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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 도쿠가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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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토 도쿠가와가는 161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요리후사를 초대 다이묘로 하여 창설된 가문이다. 오와리, 기이 도쿠가와가와 함께 고산케로 불리며, 미토 번을 다스렸다. 2대 당주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다이 니혼시' 편찬을 후원하여 미토의 위상을 높였고, 9대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존왕양이 사상을 주도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이 되었으며, 공작위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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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 도쿠가와가
가문 정보
가문도쿠가와 씨 (徳川氏)
가문 (로마자 표기)Tokugawa-shi
지번다이묘
창시자도쿠가와 요리후사
최종 통치자해당 사항 없음 (현재 존속)
현재 수장도쿠가와 나리마사
설립 연도1608년
해산해당 사항 없음 (현재 존속)
본거지히타치 국
주요 분가다카마쓰 마쓰다이라 가 (무가, 백작)
모리야마 마쓰다이라 가 (무가, 자작)
이시오카 마쓰다이라 가 (무가, 자작)
시시도 마쓰다이라 가 (무가, 자작)
나가쿠라 마쓰다이라 가 (무가)
마쓰도 도쿠가와 가 (자작)
문장
마루니 미쓰바 아오이
마루니 미쓰바 아오이 ("원 안의 세 잎 아욱")는 도쿠가와 가문의 미토 분가의 몬

2. 역사

1603년 도쿠가와 막부 수립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0년에 자신의 열한 번째 아들 도쿠가와 요리후사다이묘로 임명했고, 요리후사는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1] 미토 분가는 기이, 오와리의 도쿠가와 분가와 함께 고산케(도쿠가와 삼경가)로 불렸다.[2]

미토 분가는 다른 두 분가보다 영지와 재산이 적었지만, 에도 시대 동안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미토 번이 에도와 가까웠고, 미토 다이묘가 "부장군"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 그러나 고산케 중 최하위였던 미토 분가는 쇼군 직위에 오를 수 없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요리후사의 셋째 아들로, 1661년 미토의 두 번째 다이묘가 되었다. 미쓰쿠니는 1657년에 다이 니혼시 편찬을 후원하여 미토의 위상을 높였다.[4] 이 사업으로 미토는 지적 사상의 중심지로 명성을 얻었다.

"만약 도쿠가와 막부와 조정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조정을 지지하라."는 미쓰쿠니 공 이후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전통이었다.[5]

미토 가문의 15대 당주는 도쿠가와 나리마사|徳川斉正일본어(1958년생)이다. 2009년 7월부터 도쿠가와 뮤지엄의 관장이기도 하다. 현재 도쿄 해상 일동 화재 보험 주식회사에서 근무하며, 주말에는 미토로 출퇴근한다.

2. 1. 에도 시대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수립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0년에 자신의 열한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리후사를 ''다이묘''로 임명했다.[1] 요리후사는 임명과 함께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기이와 오와리의 도쿠가와 분가와 함께 미토 분가는 ''고산케''("도쿠가와 삼경가")로 알려진 세 도쿠가와 가문 중 하나를 대표했다.[2]

미토 분가는 다른 두 분가보다 토지와 재산이 적었지만, 에도 시대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미토 번이 사실상 수도인 에도와 가까웠던 점이 이러한 힘의 요인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미토 다이묘를 비공식적으로 "부장군"으로 여겼다는 사실도 작용했다.[3] 그러나 고산케 중 최하위였던 미토 분가는 쇼군 직위에 오를 자격이 없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셋째 아들로, 1661년 미토의 두 번째 다이묘가 되었다. 미쓰쿠니는 1657년에 ''다이 니혼시''를 후원하여 미토의 위상을 존경받는 번으로 더욱 확립했다.[4] 이 사업은 지적 사상의 중심지로서 미토의 명성을 드높였다.

"만약 도쿠가와 막부와 조정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조정을 지지하라."는 미쓰쿠니 공 이후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전통이었다.[5]

가문의 시조는 에도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내아들인 요리후사이다. 미토번은 도호쿠 제번의 반란에 대비하여 기타칸토의 거점으로 만들어진 번이었으며, 표고는 당초 25만 석이었지만, 겐나 8년(1622년)에 28만 석, 겐로쿠 14년(1701년)에 36만 석이 되었다. 그러나 그 영지는 히타치와 도호쿠 지방의 경계였기 때문에 경작지가 적고 생산력도 낮았다.

격식은 고산케 중 하나로 오로카에 자리잡았고 야카타고를 허가받았다. 관위에서는 오와리 도쿠가와가기슈 도쿠가와가가 다이나곤을 극관으로 삼은 것에 비해 미토가는 그보다 낮은 주나곤을 극관으로 삼았다. 산킨코타이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에도고이시카와저택에 상주하는 테이후 다이묘였다. 이로부터 속칭 "부장군"이라는 호칭이 생겨났다고 생각된다. 한편, 가문 격식에서 상위가 되는 스루가 도쿠가와가나 고료텐(고후 도쿠가와가・타테바야시 도쿠가와가)의 존재도 있어서, 고산케의 제3의 가문이라는 위치가 확립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쇼군이 되어 고후가가 해소된 이후였다.

렌시에는 다카마쓰 마쓰다이라가(히타치국 시모다테번→사누키국다카마쓰번), 모리야마 마쓰다이라가(히타치국 누카타번→무쓰국모리야마번→히타치국 마쓰카와번), 이시오카(후추) 마쓰다이라가(히타치국 호우치번→후추(이시오카)번), 시시도 마쓰다이라가(히타치국 시시도번)의 4가문이 있다. 모두 자녀가 많은 요리후사의 서자를 가문의 시조로 한다.

역대 당주는 비교적 장수했고, 자식이 없는 사람도 적었으며, 렌시를 포함해 양자를 주고받는 일은 있어도 요리후사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에도 후기에는 타가문에 많은 양자를 보냈다.

요리후사의 셋째 아들인 2대 미츠쿠니(기코)는 "미토 고몬"으로 유명하다. 미츠쿠니는 『다이닛폰시』의 편찬을 시작했고, 덴노와 조정을 깊이 존경하며, 미나토가와 신사에 고다이고 천황의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다이난코)의 비를 세우는 등, 존황 운동에 힘썼다. 미츠쿠니 이래, 미토번 내에는 존황을 기둥으로 하는 미토학이 탄생하여, 막말의 존황양이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토가는 신판의 고산케이기는 하지만, 미토학을 받드는 근왕가의 가문으로서 "만약 쇼군가와 조정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주저 없이 천황을 받들라"는 가훈이 있었다고 한다.

9대 나리아키(렛코)는 강렬한 존황양이파로 알려져 있으며, 해방 강화 및 덴노릉 수복, 고도칸을 세우고 후기 미토학에 의한 번사의 교화, 영내의 폐불훼석의 철저에 의한 사원 압박 등 존황 사상에 관철된 정책을 실시했고, 더 나아가 미일수호통상조약 무칙허 조인 반대 운동을 주도했지만, 다이로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하여 안세이 대옥에서 실각했다.。또한 나리아키의 일곱째 아들 요시노부는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에 양자로 들어가 쇼군이 되었다.

막말의 존황양이 운동의 불을 지핀 가문이었지만, 나리아키 사후에는 존황양이파와 사쿠보파의 번내 항쟁이 반복되어 혼란 상태에 빠졌고, 시세의 지도권을 잃은 채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2. 2. 메이지 시대 이후

11대 아키타케시미즈 도쿠가와가를 상속받은 뒤 프랑스에 유학했지만, 메이지 유신의 혼란과 맏형인 10대 요시노리의 죽음을 겪고 1868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1869년에 생가인 미토가를 상속했다. 같은 해 하코다테 전쟁에 관군으로 참전했다. 1869년 7월 15일 판적봉환으로 지번사로 전임됨과 동시에 화족에 올랐으며[1], 1869년 9월 14일 전공으로 상전록 3500석을 하사받았다.[2][3] 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까지 지번사를 맡았다.[4]

판적봉환 시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5773석이었다.[5][6] 1876년 금록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의거, 가록과 상전록(실액 850석)의 합계 6623석과 교환하여 지급된 금록공채의 액수는 18만 6276엔 96전(화족 수급자 중 33위)이었다.[7]

1875년 4월 4일, 도쿄 스미다강변의 고우메 촌에 있는 미토 도쿠가와 저택에 메이지 천황이 방문했고,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된 미토학의 발전에 진력한 도쿠가와 미쓰쿠니·나리아키의 유문과 회화가 전시되었다. 아키타케와 그 친족들도 천황을 알현했고, 그 중에는 나리아키의 생모도 있었다. 천황은 미쓰쿠니와 나리아키의 존황의 공적을 칭찬하며 그 뜻을 잇도록 아키타케에게 칙어를 내렸다. 또한 미토 도쿠가와 저택의 벚꽃을 보고, "꽃은 아름다운데, 벚꽃도 있으니 이 집의 대대의 마음을 나는 물어보았네"라는 시를 읊으며, 만개한 벚꽃 이상으로 미토 도쿠가와가의 대대로 이어져온 존황의 뜻에 감명받았음을 표현했다.[8][9]

성덕기념회관 벽화 『도쿠가와 저택 행차』(키무라 부잔 필, 도쿠가와 구니요리 공작 봉납) 1875년 4월 4일, 미토 도쿠가와 저택을 방문하여, 당주 도쿠가와 아키타케 (좌)나 궁내경 도쿠다이지 사네토미 (우)와 함께 벚꽃을 감상하는 메이지 천황


아키타케가 은거한 후, 그의 조카 도쿠가와 아쓰요시가 가독을 이었고, 1884년 화족령이 시행되자 아쓰요시는 후작이 되었다.[10] 분가인 마쓰다이라 4가 중 다카마쓰 마쓰다이라가는 백작,[11] 다른 3가는 모두 자작 가문이 되었다.[12] 또한, 아키타케의 친아들인 도쿠가와 다케사다도 자작으로 서임되었다(마쓰도 도쿠가와가).[13]

아쓰요시는 주이탈리아 특명전권공사와 궁내청 식부 차장, 귀족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14] 1898년 아쓰요시가 사망하자, 장남인 구니요리가 후작위를 이었다.[15]

1920년, 나가노현가루이자와에 아메리카야가 건설한 미토 도쿠가와 후작가의 별장이 준공되었다. 요시치카 공작의 별장 뒤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위에 건설되었으며, 목조 2층 건물로 다락방이 있고, 외관은 전면 오시히키 시타미자카 시공이며, 처마 부분만 굳은 날개 매달림 마감이었다. 지붕은 모임지붕인데, 탑 부분은 뾰족한 지붕으로 되어 있다. 남쪽에는 베란다가 있으며, 지붕은 삼각파풍이 2개 연속되어 있는 등, 당시 아메리카야의 기술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었다. 현존하는 건물이며, 전후 소유자는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다나카 가쿠에이였다.[16]

도쿠가와 구니요리 공작이 다이쇼 시대에 아메리카야에 건설한 가루이자와의 별장. 전후에는 내각총리대신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의 별장이 되었다.


역대 당주 중에 존황가가 많았던 미토가는, 메이지 이후에 위계가 추증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미쓰쿠니와 나리아키의 위계는 격상되어, 1869년에는 두 사람 모두 종1위가 추증되었고, 1900년에는 미쓰쿠니에게 정1위, 1903년에는 나리아키에게도 정1위가 추증되었다. 미쓰쿠니가 1657년에 시작한 이래, 미토가가 계속해 온 총 397권(본기 73권, 열전 170권)으로 구성된 『다이 일본사』는, 1906년에 완성되었다. 그 내용은 존황 사상에 입각하여 황통을 명확히 하고 남조를 정통으로 한 것 등을 특징으로 한다.

1929년 "다이 일본사의 편찬을 완성하여 황실 국가에 공헌한 공"이 인정되어, 당시 당주 도쿠가와 구니요리 후작이 공작으로 승작했다. 그 공적 조사에는, 『다이 일본사』 편찬에 공헌한 근왕 사상, 제98대 조케이 천황을 정통으로 꼽은 것, 역대 천황릉을 수색하여 수복한 공적,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현창 등이 열거되어 있으며, 메이지 이후는 물론 유신 전부터의 역대 당주의 존황 사상이 평가된 것이었다. 오와리가기슈가는 후작 그대로였기 때문에, 어삼가에서 가계가 가장 높은 가문이 되었다.

쇼와 전기 미토 도쿠가와 공작가의 저택은 도쿄시시부야구사루가쿠초에 있었다. 1938년에는 같은 곳에 건축가 쓰치우라 가메키의 설계로 콘크리트조 2층 건물(지하실 포함)의 쇼와 모던풍 대저택을 건설했다. 부채꼴 저택으로 안뜰이 있었다. 저택 북쪽에는 테니스 코트차고, 세차장도 갖추고 있었다.[7]

구니요리는 재단법인스이후메이토쿠회를 설립하여 전래의 다이묘 도구와 고문서를 기증하고, 산일 방지 조치를 취했다. 구장품 일부는 『도쿠가와 장군가 어삼가 어삼경 구장품 총람』(미야타이 출판사)에 편집·수록되어 있다. 1977년 미토시의 미쓰쿠니의 다실 터에 상고관 도쿠가와 박물관(현 도쿠가와 뮤지엄)을 열고, 그 보존·전시에 힘쓰고 있다.

3. 역대 당주

권중납언style="text-align:left"|2

도쿠가와 미쓰쿠니 (의공)선대의 아들종3위2대 미토번
권중납언
통칭 "미토 고몬"style="text-align:left"|3
{{lang|ja|徳川綱條|도쿠가와 쓰나에다|}} (숙공)

| 선대의 조카

| 정3위

| 3대 미토번
권중납언

| style="text-align:left"|

  • 徳川吉孚|도쿠가와 요시타다|일본어 (요절)

|-

| 4

| --

| 도쿠가와 무네타카 (성공)

| 선대의 종손

| 종3위

| 4대 미토번
참의

| style="text-align:left"|

  • 무네모토(5대)

|-

| 5

| --

| 도쿠가와 무네모토 (량공)

| 선대의 아들

| 종3위

| 5대 미토번
참의

| style="text-align:left"|

  • 하루모리(6대)

|-

| 6

| --

| 徳川治保|도쿠가와 하루모리|일본어 (문공)

| 선대의 아들

| 종3위

| 6대 미토번
권중납언

| style="text-align:left"|

  • 하루토시(7대)
  • 마쓰다이라 요시카즈 (다카스 마쓰다이라가로 양자)

|-

| 7

| --

| 도쿠가와 하루토시 (무공)

| 선대의 아들

| 종3위

| 7대 미토번
참의

| style="text-align:left"|
|-

| 8

| --

| 徳川斉脩|도쿠가와 나리노부|일본어 (애공)

| 선대의 아들

| 종3위

| 8대 미토번
권중납언

| style="text-align:left"|

  • (친자 없음)

|-

| 9

|


| 도쿠가와 나리아키 (열공)

| 선대의 동생

| 종3위

| 9대 미토번
권중납언

| style="text-align:left"|
|-

| 10

| --

| 徳川慶篤|도쿠가와 요시아쓰|일본어 (순공)

| 선대의 아들

| 종3위

| 10대 미토번
권중납언

| style="text-align:left"|

  • 아쓰요시(12대)

|-

| 11

|


| 도쿠가와 아키타케 (절공)

| 선대의 동생

| 종1위

| 11대 미토번 주→지번사→폐번치현
1883년 은거

| style="text-align:left"|

  • 徳川武定|도쿠가와 무사다|일본어 (마쓰도 도쿠가와가의 조상, 자작, 해군조선중장)

|-

| 12

| --

| 徳川篤敬|도쿠가와 아쓰요시|일본어 (정공)

| 선대의 조카

| 종2위

| 후작
주 이탈리아 특명전권대사
식부차장
귀족원 의원

| style="text-align:left"|

  • 구니유키(13대)
  • 徳川宗敬|도쿠가와 무네타카|일본어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로 양자, 귀족원 부의장, 참의원 의원)

|-

| 13

| --

| 도쿠가와 구니유키 (명공)

| 선대의 아들

| 정4위

| 후작공작
귀족원의장
일본 적십자사 사장

| style="text-align:left"|

  • 徳川圀順|도쿠가와 구니치카|일본어(14대)
  • 구니사다
  • 구니히데 (시시도 마쓰다이라가로 양자)
  • 구니히로 (모리야마 마쓰다이라가로 양자)

|-

| 14

| --

| 徳川圀斉|도쿠가와 구니나리|일본어 (경공)

| 선대의 아들

|

|

| style="text-align:left"|

  • 徳川斉正|도쿠가와 나리마사|일본어(15대)
  • 노리에이 (도쿠가와 미술관 부이사장)

|-

| 15

| --

| 徳川斉正|도쿠가와 나리마사|일본어

| 선대의 아들

|

|

| style="text-align:left"|

  • 노리히로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10년에 자신의 열한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리후사를 ''다이묘''로 임명하면서 미토 도쿠가와가가 시작되었다.[1] 요리후사는 고산케("도쿠가와 삼경가") 중 하나인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2] 미토 번은 수도인 에도와 가까웠고, 많은 사람들이 미토 다이묘를 비공식적으로 "부장군"으로 여겼기 때문에 미토 분가는 에도 시대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3]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1657년에 ''다이 니혼시''를 후원하여 미토의 위상을 더욱 확립했다.[4] "만약 도쿠가와 종가와 조정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조정을 지지하라."는 미쓰쿠니 이후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전통이었다.[5]

미토 가문의 15대 당주는 徳川斉正|도쿠가와 나리마사|일본어 (1958년생)이다. 그는 2009년 7월부터 미토 도쿠가와 박물관의 관장이기도 하며, 현재 도쿄 해상 일동 화재 보험 주식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3. 1. 가계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내아들인 요리후사를 시조로 하는 가계는 다음과 같다.

} ||

|-

| 4 || 도쿠가와 무네타카 ||

|-

| 5 || 도쿠가와 무네모토 ||

|-

| 6 || 徳川治保|도쿠가와 하루모리|일본어 ||

|-

| 7 || 도쿠가와 하루토시 ||

|-

| 8 || 徳川斉脩|도쿠가와 나리노부|일본어 ||

|-

| 9 || 도쿠가와 나리아키 || 강렬한 존황양이파, 고도칸 설립, 폐불훼석 철저, 미일수호통상조약 무칙허 조인 반대 운동 주도, 안세이 대옥에서 실각.

|-

| 10 || 徳川慶篤|도쿠가와 요시아쓰|일본어 ||

|-

| 11 || 도쿠가와 아키타케 ||

|-

| 12 || 徳川篤敬|도쿠가와 아쓰요시|일본어 ||

|-

| 13 || 도쿠가와 구니유키 ||

|-

| 14 || 徳川圀斉|도쿠가와 구니나리|일본어 ||

|-

| 15 || 徳川斉正|도쿠가와 나리마사|일본어 ||

|}

미토 번은 도호쿠 제번의 반란에 대비하여 기타칸토의 거점으로 만들어진 번이었다. 미쓰쿠니 이래, 미토번 내에는 존황을 기둥으로 하는 미토학이 탄생하여, 막말의 존황양이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리아키 사후에는 존황양이파와 사쿠보파의 번내 항쟁이 반복되어 혼란 상태에 빠졌고, 시세의 지도권을 잃은 채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3. 2. 水戸徳川家・高松松平家

가문의 시조는 에도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내아들인 요리후사이다. 미토번은 도호쿠 제번의 반란에 대비하여 기타칸토의 거점으로 만들어진 번이었으며, 당초 25만 석이었지만, 겐나 8년(1622년)에 28만 석, 겐로쿠 14년(1701년)에 36만 석이 되었다. 그러나 그 영지는 히타치와 도호쿠 지방의 경계였기 때문에 경작지가 적고 생산력도 낮았다。

격식은 고산케 중 하나로 오로카에 자리잡았고 야카타고를 허가받았다. 관위에서는 오와리 도쿠가와가기슈 도쿠가와가가 다이나곤을 극관으로 삼은 것에 비해 미토가는 그보다 낮은 주나곤을 극관으로 삼았다. 산킨코타이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에도고이시카와저택에 상주하는 테이후 다이묘였다。이로부터 속칭 "부장군"이라는 호칭이 생겨났다고 생각된다。한편, 가문 격식에서 상위가 되는 스루가 도쿠가와가나 고료텐(고후 도쿠가와가・타테바야시 도쿠가와가)의 존재도 있어서, 고산케의 제3의 가문이라는 위치가 확립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쇼군이 되어 고후가가 해소된 이후였다.

렌시에는 다카마쓰 마쓰다이라가(히타치국 시모다테번→사누키국다카마쓰번)・모리야마 마쓰다이라가(히타치국 누카타번→무쓰국모리야마번→히타치국 마쓰카와번)・이시오카(후추) 마쓰다이라가(히타치국 호우치번→후추(이시오카)번)・시시도 마쓰다이라가(히타치국 시시도번)의 4가문이 있다. 모두 자녀가 많은 요리후사의 서자를 가문의 시조로 한다.

역대 당주는 비교적 장수했고, 자식이 없는 사람도 적었으며, 렌시를 포함해 양자를 주고받는 일은 있어도 요리후사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에도 후기에는 타가문에 많은 양자를 보냈다.

요리후사의 셋째 아들인 2대 미츠쿠니(기코)는 "미토 고몬"으로 유명하다. 미츠쿠니는 『다이닛폰시』의 편찬을 시작했고, 덴노와 조정을 깊이 존경하며, 미나토가와 신사에 고다이고 천황의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다이난코)의 비를 세우는 등, 존황 운동에 힘썼다. 미츠쿠니 이래, 미토번 내에는 존황을 기둥으로 하는 미토학이 탄생하여, 막말의 존황양이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미토가는 신판의 고산케이기는 하지만, 미토학을 받드는 근왕가의 가문으로서 "만약 쇼군가와 조정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주저 없이 천황을 받들라"는 가훈이 있었다고 한다.

9대 나리아키(렛코)는 강렬한 존황양이파로 알려져 있으며, 해방 강화 및 덴노릉 수복, 고도칸을 세우고 후기 미토학에 의한 번사의 교화, 영내의 폐불훼석의 철저에 의한 사원 압박 등 존황 사상에 관철된 정책을 실시했고, 더 나아가 미일수호통상조약 무칙허 조인 반대 운동을 주도했지만, 다이로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하여 안세이 대옥에서 실각했다。또한 나리아키의 일곱째 아들 요시노부는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에 양자로 들어가 쇼군이 되었다。

막말의 존황양이 운동의 불을 지핀 가문이었지만, 나리아키 사후에는 존황양이파와 사쿠보파의 번내 항쟁이 반복되어 혼란 상태에 빠졌고, 시세의 지도권을 잃은 채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3. 3. 守山・石岡・宍戸松平家

미토 도쿠가와가의 분가(렌시)에는 다카마쓰 마쓰다이라가(시모다테번→사누키국다카마쓰번), 모리야마 마쓰다이라가(누카타번→무쓰국모리야마번마쓰카와번), 이시오카(후추) 마쓰다이라가(호우치번→후추(이시오카)번), 시시도 마쓰다이라가(시시도번)의 4가문이 있다. 이들은 모두 자녀가 많은 요리후사의 서자를 시조로 한다.

참조

[1] 문서 Annals of Mito 水戸紀年
[2] 문서 History of Mito
[3] 문서 Koschmann
[4] 문서 Koschmann
[5] 웹사이트 朝廷と幕府とが弓矢に及ぶごときことがあれば、我らはたとえ幕府に背くとしても、朝廷に弓を引いてはならない。これは、光圀公以来の家訓であるから、ゆめゆめ忘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 https://agora-web.jp[...] AGORA 2021-03-20
[6] 웹사이트 徳川(德川)氏(御三家・水戸徳川家) https://reichsarchiv[...] 2019-11-03
[7] 간행물 新建築 新建築社 1938
[8]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9] 문서 守山藩主松平頼貞の五男。
[10] 문서 松平直侯、松平武聰の生母。
[11] 문서 宍戸藩主松平頼救の四男。のち宍戸家を継いだ。
[12] 문서 昭武が水戸家を継いだ際に明屋敷(当主不在)となった清水徳川家を継いだ。
[13] 문서 水戸藩主徳川宗翰の六男。
[14] 문서 水戸藩主徳川治紀の四男。
[15] 문서 水戸藩主徳川斉昭の二十二男。
[16] 문서 水戸藩主徳川斉昭の十九男。元は会津松平家(会津藩主)を継い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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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도쿠가와 요리후사
2도쿠가와 미쓰쿠니요리후사의 셋째 아들, "미토 고몬"으로 유명. 『다이닛폰시』 편찬 시작, 존황 운동에 힘씀.
3{{lang|ja|徳川綱條|도쿠가와 쓰나에다|}