받아들여 교섭을 진행하려 했으나 요시이에는 거절했다. 요시미쓰는 자신의 노토(郎党)인 후지와라노 스에카타를 대신 보내 교섭했으나, 요시이에는 끝내 항복을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했다. 결국 가나자와 요새는 함락되었고, 다케히라와 이에히라는 사로잡혀 처형되면서 전쟁은 끝났다.[5][6]2. 3. 가와치 겐지 내부 갈등
간지 원년(1087년), 고삼년의 역에서 맏형 요시이에가 기요하라노 다케히라·이에히라에게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에 요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무쓰국으로 향했다. 요시미쓰는 요시이에와 함께 가나자와 책에서 다케히라·이에히라와 싸웠지만, 다케히라가 항복하려 하여 요시미쓰에게 연락해왔다. 요시미쓰는 가나자와 책 안으로 협상에 들어가려 했지만 요시이에에게 제지당하고, 대신 낭당인 후지와라노 스에카타를 보냈다. 결국 요시이에가 항복을 거부하여 전투는 계속되었고, 가나자와 책은 함락되어 다케히라·이에히라는 붙잡혀 처형되었다.[2]교토로 돌아온 요시미쓰는 히타치국의 유력 호족인 히타치 헤이씨(요시다 일족)에게서 아내를 얻어 그 세력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어갔다. 가쇼 원년(1106년), 히타치국에 진출해 온 조카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아시카가 씨나 닛타 씨의 시조)와 다투어 전투를 벌였고, 요시쿠니와 함께 칙찬을 받았다.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뒤를 이은 요시타다가 덴닌(天仁) 2년(1109년)에 낭당에게 살해되자(미나모토노 요시타다 암살 사건), 처음에는 미나모토노 시게자네에게 혐의가 갔지만, 이후 혐의는 요시이에의 둘째 동생 요시쓰나의 아들 요시아키와 그 유모부인 후지와라노 스에카타에게도 향하게 되었고, 요시아키와 스에카타는 시라카와 상황의 명을 받은 미나모토노 시게토키에 의해 추포되어 살해되었다. 요시쓰나는 동국으로 도망쳤지만, 시라카와 상황의 명을 받은 미나모토노 미쓰쿠니와 요시타다의 조카 다메요시에 의해 추토되어 코가 산에서 항복하고 사도국으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존비분맥』은 그 배후 인물로 요시미쓰를 지목한다. 낭당인 카시마 사부로에게 명하여 요시타다를 암살하게 하고, 카시마 사부로는 미이데라로 도망쳤지만 요시미쓰와 한패인 동생 가이요 등의 손에 의해 생매장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요시이에 사후의 가와치 겐지 내부의 대립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요시미쓰의 관여를 포함하여 진상은 불명이다.[2]
2. 4. 만년
간지 원년(1087년), 후3년의 역에서 맏형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기요하라노 다케히라·이에히라에게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태정관에 글을 올려 동쪽으로 내려갈 것을 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자 관직을 내놓고 무쓰국으로 내려가 요시이에를 도와 가나자와 요새에서 다케히라 ・ 이에히라를 쳤다. 항복을 결정한 다케히라가 요시미쓰를 통해 이러한 의사를 밝혀왔을 때 요시미쓰 본인도 이를 받아들이고 가나자와 요새의 데와 기요하라 씨 세력과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요시이에는 이를 거절하였다. 요시미쓰는 자신 대신 노토(郎党) 후지와라노 스에카타를 사자로 보내 교섭하였으나 결국 요시이에는 항복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가나자와 요새가 함락되자 다케히라 ・ 이에히라는 탈출에 실패하고 잡혀와 처형되고 전쟁은 끝났다.[2]교토로 돌아온 요시미쓰는 형부승(刑部丞)에 임명되고 히타치노스케(常陸介), 가이노카미(甲斐守)를 거쳐 형부소보(刑部少輔) 종5위상에 이르렀다. 후3년의 전쟁이 끝난 뒤에 요시미쓰는 히타치국의 유력 호족이었던 히타치 헤이씨(吉田 일족)로부터 아내를 맞이하고 그 세력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가쇼 원년(1106년) 뒤늦게 히타치로 진출한 조카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아시카가 씨나 닛타 씨의 시조)[4]와의 다툼으로 전투까지 벌인 끝에 요시쿠니와 함께 조정의 벌을 받았다.
그 해에 맏형 요시이에가 사망하고, 그 계승 다툼에서 요시이에의 맏아들이었던 요시치카가 반란을 일으켰다 사망한 뒤인 덴닌 2년(1109년) 요시이에의 뒤를 이어 겐지의 도료(棟梁)가 된 조카 요시타다가 노토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초 사건의 범인으로 미나모토노 시게자네가 의심되었으나 그 뒤 혐의는 조카 요시아키의 유모의 남편이자 요시미쓰 자신의 노토이기도 했던 후지와라노 스에카타로 향했고, 스에카타는 요시아키와 함께 게비이시와 싸우다 자해, 그 아버지 요시쓰나는 도고쿠(東国)로 달아나다 요시치카의 아들인 다메요시에 쫓겨 가가 산(甲賀山)에서 항복하였다(요시쓰나의 자식들은 전원이 자결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존비분맥》은 그 흑막에 요시미쓰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노토인 가시마 사부로(鹿島三郎)[5]에게 명해 요시타다를 암살하고 가시마사부로는 미이데라로 달아났다가 요시미쓰의 명을 받은 동생 가이요(快誉) 등의 손에 의해 생매장당했다. 이 사건 자체는 요시이에 사후 가와치 겐지 내부의 대립이라는 영향이 강했지만 요시미쓰가 관여했는지의 여부를 비롯해 여러 가지 면에서 진상은 명확하지 않다.[6]
다이지 2년(1127년) 10월 20일 사망하였다.
3. 인물과 평가
요시미쓰는 궁술과 마술 등 무예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음률에도 재능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일본의 고무도(古武道) 중 하나인 대동류합기유술은 요시미쓰를 개조(開祖)로 삼고 있다. 또한 야부사메로 대표되는 궁술, 마술(馬術), 예법(礼法)의 유파인 오가사와라류나 다케다류 등은 옛 무가(武家)의 마음가짐과 형태를 오롯이 전하고 있다.[1] 다케다 씨(武田氏)의 적류(嫡流) 대대로 전해지던 갑옷(盾無)이나 난부 씨(南部氏)에 전해지는 검 기쿠이치몬지(菊一文字) 등이 요시미쓰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황의 명수로 알려진 도요하라노 도키타다(豊原時忠)에게서 비곡을 배우고 명기 하시리마루(交丸)를 얻었는데, 후삼년 전투 당시 형 요시이에를 구원하러 가면서 도키타다와 오사카 산(逢坂山)에서 작별할 때 요시미쓰는 자신이 하시리마루를 잃어버릴 것을 우려하여 이 자리에서 하시리마루를 도키타다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설화집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에 「요시미쓰가 도키타다의 동생인 도요하라노 도키모토(時元)에게서 비곡을 전수받았는데, 도키모토의 아들 도요하라노 도키아키(時秋)가 아시가라 고개(足柄峠)까지 요시미쓰를 뒤따랐을 때, 요시미쓰는 비곡의 명맥이 끊길 것을 두려워해서 산속에서 이를 도키아키에게 전수하였다」라는 이야기로 실리게 되었다.[3]
요시미쓰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 (988-1075)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였다. 그는 또한 '''신라 사부로''' (新羅 三郎)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그가 원복 의식을 치른 미이데라 사찰의 신라 선진도 홀에서 유래한 별명이다. 그의 법명은 '''센코인 슌토쿠 손료''' (先甲院峻徳尊了)였다. 오에노 마사후사는 요시미쓰에게 생을 가르쳤다.
다이토류의 초기 역사에 따르면, 요시미쓰는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해부하여 급소 타격 (''큐쇼지츠'') 및 관절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연구했다. 다이토류는 요시미쓰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오미국 (오늘날의 시가현)의 "다이토"라는 저택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후 히라가(平賀氏), 다케다, 사타케, 오가사와라, 난부, 야나세(簗瀬) 등 재지 무사로 발전하였다.
가와치 겐지 본가에 대해서도 요시미쓰 계통인 가이 겐지(甲斐源氏)의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 ・ 가가미 도야스(加賀美遠光) ・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 등이 일족을 이탈하는 일 없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頼朝)에 합류했기에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요리토모는 그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고, 다케다 노부요시가 실각하고 그 아들인 이치조 다다아키(一条忠頼)가 암살되고 가가미 도야스가 거꾸로 후대되는 등 억압 ・ 분열책 등으로 그들을 막부의 고케닌(御家人)으로 순치시켰다.
한편으로 같은 요시미쓰 계통의 히타치 겐지(常陸源氏)인 사타케 씨는 이들과 달리 헤이케(平家)와 연계해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이후 동부 간토에서 영향력을 떨쳤으나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성립으로 가지고 있던 영지를 몰수당하고 훗날 오슈 전투(奥州合戦)에 참가해 영지를 돌려받기는 했지만 크게 떨치지는 못한 채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까지 이어졌다.
4. 후손과 영향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생황의 명인 도요하라노 도키타다(豊原時忠)에게서 비곡을 전수받고 명기 하시리마루(交丸)를 얻었다. 후3년의 역 때 형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를 구원하러 가면서 도키타다와 오사카 산(逢坂山)에서 작별할 때, 하시리마루를 잃을까 두려워 도키타다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1] 이 일화는 설화집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에 요시미쓰가 도키타다의 동생에게 비곡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로 실려 있다.
요시미쓰는 무예뿐 아니라 음률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일본 고무도(古武道) 중 하나인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気柔術)은 요시미쓰를 개조(開祖)로 삼고 있다. 야부사메(流鏑馬)로 대표되는 궁마군례고실(弓馬軍礼故実)인 궁술, 마술(馬術), 예법(礼法) 유파인 오가사와라류(小笠原流)나 다케다류(武田流) 등은 옛 무가(武家)의 마음가짐을 오롯이 전하고 있다. 다케다씨(武田氏) 적류(嫡流) 대대로 전해지던 갑옷(오오요로이) 다테다시(盾無)나 난부 씨(南部氏)에 전해지는 검 기쿠이치몬지(菊一文字) 등은 요시미쓰에게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시미쓰의 후손들은 히라가씨(平賀氏), 다케다씨(武田), 사타케씨(佐竹), 오가사와라씨(小笠原), 난부씨(南部), 야나세씨(簗瀬) 등 재지 무사로 발전하였다.
가와치 겐지 본가에 대해서도 요시미쓰 계통인 가이 겐지의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 가가미 도야스(加賀美遠光),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 등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頼朝)에 합류하여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요리토모는 그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다케다 노부요시를 실각시키고, 아들 이치조 다다요리(一条忠頼)를 암살하고, 가가미 도야스를 후대하는 등 억압과 분열책으로 그들을 고케닌(御家人)으로 만들었다.
한편, 같은 요시미쓰 계통인 히타치 겐지(常陸源氏) 사타케씨(佐竹氏)는 헤이케(平家)와 연계하여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이후 동부 간토에서 영향력을 떨쳤으나,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성립으로 영지를 몰수당했다. 훗날 오슈 전투(奥州合戦)에 참가하여 영지를 되찾았지만 크게 떨치지 못하고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까지 이어졌다.
5. 연고지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후삼년 전투 (1083–1089)에서의 군사적 공헌으로 가이국(오늘날의 야마나시현)의 지사로 임명되어 그곳에 정착했다.[1]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키요는 다케다씨의 시조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깃발 중 하나는 야마나시현 고슈시의 운포지 사찰에 보관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깃발은 고레이제이 천황이 미나모토노 요시미쓰에게 하사한 것으로, 지난 1,000년 동안 다케다씨의 가보로 여겨져 왔다고 한다.[1]
5. 1. 묘소

시가현 오쓰시 온조지 정(園城寺町)에 묘소가 있다. 요시미쓰가 원복(元服, 관례)를 행했다는 신라선신당의 뒤편이다.[7]
또한 그가 태어난 곳으로 여겨지는 가와치 겐지의 본거지 가와치국 이시카와 군의 쓰바이(壷井, 현재의 오사카부 하비키노시 쓰보이)에 있는 가와치 겐지의 우지가미(氏神)를 모신 사당 쓰보이 하치만구 및 쓰바이 곤겐(壷井権現)에 요시미쓰와 함께 그 조부인 미나모토노 요리노부, 아버지 요리요시, 맏형 요시이에, 둘째 형 요시쓰나가 모셔져 있다. 한편 계명(戒名)은 사타케 가문의 전승에 따르면 '''숭원원전의광존료(崇源院殿義光尊了)'''였다고 한다.
가마쿠라의 다이호지에도 요시미쓰의 묘소가 남아 있다.
5. 2. 신사
'''요시미쓰를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신사''''''요시미쓰와 연고가 있는 신사'''
- 신라 선신당 - 미나모토노 요시미쓰가 관례를 올린 곳이다.
- 이와시미즈 하치만구
- 와카미야 하치만구 (히타치오타시) - 무로마치 시대인 오에이(1400년경) 요시미쓰의 후손인 사타케 요시히토(佐竹義仁)가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로부터 하치만 신을 권청해 와서 이곳에 신사를 지은 이래로 사타케 집안의 기원지가 되었고, 사타케 씨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아키타로 전봉된 뒤에도 계속해서 현지의 수호신으로 모셔졌다.
- 구시히키 하치만구 - 요시미쓰의 후손으로 오슈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난부 미쓰유키(南部光行)가 영지로 받은 땅에 겐큐 2년(1191년) 가이의 난부 향(南部郷)으로부터 하치만 신을 권청해 와서 이 땅에 신사를 지었다고 한다.
- 오토리 신사 (아다치구) - 요시미쓰가 요시이에에게 가담하러 가던 도중에 이 땅에서 전승을 기원하였고 독수리가 나타났다는 전승이 있다.
- 야쿠모 신사 (가마쿠라시 오마치) - 미나모토노 요시미쓰가 권진.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 이시바시 하치만 신사 - 미나모토노 요시미쓰가 권진. 야마나시현 후에후키시
참조
[1]
뉴스
Hinomaru, 'Kimigayo' express conflicts both past and future
http://search.japant[...]
The Japan Times
2007-07-17
[2]
간행물
源義忠の暗殺と源義光
https://yone.repo.ni[...]
山形県立米沢女子短期大学
2009-12
[3]
서적
武田義清・清光をめぐって
西川広平 編著 『甲斐源氏一族』戒光祥出版
2021
[4]
문서
아시카가 씨(足利氏)나 닛타 씨(新田氏)의 선조이다.
[5]
문서
다이라노 나리모토(平成幹)와 이름이 같아서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6]
논문
源義忠の暗殺と源義光
[7]
문서
지금의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하비키노시]](羽曳野市) 쓰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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