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고레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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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일본의 정치가이자 은행가로, 1854년에 태어나 1936년 암살당했다. 그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일본의 재정을 담당하며 여러 차례 재무대신을 역임했고, 제20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러일 전쟁 당시 외채를 성공적으로 조달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했으며, 대공황 시기에는 '다카하시 재정'으로 불리는 과감한 정책을 통해 일본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정책은 케인즈 경제학의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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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고레키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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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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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카하시 고레키요 |
원어 이름 | 高橋 是清 |
로마자 표기 | Takahashi Korekiyo |
출생일 | 1854년 7월 27일 |
출생지 | 에도, 일본 |
사망일 | 1936년 2월 26일 |
사망지 | 아카사카, 도쿄, 일본 |
사망 원인 | 암살 (총상) |
묘소 | 다마 레이엔 묘지, 후추, 도쿄 |
배우자 | 다카하시 시나(1865–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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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입헌정우회 |
관직 | |
내각총리대신 | 재임 기간: 1921년 11월 13일 – 1922년 6월 12일 재임 기간 (임시): 1932년 5월 16일 – 1932년 5월 26일 전임: 우치다 고사이 (대리) 후임: 가토 도모사부로, 사이토 마코토 |
대장대신 | 재임 기간: 1913년 2월 20일 – 1914년 4월 16일, 1918년 9월 29일 – 1922년 6월 12일, 1927년 4월 20일 – 1927년 6월 2일, 1931년 12월 13일 – 1934년 7월 8일, 1934년 11월 27일 – 1936년 2월 26일 |
농림대신 | 재임 기간: 1925년 4월 1일 – 1925년 4월 17일 |
상공대신 | 재임 기간: 1925년 4월 1일 – 1925년 4월 17일 |
농상무대신 | 재임 기간: 1924년 6월 11일 – 1925년 4월 1일 |
의회 경력 | |
귀족원 의원 | 재임 기간: 1905년 1월 29일 – 1924년 3월 24일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이와테 1구 재임 기간: 1924년 5월 10일 – 1928년 1월 21일 |
작위 및 훈장 | |
작위 | 자작 |
훈장 | 대훈위 국화대수장, 훈1등 욱일대수장 |
2. 생애
1854년 9월 19일 막부 어용 화가 가와무라 쇼에몬(川村庄右衛門)의 아들로 에도에서 태어났으며, 곧 센다이번 아시가루 다카하시 간쿠지(高橋覚治)의 양자로 보내졌다.[2][10] 요코하마시의 미국인 의사이자 개혁 교회 선교사인 제임스 커티스 헵번[48]의 사숙 헵번숙/ヘボン塾일본어(지금의 메이지 가쿠인 대학)에서 영어를 배웠다.
1867년 센다이 번주 다테 요시쿠니의 명령에 의해 가쓰 가이슈의 장남 가쓰 고로쿠/勝小鹿일본어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3][11] 그러나 요코하마에 체류 중이던 미국인 무역상 유진 밴 리드[11]에게 학비와 여비를 착복당했고, 홈스테이 부모에게 속아 연기봉공[12] 계약서에 서명, 오클랜드의 브라운가에 팔려가 목동이나 포도원에서 노예처럼 취급받았다.[13] 여러 집을 전전하며 저항하여 파업을 시도하는 등 고난을 겪었으나, 이 기간 동안 영어 회화와 읽기 쓰기 능력을 습득했다. 1868년 귀국했다.[13]
귀국 후 187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알게 된 모리 아리토모의 추천으로 문부성에 들어가 십등 출시가 되었다. 영어 교사도 겸임하며 대학예비문에서 가르치는 한편, 사가현의 타이코우료나 스다가쿠샤 등 당시의 진학 예비학교 몇 곳에서 강단에 섰고, 그 중 폐교 직전이었던 교류학교(현: 카이세이 중고등학교)의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교류학교 제자로는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와 발틱 함대를 격멸한 해군 중장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있다.
문부성, 농상무성의 관료로 활약하며, 1884년 농상무성의 외국으로 설치된 특허청(당시 특허국)의 초대 특허청장(당시 국장)에 취임하여 일본의 특허 제도를 정비했다. 1889년 관료로서의 경력을 중단하고 페루로 건너가 은광 사업을 하지만 이미 폐광이었기에 실패하고, 영어 교사 시절부터의 친구 야마구치 신과 고생을 함께 한다. 1892년 귀국 후 노숙자가 되지만, 가와다 고이치로의 부탁으로 일본은행에 입행한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행 부총재로서, 비서역 후카이 에이고를 동반하여 전비 조달을 위해 전시 외채의 공모로 영국으로 향했다. 투자자들은 병력 차이에 의한 일본 패배 예상, 일본 정부의 지불 능력, 공채 인수에 대한 군비 제공이 중립 위반이 될 우려가 있었다. 그에 대해 다카하시는,
- 이 전쟁은 자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것이며 일본은 만세일계(万世一系)의 황실 아래에서 일치단결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울 각오이다.
- 지불 능력은 관세 수입이다.
- 중립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남북 전쟁 중에 중립국이 공채를 인수한 사례가 있다.
라고 반론했다. 관세 담보에 대해 영국인을 파견하여 세관 관리하는 안에 대해서는 "일본국은 과거에 외채·내국채로 한 번도 이자 지불을 지연한 적이 없다"라고 거절했다. 협상 결과, 당시 홍콩상하이은행의 런던 지점장 유웬 캐머런(데이비드 캐머런/Ewen Cameron (banker)영어의 증조부) 등이 공채 발행에 응했고[14], 제이콥 시프 등 뉴욕의 인맥도 외채를 인수하여 공채 모집은 성공하여 전비 조달이 가능하게 되었다.
1905년 귀족원 의원에 칙선된다. 1911년 일본은행 총재에 취임한다.
1913년 제1차 야마모토 내각의 대장대신에 취임, 이때 입헌정우회에 입당한다. 하라 다카시가 조각했을 때에도 대장대신이 되었고, 하라가 암살된 직후 재정 정책의 기량을 평가받아 제20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 동시에 입헌정우회의 제4대 총재가 된다. 그러나 다카하시 자신도 예상치 못한 총재 취임이었기에, 중심인물인 하라를 잃고 혼란에 빠진 정우회를 재건할 수 없었고, 각료 불화의 결과 내각은 반년 만에 와해된다.
정우회는 그 후에도 표류하고, 기요우라 게이고의 초연내각이 등장했을 때는 지지·불지지를 둘러싸고 대분열이 일어났고, 탈당한 도코나미 다케지로 등은 정우본당을 결성하여 기요우라를 지지했다. 한편 다카하시가 이끄는 정우회는, 헌정회 및 혁신구락부와 함께 호헌삼파를 결성하여 제2차 호헌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기요우라는 중의원 해산으로 맞섰지만, 이에 의해 공시된 제1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다카하시는 은퇴하여 작위를 적남에게 물려주고 하라의 선거구였던 모리오카시의 구 이와테현 1구에서 출마하기로 했다. 작위를 양도한 것은 화족에게는 중의원 의원으로서의 피선거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요우라 내각을 "귀족원 내각""특권 내각" 등으로 공격하는 와중에 그 총재가 자작인 채로는 역시 불편했던 것도 그 배경에 있다. 정우회 현 총재로서, 절친이었던 전 총재의 선거구에서 출마하고 싶다는 것은 다카하시의 간절한 소망이었지만, 다카하시는 여당 정우본당의 대립 후보 타고 카즈타미에게 예상치 못한 고전을 했다. 결국 다카하시는 49표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을 거머쥐었고,[15][16] 선거는 호헌삼파의 압승으로 끝났다. 기요우라 내각은 여기서 총사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새롭게 총리대신에 취임한 헌정회 총재 가토 다카아키는 다카하시를 농상무상에 임명한다.
이후, 다카하시는 정우회 총재를 다나카 기이치에게 양보하고 정계를 은퇴하지만, 1927년에 쇼와 금융공황/昭和金融恐慌일본어이 발생하여 와해된 제1차 와카쓰키 내각에 대신하여 조각한 다나카의 부탁으로 3번째로 장상(蔵相)에 취임한다. 다카하시는 일본은행 총재가 된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협력하여 지불 유예 조치를 실시하는 한편, 한쪽 면만 인쇄한 급조의 200엔 지폐를 대량 발행하여 은행 점포에 쌓아놓고 보여줌으로써 예금자를 안심시켜 금융 공황을 진정시켰다.
1931년 정우회 총재 이누카이 쓰요시가 조각했을 때에도 이누카이의 부탁으로 4번째로 장상에 취임하여 금 해금(금 수출 재금지), 사상 최초의 국채의 일본은행 직접 인수에 의한 정부 지출 증액, 시국구조 사업으로 세계 대공황으로 혼란에 빠진 일본 경제를 디플레이션에서 세계 최고 속도로 탈출시켰다. 이것은 케인즈가 "유효 수요의 이론"에 도달한 것과 거의 동시이며, 「일반 이론」간행 4년 전이었다. 다카하시가 케인즈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없지만, 이시바시 단잔이나 후카이 에이고라는 고도로 훈련된 혁신적인 상담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5·15 사건에서 이누카이가 암살되었을 때 총리대신을 임시 겸임한다. 이어 친우인 사이토 마코토가 조각했을 때에도 유임한다. 1934년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의 오카다 내각에서 6번째로 장상에 취임한다. 당시 케인즈 정책은 거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이에 따라 고율의 인플레이션 발생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이를 억제하기 위해 군사 예산을 억제하려고 했다. 육군·해군으로부터 각 4000만 엔의 증액 요구에 대해 다카하시는 "예산은 국민 소득에 맞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재정적 신용 유지를 최대의 급무이다. 오직 국방에만 매달려 악성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그 신용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일이 있어서는 국방도 결코 견고해질 수 없다. 나는 없는 돈을 억지로 짜내어 육군·해군에 각 1000만 엔의 증액은 인정했다. 이 이상은 도저히 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17] 군사 예산을 억제하려고 했던 것이 군부의 원한을 사서, 2·26 사건에서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의 자택 2층에서 반란군 청년 장교들에게 가슴을 6발 총격당해 암살당했다. 향년 81세. 장례식은 육군의 통제로 한 달 후 쓰키지혼간지에서 치러졌다.
2. 1. 어린 시절과 유학
1854년 9월 19일 막부 어용 화가 가와무라 쇼에몬(川村庄右衛門)의 아들로 에도에서 태어났으며, 곧 센다이번 아시가루 다카하시 간쿠지(高橋覚治)의 양자로 보내졌다.[2] 요코하마시의 미국인 의사이자 개혁 교회 선교사인 제임스 커티스 헵번[48]의 사숙 (지금의 메이지 가쿠인 대학)에서 영어를 배웠다.1867년 센다이 번주 다테 요시쿠니의 명령에 의해 가쓰 가이슈의 장남 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3] 오클랜드에서 어렵게 공부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4]
2. 2. 관료 생활과 러일 전쟁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1854년 9월 19일 에도 막부 어용 화가 가와무라 쇼에몬(川村庄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나, 곧 센다이번 아시가루 다카하시 간쿠지(高橋覚治)의 양자로 보내졌다.[48] 요코하마시의 미국인 의사이자 개혁 교회 선교사인 제임스 커티스 헵번의 사숙 헵번숙(지금의 메이지 가쿠인 대학)에서 배웠다. 1867년 센다이번주 다테 요시쿠니의 명령에 의해 가쓰 가이슈의 장남 고로쿠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48]1868년 귀국 후에는 영어 회화를 가르쳤고, 도쿄의 고등학교(현재 개성학원(Kaisei Academy))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동시에 문부성의 하급 관리로 일하다가, 이후 농상무성(Ministry of Agriculture and Commerce)으로 자리를 옮겼다. 농상무성의 부서인 특허국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일본의 특허 제도 정비에 기여했다.[1] 한때 그는 정부 직책에서 사임하고 페루로 가서 은광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했다.[1]
다카하시는 1892년 일본은행(Bank of Japan)에 들어가, 1898년 부총재가 되었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의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중과 그 이후, 다카하시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중요한 외국 차관을 조달했다. 그는 미국 금융가 제이콥 시프(미국에서 일본 차관의 절반을 조달함)와 직접 만났고, 영국의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으로부터도 차관을 조달했다.
이러한 공로로 1905년 귀족원의 일본 의회(Diet of Japan)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요코하마 정금은행(Yokohama Specie Bank) 총재로 임명되었고, 1907년에는 화족(kazoku) 제도하에서 남작(baron)(danshaku) 작위를 받았다. 1911년 6월 1일부터 1913년 2월 20일까지 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했다.[5]
2. 3. 정치 입문과 총리 재임
1854년 9월 19일 막부 어용 화가(絵師) 가와무라 쇼에몬(川村庄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나, 곧 센다이번 아시가루 다카하시 간쿠지(高橋覚治)의 양자로 보내졌다. 요코하마시의 미국인 의사이자 개혁 교회 선교사인 제임스 커티스 헵번[48]의 사숙 (지금의 메이지 가쿠인 대학)에서 배웠으며, 1867년 센다이번주 다테 요시쿠니의 명령에 의해 가쓰 가이슈의 장남 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귀국 후에는 문부성과 의 관료로 활약했으며, 특허국장을 거쳐 1892년 일본은행에 들어가 부총재와 총재 등을 맡았다.1913년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취임하면서 입헌정우회에 입당하였다. 하라 다카시가 내각을 조성했을 때도 대장대신이 되었고, 하라 총리가 암살된 직후에는 재정 정책의 수완이 평가돼 제20대 내각총리대신에 올랐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의 러일전쟁 중과 그 이후, 다카하시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중요한 외국 차관을 조달했다. 그는 미국 금융가 제이콥 시프(미국에서 일본 차관의 절반을 조달함)와 직접 만났고, 영국의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도 차관을 조달했다. 다카하시는 일본 역사상 두 번째 기독교 수상이였다. 그의 총리 임기는 7개월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주로 당내 파벌을 통제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이며, 당내에 권력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1]
다카하시 내각이 무너진 이후, 다카하시가 이끄는 정우회는 호헌 운동을 일으켜 기요우라 내각의 타도에 성공하였다. 새롭게 총리대신에 오른 헌정회 총재 가토 다카아키는 본인 내각의 농상무성에 임명하였다.

2. 4. 대공황 극복과 다카하시 재정
1892년 일본은행에 들어가 부총재와 총재 등을 맡았다. 1913년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취임하였고, 이때 입헌정우회에 입당하였다. 하라 다카시가 내각을 조성했을 때도 대장대신이 되었고, 하라 총리가 암살된 직후에는 재정 정책의 수완이 평가돼 제20대 내각총리대신에 올랐다.다카하시 내각이 무너진 이후, 다카하시가 인솔하는 정우회는 호헌 운동을 일으켜 기요우라 내각의 타도에 성공하였다. 새롭게 총리대신에 오른 헌정회 총재 가토 다카아키는 본인 내각의 농상무성에 임명하였다.
그 후 다카하시는 정우회 총재를 다나카 기이치에게 양보해 일본 정계를 은퇴했지만, 1927년 쇼와 금융 공황/昭和金融恐慌일본어의 발생으로 무너진 제1차 와카쓰키 내각을 대신해 내각을 조직한 다나카의 청으로 대장대신에 올랐다. 다카하시는 일본은행 총재와 협력해 지급 유예 조치를 실시함과 동시에 제반 조치를 취해 쇼와 공황을 극복하였다.
정우회 총재 이누카이 쓰요시가 내각을 조성할 때도 이누카이의 요구로 대장대신에 올라 재정 문제 처리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또,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가 암살됐을 때에는 총리대신을 임시 겸임하였다. 계속해서 사이토 내각과 오카다 내각에서도 대장대신으로 일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 예산을 축소하려고 했던 것이 일본 군부와의 충돌을 불렀고, 2·26 사건 당시 아카사카의 자택 2층에서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었다.
2. 5. 2·26 사건과 암살
1927년 쇼와 금융 공황으로 무너진 제1차 와카쓰키 내각을 대신해 내각을 조직한 다나카 기이치의 청으로 다카하시는 대장대신에 취임했다. 다카하시는 일본은행 총재와 협력해 지급 유예 조치를 실시함과 동시에 제반 조치를 취해 쇼와 공황을 극복하였다.이누카이 쓰요시가 내각을 조성할 때도 이누카이의 요구로 대장대신에 올라 재정 문제 처리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가 암살되었을 때는 총리대신을 임시 겸임하였다. 계속해서 사이토 내각과 오카다 내각에서도 대장대신으로 일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 예산을 축소하려고 했던 것이 일본 군부와의 충돌을 불렀고, 2·26 사건 당시 아카사카의 자택 2층에서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다나카 기이치(1927~1929), 이누카이 쓰요시(1931~1932), 사이토 마코토(1932~1934), 그리고 오카다 케이스케(1934~1936) 내각에서 재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1931년 12월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재정적자를 감수하며 확장적 통화 및 재정 정책을 실시했다. 그의 재정 정책은 군비 감축을 포함했기에 군부 내부에 많은 적을 만들었고, 결국 2·26 사건에서 반란을 일으킨 군 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묘는 도쿄도 후추시의 다마 레이엔 묘지에 있다.
3. 가계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가계는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왔다.[45] 친가인 가와무라 가문(川村家)은 대대로 가노파(狩野派) 화가 집안이었으며, 8대 쇼우에몬 모리후사(庄右衛門守房) 때에는 에도 본마루(江戸本丸)의 병풍 담당을 맡아 시바(芝)의 로게츠초(露月町)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45]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후카가와 엔마도바시(深川閻魔堂橋) 쪽에 떡집(団子店)을 열었다.[45]
고레키요는 전처 사토 유우(里ゆう)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으나 1884년에 사별했고, 후처 시나(品子)를 맞이했다.[46][47]
장남 다카하시 고케이(高橋是賢)는 실업가이자 귀족원 자작 의원을 지냈으며, 고레키요 사후 자작위를 승계했다. 차남 다카하시 고후쿠(高橋是福)는 요코하마 상업학교(横浜商業学校)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미쓰이물산(三井物産)을 거쳐 다렌(大連)에서 무역업을 했으나 폐업했다. 이후 일본산소(日本酸素) 임원, 테이토자(帝都座) 사장을 역임했다.[46][47]
차녀 와키코(和喜子)는 메이지 시대 원훈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여덟째 아들 리켄(利賢)과 결혼했다. 와키코의 아들은 록히드 사건(ロッキード事件)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마루베니(丸紅) 전무 오쿠보 토시하루(大久保利春)이다.
고케이의 장남 다카하시 켄이치(高橋賢一)는 농림성 관료(官僚)를 거쳐 홋카이도 의회(北海道議会) 의원을 지냈으며, 홋카이도 다테시(伊達市)에 있는 다카하시 농장을 서러브레드(サラブレッド) 경주마(競走馬) 목장으로 전환하여 1977년(1977年)(쇼와 52년])
4. 평가와 유산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대공황 시기 일본을 구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 벤 버냉키 전 미국 연준 의장은 다카하시를 "일본을 대공황으로부터 훌륭하게 구해낸 인물"로 묘사했으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또한 자신의 아베노믹스 정책에 다카하시의 정책이 영감을 주었다고 언급했다.[1]
다카하시의 재정 및 통화 정책은 1936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발표한 고용, 이자 및 화폐 일반이론의 내용과 유사한 점이 많다.[1] 다카하시의 성공이 케인즈의 이론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명확하게 증명되지는 않았다.[1]
다카하시는 1951년 일본은행이 발행한 50엔 지폐에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은행 총재 출신 인물이 일본 지폐에 등장한 것은 이 경우가 유일하다.[1] 그의 도쿄 저택은 현재 미나토 아카사카에 있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기념 공원"이며, 건물 일부는 고가네이시의 에도-도쿄 오픈에어 건축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1]
4. 1. 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대공황 시기 일본을 구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 벤 버냉키 전 미국 연준 의장은 다카하시를 "일본을 대공황으로부터 훌륭하게 구해낸 인물"로 묘사했으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또한 자신의 아베노믹스 정책에 다카하시의 정책이 영감을 주었다고 언급했다.[1]다카하시의 재정 및 통화 정책은 1936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발표한 고용, 이자 및 화폐 일반이론의 내용과 유사한 점이 많다.[1] 다카하시의 성공이 케인즈의 이론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명확하게 증명되지는 않았다.[1]
다카하시는 1951년 일본은행이 발행한 50엔 지폐에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은행 총재 출신 인물이 일본 지폐에 등장한 것은 이 경우가 유일하다.[1] 그의 도쿄 저택은 현재 미나토 아카사카에 있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기념 공원"이며, 건물 일부는 고가네이시의 에도-도쿄 오픈에어 건축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1]
5.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다룬 작품
남조범부(南條範夫)의 소설 『노예에서 재상으로 다카하시 고레키요』(奴隷から宰相へ 高橋是清)가 1967년에 출판되었고, 이후 『달마 재상·다카하시 고레키요』(達磨宰相・高橋是清)라는 제목으로 PHP문고에서 재출간되었다. 마쓰우라 유키마사(松浦行真)는 『뜨거운 폭풍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생애』(熱い嵐 高橋是清の生涯)를 1979년에 주에이샤(集英社)에서 출간했는데, 이는 TBS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다. 같은 해 나가노 히로오(長野広生)는 『파란만장 다카하시 고레키요 그 시대』(波瀾万丈 高橋是清 その時代)를 도쿄신문출판국에서 상하권으로 출간했다. 쓰모토 아키라(津本陽)는 『삶을 밟고 두려워하지 않다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생애』(生を踏んで恐れず 高橋是清の生涯)를 1998년에 겐토샤(幻冬舎)에서 출간했고, 2002년에 겐토샤 문고로 재출간했다. 2017년에는 『인생을 역전시킨 남자 다카하시 고레키요』(人生を逆転させた男 高橋是清)를 PHP문예문고에서 출간했다.
다카하시 요시오(高橋義夫)는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이노우에 준노스케』(高橋是清と井上準之助)를 2005년에 가쿠요쇼보 인물문고에서 출간했다. 카타오카 히데(片岡英)는 『빨강과 흰색 소설 다카하시 고레키요』(赤と白 小説高橋是清)를 2009년에 문예사에서 출간했다. 미하시 타카아키(三橋貴明)는 『고레키요의 연애편지』(コレキヨの恋文)를 2012년에 쇼가쿠칸(小学館)에서 출간했다. 코우다 마오토(幸田真音)는 『천우인가 다카하시 고레키요·100년 전의 일본 국채』(天佑なり 高橋是清・百年前の日本国債)를 상하권으로 각카쿠쇼텐(角川書店)에서 2013년에 출간했고, 2015년에 각카쿠 문고로 재출간했다. 이 작품은 2011년부터 『츄니치신문』(中日新聞)·『도쿄신문』(東京新聞) 계열에서 연재되었다.
오이시 료(大石亨)는 평전 『대장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 불황 극복의 달인』(大蔵大臣高橋是清 不況乗り切りの達人)을 1992년에 매니지먼트사에서 출간했다. 마쓰모토 타카시(松元崇)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암살 후의 일본:「갖지 못한 나라」로 가는 길』(高橋是清 暗殺後の日本:「持たざる国」への道)을 2010년에 대장재무협회에서 출간했다. 이타야 토시히코(板谷敏彦)는 『나라의 명운은 금융에 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생애』(国家の命運は金融にあり 高橋是清の生涯)를 상하권으로 2024년에 신초샤에서 출간했다. 스즈키 토시오(鈴木俊夫)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힘쓰고 나서 낙관하다』(高橋是清:尽人事而後楽天)를 미넬바 일본평전선(ミネルヴァ日本評伝選) 시리즈로 미넬바서점에서 2024년에 출간했다.
영화로는 1936년작 『다카하시 고레키요 자전』(高橋是清自伝)에서 오카 죠우지(岡譲司)가 청년·장년기를, 야마모토 카이치(山本嘉一)가 노년기를 연기했다. 1970년 영화 『격동의 쇼와사 군벌』(激動の昭和史 軍閥)에서는 아키시키 우시오(明石潮)가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연기했다. 1980년 영화 『동란』(動乱)에서는 노구치 모토오(野口元夫)가 '재상' 역으로 출연했다. 1989년 영화 『226』(226)에서는 오다베 미치마로(小田部通麿)가 다카하시 고레키요 역을 맡았다. 2003년 영화 『스파이 졸게』(スパイ・ゾルゲ)에서는 가네코 타츠(金子達)가 출연했다. 2011년 영화 『TAKAMINE 미국에 벚꽃을 피운 남자』(TAKAMINE アメリカに桜を咲かせた男)에서는 이무라 히데토시(井村英俊)가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연기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로는 1976년 후지텔레비전(フジテレビ) 드라마 『타올라라! 달마 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전』(燃えよ!ダルマ大臣 高橋是清伝)에서 사가 젠페이(嵯峨善兵)가 주연을 맡았다. 1978년 TBS(TBS) 드라마 『바람이 타올랐다』(風が燃えた)에서는 아마다 토시아키(天田俊明)가 다카하시 고레키요 역을 연기했다. 1979년 TBS 드라마 『뜨거운 폭풍』(熱い嵐)에서는 쿠니히로 토미유키(国広富之)가 청년기를, 모리시게 히사야(森繁久彌)가 장년기를 연기했다. 1981년 TBS 드라마 『이백삼고지 사랑은 죽습니까』(二百三高地 愛は死にますか)에서는 나가토 유(長門勇)가 출연했다. 1984년 NHK(NHK) 대하드라마(大河ドラマ) 『산하연유』(山河燃ゆ)에서는 이리에 마사오(入江正夫)가 다카하시 고레키요 역을 맡았다. 2009년 텔레비전 아사히(テレビ朝日) 개국 50주년 기념 드라마 스페셜 『낙일연유』(落日燃ゆ)에서는 칸야마 시게루(神山繁)가 출연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방영된 NHK 스페셜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에서는 니시다 토시유키(西田敏行)가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연기했다. 2015년 NHK 방송 90년 드라마 『경세제민의 남자 다카하시 고레키요』(経世済民の男 高橋是清)에서는 오다기리 죠(オダギリジョー)가 주연을 맡았다. 2019년 NHK 대하드라마 『이다텐〜도쿄 올림픽 이야기〜』(いだてん〜東京オリムピック噺〜)에서는 하기와라 켄이치(萩原健一)가 출연했다. 2019년 가고시마텔레비전(鹿児島テレビ) 드라마 『마에다 마사나 龍마가 맡긴 남자』(前田正名 龍馬が託した男)에서는 카와아이 가몬(河相我聞)이 다카하시 고레키요 역을 연기했다. 2021년 NHK 드라마 『런던의 야마모토 이소로쿠』(倫敦ノ山本五十六)에서는 야마모토 가쿠(山本學)가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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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ntured serv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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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語のIndentured servantはslaveとは区別される存在であり、「年季奉公人」と和訳されることが多いが、日本古来の年季奉公とは意味が異なり、期間限定の奴隷に等しい。そのため奴隷、あるいは年季奴隷と和訳されることも多い。高橋是清のことを記した著作物でも、この時期の高橋を境遇を「奴隷」と記すものが多々見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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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日本の戦費調達を支援したのはキャメロン英首相の高祖父だった! 銀行家として高橋是清から真っ先に外債引き受け…
https://www.sanke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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