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이에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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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 이에히사는 1547년에 태어난 시마즈 다카히사의 아들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이며 센고쿠 시대에 활약한 무장이다. 15세에 첫 출진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오키타나와테 전투, 헤쓰기가와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시마즈 가문의 세력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1587년, 규슈 정벌 중 사도와라 성에서 급사했으며, 독살설 등 사망 원인에 대한 여러 추측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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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이에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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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시마즈 이에히사 |
출생 | 1547년 |
사망 | 1587년 7월 10일 (향년 39-40세) |
출생지 | 이자쿠 성 |
사망 장소 | 알 수 없음 |
별명 | 알 수 없음 |
계급 | 알 수 없음 |
소속 | [[File:Maru_juji.svg|15px]] 시마즈 씨 |
가문 | Maru ni Jū-monji (Kutsuwa) inverted.svg 원형에 십자(丸に十の字) |
묘소 | 히오키시에이요시의 바이텐지 터지정문화재 목록 -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공식 홈페이지 |
계명 | 쵸우사쿠바이텐다이젠죠우몬(長策梅天大禅定門) |
관위 | 나카쓰카사노타이후 (中務大輔), 주쇼(中書) |
가계 | |
아버지 | 시마즈 다카히사 |
어머니 | 혼다 지카야스의 딸 |
형제 |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도시히사 시마즈 이에히사 |
배우자 | 정실: 가바야마 요시히사의 딸 |
자녀 | 시마즈 도요히사 시마즈 다다나오 딸 (네지메 시게히라의 부인) 딸 (사타 히사요시의 부인) 딸 (시마즈 히사노부의 부인, 사가라 요리야스의 부인) 소우테츠 |
경력 | |
직위 | 사도와라 성 성주 |
임관 시작 | 1579년 |
임관 종료 | 1587년 |
전임 | 이토 요시스케 |
후임 | 시마즈 도요히사 |
주요 전투 | 미미가와 전투 (1578년) 미나마타 성 공방전 (1581년) 오키타나와테 전투 (1584년) 다치바나야마 성 공략 (1586년) 규슈 정벌 (1586년-1587년) |
2. 생애
덴분 16년(1547년)에 시마즈 다카히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조부인 시마즈 다다요시로부터 "군법과 전술에 묘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다.[5]
에이로쿠 4년(1561년) 7월, 오스미 국의 기모쓰키 가문(肝付氏)과의 메구리자카 전투(廻坂の合戦)에서 15세의 나이로 첫 출진하여, 적장 구도 오키노카미(工藤隠岐守)를 창으로 찔러 승리하였다. 그 후 휴가 사도와라성 성주로서 분고의 오토모 가문(大友氏)의 침공을 요격하여 격파하는 대승을 거둔 미미가와 전투, 히젠의 류조지 가문을 대파하여 몰락을 결정지은 오키타나와테 전투, 오토모 가문의 원군으로 온 도요토미 연합군 선발대를 격파한 헤쓰기가와 전투 등 시마즈 가문의 주요 전투에 대부분 참전하였다.
특히 오키타나와테・헤쓰기가와 두 전투는 이에히사 자신이 총 지휘를 맡아 시마즈 군을 대승으로 이끈 것으로, 두 야전에서 세 다이묘의 수급(류조지 다카노부, 조소카베 노부치카, 소고 마사야스)을 얻었다. 야전에서 다이묘의 수급을 취한 전공은 센고쿠 시대를 통틀어도 호조 우지야스가 가와고에성 전투에서 우에스기 도모사다의 수급을,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한 것 이외에는 없다.
덴쇼 3년(1575년), 시마즈 가문의 3주 평정에 대한 신불의 가호에 감사하고자 이세 신궁 등에 참배하기 위해 상락(上洛, 교토에 감)하였다.[6] 렌가(連歌, 일본 전통 시가의 일종) 명인 사토무라 쇼하의 제자 신젠(心前)의 집에 머물면서, 쇼하의 주선으로 구게(公家, 조정의 귀족) 및 사카이(堺) 상인들과 교류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아케치 미쓰히데와도 교류하였다고 한다. 이때 여러 성을 방문했으며, 스오 산큐다케 성이나 셋쓰 이케다 성에 대한 평가를 『중서 이에히사 공 어상경 일기』에 기록하였다.[6]
1587년 6월 5일, 거성 사도와라 성에서 급사하였다.[14] 사망 원인은 확실하지 않으나, 에도 시대부터 히데나가에 의해 자문독으로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었고,[14] 도요토미 혹은 오토모, 이토 씨 잔당, 또는 시마즈 본가에 의한 독살, 쓰가무레성 공략 중에 입은 상처가 악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도요토미와 시마즈 양측 모두 이에히사를 독살해야 할 이유가 적고, 히데나가의 측근인 후쿠치 나가미치가 요시히로에게 보낸 서신(같은 해 5월 13일 자)에 이에히사가 병을 앓고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일반적으로는 병사한 것으로 여겨진다.[14] 향년 41세.
2. 1. 약력
덴분 16년(1547년)에 시마즈 다카히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조부인 시마즈 다다요시로부터 "군법과 전술에 묘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다.[5]어렸을 때부터 조부 시마즈 다다요시로부터 “병법과 전술의 묘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히사는 그 기대에 부응하여 평생동안 수많은 군공을 쌓아 올렸다.
에이로쿠 4년(1561년) 7월, 오스미 국의 기모쓰키 가문(肝付氏)과의 메구리자카 전투(廻坂の合戦)에서 15세의 나이로 첫 출진하여, 적장 구도 오키노카미(工藤隠岐守)를 창으로 찔러 승리하였다.
그 후로 휴가(日向) 사도와라성 성주로서 분고의 오토모 가문(大友氏)의 침공을 요격하여 격파하는 대승을 거둔 미미가와 전투, 히젠(肥前)의 류조지(龍造寺) 군을 대파하여 류조지 가문의 몰락을 결정지은 오키타나와테 전투, 오토모 가문의 원군으로 온 도요토미 연합군 선발대를 격파한 헤쓰기가와 전투 등 시마즈 가문의 주요 전투에 대부분 참전하여 전장에서 뛰어난 전술능력을 자랑하였다.
특히 오키타나와테・헤쓰기가와 두 전투는 이에히사 자신이 총 지휘를 맡아 시마즈 군을 대승으로 이끈 것으로, 두 야전에서 세 다이묘의 수급(류조지 다카노부, 조소카베 노부치카, 소고 마사야스)을 얻었다. 야전에서 다이묘의 수급을 취한 전공은 센고쿠 시대를 통틀어도 호조 우지야스가 가와고에성 전투에서 우에스기 도모사다의 수급을,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한 것 이외에는 달성된 적이 없다. 두 전투의 대승은 이에히사의 뛰어난 전술 수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오구치 성에 갇힌 히시가리 씨 및 사가라 씨로부터의 원병에 대해 이에히사는 음력 5월 8일에 토가미가오와 이나리 산에 각각 오노 타다무네, 미야하라 카게타네를 지휘관으로 하는 복병을 숨겨두고, 자신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짐 수송 부대를 가장한 300명을 이끌고 오구치 성의 기슭 길을 통과하여 유인된 오구치 성 병사를 복병에게 유인하여 136명의 수급을 베었다.
2. 2. 상락
덴쇼 3년(1575년), 시마즈 가문의 3주 평정에 대한 신불의 가호에 감사하고자 이세 신궁 등에 참배하기 위해 상락(上洛, 교토에 감)하였다.[6] 이에히사는 렌가(連歌, 일본 전통 시가의 일종) 명인 사토무라 쇼하의 제자 신젠(心前)의 집에 머물면서, 쇼하의 주선으로 구게(公家, 조정의 귀족) 및 사카이(堺) 상인들과 교류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아케치 미쓰히데와도 교류하였다고 한다.이에히사는 상경 여행의 상세한 내용을 『중서 이에히사 공 어상경 일기』에 기록하였다. 이가시 가미고베의 와카야마 주변을 지나 아보촌에서 숙박하였고, 교토에서는 신젠의 안내로 오사카 혼간지 공격에서 철수한 오다 노부나가의 대군을 구경했는데, 노부나가는 말 위에서 졸고 있었다고 한다. 5월에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안내로 오미국 사카모토성을 견학하고 농성 대비 태세에 감명을 받았다. 이후 야마토국 다몬 산성에서 양귀비의 방과 야마토의 경치를 감상하고, 성주 야마오카 가게스케로부터 산딸기를 곁들인 술을 대접받았다.[6]
이때 여러 성을 방문했으며, 스오 산큐다케 성이나 셋쓰 이케다 성에 대한 평가를 『중서 이에히사 공 어상경 일기』에 기록하였다.[6]
2. 3. 오키타나와테 전투
덴쇼 12년(1584년) 3월, 시마즈군은 아리마 하루노부를 구원하고 류조지 가문에 맞서기 위해, 이에히사를 총대장으로 시마바라반도로 향하게 했다. 시마즈군은 아리마 군세와 합류하여도 5,000에서 8,000명 정도였던 것에 비해, 류조지군은 18,000에서 60,000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11] 그러나 이에히사는 류조지군을 '''오키타나와테'''라고 불리는 좁은 습지대로 유인하고, 활과 철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적군을 혼란시키는 쓰리노부세(釣り野伏せ)라는 시마즈 군 특유의 전법을 이용하여 총대장 류조지 다카노부를 비롯한 일족과 중신을 포함한 류조지군을 전사시켰다.그 뒤, 주요 전장은 다시 지쿠젠으로 옮겨져 히고에 있던 시마즈군은 북진을 노렸지만, 다카노부의 사촌 동생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이 철저 항전 의지를 보이며 저항했기 때문에[12], 일단 단념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시마즈 가문의 세력은 갈수록 강해져, 류조지 가문은 항복에 가까운 형태로 시마즈 가문과 화의를 맺고 세력권 온존을 꾀하였다.[13]
이 전투의 승리로 시마즈 가문은 규슈에서 으뜸가는 세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2. 4. 헤쓰기가와 전투
1586년, 규슈 제패를 목표로 하던 시마즈 가문은 분고 국의 오토모 가문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오토모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히데요시는 이를 받아들였다. 센고쿠 히데히사를 대장으로, 조소카베 모토치카와 노부치카 부자, 소고 마사야스 등 총 6천여 명의 도요토미 연합군 선발대가 규슈 평정을 위해 상륙했다.[1]이에 시마즈 이에히사는 이들을 맞아 헤쓰기가와(戸次川)에서 전투를 벌였다. 양측 도합 4천여 명이 전사하는 난전 끝에, 도요토미 측 장수인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가 전사하면서 도요토미 연합군은 궤멸되었고, 시마즈 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헤쓰기가와 전투)[1]
2. 5. 의문의 죽음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서 시마즈군이 패퇴하자, 이에히사는 봉토를 조건으로 시마즈 요시히사, 요시히로, 도시히사 세 형보다 먼저 도요토미 히데나가 군세와 단독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1587년 6월 5일, 거성 사도와라 성에서 급사하였다.[14]사망 원인은 확실하지 않으나,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에도 시대부터 히데나가에 의해 자문독으로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었고,[14] 도요토미 혹은 오토모, 이토 씨 잔당, 또는 시마즈 본가에 의한 독살, 쓰가무레성 공략 중에 입은 상처가 악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도요토미와 시마즈 양측 모두 이에히사를 독살해야 할 이유가 적고, 히데나가의 측근인 후쿠치 나가미치가 요시히로에게 보낸 서신(같은 해 5월 13일 자)에 이에히사가 병을 앓고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일반적으로는 병사한 것으로 여겨진다.[14] 향년 41세.
3. 평가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에히사를 "지극히 우수한 카피탄(무장)"[7]이자 "용감한 전사이자 노련한 주장"[8]이라고 평가했다. 프로이스는 일관되게 이에히사를 "나카즈카사(=중무)"라고 표기했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차를 권하자 "다도에 대해 잘 모른다"며 온수를 청했고, 렌가(連歌, 일본 전통 시가의 일종) 모임에도 초대받았지만 사퇴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교양적인 면모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키타나와테 전투 이후 이에히사가 사도와라 영지 3만 석을 받았다는 오해가 있지만,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분 주인장(朱印狀)과 이후 성립하는 사도와라 번(시마즈 이에히사)이 3만 석이었던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쓰가와 전투 후, 간조 때문에 출항하지 못하는 조소카베 모토치카에게 가와카미 히사토모를 보내 만조까지 진을 풀도록 배려했다.[9]
이에히사는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지만, 요시히사의 격려로 학문과 무예에 정진하여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성장했다.[10]
이에히사의 처남 가바야마 다다스케(가바야마 쇼켄)는 요시히로가 이에히사의 전공을 시샘했다고 평가했다.
3. 1. 군사적 재능
어렸을 때부터 조부 시마즈 다다요시에게 "병법과 전술의 묘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다.[5] 이에히사는 그 기대에 부응하여 평생동안 수많은 군공을 쌓아 올렸다.에이로쿠 4년(1561년) 7월 기모쓰키 가문(肝付氏)과의 메구리자카 전투(廻坂の合戦)에서 약관 15세의 나이로 첫 출진하여, 적장 구도 오키노카미(工藤隠岐守)와 창을 맞대고 싸워 승리하였다.
이후 휴가(日向) 사도와라성 성주로서 분고의 오토모 가문(大友氏)의 침공을 요격하여 격파하는 대승을 거둔 미미가와 전투, 히젠(肥前)의 류조지 가문을 대파하여 류조지 가문의 몰락을 결정지은 오키타나와테 전투, 오토모 가문의 원군으로 온 도요토미 연합군 선발대를 격파한 헤쓰기가와 전투 등 시마즈 가문의 주요 전투에 대부분 참전하여 전장에서 뛰어난 전술능력을 자랑하였다.
특히 오키타나와테 전투와 헤쓰기가와 전투는 이에히사가 직접 총지휘를 맡아 시마즈 군을 대승으로 이끈 것으로, 두 야전에서 세 다이묘의 수급(류조지 다카노부, 조소카베 노부치카, 소고 마사야스)을 얻었다. 야전에서 다이묘의 수급을 취한 전공은 센고쿠 시대를 통틀어도 호조 우지야스가 가와고에성 전투에서 우에스기 도모사다의 수급을,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한 것 이외에는 달성된 적이 없다.
미미가와 전투로 오토모 가문이 쇠퇴하자 히젠의 류조지 다카노부가 대두하여, 규슈의 패권을 두고 시마즈 가문과 류조지 가문이 서로 다투었다. 덴쇼 12년(1584년) 3월, 이에히사는 아리마 하루노부를 구원하고 류조지 가문에 맞서기 위하여 시마바라반도로 향했다. 시마즈군은 아리마의 군세와 합류하여도 5,000에서 8,000명 정도였던 것에 비하여, 류조지군은 18,000에서 60,000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11] 그러나 이에히사는 류조지군을 '''오키타나와테'''라고 불리는 좁은 습지대로 유인하고, 활과 철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적군을 혼란시키는 쓰리노부세(釣り野伏せ)라는 시마즈 군 특유의 전법을 이용하여 총대장 류조지 다카노부를 비롯하여 류조지 군을 전사시켰다.
규슈 제패를 목표로 한 시마즈 가문은 분고의 오토모 가문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받아들여, 덴쇼 14년(1586년), 센고쿠 히데히사, 모토치카・노부치카 부자, 소고 마사야스 등 총 6천여 명의 도요토미 연합군 선발대가 규슈에 상륙하여, 헤쓰기가와(戸次川)를 사이에 두고 이에히사가 이끄는 시마즈군과 대치했다. 전투는 양군 도합 4천여 명이 전사한 난전이었으나, 도요토미 측의 장수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가 전사하자 도요토미 연합군의 전열이 무너져 시마즈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3. 2. 성격 및 일화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에히사를 "지극히 우수한 카피탄(무장)"이자 "용감한 전사이자 노련한 주장"이라고 평가했다.[7][8] 프로이스는 일관되게 이에히사를 "나카즈카사(=중무)"라고 표기했다.덴쇼 3년(1575년), 시마즈 가문의 3주 평정을 도운 신불의 가호에 감사하기 위해 이세 신궁 등에 참배하고자 상경했을 때, 아케치 미쓰히데가 차를 권하자 이에히사는 "다도에 대해 잘 모른다"며 온수를 청했다. 또한 이때 열린 렌가(連歌, 일본 전통 시가의 일종) 모임에도 초대받았지만 사퇴했다.
오키타나와테 전투 이후, 이에히사가 사도와라 영지 3만 석을 받았다는 오해가 있지만,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분 주인장(朱印狀)에 의한 국할, 그리고 후에 성립하는 사도와라 번(시마즈 이에히사)이 3만 석이었던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쓰가와 전투 후, 간조 때문에 출항하지 못하고 있는 조소카베 모토치카에게 가와카미 히사토모를 보내, "사쿄노스케(노부치카)를 토벌한 것은 궁시의 일이므로 시비에 걸릴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전하며, 만조까지 진을 풀도록 했다.[9]
이에히사는 세 명의 형과 달리 정실이 아닌 측실에게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다. 형제 4명이 함께 가고시마 요시노에서 말 몰이를 했을 때, 도시히사가 "말의 털색깔은 대부분 어미 말과 닮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라고 말했다. 요시히사는 "사람은 짐승이 아니니 마음의 덕이라는 것이 있다. 학문을 하여 덕을 닦으면, 부모보다 나아지고, 덕을 소홀히 하면, 부모보다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 후 이에히사는 학문과 무예에 정진하여 문무의 재능이 뛰어나게 되었다.[10]
이에히사의 처남인 가바야마 다다스케(가바야마 쇼켄)는 요시히로가 이에히사의 전공을 시샘하는 모습은 총대장으로서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4. 가계
시마즈 요시히사, 요시히로, 도시히사와는 이복 형제이다. 아내는 중신 가바야마 요시히사(이에히사에게 고금전수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의 딸이다. 자식으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퇴각할 때 전위대를 맡아 장렬하게 전사한 도요히사, 도고 씨에게 양자로 들어간 다다나가가 있다. 차녀는 시마즈 씨의 서가인 사타 씨의 사타 구게이에게, 셋째 딸 소테쓰(법명: 1583년 - 1629년 9월 22일[4])는 사가라 씨가로였던 이누도 요리이에의 아들 사가라 요리아스에게 시집갔다. 형인 요시히로의 삼남으로 초대 사쓰마 번주인 시마즈 다다쓰네도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휘를 받아 이에히사를 칭했지만, 이쪽은 조카에 해당한다.
참조
[1]
웹사이트
島津家久(1)(読み)しまづ いえひさ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島津家久(1)」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6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3]
웹사이트
指定文化財一覧表 - 鹿児島県日置市公式ホームページ
http://www.city.hiok[...]
日置市
2011-07-07
[4]
문서
남등만면록
[5]
문서
島津義弘公記
[6]
서적
戦国の城の一生―つくる・壊す・蘇る―
吉川弘文館
2018
[7]
문서
「フロイス日本史 豊後編III」67章
[8]
문서
「フロイス日本史 豊後編III」70章
[9]
문서
本藩人物誌 川上久右衛門久智의 항
[10]
문서
日本戦史 九州陣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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