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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 국민전선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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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조 국민전선 봉기는 1966년 미조족의 자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조 국민전선(MNF)이 주도하여 시작된 무장 봉기이다. MNF는 동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무장 조직을 결성하고, 1966년 3월 1일 아이자울 등 미조 지역 주요 도시를 공격하여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인도 정부는 군대를 투입, 공습과 지상 작전을 통해 봉기를 진압했다. 봉기 진압 과정에서 인도군은 '집단화' 정책을 시행하여 미조족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무장력 특별 권한법(AFSPA)을 적용하여 인권 침해 논란을 낳았다. 이후 평화 협상을 통해 미조람은 연합 영토가 되었고, MNF는 주류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봉기의 경험은 람부아이 문학의 등장과 여러 기념일 제정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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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 국민전선 봉기 - [전쟁]에 관한 문서
미조 국민 전선 봉기
미조람 주의 지도 (이전 미조 지구)
미조람 주의 지도 (이전 미조 지구)
분쟁의 일부인도 북동부 반란
날짜1966년 2월 28일 – 1966년 3월 25일
장소아삼 주 미조 지구, 인도 (현재의 미조람 주)
결과봉기 진압
미조람 평화 협정
전투 세력2미조 국민 전선
지원 세력:

지휘관1Lt. Gen. Sagat Singh
Lt. Gen. Sam Manekshaw
지휘관2대통령 Laldenga
부통령 Lalnunmawia
국방 장관 R. Zamawia
총무 S.Lianzuala
외무 장관 Lalhmingthanga
아이자울 타운 제로 아워 작전 지도자
Lalkhawliana
Lalnundawta
Vanlalhruaia
부대1제1대대, 아삼 소총대
제5대대, BSF
제8대대, 시크 연대
제2대대, 11 고르카 소총대
제3대대, 비하르 연대
부대2미조 국민군
미조 국민군 지원병
피해 규모159명 사망
126명 부상
23명 실종
피해 규모295명 사망
35명 부상
558명 포로

2. 역사적 배경

1987년 미조람 주가 형성되기 전, 인도 내 미조족이 다수를 이루던 지역은 아삼 주의 일부였다. 당시 미조족 사회에서는 아삼 정부의 차별적인 정책과 대우에 대한 불만이 오랫동안 누적되어 왔으며, 이는 미조 연합과 같은 단체들을 중심으로 미조족을 위한 별도의 주를 요구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약 48년 주기로 발생하는 마우탐이라는 독특한 생태 현상은 주기적으로 심각한 기근을 몰고 왔다. 특히 1959년 발생한 기근 당시 아삼 정부의 미흡한 대처는 미조족의 실망감을 키웠고, 이듬해인 1960년 미조어를 배제하고 아삼어만을 공식 언어로 지정한 조치는 이러한 불만에 기름을 부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배경 속에서 미조족의 분리주의 운동이 점차 힘을 얻게 되었으며, 특히 기근 구호 활동 과정에서 조직된 미조 국민 전선(MNF)이 이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미조 연합이 인도 연방 내에서의 자치주 설립을 목표로 한 반면, MNF는 미조족의 완전한 주권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더 급진적인 목표를 내세우며 본격적인 활동을 예고했다.

2. 1. 미조족의 차별과 불만

1987년 미조람 주가 생기기 전까지, 인도 내에서 미조족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아삼 주의 미조 구역에 속해 있었다. 미조 연합을 비롯한 미조족 단체들은 오랫동안 아삼 정부로부터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조족을 위한 별도의 주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왔다.

이 지역에서는 48년 주기로 마우탐이라는 생태 현상이 발생하여 심각한 기근을 초래하곤 했다. 1959년에 또다시 마우탐으로 인한 기근이 시작되었을 때, 미조족은 아삼 정부의 대응 방식에 크게 실망했다. 게다가 1960년에는 미조어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아삼어만을 주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면서 미조족의 불만과 항의는 더욱 거세졌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이면서, 이는 결국 분리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본래 기근 구호 활동을 위해 만들어졌던 미조 국민 전선(MNF)이 주도하게 되었다. 미조 연합은 인도 안에서 미조족을 위한 별도의 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MNF는 더 나아가 미조족을 위한 독립적인 주권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 2. 마우탐 기근과 아삼 정부의 대응

48년마다 발생하는 마우탐이라고 불리는 주기적인 생태 현상은 이 지역에 광범위한 기근을 초래했다.[1] 1959년에 이러한 기근이 시작되었을 때, 미조족은 아삼 주 정부의 상황 대처 방식에 크게 실망했다.[1]

또한 1960년, 아삼 정부는 미조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아삼어를 주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미조족의 더 큰 불만과 항의 시위를 불러일으켰다.[1]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이는 결국 기근 구호 활동을 위해 조직되었던 단체에서 발전한 미조 국민 전선 (MNF)이 주도하는 분리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1] 기존의 미조 연합이 인도 내에서 미조족을 위한 별도의 주를 요구했던 것과 달리, MNF는 미조족을 위한 완전한 주권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1]

2. 3. 미조 국민 전선 (MNF)의 등장

1987년 미조람 주가 형성되기 이전, 인도 내 미조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은 아삼 주의 미조 구역에 속해 있었다. 미조 연합을 비롯한 미조 단체들은 오랫동안 아삼 정부로부터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며 불만을 제기했고, 미조족을 위한 별도의 주 설립을 요구했다.

이 지역에는 약 48년 주기로 발생하는 마우탐이라는 생태 현상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1959년에 마우탐 기근이 닥쳤을 때, 미조족은 아삼 정부의 미흡한 대처에 크게 실망했다. 게다가 1960년에는 미조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아삼어만을 주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면서 불만은 더욱 커졌고 항의 시위로 이어졌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이는 결국 분리주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기근 구호 활동을 위해 조직되었던 미조 국민 전선 (MNF)이 주도하게 되었다. 기존의 미조 연합은 인도 내에서 미조족을 위한 별도의 주를 요구하는 데 그쳤지만, MNF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조족을 위한 완전한 주권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3. MNF의 무장 봉기 계획

미조 국민전선(MNF) 내부에서는 인도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무력 사용을 주장하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들은 독립 목표 달성을 위해 미조 민족군(Mizo National Army, MNA)이라는 자체 무장 조직을 창설했으며, 약 2,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추가로 비정규군 성격의 미조 민족 지원군(MNV)의 지원도 받았다.

독립 운동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푸 랄덴가를 비롯한 MNF 지도부는 1960년대 초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을 방문하여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군사 장비 지원과 훈련 제공 약속을 받았다.[7] 이를 바탕으로 MNF는 미조족 주민들로부터 자금을 확보하고 자원병을 모집했으며, 외부에서 확보한 무기로 이들을 훈련시키는 등 분리주의 활동을 본격화했다.[7]

당시 인도는 1962년 중-인도 전쟁과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겪은 후 군사력을 주로 국경 지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MNF 강경파는 이러한 상황을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무장 봉기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또한, 동파키스탄에서 넘어온 친정부 성향의 차크마족 난민들이 미조 지역에 정착하는 문제 역시 이들의 분리주의 감정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8]

이에 따라 MNF는 미조 지역의 주요 시설을 점령하고 행정력을 장악하기 위한 구체적인 군사 작전 계획, 일명 "예리고 작전"을 수립했다. 이들은 아이자울 등 주요 거점을 신속하게 점령하고 MNF 깃발을 게양함으로써 국제 사회, 특히 파키스탄 등의 인정을 받아 독립을 현실화하고자 기대했다.[8] MNF는 지지자들에게 독립 국가 수립 후의 번영을 약속하며 참여를 독려했다.

이러한 무장 봉기 계획은 철저한 비밀 속에서 추진되었다. 외부적으로는 비폭력적 수단을 통해 독립을 추구한다고 선전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군사 행동을 준비했다. 정부 정보원으로 의심되던 인물을 제거하는 등 보안 유지에도 신경 썼다.[8] 마침내 1966년 2월 27일, MNF 지도부는 봉기 개시일을 3월 1일로 확정하고, 주요 군사 목표에 대한 동시 공격을 지시했다. 인도 정부 당국은 임박한 위협에 대한 일부 징후를 감지했지만, MNF의 구체적인 계획과 봉기의 규모를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했다.

3. 1. 미조 민족군 (MNA)의 조직

미조 국민전선(MNF) 내 강경파는 인도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력 사용을 지지했다. 이를 위해 특수 무장 조직인 미조 민족군(Mizo National Army, MNA)이 창설되었다.

MNA는 인도군의 편제를 본떠 조직되었으며, 총 8개의 보병 "대대"로 구성되었다. 이들 대대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 한 개 대대는 여호수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나머지 일곱 개 대대는 전설적인 미조 영웅들(창바울라, 콰웅체라, 랄붕가, 사이자하울라, 타이테세나, 바나파, 잠푸이 망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 8개 대대는 다시 두 개의 여단으로 편성되어 활동 지역을 나누었다.

  • 사자 여단(Lion Brigade): 창바울라, 콰웅체라, 사이자하울라, 타이테세나 대대로 구성되었으며, 미조 지역 북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 단검 여단(Dagger Brigade): 여호수아, 랄붕가, 바나파, 잠푸이 망가 대대로 구성되었으며, 미조 지역 남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MNA의 총 병력은 약 2,000명 규모였다. 또한, MNA는 같은 수(약 2,000명)의 비정규군으로 이루어진 미조 민족 지원군(Mizo National Volunteers, MNV)이라는 별도의 조직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3. 2. 파키스탄의 지원

1960년대 초, 푸 랄덴가를 비롯한 미조 국민전선(MNF) 지도자들은 당시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을 방문했다. 이 방문을 통해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군사 장비와 훈련 지원을 받았다.[7] 이후 랄덴가와 그의 부관 푸 랄눈마위아는 국가에 반하는 음모 혐의로 아삼 주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랄덴가가 선행을 약속한 후 1964년 2월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MNF는 분리주의 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이들은 미조족 주민들에게 강제로 기부금을 걷고 자원병을 모집했으며, 파키스탄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로 이들을 훈련시켰다.[7] MNF는 무장 봉기 계획인 '예리고 작전'을 세우면서, 아이자울에서 48시간 동안 MNF 깃발을 게양하면 파키스탄 등 다른 국가들이 미조를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유엔에서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8] 또한 공격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인도-파키스탄 국경 근처에 집결하는 대체 계획도 세워졌다.

3. 3. 예리고 작전

미조 국민전선(MNF) 내 강경파는 인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폭력 사용을 주장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미조 민족군(MNA)이라는 특수 무장 조직이 창설되었다. MNA는 인도군 편제를 모방하여 8개 보병 대대로 구성되었다. 이들 대대는 다음과 같이 명명되었다.

미조 민족군(MNA) 대대 구성
여단대대명유래
사자 여단 (북부)창바울라전설적인 미조 영웅
콰웅체라전설적인 미조 영웅
사이자하울라전설적인 미조 영웅
타이테세나전설적인 미조 영웅
단검 여단 (남부)여호수아성경 인물
랄붕가전설적인 미조 영웅
바나파전설적인 미조 영웅
잠푸이 망가전설적인 미조 영웅



사자 여단은 지역 북부에서, 단검 여단은 남부에서 활동했다. MNA의 병력은 약 2,000명이었으며, 비슷한 규모의 비정규군 조직인 미조 민족 지원군(MNV)의 지원을 받았다.

1960년대 초, 푸 랄덴가를 비롯한 MNF 지도자들은 당시 동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시)을 방문하여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군사 장비와 훈련 지원을 약속받았다.[7] 랄덴가와 그의 부관 푸 랄눈마위아는 국가 반란 음모 혐의로 아삼 주 정부에 체포되었으나, 랄덴가가 특정 약속을 한 후 1964년 2월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 직후 MNF는 분리주의 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MNF는 미조족 주민들로부터 강제로 기부금을 걷고, 자원병을 모집하여 파키스탄이 제공한 무기로 훈련시켰다.[7] 1965년 말, MNF의 무기고에는 국경 도로 기구에서 탈취한 플라스틱 폭탄, 아이자울에 주둔한 제1 아삼 소총대(1 AR)에서 확보한 소총과 탄약, 조잡하게 만들어진 폭탄, 그리고 스텐 기관단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2년 중-인도 전쟁과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겪은 인도군은 인도-파키스탄 및 인도-중국 국경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MNF의 강경파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독립된 미조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무장 봉기를 계획했다. 또한, 동파키스탄에서 온 친정부 성향의 차크마족 난민들이 미조 지역에 재정착하는 문제도 이들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8]

이에 따라 미조 지역의 권력을 체계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예리고 작전"이 수립되었다. 작전 목표는 재무부와 주유소를 점령하고, 경찰력을 무력화하며, 모든 중요한 비미조족("바이") 관리를 체포하는 것이었다. MNF는 1966년 3월 1일 아이자울에 MNF 깃발을 게양하고, 다음 날인 3월 2일에는 승리 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다. 부족한 무기는 제1 아삼 소총대, 국경 보안군(BSF), 지역 경찰의 무기고를 점령하여 확보할 예정이었다. MNF 지도부는 지역 경찰, 정부 관리, 심지어 아삼 소총대 내에도 많은 동조자가 있어 비교적 평화롭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더 나아가 아이자울에서 48시간 동안 깃발을 게양하고 버틸 수 있다면, 파키스탄과 같은 다른 국가들이 미조 영토를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유엔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8] MNF는 자원봉사자와 지지자들에게 독립 국가가 수립되면 번영하는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계획은 철저한 비밀 속에서 진행되었다. MNF 지도부는 외부적으로는 미조족의 독립을 위해 "비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선전하며 실제 계획을 은폐했다. 정부 정보원으로 의심받던 MNF 사령관 라마이나 중령은 1966년 1월 1일에 암살되었다.[8]

1966년 2월 27일, 푸 랄덴가와 다른 MNF 지도자들은 무장 봉기 개시일을 3월 1일로 최종 결정했다. 제1 아삼 소총대와 BSF 초소에 대한 동시 공격 명령이 내려졌으며, 공격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인도-파키스탄 국경 근처로 집결하라는 대체 계획도 마련되었다.

인도 정부 당국은 임박한 무력 충돌에 대한 몇 가지 징후를 포착했지만, 그 규모와 강도를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했다. 2월 27일 밤, MNF 중위 푸 랄눈마위아의 형제인 로키마가 폭발물 관련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아삼 소총대 요원들에게 인지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아삼 소총대 초소에는 MNF 대원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라는 경계령이 내려졌다.

4. MNF의 무력 행동

미조람은 1950년대 아삼 주의 일부였다


당시 미조 힐스 지역에는 제1 아삼 라이플 대대(1 AR)가 아이자울에 본부를 두고 주둔하고 있었으며, 제5 국경 보안대 대대(5 BSF)와 지역 경찰 병력도 배치되어 있었다. 1966년 2월 28일 밤부터 3월 1일 새벽 사이, 미조 국민전선(MNF)은 이들 보안군을 상대로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주요 공격 대상은 아이자울, 룽글레이, 참파이에 위치한 제1 아삼 라이플 대대 주둔지와 Chawngte, 데마기리, Hnahlan, 마르파라, Tipaimukh, Tuipang, Tuipuibari, Vaphai, Vaseitlang 등지에 분산된 제5 국경 보안대 초소들이었다. 이는 MNF 봉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4. 1. 아이자울 공격

1966년 2월 28일 밤, 미조 국민전선(MNF) 반군은 아이자울에 진입했다. 같은 날 미조 지구 행정부는 MNF 지도자들에게 배포된 2쪽 분량의 독립 선언문 사본을 발견했다. 반군은 모든 전화선을 절단하여 지방 당국이 실롱이나 실차르에 즉시 도움을 요청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후 국경 도로 기구의 지휘관이 무선 메시지를 통해 실차르에 상황을 알릴 수 있었다.[8]

1966년 3월 1일 오전 2시(인도 표준시), 반군은 아이자울의 전화 교환국을 공격했다. 한 시간 뒤, 푸 랄눈다우타가 이끄는 약 150명의 반군은 아이자울 지구 재무부를 공격하여 돈, 무기, .303 탄약을 탈취했다. 몇 시간 만에 반군은 미조 지구의 모든 주요 중심지를 장악하고 민간 행정을 마비시켰으며, 마을의 모든 차량을 압수했다. 치안 상황은 지방 경찰과 지구에 주둔한 소규모 아삼 소총대(AR)의 통제 범위를 넘어섰다.[7] 미조 지구 부지사 T. S. 길은 AR 본부로 피신했다. 반군은 아이자울의 제1 AR 본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아이자울-실차르 도로의 침루앙에 있는 AR 초소 공격도 소총병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실차르로부터의 증원을 막기 위해 반군은 여러 검문소를 설치하고 도로의 유일한 다리를 파괴했다.

이 시기, 여러 MNF 지도자들이 총회를 명분으로 아이자울에 모여 있었다. 일부 지도자들은 폭력 사용에 강력히 반대하며 랄덴가에게 무력 행동 명령 철회를 요청했으나, 이미 룽글레이, 참파이, 데마기리 등 여러 곳에서 반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작전을 중단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3월 1일, 랄덴가는 독립을 선언하고 모든 미조인에게 미조 영토에 대한 "불법적인 인도 점령"에 맞서 봉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8]

3월 2일, 반군은 제1 AR의 순찰대를 매복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아이자울의 제1 AR이 항복을 거부하자, MNF 자살 부대는 3월 4일 오전 9시에 본부를 다시 공격했다. 이 공격은 아삼 소총병의 반격으로 실패했고, MNF 측은 13명의 사상자를 냈다. 소총병 지원을 위해 정부가 보낸 예비군, 탄약, 물자를 실은 헬리콥터 두 대는 반군의 지속적인 사격으로 착륙하지 못했으며, 투하된 일부 물자는 MNF 대원들의 손에 들어갔다.

같은 날, 반군은 아이자울 감옥의 모든 죄수를 석방했다. 석방된 죄수들은 비(非)미조인("Vai") 상점을 약탈하고 아이자울 시장의 여러 오두막에 불을 질렀다.[8] AR의 항복 거부로 인해 3월 2일로 예정되었던 승리 행진은 3월 10일로 연기되었다.

3월 5일, 푸 흐루아이아가 이끄는 반군은 아이자울의 공공 사업 부서 사무실을 약탈하여 "미조람 사와르카르"("미조람 정부") 사무실 비품을 마련했다.[8] 3월 11일, 반군은 미조 연합 고위 관리들의 집을 불태웠다.

4. 2. 룽글레이 공격

1966년 2월 28일 오후 10시 30분경 IST, 미조 국민전선(MNF)은 룽글레이의 부금고를 공격하며 첫 군사 행동을 시작했다. 약 50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MNF 병력이 보안군 진지와 아삼 소총대(AR) 초소를 공격했다.[9] 이 공격은 AR에 의해 격퇴되었으나, AR 병력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MNF 병력 일부도 사망했다. 이후 AR 진지는 MNF에 의해 3일 동안 포위되어 식량이 고갈되었다. 인도 공군(IAF) 헬리콥터가 진지 상공을 통해 아삼 소총대원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보급하며 상황을 타개했다. 3월 5일, MNF는 R.V. 필라이 부구청장을 납치했다. 이어 3월 7일에는 룽글레이에 위치한 AR 초소와 국경 도로 기구의 태스크 포스 캠프를 점령했다.

4. 3. 기타 지역 공격

1966년 3월 1일 오전 1시 30분경, 약 150명의 반군이 격투봉 등으로 무장하고 바이렝테의 공공사업부 차관보 사무실을 포위했다. 이들은 차관보에게 해당 구역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으며, 부서 창고와 지프 차량을 점거했다. 비슷한 시기 코인루앙과 차웅테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보고되었다.[9]

같은 날, 반군은 AR 내부 동조자들의 도움을 받아 참파이에 위치한 AR 초소를 쉽게 점령했다.[9]

콜라십에서는 약 250명에 달하는 민간 공무원, 경찰, 정보 요원 및 도로 건설 노동자들이 반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이들은 음식과 물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채 억류되었으며, 여성과 어린이들 역시 포로 신세가 되어 별도의 작은 건물에 수용되었다.[8] 반군은 장차 수립할 독립 국가의 행정 운영에 이들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포로로 잡힌 민간 및 정부 공무원들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8]

5. 인도 정부의 대응

아삼 주 총리 비말라 프라사드 찰리하는 3월 1일 성명을 통해 아이자울 재무성과 룽글레이를 공격한 반군 규모를 약 10,000명으로 추산했다. 반면, 인도 내무부 장관 굴자리 랄 난다는 3월 3일 인도 의회에서 아이자울, 룽글레이, 바이렝테, 초앙테, 침루앙 등지의 반군 총수를 800명에서 1,300명 사이로 발표하며 다른 추정치를 내놓았다.[9]

봉기 다음 날인 1966년 3월 2일, 아삼 주는 1955년 제정된 아삼 불안 지역법과 1958년 군대 (특수 권한)법을 발동하여 미조 구 전체를 "불안 지역"으로 선포했다. 비말라 프라사드 찰리하 총리는 MNF 지도자 랄덴가의 행동을 "배신"이라고 강하게 비난했으며, 굴자리 랄 난다 내무부 장관은 정부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 "엄중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8] 이에 따라 3월 3일에는 아이자울에 24시간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고, 아삼 라이플(AR) 제1대대에 대한 증원 병력이 헬리콥터를 통해 긴급히 파견되었다.

5. 1. 공습

인도 공군(IAF)은 1966년 3월 4일 오후, 아이자울의 미조 국민전선(MNF) 표적을 기관총으로 스트레이핑했으며, 이 과정에서 소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8][11] 다음 날인 3월 5일에는 약 5시간 동안 더 광범위한 공습이 이루어졌다. 일부 미조족 주민들은 인도 공군이 소이탄을 사용하여 다우르푸이(Dawrpui)와 친가 벵(Chhinga Veng) 지역의 여러 가옥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기록에 따르면 해당 가옥들은 반군이 아이자울 감옥에서 풀어준 수감자들이 일으킨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8] 아이자울 외에도 인근 마을인 투알붕(Tualbung)과 한할란(Hnahlan) 역시 폭격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이 공습으로 인해 대부분의 민간인은 아이자울을 떠나 주변 언덕의 외딴 마을로 피난했다.

이 공습은 독립 이후 인도 역사상 인도 정부가 자국 영토 내에서 공중 폭격을 감행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10][12]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는 훗날 정치인이 된 라제시 파일럿과 수레쉬 칼마디가 당시 폭탄을 투하한 인도 공군 조종사 중 일부였다는 주장이 있다.[13] 1998년 미조람 주지사가 된 푸 조람탕가는 자신이 MNF에 가입하여 반군 활동을 시작하게 된 주된 계기가 "1966년 아이자울에 대한 끊임없는 폭격" 때문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14] 현재 미조람 주민들은 이 공습을 기억하기 위해 매년 "조람 니"(Zoram Ni, 조람의 날)를 기념하고 있다.[15][16]

5. 2. 지상 작전

작전은 삼 마네크쇼 중장이 지휘하는 동부 사령부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현지 작전 책임은 사가트 싱 소장 휘하의 제101 통신 지구가 맡았다. 당시 실차르에는 제311 (독립) 보병 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추가로, R.Z. 카브라지 준장이 지휘하는 제61 산악 여단이 아갈탈라에서 아이자울로 이동했다. 이후 미조람에서의 후기 대반군 작전을 감독하기 위해, 정규 사단인 제57 산악 사단이 실차르 인근 마심푸르에 창설되었다.

제61 산악 여단의 선두 부대인 제8 대대, 시크 연대(8 시크)는 3월 3일 실차르에서 작전 지역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장 단체의 도로 봉쇄로 인해 3월 6일에야 아이자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17][18][19] 3월 7일, 이들은 아이자울에서 포위되어 있던 아삼 라이플(AR) 수비대를 구출했다. 다음 날인 3월 8일에는 제2 대대, 11 고르카 라이플(2/11 GR)이 참파이로, 제3 대대, 비하르 연대(3 비하르)가 룽레이로 각각 이동했다. 3월 15일까지 4개 대대와 지원 부대를 포함한 제61 여단 전체가 미조람으로 이동을 완료했으며, 인도 육군은 그달 말까지 미조람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20]

5. 3. MNF 군의 철수

미조 국민전선(MNF) 군은 아이자울에 있는 제1 아삼 소총대(1 AR) 본부를 제외한 모든 초소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인도 공군의 공습 이후 본부 점령은 어려워졌다. 3월 7일 인도군이 아이자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MNF 지도부는 당시 MNF가 장악하고 있던 룽레이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인도 치안군은 룽레이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두 명의 기독교 성직자인 H. S. Luaia 목사와 C.L. Hminga 목사가 민간인 사상자를 막기 위해 폭격을 피하도록 요청했다. 두 성직자는 MNF 측에도 군대를 공격하지 않도록 설득했다.[7] 약간의 저항 끝에 MNF 군은 3월 13일 룽레이에서 철수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무기, 탄약 및 차량을 가져갔다.

이에 따라 인도 치안군은 3월 14일 룽레이를, 3월 15일에는 챔파이를 확보했다. 인도 공수 연대 제5대대는 3월 14일과 15일에 걸쳐 헬리콥터로 룽레이에 투입되었고, 이후 데마기리로 이동하여 3월 17일에 확보했다. 3월 25일까지 미조람 지역의 모든 주요 도시와 초소는 다시 인도 치안군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1966년 3월 말까지 인도 치안군은 MNF로부터 상당량의 무기를 압수했다.

종류수량
머즐 장전식 총467정
엽총332정
소총175정
권총/리볼버57정
탄약약 7만 발



하지만 MNF 역시 점령했던 치안군 초소로부터 많은 양의 무기와 탄약을 확보한 상태였다.

종류예상 확보량
엽총약 1500정
소총 (대부분 .303 구경)약 600정
스텐 기관단총75정
리볼버/권총30정
카빈총25정
경기관총20정



한편, 분쟁이 격화되면서 미조 국민군(MNA)의 본부는 여러 차례 이전되었다. 처음 아이자울에 위치했던 본부는 3월 3일 사우스 흘리멘으로, 3월 18일에는 레이에크로 옮겨졌으며, 최종적으로는 당시 동파키스탄 영토였던 치타공 구릉지대로 이동했다.

6. 분쟁의 지속과 평화 협상

미조 연합 지도자들은 미조 국민전선(MNF)이 민간인 사망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며 무장 봉기를 규탄했다. 반면 MNF는 아이자울 공습 당시 인도 정부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고 비난했다.[21] 당시 아삼 주 의회 의원이었던 스탠리 D.D. 니콜스 로이와 후버 H. 하니에우타는 직접 미조 지역을 방문하여 상황을 파악했으며,[22] 이후 로이 의원은 아삼 주의회에서 아이자울 공습에 공군력을 동원한 것은 "과도했다"고 비판하는 동의안을 발의했다.[23]

분쟁이 격화되자 1966년 말, 인도 정부는 대규모 병력을 미조 지역에 증파했다. 증원된 병력은 다음과 같다.


  • 인도 육군 2개 대대 (펀자브 연대 제18대대, 비하르 연대 제9대대)
  • 아삼 소총 3개 대대 (제6, 18, 19대대)
  • 중앙 예비 경찰대(CRPF) 무장 경찰 4개 대대


MNF는 소규모 부대로 나뉘어 지역 주민들 사이에 숨어들면서 인도 보안군에 대한 게릴라 공격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은 MNF의 협조 거부자에 대한 살해 위협과 보안군의 보복 공격 사이에서 큰 고통을 겪었다.[20]

결국 인도 정부는 1967년 미조 국민전선을 불법 단체로 지정했다. 같은 해, 북동부 인도 지역의 반군 소탕 작전을 위한 전문 훈련 기관인 반게릴라 및 정글전 학교가 바이렌게에 설립되었다.

6. 1. 집단화 정책 (작전 완수)

미조 국민전선(MNF) 봉기 세력이 농촌 마을에 숨어 인도 치안 병력을 공격하고 민간인 사이에 숨어들자, 인도군은 반군과 일반 주민의 접촉을 차단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따라 인도 정부는 1967년 1월부터 미조 지역에서 소위 '집단화' 정책을 시행했다. 이 계획은 샘 마네크쇼 당시 중장과 아삼 주 정부가 처음 제안했으며, 중앙 정부의 초기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의 강력한 요구로 승인되었다. 이 정책은 이후 작전 완수(Operation Accomplishment)로 명명되었다.[24]

'작전 완수' 정책에 따라 농촌 인구의 약 80%가 기존 마을에서 강제로 이주되어 고속도로 주변에 새로 건설된 정착지로 재배치되었다. 원래 살던 마을들은 불태워졌으며, 새로 만들어진 정착촌은 1970년까지 치안 병력의 엄격한 통제하에 놓였다. 이를 통해 인도군은 작전 수행의 제약을 덜고 반군을 주민들로부터 분리시키는 동시에 보급망을 차단하는 데는 일부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주민인 미조족은 집과 농장을 잃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강제로 이주당한 '보호 마을'은 사실상 수용소와 같았고, 주민들은 충분한 농지를 확보할 수 없었다. 가축 사육은 제한되었고, 식량 배급은 엄격히 통제되어 반군에게 식량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7년간 통행 금지가 시행되어 줌 경작(Jhum cultivation)을 포함한 생계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무기 압수 정책 역시 주민들의 식량 확보 능력을 더욱 악화시켰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 농업 생산량은 급격히 감소하여 주민들은 심각한 기아 상태에 직면했다. 한 해에는 필요한 식량 7.5만ton에 비해 생산량이 3.5만ton에 불과할 정도였다. 또한, 이 정책은 ''Tlawbawk''(줌 경작지 근처의 임시 오두막) 같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금지하는 등 미조족의 고유한 문화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1968년 식량 배급 시스템이 갑자기 중단되는 등 일관성 없는 정책은 쌀, 설탕 등 기본 생필품 가격의 폭등을 유발하여 주민들의 기아를 더욱 심화시켰다.[25][26]

이러한 강제적인 집단화는 미조람 지역 사회 문제의 시발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주민들은 총칼의 위협 속에서 이주 동의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했다.[27] 집단화는 여러 단계에 걸쳐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작전 완수: 단계별 집단화 현황 [28]
단계명칭시행 시기근거 법률주요 대상 지역/도로묶인 마을 수총 인구집단화 센터 수
1단계보호 및 진보 마을 (PPV)1967년 1월 시작 (10주간 건설)-실차르-콜라십-아이자울-룽글레 국도10652,21018
2단계새로운 집단화 센터1969년 8월아삼 공공 질서 유지법 1953 (AMPOA)트리푸라 국경, 룽글레-라웅틀레이 도로 등 5개 인구 구역18497,33940
3단계자발적 집단화 센터1970년 8월AMPOA미조 언덕 여러 마을-47,15626
4단계확장 루프 지역1970년AMPOA-63 (계획)34,219 (계획)17 (계획)



1단계로 건설된 보호 및 진보 마을(PPV)은 1967년 2월부터 민간 행정부의 관리하에 놓였으나, 치안 및 일상 유지는 인도 치안 병력이 담당했다. 행정 책임은 아삼 주 민간 서비스 소속 공무원이 맡았다.[28] 2단계부터 4단계까지는 1953년 제정된 아삼 공공 질서 유지법(AMPOA)을 근거로 시행되었다.[28]

그러나 '작전 완수' 명령은 인도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침해라는 이유로 법적 문제 제기에 부딪혔다. ''Chhuanvawra 대 아삼 주 및 기타'' 소송[28] 등으로 인해 집단화 작전이 중단되었다. 가우하티 고등법원이 정책의 정당성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아삼 주 정부는 더 이상 작전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밝혀, 3단계와 4단계의 완전한 실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9]

마을 집단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반군의 활동은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1976년까지도 상당한 규모의 군사적 충돌이 이어졌다. 또한 이 정책은 농업 생산을 극도로 위축시키고 주민들을 기아 상태로 몰아넣었으며, 결국 주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상황까지 발생하여 정책의 실패를 보여주었다.[24]

이후 반군 활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협상의 길이 열렸고, 그 결과 미조람은 연방 직할령이 되었으며 MNF는 제도권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20]

6. 2. 평화 협상 과정

미조 연합과 인도 연방 정부의 협상 결과, 1972년 1월 21일 미조 지역은 미조람이라는 이름의 연방 직할지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이후 동파키스탄이 해체되면서 미조 국민전선(MNF)은 중요한 후방 지원 기지를 잃게 되었다. 이는 MNF가 인도 정부군의 추격을 피하고 무기와 자원을 재보급하는 능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1년 12월 초, MNF 지도자 랄덴가가 파키스탄에서 외교 활동을 벌이는 동안, 국가 비상 위원회(National Emergency Committee, NEC)가 구성되었다.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직후인 1972년 12월 초, 말사우마 콜레이가 이끄는 NEC는 새롭게 출범한 미조람 연방 직할지 지도자들과 만나 인도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시작했다.[24]

그러나 1975년 방글라데시에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군사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했다. 랄덴가와 MNF는 인도의 대반군 작전을 피해 다시 방글라데시 내에 활동 거점을 마련하려 시도했다. 이 시기 MNF는 트리푸라 지역의 반군인 트리푸라 국민 지원병(Tripura National Volunteers)을 창설하고 훈련을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 인도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는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의 마약 거래가 증가하는 상황과 MNF가 이를 활동 자금으로 활용할 가능성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32]

6. 3. 1976년 협정

RAW 요원들과의 여러 차례 회담을 거친 후, 랄덴가는 1976년 가족과 함께 델리를 방문하여 인도 정부와의 첫 공식 회담을 시작했다. 1976년 2월 6일, 미조 국민전선(MNF)과 인도 정부 간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MNF는 미조람이 인도의 불가분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모든 문제를 인도 헌법의 틀 안에서 해결하는 데 동의했다. 또한 무기와 탄약을 반납하고 모든 폭력 행위를 중단하기로 약속했다.[24]

그러나 협정 이행은 여러 어려움에 부딪혔다. 랄덴가의 지도력에 대한 당내 갈등으로 인해 일관된 외교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웠고, 이는 평화 정착의 기회를 지연시켰다.[24] 특히 버마 지역 MNF 지휘관이었던 비악충가는 인도와의 평화 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협정 내용은 6월까지 비밀로 유지되었다. 미조람 부총독이 대반란 작전을 중단하자, 랄덴가는 협정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무 이행을 철회했다.[32]

랄덴가는 평화적 협력에 반대하는 당내 반대파를 강등시키거나 축출하는 방식으로 제거하여 인도와의 문제 해결을 위한 당의 지도력을 통합하려 했다.[24] 하지만 이후 랄덴가가 런던으로 자진 망명하면서 당 조직, 특히 미조 민족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한 비악충가를 경계했다. 비악충가는 운동의 방향에 대해 강경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랄덴가와 같은 정치적 선견지명은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채터지와 같은 일부 분석가는 랄덴가가 비악충가에 반대하는 것이 운동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협정을 거부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2]

6. 4. 랄덴가의 투옥과 석방

1976년, 랄덴가는 인도 정부와의 평화 회담을 위해 뉴델리로 소환되었다.[31] 하지만 랄덴가는 미조 국민 전선(MNF) 내부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점차 약화되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반감이 커지자 1978년 6월 MNF 대표직에서 사임했으며,[32] 같은 해 10월 27일에는 버마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MNF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되었다.[32]

이후 인도 정부와의 평화 협상이 최종적으로 결렬되면서, 1982년 1월 미조 국민 전선(MNF)은 불법 단체로 지정되어 활동이 금지되었다.[31] 같은 해 랄덴가는 일부 친척들과 함께 인도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고[30], 4월에는 국외로 추방되는 조치를 당했다.[31]

6. 5. 미조 협정 (1986)

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 이후, 라지브 간디 정부는 미조람의 평화를 위한 협상을 이어갔다. 이는 아쌈 협정의 성공적인 타결에 힘입은 바 크다.[24][32] 학생 연합 행동 위원회(SJAC)와 미조 교회 지도자 위원회(MCLC) 등 여러 시민 사회 단체들도 평화 회담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비폭력적인 해결을 촉구했다.[24] MCLC는 평화 채널을 조직하고, 초당파 회의를 소집하며, 선의의 평화 회담을 위한 각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24]

당시 미조람 수상이었던 랄탄하울라는 평화 회담에 협조적이었으나, 자신의 사임 문제에 대해서는 미조 의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32] 랄덴가는 미조 국민전선(MNF)을 이끌며 라지브 간디 총리의 대표와 협상을 진행했고, 1985년 12월 23일에는 라지브 간디와 직접 만나 회담의 윤곽을 잡았다.[32]

오랜 협상 끝에 1986년 6월 30일, 랄덴가가 이끄는 미조 국민전선과 라지브 간디 정부는 역사적인 미조 평화 협정 (Mizo Peace Accord)을 체결했다. 이는 앞서 5월 25일에 인도 국민 회의의 아르준 싱을 포함한 정치 담당 내각과 MNF 간에 이루어진 정치적 합의를 최종적으로 공식화한 것이다.[24][34][35]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현직 수상 랄탄하울라는 랄덴가에게 수상직을 넘겨주고, 연립 정부의 부수상직을 맡는다.
  • 미조 국민전선(MNF)은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무장 투쟁을 중단한다.
  • MNF는 트리푸라 국민 자원 봉사단, 마니푸르 인민 해방군 등 다른 분리주의 단체와의 관계를 단절한다.
  • MNF는 남부 마니푸르와 미얀마의 친 주를 포함하는 '대미조람' 건설 목표를 포기한다.[24][34][35]


미조 협정 체결 이후, 미조람은 인도의 23번째 주(state)로 공식 승격되었다. 1987년 2월, 미조람에서 첫 번째 주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 선거에서 미조 국민전선(MNF)이 승리하여 랄덴가가 이끄는 정부가 출범했다.[24][34][35] 이로써 수십 년간 지속된 미조람의 분쟁 상태가 종식되고 평화의 시대가 열리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7. 무장력 특별 권한법 (AFSPA) 하의 인권 침해

1966년 미조람이 '혼란 지역'으로 선포되면서 무장력 특별 권한법(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 AFSPA)이 적용되었다.[36] 이 법은 대반란 작전을 수행하는 보안군에게 매우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여기에는 공공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영장 없이 체포하거나 필요시 치명적인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 반란 활동이 의심되는 재산을 파괴할 수 있는 권한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중앙 정부의 사전 허가 없이는 AFSPA에 따른 보안군의 행위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게 만드는 면책 조항은 심각한 인권 침해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36]

AFSPA 적용 이후, 보안군은 미조 국민전선 봉기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 여러 마을에서 남성들을 임의로 구금하고 고문했으며, 재산을 약탈하고 여성들을 집단으로 성폭행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24][26][37] 또한, '작전 완수'(Operation Accomplishment)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마을 집단화 정책은 주민들을 '보호 및 진보 마을'(PPV)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총구를 겨누고 동의서 서명을 강요하거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강제 노동을 부과하는 등 또 다른 형태의 인권 유린을 낳았다.[38]

이러한 상황에서 T. 사이로 준장은 보안군의 잔혹 행위를 줄이고자 노력했다. 그는 1974년 인권 위원회를 설립하여 육군의 인권 침해 사례를 조사하고 이를 인디라 간디 당시 총리에게 보고하는 등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1] 그의 개입은 보안군의 행동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거는 역할을 했지만,[1] 이후 집권 과정에서는 여성 인권 문제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도 받았다.[39][40]

봉기가 끝난 후에도 AFSPA 하에서 자행된 인권 침해 문제는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2010년에는 과거 아이자울 폭격을 포함한 보안군의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해 인도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대중적인 목소리가 높아졌다.[37] 그러나 성폭력 피해와 같은 민감한 사안은 사회적 낙인과 명예 실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여전히 진상 규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37]

7. 1. 보안군의 인권 침해 사례

1966년 미조람이 '혼란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무장력 특별 권한법(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 AFSPA)이 적용되었다.[36] 이 법은 대반란 작전 수행 시 보안군에게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는데, 여기에는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치명적인 무력 사용 허가, 반란 활동이 의심되는 재산 파괴 권한, 영장 없는 체포 및 필요시 무력 사용 권한, 그리고 중앙 정부의 허가 없이는 AFSPA에 따른 행위에 대해 군인에게 법적 면책권을 부여하는 내용 등이 포함된다.[36]

미조 국민전선 봉기 이후 보안 요원들은 콜라십, 카운푸이(Kawnpui)와 같은 지역에서 남성들을 구금하고 재산을 약탈했으며,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살해하거나 고문하는 만행을 저질렀다.[24][26] 콜라십 사건 직후, 켈캉에서는 마을 주민 전체가 여러 날 동안 구금되어 음식과 물 없이 교회에 갇힌 채 굶주림에 시달렸다.[24][26] 일부 육군 장교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마을 위원회에 여성을 요구하거나 직접 강간을 저지르기도 했으나, 이는 문화적 낙인과 수치심 때문에 제대로 보고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24][26] 참파이에서 발생한 사건에서는 인도 보안군이 남성과 여성을 학교와 교회로 분리시킨 사례가 보고되었다. 남성들은 미조 국민전선과의 연계 혐의로 고문을 당했으며, 여성들은 때때로 공개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일부 군인들은 여성들을 몇 주 동안 억류하기도 했다.[37]

'작전 완수'(Operation Accomplishment)라는 이름 아래 시행된 집단화 정책은 '보호 및 진보 마을'(Protected and Progressive Villages, PPV)이라는 정착촌을 만들었으나, 이는 수많은 인권 침해와 학대를 낳았다.[38] 기존 마을에서 PPV로 이주할 때는 총구 앞에서 강제로 동의서에 서명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동의 자유는 군의 감시와 등록 절차에 의해 엄격히 제한되었고, 식량 배급제가 시행되었다. PPV 내에서는 강제 노동이 자행되었으며, 이에 저항할 경우 신체적 처벌이 가해졌다. PPV에 갇힌 미조 공동체 내에서는 높은 범죄율이 나타났고, 군인들에 의한 범죄도 빈번했다.[38]

T. 사이로(T. Sailo) 준장의 등장은 보안군에 의한 잔학 행위를 줄이는 데 일부 기여했다.[1] 그는 1974년 인권 위원회를 설립하고, 육군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인디라 간디 당시 총리에게 36건의 구체적인 사건 자료를 제출했다.[1] 사이로 준장은 마을 방화, 교회 방화, 집단 강간과 같은 반란 진압 정책의 잔혹성이 이러한 개입의 필요성을 촉발했다고 강조했다.[39][40] 그는 이후 미조람 인민 회의라는 정당을 창당하기도 했다.[39][40] 그러나 집권 후에는 반란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여성에 대한 인권 침해를 외면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39][40] 그럼에도 사이로 준장의 개입은 보안군의 행동에 어느 정도 신중함을 가져왔으며, 그의 군 경력은 장교들이 기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1]

2010년에는 인도 육군 및 보안 요원들의 인권 침해에 대한 강력한 대중적 항의가 있었으며, 인도 정부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사과 요구에는 미조 국민전선 봉기 당시 아이자울 폭격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었다.[37] 현재까지도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조사와 인터뷰는 사회적 낙인과 신상 공개 및 명예 실추에 대한 개인적인 두려움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37] 물이나 장작을 구해오는 등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남성 노동자들에 대한 신체적 폭행도 흔했으며, 처벌은 종종 그 가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AFSPA에 따라 거의 또는 전혀 이유 없이 개인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은 석방 시 신체적 변형을 남기는 경우가 흔했다.[37]

7. 2. T. 사이로의 대응

T. 사이로 준장의 등장은 보안군에 의해 자행된 잔혹 행위를 줄이는 계기가 되었다.[1] 그는 1974년 인권 위원회를 설립하고, 육군의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36건의 구체적인 사례를 당시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에게 직접 보고했다.[1] T. 사이로는 반란 진압 과정에서 자행된 마을 방화, 교회 방화, 집단 강간 등의 심각한 인권 유린 실태를 지적하며 자신의 개입이 불가피했음을 강조했다.[39][40]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그는 이후 미조람 인민 회의라는 정당을 창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39][40] 하지만 T. 사이로 역시 집권 이후 반란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여성에 대한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9][40] 그럼에도 불구하고 T. 사이로의 적극적인 개입과 그의 군 경력은 보안군의 행동에 어느 정도 신중함을 가져왔으며, 군 장교들의 기강 유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1]

8. 유산

미조 국민전선 봉기는 미조람의 현대 사회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이 격동의 시기는 미조족의 집단적 기억과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문화적 영역에서 중요한 유산을 만들어냈다. 봉기 기간 동안 겪었던 경험과 트라우마는 이후 미조람의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8. 1. 람부아이 문학의 등장

미조 국민전선 봉기의 사건들은 미조람 고유의 문학 장르인 ''람부아이''의 창작으로 이어졌다. ''람부아이''는 '혼란스러운 땅'을 의미한다.[41] 이 작품들은 인도군의 시각, 지하 운동, 그리고 당시의 폭력과 트라우마 등 다양한 관점을 탐구한다.[42]

9. 기념


  • 2월 20일은 미조람의 연례 공휴일인 "국가의 날"이다.[43]
  • 3월 1일은 미조 국민전선(MNF)이 독립 선언일로 기념하는 "미조 민족의 날"이다.[44]
  • 1966년 주요 폭격이 있었던 3월 5일은 "조람의 날"(Zoram Nilus)로 알려져 있다.[44]
  • 1986년 미조 평화 협정이 체결된 6월 30일은 미조람 정부가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렘나 니"(Remna Nilus, 평화의 날)이다.[45]
  • 9월 20일은 미조 국민전선(MNF)이 봉기 기간 중 사망한 MNF 군인들을 추모하는 "순교자의 날"로 기념한다.[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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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Opinion: Secession and Karachi link - Why Indira Gandhi got IAF to bomb Mizoram in 1966 https://www.indiatod[...] 2023-08-11
[3] 웹사이트 Pakistan's Involvement in Terrorism against India https://www.satp.org[...]
[4] 논문 The Indian Experience of Conflict Resolution in Mizoram http://www.tandfonli[...] 2009
[5] 논문 Explaining Cohesion in an Insurgent Organization: The Case of the Mizo National Front https://www.tandfonl[...]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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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Contesting marginality: ethnicity, insurgence and subnationalism in North-East India Technical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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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뉴스 Silent rally echoes Mizo pain of '66 IAF attacks https://timesofindia[...] 2011-03-05
[12] 뉴스 Air attacks in Mizoram, 1966 - our dirty, little secret http://articles.econ[...] 201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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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Field Marshal Sam Manekshaw, M.C. – Soldiering with Dignity Natr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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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논문 of Rambuai and the Unsettling Lifeworlds: An appraisal of Malsawmi Jacob's Zorami https://www.research[...]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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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웹사이트 Mizoram: Martyr's Day observed to commemorate those who died during Mizo Insurgency https://indianexpres[...] 2015-09-21
[47] 저널 The Indian Experience of Conflict Resolution in Mizoram http://www.tandfonli[...] 2009
[48] 저널 Explaining Cohesion in an Insurgent Organization: The Case of the Mizo National Front https://www.tandfonl[...] 2017
[49] 서적 Mizoram, dimensions and perspectives: society, economy, and polity Concept Publishing Company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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