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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유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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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야모토 유리코는 일본의 소설가, 평론가, 사회 운동가로, 1899년에 태어나 1951년에 사망했다. 그는 여성의 자아실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결합한 독특한 시각을 작품에 담아냈다. 대표작으로는 자전적 소설 《노부코》, 전후의 경험을 그린 《반슈 평야》 등이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과 여성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미야모토는 두 번의 결혼과 소련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회주의와 여성의 역할을 탐구했으며, 공산당 활동 중 투옥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비판과 여성의 해방을 강조하며, 일본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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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유리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미야모토 유리코
원어 이름宮本 百合子
출생 이름주조 유리 (中條 ユリ)
출생일1899년 2월 13일
출생지일본 도쿄도 고이시카와구
사망일1951년 1월 21일
사망지일본 도쿄도
국적일본
로마자 표기Miyamoto Yuriko
직업
직업소설가, 평론가
활동 시기1916년 - 1951년
장르소설, 단편 소설, 수필, 문학 비평
문학 사조프롤레타리아 문학
데뷔작빈한한 사람들의 무리(1916년)
작품
주요 작품빈한한 사람들의 무리(1916년)
신코(1928년)
반슈 평야(1947년)
두 개의 정원 (1948년)
도표(1950년)
개인 정보
배우자아라키 시게루 (1919년 - 1924년)
미야모토 겐지 (1932년 - 1951년)
가족주조 마사쓰네 (아버지의 할아버지)
니시무라 시게키 (어머니의 할아버지)
주조 세이치로 (아버지)
학력도쿄 여자 사범학교 부속 고등여학교 졸업, 일본여자대학 중퇴
활동 단체
활동 단체일본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
일본 공산당
신일본 문학회
NHK 방송위원회
부인 민주 클럽
기타
묘지고다이라 묘원 2-11-6
관련 정보
위키 문헌미야모토 유리코 작품
추가 정보미야모토 겐지는 유리코 사후에 유리코의 비서였던 오모리 스에코와 결혼했다.

2. 생애

미야모토 유리코는 1899년 2월 13일 도쿄 고이시카와(현재 분쿄구)에서 건축가인 아버지 중조 세이이치로(中條精一郎)와 전직 화가였던 어머니 요시아에(葭江) 사이에서 태어났다.[3][4][5] 오차노미즈 여자중학교를 다녔으며, 히구치 이치요, 나쓰메 소세키 등 일본 작가들과 오스카 와일드,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등 외국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3]

1911년 동경여자사범학교 부속 고등여학교(오차노미즈 여자대학 부속 중학교・오차노미즈 여자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16년 일본여자대학교 영문과 예과에 입학하자마자, 나카죠 유리코(中条百合子)라는 이름으로 백화파풍의 인도주의적인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貧しき人の群れ)"를 『중앙공론』 9월호에 발표하여 주목받았다.[3]

1918년,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아라키 시게루를 만나 결혼했다.[6][19]

1918년경
1924년, 노가미 야요코를 통해 러시아 문학자 유사 요시코를 알게 되었고, 아라키 시게루와 이혼했다.[19] 이혼은 소설 『노부코』(1924~1926)에 영감을 주었다.[3]

1927년, 유리코와 요시코는 소련으로 여행을 떠나 3년간 러시아어러시아 문학을 공부했다.[8] 1930년 귀국 후, 1931년 일본공산당에 입당, 이듬해 미야모토 겐지와 결혼했다.[3] 3·15사건으로 남편과 함께 체포되는 등, 반복적인 체포와 탄압을 받았다.[3] 1933년 12월 남편 겐지가 체포되어 1945년 8월까지 투옥되는 동안, 많은 수필과 소설을 썼다.[3]

1945년 남편과 재회하여 공산당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1946년 여성민주클럽 창립에 참여하여 초대 간사를 맡았다.[21] 종전 1년 만에 《반슈 평야(播州平野)》와 《풍치초(風知草)》를 발표했으며, 《반슈 평야》는 1947년 마이니치 문화상을 수상했다.[3]

1951년 급성 수막염균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51세였다.[20]

2. 1. 어린 시절과 문학적 성장 (1899년 ~ 1918년)

미야모토 유리코는 1899년 2월 13일 도쿄 고이시카와(현재 분쿄구)에서 중조 유리코(中條百合子)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3][4] 아버지 중조 세이이치로(中條精一郎)는 도쿄 제국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학한 건축가였고, 어머니 요시아에(葭江)는 화가였으나 우에노 국립미술학교가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아 경력을 중단해야 했다.[5] 미야모토의 어머니는 메이지 정부가 장려하던 현모양처(良妻賢母)의 역할에 딸을 강요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5]

미야모토는 오차노미즈 여자중학교를 다녔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환경과 집안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들의 환경 사이의 차이를 인식했는데, 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인 "농촌(農村)"과 후기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貧しき人の群れ)"에 나타난다.[3] 사회적·경제적 지위의 차이에 대한 미야모토의 관심은 그녀를 사회주의와 초기 일본 여성 운동으로 이끌었다.

미야모토는 히구치 이치요, 후타바테이 시메이, 나쓰메 소세키 등 일본 작가들과 오스카 와일드, 에드거 앨런 포,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레오 톨스토이 등 외국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으며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3]

3세까지 삿포로시에서 자랐고, 이후 도쿄 혼고구(本郷区) 코마고메 신타기바야시마치(駒込千駄木林町)(현재 분쿄구 센다기 5쵸메(千駄木5丁目))로 이사했지만, 아버지는 영국으로 단신 유학을 떠났다.[18] 6세 때 미국에서 귀국한 삼촌(호리네스 교회(ホーリネス教会) 선교사(宣教師))과 함께 살았으나(1년 정도 후 병사), 8세 때 아버지도 귀국하여 유럽과 미국의 사상에 접하며 자랐다.[18] 어머니에게 서예를, 쿠노 히사코(久野久子)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미술관 관람과 연극 관람 등 중상류층 가정다운 풍부한 정서 교육을 받았다.[18] 코마고메 코마모토 보통소학교(駒本尋常小学校)(현재 분쿄구립 코마모토 소학교)에서 명문 사립학교인 세이지 보통소학교(誠之尋常小学校)(현재 분쿄구립 세이지 소학교)로 전학하여 성적도 우수했다.[18] 형제자매는 9명이었지만 그중 3명을 잃었다.[18]

1911년 동경여자사범학교 부속 고등여학교(오차노미즈 여자대학 부속 중학교・오차노미즈 여자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16년 일본여자대학교 영문과 예과에 입학하자마자, 나카죠 유리코(中条百合子)라는 이름으로 백화파풍의 인도주의적인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貧しき人の群れ)"를 『중앙공론』 9월호에 발표하여 천재 소녀로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어릴 적 여름방학에 놀러 갔던 아버지의 고향 개척마을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여자대학 예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퇴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시라카바 문예 동인이 후원하는 문학상을 수상했고, 쓰보우치 쇼요의 지지를 받았다.[3]

2. 2. 미국 유학과 첫 번째 결혼 (1918년 ~ 1924년)

1918년, 미야모토는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했다.[6] 그곳에서 15살 연상의 고대 동양어 연구가 아라키 시게루를 만나 결혼했다.[19] 그녀는 연애 결혼, 스스로 청혼,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등 여러 사회적 규범을 깨뜨렸다.[7] 같은 해 12월, 어머니의 중증 당뇨병 소식을 듣고 홀로 귀국했고, 아라키 시게루는 1920년에 귀국했다.

1924년, 노가미 야요코를 통해 러시아 문학자 유사 요시코를 알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 미야모토는 아라키 시게루와 이혼했다.[19] 이혼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 『노부코』(1924~1926)에 영감을 주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결혼 실패, 해외 여행, 독립을 위한 갈망을 다루면서 전통적인 성과 사랑에 대한 관념을 비판한다.[3] 여성주의 사소설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1924년부터 1926년까지 『개조』(개조)라는 잡지에 연재된 후 1928년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1] 유아사와 동거하면서 파탄난 불행한 결혼 생활을 장편소설 『노부코』(1928년 3월 3일 간행)에 담았다 (『개조』 1924년 9월 「듣기 어려운 발소리」~1926년 9월).

2. 3. 유아사 요시코와의 만남과 소련 방문 (1924년 ~ 1930년)

1927년, 미야모토 유리코와 유아사 요시코는 소련으로 여행을 떠나 3년 동안 함께 생활했다.[8] 모스크바에서 그들은 러시아어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저명한 영화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과 친분을 쌓았다. 유아사는 러시아어 번역에 전념했고, 미야모토는 공산 국가에서 여성의 발전을 관찰했다.[6]

미야모토와 유아사는 1930년 11월 일본으로 돌아왔다.[6] 귀국 후, 그들의 관계는 당시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어려워졌다. 유아사는 공개적으로 레즈비언임을 밝혔지만, 미야모토는 후기 작품에서 표현했듯이 근대화되는 일본에서 여성 간의 사랑의 위치에 대해 고민했다.[6][9] 이러한 불화는 요시코의 폭력적인 언행과 미야모토의 부정직에 대한 비난으로 인해 악화되었는데, 이는 두 여성의 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6]

2. 4.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과 두 번째 결혼 (1930년 ~ 1945년)

1930년 2월, 무정부주의-볼셰비키 논쟁(아나-보루 론소) 이후 미야모토 유리코는 다카무레 이쓰에, 야기 아키코 등 무정부주의를 지지하는 다른 편집자들과 함께 여성 문예지 『여성예술』에서 탈퇴하여 자체적인 잡지 『부인선전』(여성전선)을 창간하였다.[10] 그러나 정부의 치안유지법 강화 및 좌익 정치 운동 탄압이 심화되면서 미야모토의 작품들은 심한 검열을 받았고, 그녀의 잡지는 발행 금지를 당했다.

1931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이듬해 문예평론가이자 공산당원이었던 아홉 살 연하의 미야모토 겐지와 결혼했다.[3] 하지만 곧 프로레타리아 문화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겐지가 불법 활동에 종사하게 되어 부부로서의 생활 기간은 짧았다. 1933년, 겐지가 체포되어 일본공산당 스파이 심문 사건의 주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유리코는 이듬해 겐지와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하고, 중조(中條)에서 미야모토(宮本)로 성을 바꾸었다. 1937년, 옥중의 겐지로부터 필명도 미야모토 성으로 바꿀 것을 제안받고, 고심 끝에 몇 달 후, 중일전쟁 개시 후 옥중과의 연대의 의미도 담아[20] 미야모토 유리코로 필명을 바꾸었다.

미야모토 유리코와 사타 이네코. 1937년 12월경, 가미오치아이(上落合)에 있는 미야모토의 자택에서 촬영.


미야모토 유리코와 미야모토 겐지는 다른 공산주의 작가들과 함께 3·15사건으로 체포되었다.[3] 미야모토는 경찰에 의해 반복적으로 체포 및 괴롭힘을 당했고, 1932년부터 1942년까지 2년 이상 투옥되었다.[3] 겐지는 1933년 12월 다시 체포되어 1945년 8월까지 투옥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1930년대 일본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상세히 묘사한 많은 수필과 소설을 썼는데, 그중 사후에 발표된 "고쿠코쿠"(순간순간)는 공산주의자 수감자들이 겪은 고문을 묘사하고 있다.[3]

겐지가 투옥되는 동안 미야모토 유리코는 유아사 요시코와의 우정을 되살렸지만, 이전과 같은 친밀함은 회복하지 못했다.[6] 유리코는 남편과 공산주의에 대한 충실함을 유지했는데, 그녀에게 있어 이 둘은 서로 얽혀 있었다.[6] 그녀는 1942년 체포되었고, 경찰 조사 중 열사병을 앓아 건강이 악화되었다.[3] 그러나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모두 자신의 신념에 헌신했고, 결코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1]

유리코는 투옥 중인 겐지를 옥외에서 지원했지만, 자신도 여러 차례 체포되어, 1936년에는 징역 2년·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았다. 이후에도 체포와 집필 금지 등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건강을 해치는 일도 있었지만, 끈기 있게 문학 활동을 계속했다. 겐지는 1944년에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아바시리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지만, 일본의 패전 후 연합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GHQ)가 국내 모든 정치범의 즉시 석방을 지시함에 따라, 1945년 10월에 겐지도 12년 만에 출옥했다. 남편과 주고받은 약 900통의 서간은 나중에 두 사람의 선택을 거쳐, 유리코의 사후 『12년의 편지』로 출판되었다.

2. 5. 전후 활동과 사망 (1945년 ~ 1951년)

미야모토 유리코는 남편과 재회하여 공산당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이 시기는 그녀의 문학 경력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1946년, 미야모토는 새로운 일본 문학 협회를 위해 "우타고에 요 오코레(歌声よおこれ)"를 썼다. 이 수필에서 그녀는 작가들에게 국가의 역사, 자신의 삶의 경험, 그리고 인권에 대해 반성할 것을 촉구했다.[3] 이 수필과 다른 글에서 그녀는 20가지의 보장된 권리를 옹호했으며, 그중 3가지는 일본 헌법 (제14조 1항 및 제24조 1-2항)에 채택되었다.[11]

종전 1년 만에 그녀는 두 편의 자매 작품인 《반슈 평야(播州平野)》와 《풍치초(風知草)》를 발표했는데, 둘 다 일본 항복 직후 몇 달 동안의 그녀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다. 《반슈 평야》는 1947년 마이니치 문화상을 수상했다.[3]

1942년 열사병 이후 미야모토 유리코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시력과 심장에 장애가 생겼다.[3] 그녀는 마지막 소설 『도표(道標)』를 완성한 직후인 1951년 급성 수막염으로 인한 합병증인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묘는 도쿄 외곽의 고다이라 시 고다이라 공원묘지에 있다.

여성민주클럽 중심 멤버들(1946년 촬영). 앞줄 왼쪽부터 한 명 건너뛰고, 가토 시즈에, 아츠기 타카, 미야모토 유리코, 사다 이네코, 쿠시다 후키, 하니 세츠코. 뒷줄 왼쪽부터 한 명 건너뛰고, 세키 카가미코, 후지카와 사치코, 야마무로 타미코.


1950년 미야모토 유리코


전후 공산당 활동이 재개되자 유리코는 사회운동과 집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시 중 집필 금지에서 해방되어 『바람소리풀』, 『반슈 평야』, 『도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대부분은 소설로서 자신의 손으로 그려져 있다.

1945년 11월, 미야모토 유리코, 하니 세츠코, 가토 시즈에, 사다 이네코, 야마무로 타미코, 야마모토 스기, 아카마츠 토네코, 마츠오카 요코 8인이 호소인이 되어 여성 단체 결성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준비회가 거듭된 끝에 1946년 3월 16일, 여성민주클럽 창립 대회가 칸다 교류 강당에서 열렸다.[21] 초대 위원장은 마츠오카가 맡았고, 미야모토는 간사를 맡았다.

공산당원으로서 신일본문학회 중앙 위원도 역임하며 공산당의 지도에 따른 문예 운동과 여성 운동 추진에 힘썼다.

미야모토 유리코 문학비(郡山市 개성산공원)


1950년, 점령하의 정치 활동 방침을 둘러싼 당내 혼란과 레드퍼지로 인해 공산당의 활동이 크게 제한되었고, 공산당 중앙위원이었던 미야모토 겐지도 공직추방 대상이 되면서 국제파의 지도자로서 당의 분열에 직면했다. 유리코는 새로운 곤경 속에서도 집필 활동과 당의 선전 활동을 계속했고, 같은 해에 『도표』 전 3부를 완결했다. 그러나 이듬해 1951년 1월 급성 수막염균 패혈증으로 급사했다. 향년 51세였다.

3. 작품 세계

미야모토 유리코는 초기 작품에서부터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으며, 이는 그녀를 사회주의와 초기 일본 여성 운동(Feminism in Japan)으로 이끌었다.[3] 자전적 소설 『노부코』(1924~1926)는 결혼 실패, 해외 여행, 독립을 향한 갈망을 다루며 전통적인 성 역할과 사랑에 대한 관념을 비판하는 여성주의 사소설로 평가받는다.[1]

1927년 유아사 요시코와 소련으로 건너가 3년간 러시아 문학러시아어를 공부한 경험은[8] 그녀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귀국 후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 적극 참여, 마르크스주의 문학 잡지 『일하는 여성』 편집자로 활동했고,[6] 일본 공산당에 가입하여 미야모토 겐지와 결혼했다.[4][6]

전후에는 『반슈 평야』(1947)를 통해 일본의 항복 직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도덕적 파탄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마이니치 문화상을 수상했다.[3]

3. 1. 주요 작품

제목출판 연도
노부코1924년
반슈평야1946년
풍지초1946년
두 개의 정원1947년
도표1950년
가난한 사람들1916년
1932년의 봄1932년
유방1935년
삼나무 울타리1939년
3월의 제4 일요일1940년


3. 2. 주제 의식

미야모토 유리코는 사회주의(socialism)와 초기 일본 여성 운동(Feminism in Japan)에 영향을 받아 작품 활동을 했다.[3] 그녀는 개인의 자아실현이 중요하다고 믿었으며, 데뷔작 『노부코』를 통해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을 탐구했다.[1]

미야모토는 "여성적인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에 반대했으며, 여성과 남성의 글쓰기 스타일이 다르다는 당시의 「女流」(조류, joryū, 여성 작가) 문학관에 반대했다.[10] 그녀는 노동계급 여성과 여성 간의 유대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여성 해방을 더 나은 사회 질서로 가는 길의 일부로 보았다.[1][12]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일원으로서 미야모토는 반제국주의자였지만, 그녀의 작품은 도시 중심부와 특정 부유층을 외부 집단을 위한 문명화 세력으로 묘사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고정관념에 반박한다.[12] 그녀의 몇몇 작품은 가족 단위 내에서 혁명적 행동을 위치시키기도 했다.[13]

3. 3. 문학적 특징

미야모토 유리코는 초기 작품에서부터 자신의 유복한 환경과 주변 소작농들의 가난한 삶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인식하고, 이를 작품에 반영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관심은 그녀를 사회주의와 초기 일본 여성 운동으로 이끌었다.[3]

그녀는 히구치 이치요, 후타바테이 시메이, 나쓰메 소세키 등 일본 작가뿐만 아니라 오스카 와일드, 에드거 앨런 포,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오 톨스토이 등 서구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받았다.[3] 10대 시절에 쓴 단편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는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시라카바 문예 동인의 후원을 받았다.[3]

미야모토의 자전적 소설 『노부코』(1924~1926)는 결혼 실패, 해외 여행, 독립을 향한 갈망을 다루며 전통적인 성 역할과 사랑에 대한 관념을 비판한다. 이 작품은 여성주의 사소설로 평가받으며, 전후 시대에 여성 해방에 대한 이야기로 재해석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1]

소련 체류 경험은 미야모토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귀국 후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마르크스주의 문학 잡지 『일하는 여성』의 편집자로 활동했다.[6] 일본 공산당 가입 후에는 미야모토 겐지와 결혼했다.[4][6]

3·15사건으로 체포된 후, 미야모토는 반복적인 체포와 투옥, 경찰의 괴롭힘 속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3] 그녀의 작품은 치안유지법으로 인해 심한 검열을 받았고, 잡지 발행이 금지되기도 했다.[10]

전후 미야모토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반슈 평야』(1947)는 일본의 항복 직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도덕적 파탄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마이니치 문화상을 수상했다.[3] 『풍치초』(1947)는 전쟁 후 남편과의 재회와 적응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두 개의 정원』(1948)과 『이정표』(1950)는 『노부코』의 속편으로, 여성 관계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다. 미야모토는 소설 외에도 에세이, 문학 비평, 편지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문학 세계를 펼쳐 보였다.

4. 사회 운동

미야모토 유리코는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한 독특한 인물이었다.[1] 그녀의 데뷔작 『노부코』는 자아실현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 규범을 위반하고 그 추구 과정에서 "사회 문제"와 맞설 수 있는지 자세히 탐구한다.[1]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일원으로서 미야모토는 반제국주의자였지만, 그녀의 작품은 도시 중심부와 특정 부유층을 외부 집단을 위한 문명화 세력으로 묘사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고정관념에 반박한다.[12] 그녀의 몇몇 작품은 또한 당시 혁명과 해방에 대한 대부분의 개념과는 달리 가족 단위 내에서 혁명적 행동을 위치시킨다.[13]

앞줄 왼쪽부터 미야모토 유리코, 유아사 요시코. 오른쪽 끝은 아키타 아마자쿠. 모스크바에서 촬영.


1927년 12월, 미야모토 유리코는 유아사 요시코와 함께 소련으로 건너가 공산주의에 대한 경향을 더욱 깊게 하였다. 1930년 11월 귀국 후, 일본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에 가입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 참가하였고, 1931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2년 3·15사건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후 경찰에 의해 반복적으로 체포 및 괴롭힘을 당하고 2년 이상 투옥되었다.[3] 1933년에는 남편 미야모토 겐지가 일본공산당 스파이 심문 사건의 주범으로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겐지는 1944년에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아바시리 교도소에서 복역했지만, 1945년 10월에 12년 만에 출옥했다.

전후 공산당 활동이 재개되자 유리코는 사회운동과 집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4. 1. 여성 운동

미야모토 유리코는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두 운동 모두에서 개인의 자아실현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1]

당시 많은 페미니스트들과 달리, 미야모토는 "여성적인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에는 반대했다.[10] 그녀는 여성과 남성의 글쓰기 스타일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견해를 가진 당시 유행하던 「女流」(조류, joryū|조류일본어, 여성 작가) 문학관에 반대했다.[10]

당시 남성적 유대감과 남성 노동자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던 많은 프롤레타리아 작가들과 달리, 미야모토는 노동계급 여성과 여성 간의 유대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12] 그녀는 여성 해방을 더 나은 사회 질서로 가는 길의 일부로 여기며,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일본의 주류 사상 모두에 맞섰다.[1][12]

1945년 11월, 미야모토 유리코(宮本百合子), 하니 세츠코, 가토 시즈에, 사다 이네코, 야마무로 타미코, 야마모토 스기, 아카마츠 토네코, 마츠오카 요코 8인이 호소인이 되어 여성 단체 결성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준비회가 거듭된 끝에 1946년(쇼와 21년) 3월 16일, "여성민주클럽" 창립 대회가 칸다 교류 강당에서 열렸다.[21] 초대 위원장은 마츠오카가 맡았고, 미야모토는 간사를 맡았다.

공산당원으로서 신일본문학회 중앙 위원도 역임하며 공산당의 지도에 따른 문예 운동과 여성 운동 추진에 힘썼다.

4. 2. 공산당 활동

1930년 2월, 미야모토 유리코는 무정부주의-볼셰비키 논쟁(아나-보루 논쟁) 이후 다카무레 이쓰에, 야기 아키코 등 무정부주의를 지지하는 다른 편집자들과 함께 여성 문예지 『여성예술』에서 탈퇴하여 자체적인 잡지 『부인선전』(여성전선)을 창간하였다.[10] 그러나 정부의 치안유지법 강화 및 좌익 정치 운동 탄압이 심화되면서 미야모토의 작품들은 심한 검열을 받았고, 그녀의 잡지는 발행 금지를 당했다.

1932년, 미야모토 유리코와 미야모토 겐지는 다른 공산주의 작가들과 함께 3·15사건으로 체포되었다.[3] 미야모토는 경찰에 의해 반복적으로 체포 및 괴롭힘을 당했고, 1932년부터 1942년까지 2년 이상 투옥되었다.[3] 그녀의 남편 미야모토 겐지는 1933년 12월 다시 체포되어 1945년 8월까지 투옥되었다.

1927년 12월부터 유아사와 함께 소련으로 향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경향이 더욱 깊어졌다. 영화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등과 교류하였다. 이 시기에 소련과 유럽을 방문했던 영화감독 이가사 사다노스케나 귀국 후 전진좌를 창립한 4대째 가와라자키 쵸쥬로 등과도 교류하였다. 서구 여행 등을 거쳐 1930년 11월 귀국하였다. 다음 달 일본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에 가입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 참가하였고, 1931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문예평론가이자 공산당원이었던 아홉 살 연하의 미야모토 겐지와 결혼했지만, 곧 프로레타리아 문화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겐지가 불법 활동에 종사하게 되어 부부로서의 생활 기간은 짧았다. 1933년, 겐지가 체포되어 일본공산당 스파이 심문 사건의 주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유리코는 이듬해 겐지와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하고, 중조에서 미야모토로 성을 바꾸었다. 1937년, 옥중의 겐지로부터 필명도 미야모토 성으로 바꿀 것을 제안받고, 고심 끝에 몇 달 후, 중일전쟁 개시 후 옥중과의 연대의 의미도 담아[20] 미야모토 유리코로 필명을 바꾸었다.

유리코는 투옥 중인 겐지를 옥외에서 지원했지만, 자신도 여러 차례 체포되어, 1936년에는 징역 2년·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았다. 이후에도 체포와 집필 금지 등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건강을 해치는 일도 있었지만, 끈기 있게 문학 활동을 계속했다. 겐지는 1944년에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아바시리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지만, 일본의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가 국내 모든 정치범의 즉시 석방을 지시함에 따라, 1945년 10월에 겐지도 12년 만에 출옥했다.

전후 공산당 활동이 재개되자 유리코는 사회운동과 집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5년 11월, 미야모토 유리코, 하니 세쓰코, 가토 시즈에, 사타 이네코, 야마무로 다미코, 야마모토 스기, 아카마쓰 도네코, 마쓰오카 요코 8인이 호소인이 되어 여성 단체 결성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준비회가 거듭된 끝에 1946년 3월 16일, "여성민주클럽" 창립 대회가 간다 교류 강당에서 열렸다.[21] 초대 위원장은 마쓰오카가 맡았고, 미야모토는 간사를 맡았다.

공산당원으로서 신일본문학회 중앙 위원도 역임하며 공산당의 지도에 따른 문예 운동과 여성 운동 추진에 힘썼다.

5. 평가

미야모토 유리코는 남편 미야모토 겐지가 일본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그의 아내이자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제1인자로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1951년 급성 수막염균 패혈증으로 사망한 후, 50년이 되는 2001년부터 신일본출판사에서 미야모토 유리코 전집을 간행하기 시작하여 2004년에 전 33권으로 완결되었다. 이 전집에 대한 추천사에는 가토 슈이치 외에 당시 공산당 의장이었던 후지타 테츠조와, 과거 공산당원이었던 츠지이 타카시(츠츠이 세이지)도 이름을 올렸다.

6. 작품 목록

제목발표 연도비고
가난한 사람들1916년1917년 현문사(玄文社) 출판.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 가도카와 문고(角川文庫), 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재출간.
하나의 싹1918년신초사(新潮社) 출판
노부코1924년1928년 개조사(改造社) 출판. 신초문고(新潮文庫), 가도카와 문고(角川文庫),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 고단샤 문고(講談社文庫), 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오우분샤 문고(旺文社文庫) 재출간.
새로운 시베리아를 가로질러1931년내외사(内外社) 출판
1932년의 봄1932년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재출간.
겨울을 넘기는 꽃봉오리1935년현대문화사(現代文化社) 출판
유방1935년1937년 타케무라 서점(竹村書房) 출판. 아오키 문고(青木文庫) 재출간.
주야 수필(晝夜随筆)1937년백양사(白揚社) 출판. 초판은 주조(中條) 명의로 출판.
삼나무 울타리1939년
내일을 위한 정신(明日への精神)1940년실업之일본사(実業之日本社) 출판
아침의 바람(朝の風)1940년가와데 쇼보(河出書房) 출판
3월의 제4 일요일1940년금성당(金星堂) 출판. 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재출간.
문학의 진로1941년고산서원(高山書院) 출판
우리들의 생활1941년협력출판사(協力出版社) 출판
반슈평야1946년1947년 가와데 쇼보(河出書房) 출판. 신초문고(新潮文庫), 가도카와 문고(角川文庫), 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재출간.
풍지초1946년1947년 문예춘추신사(文藝春秋新社) 출판. 신초문고(新潮文庫), 가도카와 문고(角川文庫), 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재출간.
두 개의 정원1947년1948년 추오 코론샤(中央公論社) 출판. 신초문고(新潮文庫),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 가도카와 문고(角川文庫), 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재출간.
우리들의 건설1947년실업之일본사(実業之日本社) 출판
행복에 관하여1947년유계신서(雄鶏新書) 출판. 가도카와 문고(角川文庫) 재출간.
진실로 살았던 여성들1947년창생사(創生社) 출판
흰 모기장(白い蚊帳)1948년신흥예술사(新興芸術社) 출판
노랫소리여 오라(歌声よおこれ)1948년해방사(解放社) 출판. 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재출간.
여자 구두의 자취1948년고시마야 출판부(高島屋出版部) 출판. 수필집.
도표1948년 ~ 1951년치쿠마쇼보(筑摩書房)에서 제1-3부 출판. 신초문고(新潮文庫),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 가도카와 문고(角川文庫), 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재출간.
미야모토 유리코 선집(宮本百合子選集)1948년 ~ 1949년아게 서점(安芸書房)에서 전15권 출판
작가와 작품1948년야마네 서점(山根書店) 출판. 평론집.
부인과 문학1948년실업之일본사(実業之日本社) 출판. 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재출간. 근대 일본의 부인 작가
평화의 수호(平和のまもり)1949년신일본문학회(新日本文学会) 출판
문예 평론집1949년근대사상사(近代思想社) 출판
모스크바 인상기(モスクワ印象記)1949년도쿄민보출판사(東京民報出版社) 출판
미야모토 유리코 문고(宮本百合子文庫)1949년 ~ 1951년이와사키 서점(岩崎書店)에서 전6권 출판
여성의 역사1949년부인민주클럽출판부(婦人民主クラブ出版部) 출판. 문학에 따라
12년의 편지1950년 ~ 1952년미야모토 겐지(宮本顕治)와 공저. 치쿠마쇼보(筑摩書房)에서 그 1-3 출판. 아오키 문고(青木文庫), 분슌 문고(文春文庫), 신일본 문고(新日本文庫) 재출간.
일본의 청춘(日本の青春)1951년춘조사(春潮社) 출판
젊은 여성을 위하여1951년가와데 쇼보(河出書房) 출판 (시민 문고)


참조

[1] 서적 Becoming Modern Women: Love and Female Identity in Prewar Japanese Literature and Culture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0
[2] 서적 Dictionary of Oriental Literatures: East Asia Charles Tuttle 1978
[3] 서적 Japanese women novelists in the 20th century: 104 biographies, 1900-1993 Museum Tusculanum Press 1994
[4]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Japanese Literature https://archive.org/[...] Kodansha International in collaboration with 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Educational Information 1976
[5] 학술지 Women writers and feminist consciousness in early twentieth-century Japan 1991-06
[6] 서적 Red Love Across the Pacific: Political and Sexual Revolutions of the Twentieth Century Palgrave MacMillan 2015
[7] 학술지 Misreading and Un-Reading the Male Text, Finding the Female Text: Miyamoto Yuriko's Autobiographical Fiction 1997
[8] 서적 Queer Voices from Japan: First-Person Narratives from Japan's Sexual Minorities https://books.google[...] Lexington Books 2017-04-26
[9] 서적 Miyamoto Yuriko: kazoku, seiji, soshite feminizumu Kanrin Shobō 1996
[10] 서적 Turning Pages: Reading and Writing Women's Magazines in Interwar Japan University of Hawaiʻi Press 2006
[11] 서적 Modern Japanese Women Writers as Artists as Cultural Critics: Miyamoto, Ōba, Saegusa 2013
[12] 서적 Red Love Across the Pacific: Political and Sexual Revolutions of the Twentieth Century Palgrave MacMillan 2015
[13] 학술지 Revolutionizing the Japanese Family: Miyamoto Yuriko's "The Family of Koiwai" 2004
[14] 서적 Routledge Handbook of Sexuality Studies in East As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04-26
[15] 백과사전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Britannica Japan 2014
[16] 백과사전 20世紀日本人名事典 日外アソシエーツ 2004
[17] 학술지 NHK経営委員会制度の形成過程--「委員会設置型公企業」の一事例として 国際基督教大学社会科学研究所 2007-03
[18] 간행물 宮本百合子 自己形成への軌跡−デビュー作『貧しき人々の群』が書かれるまで http://atlantic2.gss[...] 2005
[19] 서적 宮本百合子全集 第十八巻 新日本出版社 1981-05-30
[20] 서적 いまに生きる宮本百合子 新日本出版社 2004
[21] 웹사이트 ふぇみんとは https://www.jca.apc.[...] ふぇみん婦人民主クラブ 2024-02-20
[22] 서적 Becoming Modern Women: Love and Female Identity in Prewar Japanese Literature and Culture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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