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에노 야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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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에노 야스시는 1924년 도쿄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일본의 경제 관료이다.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7년 일본은행에 입행하여 부총재를 거쳐 1989년 총재가 되었다. 총재 재임 기간 중 버블 경제 붕괴를 위한 금융 긴축 정책을 시행했으나, 결과적으로 일본의 장기 불황인 '잃어버린 10년'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4년 총재에서 물러난 후에도 인플레이션 없는 경제 성장을 주장하며 일본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2012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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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노 야스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미에노 야스시 |
원어 이름 | 三重野 康 |
로마자 표기 | Mieno Yasushi |
출생일 | 1924년 3월 17일 |
출생지 | 오이타, 일본 |
사망일 | 2012년 4월 15일 |
사망 장소 | 알 수 없음 |
직책 | |
직위 | 일본은행 총재 |
대수 | 26대 |
임기 시작 | 1989년 12월 17일 |
임기 종료 | 1994년 12월 16일 |
총리 |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무라야마 도미이치 |
이전 | 스미타 사토시 |
이후 | 마쓰시타 야스오 |
학력 | |
모교 | 도쿄 제국대학 |
2. 생애
1924년 도쿄부에서 태어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어린 시절 만주에서 성장했다.[18][19] 1947년 도쿄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은행에 입행하여, 부총재를 거쳐 총재까지 역임했다.
1980년대 일본의 금리 인하 국면에서 금융 긴축의 필요성을 느껴 플라자 합의 이후 금리 인상을 시도했으나, 대장성과 외국의 압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금리 인상이 늦어지면서 거품경제 형성을 막지 못했다.
총재 취임 후에는 금융 긴축을 실시하여 거품경제를 붕괴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경제 연착륙에 실패하고 금융 완화 조치가 늦어져 잃어버린 10년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2년에는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일은특융을 통한 공적 자금 투입에 합의했으나, 재계와 대장성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1994년 총재에서 물러난 후에도 인플레이션 없는 경제 성장을 주장하며 일본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5년부터 교린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고, 스모에 대한 조예도 깊어 요코즈나심의위원회 위원으로도 참여했다. 2012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21][22]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24년 도쿄부에서 태어났다.[18][19]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유년 시절을 만주에서 보냈다.[18][19] 중학교 1학년 1학기부터 2학년 1학기까지 오이타현 백모(큰어머니) 집에서 거주하며 오이타 중학교를 다녔다.[18][20]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미에노는 만주[18]를 자신의 고향으로, 오이타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겼다.[20]1947년 도쿄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18]
2. 2. 일본은행 입행 및 경력
1947년 도쿄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10월 일본은행에 입행했다.[18][19] 채용시험장에서 당시 채용부장으로 훗날 총재가 되는 사사키 다다시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마쓰모토지점장, 총무부장, 영업국장, 이사를 거쳤다.[18][19] 1975년 4월부터 1978년 2월까지는 일본은행 금융부장을 역임했다.[4]1984년 12월, 부총재에 취임했다.[18][19] 당시 총재였던 스미타 사토시는 대장성 출신이었던 반면, 미에노는 일본은행 출신이었기에 스미타를 제치고 실질적인 일본은행의 1인자로서 금융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9년 12월, 스미타 사토시의 뒤를 이어 총재로 취임했다.[5] 1994년 12월에 총재에서 퇴임했다.[5]
2. 3. 은퇴 이후
1995년부터 1999년까지 교린 대학 사회과학부 및 종합정책학부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교린 대학 대학원 국제협력연구과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2010년 9월부터 10월까지 『도쿄 신문』 석간지에 회상록 「이 길」을 연재했다. 스모에 대한 조예가 깊어 1990년대부터 2005년까지 요코즈나심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21][22]2012년 4월 15일 도쿄도의 한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88세.[21][22]
3. 일본은행 총재로서의 활동 및 평가
버블 경제로 땅값이 올라 일반 서민들이 토지를 구매하기 어려워진 상황을 해결하려 한 미에노를 언론에서는 "헤이세이의 오니헤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지나친 버블 붕괴는 결과적으로 실패하여, 이후 디플레이션(잃어버린 10년, 잃어버린 20년, 잃어버린 30년)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2000년 FRB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미국의 IT 버블을 연착륙시킨 것과 비교되면서 미에노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당시 미에노를 띄워주기만 했던 언론의 식견을 묻는 목소리도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미국, 영국 등에서 중앙 은행의 양적 금융 완화 정책을 통해 경기 회복을 이룬 것과 대비된다.
2013년 아베노믹스 이후에는 리플레파가 세력을 키우면서 미에노와 당시 일본은행에 대한 비판이 더욱 커졌다. 특히 버블 붕괴 후 금융 완화가 늦었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일본 경제에 금융 긴축 환경이 지속된 영향이 컸다는 지적이 나온다.[16]
3. 1. 플라자 합의와 금리 정책
미에노 야스시는 1980년대 일본의 금리 인하 국면에서 금융 긴축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금리 인상을 추진했지만, 대장성과 외국의 압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총재였던 스미타 사토시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폴 볼커와의 회담에서 금리 인하를 약속하자 이에 반대하며 금리 인상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6]3. 2. 거품 경제 붕괴와 '잃어버린 10년'
미에노 야스시는 총재 취임 직후인 1989년 12월부터 1990년 8월까지 일본은행의 금리를 대폭 인상했다.[6] 이로 인해 1980년대 일본 자산 거품이 붕괴되었다.[6] 버블 경제에 따른 지가 상승으로 일반 서민들의 토지 구매가 어려워지자, 언론에서는 미에노를 "헤이세이의 오니헤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버블 붕괴 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여, 이후 디플레이션(잃어버린 10년, 잃어버린 20년, 잃어버린 30년)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92년에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총리대신과 함께 일본은행 특별 융자 형태로 공적 자금 투입을 시도했으나, 재계와 대장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미야자와는 훗날 당시 정관민 주요 인물 중 위기의식을 공유한 것은 미에노뿐이었다고 회고했다.[14]
2000년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이 미국의 IT 버블을 연착륙시킨 것과 비교되면서, 미에노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세계 금융 위기를 겪은 미국, 영국 등에서 중앙 은행의 양적 금융 완화 정책을 통해 경기 침체를 빠르게 벗어난 것과 대비된다.
2013년 아베노믹스 이후에는 리플레파가 세력을 키우면서 미에노와 당시 일본은행에 대한 비판이 더욱 높아졌다. 특히 버블 붕괴 후의 금융 완화가 늦었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결과, 일본 경제에 금융 긴축 환경이 지속되어 악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 제기된다.[16]
3. 3. 공적 자금 투입 시도와 실패
1992년(헤이세이 4년),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함께 일본은행 특별 융자 형태로 공적 자금 투입을 모색했다.[14] 그러나 재계와 대장성의 반대로 미야자와 총리가 방침을 철회하면서 무산되었다. 미야자와 총리는 훗날 당시 정·관·민의 주요 인물 중에서 위기 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것은 미에노뿐이었다고 회고했다.[14] 미에노는 일본은행 특별 융자를 통한 공적 지원을 미야자와 총리에게 약속했으나, 미야자와 총리가 각 방면의 반대에 부딪혀 무너진 것에 대해 매우 격분했다고 한다.[15]4. 사상 및 어록
미에노 야스시는 "인플레이션 없는 경제 성장"을 주창하였으며, 퇴임 이후에도 일본은행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7]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일본 경제와 중앙은행』 (동양경제신보사, 1995년): 총재 재임 중 강연록
- 『붉은 석양 뒤에』 (신초샤, 1996년): 자전적 에세이
- 『이(利)를 보고 의(義)를 생각하다』 (주오코론신샤, 2000년): 강의록, 권말에 친구이자 일본은행 부총재인 후지와라 사쿠야와의 대담 수록.
- 일본 경제와 중앙 은행 - 전 일본은행 총재 강연록일본어 (1995)
- 이익을 보고 의를 생각하다: 미에노 야스시의 금융 정책 강의일본어 (2000)
OCLC/월드캣에 따르면, 미에노 야스시에 관한 저술은 2개 언어로 된 10개의 출판물, 7개의 작품, 50개 이상의 도서관 소장품을 포함하고 있다.[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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