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게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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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야베 게이준은 오미 국 출신의 무장으로, 본래 승려였으나 아사이 나가마사를 섬기며 무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귀순하여 주고쿠 지방 공략에 참여하고, 돗토리성 성대와 성주를 역임하며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았다. 규슈 정벌과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여했으며, 임진왜란 시기에는 히젠국 나고야에 주둔했다. 만년에는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정무를 담당하다가 159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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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게이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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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미야베 게이준 |
본명 | 미야베 쓰구우루 |
일본어 이름 | 미야베 쓰구우루 (宮部継潤) |
출생 | 1528년 |
사망 | 1599년 4월 20일 |
출생지 | 오미국 |
사망지 | 이나바국 |
자녀 | 미야베 나가후사 |
별명 | 젠쇼보 (善祥坊), 미야베 호인 (宮部法印), 나카쓰카사쿄 호인 (中務卿法印) |
법명 | 게이준 (継潤) |
어린 시절 이름 | 마고하치 (孫八) |
통칭 | 젠쇼보 (善祥坊) |
이명 | 미야베 호인 (宮部法印), 주무쿄 호인 (中務卿法印) |
묘소 | 교토부교토시가미교구의 로잔사 |
씨족 | 간무 헤이시 도히 씨류 미야베 씨 (桓武平氏土肥氏流宮部氏) |
아버지 | 도히 사네쓰구 |
양아버지 | 미야베 기요우루 |
형제자매 | 게이준, 도히 교부쇼유실 |
양자 | 도요토미 히데쓰구 (후에 이연) |
의붓자식 | 미야베 무네하루 (도히 교부쇼유의 아들) |
군사 경력 | |
소속 | 아자이 씨, 오다 씨, 도요토미 씨 |
복무 기간 | 불명 |
계급 | 소헤이 |
지휘 | 미야베 성, 돗토리성 |
참전 전투 | 노라다 전투 (1560년) 가네가사키 공방전 (1570년) 아네가와 전투 (1570년) 오다니성 공방전 (1573년) 규슈 정벌 (1587년) |
주군 | 아자이 나가마사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관위 | |
관위 | 주무쿄 |
2. 생애
비에이 산의 승려 출신인 미야베 게이준은 아사이 나가마사를 섬기다가 1572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설득으로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1] 1573년 아사이 가문이 멸망한 후, 히데요시의 요리키로서 주고쿠 지방 공략에 종군하여 탄바 국 방면 공략에 공헌하였으며, 1580년경에는 도요오카성 성주로서 2만 석을 소유했다.[1] 돗토리성 공략에서는 최전선에서 깃카와 모토하루의 원군과 계속 싸웠다.
1581년, 인바 국 돗토리 성주가 되었다. 혼노지의 변 이후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가 주고쿠 지방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돗토리 성을 지켰다. 1585년 규슈 평정에 참전하여 시마즈 이에히사 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고,[1] 규슈 정벌 후 인바・다지마에서 영지를 추가로 받아 5만 971석을 다스렸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한 후 아들 나가후사에게 가독을 물려주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유지했다.
1596년 은거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토기슈로서 상담역을 맡으며 정무에도 관여했다.[1] 1599년 사망했다.[1]
2. 1. 아자이 가신에서 히데요시 가신으로
오미 국아사이 군 미야베 촌(현 시가현나가하마시 미야베 정)의 작은 호족 출신으로, 본래는 비에이 산의 승려였다고 전해진다.[1] 칸무 헤이 씨도이 씨의 후예로, 사카타 군 사메가이의 국인 도이 마사토시의 아들로 태어나, 아사이 군 미야베 촌의 유지 신사의 승려 미야베 젠쇼보 세이준의 양자가 되어 비에이 산에서 수행을 한 뒤 승려가 되었으나, 고향 미야베로 돌아와 오미의 전국 다이묘인 아사이 나가마사의 가신으로 섬기게 된다.무용이 뛰어난 면모도 있어, 나가마사를 따라 오다 노부나가와의 싸움에서 활약하여, 요코야마 성의 성주였던 하시바 히데요시와 대립했으나, 겐키 3년 (1572년) 10월, 히데요시의 책략에 응하여 그의 여력이 되었다. 『아사이 삼대기』에 따르면, 배반의 증거로 아사이 측의 구니토모 성을 공격했을 때 총격을 받아 부상당했다고 한다. 『신장공기』에는 이보다 조금 이른 8~9월에 노부나가에 의해 미야베 촌의 요새를 지키도록 명령받았다고 한다.
거성인 미야베 성은 오다니 성 공략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덴쇼 원년 (1573년) 8월의 오다니 성 함락까지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 시기에 히데요시의 조카(후의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양자로 삼았지만, 사실상의 인질이었던 것 같으며, 아사이 씨 멸망 후에는 히데요시에게 반환되었다.
2. 2. 주고쿠 공략에서의 활약
덴쇼 5년(1577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리키로 임명되어 주고쿠 지방 공략에 종군하였으며, 주로 히데요시의 동생인 하시바 히데나가를 따르면서 탄바 국 방면 공략에 공헌하였다. 히데나가가 산요 방면으로 향했을 때에는 히데나가를 대신하여 산인 방면 전체의 지휘를 담당하였다.[1] 덴쇼 8년(1580년)경에는 야마나 씨 토벌 후 탄바 도요오카성 성주로서 2만 석을 소유하고 있었다. 돗토리성 공략에서는 최전선에서 깃카와 모토하루의 원군과 계속 싸웠다. 아라키 무라시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무라시게의 고쇼(小姓)에서 히데요시에게 전사(転仕)한 아라키 시게카타(후의 기노시타 시게카타), 탄바 평정을 통해 하시바 측에 종속된 가키야 미쓰나리・도요쓰구, 이즈모 국 출신으로, 한때 야마나카 유키모리와 행동을 함께 했던 가메이 고레노리 등은 모두 게이준의 배하(配下)로서 산인 방면에서의 모리 세력과의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생각된다.[1]덴쇼 9년(1581년) 10월, 산인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인바 국 돗토리 성주가 되었다. 혼노지의 변 때, 돗토리성은 모리 씨에게 공격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거점이었지만,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 세력의 주력이 주고쿠 지방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그 거점을 계속 맡았다는 점에서 히데요시의 두터운 신뢰를 엿볼 수 있다.
2. 3. 규슈・오다와라 정벌 참전과 가독 상속
덴쇼 13년(1585년) 사사 나리마사 공격과 규슈 평정에 난조 모토쓰구, 가메이 시게노리, 아라키 시게카타, 가키야 미쓰나리 등의 군을 거느리고 참전하여 휴가국 다카기에서 시마즈 이에히사 군을 격퇴했다(네시로자카 전투).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의 활약을 "법인(게이준)의 일은 지금에 와서 시작된 솜씨가 아니다" (『가와스미 태합기』)라고 칭찬했다고 한다.[1] 규슈 정벌 후, 인바・다지마 국내에서 가증되어 5만 971석을 지행했다. 군역은, 앞서 언급한 인바・다지마의 고쿠진들을 포함해서 5,350명으로 되어 있다 (미야베 문서).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전했다. 같은 해에 적자 나가후사에게 가독을 물려주었지만, 형식적인 것이었을 뿐 본인이 은거한 것은 아니며, 전장에서의 활동은 줄었지만, 정무상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2. 4. 만년
1596년 고령을 이유로 은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신임을 받아, 만년에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로서 상담역을 맡으면서도, 히데요시 중신으로서 정무에도 관여했다.[1]1599년 3월 25일 사망했다. 향년은 64세, 72세 등 여러 설이 있다.[1]
3. 인물・일화
『무가사기』에 따르면, 아자이 가의 신하 시절 활의 명수인 도미나가 신베라는 자와 토지 문제로 다툰 적이 있는데, 이때 게이준은 도미나가가 쏜 화살 세 발을 창으로 쳐 떨어뜨렸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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