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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쿠라 시게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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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타쿠라 시게무네는 이타쿠라 가쓰시게의 장남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1620년부터 1654년까지 30년 이상 교토 쇼시다이 직을 수행하며, 반역 및 반란 관련 첩보망을 관리하고, 막부와 조정 사이의 중재 역할을 했다. 그는 공정한 판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간에이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인들을 후원했다. 시게무네는 세키야도 번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충성은 후손의 가문을 보호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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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쿠라 시게무네
기본 정보
이타쿠라 시게무네
이름이타쿠라 시게무네
출생1586년
출생지슨푸, 스루가국, 일본
사망1657년 1월 15일
다른 이름시게무네(초명), 쥬사부로(통칭), 고로하치, 마타우에몬
묘소아이치현니시오시초엔지
법명쇼운인덴슈호겐슌다이코지
씨족이타쿠라 씨
관직
관위종5위하 스와노카미, 종4위하, 시종 우쇼쇼, 종4위상
막부에도 막부고쇼구미반가시라 → 쇼인반 가시라 → 교토 쇼시다이
주군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 → 이에미쓰 → 이에쓰나
시모사세키야도 번 번주
가계
부모아버지: 이타쿠라 가쓰시게, 어머니: 아오 나가카쓰의 딸
형제나카지마 시게요시(이부 형), 시게무네, 시게마사, 시게다이
배우자정실: [나루세 마사나리의 딸]
계실: [도다 우지테쓰의 딸]
자녀시게사토
시게카타
나베 ( 혼다 도시나가의 부인 )
사카 ( 오타 스케무네의 정실 )
도쿠 ( 엔도 요시토시의 정실 )
야스 ( 나이토 마사카쓰의 정실 )
나가후쿠 ( 모리카와 시게마사의 정실 )
히사 ( 마쓰다이라 미쓰시게의 정실 )
나카 ( 나이토 다다마사의 정실 )
케이 ( 마쓰다이라 데루쓰나의 정실 )
미이 ( 이치하시 마사노부의 정실 )
요쓰 ( 마쓰다이라 노리노부의 정실 )
쓰루 ( 마쓰다이라 데루쓰나의 계실 )
경력
주요 경력아버지와 함께 2대에 걸쳐 소시다이 직을 세습 (조카인 시게노리를 포함하면 3대)
교토 쇼시다이3대
임기 시작1619년
임기 종료1654년
선임이타쿠라 가쓰시게
후임마키노 지카시게
세키야도 번주초대 (이타쿠라 가)
임기 시작1656년
임기 종료1656년
선임마키노 지카시게
후임이타쿠라 시게사토

2. 생애

이타쿠라 시게무네는 이타쿠라 가쓰시게의 장남으로, 어릴 적 이름은 주사부로(十三郎)였다.[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총애를 받았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성 전투에 모두 참여했다. 1620년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어[4] 1654년까지 30년 이상 이 직책을 수행하며[1] 첩보망을 운영하고 판결의 공정성을 위해 노력했다.[5] 궁궐 경비와 궁정 관리 감독 중 고코묘 천황과의 일화도 전해진다.[6]

1654년 쇼시다이 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막정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1656년 시모후사 세키야도 5만 석을 받아 번주가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1일(1657년 1월 15일)에 세키야도에서 사망했다.

시게무네의 공적은 훗날 후손의 잘못으로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참작되었다.[7] 묘는 교토의 고에쓰지와 아이치현 니시오시의 초엔지에 있다.[8][9]

이타쿠라 시게무네의 묘(니시오시 조엔지)

2. 1. 초기 생애 및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

이타쿠라 시게무네는 이타쿠라 가쓰시게의 장남이었다.[3] 어린 시절 이름은 주사부로(十三郎)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발탁되었으며, 이에야스는 시게무네를 매우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나가이 나오마사, 이노우에 마사나리와 함께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측근에서 모셨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타다를 따라 출진했다. 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 부자가 상경할 때, 히데타다의 에도 막부 2대 쇼군 취임에 따라 시게무네도 종5위하・스오노카미에 서임되었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겨울, 여름 두 진영에 모두 출진하여,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사이에서 연락 역할을 맡았다. 전쟁 후 6000석을 받았다.

1620년 아버지의 천거로 교토 쇼시다이가 되어 2만 7000석을 받았다. 전 해인 1619년 히데타다의 딸 마사코(후의 도후쿠몬인)가 고미즈노오 천황뇨고로 입내하는 과정에서, 덴지・요쓰지 요츠코의 황녀 출산 문제로 입내가 연기되고 히데타다가 공가를 처벌하는 사건(오요츠 고료닌 사건)이 발생하여 천황이 태도를 굳히자, 아버지,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주선하여 입내를 성사시키고 처벌받은 공가도 사면받도록 하였다. 시게무네는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성 전투에 모두 참여했다.

2. 2. 교토 쇼시다이 임명 및 활동

이타쿠라 시게무네는 이타쿠라 가쓰시게의 장남으로, 어린 나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총애를 받았다.[3]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성 전투에 모두 참여했다.

1620년, 시게무네는 세 번째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어[4] 1654년까지 30년 이상 이 중요한 직책을 수행했다.[1] 쇼시다이로서 그는 반역, 반란 등의 은밀한 출처를 발견하고 보고하는 첩보망의 수장으로 활동했다.[5] 쇼군 정치의 미묘한 흐름 속에서 판결의 공정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재판을 할 때 자신과 발언자 사이에 등불을 놓고 차를 끓이면서 외부적인 모습이 자신의 정의감에 방해되지 않도록 했다.

시게무네는 궁궐을 경비하고 궁정 관리들을 감독해야 했다. 고코묘 천황이 검술 수업을 받자 시게무네는 자살하겠다고 위협했고, 고코묘 천황은 "나는 군인이 자살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 광경이 흥미로울 것이다. 너는 너의 업적을 목격할 수 있도록 궁궐 부지에 무대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6]

겐나 6년(1620년), 아버지의 천거로 교토 쇼시다이가 되어 2만 7000석을 받았다. 전 해인 겐나 5년(1619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마사코(후의 도후쿠몬인)가 고미즈노오 천황뇨고로서 입내하는 과정에서, 덴지 요츠코의 황녀 출산 문제로 입내가 연기되고 히데타다가 공가를 처벌(오요츠 고료닌 사건)하면서 천황이 태도를 굳히자, 아버지,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주선하여 입내를 성사시키고 처벌받은 공가도 사면시켰다. 마사코의 입내에도 수행했다.

겐나 9년(1623년) 11월 19일에 종4위하로 승진하고, 12월 23일에 시종에 임관했다. 그해 9월 천황의 숙부인 하치조노미야 토시히토 친왕이 적장남 와카미야(후의 하치조노미야 토시타다 친왕)를 천황의 요시로 원했을 때, 요시에 신중한 와코의 발언을 무가전주로부터 전해 듣고 히데타다와 상담해야 한다고 답했다. 12월 21일에 와코가 출산한 황녀 뇨이치노미야 교시 내친왕(후의 메이쇼 천황)이 츄와몬인의 어소로 넘어갔을 때, 동생 시게토와 함께 수행했다. 간에이 원년(1624년) 4월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유령을 동생 시게마사와 분할 상속하여 1만 860석을 이어받아 총 3만 8000석이 되었다.

같은 해 와코가 중궁에 책립될 예정이 세워지자, 막부의 로주도이 토시카츠, 나가이 나오마사, 이노우에 마사나오로부터 로주 봉서로 조도품과 다이묘로부터의 진물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 간에이 3년(1626년)에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참내를 따라, 니조 성에서 천황 행차의 례식을 토시카츠, 나오마사, 마사나오 등과 상담했다. 11월 13일에 와코가 고닌 친왕을 출산하자 단기로 어소에 달려가 축의를 표했지만, 간에이 5년(1628년) 6월에 친왕은 요절했다. 같은 해 자색 의복 사건에 즈음하여, 다이토쿠사 주지 타쿠앙 소호 등 강경파로부터 항변서를 제출받았지만, 묘신사와 상담하여 사태 수습을 도모했다.

간에이 6년(1629년) 7월, 막부는 타쿠앙 등을 유죄로 처하고, 9월에 상락한 이에미츠의 유모 후쿠가 강제로 참내 자격을 갖추고, 10월에 카스가노 츠보네의 이름으로 천황과 대면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불만 등으로 천황은 쿄시 내친왕에게 양위를 획책, 막부에 내밀하게 준비를 진행해 11월 8일에 양위했다.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던 시게무네는 분노하면서도 에도로 비각을 파견하여 연락을 기다리는 한편, 무가전주 나카인 미치무라와 츠치미카도 야스시게에게 양위의 내정을 묻고, 12월 27일에 에도의 히데타다로부터 양위를 용인하는 회답이 조정에 전해졌다. 이듬해 간에이 7년(1630년)에 막부로부터 소환되어 1월 26일에 교토를 출발, 에도로 갔다. 에도에서 히데타다로부터 메이쇼 천황 즉위에 관해 15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지시를 받고, 8월 2일에 귀경한 후에는 9월 12일의 즉위례 정전의에서 경비를 담당한 후, 즉위를 지켜보기 위해 상락한 로주 도이 토시카츠, 사카이 타다요와 킨치인 소덴과 합류, 나카인 미치무라에게 양위의 책임을 지게 하여 무가전주를 더이상 임명하지 않았다. 이후 막부가 추진하는 형태로 조정은 섭가(摂家)중이 중심이 되어 운영해갔다.

간에이 10년(1633년) 4월 21일에는 1만 2000석이 가증되어 총 5만석이 되었다. 다음 간에이 11년(1634년) 7월 이에미츠의 상락에 수행, 고미즈노오 상황의 원정을 인정하는 이에미츠의 의향을 전하는 사자 중 한 명으로 상황의 센토 어소로 파견되었다. 간에이 12년(1635년) 9월 16일에 메이쇼 천황이 상황의 어소에 행행했을 때 수행했지만, 간에이 14년(1637년) 12월에 상황은 천황이 15세로 성인이 되는 단계가 된 것을 이유로, 섭정니조 야스미치관백으로 하고 천황이 정무를 행할 것을 지시, 상황으로부터 관백의 임명으로 내담을 받자, 막부와 상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에미츠가 병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거절했다.

2. 3. 만년

1620년, 시게무네는 세 번째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었으며,[4] 1654년까지 30년 이상 이 중요한 직책을 수행했다.[1] 쇼시다이로서 그는 반역, 반란 또는 기타 불안 요소의 은밀한 출처를 발견하고 보고하도록 임무를 맡은 첩보망의 수장으로서 적극적이고 개인적으로 참여했다.[5]

쇼군 정치의 미묘한 흐름 속에서 그는 판결의 공정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과 발언자 사이에 등불을 놓고 차를 끓이면서 외부적인 모습이 자신의 정의감에 방해되지 않도록 했다.

시게무네는 궁궐을 경비하고 궁정 관리들을 감독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이 직책이 한가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고코묘 천황이 검술 수업을 받자, 시게무네는 자살하겠다고 위협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고코묘 천황은 "나는 군인이 자살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 광경이 흥미로울 것이다. 너는 너의 업적을 목격할 수 있도록 궁궐 부지에 무대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6] 두 사람은 어떻게든 이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았다.

조오 3년(1654년) 12월 6일, 34년에 걸쳐 재직했던 쇼시다이 직을 퇴임했다. 그러나 시게무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이듬해 11월 15일까지 차대 마키노 치카나리를 보좌하며 교토에 머물렀다. 그 후에는 이에쓰나의 보좌, 도쿠가와 가문의 숙로로서 에도에서 막정에 참여했으며, 호시나 마사유키이이 나오타카 등 대로와 동격의 발언력을 가졌다고 한다.

메이레키 2년 (1656년) 8월 5일, 시모후사 세키야도 5만 석을 받아 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11월에 병에 걸려, 막부에서 의사의 파견을 받았지만 12월 1일(1657년 1월 15일)에 세키야도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

시게무네가 쇼군에게 충성스럽게 봉사하여 얻은 공적은 후손의 용서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이타쿠라 가문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몇 년 후에 기억되었다. 1739년, 히고의 호소카와 무네타케가 에도성 안에서 이타쿠라 가쓰카네에게 살해당했고, 살해자는 정당한 처벌로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살해자의 ''후다이'' 가문에게 불리한 결과를 완화하기 위해 직접 개입했다.[7]

시게무네의 묘는 교토의 고에쓰지에 있다.[8] 그는 또한 아이치현 니시오시의 초엔지에도 묘가 있다.[9]

이듬해 메이레키 3년 (1657년) 3월 23일에 적남인 시게사토가 세키야도를 잇고 주자반・사사 봉행을 맡았지만 간분 원년 (1661년)에 사직하고 사망, 자손은 이세 가메야마번, 시마 도바번, 다시 이세 가메야마번으로 전봉된 끝에 빈추 마쓰야마번주로서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차남인 시게카타도 간분 원년에 시게사토로부터 영지를 나눠받아 1만 석의 다이묘가 되어, 엔포 9년 (덴나 원년・1681년) 5월 21일에 1만 5000석의 고즈케 안나카번주에 입봉, 이쪽의 자손도 무쓰 이즈미번, 토토미 사가라번으로 전봉하여 안나카번으로 돌아와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이타쿠라 가쓰시게
어머니아오 나가카쓰의 딸
정실나루세 마사나리의 딸
계실도다 우지카네의 딸
장녀냄비혼다 도시나가의 처, 나루세 마사나리의 딸 소생
차녀사카오타 스케무네의 정실, 나루세 마사나리의 딸 소생
삼녀토쿠엔도 요시토시의 정실, 나루세 마사나리의 딸 소생
사녀야스나이토 마사카츠의 정실, 나루세 마사나리의 딸 소생
장남시게사토(1619-1662), 도다 우지카네의 딸 소생
차남시게카타(1620-1684), 고즈케안나카 번 초대 번주, 도다 우지카네의 딸 소생
오녀쵸후쿠모리카와 시게마사의 정실, 도다 우지카네의 딸 소생
육녀도다 우지카네의 양녀, 마쓰다이라 미쓰시게의 정실, 도다 우지카네의 딸 소생
칠녀나카나이토 타다마사의 정실, 도다 우지카네의 딸 소생
팔녀케이마쓰다이라 테루쓰나의 정실, 도다 우지카네의 딸 소생
구녀미이이치하시 마사노부의 정실, 도다 우지카네의 딸 소생
십녀요츠마쓰다이라 노리노부의 정실, 도다 우지카네의 딸 소생
십일녀츠루마쓰다이라 테루쓰나의 계실, 도다 우지카네의 딸 소생
십이녀-생모 불명
십삼녀-생모 불명


4. 평가 및 일화

이타쿠라 시게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성 전투에 참여했다.[3] 교토 쇼시다이 직을 30년 이상 수행하며[1] 판결의 공정성을 위해 노력했다. 재판 시 자신과 발언자 사이에 등불을 놓고 차를 끓여 외적인 모습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쇼군 정치의 미묘한 흐름 속에서 판결의 공정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재판을 할 때 자신과 발언자 사이에 등불을 놓아 외적인 모습이 정의감에 방해되지 않도록 했다.

가노파 화가들의 재판도 맡았는데, 가노 산세쓰 재판에서는 연좌를 적용하여 산세쓰를 아게야에 유치하기도 했다. 가노 진노조의 유산 상속 분쟁에서는 가노 나가노부에게 사정을 묻고 판명될 때까지 가노 호센을 아게야에 유치하는 등, 내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게이안 2년(1649년) 8월 6일에는 렌가 시인 사토무라 겐친이 기타노 큐코에게 게이리쓰라는 여성의 저택을 빼앗겼다고 고소당한 재판에서, 겐친이 게이리쓰가 자신의 아내에게 유산을 양도한다는 양도장을 제시하자, 시게무네는 양도장과 게이리쓰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한 말을 근거로 겐친의 주장을 인정했다.

시게무네가 쇼군에게 충성스럽게 봉사하여 얻은 공적은 훗날 후손의 잘못으로 이타쿠라 가문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기억되었다. 1739년, 히고의 호소카와 무네타케가 에도성 안에서 이타쿠라 가쓰카네에게 살해당했고, 살해자는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살해자의 ''후다이'' 가문에게 불리한 결과를 완화하기 위해 직접 개입했다.[7]

4. 1. 문화 예술 후원

간에이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인 혼아미 코에츠는 부친 때부터 인연이 있었고, 시게무네도 코에츠와 교류하며 그의 의견을 자주 구했다. 1625년(간에이 2년)에 혼아미 본가의 당주 혼아미 코세츠가 사망했을 때, 분가인 코에츠가 히데타다에게 봉공을 맹세하는 것을 중개하여 코세츠의 아들 또 삼랑(혼아미 코온)의 상속이 히데타다에게 허가되어 혼아미 가문과 이타쿠라 가문의 유대 관계는 매우 강해졌다. 코에츠와 마찬가지로 교류가 깊은 마츠나가 테이토쿠·샤쿠고 부자나 안라쿠안 사쿠덴도 보호하며 문화 활동을 지원했고, 그들에게 정치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다. 코에츠의 저작 『혼아미 행상기』에서 시게무네에게 충고를 준 모습이 쓰여진 것, 테이토쿠로부터 『엔다마루 오토시 문』을, 사쿠덴으로부터 『세스이쇼』를 헌상받은 것은 그 증거이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칭송과 신분 제도를 옹호하는 논조를 기록한 코에츠 등의 자세에서는 체제 옹호의 이론적 지주로서 가츠시게·시게무네 부자가 적극적으로 지원·보호한 활동, 그리고 막부 권력과 간에이 시대 지식인의 밀접한 유착이 부각되고 있다.

가노파의 활동을 뒤에서 지원하는 행동도 보였으며, 1625년(간에이 2년)에 니조성 개축에 앞서 대목수 나카이 마사토모에게 보낸 서장에서, 행차를 맞이하기 위해 니조성을 화려하게 하라는 막부의 의향을 전달했지만, 니노마루 어전 대광간 병풍화 제작을 담당하는 가노 탄유나 사쿠지 봉행코보리 마사카즈와 협의하여 탄유가 제안한 거목 표현을 채용했다고 추측되고 있다.[1] 또한 탄유와 그 공방이 1636년부터 1639년까지 3년에 걸쳐 제작, 1640년에 닛코 도쇼구에 봉납한 『도쇼구 연기 그림 두루마리』에 대해, 1636년(간에이 13년)에 그림 두루마리의 참고 자료가 될 세이료지에 전해지는 『석가당 연기 그림 두루마리』 『융통 염불 연기 그림 두루마리』 2권을 에도로 가져올 것을 명령한 막부의 요청을 세이료지에 전하고, 2권을 에도로 가져오게 했다. 고미즈노오 상황에게 글씨를 써 줄 것을 설득하거나, 사카이 타다카츠나 텐카이와 연락하며 분주하게 활동한 것도 확인되었다.[2][3] 쇼오 4년의 내리 재건에 따른 가노파의 병풍화 제작에 대해서도, 쇼코쿠지에 탑두를 탄유와 동생 가노 야스노부를 시작으로 하는 가노파 공방의 기숙 작업장(그림소)으로 하고 싶다고 요청하여, 응낙을 받았다. 그러나 쇼코쿠지에게 행사에 지장이 생기는 이 제안은 곤란했던 것으로 보이며, 시게무네 사후인 1662년(간분 2년)에 다시 내리 병풍화 제작에 의한 그림소 설치를 요청받았을 때는 거절했다.[4]

4. 2. 일화

이타쿠라 시게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성 전투에 참여했다.[3] 30년 이상 교토 쇼시다이 직을 수행하며[1] 판결의 공정성을 위해 노력한 일화가 전해진다. 재판 시 자신과 발언자 사이에 등불을 놓고 차를 끓여 외적인 모습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 아버지 이타쿠라 가쓰시게가 시게무네와 동생 이타쿠라 시게마사에게 소송의 시비를 묻자, 시게무네는 하루의 유예를 요청한 후 동생과 같은 결론을 답했다. 가쓰시게는 신중함을 이유로 시게무네가 더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명장언행록』)
  • 교토 쇼시다이로서 소송 심리 시 등불 장지를 놓고 차를 준비하여, 당사자 얼굴을 보지 않고 선입견 없는 판결을 하려 했다. (『명장언행록』)
  • 공무에 사사로운 마음 없이 공정하고 정직하게 처리하여 훌륭한 신하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도쿠가와 실기』)
  • 사형 판결을 내린 죄인에게 할 말을 묻고 며칠이나 조사하여 변명이 없어지고 나서 형을 집행했다. (『명장언행록』)
  • 아버지에게 교토 쇼시다이로 추천받았을 때 사양했지만, 아버지와 히데타다의 강력한 권유로 "폭화를 아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라는 말을 들었다. (『책이화초』)
  • 교토 쇼시다이 퇴임 시 어려운 소송 5개를 일부러 판결하지 않고 남겨 후임 마키노 치카나리에게 맡겼다. 치카나리는 시게무네의 소견대로 재판했고, 교토 사람들은 치카나리를 신뢰하게 되었다. (『명장언행록』)
  • 교토 아부라코지의 가베 스유키 사건에서, 지참금 문제로 아내를 모함한 일당을 모두 능지처참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아내에게 주었다.
  • 에이잔 쇼젠인 승려 강도 사건에서, 3년 후 단서를 발견하여 범인 17명을 잡아 처형했다.
  • 나타야 모 사건에서, 아버지를 구하려는 아들들의 에도 막부 소원에 노중의 서장이 왔지만, 시게무네는 읽지 않고 나타야를 처형했다. 이후 노중에게 교토 재판에 대한 자신의 권한을 주장했고, 노중들은 이를 인정했다.
  • 다도를 후루타 오리베에게 배운 다인이었다.

5. 등장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Gouverneure von Kyôto in der Edo-Zeit https://uni-tuebinge[...] Universität Tübingen 2008-04-11
[2]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3] 간행물 Nobiliare du Japon http://www.unterstei[...]
[4] 서적 A History of Japan
[5] 서적 https://books.google[...]
[6] 서적 Japan: the Rise of a Modern Power https://books.google[...]
[7]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https://books.google[...]
[8] 웹사이트 いたくら http://www.geocities[...]
[9] 웹사이트 板倉重宗の紹介 http://tikugo.cool.n[...] 200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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