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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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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난부 씨는 헤이안 시대 후기에 세이와 겐지의 후손으로 시작된 무가 씨족으로, 가마쿠라 시대에 무쓰국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난부 미쓰유키를 시조로 하며,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으로 활동했다. 남북조 시대와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세력을 키워, 산노헤를 거점으로 북부 무쓰를 장악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원을 받아 모리오카로 거점을 옮기고 모리오카 번을 통치하며 에도 시대를 거쳤다. 메이지 시대에는 백작, 자작 등의 화족을 배출했으며, 현대까지 가계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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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부씨
개요
난부 가문의 문장
난부 가문의 문장
성씨 (한자)南部氏
성씨 (일본어)난부시
가문 문장 이름난부쓰루
본성세이와 겐지(가와치 겐지) 요시미쓰 류
가조난부 미쓰유키
종별무가, 화족 (백작)
출신지가이국고마 군난부 향
근거지무쓰국누카노부 군
모리오카
하치노헤
도쿄간다구
도쿄도요도바시구
도쿄도시부야구
창립 연도1180년
마지막 통치자난부 도시유키
현재 수장난부 도시후미
소멸 연도존속 중
통치 종료1873년 (폐번치현)
가계 분파하치노헤 난부 가
나나노헤 난부 가
도노 난부 가
난부 가메오 가
오우라 씨자칭은 후지와라 씨이지만, 난부 씨족이라는 설이 유력함. 자세한 내용은 쓰가루 다메노부 참조.
가키자키 씨시조인 다케다 노부히로는 와카사 다케다 씨 또는 난부 씨의 흐름을 잇는다고 여겨짐.
교토 난부 씨?
기원
출신 지방가이국
무쓰국
원류미나모토 씨
모가[[File:Sasa Rindo.svg|15px]] 미나모토 씨
시조미나모토노 미쓰유키
주요 인물
인물난부 모로유키
난부 하루마사
난부 노부나오
역대 당주
주요 당주난부 사네미쓰
난부 미쓰유키
난부 도키자네
난부 모로유키
난부 마사미쓰
난부 미쓰마사
난부 하루마사
난부 노부나오
난부 도시나오
난부 시게나오
난부 유키노부
난부 도시모토
난부 도시카쓰
난부 도시타다
난부 도시야스
난부 노부요시
난부 도시미치
난부 도시나가
난부 도시히사
난부 도시마사
난부 도시사다
난부 도시요키
세력
주요 거점누카노부 지방
모리오카 번
하치노헤 번
기타
주요 가신기타 무라사키 가문
구도 씨
나카사토 씨
다이몬 씨
무카이 씨
야나기다 씨

2. 역사

헤이안 시대 말기에 일어난 전9년의 역후3년의 역에서는 세이와 겐지의 도료였던 미나모토노 요리요시 부자가 현재의 모리오카 등에 방문했다. 요리요시와 그의 아들들의 자손에게서 다수의 무가 씨족이 태어났다. 특히 요리요시의 셋째 아들 요시미쓰의 자손에게는 다케다 씨, 가가가미 씨, 야스다 씨, 아사리 씨 등이 있으며, 난부 씨는 가가가미 씨의 방계이다.

오슈 난부 씨의 시조, '''난부 사부로 미쓰유키'''는 세이와 겐지 요시미쓰 류(가이 겐지)의 가가미 지로 도미쓰의 셋째 아들로 여겨지며, 가이 고마군후지강 서안의 난부 마을(현·야마나시현미나미코마군난부정)을 영유하여 난부 사부로를 자칭했지만, 아버지의 관직인 시나노노카미에서 시나노 사부로라고도 불렸다.[32]

미쓰유키의 아들들은, 『존비분맥』에 따르면, 타로 아사미쓰, 지로 사네미쓰, 사부로 유키토모, 고시로 사네나가 4명이다. 그러나 「아키야마 계도」(『속군서류종』)는, 유키토모를 타로, 사네나가를 "난부 파절의 육랑"으로 하여, 고로 유키쓰라를 더한다. 그 중, 미쓰유키의 적자 사네미쓰와 그의 아들 도키자네의 이름은, 쇼군의 시종을 맡는 고케닌으로, 또한 호조 도키요리의 측근으로서, 종종 『아즈마카가미』에 나타난다.[32]

난부 씨의 가문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분지 5년(1189년) 가을의 오슈 헤이세이 공격 때 가가가미 도미쓰 부자 4명이 요리토모의 본진을 따라 후지와라 야스히라 군과의 전투에서 공적을 세우고, 난부 미쓰유키는 무쓰국 누카베 5군의 토지를 하사받아, 겐큐 2년(1191년) 말에 가신 수십 명과 함께 입국했다. 그러나, 하사를 증명하는 것은 없고[33], 확실한 자료에 따르면 난부 씨와 오슈의 관계가 보이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 말기로 여겨진다. 또한 누카베 5군이란 누카베군, 이와테군, 헤이군, 시카군, 쓰가루군 (무쓰국)을 말한다고 여겨지지만, 이것들은 16세기 반에 있어서 난부 씨의 최대 판도와 거의 동일하며, 도요토미 정권에 대해 영토의 정당성과 오우라(쓰가루) 다메노부에 의한 쓰가루 지방 지배가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가문을 조작했다고 생각된다.

난부 씨는 남북조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에 걸쳐 급속히 세력을 뻗쳐, 처음에는 산노헤(현재의 아오모리현산노헤군산노헤정)에 거성을 두고 있었지만, 도요토미 정권을 배경으로 구노헤 마사자네를 진압, 구노헤성을 후쿠오카성(이와테현니노헤시)으로 고쳐 옮겼다. 더욱이 마에다 도시이에 등의 중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헤이군, 와가군, 히에누키군의 지배도 인정받게 되자, 본거지인 산노헤가 영지의 북쪽에 크게 치우치게 되어, 본거지를 현재의 모리오카로 옮겼다.

난부 미쓰유키유키토모rowspan="6" colspan="2" style="text-align:left" |rowspan="6" style="text-align:left" |이치노헤 씨의 조상
사네미쓰산노헤 난부 씨(종가)의 조상
사네나가네조 난부 씨의 조상
아사키요시치노헤・구지 씨의 조상
무네토모요노헤 씨의 조상
유키쓰라구노헤 씨의 조상



난부 종가는 산노헤 난부 씨이며, 난부 미쓰유키의 적자·사네미쓰의 자손이다. 후의 하치노헤 난부 씨의 조상이 되는 하키이 사네나가는 동생이며, 2대 사네쓰구·3대 나가쓰구 이후, 종가 3대 도키자네의 아들 마사유키의 차남 모로유키가 나가쓰구의 딸의 사위가 되어 하키이 가문을 잇게 되었다고 여겨지지만, 사네쓰구·나가쓰구의 이름은 하키이 난부 가문의 이름을 기록한 동시대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치노헤(도노) 난부 가문 문서에는 가마쿠라 시대의 하키이령에 관한 문서는 존재하지 않고, 하치노헤 난부 씨가 하키이 가문의 자손이라고 하는 "하치노헤 가계"는, 교호 4년(1719년) 노부아리의 시대에 하치노헤 가문과 미노부산 구온지와의 교섭을 통해 도노 난부 가문 문서 속에 들어갔다.

2. 1. 기원

난부 씨는 가이국세이와 겐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고산넨 전투 이후 가이국을 하사받았고, 그의 증손자 노부요시는 성씨를 다케다씨로 삼았다. 또 다른 증손자인 미쓰유키는 가이국 내 그의 영지(현재 야마나시현 난부정의 일부)의 이름을 따서 "난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 미나모토노 요시미츠의 현손인 미쓰유키는 고마 군 난부 목(현재의 야마나시현미나미코마군난부정)에 살았기 때문에 난부씨라고 칭했다.

미쓰유키는 이시바시야마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합류했으며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 다양한 중간 직책을 맡았으며, ''아즈마카가미''에 여러 번 언급된다.[1]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미쓰유키, 사네미쓰, 도키자네 3대가 쇼군 가의 수행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1189년 호쿠리쿠 후지와라 정벌에 요리토모와 동행했으며, 혼슈 최북동부의 누카노부 군에서 광대한 영지를 하사받아 현재 아오모리현 난부정에 쇼주지다테 성을 건설했다.[1] 『오난 구시록』에 따르면, 조큐 원년(1219년)의 연말에 난부 미쓰유키가 가족과 가신을 데리고 유이가하마에서 출항하여 누카베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지역은 말 목장이 지배적이었으며, 난부 씨는 군마 공급을 통해 강력하고 부유해졌다.[1] 이 말 목장은 1번부터 9번까지(이치노헤부터 구노헤까지) 번호가 매겨진 요새였으며, 난부 미쓰유키의 여섯 아들에게 하사되어 난부 씨의 6개 주요 분가를 형성했다.[1]

고분 원년(1261년) 및 동 3년의 사네미쓰, 도키자네는 호조 도키요리의 고우치닌 취급을 받았다. 이는 본령인 난부령이 도쿠소령의 스루가 국 후지 군과 인접하고, 또한 호지 전투 (미우라 씨의 난) 후에 누카베 군총지토직이 도쿠소령이 된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

1333년 가마쿠라 막부 멸망 이후 남북조 시대 동안 난부 모토유키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진주후쇼군이자 무쓰국의 ''슈고''로 임명되어 북쪽으로 동행했다.[2] 난부 모토유키는 이 지역의 황실 행정 중심지가 될 네 성을 건설했다. 이는 난부 씨의 거점이 가이국에서 무쓰국으로 공식적으로 이전되었음을 의미한다.[2] 난부 모토유키는 남조에 충성을 다했지만, 동시에 같은 난부 가문의 다른 분가가 라이벌인 북조에 충성을 맹세하며 인근 산노헤정과 모리오카 지역을 다스렸다.[2] 두 씨족은 1393년에 서로 화해했다.

초대 미쓰유키의 오우 입부일이 12월 30일이고, 정월 준비 부족으로 인해, 부득이 12월을 특히 큰 달로 하여 하루를 연장하여 정월 2일을 설날로 했다는 고사에 유래하는 ''''난부의 사대'''' (와타쿠시 다이)가 입부 이후의 전통 행사가 되었다(덧붙여, 에도 시대난부 시게나오 대에 불합리하다고 하여 정규 설날로 되돌렸다[34]).

미쓰유키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유키토모는 서자이므로 이치노헤 씨의 시조가 되었고, 차남인 사네미쓰는 후의 종가인 '''미노 남부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삼남인 사네나가는 하키이 남부씨나 네성 남부씨의 시조가 되었고, 넷째 아들인 아사키요는 시치노헤 씨의 시조, 다섯째 아들인 무네키요는 시노헤 씨의 시조, 여섯째 아들인 유키쓰라는 구노헤 씨의 시조가 각각 되었다.

덧붙여, 미쓰유키의 형인 오가사와라 나가키요는 고마 군 오가사와라 장에 살았으며, 오가사와라 씨의 시조가 되었다.

2. 2. 남북조 시대

난부 무네쓰구[50]는 야하기 전투 이후 "다타라하마 전투" 등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따랐고, 고에이 4년(1345년) 8월 29일에는 덴류지 공양에 수행했다. 그의 동생 지로자에몬노조(무네하루)는 조와 (1348년) 4년 1월 5일의 "시조나와테 전투"부터 형과 함께 고 무사시노카미 모로나오의 수하가 되어, 미나미 오오마모루, 미나미 지로자에몬노조 등으로 남씨 성을 썼으며[51] 태평기에 자주 등장한다.

고무라카미 천황 시대, 조와 5년(1349년) 이후 가이국이 가마쿠라 공방의 아시카가 모토우지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간노의 혼란의 쇼헤이 잇토를 계기로, 다카우지 군에 합류한 가이 난부씨, 기타바타케 아키노부의 남조 군의 일각에서 나오요시파의 기라 사다이에에 합류한 산노헤 난부씨의 난부 노부나가로 추정되는 난부 이요노카미 등이 있었다. 가이의 난부씨 일족은 간노 2년(1351년)부터 아시카가씨 밑에서 싸운 모습이 <태평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난부 타메시게의 적자로 보이는 하키리 도오토미노카미는 "삿타산의 전투"에서, 간노 2년 1351년 12월 27일에 이마가와 세력에 참여했다. 간노 3년(1352년) 2월 25일에는 난부 요시시게의 아들로 여겨지는 난부 히타치노스케는[52] 무사시노 전투에서 가이 겐지 무리의 일원으로, 다케다씨, 오가사와라씨 등과 함께 "후에후키 고개 군"의 장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측에 참여했다.

겐추 9년/메이토쿠 3년(1392년)경,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밀명을 받은 난부 모리유키는 남조를 지지하는 네노시로 난부씨의 난부 마사미쓰를 찾아가 항복을 권고했다. 하키이에 있던 난부 마사미쓰는 남북조 합일에 즈음하여 오슈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노시로 난부씨의 하치노헤로의 본거지 이전 이후, 전반적으로 가이의 난부씨 일족은 쇠퇴하게 되었고, 이치노헤 난부씨 계통으로 여겨지며, 가이 난부씨의 적류로 보이는 난부 기요마사의 계통은 남북조 말기 무렵부터 다케다씨에게 압박받아 오슈로 돌아가지만 내분으로 멸망했고, 소료는 네노시로 난부씨에서 산노헤 난부씨로 넘어갔다고 한다.

2. 3. 센고쿠 시대



24대 당주 난부 하루마사 시대의 난부씨는 북부 무쓰국의 7개 군(누카노부, 헤이, 카즈노, 쿠지, 이와테, 시와, 토노)을 지배했지만, 씨족은 강력한 중앙 권력 없이 경쟁하는 지파의 느슨한 집합체에 가까웠다.[1] 육오(陸奥)에서는 난부 모리유키(南部守行) 이후, 산노헤 난부씨(三戸南部氏)의 제24대 당주인 난부 하루마사가 다른 세력을 제압하고 육오 북부를 장악했다. 하루마사는 적극적으로 세력 확대를 도모하여 "초승달이 둥글게 될 때까지 난부령(南部領)"이라고 칭송받는 난부씨의 최성기를 이룩했다. 하루마사는 중앙의 오다 노부나가와도 친교를 맺는 등 외교를 펼쳤지만, 가신 내부에서는 하루마사와 그의 양자였던 사촌 이시카와 노부나오가 대립하는 등 내홍도 존재했다.

이러한 약점을 오우라 씨가 이용했는데, 오우라 씨는 난부 씨의 방계였다. 1572년에 반란을 일으켰다.[3] 하루마사의 만년에는 난부씨의 일족으로 여겨지는 오우라 다메노부가 거병했다. 오우라 타메노부는 난부씨의 지역 관리인 이시카와 타카노부 아래에서 군다이 호사/郡代補佐일본어였지만, 그는 이시카와를 공격해 죽이고 난부 씨의 성을 점령하기 시작했다.[3] 타메노부는 또한 키타바타케 아키무라 (또 다른 지역 유력자)를 공격하여 나미오카 성을 점령했다.[4] 광대한 난부씨의 영지에서는, 구니진(国人)의 가신화와 중앙 집권화가 그다지 진행되지 않았고 (난부씨의 중앙 집권이 진행된 것은 도시나오의 시대에 들어서부터), 쓰가루 지방의 구니진(国人) 무리, 나미오카 고쇼(浪岡御所) (나미오카 기타바타케씨), 에조(蝦夷) 관령 (히야마 안토씨)의 잔당[58], 이시카와성의 쓰가루 군대(郡代) (이시카와 난부씨) 등은 다메노부에게 각개 격파되었다. 난부 노부나오를 시작으로, 오우라씨의 난부씨와의 싸움은 그 후 2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1582년 난부 하루마사의 사망 후, 씨족은 여러 경쟁 파벌로 분열되었다. 덴쇼 10년 (1582년)에 하루마사, 하루쓰구 부자가 사망하고, 난부 일족 내의 가독 다툼의 결과, 이시카와(난부) 노부나오가 상속하게 되지만, 그 당시에 하루마사 부자는 노부나오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1590년, 난부 노부나오가 이끄는 산노헤 파는 대부분의 난부 씨족의 연합을 조직하여 오다와라성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대가로 그는 난부 씨족의 당주로 인정받았고, (쓰가루를 제외한) 기존 영지의 다이묘로 확정되었다. 덴쇼 18년 (1590년), 난부씨 제26대 당주인 난부 노부나오는 하치노헤 나오에이를 수행하여 병사 1000명을 이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한다. 이는 하치노헤 마사에이 (나오에이의 아버지)가 네조 난부씨가 산노헤 난부씨의 "부용"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오다와라 참전을 포기하고, 영내에서 대립하는 구노헤 마사자네와 오우라 난부씨에 대한 견제를 위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부나오는 그대로 오슈 오시와의 군에 종군하여, 히데요시로부터 우쓰노미야에서, 7월 27일자로 난부의 소령 중 7개 군(郡) (누카베군, 헤이군, 시카군, 쿠지군, 이와테군, 시와군, 그리고 토노보?)에 대한 각서의 주인을 얻는다[59]. 그러나 씨족 당주의 자리에 더 강력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쿠노헤 마사자네가 즉시 반란을 일으켰다.[5] 쿠노헤의 난은 신속하게 진압되었고[6] 히데요시는 쓰가루를 잃은 난부씨에게 보상으로 히에누키와 와가 지역을 추가했다. 다음 해에 구노헤 마사자네가 일으킨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이 도요토미 정권의 손에 진압되고, 실령(失領)했던 쓰가루 3개 군 (히라카군, 하나와군, 이누카이군)의 대체지로 와가군, 히에누키군의 2개 군이 가증(加增)되어, 난부씨는 9개 군 10만 석의 소령이 확정되었다 (실고(実高) 20만 석[60]이라고도 하는 쓰가루 지방에 대해, 와가・히에누키 양 군은 합쳐도 수만 석이기 때문에 하루마사의 전성기보다는 석고(石高)는 대폭 감소하고 있다).

덴쇼 16년 (1588년), 시와군과 이와테 반군(半郡)을 가진 고스이데라(시와 고쇼)와 시즈쿠이시(시즈쿠이시 고쇼 및 이노시리관)의 두 시바씨를 항복시키고, 헤이군에 웅거하는 타노사키의 헤이씨와, 토노보 요코타의 아소누마씨를 신하로 삼았다. 한편 쓰가루 지방, 소토가하마와 누카베군의 일부를 점령한 오우라 다메노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신종하여 소령(所領)을 안도받았기 때문에, 산노헤 난부씨는 원래 불안정했던 오우라 난부씨의 통제를 완전히 잃게 된다. 다만, 구령(旧領)을 몰수당한 와가 요시타다와 히에누키 히로타다는 수차례 유민(遺民)을 봉기시켜, 난부씨를 괴롭혔다 (와가・히에누키 일기). 이키(一揆)의 진압으로 와가 요시타다는 전사, 히에누키 히로타다는 도망했다. 히로타다의 딸은 출가했지만 난부 노부나오에게 눈에 띄어 환속하여, 히에누키 고젠이라고 불리는 측실이 되었다. 한편, 요시타다의 아들 와가 타다치카는 오히려 굴하지 않고, 세키가하라 전투 때 다테 마사무네에게 선동되어, 난부령에 침공했다 (이와사키 일기)[61]. 난부 노부나오는 거점을 산노헤 성에서 보다 중심적인 위치인 모리오카로 옮기고, 1592년에 모리오카 성과 그 주변의 성하 마을 건설을 시작했다.

2. 4. 에도 시대

난부씨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했다.[7] 이에야스의 승리 이후 난부씨는 모리오카번(난부번)의 영주 자리를 확정받았다.[7] 번의 고쿠다카는 공식적으로 10만 코쿠였지만, 에도 시대 후기에 그 양이 두 배로 늘었다.[8] 난부씨는 에도 시대 전체 기간 동안 영지를 유지하며 메이지 유신까지 살아남았다. 1635년(간에이 12년)에는 모리오카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1664년(간분 4년)에는 난부 시게노부가 동생 난부 나오후사에게 2만 석을 분여하여 8만 석으로 줄었으나, 1683년(덴나 3년)에 10만 석으로 복귀했다.

에도 시대 동안 난부씨의 두 개의 새로운 분가가 설립되었는데, 하나는 하치노헤번에,[9] 다른 하나는 시치노헤번에 설립되었다.[10] 하치노헤 번은 1664년(간분 4년)에 난부 시게나오가 동생 난부 나오후사에게 2만 석을 분여하면서 성립되었다. 시치노헤 번은 1819년(분세이 2년)에 난부 노부린 대에 종가에서 6000석을 추가 분여받아 총 1만 1000석으로 성립되었다.

1821년, 난부씨와 쓰가루씨 사이의 낡은 긴장은 소마 다이사쿠 사건으로 다시 불붙었다.[4] 이는 난부씨의 전 가신인 소마 다이사쿠가 쓰가루 영주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었다.[11] 난부씨의 영토는 1830년대 중반의 덴포 대기근의 영향을 받은 지역 중 하나였다.[12]

혼슈 북부의 많은 다른 번과 마찬가지로, 모리오카번은 쇼군에 의해 에조치(현재 홋카이도)의 변경 지역을 감시하는 임무를 받았다.[13] 1808년(분카 5년)에는 에조치 경비로 인해 20만 석으로 영지 조정이 이루어졌다. 난부씨가 외국인과 처음 직접적으로 조우한 것은 16세기 후반으로, 네덜란드 선박 ''브레스켄스''가 난부 영토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 배에서 나온 해안 경비대가 지역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에도로 이송되었다.[14]

보신 전쟁 동안 활약했던 번의 원로(''가로'')인 나라야마 사도는 난부 씨의 정치 활동과 인접한 번과의 상호 작용을 책임졌다.[16] 나중에 일본의 총리가 된 하라 다카시도 난부 씨 가신 출신이었다.[17] 20세기 일본 정치인 중에서도 전 난부 가문의 가문 출신이 있었는데, 이타가키 세이시로[18]도조 히데키가 대표적이다.[19] 사사키 토요주는 금주 운동가, 페미니스트이자 반매춘 운동가였다.[15]

보신 전쟁에서 마쓰다이라 카타모리에 가담했던 난부 도시카타는 1868년(메이지 원년) 11월에 관위 박탈 및 성지 수납되었지만, 이듬해 12월에는 아들 난부 도시야스에게 시로이시 번 13만 석이 하사됨으로써 가명 재흥이 허락되었다.

2. 5. 보신 전쟁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이어진 보신 전쟁에서 난부씨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키려 했다.[20] 그러나 난부 도시히사가로 나라야마 사도의 지도 아래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다.[16] 1868년 9월 23일, 난부씨 군은 동맹에서 이탈해 아키타 번을 공격하여 제국 정부군 편에 섰다.[21] 10월 7일에는 아키타 번의 오다테를 점령했다.[22] 동맹이 무너지자 난부씨는 1868년 10월 29일 제국군에 항복했다.[23] 전쟁 후, 난부씨는 북부 동맹에 가담한 대가로 제국 정부에 의해 영지가 크게 줄었다. 하치노헤 번과 시치노헤 번은 유지되었지만, 현재 아오모리현 북동부 지역은 아이즈 번의 전직 사무라이들을 위한 재정착지가 되었다. 난부씨는 잠시 모리오카에서 추방되어 시로이시 성 주변의 새 영지를 받았다가 몇 달 뒤 모리오카로 돌아왔다.[24] 폐번치현으로 다른 모든 다이묘와 마찬가지로 세 난부 분가의 수장들은 직위에서 해임되었다.[24]

2. 6.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시대 초기에 난부 씨족의 본가는 새로운 작위 제도로 백작( ''하쿠샤쿠'')의 작위를 받았다.[25] 하치노헤 및 시치노헤의 난부 씨족 역시 자작( ''시샤쿠'')의 작위를 받았다.[25] 난부 도시나가 백작, 난부 씨족의 42대 당주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였으며, 러일 전쟁에서 전사했다.[26] 그의 동생 난부 도시아쓰가 뒤를 이었다. 도시아쓰는 예술을 옹호하며 구로다 세이키에게 그림을 배웠다. 도시아쓰의 유력한 상속자인 난부 도시사다가 18세에 사망했으므로, 도시아쓰는 사위인 이치조 도시히데를 양자로 삼았다. 도시히데는 전 궁정 귀족이치조 사네테루 공작의 아들이었다.[27] 양자 입적 후 도시히데는 난부의 성을 물려받았고, 도시아쓰 사후 44대 난부 씨족의 당주가 되었다. 그의 아내는 일본 걸스카우트의 저명한 인물인 미즈코 난부였다. 1980년 도시히데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난부 도시아키가 45대 씨족 당주가 되었다.[28]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난부 도시아키는 야스쿠니 신사의 궁사로 재직했다.[29] 현재, 46대 씨족 당주는 1970년에 태어난 난부 도시후미이다.

유신 이후, 난부씨(南部氏)에서는 백작가 1가, 자작가 2가, 남작가 2가 등 총 5가의 화족가가 배출되었다.

1868년 12월에 이와키국 시로이시 번주로 임명된 토시야스는 1869년 6월 18일의 판적 봉환으로 시로이시 번 지사로 전임된 후, 7월 22일에 구령 모리오카로의 재이봉을 허가받아 모리오카 번 지사로 전임되었다. 1870년 7월 10일 이전 번 지사를 사임하고 군현의 제도로 복귀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제출했으며, 같은 날 이 상소가 가납되어 지사에서 면직되었다.

판적 봉환 때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6858석. 1876년의 금록 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의거, 가록과 교환으로 지급된 금록 공채의 액수는 23만 8183엔 7전 2리 (화족 수급자 중 27위).

메이지 시대 전기의 토시야스의 거처는 도쿄시칸다구니시코가와초에 있었다. 당시의 가신은 나미오카 시게모토, 세야마 스케치카, 타노쿠사 타카카게[62]

1884년 7월 7일에 화족령에 의해 화족이 오작제로 되면서 구 중번 지사로서 토시야스는 백작으로 열거되었다.

토시야스가 1903년에 사망한 후, 장남 토시나가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받았다. 토시나가는 육군 기병 중위였지만, 1905년 3월 4일에 러일 전쟁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토시나가의 동생 토시즈미가 양자로서 작위와 가독을 상속받았다. 토시즈미는 도쿄부 고액 납세자에 이름을 올린 부호였다.

1930년에 토시즈미가 사망한 후, 토시즈미의 딸의 남편인 토시히데(이치조 사네테루 공작의 셋째 아들)가 데릴사위로서 작위와 가독을 상속받았다. 토시히데 시대의 쇼와 시대 전기에 난부 백작가의 저택은 도쿄시요도바시구토츠카초에 있었다.

마지막 하치노헤 번주 난부 노부유키는 메이지 2년(1869년) 6월 27일에 판적 봉환으로 번지사에 전임된 후, 메이지 4년(1871년) 7월 15일에 폐번치현에 따라 해임될 때까지 동 번지사를 역임했다.

판적 봉환 시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 944석.

노부유키는 메이지 4년에 은거했고, 적자인 요리노부가 가독을 상속했지만, 메이지 9년(1876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내이자 종가의 난부 토시타케의 차녀인 아사가 일시적으로 가독을 상속한 후, 메이지 9년에 난부 토시타케의 열한 번째 아들인 토시카츠가 어린 나이에 그녀의 양자로서 가독을 상속했다.

메이지 9년(1876년)의 금록 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따라 가록과 교환으로 지급된 금록 공채의 액수는 2만 3018엔 35전 5리 (화족 수급자 중 205위).

메이지 전기의 토시카츠의 거처는 도쿄시 시바구 혼시바에 있었다. 당시의 가정은 나카자토 야스에, 가신은 테라사키 야스요시[63]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에 화족령에 의해 화족이 5등작제가 되자, 다음 날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토시카츠가 자작에 서임되었다. 토시카츠는 메이지 30년에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궁내성에 근무하여 식부관을 역임했다. 그의 대(代)인 쇼와 전기에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세타가야구 키타자와에 있었다.

메이지 2년 정월에 가독을 상속하여 마지막 시치노헤 번주가 된 노부카타는 메이지 2년 6월 24일에 판적봉환으로 번지사로 전임된 후, 메이지 4년 7월 14일에 폐번치현에 따라 해임될 때까지 동 번지사를 맡았다.

판적봉환 시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162석.

메이지 9년(1876년)의 금록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의거하여, 가록과 교환으로 지급된 금록공채의 액수는 5100엔(화족 수급자 중 440위).

메이지 전기의 노부카타의 거소는 도쿄시간다구니시오가와초에 있는 종가 저택. 당시의 가보는 사이토 나가카타[64]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에 화족령에 의해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다음 날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노부카타자작에 열거되었다.

노부카타후쿠시마현심상중학교 교유, 화족 여학교 교사를 거쳐, 가쿠슈인, 도쿄부, 농상무성 산림국의 각 촉탁을 맡았다. 다이쇼 12년에 노부카타가 사망한 후, 딸 마사노의 남편인 노부타카(나베시마 나오히로 후작의 셋째 아들)가 사위 양자로 작위와 가독을 상속. 그러나 노부타카는 쇼와 4년에 은거하여 난부가에서 이적했기 때문에, 이가 우지히로 차남 노부토시가 양자로 작위와 가독을 상속. 노부토시 대의 쇼와 전기에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세타가야구 와카바야시정에 있었다.

당가는 남부씨의 시조인 남부 미쓰유키의 셋째 아들 사네나가를 시조로 하는 남부씨 분가이다. 남북조 시대의 자손인 모로유키·마사나가 형제는 남조의 무장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에 속해 근왕의 공을 세웠으며, 그 자손도 남조 측으로 공적이 있었다. 에도 시대에는 모리오카번의 중신 가문이 되었고, 도노를 영유했다.

유신 후에는 사족으로 분류되었지만, 메이지 16년에는 종가인 남부 도시야스가, 동가의 당주인 남부 유키요시는 남조 충신인 모로유키의 자손에 해당하므로 화족으로 열해야 한다고 청원했다. 그러나 궁내성은 이듬해 17년 2월 26일자로 "(남부 모로유키는) 닛타 이하 여러 사람에 비할 만한 자가 없으므로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들의 포상을 허용하게 되면 한계가 없으므로 본 건은 채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여 이 단계에서는 청원을 기각했다.

『수작록(授爵禄)』(메이지 30년)에 따르면, 메이지 28년 3월에도, 난부 도시야스 백작, 난부 노부카쓰 자작, 종3위 난부 도시타케, 종4위 난부 노부미가 연명으로 궁내대신 히지카타 히사모토에게, 유키요시의 선조 모로유키는 남조에 헌신하고, 적장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노 모로나오와 싸워 전사한 충신이므로, 유키요시의 화족 편입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청원은 일단 기각되었거나, 한동안 심의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메이지 30년 5월 3일자 『고조 요리사다·남부 유키요시를 화족에 열하고 남작을 수여하는 건』에 따르면, 궁내성은 "(남부 모로유키의) 그 숭고한 절개와 의리는, 기쿠치·나와씨에 비견될 만하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다. 또한 그 가계에 정확한 혈통이 연속되고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여, 유키요시를 화족의 남작에 열하는 것에 대해 천황에게 상주하여 재가를 받는 것을 결정했다.

그 결과, 남부 모로유키는, 기쿠치·나와와 같은 공이 있다고 인정되어, 같은 해 7월 1일자로 유키요시는 화족의 남작으로 서임되었다.

메이지 35년에 유키요시가 사망한 후, 장남인 요시노부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 요시노부는 육군 기병 소위였다. 다이쇼 10년에 요시노부가 사망한 후, 그의 장남인 히사미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 히사미는 쇼와 초기에 니치렌종의 경원방의 주지였고, 그 때문에 당시 남작가의 본거지도 야마나시현미나미코마군미노부정 우메다이라에 있었다. 히사미는 후에 도쿄의 도고지 주지로 전임되었다.

사법 관료 난부 겐오(南部甕男)의 훈공으로 화족의 남작에 서임된 가문이다. 난부 씨의 분파 중 하나이며, 다카타다의 대에 무쓰국에서 도사국 요네노카와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초소카베 씨를 섬겼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초소카베 씨가 개역되자, 대신 토사로 이봉된 야마우치 씨를 섬겼지만, 오사카 전투에서는 오사카성에 농성했기 때문에, 자손은 토착하게 되어, 메이와 7년부터 토사번향사의 가계가 되었다.

막말부터 다이쇼 시대의 당주 겐오는, 막말에 번의 명으로 교토로 나가 산조 사네토미를 수행하여 조슈와 규슈로 갔다. 보신 전쟁에서도 관군을 따라 종군하여 전공을 세워, 상전금 100량을 하사받았다. 메이지 유신 후, 병부성, 도쿄부에 출사하여, 메이지 4년에 사법성으로 이동하여, 구마모토고베의 각 재판소 소장 등을 역임한 후 본성으로 돌아와, 여러 법전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메이지 24년에는 도쿄고소원 원장이 된다. 메이지 29년 6월에 훈공으로 화족의 남작에 서임되었다. 그 후 대심원 원장이 되었고, 더욱 그 후 추밀고문관, 회계검사원 징계 재판소 장관을 역임했다.

다이쇼 12년에 겐오가 사망한 후, 겐오의 딸과 결혼한 데릴사위 미쓰토미(가라스마 미쓰노리 셋째 아들)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 미쓰토미는 내무성에 입성하여, 토목국장이나 군마현 지사 등을 역임한 후, 궁내성으로 이동하여, 제실 임야 관리국장, 궁중 고문관, 이노미야 벳토, 귀족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미쓰토미가 쇼와 6년에 사망하자, 그의 장남 다케오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 그의 시대의 쇼와 전기에는 남작가의 주거는 도쿄시시나가와구가미오사키 나카마루에 있었다. 다케오가 쇼와 15년에 사망한 후, 그의 장남 다다오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

3. 난부 씨 가신단


  • 이시카와 다카노부[71]
  • 하치노헤 마사히데[72]
  • 닛타 마사모리
  • 키타 치아이
  • 키타 노부아이
  • 키타 히데아이
  • 키타 노부카게
  • 이치노헤 마사츠라
  • 시노헤 무네야스
  • 시치노헤 이에쿠니
  • 쿠노헤 마사자네
  • 쿠노헤 사네치카
  • 쿠시히키 키요나가
  • 세이신니[73]
  • 나가우리 도모요시
  • 아네타이 카네마사
  • 다이코지 마사치카
  • 사쿠라바 미츠야스

4. 역대 당주

난부 미쓰유키를 시작으로, 난부 사네미쓰, 난부 도키자네, 난부 마사미쓰, 난부 무네쓰네, 난부 무네유키, 난부 스케유키, 난부 마사쓰라, 난부 스케마사, 난부 시게토키가 당주를 역임했다. 난부 노부나가, 난부 마사유키, 난부 모리유키, 난부 요시마사, 난부 마사모리, 난부 스케마사가 그 뒤를 이었다. 난부 미쓰마사, 난부 도키마사, 난부 미치쓰구, 난부 노부토키, 난부 노부요시, 난부 마사야스, 난부 야스노부가 당주직을 수행했다. 난부 하루마사 사후, 난부 하루쓰구, 난부 노부나오[65], 난부 도시나오, 난부 시게나오, 난부 시게노부가 당주가 되었다. 난부 유키노부, 난부 노부오, 난부 도시모토, 난부 도시미, 난부 도시오, 난부 도시마사, 난부 도시타카가 이어서 당주를 맡았다. 난부 리요, 난부 키치지로 리요, 난부 다이젠노다이부 리요[66], 난부 도시사다, 난부 도시요시, 난부 토시타케, 난부 도시야스, 난부 토시요시, 난부 토시히데[67], 난부 토시아키, 난부 토시후미[68] 등이 당주를 역임했다.

5. 계보

난부씨의 계보는 『난부 계보』에 따르며, 굵은 선은 친자, 가는 선은 양자를 나타낸다. 26대 당주인 난부 신직 이전의 계보는 여러 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난부 미쓰유키'''

┏━━━━╋━━━━━━━━━━━━━━━━━━━━━━━━━━━┳━━━━━━━┳━━━┳━━━┓

유키토모    '''사네미쓰'''           '''사네나가'''      시치노헤 아사키요  무네키요  유키쓰라

(이치노헤 씨)(산노헤 난부 씨)               (하키이 난부 씨)  (시치노헤 씨)(요노헤 씨)(구노헤 씨)

┃                 ┣━━━┓

┃ ┃ ┃

'''도키자네'''           사네쓰구  하키이 나가요시

┃ ┃ (하키이 씨)

┣━━━┳━━━┳━━━┳━━━┳━━━┓  ┃

'''마사미쓰'''  '''무네쓰구''' '''마사유키''' 사네마사   무네자네  요시모토 나가쓰구

┃ (이세 난부 씨) (가이 난부 씨) ┣━━━━━━━┓

┏━━━╋━━━┓ ┣━━┓  ┃ ┃ ┏━━━┳━━━┓

'''도키나가'''  '''모로유키'''  '''마사나가''' 요시유키   ┃ 무네쓰구 처(모로유키 처) ┃ '''무네유키''' '''스케유키'''

┃ ┃ ┃   ┃     ┃     ┃ ┃

네조 난부 씨 ┃ ┃ ┃ (이세 난부 씨?) ┃ ┃

┃       ┃ ━━━━━━━━━━━━━━━━━ ┃

┃    ┣━━━┳━━━┳━━━┳━━━┳━━━┓   ┣━━━┓

'''노부마사''' '''요시시게'''  '''시게토키''' '''노부나가''' '''타메시게'''  '''스케나가'''  '''노부유키'''  '''마사카즈''' '''스케마사'''

┣━━━┓        ┃

'''노부미쓰''' '''마사미쓰'''   '''마사유키'''

(하치노헤 씨)(시치노헤 씨)     ┃

'''모리유키'''

┏━━━┳━━━━━━━━━━━╋━━━┓

'''요시마사''' '''마사모리'''         '''스케마사'''  요코타 유키나가

(히가시 씨) ┣━━━┓    ┃

'''미쓰마사''' '''도키마사'''     '''노부토키'''

┃   ┏━━━┫

'''미치쓰구''' '''노부요시''' '''마사야스'''

┃   ┣━━━━━━━┳━━━┳━━━┳━━━━┓

키타 지아이  '''야스노부'''  이시카와 다카노부   미나미 나가요시  이시가메 노부후사   게마나이 히데노리

┃   ┃   ┏━━━┫  (미나미 씨)(이시가메 씨)(케마나이 씨)

키타 노부아이  '''하루마사''' '''노부나오''' 이시카와 마사노부

(키타 씨) ┃   ┃ (이시카와 씨)

'''하루쓰구''' '''도시나오'''

(난부 번)

┏━━━╋━━━━━━━━━━━━━━━━━━━━━━━┓

'''시게나오''' '''시게노부'''             나오후사

┃ (하치노헤 번)

┣━━━━━━━━━━━┳━━━┳━━━┓   ┃

'''유키노부'''         마사노부  가쓰노부  미치히로  나오마사

┏━━━╋━━━┓       |   (나오마사 양자) |

사네노부  '''노부오''' '''도시모토'''    노부야         미치히로

┃   ┣━━━┓   |           ┃

'''도시미''' '''도시오''' 노부키 노부히로          히로노부

┏━━━┳━━━┳━━━┳━━━━━━━┫   ┃       ┃           ┃

노부히로 노부카  노부슈  노부이에     '''도시마사''' 도시즈      노부요시          노부오키

(노부야 양자) ┃   ┣━━━┓  ┃   ┃       ┃           ┃

노부아키  노부사토 노부스케 '''도시타카''' '''도시나'''     노부린(시치노헤 번)     노부요리

┃   ┃   ┃  ┏━━━┫      ┃        ┏━━┫

노부야 '''도시토모''' '''도시토모''' '''도시요시''' '''도시타케'''     노부아키      노부후사 노부자네

┃             ┣━━━┳━━━┳━━━┓        |

노부타미       '''도시야스''' 노부카타  마코  도시카       노부준

(노부아키 양자)    ┏━━━┫   |    ┃    ┃

'''도시요시''' '''도시유키''' 노부타카     노부카쓰 에이신



'''도시히데'''



'''도시아키'''



'''도시후미'''

6. 서족

난부씨의 서족으로는 동씨, 북씨, 남씨, 이시가메씨, 케마나이씨가 있다. 구노헤씨는 덴쇼 19년(1591년) 구노헤 마사자네가 처형되었으나, 나카노씨(구노헤씨)는 구노헤 마사자네의 친동생 나카노 야스자네의 자손이 나카노씨를 칭하며, 하치노헤씨, 북씨와 함께 모리오카 난부 가문 내에서 대대로 가로를 맡는 "어삼가" 중 하나로 이어진다. 이치노헤씨는 덴쇼 9년(1581년) 이치노헤 마사쓰라가 친동생 히라다테 마사카네에게 멸망하여 적류는 단절되었다. 센토쿠씨, 쓰가루이시씨도 서족에 포함된다. 시노헤씨, 시치노헤씨가 있었는데, 시치노헤씨는 덴쇼 19년(1591년) 시치노헤 이에쿠니가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에서 구노헤씨 편에 서서 처형되었다. 쿠지씨는 덴쇼 19년(1591년) 쿠지 나오하루, 쿠지 마사노리 부자가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에서 구노헤씨 편에 서서 처형되어 적류는 단절되었다. 오우라씨(쓰가루씨)는 오우라씨도 난부의 지족이지만, 쿠지씨 가문에서 양자로 들어간 오우라(쓰가루) 다메노부가 고노에 가문의 방계를 칭하며 후지와라씨로 환성했다. 그 외에도 쓰가루와 이와테 군에도 이마이씨 등의 지족이 있었지만, 이와테 군의 난부씨 지족은 몰락했고, 쓰가루의 난부씨 지족은 모두 오우라씨에게 멸망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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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행물 Tokugawa Bakufu to Tozama 117 han. Rekishi Dokuhon 1976-04
[4] 웹사이트 Tsugaru-shi on Harimaya.com http://www2.harimaya[...] 2008-08-15
[5] 서적 Toyotomi Hideyoshi https://archive.org/[...] Osprey
[6] 서적 Hatamoto: Samurai Horse and Foot Guards 1540-1724 Osp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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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웹사이트 Shichinohe-han on Edo 300 HTML https://web.archive.[...] 2016-03-04
[11] 문서 Taken Captive: A Japanese POW's Story
[12] 서적 Early Modern Japan 1993
[13] 서적 Aizu-han Gendai shokan 2005
[14] 문서 Historical and Geographical Dictionary of Japan 1906
[15] 논문 New Women before the "New Woman": Sasaki Toyoju and Sasaki Nobuko in Meiji Japan https://brill.com/di[...] Brill 2018-08-28
[16] 문서 Boshin nanboku sensō to Tōhoku seiken
[17] 문서 Five Political Leaders of Modern Japan
[18] 간행물 Contemporary Japan: A Review of Japanese Affairs
[19]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Japanese History 1978
[20] 문서 Ōuetsu Reppan Dōmei
[21] 문서
[2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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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웹사이트 Nanbu chūi https://web.archive.[...] 201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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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문서 Nanbu chūi
[27] 문서 The Japan Year Book
[28] 뉴스 Ad Man-Turned-Priest Tackles His Hardest Sales Job, https://query.nytime[...] New York Times 200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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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문서 藤原氏
[31] 문서 武田信廣
[32] 문서 青森県史
[33] 문서 岩手県史
[34] 문서 南部藩 参考諸家系図
[35] 문서 南部孫次郎
[36] 문서 <太平記>では南部太郎とする場合や、南部二郎、又は南部三郎などと定かでない。
[37] 문서 この後、[[新田義貞]]らの反足利勢力の一翼として、後醍醐天皇の比叡山への[[行幸|御幸]]に従いながら足利方に捕らえられ禁殺されたとされているが、南部氏系譜によって記載する系譜と不記載がある。
[38] 문서 『盛岡南部氏物語』の嫡家系譜では、義行をして[[北条泰家|恵性]]の北条軍として[[分倍河原の戦い]]に出陣して戦い、敗れた恵性を[[奥州]]に案内した南部太郎としている。
[39] 문서 『陸奥南部一族』など
[40] 문서 『太平記』第14巻より
[41] 문서 同年の足利尊氏の供奉の列に波木井南部氏の[[波木井長氏]]の子と見える[[波木井政氏]]の名もある。
[42] 문서 この軍勢に南部信政が従軍した『八戸根城と南部家文書』より。
[43] 문서 この説は『南部史要』も採用している。
[44] 문서 『八戸根城と南部家文書』1P166より
[45] 문서 『八戸根城と南部家文書』P167より
[46] 문서 『八戸根城と南部家文書』P169より
[47] 문서 同じく『南部史談会誌』などによれば、この派遣軍の中には南部信長兄弟が従い奥州に還ったとしている。
[48] 문서 八戸根城と南部家文書 p.253
[49] 문서 八戸根城と南部家文書 p.256
[50] 문서 新潮社版<太平記>では[[高階惟宗|高階弾正惟宗]]の息としている。
[51] 문서 これは足利氏と結んだ甲斐南部氏と区別するための太平記作者の配慮か?
[52] 문서 新潮社版<太平記>では南部常陸守としているが、太平記注釈書の<参考太平記>では南部常陸介とする。
[53] 문서 [[河西氏]]の先祖[[南部元時]]や、[[奥氏]]の[[南部清政]]、[[仙洞田氏]]の[[南部重清]]
[54] 문서 南部実政以降の伊勢南部氏系図が載る[[系図纂要]]の形式から家の系図を名のある系図に結びつける手法が採られているようなので、実政以降[[南部頼村]]までは参考系図程度に見るべきだろう。むしろ実政より波木井実長の跡としたほうが合っているし、今後の伊勢南部氏の研究対象となるだろう。
[55] 문서 <太平記>の巻.26の記述の中で、同一人物とみられる南部遠江守・同次郎左衛門尉をして、南遠江守・同次郎左衛門尉とする記述がある。
[56] 문서 平山(2011)、p.79
[57] 문서 丸島(2015)、p.545
[58] 문서 下国氏([[安東氏|檜山安東氏]])の勢力が津軽から駆逐された事により、[[蠣崎氏]](松前氏)の分離独立、上国氏([[安東氏|湊安東氏]])を相続・拠点移動(檜山から[[湊城]]へ)などによる[[安東氏|安東]]両家の統合と秋田制圧([[蝦夷]]の支配を放棄、秋田氏に改姓)が進む。
[59] 웹사이트 天正20年(1500年)7月27日付豊臣秀吉朱印状南部信直宛(盛岡市中央公民館蔵) http://www.pref.aomo[...]
[60] 문서 時代は下るが『各藩高並租税調帳』『藩制一覧』における[[弘前藩]]実高は287,733石
[61] 문서 これによって、[[伊達政宗]]は上杉の[[白石城]]を奪取するなど功績を挙げたにもかかわらず、所謂「百万石のお墨付き」を反古にされた。
[62] 서적 明治華族名鑑 https://dl.ndl.go.jp[...] [[深沢堅二]] 1881-01-01
[63] 서적 明治華族名鑑 https://dl.ndl.go.jp[...] [[深沢堅二]] 1881-01-01
[64] 서적 明治華族名鑑 https://dl.ndl.go.jp[...] [[深沢堅二]] 1881-01-01
[65] 문서 (盛岡藩初代藩主)(安信弟[[石川高信]]長男)
[66] 문서 (吉次郎が事故死したため、表向きは同一人物としてすり替わった)
[67] 문서 ([[公爵]][[一条実輝]]の三男で[[婿養子]]、妻は利淳の長女の瑞子)
[68] 문서 (利昭の長兄利久の長男)
[69] 간행물 上北町史 https://dl.ndl.go.jp[...] [[上北町]] 1986-05-31
[70] 간행물 新修鳥取市史 https://dl.ndl.go.jp[...] 鳥取市 1988-04-01
[71] 기타 南部信直の実父
[72] 기타 根城南部氏第18代当主
[73] 기타 八戸直栄の娘、直政の妻、女大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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