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다다모토 (15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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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즈노 다다모토는 1576년 오와리국에서 태어난 인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이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 간토 입부 후 사가미국에 영지를 받았으며, 1605년 히데타다가 쇼군으로 임명될 때 종5위하에 서임되고 코쇼구미 반토로 임명되었다.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1616년 시모사국 야마카와령의 영주가 되어 3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620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야마가타현 야마가타시의 호레쓰 신사에서 모셔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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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다다마사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오와리 국 지타반도를 지배하며 오다 노부히데와 협력하고 마쓰다이라 가문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영토를 보전하려 했으며, 겐곤인에 묘소가 있다.
미즈노 다다모토 (157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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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미즈노 씨 |
이름 | 미즈노 다다모토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덴쇼 4년 (1576년) |
사망 | 겐나 6년 10월 6일 (1620년10월 31일) |
계명 | 만송사전휴옹종파거사 |
신호 | 풍렬령신 |
묘소 | 이바라키현유키시의 산카와 미즈노 가문 묘소 아이치현지타군히가시우라정의 건곤원 |
관위 | 종5위하 감물 |
막부 | 에도 막부 소성조 반두 → 니시노마루 서원반두 |
주군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번 | 시모사 산카와 번 번주 |
씨족 | 미즈노 씨 |
아버지 | 미즈노 다다모리 |
형제 | 긴조 모리시게 다다모토 모리노부 여자 (오쿠다이라 지자에몬의 아내) 시게이에 모토요시 |
정실 | 미우라 다메하루의 딸・고마쓰인 |
자녀 | 여자 (아리마 도요나가의 아내) 여자 (미즈노 시게요시의 아내) 다다요시 여자 (사노 마사노부의 아내) 다다히사 |
번주 계승 정보 | |
전임자 | 마쓰다이라 사다쓰나 |
후임자 | 미즈노 다다요시 |
직책 | 시모사 야마가와 번 번주 (미즈노 가문) |
임기 | 1615년 ~ 1620년 |
대수 | 1 |
2. 생애
덴쇼 4년 (1576년) 오와리국 지타군의 오가와성 성주였던 미즈노 타다모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다다모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어머니 오다이노카타의 형제였으므로, 이에야스의 조카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이에야스의 명으로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토 입부 후, 사가미국에 영지를 받았다. 간세이 중수 제보기에 따르면, 사가미국 누마메 향(현재의 가나가와현 이세하라시 누마메 부근)이 다다모토의 영지였고, 아버지 다다모리는 이곳에서 은거 생활을 하다 게이초 5년 (1600년)에 사망했다.
게이초 10년 (1605년) 히데타다가 쇼군 선하를 받을때 호종하여 종5위하에 서임되었고, 이후 코쇼구미 반토로 취임했다. 당시 코쇼구미 반토로는 이노우에 마사나리, 이타쿠라 시게무네, 쿠사카베 마사후유, 오쿠보 노리타카, 나루세 마사타케 등 5명이 더 있었다.
게이초 19년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와 다음 해 오사카 여름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특히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수급 5개를 올렸다. 그 후, 니시마루 쇼인반 반토로 전임되었다.
겐나 2년 (1616년), 시모사국 야마카와령 (현재의 이바라키현 유키시 야마카와 지구 부근)의 영주가 되어 3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시모사 야마카와번). 다다모토는 야마카와성 (전국 시대 이래의 성곽으로 야마카와 아야토성이라고도 불린다. 현재의 유키시 야마카와 신주쿠)을 수축하고, 성하마을 건설에 힘써 번정의 기초를 다졌다. 겐나 3년(1617년)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닛코 사참 때 오미국 가모군에서 5000석을 추가로 받았다.
겐나 6년 (1620년) 10월 6일, 45세로 사망하여 야마카와의 반쇼지에서 장례를 치렀다. 적남 미즈노 타다요시가 가독을 이었지만, 9세로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이노우에 마사나리 (토토우미국요코스카번 주)가 후견인으로 붙여졌다. 미즈노 타다모토와 이노우에 마사나리가 지기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미즈노 다다모토는 덴쇼 4년 (1576년) 오와리국 지타군의 오가와성 성주였던 미즈노 타다모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다다모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어머니 오다이노카타의 형제였으므로, 이에야스의 조카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이에야스의 명으로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토 입부 후, 사가미국에 영지를 받았다. 간세이 중수 제보기에 따르면, 사가미국 누마메 향(현재의 가나가와현 이세하라시 누마메 부근)이 다다모토의 영지였고, 아버지 다다모리는 이곳에서 은거 생활을 하다 게이초 5년 (1600년)에 사망했다.
게이초 10년 (1605년) 히데타다가 쇼군 선하를 받을때 호종하여 종5위하에 서임되었고, 이후 코쇼구미 반토로 취임했다.
2. 2. 도쿠가와 가문에서의 역할
미즈노 다다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어머니 오다이노카타의 형제인 미즈노 타다모리의 아들로, 이에야스의 조카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게이초 10년 (1605년) 히데타다의 쇼군 선하 때 호종하여 종5위하에 서임되었고, 이후 코쇼구미 반토로 취임했다. 당시 코쇼구미 반토는 이노우에 마사나리, 이타쿠라 시게무네, 쿠사카베 마사후유, 오쿠보 노리타카, 나루세 마사타케 등 5명이 더 있었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오사카 겨울 전투와 오사카 여름 전투에 모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특히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수급 5개를 올리는 전과를 기록했다. 이후 니시마루 쇼인반 반토로 전임되었다.
겐나 2년 (1616년), 다다모토는 시모사국 야마카와령(현재의 이바라키현 유키시 야마카와 지구)의 영주가 되어 3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시모사 야마카와번). 겐나 3년(1617년)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닛코 사참 때 오미국 가모군에서 5000석을 추가로 받았다.
2. 3. 오사카 전투 참전
게이초 19년 (1614년)의 오사카 겨울 전투에는 배하의 사졸을 이끌고 종군했다. 다음 해 게이초 20년/겐나 원년 (1615년)의 오사카 여름 전투에 참전하여, 수급 5개를 올렸다. 그 후, 니시마루 쇼인반 반토로 전임되었다.2. 4. 시모사 야마카와 번주
미즈노 다다모토는 덴쇼 4년 (1576년)에 오와리국 지타군의 오가와성 성주였던 미즈노 타다모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타다모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어머니 오다이노카타의 형제였기 때문에,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토 입부 후, 다다모토는 사가미국에 영지를 받았다. 게이초 10년 (1605년) 히데타다의 쇼군 선하 때 종5위하에 서임되었고, 이후 코쇼구미 반토로 취임했다.
게이초 19년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와 다음 해 오사카 여름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 니시마루 쇼인반 반토로 전임되었다.
겐나 2년 (1616년), 시모사국 야마카와령 (현재의 이바라키현 유키시 야마카와 지구 부근)의 영주가 되어 3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시모사 야마카와번). 다다모토는 야마카와성 (전국 시대 이래의 성곽으로 야마카와 아야토성이라고도 불린다. 현재의 유키시 야마카와 신주쿠)을 수축하고, 성하마을 건설에 힘써 번정의 기초를 다졌다. 겐나 3년(1617년)에는 오미국 가모군에서 5000석을 추가로 받았다.
겐나 6년 (1620년) 10월 6일, 45세로 사망하여 야마카와의 반쇼지에서 장례를 치렀다.
2. 5. 사망
겐나 6년 (1620년) 10월 6일, 미즈노 다다모토는 45세로 사망했다. 자신이 개기한 이바라키현 유키시 야마카와의 반쇼지에서 장례를 치렀다.적남 미즈노 타다요시가 가독을 이었지만, 9세로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이노우에 마사나리 (토토우미국요코스카번 주)가 후견인으로 붙여졌다. 미즈노 다다모토와 이노우에 마사나리가 지기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가계
아버지 미즈노 타다모리와 어머니 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실은 기슈 도쿠가와 가 가신인 미우라 타메하루의 딸 고쇼인이다. 『간세이 중수 제보』에 따르면, 2남 3녀를 두었다.
장녀는 아리마 토요나가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기슈 번 가로 미즈노 시게요시에게 시집갔다. 미즈노 시게요시는 미즈노 시게히로의 아들이자 미즈노 타다모토의 숙부인 미즈노 타다와케의 손자에 해당한다. 장남 미즈노 타다요시는 가독을 이었고, 미카와 오카자키 번주 (5만 석)가 되었다. 삼녀는 사노 마사노부에게 시집갔다. 정실 소생의 차남 미즈노 타다히사는 별가를 세웠고, 후에 미즈노 타다요시로부터 니타 영지를 분여받아 5,000석의 다이신 하타모토가 되었으며 쇼인반토를 역임했다.
가마쿠라에 있었던 수연산 다카마츠 사찰은 미즈노 타다모토의 정실인 미우라 씨(다카마츠인 닛센)가 창건한 암자이다. 다카마츠인이 사망한 다음 해인 1642년, 미즈노 시게요시가 추복을 위해 창건했다. 다카마츠 사찰은 간토 대지진으로 전소되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은 후, 쇼와 초년에 미야기현 쿠리하라군(현재의 미야기현 쿠리하라시 와카야나기)으로 이전했다.
4. 사후 숭경
타다모리가 성주를 맡았던 오가와 성터와 가까운 아이치현치타군히가시우라정의 건곤원에는 간분 10년(1670년)에 미즈노 타다요시에 의해 미즈노 가문의 역대 위패를 모시는 "견웅당"이 세워졌다. 이 절에는 미즈노 가문 4대(미즈노 타다마사, 타다모리, 충원, 타다요시)의 묘소도 마련되어 있으며 "미즈노 가문 4대의 묘소"로 히가시우라정 지정 문화재이다. 건곤원에는
충원의 후손인 미즈노 가문(미즈노 겐모쓰 가문, 야마카와 미즈노 가문 등으로 불림)은 몇 차례 전봉되었지만, 처음 다이묘로 발탁된 "번조" 충원의 묘소가 있는 야마카와의 반쇼지를 대대로 묘소로 삼았다. 이 때문에 덴포의 개혁으로 알려진 미즈노 타다쿠니의 묘가 야마카와에 있다. 반쇼지는 안세이 2년(1855년)에 소실되어 재건되지 않은 채 메이지 4년(1871년)에 폐사되었다. 현재는 절터에 "야마카와 미즈노 가문 묘소"만 남아 있으며, 타다쿠니까지 역대 묘가 있고 "야마카와 미즈노 가문 묘소"로 유키시 지정 사적, "미즈노 에치젠노카미 타다쿠니의 묘"에 관해서는 이바라키현 지정 사적이다. 야마카와에는
야마가타현야마가타시에 있는 호레쓰 신사는 충원을 주신 중 하나인 "호레쓰 영신"으로 모시고 있다. 분세이 4년(1821년), 미즈노 타다쿠니가 하마마츠 성내에서 번조인 충원을 모시고, 이때 조정으로부터 "호레쓰 영신"의 신호를 받았다. 고카 5년(1848년)에는 타다쿠니의 아들 미즈노 타다키요가 야마가타 번으로 옮겨가면서 야마가타 성내로 천좌하였고, 메이지 3년(1870년)에는 충원과 관련된 땅인 시모후사 야마카와로 천좌했다. 그 후 야마가타시의 현재 위치에 분사가 건립되어, 다이쇼 2년(1913년)에 본사가 야마카와에서 야마가타로 천좌하여 분사와 합병했다. 또한, 하마마츠 성에서 타다쿠니가 충원을 모실 때 다큐를 봉납한 것이 유래가 되어, 야마가타의 호레쓰 신사는 고식 다큐를 전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호레쓰 신사의 다큐"로 야마가타현 무형 민속 문화재이다. 야마가타시에는
4. 1. 묘소
타다모리가 성주를 맡았던 오가와 성터와 가까운 아이치현치타군히가시우라정의 건곤원에는 간분 10년(1670년)에 미즈노 타다요시에 의해 미즈노 가문의 역대 위패를 모시는 "견웅당"이 세워졌다. 이 절에는 미즈노 가문 4대(미즈노 타다마사, 타다모리, 충원, 타다요시)의 묘소도 마련되어 있으며 "미즈노 가문 4대의 묘소"로 히가시우라정 지정 문화재이다. 건곤원에는 가 있다.충원의 후손인 미즈노 가문(미즈노 겐모쓰 가문, 야마카와 미즈노 가문 등으로 불림)은 몇 차례 전봉되었지만, 처음 다이묘로 발탁된 "번조" 충원의 묘소가 있는 야마카와의 반쇼지를 대대로 묘소로 삼았다. 이 때문에 덴포의 개혁으로 알려진 미즈노 타다쿠니의 묘가 야마카와에 있다. 반쇼지는 안세이 2년(1855년)에 소실되어 재건되지 않은 채 메이지 4년(1871년)에 폐사되었다. 현재는 절터에 "야마카와 미즈노 가문 묘소"만 남아 있으며, 타다쿠니까지 역대 묘가 있고 "야마카와 미즈노 가문 묘소"로 유키시 지정 사적, "미즈노 에치젠노카미 타다쿠니의 묘"에 관해서는 이바라키현 지정 사적이다. 야마카와에는 가 있다.
야마가타현야마가타시에 있는 호레쓰 신사는 충원을 주신 중 하나인 "호레쓰 영신"으로 모시고 있다. 분세이 4년(1821년), 미즈노 타다쿠니가 하마마츠 성내에서 번조인 충원을 모시고, 이때 조정으로부터 "호레쓰 영신"의 신호를 받았다. 고카 5년(1848년)에는 타다쿠니의 아들 미즈노 타다키요가 야마가타 번으로 옮겨가면서 야마가타 성내로 천좌하였고, 메이지 3년(1870년)에는 충원과 관련된 땅인 시모후사 야마카와로 천좌했다. 그 후 야마가타시의 현재 위치에 분사가 건립되어, 다이쇼 2년(1913년)에 본사가 야마카와에서 야마가타로 천좌하여 분사와 합병했다. 또한, 하마마츠 성에서 타다쿠니가 충원을 모실 때 다큐를 봉납한 것이 유래가 되어, 야마가타의 호레쓰 신사는 고식 다큐를 전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호레쓰 신사의 다큐"로 야마가타현 무형 민속 문화재이다. 야마가타시에는 가 있다.
4. 2. 호레쓰 신사 (야마가타현 야마가타 시)
야마가타현 야마가타시에 있는 호레쓰 신사는 미즈노 다다모토를 주신 중 하나인 "호레쓰 영신"으로 모시고 있다. 분세이 4년(1821년), 하마마츠 번주 미즈노 다다쿠니가 하마마츠 성내에서 번조인 다다모토를 모셨고, 이때 조정으로부터 "호레쓰 영신"의 신호를 받았다. 고카 5년(1848년)에는 다다쿠니의 아들 미즈노 다다키요가 야마가타 번으로 옮겨가면서 야마가타 성내로 신사를 옮겼다. 메이지 3년(1870년)에는 다다모토와 관련된 땅인 시모후사 야마카와로 옮겼다. 그 후 야마가타시의 현재 위치에 분사가 건립되어, 다이쇼 2년(1913년)에 본사가 야마카와에서 야마가타로 천좌하여 분사와 합병했다.또한, 하마마츠 성에서 다다쿠니가 다다모토를 모실 때 다큐를 봉납한 것이 유래가 되어, 야마가타의 호레쓰 신사는 고식 다큐를 전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호레쓰 신사의 다큐"로 야마가타현 무형 민속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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